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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시 | 변경일자 (요일) | 시간 | 강의내용 | 담당강사 |
1 | 6.15(금) | 13:30 ~ 15:30 | ‘시대공감 인문학그램’ 오리엔테이션 - 1 - 교육과정 및 강사 소개 - 왜 인문학 기행일까요? | 김경식 |
2 | 6.22(금) | 13:30 ~ 15:30 | ‘시대공감 인문학그램’ 오리엔테이션 - 2 - 기록의 중요성과 방법 - 스마트하게 글쓰기 | |
3 | 6.29(금) | 13:30 ~ 15:30 | 1차 이론 교육 - 답사지의 역사적 배경 - 답사지에 대한 인문학적 의의 - 세부일정 안내 | |
4 | 7.6(금) | 13:30 ~ 16:30 | 1차 기행 -덕수궁,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고보터 중명전, 이화학당박물관, 러시아공사관터 등 | |
5 | 7.13(금) | 13:30 ~ 15:30 | 1차 기행문 작성 및 업로드 - 기행에 대한 소감과 느낀점 글쓰기 - 기행 사진 · 소감문 온라인으로 기록하기 | 담당 사회복지사 |
6 | 7.20(금) | 13:30 ~ 15:30 | 2차 이론교육 - 답사지의 역사적 배경 - 답사지에 대한 인문학적 의의 - 세부일정 안내 | 김경식 |
7 | 7.27(금) | 13:30 ~ 16:30 | 2차 기행 - 서울 북촌(별궁길, 재동길), 고희동가옥 경기고보터(김옥균, 김훈, 박인환 외) 등 | |
8 | 8.3(금) | 13:30 ~ 15:30 | 2차 기행문 작성 및 업로드 - 기행에 대한 소감과 느낀점 글쓰기 - 기행 사진 · 소감문 온라인으로 기록하기 | 담당 사회복지사 |
9 | 8.10(금) | 13:30 ~ 15:30 | 3차 이론교육 - 답사지의 역사적 배경 - 답사지에 대한 인문학적 의의 - 세부일정 안내 | 김경식 |
10 | 8.17(금) | 13:30 ~ 16:30 | 3차 기행 - 보안여관, 영추문, 세종대왕탄생지, 송강 정철 생가터, 김상헌 고택터, 이상 고택 등 | |
11 | 8.24(금) | 13:30 ~ 15:30 | 3차 기행문 작성 및 업로드 - 기행에 대한 소감과 느낀점 글쓰기 - 기행 사진 · 소감문 온라인으로 기록하기 | 담당 사회복지사 |
서울노인복지센터인문학기행
■ 강 사: 김경식 (시인,기행작가)
1960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문학과 역사, 지리를 집중 탐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부터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을 시작했으며,
학교 및 단체에서 수백 회의 인문학기행을 진행했다.
저서로 <사색의향기문학기행>,<서울문학지도>외 다수가 있으며,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지학사)에
문학기행 <이병기시인을 찾아서>가 게재 되었다.
2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에서 문학특강,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였다.
몇 년간 서울문화재단 주최의 <서울문학기행>을 진행하였으며,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주최하고,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문학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최: 서울노인복지센터
6월15일/ 6월22일 강의
■ 시대공감 인문학- 왜 인문학 기행인가?
■ 인문학기행의 의미
한반도의 가슴조이는 변화속에서도 꽃들은 피고 지고, 나무들은 자신의 색상을 발하고 있다. 세상살이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다. 걱정들이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언제 태평성대의 시대가 있었던가. 늘 가난과 굶주림이 이 땅을 지배했고 지배자들의 농락이 백성들의 삶을 파탄나게 만들곤 했다. 이민족의 침략으로 사람과 국토는 유린당했다.
우리나라의 산과 골짜기, 들, 강과 아니 전 국토에는 이런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 있는 곳이다. 오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국토를 순례하는 일은 그래서 숭고하다. 특히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던 장소를 답사하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인문학기행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탐방이 시작된다. 사람이 살았던 곳에는 어디나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문자로 기록되면 문학이 되고 역사가 된다. 역사와 문학에는 사람과 지명이 등장한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의 고향과 삶의 길이 있다. 이 여행은 아득한 역사의 뒤안길을 가기도 하고 얼마 전의 이야기를 찾아 길을 나서기도 한다. 그 길은 자동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지만 항상 우리 눈에 보이는 길만 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길과 상상의 길인 보이지 않는 길도 함께 따라 가는 것이다. 누군가 처음에는 길이 아닌 곳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기에 길이 만들어 졌다.
인문학기행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가는 여행이다. 작가와 작품을 알지 못하고 역사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인문학기행은 이런 길을 찾고 만드는 여행이다.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나러 가지만 그 만남은 생시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우리네 현실적인 삶은 가정이나 직장, 이웃 사람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상적인 삶의 한계는 공간이 좁고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문학작품이나 답사처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가공인물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확실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 와 내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곤 한다. 그들은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기행이 끝나면 시대를 초월하여 만나는 그들의 열정적인 삶을 엿보게 되고 또한 그 곳에서 만난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역사와 문학작품 속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더듬거리며 찾다 보면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을 찾아 가면 어디선가 살아서 돌아온 듯 착각을 하게 된다. 무언으로 말을 하며 그 장소를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듯하다. 이런 기분으로 답사를 하면 인문학의 향기는 소리 없이 피어나는 안개와 같다. 스멀거리면서 퍼지는 향기는 코를 자극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혼을 울리기도 한다. 이 영혼이 머리를 타고 흘러 내려 와 가슴을 흔들면서
향기 있는 생명력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마력을 가지게 된다. 문학기행은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지인들을 만나게 하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적지, 작가의 생가와 고향마을 고샅길을 걸어 온지 몇 년 이던가.
역사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의미 있게 살다가 떠나간 이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을 찾다 보면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인문학 기행은 남아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응시할 수 있게 하며 작가와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대화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인문학기행을 통해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갈 미래의 삶 속에 좌표가 될 수 있다.
이 여행에 함께 동참한 사람들은 처음 만남이라도 그 친밀한 동질감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기행이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이다.
일상의 삶을 떠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며 자기의 존재 인식을 통해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문학기행은 역사적인 인물과 문학적인 만남을 제공한다. 역사와 문화, 자연과의 만남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만나며 찾게 되기도 한다.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인생길의 목표점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인문학기행은 답사와 여행의 장점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특별한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서울 인문학기행 의미
역사와 문학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많은 장애물을 넘나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와 민족마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학을 가지고 있으며, 민족사학자와 민족작가는 자신의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나 민족이 말살될 때, 역사와 문학으로 저항하게 된다.
어느 민족에게나 이런 역사와 문학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민족사학자와 민족문학의 작가들이 있다. 작가는 문학작품 어딘가에 자신이 살았던 당대의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다. 그러나 작가가 태어난 장소에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도 있다. 특히 서울은 개발로 인해 역사적인 건축물과 인물들의 흔적들은 사라지고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가 '서울역사문학기행'을 시작한 이유다. 인문학기행은 역사기행과 달리 때로는 실체가 없는 장소를 탐방하기도 한다. 단지 문학작품 속의 내용과 시 몇 편에 의지하여 작가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 서울은 600년 동안 조선의 도읍지였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수도다. 숱한 침략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수도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그러므로 서울은 역사와 문학의 보고다. 서울에 삶의 토대를 두지 않은 역사적인 인물과 문인들이 드물기 떄문이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문인들이 살았던 집과 문학작품 속의 무대를 걸으며, 삶과 문학을 나누는 여행은 그래서 의미 있다.
당대를 풍미하던 권세가와 문인들뿐 아니라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의 모습들도 상상하며, 눈여겨 볼 일이다. 그들의 삶터를 확인하고,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서울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폐허화 된 작가의 버려진 고택도 있다. 빈터가 되어 풀섶이 되어 버린 집도 있다. 조선시대의 역사적인 고택들이 스러져가는 현장도 있다.
그러나 북촌의 고택들과 성북동의 최순우 고택, 이태준 고택, 한용운 고택(심우장)은 옛 집주인들이 살았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집 주인들의 평상시 삶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들을 역사적인 상황에서 찾는 여행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상황을 인식하면 답사의 기억은 아주 오래 잔영으로 남게 된다. 이 기억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면서 미래를 성찰하게 만든다. 작가의 고향과 작품의 무대를 역사유적과 연계하고 그 지역의 명소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문학기행의 부대적인 추억을 만든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이 일반적인 여행하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지적탐구에 있다. 문학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이 땅의 지리와 역사적인 지식을 얻는다. 인문학의 역사는 장구하다. 문인들이 나고 살다 떠나간 곳은 무수히 많다. 우리들은 저마다 의식주와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정신적인 재산인 문학을 무시하는 것이 현실이다. 선진국일수록 자신의 나라 역사와 문인들을 자랑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직 역사인식과 문학적인 토대확보가 미흡하다. '인문학기행'은 수익성이 없어서 여행사에서는 진행하기 어렵다. 문학단체나 역사학술단체에서 조차 지속적으로 답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전문가의 섭외도 어렵거니와 지속할 수 있는 열정적인 동우회들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기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콘텐츠가 없는 상태다. 제대로 된 단행본이 없는 것도 문학기행 분야가 얼마나 취약한 곳인가를 상징한다.
'인문학기행'은 역사유적을 답사하면서 문인들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는 여행이다.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로 회귀하여 작품을 읽게 되면 작가를 이해한다. 또한 그가 선택한 삶의 길을 알게 된다. 혹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고 해도 당시의 시대사적인 배경을 인식하면 오해가 풀린다. 작가와 역사적인 인물을 비판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 결국 겸손해지고 남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된다. 인문학기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쉽게 동질감을 느끼고 금방 친구가 되는 이유다. 작품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만남의 인연을 만들 수 있다. 문학작품의 무대나 원작자의 고향을 탐방하고 난 후 다시 그 작품을 읽으면 깊고 넓은 지식으로 보답하게 될 것이다.
'서울 인문학기행'이 시급한 이유다. '인문학기행'을 통해 역사와 문학사의 콘텐츠를 얻게 될 것이며, 이는 인문학사의 복원적인 의미가 될 것이다.
■ 삶과 독서그리고 글쓰기
▢서론
청빈하게 살아가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제외된 삶이라면 몰라도 자본의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방향보다 속도가 중요한지 과속으로 질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삶이 지금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무한대인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에 지구는 작고 옹색합니다. 뉴스의 대부분은 이런 욕망이 만들어 내고 있는 부산물로 가득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을 비롯한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욕망이라는 브레이크 없는 차를 타고 어디론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습니다. 이런 차를 탄 사람들의 비극은 두려움과 공포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한순간의 평화를 간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차를 타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국민소득이 미화로 2만 불을 넘나듭니다. 세계경제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단기간에 경제적인 부를 획득하였습니다. 압축 성장은 심각한 빈부격차를 낳았으며, 상대적인 빈곤감이라는 갈등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 돈을 벌지만 행복은 점점 멀어져 갑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정이 무너지고 있지만 원이 치유가 어렵습니다. 사회 갈등구조가 커지고 있지만 문학적인 서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계급성과 이념성을 강조할 뿐입니다.
독서와 글쓰기의 부족은 이기주의적 인간으로 바뀌면서 사회의 위기를 가중시킵니다. 결국 독서와 글쓰기가 부족한 민족은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많은 고난을 당하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이민족에 침략과 수탈을 당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이미 사라진 민족처럼 망하지 않고,
지금도 강대국 속에서 몸을 도사리며 세계의 주역이 될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시절에도 우리 조상들은 희망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던 옛 시절을 생각하며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조상들이 잊이 않았던 것은 기록의 문확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독서를 잊으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였습니다.
답답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았어도 역사와 문학을 중시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살이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제와 처세의 책들이 범람하고 문학은 퇴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비타민과 같습니다. 우리 몸에 비타민이 없으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독서는 그릇된 욕망과 욕심이 조금이라도 사라지고, 성실한 삶으로 이루는 희망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문학은 간접경험을 통해 다양한 삶을 제공합니다. 다양한 삶의 경험은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삶의 성찰로 이어질 것입니다. 한국은 좁은 국토를 대상으로 땅따먹기 전쟁이 한창입니다. 아직도 이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부동산 소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서민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속에 과연 독서(문학)를 통해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 본론
1) 독서의 중요성
먼저 위대한 인물들이 어떻게 책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책에 관한 일화로 유명한 링컨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예를 들어봅니다.
링컨은 1809년에 미국 남부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1865년 세상을 떠난 미국의 16대 대통령입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집은 오두막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9살 때 세상을 떠납니다. 링컨이 9세 되던 해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부자나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어린 링컨의 삶은 절망적이었지만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기 때문에 정직했습니다. 가난한 삶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지붕에서는 빗물이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빌려온 책이 젖어 혼이 났던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그러나 그는 가난한 삶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한 일은 독서였습니다.
당시 링컨의 집에는 책이 한권도 없었습니다. 그는 몇 십 리 산길을 걸어 책을 빌리기 위해 길을 떠나곤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정이 많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1837년 그는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유년 시절에 그는 고생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고난당하며 살아가는 흑인들에게 애정을 느꼈습니다.주 의회 의원과 하원의원을 거쳐 1860년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2년 후인 1862년에 노예를 해방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적인 결단은 그가 10년 전에 읽었던 한 권의 문학서적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청소년기의 독서는 꿈과 희망을 실현시켜 줍니다. 부모님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독서를 강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새겨져 평생을 함께 합니다.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며 제작자인 스필버그는 어린 시절 매일 밤 그의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스필버그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지의제왕','ET', '쥬라기공원', '인디아나 존스'등 대성공을 거둔 영화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어린 시절 그가 읽었던 동화의 문학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제작된 것입니다. 스필버그의 어머니가 밤마다 동화를 들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었을 것입니다.
2) 독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독서는 내가 만나고 싶은 역사속의 사람과 만날 수가 있습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필벅 같은 사람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처칠이나 케네디도 역시 위인입니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이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독서를 통해 그들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의 삶의 지혜와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3) 독서는 글쓰기의 원동력입니다.
독서는 글을 읽는 것입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작가들은 독서를 통해 작가가 되었습니다.
□ 결론
예전에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은 삼성과 현대그룹이었습니다. 삼성과 현대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고인이 되셨지만 삼성의 이병철 회장,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모두 독서가였습니다. 특히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톨스토이의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글쓰기와 메모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논어 맹자 대학 등을 읽었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정주영 회장은 독서를 통해 대기업을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얻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독서를 통해 작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운동연습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지요. 모두들 학교에 가는데 저는 학교에 갈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읽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때 금성출판사에서 출간한 세계아동문학전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1972년입니다. 책을 읽고 난후에 저는 세상이 달라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가슴이 뿌듯하고 책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습니다. 교과서가 시시해 지기도 했지요.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부터입니다.
1974년 7월25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절망이 얼마나 크던지 20일 후에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사망한 육영수 여사의 죽음이 위안이 되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부터 독서와 일기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일기를 쓴 덕에 글쓰기에 자심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절망속에서 저를 건진 것은 한권의 시집이었습니다. 김소월 시집입니다.
이 시집을 수 십 번 읽으며 저는 슬픔을 희망으로 바꾸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문학서적을 통해서 밝고 아름다운 삶을 향한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책값은 결코 아깝지 않았습니다. 현재 2만권 이상의 장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속에서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세상 고금의 역사와 문학, 지리, 철학 기타 학문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삶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지혜의 계수를 마음속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이 화목하면, 2억을 소유한 것이고, 건강한 가족이라면, 2억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상의 재산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독서를 통한 다양한 경험들은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무형의 자산인 행복을 위해 다양한 삶을 살면서 화폐가치로 삶의 계수를 바꿀 수 있습니다.
통장의 잔고와 부동산도 재산이지만 무형의 행복도 재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지혜의 문제입니다. 지혜는 그냥 얻어지지 않습니다. 독서를 통해 가능합니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독서로 다양한 경험을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6월29일/ 7월6일
정동 인문학기행
■ 경운궁(덕수궁)과 월산대군
경운궁(덕수궁)은 조선왕조의 영광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경운궁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때다. 임진왜란 직후 화마로 잿더미만 남은 한양에서 제14대 임금 선조(宣祖)는 월산대군의 옛집에 몸을 의탁한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곳도 이곳이다. 광해군은 궁을 넓히고 ‘국가의 운은 경사스럽다’라는 뜻으로 ‘경운(慶運)’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덕수궁)은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곳이며,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장소다. 경운궁은 별궁과 정궁 사이를 오가며 왕을 모셨던 궁이다. 1907년 일제는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다. 이 무렵 경운궁은 ‘왕이 오래 살도록 기원한다’는 ‘덕수(德壽)’로 명칭이 바뀐다. 경운궁은 본래 월산대군 이정(1454~1488)의 저택이었다. 그는 덕종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이다.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1460년(세조6년) 7세 때에 월산군에 봉해졌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면서 자을산군과 함께 현록대부에 임명된다.
그러나 예종은 즉위 1년 만인 1467년에 세상을 떠난다.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과 예종의 형이었던 덕종의 아들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으로 압축된다.
이때 막후 실세였던 세조빈인 정희왕후는 자을산군을 선택한다.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월산군의 건강이 나쁘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자을산군의 나이는 13세였다.
나이도 어리고 장자가 아닌 자을산군이 왕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한명회(1415~ 1487)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명회는 신숙주1417~1475)등과 함께 실세 중의 한 명이었다.
왕이 되지 못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은 역적이 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비정치적으로 만들면서 궁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안대군은 바보처럼 행동하여 성종과 실세 정치에서 벗어났다.
월산대군은 그의 호 풍월정이 말해주듯 풍류객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시와 그림으로 여생을 보낸다.
현재의 덕수궁터에 살다가도 많은 날들을 고양에 있는 별장과 망원정에서 세월을 보낸다. 월산대군은 유년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탐구한다. 성품이 침착하고 정직하였으며,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다. 특히 문학적으로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그의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에 게재될 정도였다. 풍월정집(風月亭集)이라는 저서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월산대군의 어머니는 사극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인수대비(소혜왕후)였다. 그는 더 없는 효자였다. 인수대비가 병이 났을 때에서 극진하게 병 수발을 든 일화는 유명하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월산대군의 묘소가 있다. 묘역은 왕릉 못지않고 석물도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다. 월산대군은 조선 시대의 유명한 시조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를 지은 작가이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
- 월산대군 시조 <강호한정가> 전문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는 월산대군의 <강호한정가>는 가을 달밤의 풍류와 정취를 표현한 평시조이다. 세속적인 명예와 욕심을 초월한 자아를 '빈 배'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가을 달밤에 배에 올라 낚시를 하는 전경이다. 욕심과 명예를 버린 안빈낙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월산대군의 한시를 읽어보면, 고독하였지만 사랑에 관한 서정이 잘 담겨 있다.
월산대군이 서화에 취미를 가지며 세월을 보냈다. 특히 친동생 성종이 월산대군에게 왕위를 빼앗은 미안함 때문인지 어제어필(御製御筆)을 자주 하사했다. 어제어필은 왕이 손수 지은 글이나 글씨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성종)이 그린 사군자 그림을 월산대군에게 보이고 차운(次韻)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월산대군이 시문뿐 아니라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월산대군은 한강변에 있던 희우정에 거처를 옮겨 살기도 했다. 1484년 성종은 그를 위해 望遠亭(망원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먼 경치를 보면서 근심 걱정을 잊으시라"는 내용이다. 강 넘어 멀리 김포평야가 보이는 경관이 뛰어난 장소였다. 월산대군은 눈이 내린 양화벌의 겨울 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로 표현하며 한성십영(漢城十詠)으로 지정한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은 당시 이곳의 분위기를 시로 표현하였다.
늦은 석양이라 높은 다락에 안 오르겠는가.
아름다운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난간에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켜고도 밤 풍경 또한 좋구나.
■ 경운궁(덕수궁)과 선조
경운궁(덕수궁)의 석어당(昔御堂)은 선조 임금이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장소이다. 비록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복원하였지만 경운궁에서는 유일한 2층 건축물이다. 1608년 2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이곳에 유폐시킨 곳이다.
인조반정 때에는 광해군이 석어당 앞마당에 끓어 앉아 심문을 받던 장소이기도 하다. 석어당(昔御堂)은 "옛날 임금이 살던 집"이란 의미를 가지며,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석어당의 외부 현판은 김성근(1835~1918)이 썼다. 그는 홍문관, 도승지, 이조판서 전라 관찰사를 역임한 서예가였다. 그러나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이후에 변절하여 일제의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석어당 천장 밑에 걸려있는 금색으로 쓴 <昔御堂>의 현판은 1905년 7월에 고종황제가 직접 썼기에 매우 의미 있다. 경운궁(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다리가 놓여있다. 금천교(錦川橋)다. 조선의 궁궐은 입구에 물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있다. 경운궁의 금천도 이와 같다. 금천교는 ‘임금이 살고 계신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다리를 건너며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한다’는 정화(淨化)의 의미가 담겨 있다. 금천교를 건너 곧장 200m 쯤 걸으면, 오른쪽에 중화문(中和門)을 만난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다. 1904년 화제로 소실된 후 1906년 재건된다. 일제의 능욕과 탐욕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던 대한제국의 재정은 궁핍했다. 중화전이 단층으로 축소 건립된 이유이다. 중화전 주변에 건축했던 행각들은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 대부분 헐린다. 다행히 중화전 뒤로 건물 세 동은 살아남아 어깨동무를 하듯 서 있다. 즉조당은 덕수궁의 모태가 된 곳이며,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가 거처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때부터 즉조당은 1897년까지 경운궁의 정전이었다. 그러나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중화전을 건립하여 정전으로 사용한다. 현재 즉조당에는 고종이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석어당(昔御堂)은 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2층 건물이다. 단청을 하지 않아 오히려 돋보인다. 준명당(浚明堂)은 황제가 업무를 보던 곳이다. 준명당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 선조의 삶
명종이 1567년 세상을 떠나자 선조가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묘호를 결정한다. 이때 국가를 건립하거나 발전시킨 분은 조(祖)를 붙이고, 그렇지 못한 왕은 종(宗)을 붙이는 것이 상례이다.
