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 장
라만차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이 승리자다! (4)
성도는 셋으로 죽고 넷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진리의 양식을 세 떡이라고 하고, 우리가 무교절에 삼(3)으로 땅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떡을 먹는 것이 그 모형이다. / 바울은 그걸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다’고 한다. => 함께 묻히다, 그 땅에 같이 묻히다. / 여러분도 똑같이 이 땅에 묻혀서 그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 그걸 ‘함께 묻힌다’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 같은 너희 자손들이 넷으로 나올 거야!’ 하신다. ‘사(4)대 만에 나온다.’가 아니라, ‘넷으로’ 나올 거야. 넷으로 나와야 된다. 430년이 어떻게 4대가 되나? 한 대가 120년씩이 되는가? 넷으로 나올 거라는 말이다. 그때는 3, 4 같은 숫자 개념이 없었다. / 넷으로 나올 거야. 넷의 백성(그 시대엔 자손이란 뜻이니까?) 넷의 백성으로 나올 거야!
(註: 성경 해석의 접근 방법에는 문자적 해석, 문학적 해석, 역사적 해석, 상징적 해석, 비유적 해석, 수사학적 해석 등의 여러 접근법이 있다. 그 어떤 해석방법이 옳고 그르다 논쟁하는 것은 성경을 젖먹이 수준에서 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성령의 비춤이 없이는 문자로 적힌 성경 구절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항간에서는 자기가 목사라고 하면서 짧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김성수 목사가 ‘삼’은 무엇이고, ‘사’는 무엇이고 설명하는 것을 두고 마치 신천지인양 매도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만큼 성경 지식이 천박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목사이면 다 김성수 목사하고 맞짱 뜰 수 있는 것처럼 주제 파악이 안 되고, 함부로 나불대는 사례가 많다.
지금까지 수천수만 명의 목사가 태어나고 사라졌으나 김성수 목사의 창조의 7일, 열두 아들, 천년, 십사만사천 등의 숫자 해석을 [진리를 아는] 수준에서 해석하고, 그 해석이 성경 전체의 어디에서 나오는 숫자이든 일관되게 그 말씀이 전하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숫자 해석 체계를 잡아낸 목사도 없었고, 신학자도 없었다. 이로써 전천년설이니 후천년설이니 세대주의니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분적으로 조각내어 들여다보는 오류에 빠지지 않고,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숫자로 표현된 말씀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는 체계를 잡아주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창15:16)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면 나온다는 말. /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하다는 것은? / ‘샤렘 에본 에모리’ | 에모리 족속이란 말은 없다. ‘에모리’는 ‘아마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 ‘아마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다. 하나님의 말씀, 레마’ / ‘에머르’ =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들’ / ‘에모리’ 이 말하는 자들이 / [‘에본 | 그 악, 그 죄’]가 [샤렘 | 완성되면] 그들은 애굽에서 사(4)로 나올 것이다.’
선악과 = ‘에본’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죄가 완성되면) 이들의 육이 죽고, 그 말하는 자로 나올 것이다!’ / 그래서 ‘너희들은, 이 자손들은, 하늘의 별들은 사(4)로 나올 것이다.’
‘넷’이라는 존재의 삶을 잘 보여준 인물이 요셉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진다. / 요셉의 이야기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와 요한복음의 기사들의 순서가 다르다. / 성전 정화, 성전 파괴 사건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딱 한 번 하신 일이다. / 그래서 성전을 부순다고 하시고 십자가 지고 죽으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파괴 이야기가 2장에 나온다. 왜? / 그렇게 죽고 그 빛을 받은 어떤 이들, 육신들이 이 땅에 오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그 삶을 그대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성전이 파괴되고 다시 서는 것이 요한복음에는 맨 앞에 나오고 그때부터 우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게 요셉의 이야기이고 사(4)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셋을 통해서 [삼(3), 셋, ‘쉐리쉬’]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그 [삼(3), 셋]의 마지막 사람이 야곱이다. 탕자의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이다. 그는 강도인데 그 강도가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열심히 자기의 것들을 생산해 내어서 그걸 아버지께로 가지고 온다. / 그것들이 다 점 있고 흠 있는 알록달록한 양들이다. 삼촌이 분명히 알록달록한 양이 못 나오게 하려고 하얀 양만 주었는데 말이다.
