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헌신의 의미
예수를 구주로 믿는 기독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헌신’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기독인들에게 헌신이 중요하다는 반증이리라. 믿음 있는 성도라면 마땅히 헌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헌신에 임해야 할텐데, 과연 얼마나 많은 성도가 헌신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에 성경이 말하는 헌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헌신의 본이 될 수 있는 설교 한 편을 싣는다.
Ⅰ. 헌신의 의미
1. 헌신의 성경적 의미
성경에 나타난 ‘헌신’에 대한 용어를 살피도록 한다. 구약에는 구체적으로 ‘헌신’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간접적으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용어가 있다. 신약에는 ‘헌신’이라는 말은 없지만 의미를 풀어서 구체적으로 뜻을 제시한 구절이 등장한다.
1.1. 구약에 나타난 헌신
1.1.1. 자원한 예물: 네다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네다바, )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여기서 히브리어 ‘네다바’는 ‘자원함,’ ‘기꺼이 드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이란 의미다. 이때 헌신은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거나 혹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제공하는 것, 곧 바침이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1.1.2. 힘을 다하는 행위: 밀루 예드켐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밀루 예드켐, )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 여기에서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는 히브리어로 ‘밀루 예드켐 라아도나이/야웨’()인데, 직역하면 “여호와를 위해 너희 손을 가득 채우다”란 뜻이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이스라엘의 반역이 등장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내려오는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며 숭배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는 장면이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편에 있어 그에게로 나아오는 레위인들에게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우상 숭배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형제, 친구, 이웃을 도륙하라고 명령한다. 레위 자손들은 모세의 말대로 준행하여 백성 중 삼천 명 가량을 죽인 바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께 헌신함이 되었다.
레위인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자들을 멸하는 데 그들의 힘을 다했다. 전술하였듯이 원어에서 ‘헌신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 너희 손을 가득 채우다”로서 그들의 행위를 뒷받침하는 표현이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는 것 혹은 누군가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손을 가득 채우다’의 손은 히브리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인데, 히브리어의 손 ‘야드’()는 수고, 힘, 노력, 능력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손을 가득 채우다’의 원어적 의미는 ‘힘을 다하다, 수고하다, 애쓰다, 헌신하다’라는 뜻이다.
1.1.3. 자신을 드려 예배함: 아바드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아바드, )”(출 3:12) ‘아바드’는 섬기다, 일하다, 수고하다, 헌신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아바드’는 대개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일하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종의 위치에서 섬기는 헌신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에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출 3:12).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게 헌신하는 것은 그에게 예배드리는 것과 일치하며, 더 나아가 제사 예물을 항상 하나님께 드려 섬기는 제사장의 위치를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신된 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자, 혹은 때에 따라 예배와 관계되어 일하는 자를 칭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1.1.4. 바쳐진 거룩한 신분: 헤렘
히브리어에서 헌신을 명사로 사용할 때는 ‘헤렘’()을 쓴다. ‘헤렘’의 의미는 ‘바쳐진 것,’ ‘헌신하다’로 번역된다. 레위기 27장 28절에 의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모두가 거룩하다. 따라서 개인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신 13:17).
‘헤렘’은 성경에서 특히 전쟁과 관련지어 사용되었다. 전쟁에서 모든 탈취물은 하나님께 바칠 것을 서원했다(민 21:2-4).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죽여야 했으며(신 20:16), 가연성 물질은 태워야 했다(신 7:25-26). 이러한 규례가 확장되어 바쳐진 모든 물건은 제사장들의 소유가 되었다(레 27:21, 민 18:14, 겔 44:29).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게 명하셨고(삼상 15:1-3), 여호수아에게도 모든 가나안 사람을 멸절시키는 책임을 맡기셨다(수 10:1, 28-40; 11:11-21).
여기서 우리는 ‘헤렘’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고 따르는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시지만, 자신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벌하시는 분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훈으로 받아 우상숭배에 빠져들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신분이라는 의미도 있다.
