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586. [역경의 열매] 림택권 (1-20) 주어진 삶, 충실하게 살다 보니 이 모두 ‘여호와 이레’
내 신앙의 신조가 된 ‘여호와 이레’
삶을 돌아보면 ‘형통한 날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말씀처럼
늘 하나님은 모든 걸 미리 준비하셔
림택권 목사가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예배당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맨 앞줄 가운데에 서려고 애썼던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제일 뒷줄이 편했다. 삶을 돌아보면 무엇이든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이룬 것이었지 내가 무얼 하고자 앞장서서 이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주어진 삶에 충실했을 뿐 거창한 목적을 세우고 살지 않았다랄까.
그간 ‘역경의 열매’ 기고 제안을 수차례 받아왔지만 그럴 때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정중히 고사한 이유이기도 했다. 삶을 돌아봤을 때 그렇게 획기적이었다 할 만한 사건도 없었거니와 목회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고 살아오지도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과거 이야기를 상기해 다시 쓴다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과거 상황을 오늘날 내 상황에서 주관적으로 평가하고 결론 내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싶기 때문이다.
일생 기쁘고 좋은 일만 가득 찬 이가 어디 있겠는가. 삶을 돌아보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는 전도서 7장 14절 말씀이 떠오른다.
두 개의 평행선으로 이뤄진 기찻길이어야만 기차가 굴러갈 수 있듯 우리네 인생도 형통함과 곤고함이라는 평행선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지 않을까 한다. 우리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그저 좋은 날에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곤고한 날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 아닐까.
삶에서 항상 하나님은 모든 걸 미리 준비하고 계셨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내 신앙의 신조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뜻하는 ‘여호와 이레’다. 내 삶을 성경 인물로 굳이 비유하자면 디모데와 같다고 생각한다. 바울처럼 극적인 사건을 겪은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유진 피터슨 목사가 쓴 ‘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다윗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의 제목처럼 나 역시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과 같은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상 깊었던 영화 중 하나를 꼽으라면, ‘국제시장’(2014)이다. 전쟁을 피해 미군의 상륙함(LST)을 타고 피란길에 올랐다가 이산가족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90년 전인 1934년 8월 11일. 난 황해도 은율군 자작농 집안 삼 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1951년 6·25전쟁 통에 홀로 월남해 지금까지 혈혈단신으로 살아왔다. 전선(戰線)이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하던 당시 부모님께서는 ‘유엔군이 북진할 테니 석 달만 남한에 내려가 있으라’고 권유하셨고 그렇게 난 열여섯 살의 나이에 남한 땅에 홀로 내려온 후 지금에 이르렀다.
약력=1934년 황해도 은율군 출생. 총회신학교 대학원,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이사 역임, 현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이사장, 성경적성경연구원 원장.
***[역경의 열매] 림택권 (2) 교회는 내 놀이터, 예배 후 우리 집은 동네 잔칫집
말수가 적고 부지런한 농사꾼 아버지
마흔한 살 늦둥이로 날 낳으신 어머니
두 분 다 동네교회 다니는 기독교인
예배 후엔 교인분들과 점심 식사 나눠
림택권(오른쪽) 목사가 월남한 이후인 1952년 미군 351부대에서 근무하던 당시 전우와 함께 찍은 사진.
어렸을 적 살던 동네는 황해도 은율군 서부면 신기리 황씨 집성촌이었다. 동네는 60가정 정도가 주로 세 군데로 나눠 거주했다. 장작불을 때던 그런 시골 동네였다.
우리 부모님은 학교는 근처에도 못 가보셨지만 그저 평생을 땅을 일구시며 땀의 가치를 전하신 농사꾼이셨다. 소작농에 비하면 조금 더 나은, 자기 땅을 가진 자작농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는 처가댁에서 지내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말씀이 많이 없으셨고, 누워계시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셨던 모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나를 마흔한 살의 나이에 늦둥이로 낳으신 어머니는 덕이 많으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몇 시간씩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나를 위해 도중에 배고프면 먹으라고 찐 감자 두어 개를 싸주시던 기억. 기왓장으로 덮어놓은 화로 위에 뚝배기 된장찌개를 끓여 놓으시고는 하교하는 날 하염없이 기다리시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 모습에 난 속이 상해 ‘왜 먼저 식사하시지 않고 기다리시냐’며 괜한 짜증을 부렸던 기억도 있다.
내 위로는 스물한 살 터울의 누님과 열다섯 살 터울의 형님이 계셨다. 두 분 사이에 각각 다른 형제도 있었지만 얼마 못 가 죽었다고 들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당시만 해도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한두 해씩 늦게 했다고 한다.
부모님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교회에 다니시는 기독교인이셨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신기리의 작은 동네교회 황촌교회에 다니셨다. 면 소재지도 아닌 곳에 교회가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어린 내가 교회에서 기도하시는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잔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집에는 당시만 해도 귀했던 성경책도 한 권 있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황촌교회는 마을의 제일 높은 곳, 산등성이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15m 남짓 아래가 바로 우리 집이었다. 그런 탓에 유년 시절 교회는 내 놀이터였다.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어머니 손을 잡고 찾은 교회를 놀이터 삼아 놀았던 기억이 난다. 또 교회와 가까웠던 우리 집은 매 주일 오전 예배가 끝나고 나면 잔칫집으로 변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먼 곳에서 오신, 하얀 옷을 입은 교인분들은 으레 우리 집에 들르셨고 다 같이 점심을 먹곤 했다. 당시 교회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신발주머니다. 교회에 가려면 꼭 들고 가야 하는 물건이 신발주머니였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으로 된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뒤엉킨 신발들로 내 신발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리운 가족에 대한 소식은 나중에 수소문해 형님 가정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학차 미국에 머물던 때라 함께 살 기회는 없었다. 월남한 이래 지금까지 부모님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뵙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 어렸을 적 그저 밖에 놀러 나갈 생각에 등 좀 긁어달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부탁을 잘 못 들어드린 것 같아 지금도 아쉽고 송구한 마음뿐이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3) 열한 살 때 해방, 다시 교회 부흥하며 담임목사 부임
2차대전 중인 1941년 초등학교 입학
한국말 못쓰게 한 아픈 기억 남아있어
목사님 서재서 본 ‘박사’ 단어에 꽂혀
미국서 공부해 박사 될 꿈 갖게 돼
림택권(오른쪽) 목사가 1953년 강원도 춘천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당시 한국은 일제 치하에 있던 터라 기독교에 배타적이었다. 성경과 찬송가에 ‘왕’이라는 글자는 죄다 먹으로 칠했다. 시골이었지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더 심했다.
1941년 시험을 치고 면 소재에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한창 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에 음악 시간이면 교실에 있던 풍금으로 적군과 아군의 비행기 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쳤다.
악랄했던 일제하 학교 분위기도 기억난다. 담임 선생님은 조회 후 급장이라 불리는 지금의 반장에게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나무패를 나눠줬다. 그러면 그 급장은 하교 시간 전까지 한국말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패를 그 친구에게 준다. 만약 그 패를 받은 아이가 하교 시간까지 그 패를 갖고 있다면 선생님으로부터 된통 혼이 났다. 아이들은 나무패를 몰래 숨기고 있다가 다른 친구가 한국말을 하면 똑같이 전달했다. 한마디로 친구끼리 서로 감시하게끔 만든 학교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그런 분위기 탓이었을까. 어렸을 때만 해도 난 스스로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행여라도 한국말을 하시면 “어머니, 조선말 하면 큰일 나요!” 하며 곧잘 화를 냈다.
