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마도 개관 (1) 대마도 현황 소속 :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면적 : 708㎦(울릉도 10배, 제주도 40%, 산림지 89%) 거리 : 부산 49.5km. 후쿠오카 138km 인구 : 32,590명(2015) 쓰시마국의 최초 기록은 삼국지 위지왜인전의 대마국(對馬國 또는 對海國)이다. 일본에서는 쓰시마(津島)라고도 쓰였지만, 7세기에 율령제의 지역구분으로서 쓰시마국이 설치되면서 쓰시마(対馬)로 정해졌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에는 대마국이 왜국의 한 구니로써 등장하고 있으며, 야마타이국(邪馬台国)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섬 외에 107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 그 중 5개 섬 유인도. 본섬은 두개로 가미아가타[上縣]와 시모아가타[下縣]가 가장 큰 섬이며 만제키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시 6정(쓰시마시, 이즈하라마치, 미츠시마마치, 토요타마마치, 미네마치, 카미아가타마치, 카미쓰시마마치)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도시는 행정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 게치[鷄知]이며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한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열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먹을 게 귀한 데다 지리적 특수성까지 겹친 탓에 대마도주는 조선 국왕의 관직(예조참의급)과 일본 막부의 다이묘라는 직을 동시에 갖고 '줄타기 생존'을 모색했다.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소씨[宗氏]의 땅이었다. 1274, 1281년에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러시아는 1861년에 이 지역의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패했던 곳이다. 1905년 5월27일 대마도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대마도 포대의 공격을 받은 38척의 함대 중 35척이 침몰하고 겨우 3척만이 살아남았다. 대마도가 일본에 편입된 결정적인 계기는 공도(空島) 정책이었다. 치안 유지비용을 줄이려고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켰던 것인데 울릉도가 무인도로 변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2) 대마도와의 관계 - 신라 이사금(402-417)시절 가난한 천민 대마도 이주, 개척, 해마다 조공을 바침 - 고려 선종(1018-1094) 11년 대마도주에게 고려 관직 구당관 제수 - 1246년 종씨 대마도 도주 시작 - 고려 공민왕(1318) 17년 만호 대마도주 조공. 고려 관직 만호, 즉 고려 영토 - 고려 창왕 1년(1389) 2월 경상도 도원수 박위 대마도 정벌, 왜선 300척 소각 및 박자안 부대 동포 포로 100여명 구출 - 1419년 조선 세종 원년 삼군도 체찰사 이종무 대마도 1차 원정, 왜선 129척 소각, 가옥 1939호 소각, 왜구 114명 참수, 포로 21명, 중국인 131명 구출. 이종무 2차 원정. 가옥 68호, 선박 14척 소각, 왜구 9명 참수, 동포 8명 구출 - 1461년 조선 세조 7년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 관직 제수 - 1471년 조선 성종 2년 해동제국기 대마도 도주 기록 - 1530년 조선 중종 25년 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에 대마도 조선 영토로 기록됨 -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팔도총도 대마도 조선 영토로 표기함 - 1719년 조선 숙종 45년 해유록 - 1740년 경상도지 기록, 부산 동래 송씨 종씨로 변경 대마도 태수 기록 - 1750년 조선 영조 해동지도 조선 영토로 기록 - 1786년 삼국접양지도 대마도 조선 영토로 표기 - 1790년 조선과 일본 지도 대마도 조선 영토로 표기 - 1822년 조선 순조 22년 대마도 대동여지도 조선 영토로 명시 - 1830년 일본 조선국도 대마도 조선 영토로 표기 - 1855년 영국제작 지도에 대마도 조선령 표기 - 1861년 프랑스지도, 1865년 미국지도, 1868년 페리제독 자서전, 일본 국제 지도로 1786년 삼국접양지도 사용(대마도 조선 영토로 표기) - 1864년 미국 페리함대 사용 아시아지도 대마도 조선령 표기 - 1868년 일본 12월 19일 왕정 정부수립 조선 통고 - 1871년 일본 대마도 태수 폐지, 일본 영토 이즈하라현으로 일방적 편입 - 1873년 일본 삼국접양지도 회수 및 변조, 1878년 재보급(대마도 일본 영토로 변조) - 1876년 운양호사건으로 인한 병자수호조약 체결, 일본 나가사키 현으로 강제 편입 -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대마도 기록 재정리 - 1923년 조선사편찬위 대마도 소재 관련문서 66,469건, 고기록 3,576권, 고지도 36건, 고서 18점, 그림 53점 은폐 변조 소각, 유적 파괴 - 1948년 2월 입법의원 62명 대마도 조선 영토 복귀 대일강화조약 결의안 제출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8월18일 이승만 대통령 대마도반환 담화 발표, 9월 9일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 발표 - 1949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 이승만 대통령 대마도 반환 촉구 -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 대마도 반환 촉구 결의안 국회 제출 - 1951년 4월 27일 샌프란시스코협정에 근거, 미국정부에 보낸 공식 외교문서, 대마도 반환 요구서 제출 - 1968년 6월 26일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1862년 이후 미국령) 미국으로부터 반환에 대마도 조선 영토로 표기된 프랑스판 삼국접양지도 사용. - 2005년 3월 18일 마산시의회 대마도의 날 제정 - 2011년 일본 대마도 역사지우기 작업 시작. 1500년 (백제)은행나무 안내판 백제 삭제, 종 중상 초대도주 안내판 제거 - 2012년 일정부 독도 영유권 주장 시 팔도총도를 근거로 제시, 거기에 대마도 조선 영토 표기됨 - 2013년 3월 22일 의정부시의회 대마도 반환 촉구
(3) 구한말 시대 일본이 일방적으로 편입 1859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유도에 의해 국내 정세가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도 일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가 대행하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1868년 1월 3일 도쿠가와 막부의 조번체제(朝藩體制)가 붕괴되고 왕정복고·왕위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웅번(雄藩)들은 판권봉환(版權奉還·왕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각 번의 영주들의 영역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에 들어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시게노부(德川慶喜,1837∼1913년)도 정권을 개혁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 1871년 8월 29일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막부 시절의 번을 없애고 근대적 지방 행정기관인 현을 두는 것)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외번부용(外藩附庸)의 대마도주 종의달(宗義達, 1847~1902)도 대마도를 판적봉환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의달은 조신(朝臣)과 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 칭하고 이스하라(嚴原) 번지사(藩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현에 속한 지방 행정지로 격하되었다.
(4) 해방이후 논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이하 내각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일본의 요시다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언사로 받아들이고 이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다. 그 후 이대통령은 공식적으로나 문서상으로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하였다. 미군정 시기인 1948년 2월 17일에 열린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입법의원 허간용(許侃龍·서북도 관선의원) 외 62명은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폭주로 연기되다가 회기가 종결됨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했다.
2. 사학과2박3일대마도답사 사학과교우회는 2박3일 일정으로 2017년 6월 8일 오후 11시 30분(음력 보름날) 압구정역에서 출발하였다. 최고령선배 59최원복과 62양교석 선배님 필두로, 64이윤희, 64이주윤, 66권진순, 67김백희, 69김세응, 71박종국, 72장광준, 74정창래, 82이연우, 82박동호, 82한정섭, 82박은희, 82손재성, 82전미화, 85조한웅 등(부부참석) 29명 중 26명(3명은 부산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조우) 28인승 리무진으로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로 향했다. 6월 9일 새벽 5시 부산 구포에 도착, 할매재첩국집에서 재첩국으로 아침식사. 부추김치, 고등어무졸임, 된장국, 김치, 밥 등 괜찮다. 아침식사론 탁월한 선택이었다. 부산여객선터미널 6시 10분 도착, 1시간 30분 여의 짜증나는 승선수속후 9시 10분 오션플라워호 탑승, 대마도 이즈하라항으로 출발(2시간 소요). 1층 339명, 2층 우등실 106명, 총 445명 승선가능, 운행속도 40노트, 정확히 11시10분 도착, 입국수속도 1시간 반이 걸려서야 끝났다. 지문을 꼭 찍어야 하나? 솟아나는 악감정, 나뿐일까? 출발하는 사람들은 온통 한국사람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대마도들 먹여 살리는 것은 대한민국. 400여 명씩 하루 7~8척, 3000여 명이 들고나는 곳 우리나라 여행객 연간 15만 명이 인구 3만이 조금 넘는 이곳에서 최고의 방문객으로 큰 길거리 움직이는 이들은 모두가 우리나라 사람들뿐이다.