1.2. 신약에 나타난 헌신
1.2.1. 아낌없이 드리다: 파리스타네테
신약 성경에는 헌신이란 직접적인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헌신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몇 가지 용어는 등장한다. 먼저는 ‘파리스타네테’(, 롬 6:13)다. 이 단어는 ‘곁에 둔다,’ ‘준비한다’(to place beside, to have in readiness), ‘처분에 맡긴다’(to place at the disposal of), ‘드린다’ 혹은 ‘바친다’(to present, dedicate, consecrate, devot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6장 13절에서는 ‘드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동사 ‘파리스테미’()의 현재 능동태 명령법 2인칭 복수다. 따라서 성경은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한다(롬 6:13). 이 중에 “… 드리며,” “… 드리라”의 헬라어 또한 ‘파리스타네테’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 자신과 지체를 하나님의 곁에 두어서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준비하라는 말씀이요, 우리 자신과 지체를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그분께 맡기라는 말씀이다. 곧 우리 자신과 지체를 성별(聖別)하여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 된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된다. 진실로 주님은 ‘파리스타네테’로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우리에게 다 주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헌신이 주를 믿는 우리로 하여금 헌신을 촉발케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께 드릴 헌신이다.
1.2.2. 산 제사를 드리다: 뒤시안 조산
“…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뒤시안 조산, )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서 ‘뒤시안’은 ‘희생’ 또는 ‘제물’을 의미하며, ‘조산’은 ‘산,’ ‘살아 있는’의 뜻을 가진다. 우리는 예수의 영적 사랑에 접촉된 사람으로 그를 사랑하고 또 그가 살아가시던 삶을 살아간다. 스데반이 담대히 주의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한 것처럼,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자기를 바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제사 개념에 대한 신약의 이해를 모색해 볼 수 있다. 로마서 12장 1절의 ‘산 제사’ 용어의 배경은 그리스도까지 소급될 수 있다. 우선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단과 희생 제사를 당연한 요소로 수용한다(마 5:23-24; 23:18). 사도 바울도 헌신적인 희생 제사를 구원받은 백성의 기본적인 의무로 취급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우리 자신을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을 교육하고 지도하며 물질을 드리는 것까지가 모두 제사(뒤시안)요 예배(레이투르기아)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영적 헌신이요 제사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헌신이다.
결론적으로 헌신이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요(네다바, ), 바치는 것이며(헤렘, ), 종의 위치에 있는 것과 같이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고(아바드, ), 자신이 할 수 있는 온 힘을 기울여 수고하는 것이다(밀루 예드켐 라아도나이/야웨, ). 특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자신과 지체와 물질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이 쓰시도록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예배로써 섬기는 것을 뜻한다. 영적 예배(롬 12:1), 신령한 제사(벧전 2:5)가 빠진 헌신은 하나님께 있어서 참된 헌신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헌신의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헌신은 자기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헌신이란 하나님을 향한 진실의 표현이요, 믿음의 표현이요, 사랑의 표현이요, 충성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한다 하면서 자기표현이 없으면 이는 진정한 헌신이 아니다.
헌신하려면 먼저 헌신할 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범죄하여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롬 4:25; 5:8),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주와 함께 죽어 주와 함께 장사지냈고, 새 생명 가운데 거하도록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입은 자라 말씀한다(갈 2:20, 고후 5:14, 롬 6:1-11). 그러므로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롬 6:11). 이와 같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 된 성도의 삶을 살되, 일생동안 주를 향한 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 사도가 그러한 삶을 살았듯, 곧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고후 5:9), 깨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고(살전 5:10),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 영광 위해 살고(고전 10:31),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롬 14:17-18), 그리하여 죽든지 살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나타내는 자(빌 1:12) 가 되는 그러한 참된 헌신이 되어야 한다.
2. 헌신의 이유와 방법
2.1. 왜 헌신해야 하는가
당위성에 관한 문제다. 다음의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헌신해야 한다(고후 5:15).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둘째,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이다(고전 6:19-20). 주님은 우리 몸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존재라고 말씀한다.
셋째, 우리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고전 6:20). 주님은 우리를 원수 마귀로부터 피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촉구하신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이는 이미 마태복음을 통해 교회에 주신, 또한 기독인들에게 허락하신 지상대위임령과도 연결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9) 이는 전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 모두가 헌신이라는 말씀과 다름이 없다.
넷째, 복 받기 위하여 우리는 헌신해야 한다. 막연한 기복신앙이 아니다. 주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약속하신 것이 복이기 때문이다. 첫 열매와 연결된 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다섯째,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헌신해야 한다. 헌신하지 않으면 사랑을 못 받는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헌신은 자기표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2.2.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
2.2.1. 가치 있는 것을 드려야
마리아가 예수께 부은 나드 향유의 값은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다(막 14:5). 당시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의 품값이므로 마리아의 향유는 장정 열 달치 품값에 해당한다. 마리아는 그 오라비를 무덤에서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 고가의 향유를 그 머리에 부었을 것이다. “저가 힘을 다하여”(8절),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절)는 칭찬은 주께서 그녀의 정성을 열납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예수께서는 과부의 연보 두 렙돈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하셨다. 그것은 비록 적은 액수지만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이다(막 12:42-44). 액수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진실이 중요하다.
