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 7:7-14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7-14 /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눅11:9-13] 구하라, 받게 될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구하면 받을 것이고, 찾으면 얻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9)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떡 대신에 돌을 주겠느냐? 10) 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뱀을 주겠느냐? 11)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12)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눅6:31]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진정한 율법의 가르침이요,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좁은 문;눅13:24]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 설 교 >
좁은 문, 험한 길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7:13-14, 신명기 30:15-16 / 이현우 목사
고대 서양의 격언에‘사람의 일생은 분기점에서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분기점이란 길 따위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곳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내용이 갈라질 수 있는 극적인 때나 장소를 맞닥뜨리게 된다. 분기점을 만난다. 어느 길로 가느냐, 어떤 길로 가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선택의 도전을 받는다. 물론 사람이면 누구나 이 선택의 도전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좌우간에 선택을 해야만 한다. 두 길을 함께 다 갈 수는 없다. 인류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선택에서 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늘 도전적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라 한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길 선택이 특출했다는 거다. 모세가 그의 생애 마지막이 가까워 왔을 때 백성들에게“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내 앞에 두었으니... 그러므로 나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선택하라”고 했다.(신 30:15-19) 여호수아도 죽음을 앞두고 그도 똑 같은 선택을 백성에게 제시했다.“너희는 섬길 자를 오늘날 선택하라”(수 24:15) 예레미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전했다.“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노니...”라고 했다. (렘 21:8)
분기점에서 시작되는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다. 이 길과 저 길 또 여러 길이 열린다. 그러하지만 어떤 이는 수준이 높은 길을 찾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은 낮은 길을 찾기도 한다. 자기의 갈 길은 각자 선택하고 결단하는 데에 달렸다. 예수님은 세상에는 넓고 쉬운 길이 있고 그 길은 많은 이들이 선택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길의 끝은 멸망이라 한다. 한편 좁고 힘이 드는 길이 있고 이 길을 선택하는 이는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생명이라 한다. 길의 선택은 간단했지만 나중 끝의 내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케베스란 이는 그대는 작은 문을 보는가? 그리고 그 문 앞에 인적이 드물고 여행하는 자가 적은 길을 보는가? 그것이 참된 교훈으로 인도하는 길이라 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하신 두 길의 차이점은 간단해보여도 그 내용은 깊다. 첫째, 그 차이는 어려운 길과 쉬운 길의 차이다. 좁은 문의 험한 길과 넓은 문의 평탄한 길의 차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 험한 길로 들어가라 하신다. 많은 이들이 나서지를 않아도 그 길, 좁은 문 험한 길을 선택하라 하신다. 이유가 있다.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은 두 길이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가는 길과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은 많은 이들이 올랐던 길이다. 훤하게 잘 나있는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이 길은 시원한 숲이 없고 뙤약볕이 따갑다. 한편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울창한 숲으로 덮인 음침한 길이다. 어디에서 불쑥 사나운 짐승이 튀어나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군데군데 이끼 낀 미끄러운 바위를 밟아 올라야 한다. 그러하기에 때로 위험하기도 하다. 무릎이 깨져 피가 흐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계곡 길에서는 시원한 그늘과 계곡의 물줄기가 끊이지 않아서 목을 축일 수 있다. 험하고 힘들긴 하지만 좋은 점이 많다. 다윗은 그의 찬송 시편에서‘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여기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다.
둘째, 그 차이는 먼 길과 짧은 길의 차이다. 오랫동안 가야할 길과 금방 도달하는 길의 차이다. 어느 부잣집에 설날을 앞두고 섣달 그믐날을 보내고 있었다. 주인이 하인 둘을 불러놓고 몇 마디 건넨다. 지나간 한 해 동안 고생들 많이 했으니 이제 내일은 설날이니까 새끼를 꼬라고 했다. 그것도 아주 가늘고 길게 꼬라 하면서 짚단을 내다줬다. 한 하인은 심통이 났다. 섣달 그믐날 밤에도 일 시킨다고... 굵게 꼬면서 자기 몫의 짚단을 다 해치웠다. 그러나 한 하인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밤을 새워가며 가늘고 긴 새끼를 꼬았다. 새벽이 되자 주인은 엽전부대를 들고 왔다. 그간 일하느라 애썼던 그들에게 보답할 참이었다. 하인들에게 이 엽전을 그 꼰 새끼에 꿰어가라 했다. 하지만 새끼를 굵고 짧게 꼰 하인은 별 수가 없었다. 주인이 한 마디 했다. 어렵고 힘든 길을 가야 그만한 대가가 크다고 일러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가야할 길은 먼 길이다. 교회의 사람이 가야할 길은 짧은 길이 아니라 아주 멀리를 보고 가는 길이다. 좁은 문 험한 길로 나서는 것이다.
