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1996년 제37회 충남대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입니다
검은 언덕 1
남자아이는 미끄럼틀 받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다. 받침대는 비곗살처럼 부풀어 있다. 흠집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갔을 끈덕진 바람이 제법 능글맞다.
아이는 받침대에서 등을 떼고 발밑에 떨궈져 있는 튜브 공을 힘껏 찬다. 얼룩무늬 땅개가 저만치 달아난 튜브 공을 향해 숏다리로 전력 질주한다. 아이도 덩달아 뛰기 시작한다. 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져 녹슨 청동구슬 같은 잔해를 여러 개 달고 있는 철제 구조물을 지난다. 그건 그네인 양 싶다. 그넷줄은 개구쟁이들의 등쌀에 뜯겨 나가고 양 기둥만 고대도시의 유물처럼 앙상하게 남아 있다.
탱탱한 튜브 공은 분교 교목으로 지정된 소나무 아래까지 떼굴떼굴 굴러간다. 백 년 묵은 노송의 잔가지 사이로 잔양이 희미하게 비집고 들어와 아이들이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돌아간 듯한 밑땅에 명암을 대조시키고 있다. 노송의 위용에 주눅이 들었는가. 아이는 공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향해 무한정 가지를 뻗친 소나무를 한동안 올려다본다. 올여름 벼락을 맞아 까맣게 타 버린 솔가지도 있다. 그건 흡사 분교 옆에 축대처럼 보이는 언덕배기를 닮아 있다. 언덕은 놀부 심보로 살다 죽은 사람의 묘처럼 풀 한 포기 없다. 독한 수면제를 복용했는지 오래전에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나는 창 쪽에서 시선을 떼고 분교장을 힐끔 본다. 그는 아까부터 방학계획표를 열심히 짜고 있다. 나무젓가락만 한 안경테가 불편한 건지 관자놀이 쪽을 장지로 매만지고 있다. 그는 무척이나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성싶다. 두 명의 교원밖에 없지만 그래도 분교장이라고 데스크 위에 명패까지 소유한 모습이 제법 권위 있어 보인다. 지금쯤 한창 놀며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아이들에게 규칙 생활을 하라는 둥, 일기는 꼭 써야 한다는 둥, 자신도 실천하지 못할 일을 분교장은 너희들의 당연한 의무, 라고 단정하듯 분장술처럼 꾸미고 있다. 녀석들은 이 계획서가 무슨 큰 국가 간의 조약이라도 되듯 식물채집을 하고 꼬박꼬박 일기를 쓰고 그럴 테지.
상급반 학생들이 청소시간에 닦아 놓은 유리창을 점검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마 그녀의 작은방에는 도배지가 없어 벽에 온통 신문지나 잡지 같은 것을 북어처럼 북북 찢어서 발라 놓았지?”
친구 녀석은 안부도 묻지 않고 그렇게 말을 한다. 그건 마치 사후의 세계를 경험한 신자의 몽환적인 말투 같다. 말하자면 ‘긴 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강물은 빨간색인 것 같았구요. 강변에 황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푸른 색깔 같았어요’라고 하는. 나는 잠깐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그래, 그랬어.”
조그만 일에도 간섭하고 분개하며, 또 남의 전화 엿듣기를 즐기는 분교장을 의식한 탓일까. 나의 단정에는 기가 죽어 있다. 실은 친구의 전화가 무진장 반갑기 그지없다. 아니 수화기를 들자마자 와락 튀어나온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겹도록 목이 멜 정도다. 광주에서 문화부 신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예술가처럼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탓에 둘도 없는 친구인 내가 그쪽으로 전화를 걸지 않으면 좀처럼 그의 목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그래, 그랬어. 그만큼 나의 짧은 단정은 친구의 질문에 대한 확신 있는 응답인 셈이고, 또 사실이 그랬다. 그나마 햇살이 정통으로 내리쬔다고 해도 골방의 창틈으로 비껴 들어오는 일몰의 잔광처럼 싸늘하게 느껴지곤 하던 그녀의 작은방 벽 윤곽이 점점 클로즈업되면서 다가오는 사물의 정체처럼 확연해 보인다.
