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六章 거성(巨星)과 신성(新星) 3
해남파 수련총 무인들이 정은구를 빙 둘러쌓다.
움푹 파인 분지(盆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해남
파 무인들뿐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여족인, 한인 가릴 것 없
이 분지 위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분지 안에는 장막(帳幕)을 펼쳐 놓아 뜨거운 햇살을 막고,
편히 앉아서 관람할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져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거, 조금만 더 들어갑시다."
"입 닥치고 앉아있어!"
"에이. 여기서야 자세히 볼 수 있나, 원."
"닥치지 못하겠어!"
"알았소. 닥치면 될 것 아뇨."
정은구 꼭대기는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혼잡한 시장을 방불케 했다.
"장문인이닷! 장문인이 직접 왔어."
"그럼, 이 사람아. 이게 어디 보통 비무인가."
"저기 뚱뚱한 사람이 석가주지?"
"어디?"
"저기 말야. 키 작고 뚱뚱한 사람."
"응, 맞아. 석가주도 왔네."
"석가주뿐인가? 가주들이란 가주들은 죄다 온 것 같은데?"
사람들은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서로를 밀쳐댔다.
해남십이가 가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해남도에 살면서도 십이가주를 보지 못
한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단의 사람들이 정은구로 오르
고 있었다. 그들은 해남파 무인들이 군중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쳐 놓은 새끼줄 안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많은 사
람들의 눈길이 일신에 쏟아지고 있건만 그들의 행동은 여유가
넘쳐흘렀다. 당연하다. 군웅들의 눈길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
들이 해남십이가 가주들인 것이다.
이들이 바로 해남도를 지배하는 왕이니까.
선두에는 해남파 장문인이 석가 가주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면서 걸어왔다.
검은 피풍에 갓이 넓은 방갓을 쓴 추운단이 장문인의 뒤를
따르며 호위했다. 그들의 숫자는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을 뚫고 장문인 곁으로 다가설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이상한 일이라면 추운단이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
그들은 암중에 숨어 호위하는 그림자들이지 밝은 태양아래
모습을 보이는 무인들이 아닌 것이다.
장문인이 지나고 숨을 열 번쯤 들이쉴 시간이 지난 후, 거
목처럼 눈에 확 들어오는 거구, 범가주와 유사의 온화한 기풍
을 지닌 유가주가 걸어왔다.
다음은 중오가 가주들 중 세 명이 모습을 보였다.
십이가의 가주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뜻한 하늘색 무복을 입고 가슴에 제비 문양을 새겨 넣은
사람이 해남도의 모든 도기(陶器)를 장악하고 있는 악가(岳
家)의 가주 악빈(岳彬)이다.
악빈은 낙성검법(落星劍法)의 달인이다.
그 옆에 진붉은 무복을 입은 사람, 눈이 너무 적어 감은 듯
이 보이는 실눈을 가진 사람이 박가(博家)의 가주인 박홍(博
鴻)이다. 박가는 대력검 검급을 잃어버렸다는 오명(汚名)을
안고 있지만, 정화방(情火房)이라는 고급 기루를 일곱 채나
가지고 있는 거부(巨富)다.
조가주 조후는 인상이 특이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이하게 굵고 진한 눈썹에 코도 크고, 입술도 두터웠다.
그는 남해삼십육검의 뒤를 이을 기재를 찾는답시고 해남도
전역을 자주 돌아다니는 까닭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았
다.
조가주는 전임 조가주에 비해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약하
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는 해남오지를 뽑는 비무대회가 열리
기 전, 두 명의 기재에게 검을 주었으나 단 한 명도 해남오지
에 오르지 못했다.
"나는 가능성을 봤을 뿐이야. 두고 보라지."
하지만 조가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가의
무인들까지도.
중오가 중 삼가의 가주들로부터 한참 떨어져서 오는 사람은
약이가의 가주들이다.
염왕채(閻王債:고리대금)를 움켜쥐고 있는 강가(姜家)의 가
주, 강청(姜 )과 염색으로 일가를 이룬 단가의 가주인 단적
(段積).
강가는 마수광의에게 잔월검법을 잃어버린 전례가, 단적은
가주의 둘째형인 단대인이 흑월에게 암살 당한 전례가 있어
얼굴을 들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범가주의
형도 흑월에게 암살 당했다는 것.