셋째, 그 차이는 훈련해야만 하는 길과 내 마음대로 방종할 수 있는 길의 차이다. 목적한 곳에 이르기까지 그저 쉽게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힘든 길이다. 그러하기에 많은 이들이 가지를 않는다. 좁다고 싫어한다.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기피한다. 인간사 모든 일이 그렇다. 더더욱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일이 어찌 간단하고 쉽게 될 일인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끊임없이 배우고고 수련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제약을 받게 되고 혹독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는 길은 곧 내 마음대로 내 의지가 손짓하는 대로 살아가는 길이다. 그러한 길을 나선 이들의 종국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릇되기가 십상이다. 멀고 협착한 길과 평탄하고 금방 다다를 수 있는 길의 차이는 이런 거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문은 좁고 길은 험하다. 십자가 고난과 희생, 죽음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이 주님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에 가치가 있다. 이 길이 영광의 길이요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이기에 하나님의 구하심과 위로가 있는 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유행 따라 많은 이들의 풍조를 따라 가며 아직도 생명 길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걸음은 헛걸음일 뿐이다. 주님의 길을 가지 않고 세속의 안이한 길을 간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임에도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이 사순절에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이 길, 주님의 길을 외면하고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봐야 하겠다. 내가 손해 본다고 어렵고 힘들다며 얼마나 많은 세월 좁은 문, 험한 길을 외면해왔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주님을 좇아가는 길은 좁은 문 험한 길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좁은 문, 험한 길로 인도하기를 애쓰신다. 그러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가겠노라고 하신다. 함께 가시는 주님께서 위로하시며 도우신다. 이 길에서 영원한 진리와 생명, 찬란한 빛으로 얻게 될 거룩한 은총을 찬양하자. 하나님만이 건네주시는 이 거룩한 행복을 찬양하자.
좁은 문이 넓은 문이다
마 7:13-14 / 박찬길 목사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끔 역설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정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요. 부자는 큰일이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싶대. 우리는 부자 되면 안 돼. 안 돼. 그러면 천국에 못 가잖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은 수준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시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아실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핵심은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못 들어가고, 가난한 사람은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지요. 천국은 부자하고 가난한 사람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지요? 예, 믿음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부자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물질을 믿고 의지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부자라고 해도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물질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13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의도를 14절에서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나요?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해되시지요. 예수님은 좁은 문에, 좁은 길에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숨겨 놓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교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좋아하면서도 좁은 문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넓은 문이 편하고 안전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이 편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편한 길로 가서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생명의 길은 두 번째 치고, 소위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거나 그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편안한 길로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편하게 공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직장 생활하시는 분들이 편하게 다니면 어떻게 될까요? 집에서 인터넷으로 공부하는 것이 편하다고 집에서만 공부하면 편할까요? 집에서 근무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서 집에서 일하면 편할까요?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에만 편합니다. 세상의 일도 그런데 하물며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편한 길로 간다. 그리고선 구원받기를 원한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넓은 길이 편하고 쉽고 안전할 것 같지만, 사실은 좁은 길이 편하고 쉽고 안전한 것입니다. 넓은 길이 더 위험한 거예요. 여러분이 운전해 보시니까 아실 거예요. 자동차 사고는 좁은 길에서보다 넒은 길에서 자주 나지요. 좁은 길에서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조심스럽게 운전하기 때문에 사고가 덜 나는데, 넓은 길에서는 마음을 편안하고 느긋하게 먹고 운전하다가 사고가 자주 나는 겁니다.