조(祖)를 붙인 조선 임금 중에 선조와 인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은 왕처럼 보인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조선을 왜군에게 아주 넘겨 줄 뻔 했던 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에 큰 발전을 이룬 왕에게 붙이는 조(祖)를 붙인 것은 후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묘호이다. 그러나 선조가 죽자 신하들과 사관들은 그에게 조(祖)를 붙여 선조라고 했다. 선조는 처음 왕이 되어서는 아주 명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는 툭하면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했다. 선조가 임금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확률이었다. 선조의 부친 덕흥군은 중종의 9번째 아들이고, 선조인 하성군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왕이 되기에는 먼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인종은 아들이 없었으며, 명종은 하나뿐인 아들 순회세자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런 경우 왕손 중에 누군가가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성군은 여러 가지로 명종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곤했다. 명종이 마음속으로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한 이유다. 하성군(선조)은 인종이나 명종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는 종실로서 무위도식 하면서 세월을 보냈을 사람이다. 어쩌면 조선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선조는 운이 좋게 명종이 승하자 하루아침에 임금이 된다. 그러나 선조는 서예에 능하고, 한시도 잘 썼다.
당시 조정의 정사는 대부분 사림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사림들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선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들을 등용하며 강연에도 열정을 보인다. 이황, 이이, 성혼 같은 대유학자들과 토론하며 우대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한 사림을 신원하기도 했다. 을사사화로 오랫동안 유배살이하던 노수신(1515~1590), 유희춘(1513~1577)등을 풀어준다.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와 1575경의 음석언해를 완성하고,〈소학언해>를 간행한다. 4대 사화를 당하고 고향과 산속으로 은둔했던 사림들은 명종 때에도 중앙 정치 무대의 복귀를 포기하고 있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정국의 주도권은 이제 사림으로 이전되어 갔다. 그러나 1575년 심의겸(1535~1587)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김효원(1542~1590)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선조를 가운데 두고 이전투구가 시작된다.
서인의 주요 인물로는 박순(朴淳1523~1589), 정철(1536~1593), 윤두수(1533~1601) 등이고, 동인의 주요 인물은 유성룡(1542~1607), 이산해(1539~1609)였다.
1589년 정여립(1546~1589)의 역모사건으로 동인은 큰 타격을 입는다. 정철이 주도권을 잡고 동인을 축출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 세력에게 큰 타격을 가한다. 선조 일행의 피난 기록을 읽어보면 참담하다. 왜군이 부산(동래)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경운궁(덕수궁)과 고종
고종은 매우 불행한 왕이었다. 역사적으로 조선 왕조 망국의 책임을 대부분 그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고종은 무너지던 조선 왕조를 부활시키려 했던 노력들로 인해 재평가를 받고 있다. 경운궁(덕수궁)은 그가 집권 마지막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 장소이다. 이곳은 고종의 고독과 한이 서린 통한의 장소이다. 일제에 의한 독살 설로 인해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고종의 죽음은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분노의 화살이 되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은 충동을 유발시켰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3.1운동의 시작은 파고다공원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덕수궁이 운동의 진원지였다. 그것도 덕수궁 대한문 앞이었다. 당시 3.1운동의 시위는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이 정점이었다. 이것은 고종을 향한 대한제국 백성들의 목숨을 건 절규였다. 고종의 죽음은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용기를 주었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조선 왕조의 부흥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왕이다.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광무라는 연호까지 사용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이것은 조선 조정의 무능과 일제가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점령 정책과 친일 매국주의자들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내였던 명성황후의 죽음과 조선 왕조의 비극적인 최후에 분노를 인내해야 했던 고종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은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다. 19세에 강화도의 나무꾼에서 졸지에 조선 제25대 왕이 되었다가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왕으로 결정한다. 당시 12세 였던 고종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난지 5일 만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일이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는 혈통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대왕대비 조씨는 안동김씨를 숙청하기 위해 오랫동안 와신상담 했다. 흥선군과 의기 투합하는 과정에서 명복이 왕으로 낙점되었다. 이명복은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후계이자 대왕대비 조씨의 양자로 입적된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유년 시절 이름은 개똥이었다. 소년기에 명복으로 개명한다. 이명복에게는 형 이재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대비는 자신의 수렴청정이 가능한 어린 이명복을 선택한다.
12살이 된 고종의 정치적인 행보는 조대비에 의해서 수렴청정으로 허수아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장악하고 외세에도 힘으로 대항했다. 쇄국정책과 서원철폐 안동김씨 척결은 대원군에게는 시대적인 사명이었다. 1866년에는 여흥민씨의 딸을 고종의 배필로 맞아들인다. 훗날 그녀는 대원군의 정치적으로 정적이 된 명성황후이다.
고종이 자신의 정치적인 행보를 선포한 해는 1872년이다. 그의 나이 21세 때다. 조정의 분위기도 대원군의 독주에 관료들은 불안감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노론 유림세력들은 대원군의 기세를 꺽지 못하면 자신들이 입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무렵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온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고종은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임명하여 대원군의 기세를 꺽기 시작한다. 고종은 반대원군파를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부친과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고종은 권력을 상실했던 조대비의 권위를 높이고 정치세력을 재편한다. 대원군의 오른팔이었던 영돈녕부사 홍순목과 좌의정 강 로(남인), 우의정 한계원(북인)을 파직한다. 이유원을 영의정에 박규수를 우의정에 임명하여 고종의 심복으로 삼으며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 대원군의 무력적 기반이 삼군부였기 때문에 고종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삼군부를 약화시키고 무위소(武衛所)를 설치한다. 병조판서에 이재원을 임명하고 친위세력을 배치한다. 훈련대장, 금위대장, 어영대장에 고종의 사람들이 모두 임명된다. 병권을 장악한 고종이 임명한 암행어사도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관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대원군의 반격도 만만하지 않았다.
궁궐에는 자주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1874년(고종11)에는 민승호가 폭사하기도 했다. 영남 유생들이 대원군의 하야에 항의하는 시위로 조정은 불안했다. 고종은 급기야 대원군의 친형인 이최응을 대신으로 등용한다. 김병국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들과도 연합하며 조정을 안정시키려고 애를 쓴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은 심각했다. 이 가운데 있던 고종은 실로 나약했다. 대원군의 10년 집권(1864~1873) 이후에는 명성황후 민씨가 조정을 좌지우지 한다.
고종은 아내인 명성황후를 의지하고 사랑했다. 1866년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렸지만 궁녀 이씨에게서 먼저 왕자 완화군을 얻는다. 궁녀 이씨는 고종의 첫 사랑이었다. 명성황후에게서 아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생후 5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항문이 막히는 장애자였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이 시아버지 대원군 때문이라는 믿는다. 훗날 이 오해는 무서운 증오로 돌변한다.
1880년 완화군이 사망한다. 그의 나이 13세였다. 이번에는 대원군이 완화군의 죽음에 명성황후가 개입했다고 믿었다. 두 사람 간의 증오심은 돌아올 수 없는 칼날 같은 대립각으로 대립한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정치적 개입으로 대원군은 실각한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년)으로 대원군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명성황후는 피신을 한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사망하였다고 널리 알리기 위해 장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군사력으로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중국 천진으로 압송된다. 1895년(고종 32년)음력 8월20일 명성황후가 일제 낭인들의 칼날에 시해당한다. 을미사변이다. 친로파 내각이 퇴각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입각한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불에 타 버렸기에 고종은 2개월이 지난 후에 명성황후의 죽음을 발표한다. 1907년 7월 18일 덕수궁 함령전에서 고종은 우왕좌왕했다. 통감 이토가 참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헤이그 밀사)는 조약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고 협박한다.
이에 송병준은 고종의 면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일제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고 대단히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오후 3시 이완용 등 내각 대신들은 회의를 하고, 오후 4시에 덕수궁으로 들이 닥쳐 고종에게 사태 수습책을 건의한다. 그것은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였다. 다급해진 고종은 통감의 의견을 듣겠다며 버틴다. 5시에 이토히로부미를 만나 밀사 사건을 설명한다. 이토는 ‘한국 황실의 중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으며, 내각 대신들과 상의한 일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내각 대신들은 8시쯤 다시 고종을 찾아가 양위를 요구한다. 이런 분위기를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완용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협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밤 11시 고종은 마지막으로 원로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신기선(申箕善), 민영휘(閔泳徽), 민영소(閔泳韶)를 부른다. 신기선은 이듬해인 1908년 세상을 떠난다. 민영휘, 민영소는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과 막대한 상금을 받은 친일파였다. 7월19일 새벽 1시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하고 물러났다.
1907년 7월 20일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식이 거행되었지만 고종과 황태자 순종은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의 44년 정치가 끝나는 날이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은 당시 대한제국이 살아나면 자신들은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炳武:합방 후 자작 수여)가 군대 해산을 주도한다. 을사늑약은 외부대신이 체결하고 군대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했다.
1907년 8월 1일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한 날이다. 하세가와의 지시를 받은 이병무는 10시에 군대해산을 명령한다. 이때 서소문에 주둔했던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 박성환이 항의해 자결한다. 이에 격분한 병사들은 영외로 뛰어나가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한다. 남대문 주둔하고 있던 2연대 1대대도 이 소식을 듣고 동조 사격을 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기관총 등의 중화기로 무장한 일제의 병사들에게 진압당했다. 이날의 군대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의미한다.
고종은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주로 한시가 담긴 주연집(珠淵集)이란 문집이 남아 전한다. 물론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출간되었다. 문집 속에 한시는 39수(首)가 수록되어 있다. 한시들은 대부분 20대에 지어졌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56세에 강제퇴위 당한 후 쓴 시들은 몇 편 되지 않는다. 아마도 일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주 내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여 진다.
고종의 시는 궁궐의 분위기와 백성들을 걱정하고 신하들을 격려하며 애정을 표시하는 내용을 담았다. 봄을 표현한 시가 12수로 가장 많다. 시의 형태는 칠언절구가 19수로 가장 많다. 율시(律詩)는 거의 없으며 20자에서 28자로만 지어지는 절구(絶句)로 주로 썼다. 적은 수의 한자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대부분 궁궐에서 작품을 썼다.
■퇴계 한양 집터에서 단상
서울시청 별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사이는 퇴계 이황이 살았던 집터다.
이황(李滉, 1501~1570) 집터는 젊은 시절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생활하던 집이 있던 곳으로, 중구청의 자료에 의하면 지금의 중구 덕수궁길 15이다.
1552년 여름 사헌부에 근무할 때에 이곳에 살았으며, 1558년 이곳에서 퇴계와 고봉이 만났던 장소도 이 언저리가 될 것이다. 작년까지 있던 집터 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 이곳의 환경을 유추해 본다. 또 한편은 퇴계 고향 마을과 퇴계 묘소 탐사를 기억했다. 오래전에 이육사의 고향을 찾아가다가 퇴계고택에 들러 종손께 인사하고 퇴계묘소를 참배했던 일을 떠올렸다. 육사의 생가 육우당은 사뭇 시인에게 어떤 지조와 철학을 체득케 하였을 터이다. 지조는 아마도 퇴계의 후손이란 피의 내력인지 모른다. 가파른 퇴계묘소를 향해 약 10분 정도 올라서 소나무 숲속의 퇴계선생 묘소의 숲 우듬지 사이로 낙동강이 휘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봉분 앞에 서면 청량산을 빠져 나온 낙동강이 안동을 향해 흘러가는 모습이 아득하게 보였다. 또 산들이 동쪽으로 연결지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묘소 우측에 퇴락한 비석이 수 백 년 동안 서 있다. 빛바랜 비석에 음각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란 글씨를 읽었다.
퇴계의 시조는 고려의 추봉밀직사(追封密直使) 석(碩)이다.‘진성’은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이다. 조지훈 시인의 고향을 가기 위해 안동에서 영양읍을 가다보면 청송보호 감호소가 있는 마을이 진보면이다. 진성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58명을 배출하였고, 퇴계(退溪) 선생이 대표적인 분이다
그래서 1574년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을 숭모하는 제자들과 유림이 중심이 되어 건립된 도산서원을 탐방하는 일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일이다. 본래 도산서원은 이황 선생께서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이다.그 분의 사후에 제자들과 유림들이 떠받들고 사액을 받으며 조선의 학문의 최고봉 서원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1575년 선조가 한석봉에게 지시하여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현판 글씨를 사액(賜額)으로 내렸겠는가?
서당과 동서재(東西齋), 전교당(典敎堂) 이어지는 돌층계를 오르면서 매화를 유독사랑 했던 퇴계의 그 매화밭에 매화가 만발했었다. 정말 매화가 지천으로 핀 절묘한 호시절에 도산서원을 찾았던 기억이 선연하다. 아울러 퇴계를 사모했던 단양출신 기생 두향의 일편단심을 생각했다.
기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행운도 있는 것이다. 시사단(試士壇)이 보이는 도산서원 마당끝자락에서 낙동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옛 선비들의 과거시험 장면을 연상한다. 정조 때 앞에 보이는‘시사단’ 위치에서 약 7,000명의 선비들이 시험을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산골까지 과거시험을 보러 온 당시 선비들의 정성과 고행을 생각해 본다. 퇴계(退溪)는 이황 선생님의 호다. 청량산인(淸凉山人)라고도 부른다. 퇴계는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곳에 도산온천이 성업중이니 이름값을 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12세 때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우는 중종 때 관찰사·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형 해(瀣)는 인종 때 예조참판·대사헌을 지냈다. 이들의 영향이 퇴계를 학문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퇴계는 1523년(중종 18년)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고,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에야 비로소 소위 장원급제란 것을 한다.충청도 암행어사, 대사성(大司成) 역임,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삭직되었다. 1552년 대사성에 재임되었고,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에 우찬성을 역임한다. 대제학을 끝으로 고향인 안동 도산으로 은퇴한다. 학문과 제자교육에 전력한 퇴계 선생의 일생을 몇 날 밤을 이야기해도 불가능하리라. 철학적으로 그는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였으며,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고향 마을 근처인 도산서당에서 숱한 제자들을 키워내었는데 특히 퇴계의 학풍은 자신의 문하생인 서애 유성룡(柳成龍) 학봉 김성일(金誠一)등에게 계승되어 거대한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으로 이 두 학파의 대립되기도 하였지만, 퇴계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도 소개되어 비록 적국이지만 그들의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퇴계 선생의 묘소는 조선 유교의 성지임에도 불구하고 초라하다. 운명하시면서 결코 자신의 묘소를 크게 단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역시 퇴계 선생님이다. 서울 정동 대법원이 있던 자리가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이 되었다. 이 터가 퇴계 이황 선생께서 한양에서 가끔 벼슬살이 할 때 살았던 집이
있던 장소이다. 물론 예전에는 지금처럼 정확한 번지가 없기 때문에 추정할 뿐이다.
아마 가로 세로 200m 정도 안에는 들지 안에 들어 있지 않겠는가? 정동 일대의 변천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퇴계의 고향에 있던 고택도 1907년 왜병의 방화로 종택은 잿더미가 되지 않았던가? 안동 답사 때에 퇴계고택 앞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나서는데 개가 짖었다. 다가서면 달아나고 다시 몇 발짝 물러나면 따라왔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는 “退溪先生舊宅”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었다. 퇴계고택에는 마침 종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듯했다. 잠시 마당을 서성이면서 퇴계고택의 역사를 떠올렸다. 고택 앞으로 개울이 흐르는데 <토계>이다.퇴계종택(退溪宗宅)은 행정구역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86-2번지다. 봉화에서 안동으로 난 국도를 따라 가다 도산면 온혜파출소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개천을 따라 2.5㎞ 쯤 진입하면 개울 건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고택은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 이안도가 건립하였다. 누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715년(숙종41)에 정자인 <추월한수정>을 지었다. 이 정자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권두경이 퇴계 선생의 학문을 추모해 건립했다.
현재의 종택은 1926~1929년에 걸쳐 퇴계 13대손인 이충호가 이곳에 살던 임씨들의 종택을 매입하고 건립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도 이때 고증하여 재건하게 된다.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명당지형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퇴계 종택은 5칸 솟을대문과 ㅁ자형 본채가 있다. 우측으로 돌면 5칸의 솟을대문과 ‘한수정’이 있으며 뒤에 사당이 근엄하다. 본채인 ㅁ자형은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가 전면에 있고 뒤에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총34칸의 저택이다.
당시에 퇴계 17대 종손 이근필 선생이 많은 일행과 이야기중이라 말을 붙이지 못한 것이 아쉽다. 秋月寒水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정자에 한번 앉아 보지 못하고 급하게 나와야 했다. 종친들이 모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는 것이 미안하여 슬그머니 고택을 나왔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한양에서 퇴계가 살았던 집터를 걷는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퇴계의 시중 백미인 도산 12곡 중의 몇 수를 읽는다.
연하(煙霞)로 지붕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늙어가네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피어오르는 연기와 저녁놀의 소담한 집을 지어, 바람 달을 벗으로 삼고, 평화의 좋은 시대에 노병(老病)으로만 늙어가기를 바라는 퇴계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는 시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 하는고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어린 선조 임금에게 성리학을 알기 쉽게 10개의 표로 만들어 놓은‘성학십도’를 만들어 나라를 통치하게 한 퇴계 선생이지만 이런 시조를 지을 줄 알았다.
푸르른 산은 어찌 영원히 푸르며, 흘러가는 물은 또 이토록 밤낮으로 흘러가는가. 우리들도 저런 물처럼 쉼 없고 저 산처럼 영원히 푸르게 살았으면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간혹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 살았던 집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지만 퇴계가 살았던 집터를 알지 못한다.
■ 김장생 선생 생가터에서
서울미술관을 드나들 때면 이곳에서 태어난 김장생 선생과 그의 아들 김집 선생을 생각하게 된다.
김장생(金長生, 1548년~ 1631년)은 이곳에서 태어나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으로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또한 김집 (金集 1574∼1656) 역시 자신의 호 신독재(愼獨齋) 답게 18현의 명단에 들어 있으니 이 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정승(政丞) 10명이 죽은 대제학(大提學) 1명보다 못하고, 대제학(大提學) 10명이 문묘 배향자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이 터를 유심하게 살피자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묘의 배향 자격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제정 당시 심의는 최고의 올 곧은 선비의 종주에 오른 유학자들이었다. 설 총, 최치원, 안 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 황, 김인후, 이 이, 성 혼, 김장생, 조 헌, 김 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문묘 18현의 명단속에서 이 터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이황, 김장생, 김집이다.
김장생의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본관은 광산이며 부친은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한 김계휘(金繼輝1526∼1582)이다. 사계는 운이 좋았던 분이다. 구봉 송익필(1534년~1599)에게 예학의 가르침을 받고, 율곡 이이(1536~1584)에게 성리학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예학과 유학의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김집 역시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에 결이 곱고 올곧은 선비가 될 수 있었다.
1578년(선조11년) 사계는 과거시험 없이 천거되어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역임한다. 이후에 자잘한 벼슬이 내려졌지만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최선을 다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단양군수, 남양부사),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의 지방관과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에 은퇴하고 논산 연산으로 내려가 평생을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키웠다. 아들 깁집과 송시열이 제자로 조선 중기이후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인연으로 10년전에 사계와 신독재를 배향한 돈암서원을 탐방한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 답사기로 썼던 글을 읽으니 부끄럽다. 이곳 생가터에서 당시 답사기를 읽으며 옛 추억을 생각한다.
■중명전과 을사늑약
1905년은 을사년이다. 그해 11월17일 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이라는 외교권이 박탈 된 불평등 조약의 장소가 정동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고종은 1904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다. 1904년 덕수궁에 화재가 났기 때문이다. 중명전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 건물이다. 외교사절단 연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명전은 애초에 덕수궁 경내에 있었다.
그러나 덕수궁 석조전 사이로 길이 나면서 궁궐 밖으로 밀려났다. 서울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 721평, 연건평 227평(1층 121평, 2층 106평) 제법 큰 규모이다. 고종의 재위기간은 무려 44년이다. 집권 중에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라면 자신의 아내 명성황후를 1895년 일제의 칼날에 죽게 한 것이며, 1905년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늑약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국권 수호의 힘겨운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다.
중명전
고종은 1897년 당시 조선으로서는 쓰기 어려웠던 용어인 황제의 나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열강들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구책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능함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일제는 한성의 치안권 등의 권한을 야금야금 탈취하며 고종의 실권을 무력화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1905년 11월17일 밤, 일제의 주모자 이토오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 공모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다. 박제순이 서명했다. 그러나 고종은 서명이나 옥새 날인을 거부했다. 오히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친서를 작성해 일본의 주권 침해를 규탄했다. 이 내용은 영국의‘트리뷴’지에 보도되고,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16일자에도 게재됐다.
1905년 11월 17일 밤에 중명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날 저녁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군대가 중명전을 둘러싸고 고종황제를 협박한다. 미리 작성된 조약문을 작성하여 외부대신의 직인이 날인된다. 11월 18일 오전 1시30분이었다.
을사늑약 현장이 어느 방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1층 왼쪽 공간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을사늑약으로 우리민족은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한다. 대한제국은 다음 날부터 일본의 보호국의 신세로 전락한다. 을사늑약은 개항장과 13개 주요 도시에는 이사청이, 11개의 도시에는 지청이 설치되어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은 항일 상소운동을 전개한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한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를 파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국 대표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각국 신문기자단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역설했다. 결국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은 사라진다. 이 무렵 중명전도 외국인의 사교클럽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중명전에 화재가 난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63년에 중명전은 고종황제의 차남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된다. 그러나 민간에게 매각된다.