첫날 답사계획 : 이즈하라시내지역 표민옥적, 수선사, 나카라이토슈문학관, 하찌만신사, 마리아신사, 금석성, 조선통신사비, 대마역사민속관, 고려문,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만송원, 서산사, 한어사, 광청사,수선사, 국분사, 아메모노리호슈묘
두번째날 답사계획 : 하대마지역 및 상대마지역 일부 와타즈미신사, 에보시다께전망대, 카네다죠(금전성), 카미자카전망대, 코모다하마신사, 고몽상륙지, 이시아네마을, 상왕사, 쯔쯔자키공원, 매림사(첫불상), 소선월, 대선월, 만제끼다리.
세번째날 답사계획 : 상대마지역 도노자끼, 도노구비고분군, 미우다해수욕장, 한국전망대, 조선역관사위령비, 왕인박사현창비, 와니우라(왕인의 포구), 도요대포적, 관음사, 이꾸와라반자신사, 이국전망대, 사오자끼공원, 박재상순국비, 미네박물관, 원통사 및 이애선사공덕비, 종가묘소, 해신신사,
(1) 이즈하라시내지역 <표민옥적(瓢民屋跡)> 이즈하라 여객터미널에서 나와 시내 쪽으로 들어가는 길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으로 붉은색의 이즈하라대교가 눈앞에 보인다. 이 대교를 지나 두 물줄기가 모여지는 안쪽의 삼각부분 땅이 표민옥적의 자리이다. 지금은 자위대 나가사키 지방연락부로 쓰고 있었다. 표민옥적의 오른쪽으로는 이즈하라 시내를 흐르는 개천이고, 왼쪽 배들이 보이는 곳은 방파제 안쪽이다. 우리나라 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풍랑으로 조난이 되면 대부분 해류를 따라 대마도나 일본 서쪽 해안으로 표류하게 된다. 이렇게 표류한 어부들을 모두 대마도에 있던 표류민 집단 수용소 즉 표민옥(瓢民屋)에 수용했다가 조선에서 관리가 와서 적절한 협상 후에 귀국시켰다. 우리나라 측의 기록에 의하면, 에도시대의 약 200년간에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표류해 들어간 사람들은 약 3,400명, 또 일본으로부터 조선으로는 1,000명 정도라고 하며, 이것은 살아 송환된 사람들의 기록상 숫자이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대마도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때 대마도사람들이 일본군의 안내역을 맡게 된 연유로 조선과의 무역이 한동안 끊겼었다. 따라서 조선이 대마도에 대해 안고 있던 불신감을 제거하고, 무역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표류민의 송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통감하고 있었으며, 조선도 또 국교가 단절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마도의 표류민만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본 막부에서는 대마도를 제외하고 표착지로부터 직접 조선에 송환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대신에 모든 것을 나가사키를 통해 쓰시마번에 의해서 송환하게 하였다. 거기에 따르는 비용의 모두를 번이나 막부가 부담했다.
<수선사와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하선이후 일단 이틀동안 머물 민박집(豆酸)에 짐을 맡겨놓고 음식점 '기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바로 최익현순국기념비가 있는 백제 비구니가 세웠다는 사찰 수선사로 향하였다. 수선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이 절은 656년 백제의 법묘(法妙)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백제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대마도가 우리 역사문화 속에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해준다. 그런데 이 절에는 “修善”이라고 쓴 편액에 걸려 있다. 이 편액은 김학진이 쓴 것이다. 김학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 최익현을 옹호하는 상소를 비롯해 반일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금된 일도 있었다. 이후 최익현이 의병에 함께 나설 것을 제의했으나 동조하지 않았다. 김학진은 과거에 급제한 후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1894년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내게 되었다. 마침 그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흥선은 정권유지를 위해 동학군과 알게 모르게 제휴하고 있었다. 척화파 중 당시 정권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김학진은 전라 감사로 천거되었다. 당시 많은 관료들은 전라감사로 내려가는 일을 회피하고 있었다. 고종이 그를 불러들여 전라감사로 임명하니 그는 임금 앞에 엎드려‘편의종사(便宜從事)’의 조처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편의종사란 현지의 사정에 따라 임금의 결재 없이 일을 우선 처리하는 권한을 말한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고종은 할 수 없이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전주감영은 이미 동학군의 손에 떨어 있었다. 김학진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서야 전주에 부임할 수 있었다. 이 때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합의되었다. 집강소는 동학군에 의해 운영되던 곳으로 면사무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통해 정부와 타협하며 제반 폐정과 모순을 개혁했다.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을 공인하고 자신의 감사 집무실을 내주었다. 전주에 있는 회룡총 4백 자루, 크루프포 등 대포 3문과 탄알과 식량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농민군의 운량관(運糧官)이 되기도 했다. 김학진은 1906년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 유배를 떠날 때 홍문관 태학사에 오르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7년 사망하였다. 그 작위는 아들 김덕한이 내려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최익현순국기념비는 당초 일본측이 유령비로 제의해왔으나, 정영호박사의 주장으로 순국비로 정해지고, 토지 1평에 소유자 최익현으로 등재하였다고 한다.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라고 적혀있고 뒷면에는 한국과 대마도측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최익현은 유학자이자 관리로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친일개화파를 적으로 규정하여 개화정책 폐지를 요구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전북 태인에서 74세의 나이로 직접 의병을 일으켜 관군,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1906년 임병찬 선생과 함께 잡혀 일제에 의해 압송되어 대마도 감금 3년형을 받게 되고, 1906년 8월 28일 아침 이즈하라로 호송되어 왔다. 2년형을 받은 임병찬과 함께 하치만구신사(八幡宮 神社) 남쪽에 위치한 제사전습소에 수용되었는데, 쓰시마경비대 수용소가 완성되기 전 3개월간 이곳에 구류되었다. 임병찬의 「대마도일기」에 의하면 12월 4일 발병의 기록이 보이며, 경비대에서는 사람을 붙여 간호하였으나, 1907년 1월 1일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현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에서 치뤄지고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운구는 충남 논산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뒤에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안장되었다. 고향인 포천에 채산사가 건립되어 지금도 매년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이 비는 1982년 선생을 기리는 한국(황수영, 정영호 등)과 일본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임병찬(林炳瓚.1851~1916)은 1851년(철종 2) 2월 5일 옥구 남산(南山) 기슭에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인 1867년(고종 4) 옥구현의 형방(刑房)으로 들어갔다. 1886년(고종 23) 전라도의 대동리(大同吏)가 되어 거문도 설진 공사 감독관으로 공을 세워 1889년(고종 26)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제수 받았다. 그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 진관 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1884년(고종 21) 이래로 체납된 세금 6만 7000냥과 쌀 1,800여 석을 모두 추징하는 업적을 쌓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 임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임병찬은, 1893년(고종 30) 순창군 접경의 회문산 아래 산내면 종송리(種松里)로 이사를 와서 흥학재(興學齋)라는 학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끄는 김개남(金開南)이 자신의 고향인 태인 땅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송두용(宋斗鏞)을 시켜서 전라도 위무사 이도재(李道宰)에게 넘겼다. 그 공으로 무남영 좌령관(武南營 左領官)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다시 임실 군수(任實 郡守)를 제수 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어려서 잃은 어머니 시묘살이를 하겠다며 어머니 무덤을 그가 살던 종석산(鍾石山) 위로 옮기고는 여막에서 지냈다. 이 어머니 묘는 2013년 6월 정읍시 산내면 종석산[능교리 산 355]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즈음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편지를 통해 교류하였고 함께 창의에 대해 논의하였다. 1905년 6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태인을 정복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였다. 빠른 속도로 정읍과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였는데, 이때 근방 포수들이 모여 들어 진영은 900명에 이르렀다. 6월 12일 순창으로 진격하였으나 몰려든 적군이 일본군이 아니고 전주와 남원 진위대 군사임을 확인하고 동족끼리 살상할 수 없다 하여 해산하였다. 