2.2.2. 우선순위가 있어야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영순위가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은 이를 잘 정리해 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우선순위에 대하여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는 대상의 우선순위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7절)하시며 우선 행하고 나중에 할 것을 말씀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주님’ 자신을 대비시켜서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들은 주변에 늘 있지만 주님은 이제 곧 그들 주변에 계시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여인의 선행을 보는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제자들이 여인의 행동을 ‘허비’하는 것으로 본 것은 가룟 유다에 의하여 제기된 견해였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그 돈을 훔쳐 가기 위해서였다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였다(참조, 요 12:4-6). 무릇 선행 뿐 아니라 모든 일 처리에 있어서 선후가 있고 완급이 있어야 한다. 항상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보다는 이제 곧 그들 주변에서 떠나실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은 기회의 우선순위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기회의 우선순위에 대한 뜻이 들어 있다. 항상 있는 기회보다 한 번밖에 없는 기회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마리아의 선한 행동을 당신의 생애 최후에 있는 가장 값진 환대로 생각하신 것이다(8절). 인간에게 최우선 순위로 정해야 할 두 가지 기회가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회개’해야 할 기회며, 둘째는 하나님을 위해서 ‘지금 이때’가 언제나 최우선의 기회다.
2.2.3. 감사와 사랑과 기쁨이 담겨야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주님께서 여인의 병든 오라비를 살려 주셨고,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세상 많은 사람이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중에도 주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눅 7:36-50). 이에 대해 여인은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 한다. 여인은 예수님을 다른 누구보다 사랑했다. 노동자의 삼백 일분 봉급에 해당하는 향유를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치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한 행위다. 사랑에는 아까운 것이 없다. 전체를 주어도 모자란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확증으로 목숨까지 버리셨다. 많이 사랑하는 자는 많은 것을 드린다. 마리아는 그녀의 전 소유를 바칠 만큼 주님을 사랑한 것이다.
2.2.4. 미리 준비해서 드려야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미리 준비하여 드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으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신이 아니다. 자녀를 위해 즐겨 준비하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시다.
2.2.5. 힘껏 최선을 다해야
창조주요 구속주요 심판주 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피조물 된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결국 그로부터 “네가 힘을 다하였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일이겠는가.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보자.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2-3)라며, 이어지는 말은 우리에게 신령한 도전을 하도록 힘을 준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7)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붓는 장면을 요한은 아름답게 묘사한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막 14:3)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 마리아의 이러한 태도는 주님께 대한 최대의 경의와 최고의 사랑과 최선의 헌신을 나타내준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최고와 최선의 것을 요구하시고, 인간들이 그 뜻에 순종했을 때 더욱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막 14:8)
2.3. 무엇으로 헌신할 것인가
‘헌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물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세상에서도 두 주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물질을 단호히 드리는 것은 큰 믿음을 필요로 한다. 죄 많은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렸듯이(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물질을 통해 우리는 주님 앞에 믿음을 보이고, 사랑을 표현하고, 헌신을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 몸과 지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첫 번째 편지에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고 하여 피 값 주고 사신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를 통해서는 “…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고 말씀하여 우리 지체까지도 주님께 드릴 것을 촉구한다. 이처럼 헌신은 우리 자신과 우리 지체를 드리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드리는 것이며,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와 병기와 하나님의 도구로, 육신도 마음도 인격도 재능도 시간도 마땅히 그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3. 헌신의 결과와 보상
진정한 헌신에는 반드시 따르는 보상이 있다. 먼저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라고 하여 땅에 고루 적용될 하늘의 법을 말씀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하여 심은 대로 거두는 것에 대해 분명히 꼬집어 말씀한다.
하나님은 풍성하게 하시고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 “심는 자에게는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먹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우리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아버지께서 풍성한 수확을 약속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하셨는데, 이는 아들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도 아끼지 않으실 것을 확언하신 것이다.
영원한 보상이 있다. 영원한 이름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 이름 역시 빛난다는 말씀이다. 마가복음을 보더라도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막 14:9)고 단언하시는데, 이는 인간의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의 헌신이 기념될 것이라는 이 보상에 비하면 그녀의 헌신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작은 헌신은 영원한 큰 보상을 결실케 하는 생명나무와 같다. 말라기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고 하여 영원한 보상을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약속이다. 요한복음과 로마서를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고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고 말씀하는데, 인간에게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 아니겠는가.