요즘 이민교회를 포함하여 우리 한국 교회가 성장이 멈추고 있는데, 중요한 이유는 넓은 길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교인들이 어렵고 힘들고 땀흘리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3D업종을 피한다고 하는데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교인들이 예수를 편하고 쉽게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희생이 없습니다. 헌신이 없습니다. 봉사가 말할 수 없이 줄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교인이 자꾸만 늘어갑니다. 너무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보세요. 예배만 끝나고 도망(?)가려는 교인이 얼마나 많아요. 교인을 섬기고 봉사하는 데에 시간을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 살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적어도 집사, 권사들은 알아야 하는데 알려고 하지를 않아요. 새신자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에요. 새생명이 태어났잖아요. 그런데 봉사하지 않으려고 해요. 오히려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자신이 봉사하는 날에는 봉사하지만, 다른 이들이 봉사할 때에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기존의 교인들이 다른 교인을 생각할 줄을 모릅니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익숙해져 있어요. 교회마다 손님 같은 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다 넓은 길로 가는 교인들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넓은 길로 가는 교인들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어려워지고 힘들어지게 되어서 나중에는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인들이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좋은교회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새가족 환영회를 했는데, 매번 새가족 환영회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새가족을 섬기는 이들이 얼마나 헌신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보통 토요일 저녁에 하잖아요. 교인들에게는 토요일이 황금 날입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와야 하니까 토요일에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그 바쁜 시간인데, 시간을 내서 준비하고 정성을 모읍니다. 힘들 일을 마다하지 않고, 어려운 일에 내색하지 않고, 땀흘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사역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제 보니까 새가족반에서 헌신하는 교인들만 오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헌신자들도 아닌데 봉사하려고 오신 분들이 헌신자만큼 많았어요. 이런 분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교인들인데, 이런 교인들이 있는 한 우리 좋은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어요. 좁은 문을 확대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뭐가 생각나요?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생각합니다. 좁은 문은 고난의 길이라는 등식을 만듭니다. 좁은 문은 그냥 좁은 문인데, 우리는 확대 해석합니다. 해석을 잘못하니까 겁을 먹지요.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성경에 좁은 문이 고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좁은 문은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주서들은 것을 가지고 정확한 줄로 알면 안 됩니다. 성경은 좁은 문은 생명의 길이고 넓은 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오해할 까봐서 예수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지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 가지고 좁은 문은 고난의 문이래. 좁은 문은 힘들대. 이런 단 말입니다.
십자가도 그래요.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무거운 거야, 목사나 지는 건데, 권사만 지는 건데' 그러고는 회피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면 죽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고... 그러면 죽는 거 아닌가요. 예수님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확대해석해서 잘못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신비가 있습니다. 좁은 문은 계속해서 좁은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종 역설적이라고 했잖아요. 좁은 문은 처음에만 좁은 문이에요.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좁은 문이 넓은 문으로 바뀌어집니다. 참 이상하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갔는데 계속 좁은 문이 아니에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좁은 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넓은 문으로 바뀌어집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서 목회를 시작하는데, 교인도 많지 않고 시골 환경이 여러 가지로 좋지 않잖아요. 서울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권사님들이 종종 오세요. 그 분들이 오셔서 이런 말을 해요. "전도사님, 힘드시지요. 고생길이네요." 어떤 분은 혀를 차면서 제가 불쌍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세요. 저를 위로해 주시려고, 저를 아끼시니까 그렇게 말하는 줄로 알지요. 왜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두 번이지, 자주 들으니까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하루는 권사님이 또 그러시는 거예요. "전도사님, 힘드시지요. 고생해서 어떻게 해요." 제가 화가 나서 그랬어요. "권사님 안 힘들어요. 권사님 고생길 아니에요" 왜 그래요? 신학대학을 지원할 때부터 목회가 힘들고 어렵고 고생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에 졸업하면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나를 데려갈 거야.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들어갈 때부터 찬송가 355장을 부르면서 '부름받아 나선이몸 좋은곳에 가오리라' '부름받아 나선이몸 골라골라 가오리라' 했을까요? 아닙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이 마음 가지고 신학대학에 들어갔거든요. 주의 종이 되겠다는 사람이 주인이 가라는 대로 가야지 별 수 없잖아요. 그것이 목회잖아요. 그러한 것을 미리 알고 각오하고 들어가서 목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힘든 고생길이 아니었던 거예요. 여러분, 목회가 고생이 아닌 것은 아니지요. 목회가 힘들지요. 왜 안 힘들겠어요. 그런데 그 마음을 가지고 하니까 괜찮더라는 말씀입니다.
미국에 와서 이민목회를 시작했잖아요. 10년 전에 우리 교회를 개척했는데 사람들이 또 그래요. "목사님, 힘드시지요. 이민 목회 어려우시죠" 힘든 걸 알면 말로만 하지 말고 뭐를 도와주면서 말하든지, 선교비도 보내주지 않으면서 힘드시죠, 어려우시죠. 제가 또 그랬지요. "아니에요. 힘들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시골교회도 힘들지만 이민교회는 정말 힘듭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보통 지역이 아니에요. 똑똑하신 분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너무 유식해요. 배운 것이 많아서 말씀도 잘 하시고 비판도 잘 하시고..., 힘들긴 힘들어요. 그런데요 제가 왜 힘들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라고 말한 줄로 아세요? 이민목회가 힘든다는 것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목회하면 어렵지 않을 거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면 영화에서 봤던 까만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을 거다. 박찬길 목사님이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런 것은 꿈도 꾸지 않았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이민 목회가면 어려울 거야. 힘들 거야. 미리 생각하고 왔어요. 와서 보니까 진짜 힘들고 어려워요. 그래서 그런 줄로 알고 하니까 힘들지 않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여러분은 미국에 오실 때에 안 그러셨어요. 미국에 가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풀어질 거야. 영어가 저절로 풀릴 거야. 아이들도 잘 되어서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이 되기만 하면 연봉이 10만불 100만불 벌 줄로 알고 왔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어떤 교인들은 그래요. '목사님, 머리에서 쥐가 나요.' '직장 생활에서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쥐날 줄로 알고 오셨잖아요. 스트레스 받을 줄로 알고 오셨잖아요. 그런데 지내보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힘들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잖아요.