■ 신아일보 건축물
정동제일교회에서 이화여고 방향으로 이어진 정동 길을 걷는다. 오른편에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을 만난다. <구신아일보사 별관>이다. 이 건물의 외벽은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쌓았다
구한말에는 세무총사(현재의 관세청에 해당) 사옥으로 사용했다.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사무실이 바로 이 장소에 있었다. 그 뒤 미국기업 싱어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 사무실과 그 상사원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63년 신아일보사가 매입했다. 1980년 10월 언론기관통폐합으로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통합되기 이전까지 신아일보사 별관이었다. 신아일보 앞을 지나가다보면 구한말의 역사와 특히 1980년 신군부 언론기관통폐합 조치가 기억난다. 전두환 신군부는 하루아침에 언론사를 통폐합하였기 때문이다. 신아일보도 당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이며, 슬라브(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일강강점기의 건축기법이 잘 남아 있다. 근대건축의 기술사적연구에 좋은 건축물이다.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1858~1902)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이다. 1882년 뉴저지 주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5년 4월 5일 조선에 입국한다. 때는 마침 부활절 아침이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조선에 도착하자 그는 조선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한다. 그가 조선의 선교사가 된 것은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조선 선교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근무하면서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 복음전도에 헌신한다. 1887년 서울에 벧엘예배당을 설립한다. 벧엘예배당이 지금의 정동교회이다. 정동교회는 한국에 설립한 최초의 개신교회이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수더톤(Souder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루터파의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어머니는 독일계였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루터적인 독일 경건주의 환경에서 성장한다. 1882년 아펜젤러는 Franklin and Marshall College를 졸업한다. Franklin and Marshall 대학은 랭카스터에 있는 명문 대학이었다. 재학중에 그는 웨슬리적 체험신앙에 감명을 받는다.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결단을 내리고 드루신학교(Drew 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한다. 당시 3년 재의 드루신학교는 교양과 지성을 중시하는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명문신학교였다. 아펜젤러의 조상은 스위스의 아피(Appie) 가문이었다. 마틴루터에 의해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아피 가문은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에 참가한다. 그 중 몇 가정이 18세기 청교도 이민열풍을 타고 아메리카로 이주한다. 아펜젤러의 5대조는 1735년 펜실베니아에 도착하였을 때에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4대조 때에 이르러서야 서더튼에 자기 소유 농장을 갖게 된다. 그들은 교육과 신앙을 중시했다. 감리교회의 교리는 신약전서 사도신경의 예수의 행적에 근거한다. 당시 감리교는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아펜젤러가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던 이유이다. 신앙과 종교적 경험에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며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다.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3학년 때인 1879년 2월 선교 강연을 듣는다. 2달러 50센트를 선교비로 헌금하면서 선교사의 비전을 간직한다. 1884년 11월 엘라 제이 닺지(Ella J. Dodge)와 결혼한다. 이어 그는 감리교 조선선교부(The Korea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첫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기 위해 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는다. 1885년 2월 일본을 경유하여 1885년 4월 5일 부인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마침 부활 주일이었던 그날 제물포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이다. 아펜젤러는 한양의 정동에 한옥을 구입한다. 이곳에서 복음과 교육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1885년8월 4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아펜젤러는 학교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부여 받는다. 배재학당의 설립이 시작된 것이다.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근무하면서는 아펜젤러는 학교와 병원 등에서 복음을 전한다. 1887년 10월 29일 벧엘예배당을 설립한다. 정동교회의 전신이다.
1888년에는 H. G. 언더우드, G. H. 존스 등과 함께 당시 조선의 국토를 답사함녀서 전도활동을 시작한다. 1890년 종로서점을 개설하고,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한다. 1887년 배재학당 신학과목을 강의한다. 이것이 협성신학교의 설립 계기가 되었다. 협성신학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이다. 아펜젤러에 의해서 배재학당이 설립되고,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이 되었고,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최초의 개신교 대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펜젤러는 조선8도 중 6도의 고을들을 답사한다. 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선교 기행 중에 세상을 떠난다. 17년간 조선에서 희생적인 선교와 봉사는 개신교의 선교역사의 밀알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1890년 한국성교서회를 창립하여 성서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1897년에는 한글로 발행한 최초의 종교 신문인 〈조선 그리스도인회〉를 창간한다. 조선이 외세에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민족계몽운동에도 최선을 다한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부탁으로 배재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부모와 형제들 처와 차식들이 자살을 하거나 모두 학살당한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주경야독으로 와신상담하며,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된다. 1895년 조선에 입국한 서재필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통해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때 아펜젤러의 집에 머무르며 그는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의 학생들에게 역사, 정치, 경제, 교회사 등을 가르친다. 학생 이승만이 대미주의자가 되는 기초를 서재필이 심어 놓은 것이다. 아펜젤러는 1902년(광무6) 그는 목포에서 개최 될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탄다. 불행하게도 군산 앞바다에서 아펜젤러가 탑승한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사망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힌다. 이후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 박세영의 삶과 문학
박세영(1902~1989년)은 경기도 고양 출신이다. 1922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상해와 천진에서 생활했다. 1924년 귀국하여 염군사의 동인으로 참가했다. 염군사는 진보적인 문화단체였다.카프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25년 '해빈의 처녀' 이후 <타작>, <야습> 대표작 <산제비>를 1936년에 발표한다.
1926년 말부터 프롤레타리아 아동잡지 <별나라>의 편집을 맡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별나라> 가 폐간된다. 1935~1945년까지 중학교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1937년에 시집 산제비를 출간한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북한의 국가인 〈애국가〉작사하였으며, 〈림진강〉이 있다.〈림진강〉은 1950년대에 지어 유행가의 가사가 되었다. 남한에 두고 온 가족들과 벗들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1990년대에 가수 김연자가 텔레비전 음악회에서〈림진강〉을 노래했다.
대한민국에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북한에서는 이 노래를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나는 그의 시 <산제비>를 좋아한다. 자유를 그리워하면 쓴 시이기 때문이다. 임진강 노래를 부를 줄 모른다. 다만 그 시를 옮겨 본다.
1,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싣고 흐르냐
2, 강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마다 물결위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3, 내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者)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채찍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구나.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닫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구나.
- 박세영 시 <산제비> 부분
■ 박팔양의 삶과 시
박팔양(1905~1988)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1923년 동아일본 신춘문예에 <神의 酒>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카프와 구인회 동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모더니즘과 계급적인 양면성을 지닌 작가로 보아야 한다. 식민지의 모순을 인식하고 저항성이 있는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1940년에 발간한 여수시초와 1947년 펴낸 <박팔양 시집>이 있다. 광복 당시 그는 만주에 있던 <만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월북하여 로동신문의 전신인 <정로> 초대 편집국장과 로동신문 부주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1956)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에 북한의 종군 작가로 참전했다. 이후 그는 1958년 <황해의 노래> 1961년 <민족의 영예>를 발표했다. 비전향 장기수로 2000년 북으로 송환된 양자 '박문재'는 박팔양의 양자이다. 1988년 국내에서 해금되었으며, 시선집 <태양을 등진 거리>발간됐다.
나는 그대의 종달새 같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보다도 더 그대의 말없음을 사랑한다.
말은 마침내 한 개의 조그만 아름다운 장난감.
나는 장난감에 싫증난 커가는 아이다.
말보다는 그대의 노래를 나는 더 사랑한다.
진실로 그윽하고도 황홀한 그대의 노래여!
붉은 노을 서편 하늘에 비끼는 여름 황혼에
그대의 부르는 노래,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하느뇨.
노래에도 싫증날 때 그대는 들창가에 기대어 침묵한다.
아아 얼마나 진실하고도 화려한 침묵인고!
나는 말없이 서 있는 아름다운 그대의 창 너머로
여름 황혼의 붉은 노을을 꿈과 같이 동경한다.
-박팔양의 시 <失題>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였다가
하루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처럼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처럼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라
다.
- 박팔양 시 < 진달래> 부분
■ 배재학당터에서 읽는 나도향의 <그믐달>
나도향(1902~1926)은 젊은 날에 요절한 작가이다. 정동의 배재학당터를 거닐다보면 중학교 때 읽은 그의 작품 <벙어리 삼용이>가 기억난다. 말 못하는 벙어리 삼용이가 자신의 여주인을 위해 몸을 바치던 기억은 선연하다. 나도향의 본명은 ‘경사스런 손자’의 뜻을 지닌 나경손(羅慶孫)이다. 호가 도향(稻香)이다. '벼의 향기"란 뜻을 가진 그의 호가 이름인 듯 불러지는 작가이다.
1918년 배재고보를 졸업한 나도향은 박영희와 김기진과 어울리며 문학의 꿈을 키운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나도향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이유이다. 나도향은 의학에 관심이 없고 문학에 열정을 보였다. 1919년 집에서 돈을 훔쳐 몰래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학비가 없어 포기한다. 귀국하여 1922년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박영희 등과 함께〈백조〉동인으로 참여한다.
1923년 경북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1924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다가 출옥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집안은 순식간에 몰락하기 시작한다. 1925년 일본으로 갔다가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하고 귀국한다. 1926년 8월26일 그는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겨우 24세였다. 그는 떠났지만 한국 문학에 그의 이름은 아직 당당하다. 그의 수필 <그믐달>을 읽고, 배재고보터를 거닐면서 그의 삶과 문학을 생각해본다.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들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 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웅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을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뜻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되,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 전문
■ 정동극장과 이동백 명창
정동극장의 마당 끝에 서있는 이동백(李東伯, 1867년∼1950년)의 동상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정동극장은 중고제와 동편제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판소리의 전설 이동백 명창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이곳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정동극장은 1995년 세워졌다. 이동백의 동상은 1999년에 세웠다. 구한말에 명창으로 당시 그가 활동하던 원각사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창 이동백
현재 정동극장의 유일한 기념조형물인 이동백 명창의 동상은 백현욱 조각가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동백은 충남 서천출신이다. 본명은 종기(鍾琦), 아명이 동백(東白)이다. 결국 그의 이름은 유년시절에 부르던 이름이다.
그는 창우집단 출신이다. 창우 집단은 굿판에서 부르는 소리와 판소리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적인 공연부문인 ‘판놀음’에서 노래를 주로 하던 집단을 칭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음악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여 중고제의 시조였던 김성옥의 아들인 김정근 명창의 문하에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한다. 판소리란 말은, 장소를 지칭하는 ‘판’과 노래라는 의미의 ‘소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가 시작 될 무렵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던 판소리 명창들은 지금의 연예인들처럼 인기가 많았다. 이 시기에 명창으로는 이동백. 김창환.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을 판소리 5대 명창이라고 부른다.
중고제의 시조였던 김성옥의 아들인 김정근 명창의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시작한다. 동편제 명창인 김세종 문하에서도 수련한다. 서편제의 시조였던 박유전의 제자인 이날치(1820-1892)에게서도 소리공부를 하였으니 그는 판소리의 모든 영역을 넘나들었다.
정동극장 마당의 이동백 명창 동상
그러나 중고제인 김정근의 판소리를 근본 토대로 불렀기 때문에 그를 중고제 명창으로 부른다. 판소리는 서편제, 동편제, 중고제, 강산제 등으로 분류한다.
먼저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동편인 남원, 운봉, 구례, 곡성, 진주 등에서 불러지던 판소리를 동편제라 한다. 섬진강의 서쪽방향에 위치한 고창, 광주, 보성 등은 서편제이며, 충청도 이북 지방의 소리를 중고제라 부른다. 강신제는 서편제에서 파생된 유파이다. 이동백이 한양으로 입성한 것은 1902년이다. 그는 원각사에서 판소리를 불렀다. 지금 정동극장이 옛 원각사를 표방하고 있다. 그의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이다.
이동백이 유명하게 된 것은 노래는 물론 대단한 미남에 고종의 총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그가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기 위해 원각사의 공연 현장에 전화기를 설치하고 그의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얼마나 이동백의 노래를 좋아 하였던지 고종은 그에게 당상관(堂上官)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하사한다. 소리꾼이 정3품의 벼슬을 제수 받는 것은 이동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시 이동백 명창을 ‘이통정’ 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정동극장에서 그의 동상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 이영훈과 광화문연가 노래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동제일교회 앞 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이화여고로 가기 전에 오른쪽 담 밑에 작은 노래비가 보인다. 작곡가 이영훈(1960년~2008년)의 얼굴이 새겨진 <광화문 연가> 노래비다. 너무 작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서정시 같은 <광화문 연가>의 가사는 누군가의 정동 추억이 알알이 새겨져 있다.
작곡가 이영훈 노래비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에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저 눈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에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저 눈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가수 이문세가 불러 널리 알려진 <광화문 연가>의 노랫말을 음미하며, 작곡가 이영훈의 삶과 음악에 대해 알아보았다.
작곡가 이영훈은 2008년 2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가수 이문세에 의해 불러졌다. 그가 불러 유명한 곡이 되었다는 '난 아직 모르잖아요, 사랑이 지나가면, 시를 위한 시,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옛 사랑, 광화문 연가, 붉은 노을 같은 곡들이 이영훈이 작사하거나 작곡한 곡이다.
그는 세상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삶과 사랑은 하늘의 구름과 같이 흘러만 갑니다.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하지만, 바라보면 그 사이에 먼 곳으로 사라집니다. 항상 사랑하고, 늘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요."
-작곡가 이영훈
명상가 같은 그의 마지막 언어들이 가슴을 울린다.
그가 쓴 노랫말인 <시를 위한 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듯, 처연하다.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져도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강물이 되면 그대의 꽃잎도 띄울께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내가 눈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께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언제까지 그대를 생각해요.
노을진 구름과 언덕으로 나를 데려가줘요.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초등학교 때부터 강소천 선생이 지은‘유관순’이란 노래를 불러왔다.
이 노래를 부르면 언제나 가슴이 울렁인다. 아직도 삼월이 되면,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에는 짧지만 강렬한 은어가 숨겨 있다. 감옥과 푸른 하늘로 대비되는 시적 발상은 비장한 마음을 지니게 만들곤 했다. 간혹 정동 길을 가다가 이화여고 교정 앞을 지나칠 때면 이 노래가 유독 가슴으로 다가온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는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곳에서 이 노래를 불러보기 위해 이화여고 교정을 탐방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옥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 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
- 강소천의 동요 '유관순'
이 노래를 부르며 자란 분들에게 유관순은 우리 모두의 '누나'이다. 강소천이 시를 쓰고 나운영이 작곡한 <유관순> 노래는 박두진 시인의 '3월1일의 하늘'과 함께 유관순이 우리들의 누나임을 알려준다. 유관순(柳寬順) 열사는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부친 유중권은 감리교에 일찍 입교하고,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과 계몽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유관순 열사는 유년시절부터 부친의 독립적이며,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성장한다. 이 무렵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3,1운동 직전까지 강력한 무단 통치를 감행했다. 유관순의 뜨거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은 3.1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3,1운동은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았다. 일제 식민지 10년 만에 잃었던 조국을 찾기 위해 대동단결하고 모두들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세계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당시 국내에서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을 인식한 사람은 희박했다. 그러나 해외로 나간 동포들은 러시아의 공산화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중국 상해의 신한청년당이 3.1운동을 계획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일제는 3,1운동 직후까지도 우리 민족의 자율적인 사회단체의 설립을 불허했다. 종교계와 학생들이 3.1운동을 주도하게 된 원인이다.
천도교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하에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했다. 손병희, 권동진,오세창, 최린 선생이 중심인물이다. 불교는 한용운 시인, 기독교는 선우혁, 이승훈, 양전백이 중심인물이었다. 학생들은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연희전문의 김원벽, 경성의전 한위건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독립운동 계획을 모색했다. 1919년 2월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된다. 이를 가능하게 한 사건은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다.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고 고국에 이 거사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을 들은 국내 독립운동에 뜻을 가진 사람들은 3․1운동 계획을 본격화한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쓴다. 이 독립선언서의 초고는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쳐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된다. 보성사는 천도교에서 운영하고 있었기에 총 2만 1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고종의 국장일로 정했다. 3월 2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거사일에서 제외된다. 거사일에 많은 사람들 참여가 중요했다. 결국 고종 국장일에 참여한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그 시기를 앞당긴다. 3월1일로 거사일이 결정한 이유였다.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서울 북촌의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행동의 통일과 체포 시에 주눅 들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설파할 것을 협의했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33인중에 29명의 민족대표는 종로 태화관에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 한용운 시인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당시 경성의 종로 일대는 강둑이 터진 듯 수만의 인파로 불어난 만세 시위대가 물밀듯이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밤이 늦도록 만세시위는 계속된다.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의 선배들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한다. 만세 시위대가 이화학당 앞을 지나자 유관순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이화학당의 담을 넘는다. 당시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그들을 만류하였지만 유관순의 의지를 꺽을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유관순은 3.1운동의 진원지의 핵이 되었다. 3.1운동의 최대 시위는 1919년 3월5일 이었다. 장소는 서울역(남대문역)이었다. 이날 시위 주도는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었다. 경성의 학생 거의 전부가 이날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고종의 장례를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를 주도했다. 약 1만여 명의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행진했다.
이날 시위대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으로 이동하였고, 또 다른 시위대는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으로 전진했다. 보신각에서 만난 시위대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었다. 이날 유관순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각오를 아마 이날 했을 것이다.
시위가 격화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다.
이화학당의 휴교에 들어간다.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유관순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은밀하게 감추고 고향 천안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이날 이화학당을 떠나고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다.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간 유관순은 동네 어른들에게 경성의 3․1운동 소식을 전한다. 부친 유중권은 감리교 속회장인 조인원과 이백하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협력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한다.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에게도 경성의 만세운동 시위는 유관순을 통해 알려진다. 3월 31일 유관순은 지령리 매봉에 봉화로 다음날 만세 시위의 신호를 보낸다. 다른 지역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한다. 거사일인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그녀는 장터에 온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준다. 그리고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한다. 이날 유관순 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일제의 악랄한 지배에 당하고 살아왔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하고 학대와 모욕을 가하고 있다. 지난10년은 참아 왔지만 이제 결코 참을 수 없다. 지금 세계의 약소국가들이 자기 나라를 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고 있다. 우리도 지금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은 백성도 아니다.”
그녀의 열변에 아우내 장터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은 조인원 대표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3천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에 나섰다.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아우내로 몰려왔다. 이들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이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유관순의 부친인 유중권 선생은“왜 우리 백성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잔악한 총검에 찔려 순국한다. 어머니 또한 남편의 죽음에 항의하다가 현장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한다. 이에 분노한 유관순은 숙부인 유중무와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과 아버지의 시신을 병천 헌병주재소 앞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항의 시위를 한다. 유중무는 격분한다. 주재소로 진입하는 그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기도 했다. “우리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정당한 일을 했는데 도둑놈들이 왜 총질을 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질타한다 “ 너희들은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앞잡이를 하며 살고 있는가?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민족의 반역자가 될 것이다. 이놈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당장 죽여라”고 소리쳤다.
밖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헌병들은 다시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유관순,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도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유관순은 고문을 받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주장한다. 공주감옥에서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하며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던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난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유관순의 심정을 헤아려 볼 일이다.
법정에서 그녀는 “나는 대한 사람이다. 너희놈들은 우리 조국의 땅을 침략하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인은 너희 놈들이다.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재판 받을 근거가 없도다.”라고 강렬한 주장과 논리를 펼친다. 일제의 재판을 거부한다. 그녀의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에 검사와 판사들도 간담이 서늘하였으리라.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 받는다.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은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절규와 외침이었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에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고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결국 유관순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한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지 이틀 뒤에 이화학당의 교장 푸라이와 월터 선생은 이 소식을 듣는다. 그들은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유관순 열사의 시신 인도를 요구한다. 처음에 일제는 이를 거부한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시신을 인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신을 인도한 푸라이교장과 월터 선생은 깜짝놀랐다. 상자 속에 든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토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민족의 재단에 토막의 시신으로 바쳐진 열사가 되었다. 유관순 열사의 삶과 죽음을 알고 박두진 시인의 <3월1일의 하늘>을 읽으면,
비록 삼월이 아니더라도 조국의 해방과 자유의 소중함에 가슴이 흔들린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짓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 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외침을 알았다.
- 박두진의 '3월1일의 하늘' 전문
■ 경희궁의 역사적 의미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해 있는 경희궁은 한양의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여 서궐로 불렀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궁궐이 아니었다. 1617년(광해군9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620년에 완성하였지만 당시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백성들은 갑자기 궁궐 건축 공사와 함께 떠나야 했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전소되었기 때문에 당시 긴급하게 필요했던 왕의 업무는 불탄 궁을 수리하고 새로운 장소에 궁을 건축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경희궁의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희궁을 완성하였던 광해군은 이곳에서 집무를 할 수 없었다. 인조반정에 의해 죄인이 되어 강화도와 제주도를 수 십 년 떠돌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를 기술할 수는 있지만 미래는
그 누구인들 예측할 수 있겠는가. 광해군 역시 자신의 앞날은 예측하지 못했다.
경희궁은 생각보다 많은 왕이 정무를 보았던 곳이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정무를 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현종과 숙종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1924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인접하여 한양 동쪽에서 일명 동궐(東闕)을 형성하였다면, 경희궁은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서쪽에서 7만 2천여 평에 정전과 동궁을 비롯한 침전, 별당 등의 건축물 98채가 운집한 서궐이었다. 현재 구세군회관, 성곡미술관, 송월동기상관측소까지 경희궁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현재 살아남아 경희궁으로 돌아온 건축물은 흥화문 뿐이다. 일제는 경희궁을 파괴하고 그곳에 일본인들의 학교였던 경성중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도 서울고등학교 교정으로 사용하다가 1980년 현대건설이 매입한 후에 다시 서울특별시가 구입하여 복원이 시작되었다. 2023년까지 2차 복원계획이 차질 없게 진행된다면 경희궁은 어느 정도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에 의해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리고 광해군이 새로 지은 궁궐을 일제가 400년이 지나서 다시 파괴하였다는 역사적 진실의 의미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 경희궁의 전각
숙종(1661~1720)은 경희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숭정전(崇政殿)에서 즉위하고,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했다. 이것은 궁이 세워지고 최초의 즉위식이었다. 경덕궁(慶德宮)이란 대궐명을 경희궁(慶熙宮)으로 바꾼 왕은 영조1694~1776)였다. 1760년(영조36)에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였다. 영조는 경희궁에 남 다른 애정을 가지고 집권기의 절반을 근무했다. 태녕전에 영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숭정전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왕의 어진(御眞)를 안치하던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태녕전 뒤에 암천(巖泉)과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태녕전 뒤에 있는 작은 바위동굴 같은 곳에서 계속 물이 나고 있는 암천(巖泉)을 볼 수 있다. 정조대왕(1752∼1800)과 헌종(1827∼1849) 역시 경희궁의 숭정전(崇政殿)에서 즉위한다.