십이가주 중 세 사람이 빠졌다.
비가주는 적엽명이 대신할 것이고, 오늘 비무의 당사자인
전가주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하가주 하금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가주는 아무런 종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가에서도 모든 석수들을 동원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지만, 본문에 다녀온다고 떠났던 하가주는 하늘로 솟은 듯
종적이 묘연했다.
본문도 방관할 수 없어 비파까지 동원하여 해남도를 이 잡
듯 뒤지고 있지만 본인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를 찾을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해남오지도 모습을 드러냈다.
해남오지는 많이 오지 않았다. 우선 건곤검 한혁이 보이지
않았고, 유소청의 살인에 충격을 받고 해남오지를 그만 둔 금
잔서생 유광도 오지 않았다. 전가의 전방은 가주가 시합을 하
는 마당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무인을
보내 '혈이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말 한 마디를 전했다고 한
다.
십삼대 해남오지는 출발도 하기 전에 흩어졌다.
정은구에 모습을 보인 사람은 단 세 명뿐이다.
한백, 범위, 석불.
한백은 여전히 천하제일 미장부였고, 범위는 뼈만 남은 듯
앙상한 몰골이어서 과연 한백과 같이 유소청을 다투었던 범위
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석불도 왔다. 그는 한백과 무엇인지 다정한 말을 나누고 있었다.
일단의 무리는 분지로 들어가 미리 장막을 쳐 놓은 곳에 앉
았다.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 오시초(午時初)에 들어설 무렵, 사람
들은 또 다시 술렁거렸다.
이번에는 관군이었다.
관병 이십여 명이 호위를 하고, 한 가운데 관병 네 명이 가
마를 매고 있는데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가마 위에는 검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관원이 비스듬히
누워서 부채를 부쳐댔다.
"경주자사지? 맞지?"
"응."
"웬일일까? 무인들 비무를 구경나오고."
"이 사람아, 전가주가 치르는 비무 아닌가. 나오는 게 좋다
고 판단했겠지."
사람들은 관부와 해남파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고 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관부에 호소하지 않는
다. 해 봤자 치도곤을 당하는 쪽은 오히려 자신들일 테니까.
"퉤엣!"
누군가 땅바닥에다 가래침을 힘차게 뱉었다.
그러나 관병 한 명이 고개를 돌리자 가래침을 뱉은 자는 사
람들 속으로 슬그머니 숨어버리고 말았다.
분지 안으로 들어간 경주자사가 해남파 장문인과 인사를 나
누는 광경이 보였다. 경주자사는 장문인뿐만 아니라 자리에
배석한 가주들과 일일이 포권지례를 취한 후, 장문인과 나란
히 앉았다.
"콱 전귀(戰鬼)가 이겨 부려라."
누군가 배알이 뒤틀린 듯 중얼거렸다. 물론 해남파 무인들
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도 듣
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하하하!
"하하!"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수련총 무인이 눈을 부릅떴다.
"아니오. 우리끼리 잡담 좀 했소."
누군가 시원한 소리로 대꾸했다.
수련총 무인은 '떠들지들 마.'라는 한 소리를 하고는 고개
를 돌려버렸다.
"나는 여기 있을래."
"그래. 그게 좋겠어."
유소청도 적엽명도 짧은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오늘 아침, 적엽명은 두 벌의 옷을 놓고 망설였다.
한 벌은 비가에서 급히 달려온 목부가 내놓은 옷으로 화화
부인이 밤을 새워가며 지은 옷이라 한다. 옷감은 좋은 편이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밝은 청색에 무엇보다 처음으로 가져보
는 무복(武服)이었다.
또 한 벌은 황함사귀가 내 놓은 마의(麻衣)였다.
해남도에 들어왔을 때 입었던 옷으로 황함사귀가 깨끗이 빨
아서 몰래 숨겨온 듯 했다.
적엽명은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마의를 입었다.
홀가분했다.
철없이 날뛰던 팔 년 전 그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천여
마리의 말들 중에서 아무 말이나 집어타고 초원을 달리던 그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편해 보인다."
유소청이 해준 말도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어머님이 지어주신 옷…… 꼭 입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화화부인이 지어준 옷은 곱게 접어 황함사귀에게 건네주었
다.