이 실족시키는 자, 야곱이라는 강도는 희한한 재주가 있는데 어떤 걸 갖고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알록달록한 것(섞인 것)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는 강도요, 절도다.’ 하신 것이다. / 어떻게 알록달록한 양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단풍나무, 신풍나무 이런 것들을 양들이 물 먹는 곳, 교미가 일어나는 곳에 심어 놓는다. 양들은 지독한 근시여서 그 나무 너머에 있는 다른 양들이 알록달록하게 보이고, 거기서 교미하여 낳은 새끼들은 알록달록하게 나온다. 이런 잔머리꾼이 야곱이다.
야곱이 그렇게 낳은 알록달록한 양들을 아버지께로 가지고 가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누가 너에게 그런 것 갖고 오랬어? 내 땅, 약속의 땅 벧엘에 누가 알록달록한 것 갖고 오랬어? 네가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데, 네가 남편이 되고 주인이 되어서, 네 마누라 얻기 위해 두 칠년을 일해서 이런 알록달록한, 흠 있고 점 있는 것을 가지고 와? 내가 갖고 오랬어? 그래서 넌 죽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가신다.
그리고 환도뼈(=‘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을 뜻한다.)를 깨어 버리신다. / 그 씨가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 그리고는 이스라엘이 삼(3)으로 완성되었다. 이제 그 씨를 가진 자가 되었다. -> 그 씨를 가진 자는 이 땅에서 ‘절름발이로 산다.’ / ‘절뚝거리다’ = ‘건너가다’란 뜻. -> ‘건너 간 자’는 반드시 절뚝거리게 되어 있다. 왜? 하나님이라는 [지팡이, ‘라메드’]를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는 진리의 사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구원받을 수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절름발이들아, 고침을 받아라!’라고 하신 것이다. ->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데 내가 절름발이면 어때요? 괜찮아요.” 하고 그들은 건너가는 것이다.
우리는 나타난 것만 보고 ‘너 왜 절어?’ 하면서 절름발이를 욕한다. 그러나 죄인이면 어때? 의인으로 만들어 주신다는데. 죽으면 어때? 살려 주신다는데. / 그렇지만 이 세상은 전부 절름발이를 악이라고 한다. //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면 된다. 그걸 못 믿으니까 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삼(3), 셋, ‘쉐리쉬’]가 되면 [넷의 사람들, 하늘의 별들]이 되는데 그를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야곱의 열두 아들이 나온다. 열둘! ->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열두 아들이 생긴다. 그게 우리 얘기이다. 영적 이스라엘 얘기이다. / 나중에 그 열두 아들 중에 요셉과 레위가 빠지고 (둘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상징한다.) 그 열둘 안에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간다. / ‘이 땅에서 완성된 야곱은 이런 사람이다’를 보여준 것이 요셉이다.
(창37:1-2)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
‘야곱의 역사가 이러하니라’ 해놓고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얍복강을 건넌 이후 야곱의 인생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을 요셉으로, 넷으로 설명해 준다. 그렇게 된 이들이 이 세상에서 진짜 양식을 주는 자가 된다. 아무도 그에게 가서 양식을 얻지 않으면 못 산다. -> 그게 넷이다. 그 사람이 아들이다.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다른 자아이듯이 요셉은 야곱의 다른 모습이다. 요셉은 야곱의 다른 자아로, 넷으로 완성된 어떤 이로 나오는 것이다. -> 이 열두 아들은 요셉의 아들이기도 하다. 넷의 아들, 넷의 자손. / 그 요셉의 아들로 이 열둘을 설명하기 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그 열둘 안으로 들어간다.