Ⅱ. 헌신 설교: 옥합을 깨뜨려(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어떤 사건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오병이어의 이적과 더불어 죄 많은 여인의 헌신 사건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여인을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 드린 헌신자로 잘 묘사하고 있다.
1. 옥합을 깨뜨리다
하루는 가버나움 동리의 바리새인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다. 예수님 당시 잘사는 사람들의 집은 대개 가운데가 정방형으로 오목하게 트인 뜰을 끼고 사방으로 건물이 지어졌다. 이러한 집의 마당에는 화단과 우물이 있고, 따뜻하고 화창한 날에는 거기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흔히 이런 집에서 랍비는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귀빈을 초청하곤 했다.
이때 주인은 초청한 손님에게 적어도 세 가지 의무를 정성껏 수행해야만 한다. 첫째는 주인이 손을 손님의 어깨에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샬롬’으로 인사하면서 입을 맞추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집에 준비해 둔 물 항아리의 물을 떠다가 그 손님의 발을 씻기고, 피로회복을 위해 시원한 물을 그 발 위에 붓는 것이다. 이유는 당시 유다 지방의 길은 먼지가 많고 특히 신이라고는 하지만 밑창만 붙은 샌들 모양의 신발을 신고 다녔기 때문이다. 셋째는 향이 좋은 향수나 아니면 장미향 한 방울 정도를 손님의 머리 위에 붇는 것이다. 이러한 예절은 당시 이름 있는 랍비들의 경우 빠뜨릴 수 없는 존경의 표시였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의무를 아는 바리새인 집에 초청을 받으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리새인 집에 초청 받아 들어가 앉으셨을 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그 자리에 동네에 살고 있는 한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누가복음은 그 여자를 ‘죄인인 한 여자’(눅 7:3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육적, 영적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때 그 여자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등 뒤에 서서 울며 자기가 흘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셨다. 나중에는 자기의 머리털을 풀어 주님의 발을 씻겼다. 또 그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갖고 온 옥합을 깨뜨려서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을 동안에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뜻밖의 사건 앞에 흥분한 자는 예수님을 초청한 집 주인인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그 순간 주님께 도전의 화살을 마음속으로 겨누었다. 만일 예수님이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자기를 만지는 여자가 누구며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더러운 죄인인 것을 모를리가 있겠는가 생각했다. 바로 그때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시고 주님이 집 주인 시몬을 불러 그에게 물으셨다. “어떤 큰 부자가 두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 또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나리온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이 빚진 자 두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도무지 갚을 수가 없어 주인은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때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 물론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주님은 그의 대답이 옳다 하시며 자기 발 앞에 있는 여인을 돌아보신다. 그리고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느냐!” 하시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도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 하였도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발에 부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주님은 그녀를 향해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 7: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고 선언하셨다. 실로 위대한 생명의 선언이요, 자유와 해방의 선포가 아닐 수 없다. 이 여인을 보라!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2. 이 여인을 보라
우리는 이 여인 속에서 우리의 실존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여인의 모습을 면밀히 검토하며 오버랩 되는 우리 모습을 같이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 여인은, 첫째, 죄인이다(눅 7:37). 죄인이라는 말은 당시 사회에서 흔히 창기들에게 쓰는 말이다. 주님은 그녀의 죄를 자기 힘으로는 갚을 길 없는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비유하셨다(눅 7:41). 그리고 표면적으로 그녀를 많은 죄를 지은 여자라고 하셨다(눅 7:47).
둘째, 죄 사함을 얻었다(눅 7:48). 주님은 그녀를 많이 탕감 받은 여자라고 하셨다(눅 7:43). 그녀는 본래 오백 데나리온을 자기 힘으로는 갚을 여망이 없는 여자였다. 말하자면 그녀가 지은 그 많은 죄를 자기의 노력이나 수신제가로는 속죄 받을 길이 없었다는 의미다. 오직 부자의 탕감 은택으로만 살 수 있었을 뿐이다. 이는 그녀의 많은 죄에 대한 큰 용서와 사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사 곧 특별한 은총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눅 7:50). 그녀에게 일어난 믿음은 그녀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엡 2:8).