그의 허리춤에는 취옥검이 꼽혀 있었다.
그래도 묵검이 손에 익었지만 유소청의 간절한 눈빛을 저버
릴 수 없었다.
"간다."
적엽명은 한 마디만 던진 채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걸어갔
다.
"죽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유소청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서 그렁거리던 눈물은 기어코 방울져 떨어졌다.
한백이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안 죽을 겁니다. 무운(武運)이 무척 강한 분이니까."
"죽으면 나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자식, 팔 년
이나 지났는데 왜 나타나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거야."
호귀 류가 무릎사이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따라가지 않았다.
황유귀 술과 수귀 탄은 아침 일찍 정은구에 올랐다. 그들은
조망(眺望)이 좋은 자리를 골라 앉아있을 게다.
적엽명은 점 하나로 변해 점점 멀어졌다.
"전귀다!"
"전귀! 전귀가 왔어?"
여족인들은 적엽명이나 비건이라는 이름보다 전귀라는 그들
의 작호를 더 좋아했다.
"전귀, 꼭 이겨!"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자 누군가 '전귀, 이겨라!'하는 말을
다시 소리쳤고, 그 소리는 물결처럼 군중 사이로 퍼져갔다.
"전귀, 이겨라!"
"전귀, 이겨라!"
적엽명이 한 걸음씩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전귀, 이겨라!'
라는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울려 퍼졌다.
"조용히 햇!"
"조용히 못하겠어!"
수련총 무인들이 당황해서 검을 뽑아들었지만 이미 고삐 풀
린 망아지처럼 흥분을 더해 가는 군중 앞에서는 힘없는 속삭
임에 불과했다. 위험했다. 이런 현상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과
똑같은 현상이지 않은가.
그 때였다.
꽈앙!
엄청난 폭음이 정은구 정상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죽였다.
"뭐야? 무슨 소리야?"
"화약이 터지는 소리 같은데……"
사람들이 일단 조용해지자 수련총 무인 중 한 명이 득달같
이 소리쳤다.
"조용히 햇! 지금부터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는 가차없이
목을 베어버리겠다."
소리를 지른 무인은 힘차게 검을 휘둘러 보였다.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여족인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물러섬은 또 다른 물러섬을 불러온다. 여족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고, 계획되지 않은 즉흥적인 흥분은 쉽게 가라앉
았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도 분지 안에 앉아있던 무인들은 동요
하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화약을 묻어놓았다는 사
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게다.
적엽명은 새끼줄을 따라 빼곡히 늘어서 있는 여족인들을 보
며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 광채를 잃은 눈동자…… 햇살에 그
을려 검은 색을 띠고 있는 피부……
적엽명은 탄을 이해했다. 우화를 이해했다. 자존을 위해서
목숨마저 과감히 버리는 우화대원을 이해했다. 오래 전부터
이해했다.
해남파가, 십이 가문이 조금만 나눠준다면……
부질없는 소망이다.
한족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한인들은 소수민족(少數
民族)이 구박받는 것을 당연시한다. 옛날부터, 손가락으로 헤
아릴 수 없는 먼 옛날부터 고정되어온 사고(思考)가 하루아침
에 바뀌겠는가.
중원도 상황은 똑같다.
그런데도 중원이 조용한 것은 한인들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
다. 감히 '찍'소리 한 마디 못할 만큼 많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도 구박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산다.
해남도는 여족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이 문제다. 사람
은 많으면서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정은구를 딛고 선 적엽명은 잠시 분지 안을 쳐다보았다.
전가주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순간, 분지 안을 들여다보던 적엽명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
났다.
해남파 장문인과 가주들이 올 것은 예상했지만 경주자사는?
그는 천천히 분지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적엽명은 공손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많이 변했구나. 강해졌다는 것을 알겠어."
한민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인사를 받았다.
"진작 찾아뵈어야 한다는 것이 늦었습니다."
"허허허! 찾아뵙기는…… 해남파 사람이 아니니 강요할 수
없지."
한민은 은근히 해남파 무인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번 중양절까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민의 눈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적엽명의 말뜻은 무엇인가! 해남파 무인이 되는 것도, 되지
않는 것도 자신이 결정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사실이 그렇다.
