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瑞石錄 [유서석록] |
霽峰 高敬命 |
고경명(1533~1592)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 본관은 장흥. 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92년 임란 때 전라좌도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금산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문집 [제봉집]이 있다. 무등산의 옛 이름은 서석산(瑞石山)이다. |
晡時0瀟灑,乃梁山人(山甫)舊業也. 澗水來自舍東闕墻通流00循除下, 上有略彴. 略彴之下石上自成科臼號曰槽潭, 0爲小瀑玲瓏如琴筑聲, 槽潭之上老松盤屈如偃盖橫過, 潭面小瀑之西有小齋宛如盡舫. 其南累石高之翼以小亭形如張傘當簷有碧梧甚古枝半杇. 亭下鑿小池刳水引澗水注之池. 西有鉅竹百梃玉立可賞. 竹西有蓮池0以石引水池. 由竹下過蓮池之北又有水碓. 一區0見無非瀟灑物事而河西四十詠盡之(矣). 主人梁君子渟爲先生置酒. |
저녁 무렵 소쇄원(瀟灑園)에 당도했다. 이는 산보(山甫) 양산인(梁山人)이 과거 이룬 것이다. 산골물이 집의 동쪽 담장 밑을통해 콸콸 흘러 들어오며, 그 위로는 외나무 다리(略彴)가 놓여있다. 약작 아래 바위 위로 저절로 생긴 빈 절구 있는데 이름하여 ‘조담(槽潭)’이라하고, 작은 폭포는 영롱하여 마치 거문고 소리 같다. 조담 위에는 노송이 굽어져 마치 연못을 덮어 비껴있다. 조담의 작은 폭포 서쪽으로 작은 서재는 완연히 화방(畵舫)과 비슷하였다. 그 남쪽에는 쌓여 있는 바위는 높아 날개를 편 듯 하여, 작은 정자의 형상이 마치 긴 일산(日傘)과 같고 처마 앞의 가지는 고목이 되어 반쯤 썩어 있다. 정자 아래에 조그만 연못을 파고 나무 홈통으로 산골물을 끌어 댔다. (연못) 서쪽에는 대나무 백여 그루가 옥과 같이 서 있어 완상할 만하였다. 대나무 서쪽에는 연지가 있는데 둘레를 돌로 쌓고 물을 끌어 이룬 못이다. 대나무 아래 연지(蓮池)를 지나 북쪽으로또 물방아가 있다. 하나의 구역 구역마다 소쇄하지 않은 물상이 없어 하서(金河西)의 40영(詠)에 그 극치를 노래하였다. 주인 양군(梁君)이 선생을 위하여 술을 차리고 머물게 하였다. |
•晡時(포시) : 오후 3시~5시까지 신시(申時)를 의미한다. 해질무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畵舫(화방) : 그림속의 배. |
고경명은 자가 ‘而順’, 호가 ‘霽峯’, ‘苔軒’, 시호가 ‘忠烈’이다. 부친은 대사간 高孟英, 모친은 진사 徐傑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또 1558년 국왕이 성균관에 친림한 시험에서 수석을 하였다. 같은 해 식년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湖堂에서 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교리를 맡고 있을 때, 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경위를 이량에게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다. 이때 고향에 돌아가서 독서하며 산수유람을 즐겼는데, 본 책은 이 시기에 저술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遊山記는 입산 계기나 준비 과정의 도입부, 등정 과정의 전개부, 하산 후 감회를 적은 결말부로 구성된다. 본서의 서두에도 무등산을 유람하게 된 경위와 과정을 먼저 서술하였다. 고경명이 나이 42세 때 당시 광주목사 林薰(1500~1584)에게서 같이 무등산에 오르자는 편지를 받는다. 무등산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어릴 적부터 자주 올랐던 곳이기도 하여 등반할 결심을 하였다. 그간의 산행은 산의 경치만을 보았는데 이번 산행에서 산의 정취를 얻겠다고 다짐한다. 임훈은 고경명이 학문과 시재가 뛰어나 말동무 적임자라서 등반 제의를 하였던 것이다.
전개부에는 등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경명은 약속한 날보다 하루 전날인 4월 20일에 도착하여 먼저 翠栢樓를 둘러보고, 證心寺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21일에 임 목사와 일행이 당도하여 무등산 산행을 시작하였다. 증심사를 출발하여 舍人巖, 證覺寺, 梨亭, 中嶺, 冷泉亭, 立石庵과 立石臺, 不思議寺, 지공너덜과 덕산너덜을 거쳐 念佛庵에서 묵었다. 22일 上元燈寺를 거쳐 무등산 최고봉인 天王峯·毗盧峯·般若峯 등을 둘러보고, 瑞石臺, 三日庵, 金塔寺, 隱跡寺, 石門寺, 錦石史, 大慈寺, 소은굴, 圭峯庵, 廣石臺, 文殊庵, 慈月庵, 風穴臺, 藏秋臺, 隱身臺 등도 구경하고, 文殊庵에서 여장을 풀었다. 산행 중에 선인의 시를 회상하며 그에 알맞은 시를 읊고 자신이 시를 짓기도 하였다. 23일 靈神洞, 方石洑, 長佛川을 거쳐 夢橋마을, 노루목, 滄浪川, 赤壁, 五峯寺, 岾峴, 耳岾을 둘러보았다. 梁山甫의 별장인 瀟灑園을 지나 息影亭에서 묵었다. 3일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24일에 서하당에서 임훈 일행을 위한 주연을 베풀면서 모든 일정을 마쳤다.
결말 부분에는 고경명이 유람을 통해 얻은 바를 기록으로 남겼다. 고경명은 유람을 마치고 엿새 만인 1574년(선조 7) 5월 초하루에 본서를 저작하였다. 특이점은 대부분의 유산기는 말미에 산에 대한 칭송이 함께 담기는데, 본서는 산행을 같이한 임훈에 대한 공경심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산은 유구하고 인생은 짧아서 인간과의 이별이 아쉽다면서 임훈에 대한 그리움이 본서의 저작 이유라고 하였다.
고경명의 본 유산기는 등반한 산에 대한 감상이나 묘사를 통해 인간을 극진히 여기는 성정을 드러낸 점과 경관을 더욱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인들의 행적이나 고사, 유래 등을 삽입하여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또 대화체를 넣어서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주변의 유서 깊은 산사 고적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특성 및 가치
고경명의 遊瑞石錄은 지금까지 밝혀진 19편의 무등산 유산기 중에서 가장 빠른 시기인 16세기의 작품이다. 鄭之游의 『遊瑞石山記』가 이보다 먼저 저작되었지만, 본서는 장편이며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체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 무등산의 실경과 명류들의 발자취 등을 세밀히 기록한 점은 문학사적인 측면이나 무등산 연구와 불교 연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본서의 내용은 『제봉집』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고경명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첫댓글 본문의 해석은 원문의 몇 글자를 파악할 수 없어 완벽하지는 않다. 시간이 허락할 때 세세히 보고 확인한 후 수정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