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8∼25)
뚜렷한 목적과 목표가 없을 때, - 사람들은 그같은 행보를 가리켜 -
‘방랑’ 혹은 ‘방황’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목적과 목표를 상실한 - 방랑과 방황의 삶 속에서는 - 참된 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 그러므로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 방랑과 방황의
삶은 - 지치고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지닐 때에만 - 생의 보람으로 축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보다 - 더 중요한 것은 - 뚜렷하되 - 바른 목표를 세우는 겁니다.
목표가 바르지 못할 때 – 일시적으로 나마 - 개인적으로 보람을 느낄 수는 있으나, - 그러나 그것은 – 자신과 -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 파멸로 이끌게 되고 맙니다.
근래 LH 직원 땅 투기 사건은 –많은 국민에게 실망감을 주고 있습니다. - 국민을 위해 바르게 일해야 할 사람들이 –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부당한 이득을 챙기느라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 사는 많은 사람의 희망을 절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반성하기는커녕 –마치 자신이 잘난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 사회적 반응에 겁을 먹고는 - 자살을 택하는 LH직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 입으로 욕하기도 아까울 만큼 – 불쌍하고도 - 파렴치한 존재들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들은 함께 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부정한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불의한 행동을 하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돈이면 다라는 금전 만능주의가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책임은 없는 겁니까? 또한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닙니다.
1급 공무원 1호봉 월급이 1,104,000원이고 – 9급 공무원 1호봉 월급이 380,200원이었던 20여년 전 -한 말단 세무 공무원의 아내가 -삶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10년 이내에 10억원을 모아 -큰 평수의 아파트에 -대형 자가용을 굴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는 목표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 목적은 떼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한 기간에 –분명한 금액까지 설정했으니 -얼마나 뚜렷하고 야무진 목표입니까? - 아마 본인은 –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 현명하고 –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가 –
열심히 일을 해서 - 돈을 모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 전적으로 의존했던 것은 - 말단 세무
공무원인 남편이 - 관내 업체로부터 받아 오는 - 부정한 뇌물이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 남편이 받아 오는 뇌물을 꼬박 꼬박 가계부에 기재했고, - 그 액수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많아지자 – 자신이 세운 목표가 계획보다 앞당겨 이룰 수 있겠다는 - 감격의 글귀를 - 가계부에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보람스러웠겠습니까? - 뿌듯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 부정한 뇌물 위에 세워진 그녀의 인생 목표는 - 분명하기는 했을망정 -
바른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변명의 여지없이 잘못된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욕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그릇된 목표는 -삽시간에 자신의 가정을 파멸시키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부패공무원 -자신은 범죄자의 아내, - 그들의 자식은 부끄러운 탐관오리의 자식으로 - 전락해 버리고 만 겁니다.
일이 터지자 - 그녀는 이렇게 항변했을지도 모릅니다. - 이게 어떻게 우리만의
일이냐고, -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 우리만 억울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참됨과 그릇됨은 - 결코 다수결에 의해 판가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을 한 사람이 –살인을 안 한 사람보다 작다고 해서 –그들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참됨과 그릇됨은 - 어떤 경우에라도 다수결이 아닌 - 절대적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릇된 것은 - 오늘 흥하는 것 같으나 -반드시 썩어 소멸 될 뿐이고, - 참된 것은 -연한 순처럼 – 이내 사라질 것 같으나 - 필경 굳게 영글고 맙니다.
따라서 - 우리의 삶이 - 참된 의미와 보람을 갖기 위해서는 - 분명할 뿐만 아니라
바른 목표를 지녀야만 합니다.
설령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 그릇된 목표를 당연한 듯 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너도 하니 나도 한다. – 나만 안 하면 바보니’ 하는 - 그와 같은 시류에 휩쓸림 없이 - 바른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 그것은 -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 저와 여러분을 포한한 모든 비전교회 가족들이 - 그렇게 살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공허하게 헛 그물질만 하던 갈릴리 바다―그러나 이제 새벽이 동터 오는 그 바닷가에서, -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주님의 양들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는 - 구체적인 삶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은 - 원치 않는 때에 - 원치 않는 장소에서 - 원치 않는 방법으로 - 느닷없이 찾아오게 될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만 가능하며 - 결국 그런 자의 삶과 죽음만이 - 하나님께 영광 일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뵙던 날, - 주님께서는 그날도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라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베드로는 배와 그물은 물론 - 가정까지 버려둔 채 -3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3년이나 지난 지금 - 왜 주님께서는 또다시 - `나를 따르라'고 새삼스럽게 명령하고 계십니까?