이후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1945년 해방되고 나서 한국인 정체성을 다시 찾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섭다. 어렸을 때부터 주입된 세뇌 교육이 그만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열한 살 되던 그해 8월 15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1시간 넘게 떨어진 면사무소까지 흰옷을 입고 걸어가며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동네 어르신 뒤를 따라가며 “만세”를 불렀다. 어디서 났는지 아버지 역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셨던 기억도 난다. 또 우리 집 앞마당에 심긴, 진드기가 많이 앉아있던 나무가 바로 무궁화였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동네 형들은 해방을 맞이하자 일본인들이 빼앗아 간 교회 풍금을 다시 찾아왔다. 그 이후로 황촌교회는 다시금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세가 커지자 교회를 전담할 목사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게 됐다. 이전까지는 담임 목사님이 한 교회만 전담하기 힘들 때라 전도사님이 주로 교회를 돌보셨다. 담임 목사님은 3주에 한 번 오실까 말까 했다.
그렇게 장형일 목사님께서 부임하셨다. 장 목사님에 대한 기억은 그의 사택에 있던 서재 풍경이 강하게 남아있다. 시골이라 책은 30여권 정도에 불과했지만 내게는 마치 지금의 국회도서관 같았다. 그중 두꺼운 책 한 권을 보게 됐는데 거기에는 ‘박형룡 박사 저’, ‘신학난제선평’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다. 그 책이 박형룡 목사님께서 1935년 한국보수주의 신학의 확인과 계승을 위해 저술한 책이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때 내가 꽂힌 단어는 ‘박사’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단어 같았다.
“목사님, 목사님! 박사가 뭐예요?”
동그란 눈으로 묻는 내게 장 목사님께서는 “응, 미국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답해주셨다. 미국.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곳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졌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4) 6·25전쟁 발발… 인민군복 입은 친구 찾아와 “택권 동무”
중학교 들어가면서 공산주의 세뇌 교육
미리 전쟁 준비 마치고 전쟁 벌여놓고
라디오서 북침이라며 가짜 소식 전해
림택권(왼쪽) 목사가 1952년 미군 351부대 근무하던 당시 전우와 함께 사진을 찍은 모습.
유년기의 황천교회 담임 장형일 목사님은 훗날 6·25전쟁이 발발한 뒤 인민군에게 붙잡혀 가 결국 총살당하셨다고 들었다. 장 목사님께는 내 또래 딸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 친형님은 같이 교회를 출석하던 또래 집사님들과 함께 인민군에 총살당한 이들이 한 무더기로 놓인 시체 더미에서 장 목사님의 시신을 찾아 임시로라도 묘를 조성하셨다고 한다.
6·25전쟁은 중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발발했다. 앞서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학제가 개편됐다. 지금의 초등학교였던 인민학교가 6년제에서 5년제로 바뀌었다. 그래서 한 학년 아래 동생들과 같이 졸업했다. 동생들은 중학교 1학년이 되고, 우린 바로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갔다. 우리보다 앞선 선배들은 3학년이 됐다. 당시 북한은 학기 시작을 서양식으로 9월에 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난 소련(현 러시아) 말과 함께 그들의 체계를 배웠다.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공산주의 혁명인 ‘10월 혁명’ 이른바 볼셰비키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마치 성경처럼 배웠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도 그때 배웠다. 어린 나이부터 공산주의 사상 세뇌 교육이 시작된 셈이다.
당시 북한은 전국의 학교가 똑같은 문제를 갖고 시험을 치렀다. 학기 말이 되면 보통 시험에 나올 만한 예제가 100개 정도 추려진다. 학생들은 이를 갖고 공부하다가 시험일이 되면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순서에 따라 앞으로 나가 시험문제가 든 봉투 하나를 받아온다. 그 봉투에는 모두 세 개의 시험 문제가 있는데, 그중 두 문제는 앞선 예제에서 나온다. 하지만 나머지 한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다. 결국 세 번째 문제에서 점수가 갈리는 셈인데 교육의 평준화와 다름없는 셈이다.
당시 난 벽보 주필이라고 벽보에 글씨를 쓰는 업무도 맡을 정도로 공부를 곧잘 했다. 시험이 끝나면 빨리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놀고 싶었는데, 당시 학교에서는 시험을 마치면 꼭 행사 명목으로 인근 계곡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체험 활동을 시켰다. 교회나 다른 곳에서 따로 모이지 못하게 막았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등교했는데 학교 인근 향교에 인민군 한 대대가 주둔해있는 모습을 봤다. 의아함으로 교실에 들어갔더니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쇼날’(내셔널)이라고 적힌 라디오에 귀를 쫑긋 세우며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대략 ‘남조선 이승만 괴뢰 정부가 북진해 전쟁을 벌여와 우리 군대가 반격해 전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참을 듣고 다시 향교 쪽을 보니 이미 군대는 출동하고 난 뒤였다. 북한이 이미 전쟁 준비를 미리 다하고 있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렇게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난 후 우리 동네에 놓인 게시판에는 인민군의 위치가 시시각각 표기됐다. 한반도 지도 위에 인민군이 진군해 점령한 곳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며칠 후 동갑내기 친구 한 녀석이 인민군복을 입고 우리 집을 찾았다. 그 친구는 대뜸 날 “택권 동무!”하고 불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택권아” 하고 부르던 친구였는데 알고 보니 그동안 군사훈련을 받은 거였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5) 인민군으로 징집… 총도 없이 행군만 하다 몰래 도망쳐
만 14세 이상 남자는 모두 징집 대상
발등에 상처 내고 할미꽃 독 바르는
누님의 극약처방에도 불구 결국 징집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다부동전적기념관 다부동전투 전적비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열여섯 살 나이로 이제 막 중학생 티를 벗으려던 나와 친구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그해 8월부터 9월까지 경북 칠곡군 가산면 일대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은 거의 몰살됐다고 한다. 당시 전투는 대한민국 국군이 대구로 진출하려던 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하고 그 기세를 꺾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향으로 만 14세가 넘는 북한 남자는 모두 인민군으로 징집됐다.
사실 6·25전쟁 발발 직전부터 전쟁을 준비하는 비밀단체가 있었다고 한다. 훗날 날 ‘택권동무’라 부르던 내 친구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고 들었다. 6·25전쟁이 터진 직후 징집된 그 친구는 이후 소식이 끊겼다.
나 역시 징집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징집 통보를 받은 그 날 읍사무소를 찾았다. 하지만 징집 절차가 길어지며 난 일단 귀가 조처됐다. 저녁이 돼서야 20리 정도 떨어진 집에 도착하니 혼인 후 출가해 전도사로 사역하던 누님이 집에 계셨다.
누님은 “택권아, 여기 앉아봐. 이렇게 하면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을 거야”라며 어디선가 할미꽃 뿌리를 가져왔다. 누님은 내 발등을 돌로 막 긁어 상처를 낸 뒤 그 위에 할미꽃 뿌리 즙을 덧발랐다. 발을 붕대로 감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날은 밤새 발등이 욱신거리며 아파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알고 보니 할미꽃 뿌리에 독이 있어 상처가 덧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날 누님과 함께 다리를 절뚝거리며 읍사무소로 갔다. 당시 징집 담당자는 그런 날 보며 “이놈, 이거 다리가 이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라며 고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누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 징집을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훗날 남한으로 피난을 갈 때 그 상처 부위가 욱신거려 고생만 했다.