그 요셉의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 ‘메낫세’ | 제거되다]와 [‘에프라임’ | 많은 열매를 맺다]이다. -> 넷으로 완성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 / [므낫세 | 장자, 맏아들]은 제거되고, ‘많은 열매’라는 아들들이 열매로 맺히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한 알의 밀알로 와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다. 하나가 제거되고 많은 열매가 맺힌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 | 넷]의 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름 이 요셉이다. -> 그걸로 진리를 알았으면 [그 | 아버지 요셉]은 반드시 (아들 예수)를 아브라함처럼 모리아 산에 데리고 올라가서 장사 지내야 한다. / 예수를 장사 지낸 자의 이름이 아리마대 요셉이다. 그래서 요셉이 낳고, 요셉이 묻는 것이다. [사(4) | 넷]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여러분이 그 삶을 살아야 한다. 아들을 살려 두고 계속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으면 여러분은 그 안에 빛을 가진 자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밖에 있는 빛도 떠나버리면 그를 어둠이라고 한다.
그분이 안에 빛으로 오시면 ‘그분이 밖에서 하신 일이나 그분의 생애’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삭제된다. -> 그 아들을 그렇게 장사 지내야 자기도 거기에 함께 묻힌다. 그 아들을 장사 지내지 못하면 영원히 그 아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섬기게 되어서 율법적 신앙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성도는 셋으로 완성되어서 넷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고 한다. / 그 ‘셋(3)’은 [열매로 일하는 나무, 선악과나무, 씨를 가진 나무]를 통해 씨를 받는 형국으로 완성된다. /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먼저 받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 된다.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다. 안 먹으면 안 된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선악이 뭔지를 알고 그 후에 진리로 합일이 된다. [스테파노스 | 포도]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율법을 통하여, [열매로 일하는 씨 가진 열매나무]를 통하여 씨를 흩뿌리는, 씨 맺는 풀싹이 되어, 또다시 그 씨를(생명을) 전하는 자가 된다. -> 생명나무 실과는 여러분이 그 진리를 말할(전할) 때 열린다. 그걸 사람들이 따먹는다.
예수의 말씀으로 진리를 알면 생명나무에서 실과를 따먹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가 생명이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생명나무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그걸 찾으면 어떻게 하나? / 마찬가지 원리로 [그 씨, 그 진리]를 여러분 안에 갖고 있고, 그 진리를 [흘려보내고, ‘프로슈코마이’]할 수 있으면 거기서 생명나무 실과가 열리고, 그 열매로 살아나는 이들이 나온다. / 진리를 흘려보내는 자는 그 씨를 심고, 부정되어 죽는다. 라만차의 기사처럼 율법을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율법으로 죽는다. 예수를 통하여, 예수에 대하여 또 죽어야 한다. 넷의 사람들은 예수를 낳았으면 그를 장사지내야 한다.
씨를 받아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변종 같은 풀싹! 열매가 맺히고 씨를 갖게 되는 풀싹! 그들은 그렇게 넷이 되어서 큰 광명을 증거하는 작은 광명의 역할을 하면 된다. / 세상은 그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라만차의 기사들, 광야의 외치는 그 소리들은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다가 심지어 종교에 맞아 죽는다. 변질된 기독교가 그들을 죽인다. / ‘무슨 은혜만 말하고 있어?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한 거지! 예수를 본받아 살아야지!’ 이런 공격을 받는다. / 그러나 그렇게 맞아 죽는 게 옳은 삶이다.
여러분 모두가 다 그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을 보았어야 하는 건데…. 차마 말로 할 수가 없다! 본 사람은 알 텐데…. 스테판이 그렇게 맞아 죽은 것이다. 포도로, 포도송이로 죽은 것이다. 여러분이 라만차의 기사들이다. 그대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 라만차의 기사가 세상을 향해 외치던 단말마 같은 대사 한마디를 여러분에게 읽어드린다.
“진실은, 진리는 현실의 적이다. 천 번을 쳐라. 천 번을 때려라. 천 번을 다시 일어날 테니.” /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어야 된다.
<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큰 광명을 드러내는 작은 광명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을 밤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빛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니, 그 빛을 올바로 전하고, 나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 빼앗기고, 하나님의 영광만 올바로 드러내는 그런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주시고, 그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