베드로가 지난 3년 동안 주님과 동행했던 것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을 믿었던 것은 – 세상의 권력, 돈, 출세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베드로의 몸은 - 비록 주님을 따라다녔을망정, -그의 마음은 주님을 따르지 않고 - 자기 멋대로 – 자기 기분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믿는 주된 목적이 – 구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 자신의 욕망입니다. - 그래서 자기 자식의 시험 합격을 위해 -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 목표를 이루기 위해 - 금식기도까지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에 감사하여 –금식기도 했다는 그리스도인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 자신의 영안의 귀를 열게 해달라고 – 간절한 마음으로 새벽 작정 기도를 했다는 –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 아마 대부분이 없으실 겁니다.
오히려 교회까지도 –대학입시 시험 합격을 위해 –40일 작정이니 하면서 – 신앙의 본질을 떠나 – 무속화 시키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 마치 베드로처럼 - 주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베드로도 자기 생각과 상반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 함부로 꾸짖는가 하면- 예수님 앞에서 - 누가 더 높은지를 놓고 - 제자들과 버릇없이 다투기도 하였고 - 또 예수님을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 지난밤만 할지라도 -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 밤새도록 - 헛그물질을 해대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제자의 행동거지일 수가 없었습니다. - 그래서 지난 3년간 베드로의 몸은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 삶이 참될 수도, - 진실할 수도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지금 복음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냥 나를 따르라고 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신 후, -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 –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
자기 멋대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 젊어서는 -
젊기에 그렇게 네 멋대로 했다 할지라도 – 늙어서는 아니라는 겁니다.
‘주여! 나를 띠 띠우시고 나를 끌고 가소서. - 내가 끌려가겠습니다.’ - 주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항복하고 -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 요한복음 21장 20절∼21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주님으로부터 -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 앞에 계신 주님께 대답을
드리는 대신 -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동료 요한을 발견하고는 - 주님을 향해 도리어 질문을 던졌습니다.―`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질문이야말로 - 주님의 명령에 대한 - 베드로의 일종의 항변이었습니다.―
`왜 제게만 주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까?' - `왜 요한에게는 두 팔을 벌려 주님께 항복하고 -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고 - 명령하지 않으십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 적당히 살고 있습니다. -
그런데 ‘왜 저 만입니까? - 왜 나만 열심히 믿어야 합니까?’
베드로의 이 항변에 대하여 - 본문 22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의 항변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즉 주님께서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시건 - 그것은 - 베드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 베드로가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은 - 상대적이 아니라 - 절대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절대성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 고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께 등을 돌린다 할지라도 너는 절대적으로 진리 되신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 우리는 먼저 사도행전을 통하여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기까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베드로에 의해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막이 오름과 동시에 - 이미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 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 베드로전서 2장을 보면, - 베드로는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다가 -
설령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 히려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 조금도 개의치 않는 - 반석과도 같은 -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 외경 속에서는 말년의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정경인 성경 속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 복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서들을 따로 엮어 외경이라 부르는데, - 그 외경의 베드로행전은 -베드로의 말년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폭군 네로에 의한 -기독교 대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 베드로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로마 당국이 - 당시 기독교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베드로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 많은 사람이 베드로에게 - 로마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 변장을 한 뒤에 -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외경인 베드로 행전 35장이 -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문에 다다렀을 때에 베드로는 -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단다.' - 베드로가 주님께 또 물었습니다.―주여, 주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작정이란 말입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렇단다.
베드로야, 내가 또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구나.'
그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크게 기뻐하면서 –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 그 길은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로마로 되돌아갑니다. - 바로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 생케비치가 쓴 소설이 - 그 유명한 `쿼바디스'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사도행전과 - 베드로전서 그리고 외경의 베드로행전은 무엇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새벽이 동터 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이래 - 중년을 거쳐 -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
그의 삶이 흔들림 없이 – 지속 되었음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구라파와 중동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까지 지배하던 거대한 로마제국에 비한다면, - 당시 베드로라는 존재와 -그가 행한 일이란 -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의 삶이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공고해짐은, 2천년 전 그의 목표가 - 주님만 따르는 참되고 바른 목표 ―절대적인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돈이나 권력을 목표로 했다면 - 그의 삶은 이미 흔적도 없이 -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 그에게 돈이나 물질이 필요했다면 - 그것이 목적이거나 목표여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 바른 목적과 목표가 있다면, -
그것은 - 생의 전반에 걸쳐 - 주님만 따르는 - 절대적인 삶입니다.
그것은 -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해, - 세상 사람이 다 그릇
되이 산다 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고 절대적으로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 주님께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명령하시는 까닭은 -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절대 진리를 - 절대목표를 삼는 삶만 -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 남기에, - 그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서두에 부정한 뇌물을 받아 - 떼부자가 될 목표를 갖고 있던 - 말단 세무 공무원 부부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단 공무원이 불과 몇 년 만에 몇 억원을 치부한 그 사건이 터졌을 때 - 세상의 여론은 그 부부를 도둑 다루듯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사실 도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목표로 갖지 않는 한, -
그 도둑 같은 부부와 우리 사이에는 -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주님 보시기에는 - 다 똑같은 도둑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 도적처럼 살라고 -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 도둑의 삶을 청산하고 - 절대 진리를 목표로 하는 - 새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되이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 진리를 절대적으로 따르기를 포기치 맙시다.