1810년(순조10년) 순조는 이곳에서 집무를 시작하여, 1834년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헌종과 철종도 이곳에서 즉위했지만 집무 기간은 짧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정조 때 출간했던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궁의 규모와 건축물의 위치 현황을 알 수 있다. 경희궁지에 의하면 “동쪽에는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희궁의 정문 역할을 했던 흥화문이 서있던 위치에는 현재 구세군회관 건물이 세워졌다. 현재 성곡미술관과 기상관측대까지 경희궁의 영역이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창건할 때 대궐문으로 세운 건물로 궁성의 동쪽에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등 궁궐의 정문은 복층으로 건축했다. 흥화문이 단층으로 건축되었던 것은 경희궁을 이궁(離宮)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 경희궁의 파괴와 복원 과정
-흥화문과 박문사를 중심으로
경희궁은 계속 복원을 해야 할 궁이다. 경희궁에는 100여 채의 전각들이 저마다 의미를 담고 궁궐다운 조선의 체통을 가지고 있던 궁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가 복원되었지만 경희궁 영역에 서울시립역사박물관, 서울시립경희궁미술관등이 건립되었고, 빈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가 경희궁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과정은 매우 계획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1932년 흥화문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분해 조립되어 건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광화문의 석재와 경복궁을 훼파하며 얻은 다양한 건축자재가 사용되었다. 특히 광화문과 경희궁의 남쪽 주작의 기를 끊기 위해 흥화문을 박문사의 정문으로 세웠다는 것은 분노할 일이다. 이것은 우리 왕조의 숨통을 조이고 민족의 정기를 영원히 끊기 위한 일제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자행되었을 것이다. 박문사의 낙성식에는 당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1868~1956)가 참석하였으며, 조선의 친일주의자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1932년 김구는 유진만(兪鎭萬) 등 한인애국단원으로 하여금 우가키 총독을 암살하려 했지만 안타깝게 미수에 그쳤다. 박문사(博文寺)는 일제가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죽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추모하기 위해 장충단공원 동쪽 현재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던 사찰이다. 당시 장충단공원에는 1895년 을미사변 때에 일제의 명성황후의 시해를 막다가 피살된 홍계훈1842년~1895년)과 이경직(1841~1895)의 죽음을 애도하며 고종이 세운 제단이 있는 곳이었다. 일제가 다른 장소를 선정하지 않고 이곳을 선택한 것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분노해야 하는 이유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박문사는 파괴되었지만 흥화문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다가 1988년에 경희궁으로 돌아 왔다. 경희궁의 정전은 숭정전이다. 이곳은 신하들의 품계석에 따라 도열하던 곳이다. 숭정전의 주위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으며, 뒤쪽에는 업무를 보던 자정전(資政殿)있다. 숭정전의 동쪽에는 정침(正寢)인 융복전이, 바로 서쪽에는 왕후의 침전인 회상전이 있었다.
그러나 숭정전(崇政殿)은 조동종(曹洞宗)의 조계사 본전으로 1926년에 매도된다. 문제는 조동종은 일본 불교의 한 종파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숭정전의 본래 건축물을 보기 위해서는 동국대학교 교정으로 가야 한다. 현재는 남산의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학정은 1890년(고종27년) 회상전의 북쪽에 세웠던 정자이다. 1923년에 매각되어 떠돌다가 현재는 사직공원 뒤편의 활터를 지키고 서 있다. 다시 원 위치로 복원되어야 하는 이유다. 회상전의 담은 5개의 문으로 둘러졌었고, 주위에 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텅 비어 있다. 융복전 동쪽에는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가 생활하던 곳인 장락전(長樂殿)이 있었고, 침전 뒤쪽으로 많은 정자들이 있는 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지만 역시 지금은 가늠할 따름이다. 1908년(융희2년)부터 일제의 경희궁 파괴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중학교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노골화 하였다. 1910년에 강제합병을 당했지만 이 무렵 이미 조선 조정은 그 기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빨리 경희궁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해야 하는 이유다.
일시: 7월20일/ 7월27일
북촌 인문학의 의미와 기행
인문학기행에서 수도 서울이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하다. 서울은 조선 시대에는 한양이란 이름으로 500년 이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36년과 대한민국 수립 70년 동안 여전히 수도이다. 환란과 전쟁으로 건축물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다만 서울을 답사하여 역사적인 사실과 그 시대의 인물을 탐구하며,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이 서울역사문학기행의 의미다.
넓은 의미로는 북촌은 청계천과 종로 북쪽을 의미한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인 율곡로의 북쪽을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는 율곡로 북쪽 중에서도 주로 삼청동길(사간동길)에서 창덕궁길(원서동길)까지를 북촌으로 부르고 있다.
율곡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진 길은 대략 6개 길로 분류된다.
북촌 제1길은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삼청동길, 제2길은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는 감고당길, 제3길은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별궁길, 제4길은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가회로(재동길), 제5길은 현대빌딩에서 시작하는 계동길, 제6길은 창덕궁 담장을 따라 난 창덕궁길(원서동길)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둔덕에 위치한다. 명당이다. 궁궐에 근무하던 세도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된 것은 일견 당연하다. 남산 근처는 남촌이라 했다. 주로 가난한 선비나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다.
일제는 북촌의 맥을 빼기 위해 남산 근처를 개발한다. 명동과 충무로의 등장이다. 북촌은 일제하에 명맥을 상실하게 된다. 세도가들이 살던 북촌은 퇴락하기 시작한다.
재력을 상실한 집안들은 유물들이나 세간들을 팔려고 내놓기 시작한다.
이 거래가 시작된 곳이 인사동이다. 결국 오늘날의 인사동으로 변모의 초기의 모습은 북촌의 망해가던 사람들이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이 나오던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북촌의 경계가 되고 있는 율곡로는 인사동 초입의 길이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과 종묘의 맥을 끊기 위해 만든 도로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1번 출구를 나오면 별궁길이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100m 쯤 올라가면,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택과 만난다.
별궁은 고종(1852~1919) 황제가 왕실의 가례(嘉禮)를 위해 건립했다.
이곳은 순종(1874~1926)혼례의 가례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례는 왕의 혼인이나 즉위식을 의미한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 화재를 당하였으며, 1936년 민간에 매각되고, 결국 풍문여고 교사와 한양컨트리클럽 휴게실로 사용되기도 하는 비운을 당한다. 조선 왕조의 건축물들은 이렇듯 풍비박산이 났다. 별궁은 1950년대 까지만 해도 풍문여고 운동장 한 가운데 있었지만, 별궁의 현광루와 경연당은 현재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이전 복원했다. 별궁길을 걸으면서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면, 역사의 뒤안길이 아닌 풍문여고 담장과 상가만 보일 따름이다.
감고당(感古堂) 길은 조선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해 건축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에 감고당에서 거처한 이후, 민씨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왕비로 책봉된다. 덕성여고 본관 서쪽이 감고당이 있던 터다. 지금 감고당은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명성황후는 자신이 왕비로 책봉된 일을 회상하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정독도서관(경성제1고보터) 답사
-서울교육역사사료관 탐방
-중등학교 발생지
-성삼문, 김옥균 집터
□ 심 훈. 한설야. 박헌영을 중심으로
경기고등학교는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 북촌의 서쪽 입구에 있는 정독도서관이 그 터다.
이 학교는 1974년에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문 고등학교였다. 1900년 현재의 종로구 화동에 터를 잡고 한국 최초의 중고등학교로 개교한다. <경성제일고보>이다.
경기고는 1976년 강남 개발 정책에 따라 삼성동으로 이전한다. 다행히 이곳을 정독도서관으로 개관하였기 때문에 학교의 모습은 대체로 그대로다. 사옥이나 개인에게 매도되었으면 아마도 답사할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했으리라. 동쪽 북촌 입구에 있었던 휘문고등학교가 그 예다. 현대사옥이 자리 잡으면서 해방공간의 역사무대였던 휘문고교 교정의 옛 모습은 찾을 방법이 없다. 정독도서관이 개관되었을 때에 이곳은 남산도서관과 함께 가장 인기 있던 도서관이었다. 북촌 길의 감고당 길과 별궁 길은 정독도서관을 찾던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길이었다. 풍문여고 입구를 통해 고샅길을 걸으면, 이내 덕성여고에 정문을 통과하고 100m 쯤에 정독도서관 정문에 닿곤 했다. 또 다른 길은 지금의 헌법재판소(옛 창덕여고) 담 길을 휘돌아 좁은 한옥 골목을 통과하여 정독도서관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그 유명한 <인왕산제색도>를 그렸다.
정독도서관 정문을 오르는 계단 옆에는 다양한 표지석이 서있다. <화기도감터>라는 표지석에는 이곳이 조선시대 총포를 제조하던 터라고 기재되어 있다. <중등교육발상지>라는 표지석도 보인다. 1900년 이곳에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관립중등학교가 건립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서울교육박물관 건축물은 1927년에 건축되어 지금은 교육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구 경기고 본관 건물은 1938년에 준공 했다. 경사지를 따라 세 동의 건물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세 동의 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예전에는 정독도서관 정문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궁궐 건축물이 보였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현재는 국립 서울미술관으로 다시 원위치로 옮긴 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들의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제반 사항을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고려 때의 제군부(諸君府)를 세종 15년(1433)에 고친 이름이다. 종친부 건축물에서는 역대 왕들의 족보와 임금의 초상화를 받들어 모시고 관혼상제 등의 사무를 보았다. 종친부 건물 중에 살아남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한 건축물은 중당(中堂)과 남쪽의 익사(翼舍), 익랑(翼廊)이다.
중당(경근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큰 건축물이다.
궁궐 건축답게 세벌대와 네벌대, 화강석 장대석 기단을 설치하였다.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워 건축했다.
그러나 3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은 회화나무다. 늙은 회화나무 아래서 필자는 이 학교 출신들 중에서 특별한 인연이 되었던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흥미로웠다. 그들의 삶과 문학, 죽음에 이르는 길을 더듬다 보면 가슴이 흔들렸다. 그래서 필자는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터)을 가거나 찾을 때, 세 명의 경기고 출신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한다. 심 훈, 한설야, 박헌영이다.
이들은 모두 경기고 출신으로 3,1운동 때에 만세운동을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심훈의 삶과 문학
심훈은 1901년에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소설 상록수로 친숙한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또한 영화인이었으며, 독립 운동가였다.
본명이 대섭(大燮)이었으며, 호는 해풍(海風)이다.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경기고)에 입학한다. 1917년에는 왕족 출신인 이해영과 결혼하는데 그의 나이 18세 때다. 이런 조혼은 당시 우리의 풍습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그에게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6개월 투옥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고 결혼을 하였지만 직업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시 그가 감옥에서 쓴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면, 애국심에 가슴이 흔들린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 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던 것이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 1919년 심훈의 옥중편지 인용
이 때 심훈이 선택한 길은 중국 망명이었다. 1920년 어느 날, 중국으로 남몰래 떠난다. 북경, 상해, 남경을 거쳐 항주의 지강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한다. 이 무렵 그는 민족주의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해 ‘극문회’라는 염군사의 산하단체를 조직한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이해영과 이혼한다. 1925년에 영화 장한몽에 출연하는데 이것은 그가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문학적으로는 카프(KAPF)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1926년에는 동아일보에 ‘탈춤’을 연재한다. 이 작품이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이다. 시련이 닥친다.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을 당한다. 이 때 함께 해직 된 사람이 박헌, 임원근, 허정숙 등이다. 철필 구락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사회부 기자들이 1926년 일제의 민족 언론탄압에 항거하여 언론옹호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단체다. 심훈은 자신의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늘 미래를 준비했던 사람이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 마음고생을 하던 심훈은 영화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먼동이 틀 때’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다.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직접 감독을 맡아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이 영화에 대해 임화와 한설야에게는 계급적이지 못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훈이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해는 1928년이다. 기자로 입사해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 하는가?’라는 제목의 평론으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에는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고 이듬해 조선일보사에 퇴사한다. 일 년 이상을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그가 집필을 위해 찾아간 곳은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였다. 1932년에 이곳으로 낙향한 심훈은 ‘영원의미소’(1933)와 ‘직녀성’(1934)을연이어 발표하며 작가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에게 위대한 시를 두고 떠나갔다. <그날이 오면>이다.
1936년 동창이었던 한설야. 박헌영을 두고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그의 죽음에 친구들은 모두 참여하지 못한다. 수배나 구속 중 이였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시 ‘그날이 오면’ 전문
이 시는 영국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러의 저서‘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페레스와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함께 뛰어난 시로 평가 받았다. 이 시에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소중함을 향한 간절한 절규를 지니고 있다. 이때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게 만든다.
■ 한설야의 삶과 문학
한설야(1900년~1976년)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한다. 심 훈, 박헌영과 경성제일고보 동창이다. 그러나 그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지는 못한다. 재학 중에 자신의 고향 함흥고보로 전학을 했기 때문이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소설 <그날 밤>으로 등단한다. 그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 때부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34년 일제에 의해 카프 문학인들의 검거가 시작되고 한설야도 체포되어 구속된다. 수감이후에 그는 계급성에 입각한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황혼>이다. 황혼은 노동자의 삶과 자본가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해방이후에 그는 북한을 선택한다. 그의 고향이 함흥이고 성향이 사회주의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과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을 역임한다. 한 때 그는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누린다. 1953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월북문인들의 숙청을 주동하기도 한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교육상과 인민상을 수상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1962년 숙청을 당한다.
모든 것을 잃고 그는 노동교화소로 추방되었다고 전하며, 1976년 사망했다는 설만 무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가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는 것과 1993년에 북한이 발간한 <문학예술사전>에 그의 장편소설 ‘황혼’에 관한 설명이 등재되어 있다. 복권을 의미한다. 북한은 아마도 그들이 중시하는 예술에서 수령형상소설의 발기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리라. 세 친구 중에 한설야가 가장 오래 살았다.
■ 박헌영의 삶과 두만강 노래
박헌영(1900~1956)은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현주는 몰락 양반 출신이며 지주였다. 박헌영은 첩의 아들이었다. 어머니 이학규와 부친은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부친 박현주는 본처의 아들 박지영., 박신기 등이 있었다. 박헌영 보다는 모두 10세 이상의 이복형제들이다. 박헌영이⟪경성제1고보⟫에 입학할 때,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아버지 신분은 양반이며 상업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 이학규는 부친과 결혼하기 전에 딸이 한 명 있었다.
남편이 사망하고 삶을 위해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국밥집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곳을 드나들던 박현주의 첩이 되었다. 박헌영은 서당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미 4세에 글을 쓸 줄 알았다.
1915년 그는 고향의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성제1고보⟫에 진학한다.
이때 심훈과 한설야를 만난다. 서자의식이 강했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언더우드의 YMCA청년부에도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다. 이때의 활동 때문에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된다.
1919년 3월 1일 무렵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퇴학은 간신히 모면했다. 친구 심훈과 한설야는 구속된다. 3‧1운동으로 민족의 독립을 갈구한 그는 독립운동에 자신의 생을 바칠 각오를 하게 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1920년 9월 일본의 밀항선을 타고가 고학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결코 자신이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해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이곳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접한다. 1921년3월에 고려공산 청년회 상해지회의 비서가 된다. 그해 5월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도 입당한다. 이때에 상해로 유학 온 주세죽과 결혼한다. 여운형(1886~1947), 김규식(1881~1950), 이동휘(1873~1935) 등과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다. 1924년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지만 비밀리에 조직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직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해직되고, 다시 조선일보에 입사하지만 일제는 그의 기자직을 용인하지 않아 해직된다. 결국 그는 막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이후 그는 수 차례 감옥에 수감되면서 가혹한 고문을 견디는 투사로 거듭난다.
지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불지 않았다.
단식과 정신이상자 흉내를 내기도 하고,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병보석을 받아 고향집에도 머물기도 하고, 함경남도에 있는 사찰 석왕사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 마다 현지 경찰서는 그를 철저히 감시했다. 아내의 고향인 함흥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일제 경찰은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이미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으며,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아내 주세죽은 딸을 낳았다. 이때 낳은 딸 이름이 <박 비비안니>이다. 이들의 탈출사건은 신문에 보도되고,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박헌영의 이런 탈출에 감동을 받아 유행한 노래가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매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국민 가수였던 김정구(1916~98)가 평생을 불렀던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사 ‘그리운 내 님’의 ‘님’은 박헌영을 지칭한다. 1927년 제1·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박헌영은 정신병자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1928년 임신한 아내 주세죽과 함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탈출한 사건은 극적이었다. 당시 영화배우이며, 연출가 김용환의 도움이 있었다. 가수 김정구는 그의 친동생이었다. 당시 무명가수였던 김정구는 박헌영 탈출사건을 주도했던 박승직(두산그룹 창업주)의 도움으로 OK레코드사로 옮겨 1935년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녹음했다. 두만강의 가사는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 ‘박헌영 탈출 성공’을 박승직에게 보고하기 위해, 신문에 기고했었던 시 ‘눈물진 두만강’을 수정한 것이다. 두만강의 ‘님’은 독립자금을 제공했던 박승직과 박헌영 사이의 암호였다.
백석 시인의 정인이었던 ‘자야’(김영한)가 운영했던 대원각(지금의 길상사)의 주인은 박헌영의 이복누나 조봉희의 소유였다. 자야 김영한은 조봉희의 딸이다.
극적으로 탈출했던 박헌영 가족은 모스크바에서 환영을 받는다. '정치망명 객들을 위한 집'이라는 임시 거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김단야의 추천으로 박헌영은 1928년 11월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한다. 주세죽도 동방근로자대학에 입학한다.
박헌영은 이무렵 자신의 ‘이정(而丁)’가명을 사용한다.
“논을 가는 써레와 농작물을 끌어 모으는 고무래”의 한자어를 합치면 '이정(而丁)'이 된다.
러시아 발음으로는 '이춘'이다. “평생을 하층 농민계급으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는 이렇듯 자신의 가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33년 7월 상하이 부두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심문과 고문을 당한다.
5년 만인 1939년에 가석방되어 나오니 자신의 부인 주세죽이 김단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주세죽은 박헌영이 감옥에 수감된 줄을 몰랐다. 자신의 아내의 이런 행위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주세죽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며 함구를 부탁했다.
출옥이후 박헌영은 일제경찰에 의해 A급 불령선인으로 지정하고 감시를 강화한다. 박헌영은 경성과 인천, 청주 등을 오가면서 일제 경찰과 밀정들의 감시를 따돌린다. 1941년 2월까지 청주와 서울, 대전 등의 비밀 아지트에 숨는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무렵 피신처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정순년(2010년 사망)이다. 물론 둘 만의 약속이었다. 아지트에서 함께 숨어 있던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순년은 정태식의 5촌 조카였다. 당시 정태식은 박헌영의 동지였다. 피신처에서도 아이는 태어난다. 1941년 3월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朴秉三1941~ )이 태어난다.
박병삼은 한국전쟁 때 한산 스님을 만나 화엄사에서 출가한다. 1960년 용화사에서 사미계를, 196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몇 년전에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최근 원경(속명 박병삼) 스님(76)은 조계종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대종사는 수행력과 지도력을 갖춘 승랍 40년 이상 스님에게 주는 법계다.
대종사 법계를 받아야 조계종 최고 어른인 종정이 될 수 있다.
원경 스님은 평택 만기사의 주지이며, 2010년 시 230편을 묶은 시집 ‘못다 부른 노래’를 출간했다.
아버지! 세월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언제나 낯설은 산등성 위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어린 것이 벌써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심심찮게 외로움을 달래주던
정겨웠던 사람들은 모두 다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 버린 지금은 텅 빈 외로운 곳
오늘도 쓸쓸하고 외로운 적막한 산등성 위에 홀로 서서
무리를 잃어버린 외기러기마냥 그리움에 쌓여
저녁노을 넘어가는 아랫마을만 바라봅니다
- 원경 스님의 시 <그리움> 일부
어린 박병삼은 김삼룡(?~1950)의 아내 이순금이 키운다. 이후 어머니 정순년은 친정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목수에게 시집을 갔다.
은신처에서 박헌영의 생활은 비참했다. 전남 광주에 있던 방직공장 변소 청소부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벽돌과 기와를 굽는 공장의 인부로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책임을 지고 김일성에 의해 박헌영은 1956년 사형을 당했다.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 음모 등의 조작된 죄목을 붙인 재판이었다. 박헌영의 죽음은 북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정통 공산주의 종언을 의미한다.
김일성을 핵으로 하는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른다.
■ 재동 백송을 바라보며
-갑신정변을 중심으로
별궁길을 따라 북촌기행을 할 때에 나는 언제나 재동 백송에 인사를 하면서 시작한다. 600살이 넘은 백송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갑신정변, 6,25전쟁에도 살아남아 아직도 그 흰 육체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백송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이곳이 박규수와 홍영식, 최린의 집터였으며, 광혜원터였기 때문이다. 백송은 헌법재판소 북서쪽에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 있다.
재동 백송을 올려다보면 1884년 12월4일 갑신정변에 죽어간 홍영식 선생의 삶과 죽음이 어른거린다. 어디 그의 죽음뿐인가. 갑신정변에 참여 했던 젊은이들의 가족들도 죽어가야 했다. 그 뿌리는 박규수의 삶과 연관이 깊다. 박규수의 집에 모인 젊은이들이 그가 죽고 난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먼저 박규수의 삶의 궤적을 찾아보자. 1884년 12월 4일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혁명의 주동자들은 이 날을 정권 쟁취의 날로 잡았다.
일본군의 후원을 받았지만 준비가 미약하고, 백성들의 지지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주역들 스스로도 불안했으리라. 안동별궁에서 방화하여 그 혼란을 틈타서 거사를 시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안동별궁은 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순종이 세자일 때 가례청으로 이용하려고 건축한 궁이다,
갑신정변의 주역중에 지금의 덕성여고 터에 살았던 사람이 서광범이다.
그는 이곳이 담을 넘기가 쉽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이곳에 불을 지르면 이곳으로 시선이 집중될 것을 알고 있었다.