막상 징집이 됐지만 우리에겐 총 한 자루도 쥐어지지 않았다. 낮에는 비행기가 하늘을 까맣게 덮어 소위 융단폭격을 가할 때라 쉽사리 이동하지 못했기에 야산에서 숨어 지냈다. 밤이 되면 정처 없이 행군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같이 징집된 친구와 도망치자고 말을 맞췄다.
우리는 인민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노렸다. 그런데 그만 내가 소변을 보는 사이 그 친구는 혼자 도망쳐 버렸다. 결국 혼자 몰래 산에서 내려왔다. 낡은 초가집이 보이기에 먹을거리라도 얻을 겸 갔더니 노부부가 살고 계셨다. 나이 탓에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하셨던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으니 고향에서 불과 걸어서 이틀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게 4개월여 만인 10월 무렵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시 발각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집에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낮에는 인근 수수밭에 몸을 숨긴 채 지내다 밤이 되면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유엔군이 곧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이 지났을까 인민군이 한둘씩 안 보이더니 결국 후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6) 유엔군이 다시 북진하면 부모님 만날 수 있을 텐데…
인민군 잔당들을 막기 위해 국군이 만든
‘서해지구 방위사령부’ 차출돼 보초 근무
미군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함경남도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이른바 '흥남철수작전' 당시 모습.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 제공 그렇게 북진해온 남한 국군은 집이 있던 은율읍사무소 소재지에 ‘서해지구 방위사령부’를 만들었다. 당시 고향 인근 구월산에는 인민군 대열에서 이탈한 일부 인민군들이 숨어 있었는데 밤이 되면 먹을거리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왔기에 그들과 싸우는 것이 주 임무였다. 국군은 가정마다 남자 한 명씩 차출했다. 그나마 키가 컸던 내가 차출돼 보초 업무를 맡았다. 보초를 서던 그 일대는 하루가 멀다고 폭격 소리로 가득했다. 하늘에서 ‘드르륵’ ‘드르륵’ 하는 총소리라도 들릴 때면 몸을 숨기기 바빴다. 지붕 위로 쏟아지듯 들리는 기관총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군복이랄 것도 따로 없었기에 인민군복을 입고 남겨진 인민군들과 싸웠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자에 써진 이름표 색깔뿐이었다.
2개월쯤 지났을까. 12월 초쯤이었다. 밤이 되면 저 멀리 평양 방향 북쪽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췄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다시 북쪽에서 인민군이 중국 중공군과 함께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부대는 당시 큰아버지 가족이 살고 계셨던 인근 서해의 조그마한 항구 ‘허새’로 일단 퇴각했다.
마을 자치대 수준에 불과했던 부대라 무기도 변변치 않았기에 중공군이 몰려온다는 육지로는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2~3일에 한 번 정도 집에 다녀올 수 있었던 나는 그렇게 부모님과 떨어지게 됐다. 그때만 해도 유엔군이 다시 북진하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51년 1월 21일쯤으로 기억한다. 웅녕이라 불리던 작은 섬으로 간 우리는 조금 더 큰 인근 섬인 초도로 넘어가게 됐다. 초도로 가기 위해 작은 어선을 탔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탔는지 간신히 물에 뜰 정도였다. 침몰의 두려움 끝에 순풍을 타고 무사히 초도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싶다.
초도에 머문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곳에 정박한 미군의 대형 군함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난 영화 ‘국제시장’(2014)에 나온 전차상륙함(LST) 같은 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앉을 틈이 없었다. 그렇게 비좁은 배에 몸을 웅크린 채 밤새 배를 타고 가니 어느 순간 배에 있던 국군이 젊은이들만 골라 갑판 위로 올려보냈다. 그렇게 백령도 진촌의 작은 항구에 내렸다. 남한 땅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를 태운 배는 군산과 목포, 부산 등에 사람들을 차례대로 내려줬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그려진 ‘흥남철수작전’과 다름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재밌는 인연도 하나 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을 탈출하려는 피난민들을 군함에 태워달라며 미 10군단장에게 요청한 현봉학(1922~2007)씨가 계신다.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는 그분은 훗날 내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교회 장로님으로 계셨다. 훗날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딴 기념 휴게소를 발견하고는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7) 열악한 환경에 쓰러져 병원 신세… 본격 남한 생활 시작
불편한 잠자리에 음식도 부족한데
위생환경까지 나빠 박테리아 감염
사경 헤매다 경기도 한 병원 입원
회복 후 추운 겨울 혈혈단신 퇴원
림택권 목사가 1967년 미국에서 목회할 당시 한국 기독신보사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면서 받은 사원증. 오른쪽은 1951년 남한에 정착한 림 목사가 이후 서울시로부터 발급받은 시민증.
인천 백령도에 머물 땐 좋지 못한 위생 환경 탓에 곤욕을 치렀다. 박테리아에 감염된 디프테리아 병을 앓아 고생했다. 또 요즘 한국에도 이가 다시 나타나 한동안 걱정이 컸다는데, 당시 백령도에 머물 때도 이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근 학교의 마룻바닥에 멍석 등을 임시로 깔고 잤는데 바닥에서는 냉기가 올라왔고, 이가 살결이 닿는 곳마다 들러붙어 몹시도 가려웠던 기억이 있다. 밥도 밀로 만든 조그마한 주먹밥에 돌소금 반찬이 전부였다. 그러다 결국 난 지쳐 쓰러졌고 1951년 7월 무렵 응급차를 타고 경기도 의정부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다. 당시 얼마나 사경을 헤맸으면 지금도 어떻게 넘어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후 서울시립병원의 효시가 된 ‘순화병원’에 머물며 본격적인 남한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서울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됐다. 많은 이들이 피난을 떠나 휑했다. 하지만 청계천 물만은 맑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머물던 병원에서는 밤새 죽어 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밤이 되면 곳곳에서 “바케스 미즈!”라며 절규하는 소리가 온 병원에 울려 퍼졌다. 물 좀 달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날이 새면 옆방의 누가 죽었다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전쟁통에도 사랑은 꽃핀다고 그랬던가. 당시 병원에는 인근 배화여고 여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왔다. 그중 한 여학생이 어찌나 친절하게 대해주던지 가슴이 설렜다. 그 여학생은 배가 고프다는 나를 위해 떡을 사와 건네주기도 했고, 고향에서 교회를 다녔다는 내 말에 자신도 교회를 나간다며 날 위해 기도해주겠다고도 했다. 그 학생의 이름도 적어놨는데 남한에서 나그네 신세와 다름없던 탓에 어느새 잃어버려 지금도 아쉽다.
열이 좀 내리며 회복된 난 당시 동대문에 있던 한 감리교회에 나가 종종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권사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러더니 대뜸 쌈짓돈을 건네주셨다.