여러분,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까지는 힘든 겁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문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겁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언제나 좁은 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만 좁은 문입니다. 들어가기만 하면 넓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좀 힘들고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좁은 문으로 가다가 보면 더 이상 힘들고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그곳에 축복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로 하면 영 안이 열려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 안의 문이 활짝 열려지는 복을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모르고 마귀에게 속는지 몰라요. 해보지도 않고 기부터 죽어 가지고 좁은 문은 힘들어 힘들어, 십자가는 어려운 거야. 십자가를 지면 죽어 죽어, 죽긴 뭐가 죽어요. 제가 해 보니까 안 힘듭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은 처음부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이럴 때 필요한 거예요. 돈 벌고 아플 때만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에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이제부터 생각을 바꾸세요. 좁은 문은 들어갈 때만 좁은 거예요. 들어가면 넓은 문으로 바뀌어집니다. 좁은 문은 언제까지나 좁은 문이 아니고, 들어갈 때만 좁은 문이에요. 이렇게 마음을 먹고 들어가서 좁은 문을 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넓은 문이 되는 거예요. 좁은 문을 믿음으로 들어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넓은 문으로 바뀌어지는 거예요. 그 때는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되는 거예요. 나중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것을 누리며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좁은 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들어가라고 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굳게 먹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좁은 문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넓은 문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부터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면 생명의 길을 절대로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좁은 문을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한 발짝을 내디디면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셔서 신앙생활의 속도가 나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고 떨리는 마음을 시작했지만, 여러분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순간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셔서 넓은 문이 되는 겁니다.
혹 여러분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있으세요? 마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있으세요? 거기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 지키는 것이 어려우세요? 하나님께 내 몸을 드리는 것이 어려우세요? 물질을 드리는 것이 어려우세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해 보세요. 드려보세요. 좁은 문인 줄로 알고 나아가 보세요. 그 다음부터는 넓은 문이 되는 거예요. 만일에 좁은 문이 내 신앙생활을 방해한다면 넘어가야 하지 않겠어요? 힘들다고 무릎꿇고 무서워서 지나친다면 나에게는 더 이상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기회도 오지 않고 넓은 문의 축복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생명의 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고 평생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기가 막힌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큰복이 되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거룩한 축복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나누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셔서 생명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 꿈 같은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의도를 잘 알았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어서 좁은 문으로 달려들어 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마귀에게 속지 않게 하시고 겁먹지 않게 하시고, 좁은 문의 첫발을 과감히 내딛게 하셔서 성령의 도우시는 능력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마 7:13-14 / 문기태 목사(창원침례교회)
문을 잘 못 찾으면 엉뚱한 곳으로 들어갑니다. 길을 잘못 들면 고생만하고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가 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움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아 평생 무척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결국도 그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자칫하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 멸망의 길을 걷다가 영원히 멸망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중하게 생명에 이르는 참된 문을 찾아 그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로 걸어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라는 말씀입니다. 겉만 보고 좋아 보인다고 잘못 선택하여 영원히 후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눈치보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선택했다고 사람들 따라 가다가는 잘못 선택하기 쉽다는 경고입니다. 우선 당장 편하고 쉬운 것만 좋아하다가는 잘못 선택하여 영원히 후회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찾았습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셨습니까?