거사가 시작되자 서재필이 보낸 자객이 민영익을 죽이기 위해 여러군데 칼로 찔렀다. 당시 한국 정부의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 출신 묄렌도르프에 의해 민영익은 간신히 피신한다. 세관본부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으로 민영익을 옮기고 알렌의사를 부른다.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칼에 찔려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왕진을 온 한의사 14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모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알렌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중상자 민영익은 이미 출혈이 심하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사망직전이었다. 오른쪽 귀부분의 두개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있었다.
다행히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었지만, 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등 뒤로 크게 나 있었는데,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 표피가 잘리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그에게 바쳤다. 알렌의 치료후에 민영익은 치유되기 시작했다. 죽음직전에 살아난 민영익은 알렌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알렌에게 현금 10만 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참판 벼슬까지 하사한다. 민영익의 쾌유는 조선 서양의학을 극대화 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서양병원 건립이 과제였던 알렌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이 건립된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 광혜원이 개설되었다. 40개 침상을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이었다.
홍영식의 집에 관한 알렌의 고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패자의 길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광혜원 건물은 전에 홍영식이 쓰던 집이었는데, 그는 최근의 갑신정변 때에 살해되었다. 우리가 그 집을 인수받았을 때에 극심한 약탈 때문에 집은 뼈대만 남아 있었다. 방에는 사람의 피로 추정되는 핏덩이로 덮여 있었다.
그 집을 병원으로 꾸미는 데는 600달러 내지 1천 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정부에서 지불하였다. 일 년에 약 300달러 상당의 약품대가 소요되고, 경상비는 정부에서 담당할 것이며,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의약품과 시술이 무료로 된다.
약 40개의 침대를 수용할 만 한 방이 있고,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할 수도 있다.”
홍영식의 식구들이 모두 자살한 집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은 설립되었다. 결국 이곳은 피의 땅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옛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박규수의 집과 홍영식의 집이 이곳에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결국 그곳이 우리나라 병원의 첫 시작점이기도 하지 않는가. 광혜원을 다시 이곳에 복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 광혜원이 홍영식의 집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는 것은 잘 한 일이 아니다.
임오군란(1882년)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더욱 대립한다. 이 무렵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형성한 세력들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했다. 이들은 청나라에 조선을 의탁하여 난국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사대당이라 한다. 민영익, 김홍집, 어윤중, 민승호, 김만식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청나라에 기반을 두려는 사대당을 반대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고무된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등이다.
임오군란의 사과를 위해 사절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큰 변혁을 이루어 부강한 나라가 되고 있는 모습에 고무되어 귀국한다. 개화파의 개화와 정치개혁의 의도를 알아챈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집권파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무렵 청나라는 독일출신 묄렌도르프를 경제고문으로 추천한다. 그는 당오전이란 화폐를 만들게 한 장본인데 이로 인해 인플레가 극심했다. 이로 인한 사대당의 불만은 대단했다.
1884년 청나라가 프랑스에게 패배하였다는 소식은 개화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개화파 주역들은 일본 주둔 병력을 무력화하여 쿠데타를 도모한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이들의 쿠데타 모의 첫모임 장소는 박영효의 집이었다. 1884년 11월 4일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주역들은 한 달 후에 있을 우정총국 개설축하를 혁명일로 삼았다. 이 모임에는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도 참석하였다.
그는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150명이면 청군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3일 천하 마지막 날 경복궁을 둘러싼 청군은 1,5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시작되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창덕궁으로 달려간다. 고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고종에게 그들은 거짓으로 사대당과 청군이 오히려 변을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대피시킨다.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가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경우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옮겨가자 사대당의 핵심들인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은 궁 입구에서 차례로 살상한다. 12월 5일 창덕궁에서 정변의 주역들은 논공행상식 나눠먹기 자리 배정을 한다.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보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때 이재선은 좌의정에 홍영식은 우의정에 김옥균은 호조판서, 박영효는 한성판윤, 지금의 외무장관 격인 외무독판에는 서광범이 임명된다. 서재필은 병조참판에 임명되는데, 그는 전위대로 공을 세웠다.
12월6일에는 혁신정강 14개조를 공표한다. 그러나 명성황후 측의 보수 수구파들은 청나라 총독 원세개에 편지를 보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청나라군 1,500명이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당연히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여야 했지만 일본군은 쉽게 퇴각한다. 홍범식은 고종을 모시고 북관종료로 가다가 청군에 살해당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법 서재필 등은 일본공사관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입지를 튼튼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은 조선쟁탈전에 와신상담하기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결국 1885년 4월 천진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철수가 결정되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 병사 고작 150명이었지만 청나라 병사는 무려 3천 명이었다. 일본이 실리를 추구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는다. 결국 김옥균은 상해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명성황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와 절두산에서 부관참시를 당한다. 혁명의 실패는 보복의 죽음과 피바람이 살기를 부른다. 그러나 명성황후도 1895년 일제가 보낸 낭인들에 의해 창덕궁에서 비참하게 살상당한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재동 백송은 인간들의 이런 참극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 홍영식의 삶과 죽음
홍영식(1855~1884)은 인생을 짧지만 굵게 산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영의정 출신의 홍순목이다. 그러나 그는 큰 아버지 홍만식의 양자가 된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관직에 나가기는 부족한 것이 많아 독서를 더 할 것을 강권한다. 2년간 그는 독서에 몰두한다.
이 무렵 그는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등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 훗날 이들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을 다녀오면서 부터이다.
1881년(고종18년)에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탐방한다. 일본 기행에서 그는 이상재를 만난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수행원이었다. 1883년 미국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을 탐방한다. 민영익, 서재필도 이때 함께 동행하였다. 미국 방문에서 그는 개화의 필요성과 혁명적으로 조선이 혁신되어야 하는 확신을 얻는다. 그는 우리나라 우편의 선구자다. 일본 방문에서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업무는 우편이었다. 일본 우편의 아버지는 ‘마에지마’이다. 그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는 홍영식과 만난 일화가 담겨 있다. 홍영식이 우편에 관해 질문한 내용과 직원들이 우편실무를 설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마에지마는 이때 홍영식에게 조선에서도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884년 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이 창설된다. 그는 우정국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드디어 10월1일 서울과 인천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1884년 12월4일 그들은 혁명을 도모한다.
이들의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한다.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군에 의해 살해 된다. 그의 가족은 모두 죽음을 선택한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가족이 모두 가 음독자살한다.
혁명적인 사고와 실천행위는 이런 비극으로 끝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재동 백송을 보면 죽어야 했던 그의 가족들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슬픈 역사의 물결이 몇 번이고 가고와도 아직 끄덕없이 살아있는 재동 백송이 소중한 이유다.
■ 선각자 박규수의 삶
박규수(1797~1877)는 본관이 반남이며, 호는 환재이다. 서울 계동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장소에서 출생했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하였다. 15세 무렵에 이미 글 공부는 대단한 경지에 올랐지만 곧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상심하여 거의 20년간 칩거하며 독서만을 한다. 특히 자신의 할아버지 박지원의⟪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심취한다.
1848년(헌종14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에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벼슬 운이 좋았다. 부안현감(1850), 동부승지(1854), 곡산부사(1858)를 역임한다. 특히 1860년(철종11)애 중국 북경 부근의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국을 다녀왔다.이 기행을 통해 그는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구미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파악한다.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한 사실은 유명하다.
진주민란후 백성들을 다른 곳 보다 많이 처형하지 않은 것은 안핵사로 조정에서 파견했던 박규수(1797~1877)의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조정에 진주와 인근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다고 보고한다. 물론 관리자들의 책임이 있었음을 보고했다. 아마 박규수의 진주민란 진상보고가 삼정의 문란이 아닌 일방적인 백성들의 책임으로 몰았다면, 조정은 최소한 수 천 명의 진주 사람들을 참살하였을 것이다. 당시 농민시가 노래처럼 불러졌다.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
진주 남강 또 만강(滿江)
짝 발로 헤앙금
도래미 줌치 장도칼
구시월에 무서리
동지섣달 대서리
-진주민란 때의 민요시
겨울밤이었을 것이다. 유년시절 마실을 가서 친구들과 함께 다리를 일렬로 가지런히 놓고 다리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물론 당시에 어떤 의미의 노래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노래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 거리 저 거리의 모든 거리 백성들아
진주 남강변을 채우도록 모두 모여라
한 쪽 발에는 대님을 묶고(동지라는 신호)
도래미 줌치(허리춤에 차는 복주머니)속에 장도칼을 지니고,
구시월에 무서리처럼
동지섣달 대서리처럼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1866년 셔먼호 사건 때는 평안감사였으며 경복궁 중수의 책임자였다. 그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을 가슴아파한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에도 승진은 계속되어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대사간 같은 요직을 역임한다.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쇄국을 풀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강골적인 면을 보여 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계동 자신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한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같은 인물들이다. 중국에서 익힌 견문으로 그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지금 식으로 하면 의식화를 한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수교를 요구한다. 박규수는 최익현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역설한다. 결국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그의 마지막 벼슬은 수원유수였다. 저서로는 ⟪환재집⟫과 ⟪환재수계⟫가 남아 있다.
⟪환재집⟫에는 다음과 같은 한시가 게재되어 있어 그의 문학과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제목은 (送李元常在恒歸報恩송이원상재항귀보은)이다.
“원상 이재항이 보은으로 귀거래사”이다.
친구가 낙심하여 분노의 노래를 부르네.
수중에는 산을 살 돈이 없지만 늘 바위 골짜기에 살기를 바랐었네.
산골의 비바람 휘몰아치는 저녁에 무엇으로 상대의 사상을 위로할까.
한 말 술이 없다면 고독하여 살아가기 어려우리라.
-대동시선 제9권 인용 김경식 번역
이 시는 <환재집>의 한시를 인용한 것이다. 1831년(순조31)에서 1841년 사이에 박규수가 지은 오언절구 6수 중 한편이다. 시에 등장하는 <이재항>은 그와 이웃하며 살던 친구였다. 그들은 자주 산골에서 함께 살자고 논의했을 것이다. 마침 이재항이 보은에 산을 구입하여 은거하기 위해 떠나는 모습을 그린 시다. 박규수는 함께 보은에 은거하지 않고 재동에 살면서 젊은이들과 사랑채에서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제자를 키웠다.
■ 혁명의 풍운아 서재필의 삶
서재필(1864~1951)은 전남 보성출신이다. 그러나 그의 본가는 충남 논산이다. 어느해 이른 봄날 필자는 그의 본가를 찾아 파란많은 삶에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갑신정변 당시에 그는 지금의 정독도서관 북쪽에 살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서광효와 어머니는 성주 이씨였지만, 부친의 6촌 동생 서광하의 양자가 된다. 결국 7촌 아저씨의 양자가 된 것이다. 양어머니의 동생 중에 김성근이 있었다. 그는 이조참판으로 현재 북촌의 정독도서관 근처에 살고 있었다. 서재필은 바로 이 집에서 숙식하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한다. 처음 벼슬은 ‘교서관 부정자'였다.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던 직책이다. 이 무렵에 서광범, 김옥균 등을 만난다.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모신다.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과 교류한다. 이들이 만나 토론하던 장소는 봉원사였다.
지금의 이대 후문 쪽에 있는 사찰이다. 이 무렵 봉원사의 주지는 이동인(1849~1881)이었다. 그는 개화파 승려였다. 이동인은 양산 출신인데 일본말을 잘 했다. 당연히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신지식을 습득했다. 이것을 개화파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봉원사는 이런 젊은이들의 모임장소였다.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에 서재필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난다. 이때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도 함께 동행한다.
서재필과 일행은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6개월간 수업을 받는다.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한다. 1984년 1월부터 7월 동안 약 7개월간이었다. 개화파들은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하여 조련국을 설립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청나라와 명성황후의 반대로 무산된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된다. 결국 1884년 12월4일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어 전위대의 책임자가 된다. 서재필의 책무는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는다.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살해하고,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은 고종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살해한다. 이때 고종은 큰 충격을 받는다. 정권장악 후에 그는 이조참판이 된다. 3일천하 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가 망명한 후에 부모와 3형제등은 처형 당했다. 처는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두 살난 아들도 이때 사망한다. 와신상담하면서 서재필이 살았던 인생역정은 누구나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1885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미국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재필을 달랐다. 와신상담하며, 주경야독하여 의사가 된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라고 후회하였다. 이쯤에서 서재필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야 한다. 그의 이야기는 길고 언젠가 새롭게 조명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들이 그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혁명을 도모하였던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로 인해 죽어야 했던 부모와 형제들, 처와 자식의 비명소리를 들어보라. 혁명이 어디 아무나 하는 것인가. 그는 미국에서 와신상담하여 성공하였지만,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이며 상처였으리라.
■ 북촌 만해당
-잡지⟪유심⟫발간 장소
북촌의 계동 43번지는 한용운 선생이 살던 집이다. 1918년 9월 창간된 잡지 유심은 이곳에서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그해 12월까지 발행하고 중단된다. 이 집은 최린이 한용운 시인을 찾아 불교계를 3,1운동에 참여하게 만든 곳이다.
최린은 당시 이승훈과의 회합을 통해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운동 일원화 시켰다. 3·1 독립운동 후 법정에서 ‘서울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 라는 검사의 질문에 <유심>지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그는 내설악 오세암에 머물고 있었다. 만해는 이 <유심>지를 통하여 세계정세의 흐름을 널리 알리려 하였다.
한용운 시인이 <유심>지는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 투고를 계속 홍보하였다. 제3호에는 그 첫 번째 현상문예란의 당선작을 발표하였다. 당시 견지동 118번지에 살던 방정환이 ‘고학생’ 과 ‘마음’등 소설로 입선되기도 했다.
8월10일/ 8월17일
서촌(세종마을)의 의미와 인문학기행
세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세종대왕의 탄생지는 서울의 서촌지역이다. 지금은 그곳에 초라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이 지역에 사는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촌을 세종마을로 부르고 있다.
‘성군’ 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반대할 사람이 없는 세종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우리 국민에게 가장 존경 받는 분이다. 세종대왕(1418~1450)의 재임기간의 성과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형편없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당대에 이미 세종은 ‘해동요순’이라 불려졌다. 집권기에 유교의 도덕정치와 민족문화는 찬란하게 꽃이 피었고, 왕도의 길은 후왕들의 모범이 되어 주었다.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정식 시호는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사뭇 길다.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1394∼1462)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은 날은 1418년 6월3일이다. 양녕대군을 폐한 것은 세자의 행동이 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갈 수 없다고 신화들이 상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녕대군은 선량하고 총명하며 민첩하여 자못 학문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정치의 실체를 인식하기 때문”에 태종에 의해 세자로 간택되었다.
1408년(태종8) 충녕군(忠寧君)에, 1412년에는 충녕대군으로 임명되었다.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 된 후, 2개월 후인 8월에 조선의 제4대 왕으로 등극한다. 태종이 많은 피를 보면서 강화시킨 왕권을 기반으로 세종은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시킬 다양한 정책을 시행한다.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승정원의 기능을 크게 강화했다. 집권 2년 후인 1420년에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다. 집현전은 젊고 실력있는 학자들을 육성했다.
집현전이 있던 장소는 현재 경복궁 수정전이 있는 곳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27대왕 중에서 세종대왕과 가장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궁궐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도 가장 먼저 건립한 정궁(正宮)이다.
1388년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한다. 1392년 개성에서 왕으로 즉위한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王씨에서 李씨로의 역성(易姓)혁명이었다. 1394년 12월4일 경복궁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5년에 중요 전각을 완성하여 경북궁의 골격을 완성한다. 경복궁의 이름은 시경(詩經)의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대대손손 조선 왕조에 경사스럽고 큰 복을 기원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묘하게도 경복궁은 한양의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건축되었지만 왕들이 머문 기간은 짧다. 세종, 문종, 단종, 고종이 이곳에서 주로 기거했을 뿐이다. 왕자의 난으로 경복궁에서 피를 본 태종이 경복궁을 기피하면서 1405년(태종5년) 지어진 궁이 창덕궁(昌德宮)이다.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 역시 경복궁을 기피했다. 그 역시 창덕궁에 살면서 집무를 보았다. 불행하게도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전소된다. 그것도 한양의 백성들에 의해서 불에 타는 수모를 겪었다. 그나마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1865년 폐허로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복원하였다. 1868년 경복궁 복원공사가 완료되었으니 경복궁은 실로 270년 동안 폐허 상태였다.
경회루 남쪽에 있는 수정전은 세종대왕 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이다.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집현전 자리에 지었던 건축물이다. 정면 10칸 측면 4칸이니 그 규모를 알만하다. 수정전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보면, 560년 전에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방문하던 상상을 하게 된다. 어느 해 늦은 밤, 세종은 하루 종일 연구에 열정을 다하다가 잠시 잠든 신숙주에게 곤룡포를 덮어주고 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세종은 그런 분이었다. 경복궁은 세종대왕의 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종은 단명했으며, 단종은 왕위에 오르자 영월로 유배를 가서 죽음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고종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막판에 덕수궁에서 처량한 만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집권 32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조선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결국 경복궁은 세종대왕의 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집현전에서는 학술연구 서적편찬과 왕과 세자의 학문적인 자문 교육도 겸했다.
이곳에서 근무했던 학자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정인지 등이다. 이들은 세종대왕의 민본정치를 추진하고,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던 세종의 사람들이었다. <효행록〉,〈삼강행실도〉,〈주자가례>를 발행하여 보급하는 한편, 유교적인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헌신한다. 1419년 사사노비(寺社奴婢)의 정리를 시작한다.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백성을 사랑했던 분은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사면령을 자주 내렸으며, 부역에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노비들의 처우를 개선한 것은 물론이며 주인이 가혹한 형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혹시 실수로 노비를 죽인 경우에도 그 주인을 강력하게 처벌 했다.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는데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했다. 출산을 당한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는데 무려 그 기간이 1개월이나 되었다. 왕의 이런 애민정책이 너무하다며, 상소를 올리는 선비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백성 사랑의 정점의 끝에는 한글창제가 있다.
세종의 대외정책은 훌륭했다. 명에 대해서는 사대와, 왜와 여진 에게는 교린의 대외정책을 강구했다. 이것은 태조 이래 써온 대외정책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명나라에 처녀를 바치는 것이나 금과 은의 조공을 폐지한다.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 최윤덕에게 명령을 내려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냈다. 이곳에 6진(六鎭)과 4군(四郡)을 설치하고 백성을 이주시켰다.
1419년 이종무(李從茂1360년~1425년)에게 명령하여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그들의 회유를 위해서 1423년 삼포(三浦)를 개항한다. 이곳에 왜인들의 출입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발생하자. 1443년 계해조약을 맺는다. 내용은 세견선과 세사미(歲賜米)의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하였다.
세종이 우리 민족을 위해 남겨진 최대 문화유산은 훈민정음이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문연구와 각종 예술 활동 및 편찬사업이 주도 되었다.
세종대왕 집권 10년 후인 1428년 이후 본격적으로 간행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발행된 간행도서는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등의 역사서, 〈사서언해〉,〈효행록〉,〈삼강행실도〉,〈오례의주〉등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 〈명황계감〉〈치평요람〉등의 중국정치서, 〈운회언역〉,〈용비어천가>,〈동국정운〉등 훈민정음이나 음운. 언해 관계 서적, 〈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등의 의서, 〈농사직설〉등의 농서를 비롯하여 중국법률, 중국문학, 천문, 병서 등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의 가계도를 보면, 부인 6명에서 자녀가 무려 18남 4녀 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족을 거느리면서도 그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세종대왕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교의례에는 다양한 음악이 필요했다.
이 무렵 다양한 악기를 조율할 수 있는 율관(律管)이 제작되었으며,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정간악보(井間樂譜)가 제작되었다. 결국 음악학이 발달한다. 조회아악(朝會雅樂)과 제례아악(祭禮雅樂)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세종의 이런 음악적인 성향과 열정을 뒷받침해 준 사람이 있었다. 충북 영동 출신 박연이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백성사랑에서 창제되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느끼는 연민의 정은 남달랐다.
훈민정음은 1433년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언해의 서문은 언제 읽어도 세종의 깊고 넓은 백성 사랑을 느끼게 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세종이 1418년에 집권하고 25년이 되던 1433년에 완성하고, 1446년 10월에 반포한 훈민정음은 우리민족에게 내린 축복이다.
세계적으로 문자를 만든 이유와 정확한 연도를 명시한 것은 훈민정음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세종의 당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탄압을 받아왔다. 한문을 익힌 자들의 기득권 때문이었다. 언문(諺文),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등으로 불러지며 수모를 견뎌야 했다. 한글은 제대로 교육 받으면 10일이면 글자를 모두 해독하고 독서가 가능하다.
조선시대 지배자들이 이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한문을 평생 배워 입신출세를 하려는 자들에게 한글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로 보였다.
그들에게 평민들 모두가 글자를 깨우치고 지식인이 된다고 하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글을 박해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때로 의미 있는 상상을 동반한다.
만약 세종대왕께서 한글 반포 후 10년 이상 생존하였다고 하면, 한글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종대왕은 한글반포 4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어렵게 창제한 한글도 세종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천대를 받아야 했다. 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해방이 되면서 남과 북이 '한글'로 부르며, 세종대왕의 위업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글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국제화라는 미명하에 조기 교육을 한답시고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먼저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살아오신다면 가장 실망하시면서 격노할 일이다.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다. 한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체계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음절 단위로 기록하는 음절 문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1446년 당시 훈민정음 창제 때의 문자 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다. 그러나 초성의 3자와 중성의 '1자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싸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젼차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옳배 이셔도 마침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할노미 하니라 내 이를 爲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히여수비 니겨 날로 쓰메 便安킈 하고져 할 따라미니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류통)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를 가지고 서로 통하지가 않는구나.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고우민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끝내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자가 많도다.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여위치민연 신제이십팔자)
내가 이를 위해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배워 매일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학자들인 박팽년, 최항,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의 노력의 결실이다. 당시 중국에는 운학(韻學)이 존재했다. 이것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서였다.