일본 군인에게 구속되어 최익현은 대마도 감금 3년을 받았고 임병찬은 대마도 감금 2년형을 받았는데, 최익현이 순절한 후에도 임병찬은 감금 생활을 계속하다가 1907년 1월 순종의 재빙가례(再聘嘉禮)로 인한 은전(恩典)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단연동맹회의소(斷煙同盟會議所)를 조직하고 전북단연기도회(全北斷煙期圖會)의 찬성장(贊成長)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구속되어 탄압을 받았다. 1910년 한일병합이 맺어진 후 11월 12일 순창군 헌병소장이 찾아와 일왕의 은사금과 첩지를 전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1912년 음력 9월 28일 충청도 공주 유생 이칙(李侙)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광무 황제(光武皇帝)[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1913년 1월 10일에는 전참판 이인순(李寅順)이 또 밀칙을 받들고 찾아 왔다. 마침내 1914년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 전쟁을 준비하였다. 임병찬, 민정식(閔正植), 이명상(李明翔) 등 13명을 총 대표로 하여 각 도 대표 14명, 각 군 대표 302명을 합쳐 총 329명에 이르렀다. 독립 의군부의 활동 목표는 대규모 의병 전쟁이었다. 그러나 1914년 5월 3일 김창식(金昌植)이 왜경에 체포되어 고문에 못이겨 조직의 비밀을 자백하는 바람에 발각되고 말았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윤 5월 23일자로 총독 및 일본내각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대리로 경무총감(警務總監)을 보냈는데 임병찬은 경무총감 타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에게 국권 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 및 일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회담이 끝난 후 6월 3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었다. 이때 임병찬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평소 지니고 다니던 칼로 목을 찔렀으나 일본 경찰의 긴급 구호로 목숨을 구하였다. 6월 12일 1년 감금의 선고를 받고 거문도에 유배되어 14일의 단식을 행하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천명을 기다리길 원하며 식사를 시작하였다. 1915년 6월 3일 거문도 일본인 주재소 소장이 찾아와 1년 감금이 더해져 2년간 거문도에 있으라 하였다는 총독부 훈령을 전하였고, 1916년 5월 20일 병이 나 그로부터 3일 뒤인 23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카라이토슈문학관과 부케야시키(武家屋敷)> 그 다음 코스로 춘향전을 번역 소개한 아사이신문 기자출신 나카라이 토슈의 문학관(5천엔 여성인물 히구치 이치요의 애인으로 아사히신문 일본 최초의 해외특파원)을 둘러보고, 인근 나카무라의 무인의 저택 골목을 지나왔다.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에는 옛 시가지답게 마을 곳곳에 일본 무사(武士)의 고급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서쪽 장수원의 입구에는 당시의 무사들이 촌락을 이루어 생활한 무사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담이 처마 밑까지 올라 간 것이 보통 주택의 방화벽 돌담장과 구분되는데, 조선통신사의 내방 때 무가(武家)의 내부가 보여 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조방법으로 과거의 그림자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무사저택의 특징은 높은 돌담과 그리고 두개의 대문, 이중 지붕이다. 대문을 창살처럼 만들고 그 문은 항상 닫혀있는데 집 안에서는 밖을 환히 볼 수 있도록 하여 항상 외부를 살피고 찾아온 이의 정체를 쉽게 파악하기 위함이다. 즉 유사시를 대비해 만든 구조이다. 대문을 지나 정원과 현관사이에는 소나무를 심는데 이는 절개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 노출되는 것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담장 밖으로 보이는 크고 잘 가꾸어진 정원수는 그 집안의 권세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무사들의 후손이 아닌 일반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장수원> 개인사찰로서 조선과의 통상외교에 큰 공을 세운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 본인과 가족묘가 있는 곳이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17세기 일본의 조선담당 외교관이자 교육자로서 부산사투리까지 구사할 정도로 조선어에 능통했던 자이다. '교린수지'라는 일본 최초의 한글교본을 쓴 저자이고, 대마도에 처음으로 조선어학교인 한어사를 설립한 인물이다. 62세 때 한글과 가나를 병기한 독특한 조선어입문서 전일도인도 저술했다.
<광청사> 광청사는 서산사 가까이 있다. 고우세이지라고 한다. 1727년 아메노모리호슈가 설립한 3년제 조선어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교재는 1학년 '교린수지', 2학년 '전일도인', 3학년 '인어대방' 이었는데 통역사 양성이 목적이었다. 또한 쓰시마에서는 왜관에 매년 사람을 보냈는데, 통계에 의하면 쓰시마 남자의 절반이 일생에 한번은 조선에 다녀왔다고 한다. 1872년 10월 25일 이 절 본당에 한어학소가 개소되었다. 우리나라 침략을 위해 통역사를 양성할 목적이었다. 대마도 고위층 자제 34명을 입소시켰다. 1873년 8월 2일까지 1년간이었다. 그들 중 10명이 10월 16일 한국말을 더 배우기 위해 초량왜관으로 보내졌으며, 초량왜관 내에는 초량어학소를 만들어 운영했다. 1880년 동경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가 생기면서 자동 폐소되었다.
<서산사(西山寺,세이잔지)> 대마도 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다. 이 곳은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떼이안(以酊庵)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테이안은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 숙소로 제공되고 또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일종의 관저였는데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이후 이떼이안이 서산사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찰 내에는 사찰에서 운영하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 있다. 절문을 들어서면 하얀 돌이 깔린 아주 좁은 정원이 있고 가운데 통로에 일렬로 늘어선 박석이 깔려있다. 마주 보이는 문이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일본에서의 지장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이떼이안(以酊庵)으로 쓰였던 건물 정면의 지붕 끝의 산 모양으로 생긴 구조물은 당파풍(唐破風)으로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 건축 양식에서는 박공이라 하는 것으로 에도(江后)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전해져서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김성일 선생의 시비가 서산사 경내에 서 있는데 이 시비는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것이다. 김성일 (金誠一,1538~1593)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1590년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일본 사찰은 묘지의 관리로 사찰 운영을 하기 때문에 신도 관리나 불사 보다는 묘지 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묘지에는 일본인 가족들의 납골묘가 가문별로 설치되어 있고, 사찰 승려의 주 업무는 이 납골묘를 관리하고 관리비를 유족들에게 받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죽어서도 가족과 옆에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어서 마을 주택가 인근에 납골묘를 만들어 안치한다. 심지어 집안이나 방안에 납골당을 만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태어나면 신사로 가서 그 조상신에게 참배로써 인사하고, 자라면 결혼은 교회에서 서구식으로 치르고, 죽으면 그 장례 절차나 매장 형식은 불교식을 따르고 사찰묘지에 묻힌다.
<금석성(金石城-사지끼바라)> 금석성 뒤로는 청수산(210m), 유명산(558m)이 놓여 있으며, 금석산성의 성터 흔적이 남아 있고, 이즈하라시를 조망할 수 있다. 금석성(가네이시성터)은 대마도주 소가가 거주하던 곳이다. 대마호텔 옆의 지신사(池神社) 위치에 대마도주 관아가 있었는데, 쯔쯔지방에 살고 있던 <종씨형제> 가 도주자리를 찬탈하기 위하여 관아에 불을 질렀다. 잠자던 도주가 혼비백산하여 이곳 산등성이로 도망쳐 와서 도주관아를 건축하고 20대까지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후 대마도를 중흥시킨 21대 소오요시자네가 사지키바라에 이즈하라성을 축성한 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소오요시자네(宗義眞) 때가 대마도의 황금시대였으며, 조선무역이 잘 되어서 대마도가 제일 번성하고 대규모의 사업이 실행되었다. 금석성은 그러한 시기인 1669년 소오요시자네가 건설한 성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天守閣이 있는 호화롭고 장대한 성이 유행했지만 대마도의 성에는 천수각이 없었다. 성터에는 대마도의 돌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과 성벽이 잘 남아 있고 한구석에는 훌륭한 정원터가 남아 있다. 금석성 안에 있는 지키바라(棧原)가 역대 대마도주들의 거처였으니, 이곳이 대마도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문의 망루는 1813년 화재로 없어졌다가 중앙의 막부(幕府)에서 복구비 이천 냥을 빌려서 다음 해인 1814년에 재건했는데, 그것이 1919년에 교또(京都)의 어디론가 팔려갔다는 설을 남긴 채 해체, 망실되고 말았다. 성의 정문인 누문은 다이쇼 8년까지 남아 있었지만 해체되어졌으며, 현재의 櫓門(노문-야쿠라문)은 平成(헤이세이) 2년(1990년) 11월에 복원되었다. 금석성에서는 조선통신사들이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노문을 지나면‘조선통신사접우로지’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과 일본의 우호관계는 임진왜란 이후 깨져 한동안 조선통신사를 보내지 않았지만 대마도주의 노력에 의해 1607년 부활되었다. 금석성은 여느 일본의 성들과는 다른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 일본성의 특징인 천수각(天守閣 :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게 높여 전시에 성주가 지휘를 하는 망루 겸 평상시에는 성주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일 높은 건물)이 없다 . 둘째, 항구에서 성까지의 대로를 일직선으로 조성했는데, 이 역시 일본 특유의 방어위주 축성원칙에 크게 벗어나는 점이라 한다. 셋째, 고려문이 성 안에 제삼문(第三門)으로 있었다고 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금석성은 전투를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영위해 나가는데 필요한 영빈적 목적이 더 컸던 것으로 보여 진다.