팔 년 전에 추방을 당한 몸이지만 팔 년이 지났으니 지난 죄
는 사면되었다.
파문……
그것은 돌아온 자의 뜻에 맡기는 것이 해남파 규율이다.
네 피가 의심스러우니 안 된다는 말은 지금에 와서는 못할
소리다. 적엽명은 분명히 비가주의 둘째 아들 자격으로써 해
남파에 입문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 자격으로 비가를
재건하고 있다.
"중양절…… 기대하지."
한민은 빙긋이 웃었다.
"전검을 익혔다고 들었다. 보자."
범가주 범장은 말 한 마디로 끝냈다.
유가주 유질은 단지 고개만 끄덕였다.
적엽명은 그것만으로도 유소청이 짊어진 짐을 덜어준 느낌
이었다. 외면하리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쌀쌀맞게 비웃던가.
유가주의 눈은 적엽명의 허리춤에서 떠나지 않았다.
취옥검, 당신의 딸이 지녔던 검.
소문을 사실로 확인시켜 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요부(妖婦)가 된 유소청이 밤마다 적엽명을 찾아간다는 소
문.
그러나 유가주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이내 꾹 다물고 말았다.
아홉 가주에게 일일이 인사한 적엽명은 십이대 해남오지에
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고, 그 다음 옛 친구들 앞에 섰다.
"형을 벤 솜씨가 어떤지 구경해 두지."
석불은 적의를 드러냈다.
웬만해서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석불이다. 그는 늘 웃는
얼굴을 했고, 어쩌다가 웃지 않는 날이라도 있으면 어딘가 아
픈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았던가.
석불이 웃지 않는다.
그들 사이는 그렇게 변했다.
적엽명이 육삭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다음부터, 적엽
명에게 패배를 당한 다음부터 그들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로
적엽명을 꼽았다. 겉으로는 '그 까짓 놈!'하고 무시했지만 본
인이 알게 모르게 적엽명은 늘 그들과 함께 했다.
"마음을 다쳤구나."
"후후!"
범위는 잘게 웃었다.
"어느 쪽인지 알고 싶다. 검인가? 사람인가?"
"……"
범위가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곧 찡그린 인상을 풀었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부탁이 있다. 사람 때문에 다쳤다면……"
"다쳤다면?"
"내가 죽고 난 다음…… 부탁한다."
"네가 죽지 않으면?"
"……"
"후후! 일방적이군."
"너에게는 이런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부탁한다는 말은 들어주겠다. 그 취옥검도 내 손으로 거둬
돌려주겠다. 그리고…… 네가 대답하지 못한 말도 해주지. 네
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이겠다. 사람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이제는 검이 문제니까."
"하하하! 그 부탁, 내가 들어주면 안 될까?"
한광이 호쾌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전검을 익혔다고?"
한광이 갑자기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적엽명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전검을 익혔으면 이겨야지. 안 그래? 전가주 따위에게 진
다면 내가 무척 실망할 거야. 또…… 듣자듣자 하니까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인데 나도 소청이를 좋아해. 아직 건드리
지는 않았지? 후후후! 여인 중에 가장 예쁜 여인이 소복을 입
고 우는 여인이야.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픔에 젖어있는 여
인…… 나는 그런 여인을 꼭 한 번 안아보고 싶었어."
적엽명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러나 한광은 이미 등을 돌리고 저만큼 멀어진 다음이었
다.
"하하하……!"
한광이 웃는 소리만 귓전을 울렸다.
경주자사에게는 특별히 공손하게 인사했다.
경주자사는 애써 외면했다. 해남파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
고 있는 자사로써는 적엽명에게 인사를 받는다는 게 찜찜했으
리라.
좋은 기회다. 전가주를 이긴다면 경주자사에 접근 할 수 있
는 좋은 기회. 그러자면 깊은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전가주가 모습을 보인 것은 해가 중천에서 기울어질 무렵이
었다.
그는 새끼줄로 길을 만들어 놓은 곳으로 오지 않았다. 여족
인들이 빼곡이 앉아있는 틈새를 비집고 나타난 전가주는 바윗
돌을 성큼성큼 건너뛰며 다가왔다.
적엽명과 전팽은 일 장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적엽명은 존장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취옥검이구나."
"네."
"파랑검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만일을 생각해 형님에게 넘겨드리고 왔습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졌구나."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뿐입니
다."