세종은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운학에서 의문나는 점을 질문했다. 성삼문에게 명하여 요동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에게 13번을 방문하게 하였다. 방문 목적은 음운에 관해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치밀한 분이셨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에도 바로 반포하지 않았다. 3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어 다양한 실험을 했다.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짓기도 하고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해례서(解例書)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용비어천가는 장편 서사시이다. 조선 건국 초기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에서 생겨난 노래이다. 〈용비어천가〉라는 노래 이름은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이다. 〈주역 周易〉의 건괘(乾卦)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표현하였다.
海東(해동) 六龍飛(육룡비)莫非天所扶(막비천소부)古聖(고성)同符(동부)
이를 해석하면 "해동(조선)의 여섯 용(왕)이 날으시어서, 그일(조선건국)마다 모두 하늘이 내리신 복이시니, 옛날의 성인(중국 개국 성군)의 하신 일들과 동일하도다."이다. 해동은 조선을 의미하며, 6용(六龍)은 조선 창업 주역인 6조를 비유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터 조부까지와 태조. 태종을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등이다.
결국 용비어천가는 하늘에 뜻에 따라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배경이라고 하지만 설화를 소재 삼아 세종의 조상이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의 영웅담을 소개한 내용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정인지, 권제, 안지를 시켜 짓게 하였다. 1445년에 완성하고 세종이 직접 '용비어천가'라 제목을 달았다.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에게 용비어천가의 주해를 달게 하였다. 이는 다른 주해가 오해를 낳을 수 있음을 염려해서였다.
〈용비어천가〉를 노래로 부를 때는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했다. 이 곡명을 사용한 것은 백성들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 감동이 백성에게까지 전달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훈민정음
1443년(세종25년) 음력 12월에 28자가 만들어졌다. 3년 후인 1446년(세종28년)음력 9월에(양력 10월9일)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훈민정음>의 서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글을 창제하였다는 것은 세종대왕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정신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글의 원리는 우리말의 닿소리를 그 나는 자리에 따라 어금닛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잇소리, 목소리의 5가지로 분류했다. 당시 세종대왕은 5가지 소리에서 대표적인 소리를 하나씩 뽑아냈다.
어금닛소리에서는 ㄱ, 혓소리에서는 s , 입술소리에서는 ㅁ, 잇소리에서는 t, 목소리에서는 ㅇ 어금닛소리는 혓바닥의 뒤쪽을 입천장에 올려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ㄱ' 자를 만들었다. 혓소리는 혀끝을 윗잇몸에 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그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ㄴ'자를 만들었다. 입술소리는 입술을 닫고 내므로 입술의 모양을 그려 'ㅁ'자를 만들었다. 잇소리는 혀끝을 감아서 나오는 공기의 흐름이 윗니 끝을 스쳐서 나는 소리이므로'ㅅ'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한글이 창제되었을 때의 공식적인 이름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을 줄여 '정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언문>은 한글을 낮추어 부르면서 한문에 대해서 우리 토박이 말을 적는 글자란 뜻으로 사용했다. 여성들이 사용한다는 <암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 국운이 위태로울 때에 한글을 <국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글이란 명칭은 한글학자 주시경에 위해서였다.
1907년부터 주시경(1876~1914) 선생은 '하기국어강습소'를 개설하고,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를창립한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국어'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되자 학회의 이름을 '배달말글 몯음'이라고 했다. 1913년에는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7년에 기관지인 〈한글〉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한글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을 담고 있다. <한글> 훈민정음을 대신한 가장 완벽한 이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기본글자의 수는 24자이며,
닿소리는 다음과 같다.
ㄱ 기역 k /ㄲ 쌍기역 k' /ㄴ 니은 n /ㄷ 디귿 t
ㄸ 쌍디귿 t' /ㄹ 리을 l /ㅁ 미음 m
ㅂ 비읍 p/ ㅃ 쌍비읍 p' /ㅅ 시옷 s
ㅆ 쌍시옷 s' /ㅇ 이응 ŋ /ㅈ 지읒 č
ㅉ 쌍지읒 č' /ㅊ 치읓 čh /ㅋ 키읔 kh
ㅌ 티읕 th / ㅍ 피읖 ph /ㅎ 히읗 h
홀소리는 다음과 같다.
ㅏ 아 a / ㅐ 애 ε / ㅑ 야 ja
ㅒ 얘 jε / ㅓ 어 ə / ㅔ 에 e
ㅕ 여 jə / ㅖ 예 je /ㅗ 오 o
ㅘ 와 wa / ㅙ 왜 wε /ㅚ 외 ø/we
ㅛ 요 jo / ㅜ 우 u / ㅝ 워 wə
ㅞ 웨 we / ㅟ 위 y/wi / ㅠ 유 ju
ㅡ 으 ï / ㅢ 의 ïi / ㅣ 이 i
한글은 표음문자(表音文字)로서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사용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인정받는 이유다. 한글은 창제 연대와 창제자를 알 수 있으며, 일시에 반포되고 사용된지 어언 600년이 가까이 사용되고 있는 문자이다. 이런 글자는 전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 보안여관과 시인부락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에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간판이 부착 된 건물이 있다. 보안여관이다. 2006년에 폐업하고도 여전히 '보안여관'이라는 간판을 부착하고 있다. 2010년에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전시회를 하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시인부락>이라는 문학지의 산실이며, 가난한 예술가들이 주로 드나들던 장소였다. <보안여관>의 간판을 그대로 둔 이유이다.
서정주(1915~2000), 김동리(1913~1995), 오장환(1918~1951), 김달진(1907~1989) 등은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 특히 서정주는 이 여관에서 장기 투숙을 한다. 당시 보안여관의 행정구역은 통의정(通義町)이었다. 통의(通義) “의가 통하는”이라는 동네 이름이 사뭇 이들 청년들의 기상을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은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의 산실이다. 이들은 식민지의 절망적인 상황을 토로하며 밤을 보냈으리라. 통의동 2-1번지 보안여관이 이름을 바꾸지 않은 이유가 될 것이다. 통의동은 겸재 정선1676∼1759)이 태어난 곳이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살았던 곳이다. 시인 이상(1910~1937)이 살았던 집도 이곳에서 가깝다. 이상 시인은 ‘오감도’에서 통의동을 ‘막다른 골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보안여관은 80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여관의 이름(보안) 유래는 알 수가 없다. 해방이후에도 이곳은 지방의 예술가들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 전에 장기 투숙을 하던 장소였다. 이곳에 묵으며 원고를 쓰고, 할일을 찾아 아침이면 길을 나섰다. 이 여관을 생각 있는 재단이 인수했다. 일맥문화재단이다. 이 재단은 보안여관의 외형을 그대로 두고, 내부를 전시실로 꾸며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시인부락의 산실, 시인부락은 어떤 동인지였던가. 시인부락은 1936년 11월 14일 창간되고, 1937년 12월 1일 통권 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당시 경제상황으로 그들은 5호까지 내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제1호 편집 겸 발행인은 서정주 시인이었다. 제2호는 오장환이 맡았다. 국판 30~50쪽으로 시인부락사에서 발행했다. 시인부락동인으로 제1호 때는 서정주, 김달진, 김동리, 여상현(1914~ ?), 오장환, 함형수(1914~1946), 김광균 등이었다. 그러나 제2호에는 오화룡 시인과 이시복 시인 등이 참여했다. 창간호에 "우리는 우리 부락에 되도록이면 여러 가지의 과실과 꽃과 이를 즐기는 여러 식구들이 모여서 살기를 희망한다"는 편집후기가 쓰여 있다.
편집 후기의 내용으로 보아 이들은 사조나 경향을 내세우지 않고 순수문학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관심 있게 추구했던 사상은 인간의 생명이었다.
시인부락의 동인들을 '생명파'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서정주의 <문둥이>, <화사 花蛇>,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오장환의 <성벽>,〈정문 旌門〉등이 시인부락지에 게재 되었던 대표시다. ‘부락’이란 단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시골에서 여러 민가가 모여 이룬 마을 .또는 그 마을을 이룬 곳. 마을로 순화’하라고 해석한다. 부락(部落)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건너왔다. 부락민(部落民)이라고 주로 쓰였다. 일본에서 부락민은 천민집단을 칭한다.
하가 노보루교수(츠쿠바대학교)는 ‘부락이란 노예같은 부락을 의미한다고 했다. 차별과 소외를 당해야 했던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단주거지를 일컫는 말’로 해석했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부락’은 ‘요주의 단어’이다. 부락대신에 마을이나 고을을 썼으면 더 좋았으리라. 그러나 이런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시인부락이란 동인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그곳을 드나들던 문인들과 시인부락의 동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모여 문학을 토론하고 잡지를 만들던 장소가 보안여관이다. 결국 보안여관은 현대문학의 산실이다. 이런 장소가 그대로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에 이들이 만든 시인부락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 영추문(迎秋門)의 역사성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쪽문이다. 경복궁은 현재 서울에 있는 5개 궁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궁이다.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북궐(北闕)로 부르기도 했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이성계(1335~1408)는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그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경복궁 건축이었다. 자신의 집권 3년 만인 1394년 12월 4일 시작된 경복궁 건축공사가 1395년 9월에 전각이 대부분 완성되었다. 경복궁의 궁궐명은 시경(詩經)에 있는 “왕조에게 영원히 복을 기원한다”는 뜻이다.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경복궁은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지만 경복궁에서 왕들이 집권했던 기간은 오히려 창덕궁보다 짧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세종과 문종, 단종이 겨우 집권했을 뿐이다.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경복궁을 기피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 한양 백성에 의한 방화로 초토화 된다. 270년간 잡초와 나무가 우거진 폐허로 있었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1865년 대규모로 공사를 시작하여 1868년 완성한다. 경복궁에는 4개의 문이 있다. 남쪽의 광화문(光化門), 북쪽의 신무문(神武門), 서쪽의 영추문(迎秋門), 동쪽의 건춘문(建春門)이다.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迎秋門)은“가을을 환영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뭇 문학적인 이름을 담고 있다. 동쪽을 봄이라 했고, 서쪽을 가을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동쪽문이 건춘문(建春門)이기 때문이다.
영추문은 이런 저런 사연을 지닌 문이다. 조선은 개국되면서 왕자의 난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왕자의 난’은 정도전과 이방원 등의 세자들 사이 갈등으로 촉발되었다.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복형인 이방원의 세력들은 방석을 살해한다. 그 장소가 바로 영추문 앞이었다. 당시 영추문은 지금의 청와대 방향인 50m 북쪽 지점에 있었다. 1926년 4월25일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이틀 후인 4월27일 영추문의 북쪽부분이 무너져 내린다. 사람들은 영추문의 붕괴를 괴이한 사건으로 여겼다. 순종이 승하한지 이틀 후에 왕궁의 서쪽 문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영추문의 붕괴를 보도했다.
"경복궁(景福宮) 안에는 금년 일월 초순에 총독부가 이전되어 간 후 우렁차고 파탄 많은 광화문(光化門)을 그 뒤로 옮겨가기로 하고 목하 이축공사에 착수하여 불원간 그 웅자를 용이히 얻어 보기 어렵게 되었음을 암암히 무엇이라 말 못할 감상을 느끼고 있는 중인데, 작 이십칠일 오전 열시에 지금까지 흔적도 없던 경복궁의 영추문의 북쪽 한편이 돌연히 무너져 영추문 전부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1927년 4월28일 매일신보 인용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을 촉발했고, 순종의 죽음은 6.10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경복궁 광화문 안쪽에 조선총독부를 건축한다. 공사는 1916년에 시작하여 1926년 1월에 끝이 난다. 10년간의 대공사였다. 이때 공사자재를 운반하던 수단은 전차였다. 그 전차 종점이 영추문 앞이었다. 결국 전차와 공사자재로 지축이 흔들려 영추문이 무너진 것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던 중앙청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총독부였다. 중앙청은 헐렸지만 대부분 화강암으로 지어진 돌집이었다. 이 돌의 대부분을 지금의 동대문 근방에 있던 창신동 채석장에서 운반해 왔다. 그 돌무더기들이 전차 종점인 영추문 앞에 쌓았을 것이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영추문이 무너졌으리라. 영추문이 붕괴되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예 이 문을 헐어 버렸다. 재건축한 것은 1975년이며, 편액은 일중 김충현(1921~2006) 선생의 글씨로 걸었다. 그러나 시멘트로 복원을 하여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결국 영추문은 예전에 있던 그 자리를 찾아 약 50m 북쪽으로 옮겨가 제대로 복원되어야 시경(詩經)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성과 문학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작가 이상의 통인동 집터
이상(1910~1937)은 서울 출신 작가다. 그는 천재적인 시인이며 소설가였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다. 조선총독부 건축과에 잠시 기술 공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33년 각혈로 조선총독부에 사표를 내고 요양을 하면서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지용 등과 친교를 맺는다. 1934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한다. 다방과 카페 등을 경영하였으나 실패하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된다. 구속이후 건강악화로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한다. 거울(1933), 오감도(烏瞰圖, 1934) 같은 형이상학적인 시를 통해 매우 한국문학을 격상시켰다. 오감도는 초현실주의적인 측면이 강하다. 날개 (1936), 종생기(1937) 동해(童骸) 1937) 등 소설을 발표한다. 시인 이상은 설화적인 이야기를 많이 남긴 기인적인 작가이다. 그가 태어날 때에 아버지 김연창은 이발소를 했다. 장남이었지만 큰 아버지의 장남으로 입적되어 성장한다. 큰 아버지 김연필은 교육열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보성고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이유이다. 졸업 후에 잠시 총독부 건축과에 근무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표를 내고 다방을 경영하고 글쓰기를 시작한다. 1931년 <조선과 건축>지에 ‘오감도’와 ‘이상한 가역 반응’을 발표한다. 1932년에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발표한다. 그가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1934년에 구인회 동인이 되면서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가 연재된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 <오감도> 부분
시가 워낙 난해시라 독자들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는다. 30회로 연재 예정이었던 오감도가 15회로 중단한 이유이다. 1936년 결혼하고, 구인회의 동인지였던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일 년을 버티지 못했다. 일본 도쿄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 쓴 작품은 <종생기>, <권태>, <환시기>이다. 1937년 사상불온 협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체포되어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 된지 며칠 후에 동경제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다. 어렵게 서울로 옮겨와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1908~1937)과 합동영결식을 하였다.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치되었지만 이후에 유실되었다. 그의 묘소가 없는 이유이다. 유년 시절의 친구가 있었다. 구본웅(1906~1953)이다. 구본웅은 꼽추이고 4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주변에서는 사람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김해경)은 그를 인갑답게 대우했다. 그들의 우정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졸업하던 날 구본웅은 사생상(寫生箱)을 선물한다. 사생상은 일종의 스케치북 상자였다. 김해경은 고마움의 표시로 사생상에서 마지막 자인 상자 상(箱)자를 넣어 필명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가장 흔한 성씨에 상자를 붙이기로 했다. 자신의 성인 김씨를 버리고 이씨를 선택한다. 이상(李箱)이란 호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933년 폐병으로 친구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여인이 <금홍>이다. 이상은 금홍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금홍’을 뜨겁게 사랑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금홍>과 이별한 후에 만난 여인은 <권순희>였다. 그러나 그녀도 이상에게서 금방 떠나갔다. 작가 이상은 이런 여인들과 정식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술집 여인들과의 관계에 연연했다. 오히려 그런 관계 속에서 이상은 문학적인 모티브를 찾았다. 첫 여인 금홍은 서울에서 다방을 차려 마담으로 근무하게도 했다. ‘제비다방’이다. 다방 뒷방에 마련했던 작은 살림방이 그의 대표작인 소설 <날개>의 무대이다. 제비다방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이상이 다방을 금홍과 함께 운영했던 시기는 (1933~1934)년 기간이다. 이상은 소설 날개에서처럼 주로 골방에서 지냈다. <금홍이>가 <이 상>과 결별한 이유는 더 이상에게 비전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감도를 써서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하였으며, 금홍이 떠난 후에 카페 '쓰루'에 근무하던 종업원인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친구 정인택(1909~1952)이 권순희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들의 결혼식을 주선하고 사회를 맡는다. 박태원1909~1986)과 김유정1908 ~ 1937과 어울려 다니며 시름을 잊으려 했고, 마지막 재산을 정리하여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 <다방69>를 개업했지만 파산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살 곳이 없을 정도의 파산이었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후에 절망의 늪은 깊었지만, 1936년 친구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 변동림과 결혼한다. 당시 변동림(1916~2004)은 이화여전 출신의 여류문인이었다. 이상이 사귀었던 여인 중에 유일하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던 여인이었다. 생활력이 강했던 변동림은 무능한 작가 이상을 대신해서 돈벌이를 하러 나선다. 작가 <이상>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피하듯 동경 행을 감행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삶의 모습들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작품 등은 이때 쓰여 졌다. 1937년 2월,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동시에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결국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국에 남아 있던 아내는 화가 김환기(1913~1974)의 아내가 된다. 작가 이상의 집터는 서울 통인동 154번지이다. 몇 년 전에 (재)아름지기의 바자회로 2억 2000만원의 수익금이 나왔다. 이 종자돈을 토대로 ‘문화공간 이상’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집을 구입하여 복원이 시작 된 것이다. 뜻을 가진 시민들도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다. 이렇게 이상의 집터는 복원되어 가고 있다. 이상은 이미 작가로 크게 부활하였으며, 그가 살았던 집터도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 송강 정철의 생가터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
1579년 담양 면앙정에서는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열렸다. 회방연이란 선비가 과거에 합격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열리는 잔치를 말한다. 당시 수명으로 60세를 넘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거늘 회방연을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순의 나이 87세 때이다. 이 무렵 정철(1536년∼1593)은 홍문관 교리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는 선조의 어사화와 어사주를 가지고 담양 면앙정으로 갔다.
때를 맞추어 전라도의 관찰사는 물론 각 고을 원님들과 호남의 문인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아마도 면앙정 마당이 비좁았을 터이다. 잔치가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때 성격이 호탕한 송강 정철이 나서며 “면앙정 선생님을 댁까지 우리 제자들이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우리 제자들이란 고경명1533∼1592), 임제1549∼1587), 정철이다. 의자모양의 간편한 가마인 ‘남여’에 스승 송순을 태우고 네 명의 제자들은 길을 떠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자원해서 앞과 뒤에 가마의 멜빵을 어깨에 걸었다는 것이 후세에 까지 미담이 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송순의 이런 회방연의 호사는 조선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사례가 될 것이다. 다만 전쟁과 사화로 일그러진 참혹한 시대 배경 속에도 한 폭의 아름다운 송순의 회방연 분위기를 연상하면 마음이 흐뭇하다. 스승과 제자의 분위기가 적어도 이 정도라면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당시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 다행이다. 이 미담은 면앙정이 존재하는 한 다음세대로 전달 될 것이다.
300년이 지난 어느 해에 한 선비가 면앙정을 지나가고 있었다. 강화도 출신의 대문호 영재 이건창이었다. 그는 보성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돌아가던 길에 면앙정에 들린다. 면앙정이란 시 한편을 짓고 송순 선생을 부러워했다. 삶의 의미는 중요하다. 세상에는 많은 의미들이 존재한다. 여행에서도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서울에서 만나는 문인들의 행적도 어떤 의미를 지닌다. 뜬금없이 어떤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의미를 꺼내어 여행을 무겁게 하자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의미 있는 흥미를 가지고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흥미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답사지의 지식이 있어야 생긴다. 사전 지식과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으면 의미가 삭감된다. 한문을 숭상하던 시대에 한글로 문학을 꽃피운 분이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다. 송강은 조선 최고 문인중의 한 분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문학작품을 썼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송강 정철의 생가터가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청운초등학교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나마 학교 통학로를 따라 송강 정철의 문학비를 세우지 않았다면, 송강이 이곳에서 태어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1536년 정철은 이 터에서 태어나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던 10세 까지 성장한다. 당시 그는 자주 궁중을 출입할 수 있었다. 큰 누이가 인종의 후궁이었으며, 셋째 누이가 계림군 류(桂林君 溜)와 혼인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궁중에서 훗날 왕이 되는 명종과 벗이 되기도 했다. 을사사화로 송강 정철의 집안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린다. 그가 한양을 떠나야 했던 이유다. 을사사화는 인종이 제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명종이 등극하면서 일어났다. 명종의 어머니는 문정왕후다. 을사사화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小尹)이 인종의 외척이었던, 윤임(大尹)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을사사화로 100 여명의 선비가 죽거나 유배를 당한다. 이때 송강의 매형인 계림군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고, 큰 형인 정자(鄭滋)는 심한 고문을 당하고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난다. 송강의 아버지는 귀양지를 전전하였으며, 어린 정철 역시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1580년 1월 송강 정철은 울진의 바닷가에 서서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런 궁금증이 있었기에 그는 관동별곡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송강 정철의 나이 45세, 하늘과 하늘 밖의 어떤 존재를 찾기 위한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을 찾기 위해 그는 기행을 하였으며 문학작품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관동별곡>이다.