1.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겉보기에 화려하지 않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의 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널찍하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 큰 길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습니까? 좁은 길이 인기가 있습니까? 큰 문이 매력이 있습니까? 작은 문이 매력이 있습니까? 겉보기에도 큰 길과 큰 문이 보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을 돈을 많이 들여 넓고 반듯하게 닦아 놓는 것이 아닙니까?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문은 판잣집, 초가집, 움집 같은데 가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궐 같은 큰 집, 대형 빌딩 같은 데는 문이 무지하게 큽니다. 대개 큰 문일수록 보기에도 멋있고 화려합니다. 옛날에 제가 살던 집에는 문들이 아주 작았습니다. 사람 한 명 겨우 드나들 정도였습니다. 어른들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보면 서양의 귀족들의 성에 있는 문들은 대부분 대단히 크고 멋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화려하고 멋진 것들을 좋아합니다. 할 수 있으면 크고 화려하고 멋진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넓고 잘 닦여진 좋은 길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겉보기에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함정일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오히려 생명의 길로 가려면 그런 화려함과 거창한 것을 피하여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열매에는 그들을 끌어들이는 어떤 매력이 있었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망의 열매는 생명의 열매보다도 겉모습이 더 화려하고 요란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영혼까지 끌어당기는 화려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금방이라도 우리를 만족시켜줄 같이 느껴지는 좋아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롯이 소돔을 선택할 때도 그랬습니다. 겉보기에 그 땅은 문화가 잘 발달된 애굽과 같았고 아름다운 에덴 동산 같았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선택한 헤브론은 황량한 황무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망했고 아브라함은 갈수록 더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겉보기에 좋아 보이고 화려한 것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사랑한 제자 데마 역시 이 세상을 사랑하여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승인 바울 선생님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왜 그런 엄청난 실수를 하였습니까? 생명의 길을 따르는 데는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화려함이 없고 시시해 보였습니다. 반면 세상에는 우리 눈을 유혹하는 온갖 화려함이 손짓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자기를 드러내려고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습니다. 평범하고 수수하나 은은한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거짓은 사람들을 속이려고 요란하게 치장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만 유일하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므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혼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다른 문은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영혼의 양식을 주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을 걸으면서 겉보기에 화려하고 매력적인 유혹들을 잘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보다 좋아 보이는 것이 있어도 그것은 모두 함정일 뿐입니다. 겉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보다 좋아 보이나 그것은 유혹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실한 믿음을 갖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겉보기에 화려한 생활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제자가 되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세상의 화려함을 마음껏 누리는 사치스런 생활을 절제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초라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겉으로 화려한 것은 잠깐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여러분, 크고 넓은 문을 선택하여 멸망에 이르지 말고 겉보기에는 좁고 초라해도 좁은 문을 선택하여 생명을 얻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왠지 위험부담이 적어 보입니다. 그리고 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런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며 좌우를 둘러 봅니다. 그리고 따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말에 남이 장에 가니 똥장군지고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들이 모두 가는데 나만 안 따라가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유행에 뒤쳐지는 것 같습니다. 무슨 큰 손해를 볼 것 같습니다. 한 밤중에 개 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따라 짖는 것 같이 요란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군중심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군중심리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누군가 선동하면 분별력을 잃기 쉽습니다.
왜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합니까? 무리에게서 소외되어 혼자되는 것을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수가 선택한 것이 항상 옳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언제나 다수가 옳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다수는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과 승리에 대한 믿음이 없이 불평만을 쏟아놓았습니다. 다수의 군중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생명의 길을 걸으려면 의미 없는 다수의 군중에 섞이지 말고 거기서 나와서 믿음의 소수 편에 서야 합니다.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오해를 받고 왕따를 당하며,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담대하게 소수의 진리 편에 서야 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영향력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들은 의미 있는 소수였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더라도 진리의 편에 선 사람들은 다수보다는 소수였습니다. 그 소수는 어떤 소수입니까?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늘 하나님의 편에 서고자 하는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자가 되어 훈련 받는 대가를 지불하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제자가 되어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게 위해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영생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빌리 선데이는 18세기 미국 대부흥 운동을 찬양으로 공헌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평생 지키기로 결심하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매일 15분씩 성경읽기, 매일 15분씩 기도하기, 매일 15분씩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기, 매일 15분씩 누군가에게 교회에 가자고 권고하기였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단지 60분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인데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나를 하나님께 묶어 놓을 때 나는 더 만족하게 세상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큰 문으로 들어가도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이 넓은 길로 걸어가도 여러분은 좁은 길을 걷기 바랍니다. 