"궤변."
"……"
"전검이 무엇이냐?"
"어떤 사람이든 초식을 전개할 때는 허점이 있기 마련입니
다. 제 몸은 허점에 기민하게 반응합니다."
"검이…… 아니고 몸이냐?"
"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다정하게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이 좋은 사제(師弟)간에 정담
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리라.
"검과 몸이 하나이면 검신일체(劍身一體). 그러나 검을 떠
나 보내고 나 홀로 고독히 섰으니 다시 돌아왔구나. 검은 검,
나는 나. 음……! 반본환원(返本還源)의 경지를 터득했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전가주가 무엇을 묻든 적엽명은 공손했다.
"좋은 창이다. 내 검은 알고 있겠지?"
"네. 지극히 지고한 경지에 있는 방패입니다."
"창과 방패라. 허허허!"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가주는 전가팔웅을 벤 것에 대하여 질책하지 않았다. 적
엽명도 변명하지 않았다.
이윽고, 누가 먼저라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발검술(拔劍術)
로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아!"
장막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 탄성을 터트렸다.
취옥검은 검신의 길이가 두 자 네 치다. 반면에 비룡은 석
자 세 치. 비룡이 월등히 길다. 검집도 취옥검은 넉넉한 여유
가 있으나, 비룡은 검집의 폭이 좁아 발검하기가 용이하지 않
다.
똑같은 순간에 검을 뽑아들었다는 것은 전가주의 검이 조금
빠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막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후욱!'
적엽명은 가슴속에 쌓인 탁기(濁氣)를 일시에 불어냈다.
머리가 맑아지고 전가주의 호흡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청강십이검과 일장검법을 혼합한 다음부터 나타나는 현상이
다. 이 공은 모두 유소청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녀가 아니었
다면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좀더 오랜 시간
이 필요했으리라.
전팽은 조심스럽게 보폭을 좁혀 왔다.
전동이 저런 보법을 취했었다. 쇄각대팔검은 검은 각기 다
르지만 보법은 같은 이치에서 밟는 모양이다.
치잇……!
공기 사이를 가르는 검음(劍音)!
적엽명의 두 다리는 땅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
나 상체는 급격히 앞으로 숙여졌고, 검은 앞으로 쭉 나갔다.
찌익……! 찌이익……!
첫 검은 무승부였다.
자세를 바꾼 두 사람은 각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적엽명은 왼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마의가 길게
찢어져 펄럭였다. 전가주도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요대(腰
帶) 바로 위, 배 있는 곳이 길게 가로로 찢어진 것이다.
"후웁!"
숨을 길게 들이마신 전가주는 좁은 보폭을 밟으며 우회했
다.
햇볕은 적엽명에게 유리하다. 유소청이 생각했던 바는 들어
맞았다. 취옥검에서 발산된 검광이 전가주의 눈가에 어른거리
고 있다. 전가주가 바로 공격하지 않고 우회하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리라.
적엽명은 왼 발을 땅에 붙이고 오른 발만 한 뼘씩 움직여
전가주와 마주 섰다.
두 사람은 이주 조금씩 움직였다.
검을 한 번 섞고 난 다음 극히 미세한 틈이 승부를 결정지
으리란 것을 직감한 터다.
눈은 태양보다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찰나에 불과할망정 틈이 발견되었다 싶으면 질풍처럼 파고
들 검.
두 사람이 조금씩 움직이는 동안 적엽명은 우위를 점점 잃
었고, 전팽은 대등한 위치로 옮겨갔다. 순간,
턱!
적엽명의 오른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잠시…… 아주 잠시 몸이 흔들린 사이,
쉬익!
전팽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쳐왔다.
선(先)의 선(先)!
수비초식이 가장 완벽하다는 전팽이다. 그런 만큼 그는 마
음놓고 공격할 수 있다. 기선을 잡았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싸아악……!
번개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전율이 일었다.
적엽명은 검기가 머리를 스치는 순간 솔개처럼 도약하여 전
팽을 압박해 들어갔다.
전팽은 검을 거둬들이는 중이다. 그것 또한 틈이다.
후(後)의 선(先)!
나중에 공격을 일으켰으나 먼저 적을 벨 수 있는 기선.