경치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정자가 있다. 담양은 이런 정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정자 문화가 가장 활발하고 발달되었던 곳 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자는 그냥 노는 곳이 아니었다.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고 현실적인 정치를 비판하고 대안을 논하던 곳이다. 또한 귀양살이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선비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으며 지조를 이어가던 선비들의 거처였다. 담양의 정자 문화권에는 서로 다른 집안과 선비들의 인맥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다. 그들의 학맥관계를 찾아가다 보면 16세기의 정치사와 문학사, 사회사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곳으로 송강 정철이 이주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송강의 부친은 함경도와 경상도 영일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어린 정철도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떠돈다. 6년 후 자유의 몸이 된 정철 아버지는 한양 생활을 청산 한 후
가족과 함께 전남 담양으로 내려간다. 담양은 정철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이었다. 송강 정철의 나이가 16세 되던 해였다. 담양에서 정철의 삶은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안정적이며 따스한 시기였다. 16세 까지 제대로 학문을 익힐 수 없었다. 그러나 담양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사림의 대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철은 무엇보다 석천 임억령에게 시를 배워 장차 대 문인이 되는 기초를 확립한다. 무등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는 담양 땅에 묻혀 살며, 시인으로서의 길로 들어선다. 동갑이었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인연을 맺고 우정을 돈독히 한다. 17세 때에 강항의 외손녀와 결혼한다. 송강 정철의 묘소는 충북 진천에 있다. 강화도에서 1593년에 세상을 떠난 정철은 1594년 2월에 신원리에 묘소에 묻힌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서 일영으로 넘어 가는 고개 밑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30년이 지난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회복된다. 1665년(현종 6년)에 우암 송시열이 충북 진천, 현재 위치에 묘자리를 정한 후에 이장한다. 1684년(숙종 10년)에 문청이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정철은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문인이며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타협하기 어려운 외골수의 성격으로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평가의 인물이다. 다만 문학적으로 그는 한글을 한 단계 발전시킨 조선의 큰 문인이다. 언문(諺文)으로 천시 받던 한글로 성산별곡, 사미인곡, 관동별곡을 창작한다. 이 송강가사는 우리 국문학발전의 큰 업적이다. 선조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쓴 가사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다. 정철의 이 작품에 대해 조선의 작가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초나라의 굴원이 쓴 이소(離騷)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굴원의 <이소>라는 작품은
중국 시가 중에서도 가장 긴 서정시라고 한다. 성산별곡은 정철이 25세 때 전남 담양군 남면에 있는 성산(별뫼)의 경치와 식영정, 서하당을 배경으로 하여 김성원을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와 함께 조선 문단의 우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시절 관동팔경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는 오랜 기간 여러 번의 유배로 떠돌아 다녔기에 문학적인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의 생애는 유년 시절부터 부친의 유배와 형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삶을 문학으로 지탱했다. 정철은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는데 1561년의 일이다. 끝내 그는 서인의 거목으로 우의정까지 지낸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송강 정철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못했다. 40세 때에 당쟁에서 밀려 담양으로 낙향한다. 3년 후에 복직되어 승지 등을 지냈지만 동인의 탄핵으로 담양으로 내려간다.
1580년 그의 나이 45세 때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는데 이 때 관동별곡을 쓰게 된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함경도 관찰사, 예조판서, 대사헌이란 직책을 가지고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이후 4년간 벼슬살이를 못할 때 다시 담양지방의 송강정에 은거한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은 문학적으로는 정철이 오히려 벼슬을 잃어버린 후에 쓰여 진다. 그의 귀양과 관직 삭탈이 문학적으로는 작품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동인의 탄핵을 받지 않고 편안한 벼슬살이를 하였다면 오늘날 그의 좋은 작품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정여립사건(1589년 기축년)이 발생하자 정철은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서인의 영수가 된다. 그리고 동인들을 철저하게 추방하고 좌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세자 책봉문제로 유배를 떠나야 할 신세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명나라의 조선 출병에 감사하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동인에게 공격을 당하고 강화도에서 가난과 고독 속에서 1593년 12월 18일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정철은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였지만 때로 낭만적 기질도 풍성했던 사람이다. 시와 술을 즐기며 거문고에도 조예가 있었다. 성삼문이 심었다는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자주 켜곤 하였다고 전한다. 술을 좋아하는 정철에게 선조 임금은 은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하기도 했다. 정철이 1580년에 지은 연시조 16수 훈민가는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할 때 도민들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 정철은 정치적인 회오리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많이 본 사람이다. 청운동 일대는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서울을 답사하며 문학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기행이다. 역사 속의 인물로 남아 있는 관념적인 작가를 현실 속으로 모셔오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김상헌 집터
궁정동 2번지와 3번지 일대는 김상헌(金尙憲 1570년~1652년)이 살았던 집터이다.
지금은 청와대 무궁화동산이 되었지만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3번지에 있던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터와 궁궐의 우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정(井)’자(字) 모양의 우물이 있다. 궁정동이란 지명은 이 우물에서 유래되었다. 청와대 앞을 서성거리다가 이곳을 답사할 때면 언제나 역사의 진실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1979년 10월26일 저녁에 충격적인 대사건이 발생한다.
이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해 장소가 놀랍게도 김상헌 선생이 태어난 집터다.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김상헌 선생은 예조판서로서 인조를 모시고 간 남한산성에서 죽음을 불사하며, 최명길이 만든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 출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붕당과 파벌을 타파하기 위한 상소를 인조에게 제안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결국 인조반정의 주체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벼슬을 포기하기도 했다. 1639년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 김상헌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청나라는 김상헌을 잡아 오라고 조선에 명령한다. 이때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면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시조로 남겼다. 조국의 산천을 그리워하는 불후의 명시조이다. 청구영언에 전하는 ‘ 가노라 삼각산’ 이란 제목의 이 시조를 읽으면 가슴이 울렁인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 김상헌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청구영언
1649년에는 좌의정에 임명되기도 한다. 자신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면, 녹봉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명필이었으며, 청음전집 40권이 있다. 김상헌의 손자는 김수항(1629∼1689)이다. 그도 이 터에서 살았다. 6세 때에 안동 풍산의 할아버지(김상헌)의 옛 집에서 살다가 16살 때부터 이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의정으로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남인과 항상 대결했다. 훗날 안동김씨들에 의한 세도정치는 그의 직계 후손들이 주축이 된다.
장희빈의 아들 왕자 윤(昀)의 원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숙종의 미움을 받아 전남 진도에 유배된다.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사약을 받고 환갑을 몇 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이렇듯 왕에게 반대 상소를 올리는 행위는 결국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김수항 선생은 한양 궁정동의 이 터에 있던 자신의 집과 식구들을 그리워하면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아득한 먼 길 진도에서... 이곳에서 옛 집 주인들의 삶터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다행스럽게 김상헌 선생의 <가노라 삼각산>이라는 시비가 최근에 세워졌다.
■ 우당기념관
서촌(세종마을)의 인왕산 아랫마을에는 우당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우당기념관이 있는 위치와 우당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회영(李會榮,1867~1932년)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가장 빛나는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다.
아호는 우당(友堂)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그는 한성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유승(李裕承, 1835~1906)이다. 이회영의 형제들은 모두 6명이다. 그는 넷째 아들로 건영, 석영, 철영은 형이고, 시영과 호영은 동생이었다. 우당 이회영의 성격은 개방적이며 호탕했다.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집안의 종들을 해방시켜주기도 했던 선각자이다. 종들에게도 나이가 자기보다 많으면 높임말을 썼을 정도로 인격적이었다. 18세 때인 1885년 달성 서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달성 서씨는 1907년 1월에 세상을 떠난다. 1908년 10월 이은숙과 상동교회에서 재혼한다. 당시 결혼식을 교회에서 하는 것은 양반가문에서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은 이회영의 삶에 전환점이 된다. 이완용, 박제순등 을사 5적은 고종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에 협의하려 했다. 당시 동생 이시영은 외부 교섭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외부교섭국장은 오늘날 외무부의 교섭통상국장 자리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시영은 조약체결의 실무자였다. 그러나 당시 외상인 박제순은 이시영에게 이런 사실을 숨기고 독단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덕수궁 중명전은 일본군이 포위하여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이시영 조차 이 조약 장소에 진입할 수 없었으니 당시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즉시 이시영은 공직을 떠난다. 1906년 이회영은 이동녕. 양기탁등과 함께 전국적인 비밀 조직체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1906년 10월, 만주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여 전 재산을 처분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회영이 해외 망명을 계획한 것은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과 이준을 파견한 배후로 지목받았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검거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1907년 이회영과 이시영 형제들은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상설과 이준에게 전달한다. 헤이그밀사사건이 국제적인 이슈가 되자 일제는 고종의 황권을 빼앗아 버린다. 1905년과 달리 1910년의 경술국치로 완전히 국권이 상실되자 이회영 6형제는 중국 망명을 결단한다.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립하고 무장병력을 훈련시켜 다시 잃었던 조국을 찾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재력이 필요했다. 형제들중에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입적되어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다. 이 토지와 재산을 모두 매각한다. 나머지 형제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망명준비를 한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약 800억의 재산이었다. 각자 자신의 가솔을 모아 약 60여명이 만주로 떠난다. 대식구였다. 자신들이 누대로 누리던 모든 기득권의 포기를 의미한다. 1910년 겨울 압록강을 건넌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 식구들은 길림성 삼원보에 자리 잡는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경학사는 주경야독을 하며 무장투쟁을 위한 인재양성이 목적이었다. 이회영 6형제는 모두 경학사의 발기인이 된다. 경학사는 신흥(新興)무관학교의 토대가 된다. 신흥(新興)이라는 이름은 조국에서 이동녕 선생과 양기탁 선생이 상동교회에서 설립한 신민회(新民會)의 첫<新>자와 만주에서 신민회의 기지를 확보하고 있다가 조국을 크게 발전시킨다는 뜻을 지닌 흥(興)자를 합쳐지었다. 신흥학교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삼원보>이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국인들도 삼원보에 집단으로 정착하며 살고 있었다. 신흥학교가 설립되자 한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위협을 느낀 것은 중국인들이었다. 일제 세력의 모략에 의한 분쟁이 발생되자, 중국인들은 신흥학교에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이회영은 북경으로 가서 원세개를 만나 학교터와 운영할 수 있는 방안모색을 담판한다. 원새개는 청나라 군대를 한국에 주둔 할 때 외교담당을 맡았던 이시영과는 안면이 있었다. 교섭이 쉬었던 것은 당연했다. 결국 신흥학교는 1911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로 옮겨 학교 부지를 확장한다. 당시 신흥학교의 교주(校主)는 이회영의 형인 이석영. 교장은 안동 출신의 이상룡(李相龍)이 맡았다. 신흥학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다. 본과는 중학교육을 가르쳤으며, 특별과는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제1회 졸업생은 11명을 배출하였는데, 이중에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가 있다. 1913년 5월 교사가 완공되어 4년제의 본과와 6개월의 장교반, 3개월의 하사관반을 개설한다. 이곳 졸업생들은 2년간 학교에서 복무한다는 강제 규정을 두었다. 신흥학교에서 신흥무관학교로 교명이 개칭된 것은 바로 이때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은 매우 엄격했다. 야간에 비상훈련도 실시하였으며, 취침중 비상나팔로 완전무장을 해야 했다. 학교 재정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학교 설립과 후원으로 이회영 형제들이 조국에서 가지고 나왔던 재정이 바닥났다. 부족한 학교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학생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농사도 짓고 날품팔이도 하면서 수입을 모아 학교 유지비로 내 놓았다. 이런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신흥무관학교는 발전한다. 1917년 봄에 통화현 제8구 팔리초 소북대에 분교를 설립한다. 이곳은 백두산 기슭의 밀림지대였다. 일명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분교라고 불렀다. 이 분교의 교장이 김동삼(金東三)선생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신흥무관학교는 입학생이 급증한다. 학생수가 600명에 이르자 수용에 한계를 드러냈다. 유하현 고산자 하동대장자(柳河縣 孤山子 河東大壯子)로 이전한 이유다. 합니하(哈泥河) 교사는 분교로 사용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는 초기에 이상룡. 후기에는 이시영이 담당한다. 교사로 이청천, 이범석등이 근무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약 3,500명이었다. 이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청산리전투 승리 후에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로 이동하던 중에 일본과 소련의 밀약에 의하여 1921년6월 <이만시>에서 소련군에게 강제로 무장해제 당한다. 이에 항거하던 270명의 독립군이 피살된다. 독립군 9백 여명이 포로가 되었으니 억울하고 원통한 사건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는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 참변>이라 기록한다. 자유시 참변으로 희생된 독립군이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흥무관학교도 더 이상 독립군 양성을 할 수 없어 지하운동으로 전환한다. 1917년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잠입한다. 고종의 중국 망명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실패한다. 이때부터 만주의 온 가족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자리를 놓고 분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회영의 깊고 넓은 통찰력은 그가 절대 앞에 나타나지 않고 뒤에서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것에도 드러난다. 결국 이회영의 예상대로 1921년 상해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 신채호 선생과 함께 조정 역할을 한다. 이 무렵 이회영은 오스기사카에의 저술을 읽는다. 큰 감명을 받는다. 오스기 시카에는 일본의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다. 1925년에 다물단을 결성한다. 다물단은 고국을 다시 찾겠다는 의지로 뭉친 결사 단체이다.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제를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1928년 5월 상하이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한다. 1932년 상해를 떠나 대련으로 떠난다. 아나키스트의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대련으로 가는 중에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이 1932년 11월17일이다. 이회영 선생이 체포당한 장소는 대련으로 가던 배 4등 선실이었다. 함께 있던 중국인들이 이회영을 지목하여 체포된다. 그러나 그를 밀고 일제 경찰에 밀고한 자는 조선인 <이규서>와 <연충렬>이다. 이들은 훗날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에게 붙잡혀 일제 경찰에 밀정한 행위를 한 것을 확인하고, 사살당한다. 이회영 선생의 죽음에 해방 된 조국은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당기념관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 같으면, 이회영 선생은 국보급의 인물이 되어 있을 분이다. 조국을 떠나지 않았으면 호시호강하면서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을 민족을 위해서 포기했다. 결국 그는 전 재산을 모두 팔아 가족을 굶기면서 까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조국 독립을 모색하던 그는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우리가 우당기념관을 탐방하고 그의 11대 직계 조상인 백사 이항복을 조명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강렬한 애국의 시심이 담겨 있는 시같은 가사의 신흥무관학교의 교가는 가슴을 흔든다.
< 1절 > 서북으로 흑룡대원 남의 영절의 / 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 좔좔좔 결치며 돈다< 2절 > 장백산 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 지옥의 쇳문이 온다< 3절 >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떴다
-석주 이상용-
■ 해공 신익희 고택
1956년 5월5일 서울은 울음바다였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정권 교체의 희망이 무너진 사람들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의 시신이 서울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수만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슬픔을 지닌 인산인해의 인파는, 마치 파도처럼 효자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막았다. 불상사가 속출했다. 경찰의 총기 발사로 2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한다. 청와대로 이어진 이 길은 아름답지만 슬픔이 넘실거리는 길이다. 이 길은 어쩌면 민족을 위해 죽어간 순교자의 길이다. 이 길에서 4,19혁명의 주체인 학생들이 피 흘리며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어가면서 보았을 푸르른 하늘은 여전하지만, 50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1956년 5월 해공 선생의 집을 찾아 가려고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리라. 해공 신익희 선생의 고택을 찾아 가는 날, 나는 그의 삶과 당시 한국의 정치사를 생각했다. 당시를 기억하던 선생님들 통해서 나는 신익희 선생의 죽음과 당시 정치사를 이해 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되면 신익희 선생 고택을 여러 사람들과 답사하고 그의 삶과 당시 정치사를 이야기 하는 희망을 간직하곤 했었다. 금년 이른 봄에 그런 기회가 드디어 왔다. 신익희 선생의 고택은 옛 진명여고 뒷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막다른 골목의 맨 끝집이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 된, 대지 47평에 건평 약 30평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5칸의 평범한 한옥이다. 19세기 와 20세기 초의 경기 지역의 도시형 한옥 형태이다. 이 집에서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5일 사망 직전까지 살았다. 국회의장을 지냈지만 평범한 한옥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5칸이다. 신익희 선생의 삶과 정치를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신익희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그의 일대기를 약술해 본다. 신익희 선생은 1894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성관립 외국어학교 영어과 졸업하고, 1912년 일본 조도전대학교 정경학부 입학하여 고학으로 학비를 조달하며 정세윤, 송진우, 문일평등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며 민족정기 선양한다. 1918년 최린, 최남선 등과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과 해외 독립운동단체와 동시에 궐기할 것을 모의한다. 기독교 대표 이승훈과 천도교 대표 손병희 선생의 협조를 받아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를 탐방한다. 이 때 3.1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3.1운동 거사를 설명하고 이시영, 홍범도, 김우진, 조소앙 등도 만나 거사를 준비한다. 1919년 2월말 귀국,3.1운동을 지휘하다 일경의 지명체포령을 피해 3월 19일 상해로 망명,4월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원에 선출된다. 이시영,조소앙 대한민국 임시헌장 기초위원으로 위촉받고 내무차장겸 내무총장서리, 의정원 법제분과위원장,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다. 1923년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국민군 중장에 위촉되어 우리 독립운동을 지휘하며, 1927년 중국 남경정부 심계원에서 도움을 받아 한중합작 전선을 도모한다. 1933년 김규식, 김원붕 등과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으며 1935년 신한독립당 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 등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조국광복을 맞아 임시정부요원의 귀국절차를 중국정부와 주중미군 당국과 교섭대표로 위촉받고 적극 교섭에 성공하고 1진을 출발시킨다. 자신은 11월1일 임시정부내무부장으로 요원들과 함께 2진으로 군산공항에 귀국한다. 1946년 국민대학교와 경남대학교를 창립하여 학장에 취임하고 6월1일에는 자유신문사장에 취임하고 대한체육회 회장에 추대 된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로 당선되고, 5월30일 국회부의장에 선출된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탄압을 무릅쓰고 당선되고 그해 12월 소위 사사오입개헌파동 의 충격으로 호헌동지회를 결성한다.
1955년 9월18일 재야정치인연합으로 민주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피선된다. 1956년 3월18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저 유명한 한강백사장에서 30만군중 당시 서울시민 150만에 유명한 연설을 한다. 5월 4일 호남유세차 호남행 열차로 전주로 가던중 하늘도 무심하여 5월5일 아침에 열차안에서 향년 63세로 서거했다. 5월5일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효자동 자택으로 행하던 중 애도하는 군중과 선생의 사인에 의문을 가진 공명선거촉진 전국학생들의 시위로 2명의 사망자와 2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700여명이 검거되었다. 그날 검거 구속된 분들이 동지회를 만들었으니 지금의 오.오 의거동지회다. 5월23일 전 국민의 애도속에 수유리 산 74-3 산록에 안장되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2년에 집약되어 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다. 부산정치파동이후 이승만은 총통시대를 준비했다. 민중의 삶이 파탄 난 것에
아랑 곳 없이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에만 몰두한다. 그 상징의 시작이 바로 4사5입 사건이다. 1954년 4사5입 개헌파동으로 자신의 3선 출마의 길을 열어놓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1년 반 동안이나 모략적인 정치작업을 했다. 해괴한 일도 만들었다. 1956년 3월 5일 개최된 제3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받자 돌연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박력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국토통일을 이룩해 주기 바란다”였다. 모든 국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 고단수 이승만 대통령의 여론 집중 쇼였다. 불출마 선언 이후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한다. 경무대 주변 지금의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 주변에는 관제 대모대가 집결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재출마를 탄원하는 대모가 연일 계속되었다. 경무대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은 그들을 기특하게 생각했으리라. 경무대 앞은 호소문, 결의문, 혈서를 쓰는 대모대로 북적거렸다.
급기야 1956년3월23일 “민심에 양보하여 불출마를 번복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승만의 이중성이 그모습 그대로 검증된 사건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악한 정치형태로 인해 사월 혁명에 의해 하와이로 망명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이승만의 번복 성명에 민주당과 혁신계 진보당은 이승만의 정치 쇼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단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신익희 선생과 장면 선생의 지지 세력들은 대립양상을 보였다. 또한 부통령 후보의 선정과정에서도 조병옥과 김준연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다. 다른 야당 계열의 혁심계 진보당 대통령 후보에는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는 박기출이 선임된 상황이었다. 그해 5월은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로 전국이 요동쳤다. 야권을 단일화하지 못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봉암은 책임정치의 수립, 수탈 없는 경제체제의 실현, 평화통일의 성취 등을 신익희 후보가 공약에 넣는 다면 대통령 후보를 사임하겠다고 발표한다. 민주당은 이를 받아드린다. 결국 신익희 선생은 야당 단일 후보가 된다.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는 선거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한다.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는 구호로 물타기를 했다. 신익희 후보의 선명성과 선거 구호는 서울을 시작으로 급속하게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대부분의 언론도 민주당에 동조했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급속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신익희 후보의 5월3일 서울 한강백사장 유세에는 무려 3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선거사상 처음 있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150만 명이었다. 신익희 선생은 이때“대통령은 국민의 심부름 꾼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또한 “국민의 심부름 꾼인 대통령이 잘 못하면 그를 국민들이 갈아 치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세장에 나온 국민들은 이 때 공명하게 선거만 한다면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지방이 문제였다. 민주당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신익희 선생은 호남으로 선거 유세를 떠난다. 1956년 5월4일 그날은 일요일 밤이었다.
부통령 후보인 장면 선생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5월5일 새벽 4시경 호남선 기차는 강경을 떠나 함열 근방을 지나 이리(익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신익희 선생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기차에는 의사가 없었다. 기관사에게 부탁하여 기차는 전 속력을 달려 이리역에 닿는다. 이리시의 병원에 도착하였지만 이미 신익희 선생은 숨을 거둔 뒤였다. 신익희 선생의 서거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신문의 호외가 낙엽처럼 뿌려지고, 사람들은 울음보를 터트렸다. 이때 유행한 노래가 <비 내리는 호남선>이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을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신익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비 내리는 호남선’은 전 국민을 울리는 유행가였다. 이 노래가 유행하자 당황한 것은 자유당과 경찰들이었다. 작사가 손로원은 경찰 수사관에게 끌려가 뺨을 맞으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손로원은 일제 때에는 절필하며 숨어 지낸 분이었다. 겨우 해방이 되어 <귀국선>, <물방아 도는 내력>, <페르시아 왕자> 등을 작사하고 있었다. 작곡가 박시춘이 1955년도에 작곡한 자료를 근거로 제출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작곡자 박춘석은 당시에 박단마 그랜드쇼의 악단장으로 있었다. 그는 목포공연을 위해 타고 다니던 호남선 열차에서 식민지 시절의 호남선의 애환을 떠올렸다. 그는‘비내리는 삼랑진’과 ‘이별의 부산 정거장’처럼 경상도 지역의 노래는 불려 지고 있는데, 호남선의 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작곡가 박춘석은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제목을 정하여 작사가 손로원 선생에게 가사를 의뢰한다. 그는 일제의 수탈과 질곡에 허덕이던 호남 사람들을 아픔을 기억했다. 호남선 기차를 이용하던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가사를 썼다. 박춘석은 가사를 보고 만족하여 가수 손인호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다. 손인호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 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수가 아니었다. 영화 녹음 기사였기 때문이다.