그 권사님은 “피난 가는 가족에게 주려던 돈인데 미처 전해주지 못했다”며 “학생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해서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더벅머리를 하고서는 아픈 몸을 이끌고 예배에 나오는 내 모습이 무척 가여워 보였나 보다. 많은 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너무나 감사했고 권사님의 따뜻했던 마음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해 11월 중순이 되자 병원에서는 이제 다 나았으니 퇴원하라고 했다. 연고지 하나 없이 갈 곳 없던 나는 그렇게 다시 추운 겨울을 앞두고 거리로 나왔다. 효자동 길거리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단벌옷과 담요 하나, 검정 고무신 한 짝이 전부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에서 잠잘 곳이 없어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나님이 왜 날 이렇게 고생을 하게 하시나’ 하는 마음으로 멀리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많았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암송한 시편 73편 28절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새 힘을 얻었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8) 미군 부대서 청소일 맡으며 학업과 신앙생활도 이어가
통사정해 어렵게 잡은 화장실 청소일
최선 다해 일하자 사무실 청소로 진급
출석 교회에서 아이들 공부 가르치며
야간엔 고등학교 입학 학업 다시 시작
림택권 목사가 1953년 춘천제일장로교회의 ‘성경구락부’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모습.
1951년 11월 중순 날이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할 무렵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러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 땅에 혈혈단신 던져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병원에서 나와 하염없이 걷다 보니 광화문의 중앙청사(구 조선총독부 청사)에 이르렀다. 길 한쪽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멋도 모르고 일단 사람들 뒤에 따라 섰다. 군용 트럭 등을 수리하던 미군 부대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줄이었다. 서양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운이 좋게 뽑힌 난 군용 트럭을 타고 당시 부대가 주둔한 용산구 남정국민학교로 갔다. 다음 날 아침 통역관이 영양실조로 비쩍 마른 날 보더니 “넌 여기서 일 못 할 것 같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난 통역관의 다리를 끌어안고 “여기서 돌아가면 전 갈 데가 없어요!”라며 애원하듯 매달렸다.
내 처지가 딱했는지 그 통역관은 내게 변소(화장실)라도 청소하라며 소일거리를 줬다. 화장실에 휴지가 있는 건 그때 처음 봤다. 교회 다닐 때 예수님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왕이신 예수님도 이런 곳에서 태어나셨다는데 맡은 일에 일단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변소 청소를 깨끗이 하고 미군이라도 만나면 잘 모르는 영어로 연신 “생큐” “생큐” 하며 살갑게 대했는데 이를 부대에서 좋게 봤는지 6개월 뒤 사무실 청소 담당으로 나름 진급도 하게 됐다.
당시 나는 한 미군 상병을 ‘미스터 홀(Hall)’이라 부르며 곧잘 따랐는데 그가 어느 날 “미국에 같이 한 번 가볼래” 하며 물었다. 하지만 당시 내 유일한 소망은 빨리 이북으로 올라가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라 거절했다.
이후 난 부대를 따라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게 됐다. 주일이면 나는 미군 차를 얻어 타고 춘천제일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그곳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원익환 형님을 알게 됐다. 3형제였던 그분의 가족은 날 잘 챙겨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던 중 53년 7월 무렵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정전협정이 이뤄진 것이다.
휴전 후 부대를 나온 나는 춘천제일장로교회 종탑 밑에 있는 작은 ‘하꼬방’(판잣집)에서 제2의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사람이 거주할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마저 감사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야간반으로 ‘성경구락부’를 운영했다. 초등학교도 못 마친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와 같은 곳이었다. 전쟁 전 중학교라도 다녔던 나는 그곳에서 선생 겸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미처 못 마친 학업도 다시 이어가게 됐다. 당시 야간제로 운영되던 춘천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원익환 형님과 학교에서 만난 여러 친구의 도움 덕분에 신앙생활도, 학교생활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직후라 학교 건물이라고 해봐야 천막에 불과했다.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들 때라 매일 학교에 나갈 여건이나 형편도 못 됐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던 차에 다니던 교회에서 서울 남산 아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9) 춘천 생활 정리하고 총신대 입학… 물정 몰라 군 재입대
춘천 출석 교회 장로님 권유로 입학
기숙사 들어가 거처 문제까지 해결
본과 때 입대 소집통지서 다시 받고
복무하지 않아도 될 군 생활 또 시작
1953년 당시 총회신학교의 경건 훈련과 심령부흥회 모습. 총신대 제공
1950년대 중후반 당시 서울 남산 아랫자락에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큰 신사(神社)가 있었다. 서울역에서 회현동을 거쳐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200여개의 계단을 오르면 신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 신사에서 쓸 제사 음식을 만들던 건물이 하나 있었다. 당시는 한국 정부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고 미국이 군정을 실시할 때였다. 남한에 머물던 장로교 목사님들은 이 건물을 신학교로 활용하고 싶었다. 당시 미군의 하지 중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목사님들은 하지 중장에게 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있으니 남한에도 신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결국 그곳에 현재 총신대의 전신인 총회신학교가 세워졌다.
1955년 춘천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온 나는 그렇게 총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춘천제일장로교회에서 나를 무척 아끼셨던 장로님의 권유도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평범했다. 첫째 혈혈단신 남한에 내려온 난 ‘의식주’가 아니라 ‘주식의’ 즉, 잘 곳이 우선 있어야 했다. 당시 학교는 서울 용산구 도원동의 ‘적산가옥’을 매입해 기숙사로 쓰고 있어 거처는 문제없겠다 싶었다. 둘째는 목사가 되면 주일성수는 당연히 지켜야 할 테니 예수 믿기 좋다고 생각했다. 영혼 구원이라는 거창한 소명은 사치였다.
또 당시 제2대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께서 재임 중이셨는데 그분이 바로 내가 어렸을 적 고향 교회에 부임하신 장형일 목사님 서재에서 봤던 ‘신학난제선평’의 저자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게 ‘박사’의 꿈을 꾸게 해주신 분이다. 박 박사님 같은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일까 싶다. 이는 내가 늘 마음속에 ‘여호와 이레’, 미리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 외쳐온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총회신학교 학제는 예과 2년, 본과 3년, 별과 3년이었다. 예과 재학 시절에는 철학 심리학 법학 등 오늘날 대학의 인문학 과정을 배웠는데 이때 배운 공부는 훗날 큰 유익이 됐다. 당시 철학을 가르치신 한철하 교수님을 비롯해 교수진 모두 학문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시간이 흘러 43년 후 부족한 내가 한 교수님 후임으로 아세아연합신학대 3대 총장으로 재직하게 됐으니 하나님께 그리고 한 교수님과 이사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57년 7월 신학교 예과를 마치고 본과 한 학기를 마칠 즈음 군에 입대하라는 소집통지서를 받게 됐다. 처음 남한으로 넘어오며 나름 군 생활을 했기에 또 복무하지 않아도 됐지만, 잘 몰랐던 나는 그렇게 또다시 군에 입대하게 됐다. 3년의 군 생활이 또 시작된 것이다. 기초 군사 훈련을 받고 공병부대로 배치됐다. 경남 김해로 이동해 공병 훈련을 받았다. 말 그대로 돌을 깎아 건물을 짓는 등 힘든 훈련의 연속이었다.
당시 군부대는 불합리한 일이 너무 많았다. 한 번은 소속 중대장이 부대원들에게 개구리를 잡아 오라고 시킨 적이 있다. 왜 잡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명령에 따라 전우들과 개구리를 잡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대장의 아내가 아파서 우리가 대신 그분의 몸보신용 재료를 구하게 시킨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0) 예배 권리 주장하다 선임하사 화 돋워 몽둥이찜질
부대 전체가 김치 담그던 주일에
교회 종소리 이끌려 예배드리다 발각
부대원 모두에게 체벌하자 화가 나
“일요일엔 교회서 예배를” 대들다…
림택권(앞줄 가운데) 목사가 1957년 강원도 화천 국군 제1103야전공병단에서 복무하던 당시 사진.