거짓과 타협하는 불의한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 있느냐'고 말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털어서 먼지 날 수 밖에 없는 -옷이나 물건이 아닙니다. - 우리는 인격과 양심을 갖춘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 그 장본인은 그리스도인인 - 바로 우리 자신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부터 묵상해 온 요한복음을 이제 마무리 합니다. -지난 5년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은혜를 나누었던 -요한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 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장 25절]
이것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인 동시에 - 4복음서를 종결하는 - 최종 구절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 마지막 구절이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은 필경 4복음서의 틀 안에 갇혀 - 기형화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구절로 4복음서가 끝남으로 인하여, - 우리는 4복음서를 토대로 하여 -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 되신 -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 바른 만남, - 바른 사귐, - 바른 섬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 임마누엘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 온 인류를 위해 – 그리고 시공을 초월하여 - 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일이 - 어찌 고작 4복음서에 기록된 것 뿐이겠습니까?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 이 기록된 책 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행하신 행적과 - 베푸신 은혜를 모두 기록할 경우 -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 그 모든 책을 수용하기에 부족할 것이라는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는 - 너무나 크고 엄청나서
주님 안에 거하는 한 -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구절을 교량으로 하여 -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복음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만 - 사도행전의 삶을 펼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주님의 부족함이 없는 은혜―이것만이 사도행전의 문을 여는 열쇠요, - 그 막을 올리는 동력입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던 갈릴리의 어부들이 - 어떻게 사도행전의 증인들이 될 수있었겠습니까? - 복음 안에서 얻은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집단과 사도들의 무리를 비교해 본다면,
그 양자 사이에는 - 조직적으로나 - 수적으로나 - 자금 면에서나 - 규모면 에서나 - 도저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 거대한 유대 종교 집단이 - 사회적으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져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새 역사의 대업은 볼품없던 소수 사도들의 무리에 의하여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 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비천하기 짝이 없었던 사도들에 의하여 -어떻게 새 역사가 전개될 수 있었습니까? - 그들은 비록 비천하고 소수였을 망정 -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
말씀 되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도구 삼아 - 역사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 주님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사도행전이란 실은 무엇입니까?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 그들을 통하여 -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친히 펼치신 주님의 역사, 곧 `예수행전'인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 마태복음2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 이때 온 예루살렘 성민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향해 - 호산나를 외치므로 - 온 성이 소동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소동했다는 헬라어 ‘쎄이오는 - 지축이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쳤는지, -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 때문에 땅이 흔들리듯이 예루살렘 지축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닷새 후에 - 또 한 번 지축이 흔들립니다. - 그것은 예수를 못 박아
죽이라는 함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 그들이 닷새 전에 예수님을 향해서 - 호산나라고 외쳤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환호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환호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주지 않자 – 저 자를 죽이라고
외쳤고 - 그리고 결국엔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을 죽였습니다. -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나를 좇아오고 싶으냐?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아오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다음 주부터 사도행전 말씀을 묵상할 것입니다. -
우리 모두 - 예수행전을 실천해 나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
나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만 합니다. -내 멋대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 멋대로 섭리하시도록 – 헌신의 옷을 입고 – 믿음의 신을 신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겁니다.
지축을 흔들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 마음이 –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 쎄이오 – 지축을 흔들 만큼 – 주님을 멀리하고, 주님을 부정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 이제는 그 잘못된 신앙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 주님을 향해 신앙의 종려가지를 흔들며 –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환영하는 – 진정한 –그리고 변함없는 종려주일이 될 것입니다. * 2842 - 비바람이
=====================[기 도]
주님! 우리는 그 동안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따랐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거짓되이 살고 있음으로 인해 - 우리의 거짓된 삶을 정당화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도적처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 나 자신이 도적이라는 사실을 자각치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요행히도 - 아직 수갑만 차지 않았을 뿐, - 내가 바로 도적이었음을 이 시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 도적 같은 나로 인해 대한민국이란 이 사회가 – 이처럼
총체적으로 부패한 사회가 되었음을 회개 드립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식들 역시 - 이 부패한 사회속에서 우리처럼 거짓되고 불의한 방법으로 살기를 진정코 원치 않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삶의 목표가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 절대 진리를 변함없는 목표로 삼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옵소서. - 그리스도인 된 우리로 인해 - 이제 이 사회가 맑아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불의하게 모은 재산이 아니라, 절대 진리 되신 주님을 따른 바른 믿음의 삶뿐임을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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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한 역사가
백성들과 - 비전교회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