그래 그랬어, 라는 대답이 오랜만에 전화를 건 친구에게 무성의함을 심어줬다고 해도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친구는 나의 무심함을 질타하지 않고 계속 그 시절을 들춰낸다.
“그때 얼마나 추웠었니? 지금 겨울은 그때에 비하면 겨울도 아니지. 그런데 그녀 아버지는 오치 양조장에 다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잡지류가 생겼을까?”
친구는 광주 양동시장에서 좌판에 옷가지들을 벌여놓고 ‘사요! 싸요!’나 ‘골라골라골라골라’를 일 초만에 따발총처럼 연발하며 옷을 팔던 사람이 그녀라고, 평소 그녀 이야기를 자주 했던 나에게 주지시켜주었으면 그걸로 됐지, 짐짓 방과 도배 따위의 엉뚱한 이야기만 좌판 위의 옷들처럼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어김없이 맞는 말이긴 하였다.
유년 시절은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추억의 한 페이지듯, 나에게도 결코 예외는 될 수 없으리라. 그러자니 남다른 데가 많아 보였던 그녀의 작은방이 떠오른다. 친구가 들춰낸 기억보다 하나 많게, 나는 그 시절 작은방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잡지를 그녀가 뒤적거리며 패션모델의 꿈을 자신만만하게 공상했었던 이미지까지 떠올린다.
“야, 몰라보게 달라졌더라. 어떻게 사람이 그런 식으로 변할 수 있는 거냐? 이건 완전 코미디야. 구경꾼이 저절로 몰려든다니까. 개그우먼 해도 되겠더라.”
소설책을 통해 인물묘사 부분을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다. 정말 코미디 같은 몸짓이었을까. 남들 일상사에 털끝만큼도 관심 없던 친구가 자신의 생활패턴까지 바꿔가며 나에게 알릴 만큼 그녀의 존재가 범속하지만 파격적인 개그였을까.
사실 친구가 나에게 호들갑까지 떨어가며 전화를 걸었던 건 그럴 만한 단서를 깔고 있기는 하다. 그녀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된 나머지, 이를 어떡하면 좋겠냐고 엊그제 친구에게 연락을 취한 건 바로 나였다. 병원에 데려가는 일쯤이야 문제도 아니겠지만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뒤처리를 누가 감당할 거냐고 하면서 신문광고 구인란에 그녀 이름을 언급하면 어떻겠냐고 얘기했다. 사실 그녀만이 아버지의 보호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녀 위로 언니가 두 명 있었고, 큰오빠가 뱀에게 물려 죽었다고 해도 여전히 건재한 작은 오빠가 있었다. 죽은 큰오빠는 키가 멀대같이 커서 술 냄새 풍기던 재강을 양식처럼 먹던 시절, 동네 아이들이 <메주>라고 놀려댔다.
