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11계명
따분한 일요일 오후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이거다 싶어 종편 mbn에서 멈췄다. "속풀이 쇼 동치미"에 배우 선우은숙이 나와 13년 전에 이혼한 이영하와의 요즘 관계를 재밌게 들려주고 있었다. 이 두 사람과 아들 부부, 손녀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는데, 그녀는 "이혼해도 끝이 아니다"라며 진솔하게 말을 이어갔다. TV를 보는 내내 장면 둘이 떠올랐다.
하나는 1991년 미국에서 잠깐 생활할 때 겪은 문화적 충격이다. 휴일날 집 근처를 산책하다 우연히 이웃에 사는 닉(Nick)을 만났다. 우리는 곧 친구 사이로 발전했는데, 그는 이혼한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집엘 놀러 갔다. 웬 중년 신사가 닉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닉은 아버지라며 나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럴 수가! 내 고정 관념으로는 부부로 살다가 이혼하면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이다. 아니, 이미 원수가 되어 헤어진다. 적어도 당시 한국인한테는 그것이 보편적 인식이라 할 것이다. 풍경이 하도 생경해서 찜찜해하고 있는데 더 쇼킹한 장면은 뒤에 펼쳐졌다.
잠시 후 거실에서 한 여인이 나오자 닉이 스텝맘이라고 소개했다. 휴일을 맞아 아버지와 새엄마가 닉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어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닉의 부친은 재혼하여 이웃 마을에 살면서 이처럼 닉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언젠가 나도 초대받은 식사자리였는데 그는 전처 및 재혼한 부인과 함께 즐겁게 식사했고 두 여성은 마치 자매처럼 다정했다. 고백건대 그땐 '이거 짐승들 아냐' 하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선우은숙이 던진 "이혼으로 가정이 깨진 것이지 가족은 깨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격세지감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솔직담백한 얘기로 연신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영하가 어느날 불쑥 '굿 나잇' 이모티콘을 보내왔다고 불자 좌중에서 폭소가 터지고 진행자는 흥미롭다며 맞장구를 쳤다. 은밀히 보낸 추파가 전격 공개됐는데 주인공 이영하가 동석했다면 뭐라고 변명했을까. 궁금했지만 정작 내 머리를 스친 건 며칠 전 단톡방에 올라온 코믹한 그림이다.
영감 : 마님, 주무시나요?
마누라 : 깜짝이야! 웬 일이슈? 아직도 안 자고.
영감 : 그래도 이 밤중에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다는 거! 행복인 줄 알아요.
마누라 : 에구~ 됐네요. 내 걱정 말고, 자기나 얼른 자요.
그림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심야에 카톡으로 대화를 나눈다. 얼마나 더 산다고, 아니면 무엇이 불편해서 팔순 나이에 각방을 쓰는 걸까. 5월 21일 부부의 날에 친구가 보내준 "부부10계명"을 찬찬히 읽어봤다. '마세요' 9개에, '하세요' 1개다. 서양 속담에 "안 보면 멀어진다"고 했는데, "각방 쓰지 마세요" 하나를 추가해서 "부부11계명"으로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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