그렇게 또다시 정식으로 한국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어느 날, 미군 카투사 근무 군인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거 내가 미군 부대를 따라다니며 귀동냥으로 영어를 배웠다는 걸 알고 있는 한 대위님이 “택권이 너도 한번 지원해서 시험 쳐봐” 하며 제안했다.
이후 합격한 난 원래 보병대로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카투사 시험에 합격했기에 카투사로 재배치될 날만 기다렸다. 그러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시험은 내가 쳤지만 그 시험 결과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소위 ‘빽’이 있다는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카투사로 가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남한에 연고 하나 없는 나로서는 별수가 없었다. 결국 부대 배치를 받지 못해 임시로 강원도 춘천 제2보충대로 발령이 났다. 10월 무렵이었던 당시 날씨가 제법 쌀쌀할 때였는데 부대 배치도 제대로 못 받아 동복조차 배급받지 못해 하복으로 그 추운 날을 이겨내야 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얼마나 서러운지 모른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내가 있던 부대에는 본부 교회가 있었다.
한번은 부대에서 배추를 사 와 전 부대가 다 같이 김치를 담그게 됐다. 당시 나는 휴가증을 내주던, 나름대로 힘이 있던 행정과 서무계에서 막내로 근무했다. 김장은 보통 주일에 했다. 김치를 담그던 내 귓가에 본부 교회에서 예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니 교회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김치를 담그는 우리를 감독하던 상사가 무서워 눈치만 봤다.
나이도 많고 수염이 많이 난 털보 상사님이었다. 눈치만 보며 김치를 담그다 슬쩍 보니 털보 상사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다’ 하고 몰래 교회로 달려갔다. 그렇게 간 교회는 왠지 모르게 포근하고 아늑했다. 덩달아 그렇게밖에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 처량했다. 그런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 내놓고 한참 예배를 드리는데 누군가 내 군복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니 선임하사가 날 발견하고는 ‘뒤로 나와’ 하며 고갯짓을 했다. 난 ‘안 나가겠다’며 애써 그를 외면했다. 이 모습을 본 목사님은 그 선임하사에게 “예배는 마치고 가게 해요”라며 내 편을 들어주셨다. 그 군목님이 지금은 102세가 되셨다는 소식을 최근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찾아봬야 하는데 싶은 마음뿐이다.
아무튼 예배를 마치고 나가니 선임하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선임하사는 부대원 모두를 집합시킨 후 몽둥이 체벌을 가했다. 교회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부대원 모두에게 피해가 가자 나 역시 화가 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법이 있습니다”며 소리쳤다. 육군본부에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 신고하겠다며 으름장도 놨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대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오히려 날아오는 건 더 가혹한 몽둥이질뿐이었다.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주일 아침이 밝았다. 내무반으로 들어온 선임하사가 날 보며 외쳤다. “림택권! 너 일요일인데 교회 안 가냐? 얼른 교회 가!”
***[역경의 열매] 림택권 (11) “신학을 시작했으니 끝을 보라”는 조언에 순종
육본에서 제대 후 야간대학 과정 마쳐
진로 놓고 고민 중 한철하 교수께 편지
조언 따라 교직 포기하고 신학의 길
림택권(가운데 성경책을 든 이) 목사가 1954년 춘천제일장로교회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삼각산기도원에서 수양회를 열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교회에 가지 못하게 막는 선임하사에게 대들며 “육군본부(육본)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할 때는 몰랐다. 실제로 육본으로 가게 될 줄은 말이다. 당시 난 통역장교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과거 춘천제일장로교회에서 알게 된 원익환 형님의 동생 원시환씨께서 부대 통역장교로 오셨다. 하나님의 앞서 준비하심이란 놀랍다. 그분은 자신의 친구가 근무하는 육본 조달감실 부관으로 내가 갈 수 있도록 추천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시환씨께서 평소 바둑을 같이 두던 인사 책임자에게 날 추천한 거였다. 공교롭게도 교회 가려는 날 막았던 그 선임하사를 훗날 육본에서 실제로 만났다. 무슨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인데 오죽 답답했는지 날 붙잡고 도와달라며 읍소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소신을 밝히려면 처음부터 밝혀야지 나중에 가서 바꾸면 힘들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군 제대 후 육본에서 문관(군무원)으로 잠시 근무를 이어가게 됐다. 저녁 시간에는 여유가 생겼다. 단국대 야간대학 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총회신학교는 학사 학위를 받기가 어려웠던 터였다. 다행히 신학교에서 2년 반 정도 공부한 이력을 인정받아 영문과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졸업해 준교사 자격증을 받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신학교를 마저 졸업할지 아니면 교사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지 고민이 컸다. 당시는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인 5·16군사정변 직후라 학교에 빈 교사 자리가 많았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며 군대에 가지 않은 교사들은 모두 내쫓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도 신학교를 가라는 이와 교사를 하라는 이로 의견이 갈렸다. 당시 총회신학교 교무과장이셨던 한철하 교수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한 교수님의 존함은 과거 춘천에서 방황하던 시절 우연히 동인지 ‘야성(野聲)’에서 처음 본 후 인상이 깊어 기억하고 있었다.
한 교수님은 답장에서 “이왕 신학을 시작했으니 끝을 보라”고 조언하셨다. 그렇게 신학교로 돌아간 그 무렵 겪은 일화 하나가 기억이 난다. 군 제대 후 육군본부에서 문관으로 잠시 근무한 후 춘천 성수상업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할 때 일이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 학생 한 명이 있었다. 한 번은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을 벌을 주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음 시간엔 꼭 해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아이만은 그러지 못하겠다며 대들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다음에도 못 해올 것이 뻔한데 거짓말은 못 하겠습니다. 계속 벌 받겠습니다.”
당시 담임교사는 월사금을 내지 못 한 학생의 집을 방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 학생 집을 방문해보니 부모님은 안 계시고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데 도저히 학교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이후 그 학생은 볼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신학교에 다니던 나는 청량리역에서 택시를 합승해 타고 태릉에서 내릴 일이 있었다. 계산하려는 내게 택시운전사가 “그냥 내리시라” 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오래전 성수상고 다닐 때 선생님 반 학생이었다”며 “그때 선생님이 계속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2) 청암교회 전도사로 사역… 정원교회 개척하며 아내 만나
미국 유학의 꿈 안고 학과 조교로 근무
청암교회 청년대학부 전도사로 섬기며
한 집사님의 중매 통해서 아내와 결혼
청수곡교회(정원교회 전신)를 개척한 초창기 시절 개척 멤버 사진. 뒷줄 가운데가 림택권 목사. 정원교회 제공
1959년 당시 한국의 장로교회는 둘로 갈라졌는데 난 개혁주의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신학교를 택했다. 박형룡 박사님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의 영향을 받고 싶었다. 총회신학교 기숙사에 입주하고 생활비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벌었다. 특히 교회에서 주보를 ‘가리방’(등사기)으로 제작했는데, 난 다행히 글씨를 제법 잘 쓰는 재주가 있어서 용돈을 벌 수 있었다. 또 박경신 권사님, 선우 집사님 형제분을 비롯해 등록금을 무명으로 입금해 주신 분들이 많았다. 전부 다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당시 여름방학엔 기숙사 식당이 문을 닫아 대부분 학생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난 갈 곳이 없어 홀로 남게 됐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지냈다.