<조선국통신사비(朝鮮國通信使之碑)>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일본의 입장에선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후기까지 조선 통신사라고 불렀을 뿐 정확한 명칭은 통신사이다. 두 차례의 왜란으로 조선이 초토화되어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가 끊어지자 대마도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조선과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기를 끊임없이 요청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에 시작하여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외교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처음 세 차례는 쇄환사로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를 귀국시키는 것이 주임무였다. 일본의 사학계 일각에서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통신사에 대응할 만한 일본측 사절단의 파견이 없었다는 점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 이래 개항할 때까지 외교정책은 성리학적 외교원칙인 사대교린으로서,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여진, 일본, 류큐 등은 어디까지나 교린의 대상이지, 결코 사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에 대한 일본학계의 자의적인 해석은 나올 수 있어도, 당시의 조선이 사대의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선 후기에 통신사 파견 요청 자체가 전적으로 에도 막부 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에 대응할 만한 일본국왕사가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군이 일본국왕사의 상경로로 침공한 일에 대한 응분의 조치로 일본 사절단의 상경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본 막부 측에서 조선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대마도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를 파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통신사를 폄하하는 경향은 에도 막부 당시의 국학파 사이에 존재했으며, 조선에서는 자국의 국왕이 일본의 군주(일본 천황)보다 낮은 지위로 외교 관계를 맺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론이 일었다. 원중거 등 파견된 통신사 중 일부는 일본의 이중적인 권력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비록 실권 없이 상징적이기는 하나, 형식상 쇼군을 임명하는 국가의 상징이 되어 있는 군주, 천황의 존재를 의식하여, 후일에 막부를 타도하고 군주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나면, 형식상 군주의 신하인 쇼군과 동등한 지위를 맺고 있는 조선 국왕에 대해서 외교의례적 문제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으로 말미암아 현실화되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 조선 통신사의 파견이 중단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대마도를 앞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은 사절단의 파견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이후 조선은 우호적 정책을 이어받은 에도(江戶) 막부에 대해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차례의 통신사를 보냈다. 도쿄에 발을 들여놓은 조선의 유일한 사절이 바로 조선통신사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정부의 최고 관료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화려한 악대, 소동(小童), 무인(武人), 통역관 등 300~500명에 달하는 대사절단이었다. 당시의 화려한 조선통신사 행차는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에 소장된 행차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고려문 옆에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고려문> 원래는 대마도주의 거처인 사지키바라(樓原)의 정문으로 영은문이었다. 1678년 완성되었으나, 조선통신사를 환영하기 위해 새로 건설, 그후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1989년 복원하였다.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 대마도의 중요 문화재와 민속자료를 전시한 ‘대마도 민속자료관’이다. 쓰시마도주 가문의 문서 8만 여점을 보관하고 있으며, 전시실 내부에는 100여 점의 고고, 민속, 역사 자료가 있고,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과 조선간행본인 ‘훈몽자회’, ‘첩해신어’라는 책자 등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고려판 대장경과 대반야경, 고려청자 등도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답사시기에는 휴관이 되어 볼 수가 없었다. 휴관 기간이 2017년 4월 1일(토) ~ 새 박물관 개관 때(2020년 예정)까지이며, 휴관 기간 동안에 티아라몰 맞은편 '후레아이 도코로 쓰시마' 에서 일부가 전시한다고 했으나, 아직 준비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성신지교린비> 조선후기 한일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의 현창비(顯彰碑: 뚜렷한 공적을 기리는 비)로 고려문 위쪽에 있다. "誠信之交隣"이란 1728년에 그가 쓴 『교린제성』(交隣堤醒: 이웃 나라와의 교제에 있어서 잊어버린 것을 깨우친다)의 핵심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6공화국때 노태우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하면서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호슈의 '성신지교린'을 예로 들면서 부터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났다.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 조선시대에 왕실에는 후궁 소생의 수많은 옹주들이 있었지만 정비 소생의 공주보다 서열이 낮은 신분의 한계 때문에 역사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인물로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와 망국의 황제 고종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덕혜옹주를 들 수 있다. 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순종 이척,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 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그 때문에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애지중지 키워졌다. 덕혜옹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서녀라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4살에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몇 년 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심리 상태는 벼랑 끝까지 몰려 정신분열증으로 비화되었지만, 냉혹한 일제는 대마도주의 후예인 ‘소오다케유키’와 1931년 5월에 사랑이 없는 정략적인 결혼을 해 도쿄에서 생활했다. 정략결혼으로 그녀는 더욱 비좁은 새장 속에 가두게 되는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하고 사방이 가로막힌 정신병원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다가 결국 1955년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였고, 하나밖에 없는 딸이 1956년 실종되자,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1962년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7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도 서거하였다. 1961년2월20일 제정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에 의하여 구황족에 포함되었으며,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아서 생활하였다. 현재 덕혜옹주의 무덤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소인 홍릉 뒤에 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는 대마도 거주 재일동포들이 세운 비이다. 덕혜옹주가 1931년 5월 ‘소오다케유키(宗武志)’백작과 결혼 한 뒤에 백작의 본가인 대마도로 신혼여행을 오자 당시 대마도 인구 6만 3000여명 가운데 3분의 1일을 차지했던 재일동포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십시일반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결혼봉축기념비는 원래 이즈하라 시내의 가네이시 성터에 건립되었으나 이혼후 사람들이 기념비를 뽑아 방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9년 대마도와 부산사이의 직항로가 개통되고 관광객이 몰려들자 2001년 11월 지금의 자리에 복원되었다.
<만송원(반쇼인,萬松院)>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의 산기슭 입구에 있다. 낙엽수림이 뒤덮힌 일대를 포함한 만송원은「쓰시마 번주 소가묘소」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 곳이다. 이 사찰은 초대 번주 요시토시의 보리사로써 제2대 번주 요시나리가 아버지를 기리며 1615년에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한 곳으로 이 곳에 역대 쓰시마 번주와 그 일족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불사공구(佛事供具)인 삼구족(三具足 : 향로, 촛대, 고배. 우리 왕실에서 대마도 번주에게 하사한 것)과 고려불(관세음보살반가사유상), 고려판경문 등이 있으며 조선에서 가져간 국보급 불상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절 옆문 바로 옆 담벼락에 돌로 만든 북이 서 있다. 북에는 삼태극이 선명하고 또아리를 튼 용이 기둥을 휘감고 있는 북의 이름은 칸코(諫鼓,간고)다. 우리나라의 신문고와 같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울리라는 것인데, 영주가 선정을 베풀어서 인민들이 북을 칠 일이 없으므로 새들만 놀고 갔다고 하여 당시의 평화로움을 말해주고 있는데, 실제적인 필요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세워둔 것 같다. 일본 사찰의 정문은 항상 닫혀 있어서 측문을 통해 들어간다. 현존하는 이곳의 절문은 쓰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桃山:1568~1600) 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다. 묘지는 햐쿠칸키(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르는 곳에 있다.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宗가 제1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묘지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번주와 그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이, 하단에는 일족 및 소가(宗家)에서 출가한 사람 등이 모셔져 있다. 이곳은 일본 3대 묘지(万松院 / 石川縣 金澤의 前田家 / 山口縣 萩市의 毛利家)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 사적이다. 묘지 쪽에는 둘레가 무려 6~7m나 되고 높이가 35~40m나 되는 삼나무(大杉)가 세 그루 있다. 수령이 1600년이라고 하며 대마도에서는 최고령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스기'라고 하는 삼나무는 수분을 흡수하지 않고 물속에서 쉽게 부패하지 않아 일본에서는 선박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한다.