넷째, 그 결과 감격적으로 주님을 사랑했다(눅 7:47).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이어서 그녀의 감격적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사랑을 표현하다
세상의 말 중에도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표현되지 않은 헌신은 더 이상 헌신이 될 수 없다. 헌신은 바로 사랑으로 나타나고, 사랑은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죄인 된 여인의 헌신과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겠다. 첫째, 주님이 어디 계시는 것을 앎에서 나타났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서 여인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라고 했다. 그녀가 주님을 사랑하는 감격적인 사랑은 주님의 행방을 놓치지 않는 것으로 시작했다.
둘째, 주님을 찾아왔다. 마가복음 14장 3절을 보면 그녀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라고 말씀한다. 감격적인 사랑은 떨어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 올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던 그녀였지만, 그녀가 알고 믿는 주님은 죄인의 친구였기에 죄 많은 그녀는 그 모든 상황을 능히 극복하고 주님을 찾아올 수 있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이렇게 달려오는 것이다.
셋째, 주님 앞에서 겸손했다. 누가복음 7장 38절에는 죄인 된 그녀가 예수님 가까이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주님의 그 발은 전도여행으로 먼지 묻은 발이요, 피곤한 발이요, 잠시 잠깐 후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릴 발이다. 그녀는 그 발 곁에 서 있는 것이다.
넷째, 주 앞에서 회개했다. 그녀는 그 발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의 실존임을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눅 7:38).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깊은 죄악의 수렁에 빠진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참회의 눈물이었다. 벵겔(Bengel)은 그녀의 이 눈물을 가리켜 “그녀의 눈물은 가장 귀한 액체다”라고 표현했고, 어거스틴(Augustine)은 그녀의 눈물을 가리켜 “그녀는 그 심장의 피인 눈물을 뿌렸다”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지금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있다.
다섯째, 주께 헌신했다. 회개 이후에 마땅히 이어져야 할 것이 있다. 누가복음 7장 38절은 그 모습을 묘사한다. “자기 머리털로 씻고” 머리털은 여자의 왕관이라 했다. 더구나 대부분 여자의 머리털은 허영과 교만으로 남용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왕관을 예수 그리스도의 상하신 발 앞에 던졌다. 이것은 그녀의 겸손과 헌신이다. 벵겔은 그녀의 이러한 겸손과 헌신을 가리켜 ‘실로 우아한 존경’이라고 했다.
여섯째, 사랑의 복종이 일어났다. 헌신의 방법은 순종과 복종이다. 이 여인도 그 순서를 놓치지 않았다. 누가복음 7장 38절을 보면 “그 발에 입 맞추고”라고 말씀한다. 그녀는 주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했다(눅 7:45). 보통의 경우 손이나 뺨에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입을 맞춘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발에, 먼지 묻고 냄새나는 발에 입맞춤으로써 그 사랑에 감격한 지극한 헌신을 표시했다.
일곱째, 값진 감사로 나타났다. 사랑과 헌신의 최후에는 감사가 남는다. 누가복음 7장 38절에는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여인의 사랑의 최종 모습을 말씀한다. 그녀는 가슴에 안고 왔던 옥합의 가느다란 목을 깨뜨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쏟아지는 향기 그윽한 향유를 주께 부어 그 사랑에 감격하는 감사를 표했다. 실로 값진 헌신이요 봉헌이다.
이 여인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았던 죄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에게 친구요 구주요 생명이셨다. 주님은 그녀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그 결과 그녀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옥합을 들고 주님을 찾아 와서 감히 주님 곁에 앉지도 못하고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바리새인의 집에 있는 발 씻을 물 대신에 자신의 가슴에 고인 진한 회개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씻었다. 또한 바리새인의 집에 있는 수건 대신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 이어서 시몬에게는 없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향유를 주께 쏟음으로써 주를 향한 농도 짙은 감사와 헌신을 표현했다.
4. 힘을 다해 헌신하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죄인 된 자기를 지극한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까닭이다. 눈물과 함께 향유를 드린 것은 죄를 회개함도 물론이나, 그 보다도 죄 사함 받은 은혜가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드린 것이다. 여인의 헌신에 대한 방법을 정리해보자. 먼저는 자원하는 헌신이었다. 유대사회의 풍속에서는 초대받지 않은 자가 연석에 출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로부터 은혜를 입었기에 주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헌신하고 싶은 갈급한 마음이 그녀에게 충만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그녀의 헌신은 겸손한 헌신이었다. 그녀는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헌신의 대상은 주님의 발이었다. 이 여인은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의 깊은 상처를 깨달았다. 곧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주님이 용서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만큼 그녀는 자기를 천하게 보고, 주님을 높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되게 한다.
