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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5]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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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 무주심無住心 <독서 : 탈출 1,8-14.22 / 복음 : 마태 10,34—11,1>
며칠 전 쉬고 있던 교우가 30년 만에 미사에 참석했다. 그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시어머니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키며 성당에 나오는 것을 고수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긴 세월이 흘렀어도 믿음을 잃지 않고 다시 성당을 찾아온 그 교우가 고맙다. 정말 고맙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복음적 가치들 때문에 세상 것을 등지고 잘라버려야 할 때가 종종 있다. 하느님 현존을 부인하는 상대주의나 세속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또한 복음적 가치들(사랑, 믿음, 희망, 생명, 비움, 나눔, 섬김, 친교, 평화, 일치 등)에 어긋나는 삶의 방식과는 타협하지 않고 그것들을 배격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때문에 예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불교에는 무주심無住心이라는 용어가 있다. 무주심이란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머무름이 없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하느님께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록 부모나 소중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고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가족들이나 가정사에 얽매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한 적은 없는지 오늘 하루 묵상해 본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고 계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말씀자료 : 김권일 신부] |
[다해]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19-07-15) I 묵상기도방 |
시작기도 : ▷
주님, 평온하게 잘 지내다가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또 타인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점점 저 자신에게 빠지게 됩니다. 제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 분노에 사로잡혀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게 되면서 게으름에 빠져듭니다. 주님, 저의 게으름을 당신께 모두 봉헌하오니, 저를 당신께서 비추시는 빛으로 인도해주소서. |
오늘의 기도지향 : 실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고난에 처할 때 당신을 더욱 생각하게 하시고, 더욱 당신을 찾게 하소서. 당신의 은총으로 힘을 주시어 세상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더 큰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영적독서 : 쌀
대부분 현대인은 식탁에 오르는 양식이 어디서 어떻게 무슨 사연을 지니고 오는지는 알 바 없고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대기업 아니면 취직도 하려 들지 않고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싫어한다지만, 수많은 직업 가운데 농사만큼 거룩하고 중요한 직업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부처도 못 살리는 굶주린 사람을 농부는 살린다고 말하는 이규보는 쌀 한 톨 한 톨이 곧 우리 생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잘 표현한다. 우리나라 국가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정치인들도 농부를 부처님처럼 존경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1년에 2천만 톤의 양식을 먹는데도 우리 땅에서 생산하는 식량은 겨우 6백만 톤 정도다. 식량 자급률이 30퍼센트도 안 된다. 석유 수입 세계 5위 국가인 우리나라는 곡물 수입도 세계 5위다. 가장 중요한 에너지와 식량을 거의 전부 수입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 식량 자급률은 60퍼센트가 채 안되지만 쌀만은 자급률이 100퍼센트다, 식량 사정이 불안하긴 하지만 쌀만은 우리나라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다. 이런 쌀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농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황창연, | '북극곰! 어디로 가야 하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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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15주간 월요일(2019-07-15) | 말씀 묵상방 [Lectio Divina & Comtemplation] * 독서 : 탈출1,8-14.22 / 복음 : 마태10,34-11,1 * |
선조들의 후예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가 된다. 스테파노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요셉의 내력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 임금은 우리 겨레에게 교활한 정책을 써서 우리 조상들을 학대하였고 갓난아기들은 내다 버리게 하여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사도 7,18-19).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히브리 백성들은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대'의 표징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사이는 아주 깊이 단절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오심이 사람들 안에 분열을 가져온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아버지와 똑같은 환대를 받으셔야 한다.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받아 들일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님께 완전히 귀속하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의 크기가 그리스도께 속하는 정도를 나타낸다(복음). |
<말씀묵상-1> : † 평화 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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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2> : † 복음의 요구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로서의 참된 삶의 자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슬러 복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신앙적인 결단과 선택 속에, 모든 것에 앞서 항상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우겠다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복음적 가치와 신앙의 진리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과 같은 가족과 혈육까지도 주님 때문에 포기하고 뒤로 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더라도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살아서는 안 되며, 어떤 것도 주님보다 낫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시는데, 칼은 무엇을 자르는 도구로서, 잘라서 서로 갈라놓으면 갈라진 둘이 서로 분명히 구분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칼’이라는 이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과 선택에 대한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보통으로 결단력이 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맺고 끊는 선이 분명한 사람을 보고, ‘칼’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과 나 자신의 유익을 챙기고, 자신의 감정의 요구에 따르는 일에는 조그마한 손해와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칼같이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면서도, 복음의 요구를 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믿음 없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를 자주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는 바보처럼 너그럽고 착하게 살고 주님의 일을 행하고 복음의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칼처럼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칼로도 끊을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혈육의 정과 유대조차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소중한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신앙으로 꿋꿋하게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함으로써, 주님의 크심과 좋으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은총 속에서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말씀자료 : 이기정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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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