후의 선은 삼 할의 힘으로 피하고 칠 할의 힘으로 공격한
다. 피하고 공격하는 십 할의 힘이 한 동작 한 호흡으로 이루
어진다.
본능적 느낌과 부단한 수련, 그리고 수많은 실전을 통해서
만 잡을 수 있는 빠름. 전검은 전형적인 후의 선이다.
후의 선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쇄각대팔검.
반격에는 가장 뛰어난 검, 전검.
창과 방패가 드디어 만났다.
창! 가각! 가가각!
전팽은 분명히 검을 후려쳤는데 머리를 가르는 검을 어느새
막아버렸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서로 검신을 훑는 소리가 징그럽게 들
렸다.
두 사람은 검을 맞댄 채 눈을 부릅떴다.
누구도 먼저 검을 물릴 수 없었다. 힘과 힘의 부딪침에서
조금이라도 밀린다면 탄력을 얻은 상대의 검이 머리를 반으로
갈라버리리라.
이런 싸움은 흔히 내력(內力)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내력의 싸움은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기에 고수들끼리 비
무를 할 경우에는 흔히 나타나는 광경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가각……!
검신을 훑고 내려간 검들은 검격(劍格:손받침)과 검격이 부
딪쳤다.
전팽은 손목을 기울여 검 끝을 적엽명의 머리 쪽으로 붙였
다. 적엽명은 전팽이 미는 힘을 이용해 옆으로 몸을 틀어버렸
다. 그리고 전팽이 사용했던 수법 그대로 전팽의 머리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들은 전신의 모든 진기를 뽑아 검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목숨을 위협하고 위협 당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검을 맞대고 힘을 겨루는 것처럼
보이리라. 하지만 장막에 있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검 끝을 놓치지 않았다.
"상상 밖으로 강하군."
범가주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전가주는 후의 선을 허용하지 않아. 하지만 이번에는 허용
했어."
석가주 얼굴도 굳어있었다.
이번 비무는 초식 대 초식의 비무라고 할 수 없다.
쇄각대팔검은 초식의 변화가 상식을 벗어난 검법이라 검 끝
의 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적엽명의 검 또한 상
식을 벗어나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의 얼굴에는 굵은 힘줄이 곤두섰다. 일순,
"타앗!'
우렁찬 고함이 터지며 적엽명이 상체를 뒤로 눕혔다. 동시
에 발로 전가주의 복부를 내질렀다.
쉬리릭……!
전가주의 검은 물러서는 적엽명의 머리를 갈라놓고자 한치
의 틈도 주지 않고 따라붙었다. 복부를 차오는 발길은 의식할
것도 없다. 모든 기력이 검에 집중된 상태에서 내지른 각법
(脚法)이란 어린아이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비룡이 적엽명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어느 틈에 빠져나왔는지 취옥검이 전가주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
전가주는 바윗돌을 후려친 다음 비칠거리며 두어 걸음 앞으
로 치달렸다.
본능이다. 심장에 검이 꼽혔다는 것을 생각할 틈도 없는 게
다. 일검이 빗나갔으니 다가올 반격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
만 있을 뿐.
"앗!"
"전가주!"
장막에서 가주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그들은 예상 밖의 결과에 눈을 부릅떴다.
적엽명은 천천히 걸어가 전팽의 앞에 섰다.
"제가 이겼습니다."
"쿨룩! 쿨룩!"
전팽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에서 역류한 피가 목구멍을 가로막은 다음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엽명은 취옥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전팽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쓰윽……!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취옥검이 쑥 뽑혔다. 동시에 붉
은 핏줄기가 솟구치며 적엽명의 얼굴과 몸에 붉은 반점을 만
들어 놓았다.
검을 뽑는 순간 전가주는 절명했다.
'아버지!'
여족인들이 앉아서 구경하는 곳.
키가 크고 유난히 마른 사내가 쓰러진 전가주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귀가 이겼어."
"이긴 건 좋은데 불쌍해서 어떡하지? 전가주까지 죽였으니
해남파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 아냐."
"설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이겠어? 오늘은 무사하겠지
뭐."
사내는 사람들이 흘리는 말을 뒤로하고 비척비척 걸어갔다.
넝마와 다름없는 허름한 옷, 산발한 머리…… 그에게 관심
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