무엇보다 최근에도 가끔 연락하는 친구 최삼열을 잊지 못한다. 그 친구는 개학해서 학교로 돌아오면 나 혼자 기숙사에 있는 것이 불쌍하다며 고향에서 갖고 온 음식들을 주곤 했다. 그 외에도 고마운 친구들이 많았다. 3년 전 서울역에서 그 친구를 만나 택시를 타고 옛 기숙사 자리를 찾아갔지만, 하늘 위로 치솟은 아파트 단지뿐이라 세월의 무상함만 느꼈다. 63년이 흘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말이다.
당시 서울 용산역 옆에 있었던 신학교 건물은 바로 옆 건물이 철공소여서 몹시 소란스러웠다. 용산역에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는 더 시끄러웠다. 그런데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내 유일한 소원이 미국 유학이었기 때문이다. 신학교 본과와 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는 일단 학교 조교로 근무하게 됐다. 졸업 당시 앞으로 교수로 키워낼 사람을 두 사람 정도 가려냈는데 감사하게도 거기에 뽑혔다. 조교로 근무하면서 학교에서는 기초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 무렵 장로교는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갈라진 후 예장합동 측은 부산 고려신학교 측과 합쳐졌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훌륭한 두 신학교 교수님들 밑에서 수업을 받았으니 이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2년 후 고려 측은 대부분 환원됐지만 말이다. 이후 총신대 출신 강사로서 많은 군소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 것도 감사할 일이다.
이후 서울 용산구 청파동 청암교회에서 청년대학부 전도사로 섬길 기회도 얻게 됐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당시 담당 목사님의 후임으로 가게 된 것이다. 청암교회는 1948년 9월 이환수 목사 주도하에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다섯 명이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다.
이 교회와 맺은 인연은 담임 목회 사역의 시작과 함께 지금은 별세한 아내 림현숙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1963년 10월 청암교회 여전도회의 지원으로 정원교회로 부임하게 됐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는 사건이 있던 무렵으로 기억한다. 아내는 한 집사님의 중매를 통해 만났다. 같은 달 26일 우리는 청암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는 다른 분이 정원교회를 개척하셨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돼 내가 대신 맡게 됐다. 정상적인 교회 개척 과정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돌아보면 신혼여행이 곧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연결된 축복(?)과도 같았던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3) 볏짚 지붕, 사과 궤짝 강대상에서 시작된 첫 목회
한두 가정 남은 성도와 열악한 시설에
한 목사님이 준비하던 개척 교회 맡아
“성도도 없는데 큰소리…” 아내 핀잔도
림택권(원 안) 목사의 총회신학교 졸업식 사진.
1963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정원교회에 부임한 나는 67년 초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첫 목회 사역을 했다. 당시 교회는 직전까지 한 목사님이 몇 개월 동안 개척을 준비하시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떠나게 돼 대신 맡았다. 교회라고 해봐야 한두 가정만 남아 성도가 거의 없었다. 교회 시설도 열악해 인근 당면 공장 임시 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 공장에서 쓰던 사과 궤짝을 주워와 강대상 삼았고 의자는 제재소에서 쓰다 버린 나무쪼가리를 모아 못질해서 썼다. 볏짚으로 된 지붕은 비가 오면 물이 샜다.
비가 많이 오는 어느 주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비를 피해가며 어렵사리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니 아내가 이렇게 물었다.
“신학교에서 설교하는 법 안 배웠어요? 아니, 교회에 성도라고 해봐야 당신하고 저뿐인데 무슨 목소리가 그리 크셔요. ‘여러분’은 무슨 여러분이에요.”
이렇게 핀잔 아닌 핀잔을 줬던 기억이 있다. 교회처럼 신혼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당시 정릉에는 처음으로 부자들이 사는 고급주택 단지가 막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우리 부부는 그 단지 집의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았다. 키가 큰 편에 속했던 나는 대각선으로 누워 자야 할 정도로 작은 단칸방이었다.
교회는 주로 주일학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5명 남짓했다. 인근 교회를 다니던 한 고등학생이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사역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 당시 ‘북한산예술학교’라 불리는 한 음악학교와 연결이 돼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다. 교인도 점점 늘어 3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가 됐다. 교회는 작았지만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군 장성 출신 가정도 있었고 외과 병원장도 있었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신앙이 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한 여성 집사님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원래 부잣집의 소실(小室), 속된 말로 첩이었다. 하지만 그 집의 주인이자 남편은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외모가 출중했던 그 집사님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게 했다고 한다. 이후 집사님은 견디다 못해 신앙의 힘으로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그 집을 나와 다른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런 처지와 형편에도 열심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
한편 당시 정릉의 교회는 상수도 시스템이 변변치 않아 물탱크에 물을 받아 썼다. 그러다 상수도 시스템이 정비되며 남는 용지를 매입할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제대로 된 교회를 짓게 됐다. 이후 65년 당시 내가 속한 총회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는 효창장로교회에서 받았다.
교회 용지를 마련하고 교회도 점점 안정됐다. 목사 안수까지 받고 나니 다시 또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그것도 미국 유학이 가고 싶어졌다. 유학을 마치고 나면 귀국해 목회보다는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총회신학교에 다닐 때 학교 초청으로 미국 커버넌트신학교의 레어드 해리스 박사가 방한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분을 안내하며 통역을 도왔다. 그 일이 인연이 돼 커버넌트신학교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할 기회를 얻게 됐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4) 전액 장학금 받고 미국 유학… 어려운 대학원 수업 큰 부담
몸조리 전념해야 하는 아내 남긴 채
교인들 도움받아 먼저 유학길 올라
림택권(왼쪽 세 번째) 목사가 1975년 시카고신학대학교에서 열린 학위 수여식에서 박사 학위증을 받고 있다.
미국, 그것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간다니 꿈만 같았다. 열두 살 때 만난 목사님이 해주신, 미국에 가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늘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와 고무신 한 짝이 가진 것 전부였던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5년간 홀로 한국에 살면서 너무 고생했기에 당시 난 서울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어렵사리 얻은 유학의 기회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는 부부가 함께 외국 유학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게다가 아내는 임신한 지 4개월쯤 됐다. 이미 사산과 유산의 아픔을 두 차례 겪었기에 몸조리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결국 일단 나 홀로 유학길에 오르고 아내는 나중에 안정을 취한 뒤 건너오기로 했다. 학기는 이미 그해 9월 시작했지만 여러 여건상 이듬해 1월 도미하게 됐다. 당시 편도 비행기 삯만 500달러였다. 이제 막 교회를 개척하고 자리 잡은 목회자에게는 큰돈이었다. 빚을 내고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1967년 1월 7일 유학길에 올랐다. 김포공항 건물 위층 환송장에서 날 배웅해주던 교인들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내는 그때도 차마 마중을 나오지 못했다.
미국 국적 항공기를 타고 시애틀을 거쳐 신학교가 있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다. 생경한 풍경에 놀라거나 신기해할 새도 없이 험난한 미국 생활, 그것도 유학 생활이 시작됐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에도 벅찰 때였다. 난 도무지 교수의 강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학기가 시작한 1월 중순인 데다 당시 한국의 영어 교육은 주로 문법과 작문에만 치중할 때였고 의사소통 수준의 영어 실력으로는 어려운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기는 한계가 있었다.