그녀는 눈물로 헌신했다. 이 눈물은 죄를 용서해 주심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요, 회개의 눈물이며, 영광의 눈물이었다. 은혜 받은 사람에게 이 과정은 빼 놓을 수 없다.
또한 가장 귀한 것, 가장 값진 것으로 헌신했다. 그녀는 옥합에 담긴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었다. 이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당시 5-6명 가족의 일 년분 생활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 들어 가룟 유다는 낭비라고 했다(막 14:4-5, 요 12:4-6). 하지만 만일 그녀에게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다면 그녀는 그것까지라도 주님께 드렸을 것이다. 그렇다.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헌신할 때 세상 사람들은 낭비라고 한다. 비웃고 조롱한다. 많은 사람을 돌보는 데 써야만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산술적으로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는 그것이 낭비일지 모르나, 이 여인이 주님께 드린 향유의 헌신은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요, 감사의 표현이다. 결국 인생이란 창조적 자기표현이다. 그러나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헌신이라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소망이 있고 향기와 개성이 있다.
인생은 자기를 표현할 때 참 행복이 있다. 화가는 그림 속에 자기를 소멸할 때 값진 예술품이 창작되고, 과학자는 연구에 자기를 소멸할 때 보람을 느끼고, 작가는 글 속에서 자기를 깨우칠 때 기쁨을 만끽한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는 어디에 자기를 소멸할 때 보람을 느낄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다. 예수께 내 자신을 소멸시킬 때 가장 큰 보람이요, 행복이요, 영광이다. 이는 그분이 나를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주님만 생각하고 헌신한 순전한 헌신이었다(막 14:3). 공석에서 여성이 머리를 푸는 것은 큰 수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헌신의 봉사를 할 때 그것은 영광이 되었다. 예수 중심, 그녀는 오직 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해를 따지거나 타산적이지 않았다. 공명심으로 하지도 않았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야 무엇이라 한들 상관하지 않았다.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밖에는 그녀에게 가진 것이 없었다.
5. 보상이 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드린 진정한 헌신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그 결과까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일은 하늘에서는 상이 있고 땅에서는 복과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주님께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마 26:10-12,눅 7:44-47). 형식으로 주님을 대접하려 했던 시몬은 대중 앞에서 무안을 당했지만, 그녀는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면 그녀가 행한 일도 높임을 받으리라는 칭찬을 받았다. 주님의 풍성한 사랑도 놓치지 않았다.
죄 사죄함을 받았다(눅 7:48).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정성이 우러났고, 그 사랑을 표시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시몬처럼 사죄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마음의 평안함을 얻었다(눅 7:50). 그녀의 믿음은 사랑의 행동으로 드러났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평안함을 누리는 특권을 누렸다.
가장 놀라운 것은 온 천하에 그녀의 이름이 전해진다는 점이다(마 26:13, 막 14:9).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발버둥을 치는가? 이 여인은 세상 끝 날, 예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그 이름이 길이 빛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오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옥합은 무엇인가? 젊음인가? 재능인가? 시간인가? 명예인가? 재물인가? 그 무엇이든 우리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헌신은 창조적인 자기표현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제물을 기뻐 받으신다. 말 1:7-10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산 제물 = 삶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드려야 함.
일반적으로 헌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일에 대한 헌신, 어떤 사람이나 관계에 대한 헌신을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되었다고 말할 때 그 의미를 크게 두 부분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헌신되었다고 이야기하는것이며, 둘째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헌신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헌신은 둘째 의미인 하나님의 뜻에 헌신되었다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보통 교회에서 헌신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가 교회의 사역에 열심을 가지고 참여하며,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 자체로 그가 온전히 헌신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헌신하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하여 책망을 받았다.
(계 2:1-5, 개정)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고 수고하고 인내하였지만 하나님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다. 물론 요 14:21 에 나와 있듯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 6:5, 마 22:37 에서 언급하듯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결과 외적인 모습만 남아 의무감 가운데 살아갔다.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의 특징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뜨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요 14:21, 개정)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둘째, 헌신은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하나님의 지상 사명에 헌신하는 것이다. 복음에 헌신하는 것이다. 세계 복음화에 헌신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헌신하는 것이다. 헌신된 사람은 자기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눅 4: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롬 15:16, 개역)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빌 2:21-22)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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