<하치만신사> 하치만궁신사(八幡宮神社)는 신공(神功)황후가 신라정복에서 돌아오던 길에 '기사카(木坂)'의 이즈야마 기슭에 여덟류(八流)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곳이다. 그러나 AD.200년 신공황후의 신라정토설은 일본학자들도 틀렸다고 인정한 학설이다. 하치만궁신사 안에는 보물전이 있는데 굳게 봉하여 개방하지 않고 있다. 이 안에 우리나라에서 가져온 금동불과 목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목상은 승려형이며, 팔번신은 여신상으로 응신(應神:오오진)천황과 그의 어머니 신공황후를 뜻한다고 한다. 여기에 신라불과 고려경, 고려청자 등도 있다고 한다. 신사의 지붕은 일본식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며 노송껍질로 지붕을 덮었고 건물 자체는 오래되어 낡고 단청없이 쇠락해 있다. 일본에는 이런 신사가 3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마리아신사> 임진왜란 전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가 조선지리를 잘 아는 대마도 번주 요시토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의 부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을 요시토시에게 시집을 보냈다. 불과 15세에 가족과 떨어져 대마도로 온 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그곳에서 남편의 사랑을 받아 (남편도 개종) 10년간 생활하였는데,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전쟁이 종결되자, 히데요시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쓰파간의 격렬한 권력투쟁과 그에 따른 전투 끝에 그의 아버지 고니시 유카나가가 살해당하고 이에야쓰가 권력을 잡자 요시토시는 대마도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부인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를 나가사키로 돌려 보낸다. 마리아는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떴고 대마도 주민들은 권력에 희생된 그녀를 기려 이 신사에 합사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국분사(國分寺)> 나라에서 관리하며 민간포교가 아닌 국가번영을 기원하는 관승(官僧)들이 활동하던 곳이다. 절 뒤편에 조성된 묘지의 상단부에는‘종3위훈1등국분상태랑지묘’라는 묘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찾게 되면서 옮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마도 출신의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는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을 주도, 조선어에 능통하여 을사보호조약과 한일병합 조약문 초안을 만들고 통역하였던 자이다. 한 때 이토히로부미의 통역비서 역할도 하였다. 그는 대마도 청사에 있던 한어학소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부산의‘초량관어학소’를 거쳐 동경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였다. 부산의‘초량관어학소’로 유학 온 왜인들은 경복궁을 드나들고 한일합병의 통역관과 정보원 노릇을 하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 때의 통역자 2명도 바로 대마도인으로 이 어학소 출신이었다. 상태랑은 조선총독부 인사국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이완용과 손잡고 조선인들에게 칼을 휘둘렀으며, 1917년에서 1921년까지 이왕직 차관을 지내던 중 6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왕직은 일본황실령으로 만들어진 고종황제를 일본의 일개 왕으로 격하시킨 직제였다. 대부분 장관은 한국인이고, 차관은 일본인으로 정하여 궁중에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물론 전에 근무하던 궁내부 직원 326명과 고용직 340명은 즉시 해고해버렸다. 1920년 4월 28일 상태랑은 이은왕자와 일본 황실의 이방자여사의 정략결혼을 추진하였고,1925년 덕혜옹주의 정략결혼 역시 이왕직에서 추진하였다. 이완용은 상태랑의 묘비문을 직접 써 주었다. 비석 왼쪽의 ‘후작 이완용 서(侯爵 李完用 書),라는 글자는 글씨체가 다르다고 하여, 나중에 누군가 적어 넣은 것이라고 추정한다.
<황윤길현창비> 현창비는 2011년 12월 3일 한국대표 황수영 박사와 대마도대표 영구수혜가 주축이 되어 설립하였다. 통신사 황윤길은 1590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선임되어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허성, 사신으로 와있던 일본 승려 겐소(玄昭)와 동행하여 수행원 200여명을 거느리고 쓰시마를 거쳐 오사카로 가서 일본의 관백(關伯,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관직)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을 만나보고 이듬해 봄에 환국하여, 국정을 자세히 보고한 사람이다. 서인이었던 황윤길은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주장하였으나, 동인인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전쟁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엇갈린 주장을 했다. 당시 동인 정권하에서 일본에 대한 방비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이 황윤길의 말을 쫒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쓰시마도주 소 요시토모(宗義智)로부터 처음으로 조총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조정에 바쳤지만, 아쉽게도 실용화계획도 세우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역사가 서인 정권이었고, 황윤길의 주장이 관철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황윤길과 김성일> 태종4년(1404년), 조선은 처음 일본과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조선은 국왕이 보내는 사절단인 통신사를 왜로 보냈고, 왜에서는 막부장군이 보내는 일본국왕사를 조선으로 보냈다. 당시 왜는 무사가 정권을 장악하는 막부시대였기에 일본 국왕이 아닌 실질적인 지배자 막부장군에게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通信)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자, 선조는 1590년 3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낼 것을 결정했다. 서인이었던 황윤길을 정사로, 동인이었던 김성일을 부사로 임명하였는데, 이 때부터 두 사람의 의견 대립은 예고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대마도에서부터 그 동안 두 나라가 사절단을 맞이할 때마다 의례적으로 행하던 절차대로 진행하지 않아 조선의 사절단을 격노하게 했다. 특히 부사 김성일은 그들의 태도가 거만하다며 통신사 일행이 움직이는 것을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는 오사카에 도착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선조의 국서를 수령하는 것을 지체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신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예를 지키지 않고 오만 방자하게 행동했고, 사절단이 돌아가기 위해 답서를 달라고 재촉해도 차일피일 미루었다. 답서의 내용도 거만하다 하여 김성일이 몇 번씩 수정을 요청해서야 수령하여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약 1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통신사의 황윤길과 김성일은 상반된 의견을 내어 놓는다. 황윤길은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눈빛에 광채가 깃들어 탐욕과 지략을 갖추었고, 전국을 통일한 직후라 자신감과 야심으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조선으로 쳐들어올 것으로 보였다."며 침략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으로 보고했다. 반면,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행동은 과장되고 허세에 가득 차 있었다."며 "군사를 움직일 저의가 있었다면 은밀하게 움직였을 것"라고 반박했다. 또, "조선과 지위를 대등하게 하기 위한 허세일 뿐이다"고 일축했다. 이것이 동인과 서인의 경쟁관계에 의해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판이하게 다르게 본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두 붕당의 대립관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조선의 조정은 조선 최대의 위기인 임진왜란을 준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더욱 혼란에 빠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은어맞이(鮎もどし) 자연공원은 계곡(세가와)과 출렁다리(세류바시), 큰 바위(1.2km 위로 물이 흐른다)가 장관이다. 은어가 오르지 못하고 돌아간다 해서 아유모도시라 불린다.
<쓰쓰자키공원과 등대> 쓰시마 최남단에 위치한 쓰쓰자키는 대한해협과 쓰시마해협의 경계를 이루며, 옛부터 수로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조망되는 풍경은 절경을 자랑하 며 등대에 부딪치는 파도는 자연의 장대함을 느끼게 만든다.
<장송사와 은행나무> 장송사에 보관된 것은 고려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으로서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 전질이다. 백제로부터 전해진 긴노오이쵸는 높이 23m, 둘래 12.5m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초조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관판 대장경(官版大藏經: 971∼983)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간행한 한역(漢譯) 대장경이다. 송나라 태조에 의해서 간행한 대장경이 991년 고려에 전래되자, 고려는 커다란 자극을 받고 대장경 간행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993년(성종 12)부터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1011년에는 현종이 남쪽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거란군이 송악에서 물러나지 않으므로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로 서원한 뒤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 즉 거란족이 침입하자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국민정신을 통합하여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신앙심으로 대장경판을 조성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족의 침입으로 불타 버린 뒤 현재까지 전래된 것이 없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국내에도 전래되어 성암고서박물관, 호림박물관, 호암미술관과 개인 등이 약 300여 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일본의 경도 난젠지(南禪寺)와 대마도에 상당량의 초조대장경이 보존되고 있다.