한 번은 구약 선지서 시간이었는데 교수가 “마이카, 마이카”라면서 설명했다. 난 속으로 ‘성경 시간에 왜 자동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네’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지자 ‘미가’를 영어로 그렇게 발음한다고 했다. 또 내 딴엔 열심히 강의 내용을 필기했는데 나중에 날 도와준 친구가 쓴 필기 노트와 대조해보니 완전히 엉뚱한 걸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때도 있었다. 웃지 못할 영어 실력으로 유학 생활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렇게 2년간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학교와 여러 지인의 도움으로 아내가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아내가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춰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봐도 보이질 않았다. 당시는 전화 통화도 힘들 때라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시애틀에 아는 지인에게 전화해 혹시 공항에 아내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답답한 마음에 아는 미국인 친구에게 사정을 전했다. 그 친구가 이곳저곳 알아보더니 아내는 환승 시간이 촉박해 시애틀에서 시카고로 오는 비행기를 놓쳤던 것이었다. 다행히 항공사에서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아내가 호텔에 머물 수 있게 배려해줬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 비행기가 오는 시간에 맞춰 밤 10시 무렵 환영 현수막을 들고 공항에 나갔지만 그때도 아내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5) 아내와 함께 본격 미국 생활… 한인장로교회 목회 맡아
뒤늦게 아내 합류하고 큰 딸 태어나
팍팍한 생활고에 생활전선 뛰어들어
인근 교회 다니다 담임 목사로 청빙
미국 시카고 벧엘교회에서 목회하던 림택권(맨 오른쪽) 목사가 1979년 가족들과 함께 교회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뒤 아내는 한낮이 돼서야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무리 끝 마지막에 키가 자그마한 한 한국 여자가 양장점에서 막 맞춘 듯한 풀색 투피스를 입고 나왔다.
나는 “아니, 무슨 식모가 온 줄 알았네” 하며 오랜만에 본 아내를 괜히 타박했다. 나중에 아내는 그날 참 서운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당시 내가 다니던 커버넌트신학교 인근 시내에 숙소를 잡고 본격적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했다. 2년간의 석사과정을 끝낸 나는 다시 생계 현장에 뛰어들었다. 한국에 남겨둔 빚도 갚고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리려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무렵 첫째 딸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날 당시 몸무게가 2.5파운드(1.13㎏)에 불과했다. 조산아라 두 달여를 인큐베이터에서 생활했다.
다행히 아이가 태어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중에 한국에 의료 선교를 다녀오신 분이 계셨다.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셨던 그 의사 선생님 덕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역시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란 참으로 놀랍다. 1969년 드디어 아이가 퇴원을 했다.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걸음을 내디뎌 온 세계가 떠들썩했던 무렵이었다. 당시 우린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대도시로 가면 일이 좀 있겠다 싶어 인근 시카고로 넘어갔다. 여름 방학 기간 일할 자리도 얻었다. 자동차 부속품 공장이었다.
주일이 되면 인근 한인장로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 외에 다른 2~3개 교회에도 교적을 등록해 다녔다. 당시만 해도 이민 목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교회 개척을 했는데 교회 설립 조건으로 신청서에 교인 수를 적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교인으로 맺은 한인장로교회와의 인연이 담임 목회로 이어졌다. 한인장로교회의 청빙을 받게 된 것이다. 1969년 9월 무렵이었다. 참고로 한인장로교회 전임 목회자셨던 임옥 목사님은 후에 내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에서 이사로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셨다.
한인장로교회에서는 3년간 목회했다. 당시 교회는 3년마다 담임 목사의 재신임 여부를 물었다. 재신임을 받은 나는 1년을 더 그곳에서 목회에 몰두했다. 1972년 둘째 딸아이도 태어났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학업을 계속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임했다. 영주권도 그 무렵 받았다. 학교는 시카고신학대학원에 다니게 됐다. 목회학 박사(D. Min.) 과정이었다. 그동안 내가 공부했던 신학교들은 주로 칼뱅주의 계통이었는데 삶의 현실을 중시하는 신학 분야에도 관심이 있어 이 대학원을 선택했다.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아내의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 때가 말이다. 그 후로 아내는 20년 넘게 풍을 앓았다. 목회 사역과 공부에만 매달리느라 차마 아내와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6) 벧엘교회 개척… 한국 이민자들의 손과 발이 돼 봉사
이민법 발효돼 많은 이민자 미국 정착 외로워서 교회를 찾는 분들이 대부분
아파트 구하고 자녀 입학 도와주는 등 ‘사회 복지사업’과도 같은 역할 도맡아
1970년대 중후반 림택권 목사가 시무했던 당시 미국 시카고 벧엘장로교회 주보.
공부를 더 하겠다며 한인장로교회를 사임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목회 사역을 멈추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1974년 시카고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직전 내 주변엔 ‘맞이하는 교회에서 찾아 나서는 교회로!’라는 뜻을 같이하는 12가정이 모여들었다. 그 무렵 미국 이민법이 발효됐다. 한국에서 건너온 많은 이민자가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했다. 그렇게 73년 10월 14일 우리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한 미국 현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다. 내가 두 번째로 개척한 교회인 벧엘교회의 시작이다.
우리가 공간을 빌려 예배를 처음 드렸던 미국 현지 교회는 복음주의 계열의 침례교회였다. 그 교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회 담임 루디 목사와 그의 사모 헬렌은 이후 몇 년 동안 우리 교회 주일학교 중등부 학생들을 도와주셨다. 그들은 나중에 애리조나주 피닉스 교회로 전임을 갔는데 우리 가족이 그곳까지 휴가를 가서 함께 즐겁게 지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특히 그분들은 자녀가 없어서 우리 아이들과 교회학교 아이들을 무척 사랑해 주셨다.
나에겐 두 번째 교회 개척이었지만 한국의 정원교회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비록 한인교회였지만 교인 간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격도 컸다. 또 아무래도 이민자들이 많은 교회이다 보니 외로워서 한인들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찾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교회에서 줄 수 있는 것과 교회를 찾아오는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너무 달랐다.
당시에 한인교회는 이민자들을 돕는 이른바 ‘사회 복지 사업’ 같은 역할이 시급했다. 예를 들면 누군가 한밤중에 시카고 오헤어공항에 도착했다며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받으면 당장 공항으로 달려가 그의 짐을 싣고 차를 태워주며 그를 단칸방 아파트까지 데려와 직업까지 구해 주는 일이 빈번했다. 이민자가 갖고 온 돈을 은행에 저금하는 일을 돕는 일도 예사였다. 아파트를 구하는 일부터 자녀 학교 입학 돕기 등 정착을 위해 교회가 챙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사회 내 한인을 위한 이민 목회는 태동기였다. 목회자들은 변변찮은 자동차 한 대 없이 그 넓은 미국 땅에서 교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심방하는 일도 많았다. 이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1년 넘게 자동차 없이 목회하며 공장에서의 일도 병행하며 살았다. 주로 오전에 학교 수업을 들었고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는 일을 했다. 쉬는 시간이면 공중전화로나마 교인들을 심방하곤 했다. 이후 180달러를 주고 중고차를 샀는데 그때는 자동차 기어가 자동이 아니라 수동식이 대부분이라 두 번이나 면허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더 힘든 일은 정성껏 섬긴 교인들의 정착률이 낮다는 점이었다. 한밤중이라도 공항에 마중 나가 그의 초기 정착을 돕곤 했지만, 어느 정도 미국 생활이 안정되면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비율은 대략 10%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때는 교인 한 분 한 분을 돌보며 이민교회 개척자의 자부심을 가졌던 때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때 사역이 고생이었다고 생각은 되지 않으니 그저 은혜일 뿐이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7) 진딧물 잡으려다 흡연자로 오해 “목사님, 담배 피우셔요?”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던 이민 사회 담배 사는 모습만 보고 흡연자로 착각
아이들 하교 때 데리러 갈 시간 놓쳐 찾아 헤매다 유괴된 부모 마음 겪기도
림택권 목사가 1995년 무렵 마지막으로 담임 목회한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정문에서 기념촬영한 모습.