친구도 그랬었겠지만, 나는 한술 더 떠서 그 시절에 우리의 임무란 썩은 두엄처럼 말라빠져서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갈 적절한 명목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당시 흑백텔레비전만 봐서 일상생활까지 침투해 버린 어떤 유희의 권태로움마저 밀어내고 우리들의 눈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던 칼라잡지 말고도 혀끝에 군침을 돌게 만들던 재강이 양푼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막걸리를 빚고 남은 것을 그녀 아버지는 날마다 집으로 가져왔다. 우리는 그게 술찌끼라는 것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너, 안 만날 거니? 시간 나면 광주 한번 올라와. 그러고 보니까 곧 방학이겠구나. 꼭 한번 와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서둘지는 마라. 업무차 양동시장을 자주 지나치는데, 그때마다 발작에 가까운 제스처로 옷을 팔곤 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나는 친구에게 그녀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의 행방에 관심 없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녀 일로 해서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나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 아버지가 몇 년째 앓아왔던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건 열흘 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큰 독에 넣고 갓난애 장사 지내듯 야산에 가매장했다. 혼자 남은 십수 년을 그는 걸인으로 살아왔다. 가족들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막내딸인 그녀가 몰래 와서 섧게 울고 간다고 귀띔으로 들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구걸을 하고 신세타령을 늘어놓아도 곱게 미쳐간다 싶더니 술에 중독이 되고 나선 아무나 붙잡고 비렁뱅이 행세를 하기 바빴다. 그러자니 닷새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오치리 장터가 그의 활동 무대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 장날이 되면 일일찻집 비슷하게 관공서 직원들이 나와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쓰겠다며 여러 가지 차를 팔던 장텃가 초가를 제집 드나들 듯했다. 그곳은 우리가 재강을 양식처럼 먹던 시절에 유랑하는 서커스 단원이 들어와 외줄 타기와 사발 돌리기를 완벽하게 보여준 후에 과연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인 약을 팔기도 했었다. 서커스 공연은 시대의 조류에 밀려 퇴보했지만 주인 없던 초가는 민속 마을처럼 고스란히 보존되어 내려왔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창가로 간다.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고, 꼬리를 치켜세운 땅개가 운동장에 코를 박고 무슨 냄새를 맡고 있다. 박 주사가 포수의 자루 같은 배낭을 도둑처럼 어깨에 걸치고 교문을 들어선다. 땅개는 하던 일을 포기하고 배낭 쪽으로 간다. 냄새를 맡기 위해 껑충껑충 뛰자 박 주사가 배낭을 허리춤까지 내려놓더니, 그것을 쭉 뻗어 개를 저만치 밀어낸다. 그도 나처럼 이곳이 모교인데, 자랑스럽게도 1기 졸업생이다. 비록 초등학교밖에 안 마쳤지만 그의 행동거지는 사범대학까지 다녔다는 분교장보다 훨씬 모범적이다. 그가 열 살 아래인 분교장에게 출퇴근 시 꼬박꼬박 인사하는 걸 보면 금방 안다. 그럴 때마다 분교장은 자기 제자를 다루듯 ‘어이. 그래’하고 만다.
일 년 전, 고향마을로 초등교사 발령이 난 건 우연이었고 행운이었다. 하지만 신규 임용 시 연고지와 도서벽지 학교로 교원인사를 단행한다는 교육부의 방침을 뒤늦게 알게 된 건 큰 절망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설령 이 세상이 원시시대로 회귀한다 해도 미덕 하나만 잘 준수한다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는 어떤 아름다운 지식체계의 습득이 아닌, 기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부품 노릇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겠냐는 공식 같은 학문이었다. 남달리 머리가 좋다는 인간들이 무슨 규칙처럼 만들어놓은 <신규 임용은 반드시 연고지로>라는 약속을 추종하는 타율적 공부만 해온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덕분에 나는 아직도 젖먹이처럼 엄마 품속에서 따뜻하게 자라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겨울철이면 자주 식혜를 해주던 엄마의 정성은 아이 때나 내가 고향마을 교사로 성장했을 때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트에서 파는 식혜를 마실 때마다 나는 시간이 정지된 건 아닌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오싹하게 느끼곤 한다.
검게 타 버린 언덕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이미지가 부유하는 먼지 입자처럼 흐늘흐늘 떠오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패션모델이 되지 못한 것을, 아니 걔는 꼬맹이 엄마를 닮아 원체 키가 작았으니까 그건 이해가 가지만, 왜 하필 시장바닥에서 광대모양 행동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녀는 키 때문에 결코 모델 같은 것이 되지 못할 터, 라는 나만의 단정이 현란한 수사로 기교를 부린 탓에 모호한 문장이 되어 버린 것처럼 그녀의 성장 과정을 한층 삐딱하게 만들어 버린 느낌이다. 차라리 그녀가 일찍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였다면 내 기분도 이렇게 잡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