<이시야네(石屋根-돌지붕)> 마치 북유럽의 작은 돌집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특이한 창고가 일본에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모고야는 해안에 표착한 해초를 모아놓은 창고로 햇볕에 말려 경작지에 비료로 쓰기 위해 저장해둔 시설이고, 집안의 곡물, 의류, 도구 등을 넣어 보관하는 창고를 '고야'라고 하는데.이 지방의 창고는 돌로 지붕을 이었다고 해서 '이시야네'라고 부른다. 섬의 89%가 산림지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쓰시마는 식량의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또 예로부터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대한해협에 면해 있는 서해안 지역은 겨울이 되면 초속 수 십 미터의 강한 계절풍이 불어왔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초가지붕과 너와지붕으로는 강풍과 화재로부터 소중한 식량을 지켜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농민이 기와로 지붕을 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강풍으로 인한 피해, 화재로 인한 피해를 막기위해 지붕자체를 사암이나 이판암의 넓은 판석을 채취하여 덮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상식(高床式: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설치하는 가구 구조)으로 지어 바람과 화재, 그리고 습기에도 강한 형태의 창고를 짓게 된 것이다. 지붕위의 돌 무게가 100톤이 넘는데 지붕이 얹어진 기반은 목조건물이므로 무거운 돌지붕의 붕괴를 막는 상당한 기술을 요하였다.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기둥으로는 강도가 강한 모밀잣나무(椎)를 주로 사용하였다. 石屋根小屋(돌지붕 창고)는 쓰시마의 돌문화를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붕판석은 주로 사암이나 이판암을 사용하였다. 창고 내부는 쌀, 보리 등의 잡곡, 의류 및 각종 생활 도구 등을 구별하여 수납할 수 있도록 구획하였다. 또 창고를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본채로부터 떨어진 곳에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건축 형태는 일본에서도 시이네(椎根)지방에서만 볼 수 있으며 현재 몇 개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다. 관광지에서 한 두 채 발견할 수 있는 이시야네는 모조품이라고 보면 된다. 습기가 많은 곳이므로 기둥을 높혀서 지면과 창고의 밑바닥에 30-50cm의 공간을 두었다. 바람이 잘 통하여 곡식의 건조를 돕기 위함이다. 곡식뿐 아니라 의류, 가구, 문서 등도 보관하였기 때문에 보관에 신중을 기하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이런 기와로 만들어 지붕 위에 무거운 돌을 군데군데 얹어두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대마도에서 창고를 칭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 고야(小屋-소옥)-안채와 떨어진 곳에 지어진 창고를 '고야’라 한다. 대마도에 고문서가 많이 현존하는 것도 이 고야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습도를 막기 위해 고상식으로 지어졌다. ※ 모고야-해안가에 해초를 모아놓은 창고로 해초는 말려서 밭의 거름으로 쓴다. ※ 이모가마-사츠마이모(고구마)를 저장하는 가마이다.
<대마도번주선착장터> 1663년에 조성된 ‘오후나에유적(お船江跡)’은 이즈하라항 쿠타포에 남아 있으며, 옛 대마도 번주의 선착장이다. 항해에서 돌아온 배를 수리하거나 격납하는 곳으로 축대의 돌담은 원형을 유지하고 정문, 창고, 번주의 휴식지 등이 남아있다. 17세기에 정박장을 가졌던 번은 많았으나 이곳처럼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사례는 드물어 근대의 중요한 유물이다. 정말 작고 이쁘게 조성된 도주 전용의 정박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도 맑고 깨끗하고 주변의 조경이나 돌과 나무도 멋스럽다. 지금은 공원이라고 보면 좋을 정도로 풍광이 좋다. 이곳에서는 지난 1984년 일본 전설의 동물인‘갓파(河童, かっぱ)’처럼 생긴 것이 목격되었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부근 도로에서는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어 경찰, 방송국, 시청 등에서 현장을 확인하는 등의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분비물 견본을 채취하기도 했으며, 결과는 불분명하게 나왔다. 아쉽게도 이후에는 갓파는 보았다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은 사라진 전설이 되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이곳을 지나는 다리 위 인도에는 갓파를 부조한 조각이 여러 모양으로 남아있어 그 전설을 다시 일깨우는 듯했다. 갓파는 일본 각지의 강, 호수, 바다 등에 사는 인간을 닮은 반인반수의 동물로 엔코(猿猴), 메도치, 가왓파 등으로 불리며, 각자 개성이 있다. 일반적인 갓파는 바가지 머리를 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머리 꼭대기에 움푹 파인 곳이 있고, 거기에는 물이 들어 있는데 물이 없어지면 죽는다고 한다. 손가락은 세 개로 물갈퀴가 있고, 두 팔이 하나로 이어져 있어서 한 쪽에서 잡아당기면 쑥 빠져버린다. 장난치길 좋아해서 아이들을 강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인간의 시리코다마(しりこだま,尻子玉, 항문(肛門)에 있다고 상상되었던 구슬)를 빼낸다고도 한다. 갓파가 오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여 일본에서는 초밥 집에서 사용하는 절인오이를 갓파라고 하는데, 오이를 왕창 넣은 초밥을 ‘갓파스시’라고 한다.
<코모따하마신사(몽고군내습지)> 1274년 10월 합포(마산)을 출발한 여몽연합군 3만이 코모따하마해변으로 상륙했다. 이때 대마도의 1만 병사는 전부 목숨을 잃었다. 당시 도주는 67세의 노장이었으며, 나중에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치열한 격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코모따하마신사는 전사자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 군인을 모신 신사는 야스쿠니신사와 본신사 2개뿐이다.
(2) 하대마지역 및 상대마지역 일부 <만관교(萬關橋-만세끼바시)> 1897년에 굴삭을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시킨 일본 군사용 운하이다. 3번에 걸쳐 만들었는데 1900년에는 운하의 길이:300m, 폭22m, 수심3m였으나, 1996년 준설 후는 운하의 길이:300m. 폭:65m. 수심5.5m이며, 다리의 폭:3.6m. 다리길이:100m. 높이:36m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만세끼 운하다. 일본은 이 운하 반대편에 수뢰 특공단과 어뢰정를 숨겨두고 러시아 발틱함대(총38척)가 지나갈 때 신속하게 이 운하를 통해 후면과 측면을 공격하고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본대가 나타나 정면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세계 최강 발틱 함대는 쓰시마에서 괴멸되고 마는데, 이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쥐고, 그 해(1905년) 가쓰라-테프트협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 지배의 승인을 받아낸 후 한국의 주권을 박탈한다. 그후 5년 뒤 1910년 대한제국은 강제합병(한일합병)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승의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는 통한의 다리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운하와 다리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이날(5월27일)을 해군전승기념일 즉 해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현재 오렌지빛 아치형 교량은 세번째 만들어진 다리다. 처음 가설된 다리는 1897년-1900년 완성되었다. 두 번째는 일본해군에 의해 건설된 철교로 1956년 완성되었다. 아치형 철교로 다리가 완성됨으로 버스가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3번째 만든 다리는 1996년 완성, 섬 전체의 도로망 정비와 함께 남북을 연결하는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다. 다리 가운데 쯤에 전망대가 있다. 만관교부근의 화장실은 이곳 특산물인 포고버섯을 상징화하였다. 러.일전쟁의 승리자요 일본에서 군신이라고도 불리는 도고 헤이아치로 후작은 러일전쟁 때 사령관으로도 참전했으며, 세계 5대 해전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쓰시마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해전술을 응용하여 자신의 함대 2배나 되는 러시아 함대를 격파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를 넬슨 제독과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 넬슨제독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장수다.",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나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나는 천왕 폐하의 부름을 받고 온 국민의 정성어린 지원으로 단 한번의 싸움을 이겨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조차 버림받고 국민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여 수없이 일본 군대를 쳐부숨으로써, 그가 지키는 지역에는 일본 군대가 한 발짝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도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나를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엄연한 모독이다."
<소선월(小船越)과 대선월(大船越)> '후나꼬시(선월-船越)'란 배船, 넘을 越, 말 그대로 '배가 산을 넘는다'라는 말이다.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 본섬 사이를 남북으로 길게 가로누운 섬이다. 따라서 대마도 서쪽 바다에서 동쪽 바다로 이동을 하려면 남쪽으로든 북쪽으로든 긴 섬을 돌아 넘어 가야 한다.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은 그런 불편을 덜기 위해 섬 중에서도 특별히 개미허리처럼 잘록하게 들어간 부분을 통하여 배를 육지로 밀어 올려 넘기는 방법을 택했다. 배 밑에 통나무 도르레를 깔아 언덕을 넘어 건너편 바다로 옮기는 방법인데, 이게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섬 반 바퀴를 삥 둘러 항해하는 것보다는 쉬웠던 모양이다. 아무튼 대마도에는 오후나쿠시(大船越)와 고후나쿠시(小船越), 두 개의 후나쿠시가 있었다. 이 중 만제키 운하 남쪽에 있는 오후나쿠시(대선월)는 간분12년(1671년) 21대 지방영주인 종의진(宗義眞)공이 오늘날 만제키 운하처럼 아예 파서 운하를 만들었다. 이후로도 고후나쿠시는 조선으로 가는 배가 뜨는 곳으로 중요성을 더 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아무 배나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드시 대마도 번주의 허가를 받은 배만 입항할 수 있었으며, 바로 이 허가서를 발행했던 기관이 매림사(梅林寺-바이린지)였다. 조선과의 교역이 유일이자 최대의 생계수단이었던 대마도에서 그 조선출입증(공식적으로는 문인(文引)이라고 불렸으며 해적이 아니라는, 소위 대마도 번주가 보증하는 양민증명서)을 관할했다는 점에서 이 절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발행권 그 자체도 막강한 권한인데 발행할 때마다 문인료를 꼬박꼬박 챙겼다 하니, 이러한 점들로 유추하면 당시 바이린지가 엄청난 부자 사찰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대마도에는 대선월운하와 만세키운하 2곳의 운하가 있다. 소선월(小船越)은 대선월의 조금 더 북쪽 현재 만관교가 있는 부근이다. 대마도에서 가장 낮고 좁은 협곡-고개로서 글자 뜻대로 <배를 밀어 넘기던 작은> 고개이다. 육지의 폭이 불과 178m 밖에 되지 않는다. 견당사가 1회-5회까지는 이곳을 통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419년 6월 29일에 대마8대도주 소사다모리가 이종무 장군에게 항복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카미자카전망대> 표고 385m, 일본을 대표하는 리아스식해안인 아소만이 눈아래 펼쳐지며, 멀리 큐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이 보이는 국경의 섬이다. 뒤편으로는 메이지시대 포대터가 남아 있다.