비웃음소리가 들려도 멈추지 말기 바랍니다. 외롭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그 문으로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그 문으로 들어가 생명을 얻고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3.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고생과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좁은 길은 길이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길이 비좁고 험하다는 뜻입니다. 길이 몹시 좁고 꾸불꾸불하고 심한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고 장애물도 많습니다. 그래서 걷기에 불편하고 힘이 많이 듭니다. 아예 예수님은 그 길은 좁고 협착하다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아무리 넓게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비좁고 험한 길이기에 불편이 따릅니다. 찾는 이가 적기에 외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구 한 사람 제대로 이해하여 주지 못하고 함께 동행해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좁은 길이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창12:1-2). 좁은 길을 걷다 보면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계2:10). 잘못한 것도 없이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마5:10-11). 때로는 죽음도 찾아옵니다(계2:13). 왜 편하고 쉬운 길을 옆에 놔두고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힘들고, 고생스럽고, 불편해도 참고 바른 문을 선택하여 들어 가야지 우선 당장 편하고 쉽게 살자고 멸망의 문을 택하여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쉽고 편안한 것을 택하셨다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고생하고 고통 당하는 것을 피하려 하셨다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자원하여 감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 그 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꺼이 고생과 불편을 감수하려고 하였기에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갖은 고생을 감수하였습니다. 때로 죄도 없이 옥에 갇히고 붙잡혀 매를 맞기도 했으며 때로 굶고 추위에 떨고 오해 받고 쫓겨 다니기도 했으며 심지어 복음 전하다가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대충 믿기를 원하십니까? 철저하게 잘 믿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잘 믿으려면 먼저 고생과 불편을 감수할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욕 얻어먹는 것은 기본입니다. 잘못 없이 매맞을 각오, 가난할 각오, 자청하여 고생할 각오, 그리고 죽을 각오까지 하셔야 합니다. 편안하고 쉽게 믿는 길은 없냐고요? 물론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 문 앞에까지 교회 차가 가서 '제발 타시죠!' 하여 모셔오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마치면 다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힘들고 어려운 교회 봉사는 하나도 안 해도 됩니다. 골치 아프게 제자 훈련 받느라고 시간 빼앗기고 기도생활 하느라고 잠 못 자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연히 예수 믿으라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권하였다가 무안 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욕 먹을 일, 비난 들을 일, 골치 아픈 일은 다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헌신도 없고 손해 볼 일도 없이 쉽게 예수 믿을 길이 원하기만 하면 여러분 앞에 널려 있습니다. 매 주일 꼬박꼬박 예배 드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약속 잡아 볼 일보고 시간 날 때만 가끔 늦게 나타나 잠깐 얼굴을 비치면 됩니다.
그러나 그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고생 고생하여야 겨우 들어가고 겨우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문을 들어서면서 겸손하게 허리를 숙여야만 합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자칫 부딪쳐서 아프기도 합니다. 그 길을 가다 보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걷다가는 미끄러지고 하면서 겨우 나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쉽게들 믿던데, 편하게 믿던데 왜 너만 별나게 믿냐? 바쁘면 예배에 빠질 수도 있는 거고, 적당히 인생도 즐기며 눈치껏 최소한의 헌신과 헌금을 드리면 되지 너는 왜 유별나게 믿냐?" 하는 비난을 듣는 다면 여러분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증거입니다.
욕 먹어가면서 조롱 당하면서도 기쁨으로 섬기고 힘들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면 여러분은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걷는 그 길이 험하여 힘들고 고통스럽고 외로워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계속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크고 넓은 길은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좁고 비좁은 길은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지금 당장을 생각하면 넓은 문, 넓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지만 조금만 미래를 내다보면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인생은 하루살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시간을 살도록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고 불편하지만 그 결과는 영생이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 대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부터 예언자들 시대까지의 성화를 1508년부터 4년에 걸쳐 그렸습니다. 그는 본래 허리 병이 심하고 호흡장애가 있어 누워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엄청난 고역이었습니다. "왜 이런 불가능한 작품을 맡으셨습니까?" 하는 제자의 질문에 그는 "내 작품이 아닐세.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 명령일세."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며 헌신적인 수고의 결과 불후의 명작이 탄생되었고 5백년 동안 전 세계의 수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 겉보기에 화려하지 않아도, 찾는 사람이 심히 적어도,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반드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걸작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욜1:10-12, 마7:13-14 / 오세원 목사
우리가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만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로인해 음식쓰레기가 1년에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가 1만5000여 톤으로 전체 생활쓰레기의 31.6%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8톤 트럭 1,880대분에 해당될 만큼 거대한 양입니다. 물론 이 비용의 계산은 연구기관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한 해 동안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8-20조원에 달하고 그 처리비용도 1조원 가량 된다고 하니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음식쓰레기 중 냉장고에 오래 보관되어 있다가 폐기되는 보관폐기와 먹지 않아 버려지는 식재료는 약 3조원의 규모에 이른다고 합니다.
