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4장
1.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1-5)
인간이 생각하는 죄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다릅니다. 인간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하기 때문에, 행위에 따라 죄의 경중에 차별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아닌, 모든 인간은 악한 죄인이며,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죄의 경중이 없습니다. 악한 행위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그 마지막은 심판일 뿐입니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선악과를 먹은 것을,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큰 죄로 여깁니까? 혹 먹지 말라는 과일 하나 먹었다고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또 아무리 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다고 해도, 한번은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다운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살인과 같은 행위는, 큰 죄로 인식을 하면서도, 선악과를 먹은 것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죄를 행위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고,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신 이스라엘의 죄는, 지도자와 통치자를 중심으로 행해졌습니다. 지도자는 뇌물을 위해 재판을 했고, 제사장은 삯을 위해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해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다는 듣기 좋은 말로, 백성을 미혹하는 것이 그들의 죄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 가운데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 현실을 전혀 심각하게 보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한 죄와 심판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분노하시고, 심판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단호하게 심판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때, 심판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 가벼운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단호하심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단호하심을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산된 사랑이, 교회를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가 택한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고 해도,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에서, 오직 긍휼과 자비만을 봅니다. 죄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심판에서 건지시는 것은, 세상 어떤 신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여호와만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란 이름에서 무엇을 바라봅니까? 복과 성공입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면, 갓바위 같은 곳에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이, 잘되고 복권에 당첨이 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그러한 곳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 길로 영원히 행하는 것은, 다른 신을 부르는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복을 누린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래, 너희는 세상의 복을 받고 잘 살아라. 그래도 나는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며, 영원히 그 길로 행하겠다’라고 외칠 수 있는 단호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가능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에서, 세상의 신에게는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여호와에게서,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존귀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를 여호와께 붙들어 놓는 힘이고,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심판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심판이 당연함을 아는 사람에게만, 큰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관없이, 심판이 당연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기희생으로 건지셨다는 것은, 심판의 당연함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대할 뿐입니다.
1절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전의 의미를 모릅니다. 여호와의 전이 자신들에게 함께 하고,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제사하면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돈을 받고, 자기 배를 채우는데 바쁠 뿐입니다. 죄도 심판도 그들에게는 관심 밖의 얘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끝날이 이르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끝날이 되면, 여호와의 전의 가치는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이미 여호와의 전의 존귀함을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만인이 다른 신을 부른다고 해도,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홍수 심판이 이르기 전에는, 노아의 방주가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는 것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홍수가 이르렀을 때는 오직 방주만이 생명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지금은 세상이 십자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끝날이 되면 단 하나의 생명의 길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의 존귀함을 아는 성도는, 영원토록 피를 믿는 믿음의 길로만 행하게 됩니다. 세상은 지금은 그 길을 거부하고, 십자가 역시 멸시합니다. 십자가보다는 돈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끝날이 되면, 십자가의 존귀함과 가치는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성도는 그것을 끝날에 가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끝날로 살면서, 십자가가 생명이며 가장 존귀하다는 믿음으로 삽니다.
2절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면, 하나님의 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보게 하시고, 심판에 해당되는 존재임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율법을 만나고 말씀을 만남으로써, 저주에 속한 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주에 속한 자임을 아는 성도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구원하는 용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존귀함을 보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자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성도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주에 속한 자에게는 넘치는 은혜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길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낸 후, 하나님에 의해 돌아오게 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자신들이 영원히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멸망을 받고 영원히 고통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결과인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자신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셨음을 깨달으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러한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 멸망이라는 끝날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저주와 멸망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결과인데,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영원히, 십자가의 길로 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2. 네게로 돌아오리라(6-8)
철학이라는 학문은 인간에 대해 연구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분석을 하고, 인간의 내적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본성과 양심, 죄와 선, 의식과 무의식 등, 인간의 전부를 파헤쳐 그 결과물을 내어 놓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 생각의 산물일 뿐입니다.