미국 시카고 벧엘교회를 개척하고 본격적인 두 번째 이민목회 사역을 펼치기 시작한 1974년 무렵. 주일이 되면 교회 예배당 구석에 둔 성경책과 찬송가가 든 상자를 문 앞에 펼쳐놓고 교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내와 함께 예배당 문 앞에서 서성대는데 그때 기분은 마치 길가에서 물건을 팔려고 좌판을 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 같았다.
설교를 위해 강대상에 올라 예배당을 볼 때면 정작 참석해야 할 교인이 잘 안 보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그러다 보니 참석한 교인들에게 신경질 아닌 신경질을 부리곤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당시는 이민법 개정 등으로 교회 주변에 한인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솔직히 교인이 근처 교회로 옮겼다는 소식이라도 들으면 그 교회 목사님들이 몹시 미웠고 시기와 질투도 생겼다. 목회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어 그냥 돈이나 벌어서 선교사나 도울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주님, 그래도 저만한 목회자 못 만나실 겁니다. 다시 시작할까요’ 하며 기도 아닌 기도만 되뇔 뿐이었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성장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보다 늘 앞서 준비하셔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셨고 도움도 받게 하셨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척했던 정원교회 주일학교 전도사였던 박도원 목사님, 벧엘교회 사역을 도와주신 최병수 목사님 등을 잊을 수 없다.
낯선 미국 사회와 이민교회 특성으로 웃지 못할 사건도 많았다. 한번은 시카고 북쪽 스코키라는 동네로 이사한 후였다. 개학 첫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피곤해서 집에서 쉬다 그만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을 놓쳤다. 한국과 달리 대중교통이 잘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아이들이 알아서 혼자 집에 오기란 쉽지 않을 때였다. 부랴부랴 뒤늦게 학교에 갔지만 아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식이 유괴된 부모의 마음과 같았던 것 같다. 경찰에 신고하고 집에서 소식만 기다리는데 다행히 어느 한 일본계 미국인 여성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왔다. 길에서 헤매는 걸 보고 차에 태워 데리고 왔다고 했다. 알고 보니 등교할 때와 다른 정반대 방향 문으로 나갔는데 학교가 무척 커서 방향을 잃었다고 했다. 그 일을 겪고 나니 이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6)
또 한번은 집 뒤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장미꽃에 진딧물이 꼬여 보기 안 좋았다. 지인이 담배를 물로 우려내서 스프레이로 뿌리면 없어진다고 귀띔해줬다. 근처 상점에서 담배를 한 갑을 사서 계산하려고 기다리는데 하필 날 아는 다른 분이 들어오셨다. 날 보고 눈인사를 하는데 그분 표정이 마음에 쓰였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교인 한 분이 어느 날 내게 슬쩍 다가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혹시 담배 피우셔요? 그런 소문이 돌아서요.”
난 당황해서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해명했다. 1년 전 담배 가게에서 만난 그분 얼굴이 떠올랐다. 오이밭에서는 신발 끈을 함부로 고쳐 매지 말라는 옛 속담도 생각났다. 이처럼 이민 사회는 여러 소문이 많았다. 특히 교회에서 소문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미국 사회의 비주류로 살다 보니 이야깃거리가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경의 열매] 림택권 (18) 건강 나빠진 아내 위해 날씨 좋은 美서부로 이주
점점 예배 출석 성도 수 늘어 안정되자
자체 교회당 마련하려 건축위원회 구성
후임으로 정원교회 박도원 목사 결정
림택권(왼쪽) 목사가 미국 필라델피아연합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만난 현봉학(1922~2007) 장로.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는 현 장로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북한을 탈출하려는 피난민들을 군함에 태워달라며 미 10군단장에게 요청한 인물이다.
이민 목회 환경은 무척 힘들었다. 이미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도 교회를 개척해봤지만 이민 목회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몇 년이 지나자 점점 탈진 상태가 됐다. 목회를 집어치우고 미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이나 운전하겠다고 하나님께 떼를 썼던 때도 이쯤이었다.
“하나님, 저 이제 그만두렵니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주세요.”
투정 부리듯 종종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떤 응답이 들어올까 싶은 마음에 이렇게 기도드리면, 하나님은 늘 “나도 알고 있다”고 대답해주시며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사실 나도 물론 진짜 속마음은 그만둘 생각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하나님께 응석을 부렸던 것 같다.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이라고는 했지만, 이후에도 하나님에 대한 내 신앙은 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도 계속해서 한 길만 바라고 한 곳만 바라보며 열심히 달렸다. 그러자 점점 예배 출석 성도 수도 늘고, 자체 교회당을 갖자는 열풍도 생겼다. 장로님 세 분을 장립해 당회가 구성됐다. 1978년 2월 정기 제직회에서 교회 성전 건물 마련을 위한 건축위원회가 구성됐다. 그 후 교회에 등록한 78가정 교인들의 기도와 정성으로 건물을 사들일 종잣돈이 마련됐다. 같은 해 10월 22일 1차 건축헌금을 했다.
벧엘교회는 79년 11월 미국 장로교인 PCA(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교단에 가입했다. 나는 그 무렵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심사위원 면접을 거쳐 이 교단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듬해 5월 PCA 아센숀노회 가입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차에 15년 넘게 미국 중서부에서만 살다 보니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 서부에서도 지내보고 싶었고, 건강이 나빠진 아내를 위해서는 날씨가 좋은 서부가 좋을 것 같았다. 시카고는 마치 미국에서 고향과도 같았던 곳이고 첫 교회를 개척해 함께한 교인들을 떠나기란 퍽 어려웠다. 마침 후임 사역자는 한국 정원교회 주일학교 전도사로 사역을 도왔던 박도원 목사님으로 정해졌다. 박 목사님은 가족들과 미국으로 건너오셨다. 후임자로 박 목사님이 정해진 것 역시 내 앞길을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또다시 경험했던 간증 거리이기도 하다.
나는 후임 박 목사님이 그동안 마련한 교회 건축헌금으로 교회 건물을 구매토록 했다. 그러면서 교회 담임 목사직도 내려놓았다. 이후 벧엘교회는 81년 11월 1일 창립 8주년 예배를 드리며 새 예배당 건물을 헌당했다.
우리 가족이 머물던 스코키 지역 집은 융자로 구입했는데 이를 팔고 융자를 갚고 나니 거의 1만 달러 정도가 남았다. 홀가분했다. 그간 가족과 함께 휴가도 제대로 못 갔으니 많은 곳을 여행해보고 싶었다. 마침 여름방학도 시작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길’(히 11:8)이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서부를 향해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이것이 믿음이었는지 만용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이 일로 네 번째 담임을 맡게 된 임마누엘교회가 이 땅에 생겼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 세상 누가 미리 내다볼 수 있을까 싶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