최근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전 세계 식량의 3분의 1이 낭비 및 폐기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버려진 음식은 약 3억 톤에 달하며 이는 세계 9억 명의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만한 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계 기아인구가 2012년 지난해 기준으로 8억7천만명에 이른다고 할 때에 버려지는 음식쓰레기를 줄이고 그것을 잘 선용하면 기아상태로 죽어가는 절대적 빈곤을 없엘수 있다는 계산이 됩니다. 세계적으로 먹지 못해 5세미만의 저체중 어린아이가 약 1억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음식 먹을 때 음식쓰레기,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도 버리는 것이 없도록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고 식사할 때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악취를 유발함은 물론이고 음식물 처리과정에서 나온 고농도의 폐수가 수질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또한 부적절하게 매립하거나 소각 할 경우 심각한 토양오염이나 대기오염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음식물 쓰레기가 20% 정도 감소하면 1,600억원 이상의 쓰레기 처리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연간 177만 톤의 온실가스가 감소하고 에너지 18억kWh가 절약되는 환경적·경제적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음식물쓰레기로 인해 1년에 이산화탄소가 885만 톤이나 발생된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승용차의 18%가량이 내뿜는 탄소량이며, 소나무 18억 그루가 흡수해야 하는 막대한 양이라고 합니다.
물론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풍요로운 세상이라고 느끼며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로 말미암아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함에 대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줄 모르고 짓는 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원을 낭비하고 낭비되는 것으로 생명을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낭비해버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부터 바꿔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죄입니다. 땅을 낭비하고 물을 낭비하는 것도 죄입니다.
예수님이 음식으로 기적을 일으킨 적이 두 번 있습니다. 마태복음14장에 보면 한 번은 벳세다 들판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남은 부서러기가 12광주리였습니다. 다른 한번은 마가복음6,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을 때 여러 환자들을 데리고 와서 고침받기를 원하셨을 때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님과 동행한지가 벌써 사흘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기진하여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부탁하였을 때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있다고 하실 때, 그것을 가지고 축복기도하신 후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먹은 자가 4천명이고 남은 부서러기가 7광주리였습니다.
두 번의 기적에서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남은 부서러기를 다 거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결단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부서러기를 자신들의 자리에 버리지 않았고 다 거두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환경오염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환경과 직간접으로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오염은 결국 지구온난화로 이어져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들려오는 환경재앙의 소식이 우리의 귓전을 울립니다. 토네이토발생 빈도가 갈수록 잦아지고 강도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에이티, 칠레, 중국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있었습니다. 그 소식에 세계는 경악과 비통에 휩싸였습니다. 또한 브라질의 푹우로 인한 산사태,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를 강타한 사이클론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과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봄이 없어지고 겨울이 길어지는가 하면 여름이 곧바로 다가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앙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잘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주님이 허락하신 생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그냥 지구와 우주에 일어나는 하나의 이상한 징조로만 받아들이지 그 원인의 주범이 바로 나 자신을 비롯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모든 원인의 원점에는 항상 인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환경오염이 왜 심해지고 있습니까? 그 원인이 있습니다.
환경오염의 주범은 인간중심주의와 물질중심의 삶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창세기1: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어서 하신 말씀이 지면의 모든 씨맺는 채소와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이 먹거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울러 30절에 보면 땅에 있는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것에는 풀을 먹거리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음대로 잡아 먹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해서 자원이 낭비되지 않아야 하고, 골고루 분배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창세기1장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일컫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복해야 합니다. 정복한다는 것은 점령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잘 선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잘 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관리한다는 것은 유지하면서도 번성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자원을 너무 많이 사용함으로 인해 자원이 고갈되고, 그 자원을 사용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여러 가지 쓰레기와 화학물질과 처리 비용 등으로 관리가 아니라 오용이 됨으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20장 10절 이하에 보면 안식일 제도와 레위기25장5절 이하에 보면 안식년제도와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다음 해, 50년째를 희년 제도를 설정하여 사람도 쉬고, 땅도 쉬고 심지어는 짐승까지도 쉬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중심으로 살도록 하지만 사람만 살 수 없어서 만물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관리권을 주셨는데도 그것을 남용하고 오용하여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20절 말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은 인간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통해 당신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장2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만물을 통해 보여주어서 알도록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만물의 생명을 보면 신비로움 자체입니다. 그 신비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만물을 사랑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아무리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아 관리한다 할지라도 우리 멋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결국 인간들이 보다 편리하고 보다 안락하고 보다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자연을 관리하다 보니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함으로 인해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점도 많이 제공했지만 그로 인한 반대급부가 더 크게 부각되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텐데 그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과 실천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같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기 때문에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어차피 심판받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실 인간들이 보다 잘살기 위해 과학기술이 발달하다보니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몇가지 현상을 정리해봅시다. 우선 쓰레기 배출로 인해 땅이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공기가 오염되어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조화롭게 창조하셔서 보시기에 그렇게도 좋았던 지구가 좋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이 극심하여 땅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생명이 살지 못하여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물들이 멸종되어 가는 것이 많습니다. 모든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적으로 조절기능을 갖도록 되어 있는데 땅과 공기와 물이 오렴됨으로 인해 생명체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은 멸종, 어떤 종은 너무 많이 존속되어 균형이 깨어집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 요엘서를 보면 식물들이 살지 못하고 다 죽어가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10-12절).