제1 야당의 후보 신익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이승만은 약 504만 표를 얻어 승리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득표율은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겨우 52%에 그쳤다.
부통령은 장면이 401만 표를 얻어 이기붕에게 승리했다. 신익희 선생이 살아 선거를 했다면,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이승만은 4년 후에 전 국민이 분노하여 일어선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시신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결국 신익희 선생의 죽음은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비극이었다. 만약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오히려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추앙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승자가 패자가 될 수 있음을 일러준다. 가끔 나는 <비내리는 호남선>을 들으면 신익희 선생의 죽음과 이승만 대통령의 죽음을 비교한다. 신익희 선생의 장례식에는 50만 명이 운집하여 가슴으로 조문을 했지만,이승만 대통령은 망명지 하와이에서 시신으로 돌아와 사람들의 외면속에 장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울 서촌 효자동의 신익희 선생의 고택과 골목길은 그의 삶과 죽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
- 하숙집터의 단상 □서론
윤동주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청년이 당해야 했던 정신적 고뇌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자유와 희망의 시로 승화하였다. 결백하고 지성적인 청년은 하늘의 별을 그리워했다. 맑고 순결한 시어를 조탁하며 한글과 민족을 하늘에 심었다. 삶이 고단하고 부끄러운 날이면 하늘을 보았다.
그의 삶은 짧았고 슬펐다. 마지막 그가 숨을 거둔 곳은 일본의 감옥이었다. 독립운동 협의로 일제는 그를 감옥에서 죽인 것이다. 1945년 2월16일, 28세의 젊은 청년은 서럽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누구인가. 윤동주다. 순국이었다. 죄가 있다면 빼앗긴 조국을 사랑한 죄였다. 당시 많은 대한의 젊은이들이 윤동주처럼 죽어갔다. 윤동주는 시를 썼다. 살아생전에 그를 시인이라 불러준 이가 없을 정도로 무명이었다. 고독했다. 그러나 순결하고 맑은 영혼은 하늘을 지향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칼날은 오히려 그가 좋아했던 하늘을 두려워했다. 맑고 순결한 시어를 창조하였다고 하여, 그가 독립의지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총과 칼을 들고 일제에 항거하는 것만이 독립운동은 아니지 않는가. 윤동주는 조용하지만 은밀하게 일제에게 pen으로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거룩한 저항정신은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자기 고백의 언어조차 일제는 위험하게 여겼다. 윤동주의 시어들은 전달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무서운 의식화로 받아 들여 졌을 게다.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참회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응하게 된다. 이것이 독립의식으로 발전하면 결국 일제에 투쟁한다. 이것이 일제 경찰이 그를 체포한 이유다. 윤동주는 죽는 날 까지 인쇄된 시집을 발행하지도 못하고 육필시집을 3권 만들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한글로 시집을 발행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적인 부활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고도 3년을 기다려야 했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 발행되었다. 이 시집을 읽은 해방 된 조국의 젊은이들은 가슴으로 울었다. 민족의 시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읽는 사람들에게 별을 가슴에 품게 만들었다.
식민지의 밤길을 걸을 때에 썼던 그의 시들은 순결하고 결백하여 감동을 준다.
삶과 시가 일치하였기에 민족의 등불이 되었다. 등불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이제 그의 시편들은 민족의 별이 되어 하늘에 떠 있다. 아직도 시련의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삶의 길을 평화롭게 인도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재단에 바쳐진 순교였다. 윤동주를 대표적인 민족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결국 그의 삶과 죽음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일은 민족의 역사와 문학을 탐방하는 기행이다.
□본론
1) 윤동주의 삶과 문학
조국의 식민지 상황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그는 아마도 그 체제에 순응하면서 잘 살았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부끄러운 현실을 알았기에 펜을 들었다. 참회해야 하는 부끄러움을 그냥 알았던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민족의식이 있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이해해야 한다. 윤동주 시인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1917년 12월 30일 태어났다. 북간도다. 윤동주의 삶의 궤적을 찾기 위해서는 북간도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좁게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사이 섬을 간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이주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간도의 범주도 넓어진다. 계속해서 북방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곳은 옛 고구려, 발해의 영토이므로 우리 땅이라는 의식이 많았다. 간도에는 서간도와 동간도, 북간도가 있다. 서간도는 백두산 서편이다. 달리 말하면 압록강 건너편과 요령성 봉성시 부근 봉황성 주변까지다. 동간도는 백두산과 송화강 상류지역의 서부지역이다. 북간도는 두만강 인접 지역과 동부지역이다.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가 모두가 북간도 땅이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북간도는 그의 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윤동주의 고향마을 명동촌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다. 서북쪽으로 선바위란 삼형제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절경이다. 그 산 정상에는 성터의 흔적이 있다. 선바위 언저리는 명동촌 사람들의 놀이터였다. 동쪽에서 뻗어 내린 장백산맥은 오봉산과 살바위란 험한 산들 휘돌아 명동촌으로 다가왔다. 명동촌에서 바라보면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유다. 윤동주는 초등학교 방학 때 선바위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필자는 1989년 가을 날 이웃에 살던 문익환 목사에게 직접 윤동주와 그의 유년 시절이야기를 들었다. 명동촌 선바위로 윤동주와 함께 소풍 같던 이야기도 했다. 당시 사진도 보여 주었다. 문익환 목사는 유년 시절 윤동주의 친한 친구였다.
윤동주의 생가는 5칸의 기와집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서 있었다.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약 30그루의 살구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이었다. 동쪽 쪽대문을 나서면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큰 뽕나무가 서 있었고, 교회당과 초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이 우물은 시 <자화상>의 작품의 무대이다. 그는 왜 이곳에서 태어났을까. 만주는 함경도보다 농사짓기에 땅이 비옥했다. 회령과 종성 등지에 살던 네 가문의 어른들은 모여 함께 두만강을 넘기로 약정한다. 회령과 종성은 두만강변의 도시였다.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정리한 4가문의 어른들은 모두 141명의 식솔들과 더불어 1899년에 두만강을 건넌다. 당시는 국경이 지금처럼 확실하지 않을 때다. 목숨을 걸고 떠난 이들에게는 잘 살아보자는 강한 소망이 있었다. 1899년 2월 찬 바람이 불던 날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 김약연, 남종구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 네 가문의 식솔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도착한다.
당시 간도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있었다. 청나라는 간도에 사람들이 사는 것을 금했다. 그들의 조상들이 터전을 잡았던 장소였기 때문에 신성시했다.
그러나 간도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우리 역사를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은 작은 영역부터 우리 땅으로 만들 작정을 하고 떠난 것이다. 조선의 불꽃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어떤 지배에서도 벗어나 자유롭게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마음들이 간도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은 기독교가 일찍 전해졌다.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에게 교육과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1900년 두만강을 건넌다. 18명의 식구들과 함께 명동촌에 자리를 잡는다. 윤하현은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아들인 윤영석을 북경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윤영석의 아들이 윤동주다. 윤동주는 장로교 유아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집안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당시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김약연 선생이 활약하던 이 지역은 이미 독립운동의 거점 같은 장소다. 자연적으로 그는 민족적인 정기를 가슴에 새기면서 자랐다. 1931년(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김약연 선생(1862~1942)은 회령에서1899년 이주해 온 분으로 1909년 기독교인이 된다. 청국인에게 땅을 구입하여 조선인 마을을 만든 장본인이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은 1906년 10월경 이상설 등이 용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후 문을 닫는다. 이후에 명동촌의 명동서숙(明東書塾)설립된다. 김약연 선생에 의해서다. 그는 명동서숙을 설립하고 명동소학교 명동중학교를 세운다. 또한 교회당을 신축하고 서울에서 교사를 초빙한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7) 선생은 1910년 기독교인이 된다.
윤하현 선생은 김약연 선생에 버금가는 선각자였다. 김약연 선생에게 윤하현 선생이 없었다면 “그의 지도력은 그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이 말을 문익환 목사의 모친에게 직접 들었다. 김약연 선생의 여동생 김용과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혼례를 올린다. 명동촌의 경사였다.
윤동주는 두 누님을 잃고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10세까지 이름은 해환(海煥)이었다. 동생 윤일주는 달환(達煥), 나이 어려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었다. <해>와 <달>과 <별>을 첫 자에 넣어 이름을 지었던 부모의 생각은 그를 시인이 되게 만들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육필시집을 만들기도 했던 윤동주의 이런 결과물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윤동주는 9세 때인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김약연 선생이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조선역사'였다. 같은 반 학생이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이었다. 이 학교에는 항상 태극기가 게양 되었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 졸업생 14명에게 주어진 선물은 김동환의 <국경의밤> 시집이었다. 학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십리 떨어진 대립자에 있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한다. 그곳에서 1년간 수학한다. 그의 대표시 <별 헤는 밤>에서 “패(佩),경(鏡) 옥(玉)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는 시어는 이 학교에서 만났던 중국인 소녀들과의 추억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유년기를 보낸 윤동주에게는 자연히 독립 정신이 뇌리와 가슴에 흐른다. 당시 가족들과 이웃들의 화두는 민족과 독립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는 별'이다. 이런 이유로 그를 천체 미학의 시인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민족과 독립, 희망의 상징어를 별로 만들었다.
조국 광복은 자신이 살아서 보기에는 너무 멀리에 존재하는 별이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서시의 '주어진 길'은 자신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 재물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그의 시는 아름답고 맑고 순결하지만 내면에는 이런 민족적인 자각이 꿈틀거리며 흘러간다.
1932년 4월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로 진학한다. 가족들도 모두 용정으로 이주한다. 자식교육을 위해서였다. 생가도 이때 매도되어 다른 사람들이 살다가 1981년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 마을 명동촌의 유년시절의 삶과 풍경들을 동시에 담았다. 생가는 1994년 8월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용정문학연맹과 연변대학연구소 기타 많은 이들의 성원으로 복원되었다. 윤동주가 15세까지 살았던 집이니 그의 문학소년 시절의 꿈과 희망이 싹튼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집에서 어린이잡지 ‘아이생활’과‘어린이’를 구독하여 읽었다. 시인의 꿈을 키우던 생가가 문학 산실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으니 생가는 당시의 추억이 묻어 있는 집이다.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인 소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다. 그 무렵 명동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가 성행했다. 평화를 갈구하던 가족들은 윤동주의 중학교 입학에 즈음하여 용정으로 이사를 한다. 명동촌은 정든 땅이었다. 용정은 명동촌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였다.
명동촌은 이념의 갈등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몰아 붙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을 살해하려고 했다. 더 이상 이주를 미를 수 없었다. 용정가 제2구 1동36호 20평 정도의 초가집으로 이사를 한다. 윤동주는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1932년은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앞 세워 괴뢰국을 만든다. 푸이는 허수아비였다. 결국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된다. 북간도의 위기였다. 북간도의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진중학교와 그들이 경영하던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았다.
은진중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캐나다 선교부에서 경영했다. 학교 분위기는 일본의 간섭으로 부터 자유로웠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에서 축구도 잘 했고 교내 잡지를 만드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웅변도 잘 했다.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을 하기도 했다. 동급생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숭실중학교에 편입한다. 그러나 1936년 봄 신사참배로 숭실중학교는 폐교된다. 이 무렵 문학에 심취한다. 도서관에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빌려 자신의 필체로 필사한다. 신문을 스크랩하고 시를 습작하며 열심히 독서한다.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카톨릭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한다. 중학교 때 그의 서가에는 정지용시집, 변영로의 <조선의 마음>, 주요한의 <아름다운 새벽 >, 김동환의 <국경의 밤>, 한용운의 <님의침묵>, 양주동의 <조선의맥박>, 이은상의 <노산시조집>, 윤석중 동요집이 꽃혀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입학당시 그의 서재는 약 800권의 장서로 벽면이 가득했다.
예수의 탄생일 성탄절에 최초의 시 작품이 탄생한다. <초한대 >,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는 바로 1934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쓰여졌다. 이듬해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로 3학년에 편입한다. 은진중학교에서 4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였지만 편입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한 학년을 낮춰 편입한다.
윤동주는 어렵게 편입했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1938년 2월에 졸업한다.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는 용정중학교의 전신이다. 윤동주 시인은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을 5년 넘게 다녔다. 용정중학교 교정이 윤동주 문학기행의 산실이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교정의 윤동주 시비는 1992년 9월10일 동아일보와 서울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하여 세워졌다. 윤동주는 1938년에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반대는 심각했다. 문과입학을 반대에 윤동주는 단식으로 호소했다. 조부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부친을 설득하여 윤동주 연회전문 문과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이양하 교수에게 영시를 배우고 최현배 교수에게 조선어와 민족의식의 깨우친다. 그의 시는 민족적이며‘슬픔의 미학’으로 변모한다. 식민지의 상황인식과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동시를 쓰던 천진무구함에서 벗어나는 때는 이 무렵이다. <슬픈 족속>에는 당시의 그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을 표현한다. 불과 4행이지만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로 모두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그런데 흰 수건은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은 거친 발에 걸리고, 흰 저고리는 슬픈 몸집을 가리고 있다. 백의 민족인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 된 것이다. 나이 22세 때에 비로소 통렬한 자기 성찰을 하며 민족을 가슴에 담는다. 절망의 정서가 고개를 숙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면, 희망은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다. 결국 절망과 희망은 가까운 거리에 존재한다. 절망의 정서는 슬픔을 동반하며 지상의 것들을 추구한다. 동주가 발견한 희망의 상징어 들은 모두 지상에 존재한다. 그것은 하늘과 별과 달이다. 그는 희망의 길을 준비했다. 1938년 5월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꿈을 키우고 있었다. 걷기를 좋아했다. 그는 연희 동산을 거닐며 절망의 길이 <새로운 길>이 시 같이 되어 주길 기원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윤동주 시인의 시‘ 새로운 길’ 전문
이 시가 쓰여 지던 1938년 당시 연희전문학교 정문 앞에서 서강 쪽으로는 논이었다. 자신의 고향 북간도를 그리워하며 아름다운 조국의 농촌을 사랑했다. 윤동주는 논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그는 산책을 좋아했다. 윤동주의 시작품은 모두 110여 편이다. 이중 35편이 동시이다. 지금도 연세대 교정에 남아 있는 기숙사 건물은 고색창연하다. 지금은 연세대재단사무실로 쓰고 있는 기숙사 3층 지붕밑 방에서 송몽규(1917~1945), 강처중(1916~ ?)과 같은 방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은 전선으로 끌려갔다. 일제는 전쟁물자 수급에 혈안이 되었다. 당연히 그 파급이 연희전문학교 기숙사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숙사의 식단이 열악해지기 시작하자 윤동주와 후배 정병욱은 하숙집을 찾아 나선다. 당시 윤동주는 4학년 정병욱은 2학년이었다. 1941년 5월부터 시작된 누상동 하숙생활은 행복했다. 그 집은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이었다. 김송의 부인 조성녀는 성악가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며 음악을 듣고 문학과 삶에 관해 정담을 나눴다. 지금의 수성동계곡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일본 형사들이 소설가 김송과 윤동주의 방을 가택수색하며 책의 목록을 기록하고 편지를 압수해 갔다. 그들이 북아현동으로 하숙집을 옮긴 이유이다. 그의 대표시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별헤는 밤>과 <서시>가 누하동 집에서 하숙생활을 할 때 쓰여졌다. 지금 그 하숙집 담벽에는 <윤동주하숙집터>라는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그 고샅길이 끝나는 곳이 수성동계곡이다. 1941년 11월5일에 쓴 윤동주 시인의 시 <별헤는 밤>을 읽으면 언제나 마음이 숙연해진다. 당시 그의 하숙생활도 형편이 좋지 못했다. 일 년 후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온다. 학교 후배인 정병욱과 친숙한 생활을 한다. 훗날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원고를 간직하였기에 광복 후에 시집을 출간 수 있었다. 1948년 육필시집을 세상에 알리며 무명시인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다. 윤동주 시인의 육필 시집은 3부를 똑 같이 써서 묶었는데, 1부는 이양하 교수, 1부는 연전 후배 정병욱, 마지막 1부는 윤동주 자신이 보관했다. 이양하 교수는 이 시집이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인쇄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했다. 윤동주는 연전 졸업 기념으로 자신의 시집 77부를 자비 출간하려고 했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만나 문학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문헌이 없다. 다만 1948년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정지용 시인이 써 준다.
그러나 1950년 정지용 시인이 행방불명되어 1955년 발행된 시집에는 그의 서문이 삭제되었다. 당시 좌익과 우익의 이념은 서로에게 증오와 두려움의 존재였다.
2) 윤동주의 죽음
1941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으로 광분한다. 조선의 학제는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진다. 그가 대학을 1941년 12월 27일에 졸업하게 된 이유이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하여 1942년 4월 2일, 동경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2년 여름방학 때 그는 북간도 용정 고향집을 방문한다. 2학기가 시작 될 때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로 전학을 한다. 당시 그의 사촌 송몽규와 교토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경에서 교토 행은 결국 죽음의 길이었다. 1943년 7월10일 독립운동 협의로 송몽규가 검거되고, 윤동주도 7월14일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특별고등경찰에 독립운동 협의로 체포된다. 윤동주는 교토의 카모카와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검사국 감옥의 독방에 넣어진다. 그가 일본에서 쓴 시와 산문 대부분이 이 무렵 압수되어 유실된다. 처음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 조사관은 윤동주 앞에 많은 서류를 던진다. 그 서류는 일 년 동안 일제 경찰이 자신을 미행하고 엿들은 정보를 그대로 기록한 문서였다. 윤동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자신의 방에 불이 몇 시에 꺼지고 켜지는 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송몽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세하게 기록한 서류에 기가 질렸다. 그러나 윤동주가 일제에 어떤 행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는 윤동주에게 2년형을 선고한다. 당시 그는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문화운동을 하고 싶어했다. 연극을 통해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문화운동을 더 두렵게 여겼다. 교토지방재판소는 윤동주에게 치안유지법 위반 협의로 구속한다. 큐슈(九州)의 후쿠오카 형무소 생활은 비참했다. 독방에서 그는 깡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쪽으로 연명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시 한국인 수감자들은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었다. 그의 당숙 윤영춘의 증언이 그것이다. 윤영춘은 윤동주가 사망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윤동주 부친과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운구한 분이다. 송몽규를 감옥에서 만났는데 그는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치고 있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5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주사를 맞고 있었다. 그 대열에 송몽규가 줄을 서 있다가 다가섰다. 송몽규의 몰골은 참혹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가 하는 인사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 하니 송몽규는 간신히 들릴 목소리로 “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고 한다. 당시 윤동주 같은 시기에 감옥살이를 했던 김헌술씨도 같은 진술을 했다. 그는 5~10cc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며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고 증언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수인번호를‘모기소리 같은 가냘픈 소리’로 복창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2월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시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 윤일주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망통지의 전보가 온 날은 일요일이었다. 식구들은 다 교회에 출석하고 나와 동생이 집을 보는 고요한 오전, 날아든 전보는 <2월16일 동주 사망,시체 가지러 오라> 였다." 윤일주는 교회로 달려갔다. 예배를 마친 교인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윤동주 집은 삽시간에 초상집이 되었다. 북간도로 윤동주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부친과 삼촌 윤영춘은 길을 떠난다. 분노의 길이었다. 그러나 조국을 잃은 자식들이 모두들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북간도에서 일본을 가기는 어려운 상황인데 당시는 어떻게 했겠는가. 동주의 시신은 화장을 하여 유골로 가져왔다. 동생 윤일주는 용정에서 2백리 떨어진 두만강변의 한국 땅 상삼봉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아버지로부터 시신을 넘겨받아 두만강 다리를 건넌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1945년 3월6일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다. 조국해방을 불과 5개월 남겨두고 그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북간도로 돌아왔다. 집 앞뜰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북간도가 울었다.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의 집례였다. 놀라운 사실은 이 장례식에서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는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눈발 날리는 하늘과 산천을 바라보았다. 조국해방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의 민족의식과 품격에 고개가 숙연해 진다. 장지는 용정의 동산으로 결정되었다. 그해 5월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시비를 세웠다. 그의 가족들이 시인이라고 제일 먼저 인정하였다. 윤동주가 운명한 시간은 새벽이었으며, 자신이 4년 전에 썼던 시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부활을 알리는 <새벽이 올 때까지> 란 시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윤동주 시인의 시 ‘새벽이 올 때까지’ 전문
조선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민족을 위해 순교한 것이다. 그들의 고결한 피는 민족의 재단을 더욱 순결하고 결백하게 만든다. 부활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민족이 존재하는 한 그의 시들은 읽혀질 것이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다시 살아났다. 윤동주 그는 27년 2개월의 순결한 삶을 민족의 재단에 바쳤다. 그의 죽음은 억울하고 슬프지만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이미 그의 시를 통해 별과 하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에 담겨 있는 그의 맑고 순결한 영혼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 결론
윤동주 시인의 문학은 정직성, 민족의식,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별을 노래한 시인이다. 이 별은 희망의 상징어다. 밤이라는 일제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국 광복의 별은 너무나 멀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그는 고독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조국의 독립을 기다렸다. 그가 일제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야 조국은 독립되었다.
맑고 순결한 그의 영혼의 시어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시를 읽으면서 하늘의 별을 본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가슴에 담는다. 시는 일상의 삶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어들은 우리 삶을 비추는 햇살 같은 존재이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기행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그의 시들을 다시 탐구해 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그의 삶과 문학을 인식하면, 감동의 흔들림으로 가슴이 두근 거릴 수도 있다. 가슴의 흔들림은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 고통은 행복한 삶으로 인도할 것을 나는 믿는다. 그의 삶과 문학을 가슴으로 느껴보기 위한 시 읽기와 기행이 의미있는 이유다. <서시>, <참회록>, <쉽게 쓰여진 시>는 윤동주 시인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게 한다. 그의 짧았던 28년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화두다.
따듯한 가슴을 지니며 이웃과 민족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의 삶을 따라가 보자. 그의 짧은 시어들은 당신의 삶을 더욱 맑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을 읽은 독자들도 맑고 욕심 없는 삶에 행복을 느끼길 기원한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통하여 아름답고 소박한 삶을 얻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윤동주 시인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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