<금전성(金田城.가네타노키)> 미즈시마 흑뢰성산 꼭대기에 쌓은 금전성의 축조연대는 '일본서기(日本書紀)' 천지(天智) 6년(667)조에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을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일본서기 : 일본 나라[奈良]시대에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 30권. 신대(神代)부터 지토천황[持統天皇, 재위 645~702]까지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다. 덴무[天武]왕의 명으로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중심이 되어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6국사(六國史) 중의 첫째로 꼽히는 정사(正史)로서 편찬 자료는 제기(帝紀) 구사(舊辭)는 물론 가기(家記), 정부의 기록, 한국의 사료 등을 널리 활용하였다 조선식 산성은 자연석을 서로 엇물려 쌓은 성벽과 흙을 판축(板築)해서 성벽처럼 만든 토루(土壘), 그리고 성 안에 계류(溪流)나 우물이 있어서 장기 항전이 가능한 특징이 있는데, 한마디로 고구려나 백제식 산성이다. 금전성은 이런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데 이 시기에 누가 대마도에 이 성을 쌓았던 것일까? 백제 수도 사비성이 660년 나당연합군에 함락되고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가자 일본에 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귀국해 백제부흥군을 이끈다. 백제부흥군은 2만7000여 명의 왜 지원군과 합세해 663년 한반도 서해안의 백강(白江-일본서기는 백촌강(白村江)으로 기록) 하구에서 맞붙는데, 이 국제해전에서 나당연합군이 승전함으로써 백제 부흥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자 일본으로 퇴각한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서일본(西日本) 각지에 백제식 산성을 쌓는다. 금전성은 나당연합군과 최전선에서 맞서는 백제 결사대의 주둔처였다.
<매림사(梅林寺-바이린지)> 소선월의 부근에 매림사가 있다. 매림사 역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문화교류 측면에서 인연이 있는 절이다. 백제가 성왕 때(538년:성왕16년) 백제사신이 우리나라에서 불경과 부처를 일본으로 가지고 가기 위해서 이곳 소선월을 통과한 후 梅林寺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기 때문에 일본 최초로 불경과 불상 그리고 승려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창건한 일본 최초의 사찰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절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가끼뚜(嘉吉)년간에는 바이린지(梅林寺)라고 칭하고 있다. 이 절에는 남북조시대에 만든 대반야경 597첩이 있고 또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탄생불이 있으며 패곡(貝谷)이란 호를 가진 조선 선비가 써주었다는 梅林寺 현판도 볼 수 있다.(이 현판은 지금 경전 보관소에 방치되어 있다.매림사가 도로공사로 인하여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부터 원래의 현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동종도 이곳에 걸려있다. 매림사 동종은 일본종과 외형상 많은 차이점이 있어 양국의 종을 비교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용통은 한국종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일본종에는 없으며, 유곽안의 유두가 우리나라 종은 9개가 있으나 일본종에는 16개가 있다. 수인(手印; 부처의 손모양)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하고 있다. 탄생불은 호신용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규모가 크지는 않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일생을 보통 팔상도(八相圖)로 설명하는데, 불교도에게 탄생불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해신신사> 일본의 해신신앙의 발원지는 대마도 풍옥정의 와쯔미 신사와 미네정의 해신신사로서 현재 일본열도에서 바다의 신을 모시는 신사는 주길신사, 하쯔번 신사, 종상신사 같은 대(大)신사 그룹들인데 이들 신사들의 기원이 대마도의 해신신사라는 것이 일본고대 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들이다. 대마도의 해신신사에서 모시는 바다의 신은 토요타마 여신과 다마요리 여신인데 이 두 여신은 자매로서 해신의 딸이다. 일본신화에 의하면 하늘에서 천손으로 강림한 니니코 노미코도를 종조로 하고 그의 아들 히코호호데미의 부인이 도요다마 히메(豊玉姬:풍옥희)여신이고, 그의 손자 우가야의 부인이 다마요리히메 옥의희(玉依姬)여신이라고 했다. 우가야의 아들이 초대 일본천황 신무가 된다. 그러므로 신무천황의 어머니와 친 외가가 모두 해신계인데 이 해신계의 도움으로 초대 일본천황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해신의 이름은 면진(綿津)이다. 면진(綿津)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실나리'가 된다. '실나리'는 과거 부산의 수영강변에 즉 조선시대 경상 우수영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름이 사천(絲川)이라 불렀으며, 사천(絲川)을 우리말로 '실내'라고 하는데, 이 '실내'에 배 닿는 곳을 나리(津)라 했다. 그래서 면진(綿津)이라는 이름은 '실나리'에서 건너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면진(綿津)은 지금의 부산수영부근에서 대마도로 이주하여 일본 초대천황의 외조부가 되는 셈이다. 해신(綿進)이 우리민족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는 신대하 해궁유행(神代下 海宮遊幸)에 있는 노래 2수를 음(音)그대로 읽어보면 명확한 우리말이 된다.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본전 앞에서 부터 인근 바다까지 5개의 토리이가 일직선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본전(本殿) 정면의 다섯개의 토리이(鳥居)중 2개는 바다속에 세워져 있다. 기키(記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본 신화의 주인공인 야마사치히코와 우미사치히코(山幸彦と海幸彦, やまさちひことうみさちひこ)로 유명한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命)와 도요타마정(豊玉町)의 유래가 되었으며 바다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옛날부터 용궁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는 곳이다. 음력 8월 1일 오마츠리(大祭)가 열리며 무형문화재 춤(舞)사위인 봉납연예(奉納演芸,ほうのうえんげい,신불(神佛)에게 헌상하는 춤)와 후나구로대회(船ぐろう(배의 안전귀환을 기원하는)大会)로 붐빈다. 본전 뒤편의 숲길이 무척 좋고, 오래된 고목 아래에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의 묘비석이 보인다. 신령스러운 나무 아래에 큰 바위가 좌측에 있고, 둥근 바위의 묘비석이 이채로운 곳이다. 아소만일대의 신사는 토리이가 한국을 향하고 있어 옛날 우리나라와 많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신사의 토리이는 직선상으로 김해와 연결된다고 한다. 따라서 김수로왕의 아들이 대마도에 와서 지은 신사라는 설도 있다.
<에보시다케전망대(烏帽子岳展望台)> 대마도 여행 중 국내여행자들의 필수코스로 에보시산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한려수도와 비슷한 곳으로 리아스식해안과 섬들의 낙원 아소만의 풍경을 동서남북 360도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120m 계단길을 올라야 정상 176m 전망대에 도착한다. 일몰, 일출로 유명한 대마도판 하롱베이이라 할 수 있다. 예쁜 섬들이 예전에는 해적들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3) 상대미도지역 <사오자키공원(棹崎公園)> 대마도 북구 사고(佐護)에 흐르는 사고강(佐護川)가까이에 있다. 이곳은 일본 최북서단에 비석이 있고, 옆에는 사오자키등대가 있다. 이곳에서 한국까지 49.5Km로 날씨가 좋으면 한국이 보이기도 한다. 공원 아래에 대마도 야생생물 보호센터가 있고 공원 언덕 정상에 대한해협을 굽어보며 오늘도 기능을 하고 있는 오래 된 무인 등대가 있고, 일제시대에 포대가 주둔했던 군대와 대포 시설물들의 흔적과 또 평화 공원 조형물들이 있다. 사오자키 공원의 아름다움은 동백나무다. 공원 전체가 거의 동백나무 군락지인 듯 동백으로 가득차 있다.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필 겨울에 오면 참 아름다울 것 같다. 언덕을 오르는 산책길도 완만한 경사길이고 동백나무들로 이루어진 터널같은 길과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참으로 훌륭하다.