결국 인간들이 즐겁게 편리하게 살려고 하다가 그것을 얻기가 무섭게 곧바로 즐거움이 말라버리는 일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른 것은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물이 문제입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비가 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왜 비가 오지 않는가? 환경문제입니다. 앞으로 세계가 겪어야 할 고통중의 하나가 물부족 입니다. 세계 물부족국가 중 우리나라는 5위입니다. 우리는 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물확보의 경우는 146위로 떨어져 있습니다. 아직도 50%의 논은 가뭄을 걱정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방사능 물질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원자력발전소가 많습니다. 이 원자력의 폐해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은 이미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지난해 일본의 쓰나미로 인한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유출로 인해 입은 피해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월성원자력 발전소의 고장으로 인해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공서나 백화점 공연장, 교회 등 다중시설의 실내온도를 26도로 정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는 벌금을 부과한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예배드릴 때 조금 덥더라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땀을 흘리며 예배드리면 하나님도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한 자세로 예배드리는 것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이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를 더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생명 길로 가야 합니다. 생명 길로 들어가는 문은 넓지 않고 좁습니다. 그래서 가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그 길로 가야한다고 하면서도 가지 않거나 가다가도 포기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이요,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생명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고 계속 그 길을 제시하지만 좁은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지 않고 찾았다가도 돌아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는 그 길이 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7장 13-14절 말씀에서 분명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환경을 보전하고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가는 길, 분명히 좁은 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요? 우선은 지금까지 모르고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려면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회개없이 진행되는 것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회개한 후에 해야 할 일은,
첫째,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풍요와 편리함보다는 절제된 삶의 방식과 즐거운 불편함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절제된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할 말씀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6:24절에서 하나님은 마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오늘날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너무 물질중심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절제의 삶을 살려고 하면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화려하게 아름답게 보이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실제적으로 겪고 있는 내용이지만 물질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긴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려고 노력하거나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 다 할 수 없습니다. 물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덜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물질을 사랑함이 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취약점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신명기8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제일 우려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없는 모든 불가능을 여호와 하나님이 가능케 하셨는데도 이들이 교만하여져서 그들의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되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큰 복을 주셔서 잘살게 되었는데도 마치 우리가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살아서 이와 같이 되었노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지 않으면 결국은 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자가 천국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입니다. 부자되어 예수 잘믿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잘 믿다가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환경이 좋아지고 삶이 부요케 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무절제하게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 그것을 절제하며 나누며 사는 좁은 길로 들어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복된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인은 항상 경건과 절제운동을 병행해야 합니다. 옛날 같으면 입고 다녔을 옷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인데도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잘 버리는 것, 즉 소비가 미덕이라는 구실아래서 이루어집니다. 다소 불편한 삶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생명의 길, 좁은 길로 걸어가는 소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에 의해 죽는지 아십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든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생명이 바로 인간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물이 오염되지 않아야 인간이 건강합니다. 먹는 열매가 오염되지 않아야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질병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천국가는 문이 좁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예수님이 탄생한 예배당에 가보면 들어가는 출입구가 아주 작습니다. 작은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광장같은 큰 홀이 있습니다.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천국가는 문은 좁고 협착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생명길입니다.
절제된 삶으로 생명의 길로 들어가지 않고 허랑방탕한 모습의 아무렇게나 사는 삶으로 이어지면 망하는 날이 옵니다. 밭에는 소출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와 양이 없습니다. 곳간에 곡식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땅에 있는 씨까지 썩어버립니다. 엄청난 재앙입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그런 재앙의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절제된 삶으로 생명의 길로 가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은 말합니다.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내가 먼저 적게 벌고 나눠 쓰면서
덜 해치고 덜 죄짓는 맑아진 얼굴로 / 모두 나처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되고
푸른 지구 푸른 미래가 살아난다고 /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더 절제된 삶으로, 더 생명을 사랑하는 삶으로 성숙되어질 때 세상은 주님의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