인간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인간을 사망에 처한 자로 규정을 하고 시작합니다. 어떤 노력으로도 개선될 수 없고, 스스로 선을 양산할 수 없는 존재로 말합니다. 이점을 도외시하고 인간을 얘기한다면, 나오는 것은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비와 긍휼로 다가오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자비와 긍휼은 무의미합니다. 개선할 것을 명령하시고, 개선한 자만 부르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선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자비와 긍휼로 다가오시는 것이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어둠에 비치는 한줄기 빛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기 존재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부터가, 자비와 긍휼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자비와 긍휼을 거둔다면, 그들 또한 이방인과 동일하게, 멸망을 받아야 하는 악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잊었고,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힘으로 여기며, 그 힘으로 약자를 박해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세상 것을 힘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을, 선지자를 세워서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6-7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그 날이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고통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이 남은 자를 부르시겠다는 말씀을 이루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이 남은 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는 자, 쫓겨난 자, 하나님이 환난 받게 한 자들입니다.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받는 자가 의미하는 것은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비참에 처한 자들을 부르셔서, 백성이 되게 하시고, 강한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불러 모으시는 자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망한 이스라엘을 재건하기 위해서 부르시고, 돌아오게 하신다면, 그들은 국가를 재건하는데 능력이 있고,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곧 기술자들이나 학자들을 골라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언급하신 사람은, 국가를 재건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받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국가적 의미의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실 뜻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무너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다시 세우고자 하신다면, 아예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셨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것은, 지금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특성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참된 이스라엘은, 저는 자와 쫓겨난 자와 환난 받은 자들이 백성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돌아오게 되는 남은 자는, 자신이 저는 자, 곧 쓸모없는 장애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자일뿐임을 알고, 환난은 자신의 행함에 대한, 당연한 보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자가, 하나님이 모으시는 참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십니까?’라고 불평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할, 그 어떤 권리도, 자격도 없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지금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부터가,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무엇도 누릴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망하게 하셨다가,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일에도, 돌아오는 것이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망하는 것은 자신들이 당해야 할, 당연한 보응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인은 자신의 의를 바라보고, 자신에게서 모든 가능성을 찾지만, 죄인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모든 가능성이 허물어진 상태에서, 주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자신의 공로와 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공로만 있고, 주님의 의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행위가 의가 되고, 자신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의 열매를, 받아 누릴 뿐임을 아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심으로써 저주에 처한 자를 건져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기뻐하고, 찬송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힘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동일한 힘을 가진 자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약자와 강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8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예루살렘의 나라를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시는데, 예전의 예루살렘의 나라가 아니라,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받은 자로 돌아오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백성인가는 오늘 본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자기 존재성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으로, ‘내가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성도 됨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멀쩡한 사람입니다. 생각도 육신도 모두 멀쩡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저주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은혜와 사랑으로 대하시겠다고 합니다.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은혜를 압니까?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르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에게로 마음이 향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죄인에게는 예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속량하여 내시리라(9-13)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인간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행보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은, 인간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10절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시고, 또 거기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결국 구원하실 것이라면,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실 필요 없이,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구원하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어쨌든 구원 하셨으니까, 다른 것은 따질 필요 없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70년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이방 나라의 포로된 처지로 70년의 세월을 지낸다는 것은, 매우 힘든 고통의 세월을 뜻합니다. 또한 바벨론에서 70년의 세월을 지냈다면, 장성하여 끌려간 사람은 모두 바벨론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실까요?
인간은 자기의 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을 하셔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곧 편안한 구원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원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것이라면, 애초 선악과의 등장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등장시켜서 인간을 죽은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도,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도 없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토록 살게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악과가 있게 하시고, 사탄으로 인해 말씀을 어기게 하시고,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후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9절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그들에게 힘이 되고 도움을 줄 자는, 모두 사라진 상태입니다. 왕도 없고 모사꾼도 없습니다. 결국 그들이 찾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포로가 되기 전에는,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왕만 잘하면 자신들은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다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종교를 유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왕과 모사를 없애시고,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셔서, 고통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단지 힘들게 해서 여호와를 부르며 도와달라고, 기도하게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동안 그들이 살아왔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결과였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보내시고, 그곳에서 구원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아는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담긴 뜻입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삽니다. 그래서 자연히 인간에게 힘이 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상에 남기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자신을 살게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로 고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하게 된 것은 죄 때문이고, 그 죄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대대로 있었습니다. 전에는 허물과 죄가 없이 신앙으로 잘 살았는데, 미가 선지자 때 신앙이 무너지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죄가 있던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나중에 망하게 하시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나아질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고통에서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그동안 살아온 것은 죄와 허물 밖에 없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과 자비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이스라엘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잘되는 것만 바랍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누릴 자기 인생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을 원하십니다.
11-12절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부인할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신은, 이방인의 시각에서는 믿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멸시하지만, 그것은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설마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하고, 고통에 빠뜨려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이방인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자기 백성을 망하는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망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망함을 통해서, ‘망하는 것이야 말로, 죄와 허물로 가득한 자신들에게는 당영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고 뜻이라면, 세상은 그런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이상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성도라면, 오히려 세상을 불쌍히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소경이면서도 소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세상이야 말로, 결국 영원한 심판으로 끝날 것인데,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성도는 고통과 실패에서, 당혹스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고통과 실패에서 나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기쁨과 감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복을 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일을 들고 오십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 고통이 될 수 있고,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의 구원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달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