<박제상순국비(朴堤上殉國碑)> 가이아가다마치의 사고노미나도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대마도로 파견돼 왕명을 수행하다가 죽은 곳이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할 필요에 의해 402년(실성왕 1)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 후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군신을 불러 협의하였다. 그 결과 벌보말(伐寶靺),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矩),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등 세 사람이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역할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梁山) 지방의 토호 세력으로서 삽량주간(賂良州干)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눌지왕 2) 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해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한 즉시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그는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였다. 이에 왜가 병을 파견해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嚮導-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 왕 앞 왜 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해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했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2년(418)에 박제상이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미사흔을 구출한 뒤 왜인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자, 부인 김씨는 남편을 사모하는 정을 잊지 못해 딸 둘을 데리고 치술령(審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으니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가 되어 바위 구멍으로 들어가 숨었다고 한다. 뒤에 사람들이 이 새가 숨은바위를 은을암이라 하였다.
<선조딸옹주묘> 임진왜란 때 일본장수 하나가 선조의 딸을 납치하여 이곳으로 끌고 왔다고 한다. 정영호박사가 13평을 얻어 애도비를 세웠다.
<미우다(三宇田)해수욕장과 온천> 대마도의 최북쪽 해안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하타카츠항에서 버스로 약 10-15분 거리에 있다. 에메랄드 물빛과 앞이 탁 트인 바다. 모래가 거의 없는 쓰시마에서 작지만 아담한 백사장, 입자 고운 천연 모래가 있는 해수욕장이다. 미우다 해수욕장은 일본의 100선 해수욕장에 선정된바 있다고 한다. 가까이에는 아주 작은 바위섬이 하나있고 소나무 한그루가 분재처럼 자라고 있다. 여름이면 텐트에서 하룻밤 지낼 수 있고, 캠핑시설도 비교적 잘 되어 있으며, 대마도에서는 드물게 넓은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야영(캠핑)장이 있고 금액은 약 3만원 정도라고 한다. 미우다해수욕장의 바로 북쪽 언덕 위에는 상대마 온천이 있어 피로를 풀기에 좋다. 원천(原泉)은 수온이 그리 높지 않아 물을 데워서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 곳 대마도에는 5곳의 온천이 있으나 화산지대인 규슈나 일본 본토의 온천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형 구조가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고 우리나라와 이어진 대륙의 끝부분이기 때문이다. 온천 내에서는 수건, 세면도구 등 필요한 물품은 모두 따로 돈을 받으므로 자기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한국전망대> 한국전망대는 대마도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마도 여행 하시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부산 및 거제도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특히 야간 부산 야경이 잘 보이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역관사순난지비> 역관은 조선통신사와는 성격이 다른 오직 대마도에 외교차 방문했던 관리였다. 역관은 단순히 통역관이 아니고 외교업무를 수행한 국가파견 사절이었고, 또 외국을 왕래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무역에도 관여하였다. 대마도 파견 역관사 일행은 대략 100여명 정도 규모로 이즈하라까지 왕복했으며, 조선후기까지 51회나 방문했다고 한다. 일본 막부에서도 대마도 번주를 통해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맺었다. 1703년 2월 5일 조선역관사 108명을 태우고 부산항을 출발한 배는 와우라항의 턱밑까지 무사히 다가갔다. 이들은 대마도 3대 번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후임 5대 종의방 번주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었다. 안내를 위해 일본관리 4인이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이때 돌풍이 치고 바다가 뒤집히듯 격랑이 일었다. 순식간에 112명 전원이 파도에 휩쓸리며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역관사 일행은 정사 한천석, 부사 박세량을 비롯하여 상관 28명, 중관 54명, 하관 24명이었다. 이들 명단은 10여 년 전 종가문서에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양국에서는 순국 300주년인 2003년 3월 7일 이름을 기록한 추모비를 1991년에 세운 순난지비 앞에 추가로 건립했다. 자연석을 쌓아올린 3층 기단의 돌은 112개라고 한다. 순국한 이들 한분한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와니우라(鰐浦)마을> 한반도의 남해에 흐르는 해류는 대마도, 특히 이곳 '와니우라'를 거쳐 가기 때문에 왕인 박사 뿐만아니라, '통신사'들도 이곳 아니면, 인접한 '사스나'를 통해 일본을 방문했다. 마을 입구에 '어구'(漁具)를 보관하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창고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을을 가로 지르는 작은 개천에는 제법 큰 잉어로 보이는 물고기와 수백 마리의 작은 치어들이 떼를 지어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5월초가 되면 마을을 둘러싼 산에 온통 이팝나무가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가야가 있었던 김해도 이팝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백제국 왕인박사 현창비> 대마도에 남아있는 한일교류의 흔적, 시간을 거슬러 그 첫번째를 꼽는다면 '백제국 왕인박사'이다. 백제 근초고왕 시대(추정 346-375년)의 지식인이었던 왕인은 천자문과과 논어를 전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고,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 시모노세키를 통해 (현재의) 규슈지역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노사키고지> 러일전쟁의 교전지 일본의 육해공자위대가 한국을 세세하게 보고 있는 곳이다. KAL기 격추를 처음 포착한 곳도 이곳이다. 일로전쟁위령비는 도노사키(殿崎)의‘일러우호의 언덕(日露友好の丘)’에 세워져 있다.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 패잔병들이 숨어들었던 곳으로, 동백나무 숲길이 멋진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큰 동백나무에 바람이 심한 곳이라 연리지가 많다. 2005년 5월 27일, 러일전쟁 1백주년을 맞아 러일전쟁에서 전사한 5천명의 전사자들을 위해 일로위령비를 세웠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는 일본과 러시아의 우호와 평화를 위해 우호와 평화의 비를 건립했다. 그 전에는 일로전쟁의 승리를 일방적으로 강조한 1911년 일본해해선기념비가 있었다고 한다. 1911년 기념비 내용은 1905년 5월 27일부터 다음 28일 조국의 흥폐를 걸어 이 대마도바다에서 전개된 일본해 해전을 기념해 지구 주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해전때 격침된 러시아 바르틱크 함대의 우라지밀·모노마프호의 수병 143명은 4척의 보트에 분승해 이 땅에 상륙했다. 전황을 지켜보면서 농사일을 하고 있던 농부는 간신히 도망쳐 온 이 수병들을 물의 솟는 샘으로 안내하고 밤에는 니시도마리의 민가들에게 숙박시키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
<러일전쟁과 정로환> 배가 아프면 제일 먼저 정로환(征露丸-正露丸)을 찾는다. 아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정로환이 바로 러일전쟁의 산물이다. 러일전쟁시 만주 일대로 간 병사들은 수질 오염이나 오염된 물을 마신 까닭에 배탈 설사로 사망자가 많았다. 이에 일왕의 칙령으로 다이코신약이 만들게 된 게 설사약 정로환이다. 이 때 정이란 정복할(칠) '정'-친히 황제가 나아가서 치는 전쟁이란 征과 러시아의 '露'를 합쳐 정로환(征露丸)이라고 일왕이 직접 이름지은 약이다.1972년 우리나라가 이 약을 수입해서 이름을 칠 征에서 바를 正(征露丸 - 正露丸)으로 고친 뒤 지금까지 복용하고 있는 것이다.
<원통사와 이예선생공적비> 원통사는 1408년 대마도주 종정무가 세운 사찰로 충숙공 이예 선생의 공적비가 있는 곳이다. 고려중기 약사불과 범종이 있다. 대마도에는 통산사와 관련되는 역사 문화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명소가 마련되었으니 이것이 곧 원통사(圓通寺)에 우뚝선 ‘통신사 이예 공적비’이다.2005년 11월 21일, 대마도 미네쵸(峰町)의 원통사에는 통신사 이예(李藝)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제막식에는 한국에서 이예 선생의 후손인 학성이씨(鶴城李氏)를 중심으로 조직된 충숙공이예선양회(忠肅公李藝宣揚會, 회장 李斗哲) 회원 80여명과 정영호 단국대 명예교수, 전북대학의 한종문 교수 등 관계학자들이, 일본 측에서는 대마시 의회 의장, 후치가미 기요시(淵上 淸) 전 이즈하라 정장과 다치바나 아츠지(橘 厚志) 전 부정장, 그리고 대마한국선현현창회장 나가도메 히사에(永留 久惠)선생과 현지 주민 다수가 참석하였다. 충숙공 이예 선생은 1373년 울산에서 태어나 조선 초 한ㆍ일 관계의 근간이 됐던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년) 체결에 공헌하고, 1401년 정식 외교사절이 된 후 40여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667명의 조선인 귀환을 성사시키는 등 근대 이전 우리 외교사에서 대일외교를 주도한 전문 외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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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마도는 우리땅~~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