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열리는 LPGA 투어인 BMW 챔피언십에서 경기하는 고진영. 사진 BMW.
만약 고진영이 LPGA 투어에 가지 않고 KLPGA 투어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진영은 KLPGA 투어에서 확고한 1인자가 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세계 랭킹 1위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KLPGA에 주는 랭킹 포인트가 많지 않아서다. 고진영은 KLPGA 투어 안에 있으니 국제 경쟁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방법도 없다.
고진영이 미국에 가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올해 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의 우승은 하나도 없다. 지난해 여름부터 한국 선수들은 28경기 동안 LPGA 투어에서 우승을 못했다.
LPGA 투어의 한국 선수 우승 여부는 한국 골프 인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인들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보이는 스포츠와 선수들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LPGA 투어는 물론 KLPGA 투어에도 관심을 줄였을 것이다.
고진영이 LPGA 투어에서 뛰고 있으니 그가 KLPGA 투어에 남았다면 하는 가정은 쓸 데 없는 걸까.
아니다. 고진영이 2017년 한국에서 열린 LPGA 투어 하나금융 챔피언십에 출전해서 우승하지 않았다면 그는 국내에 머물거나 일본으로 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약 2017년에 KLPGA가 한국에서 열리는 LPGA 투어 대회에 선수들의 출전을 막았다면 어땠을까. 고진영은 LPGA 투어 진출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현재 고진영에 대한 가정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KLPGA 최고 선수 박민지는 올해 US여자오픈 출전을 계획하고 있다. 사진 KLPGA.
지난해 KLPGA 투어의 '소속 선수 LPGA 대회 출전 제한'이 문제가 됐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소속 선수들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대회 출전 제한을 주요 현안으로 다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3월 KLPGA에 대한 사무 검사를 통해 소속 선수들의 해외 투어 출전 제한을 개선해달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KLPGA는 지난 4월 올해부터 KLPGA 대회와 같은 기간에 열리는 해외 투어 대회 출전을 3회 이하로 제한하는 규정을 폐지했다고 발표했다. 선수들의 해외 진출 문호를 활짝 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효성은 그리 높지 않다.
KLPGA는 “국내에서 열리는 해외 투어에 대한 규정은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LPGA 투어 대회인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 올해도 KLPGA 선수들이 못 나가게 하겠다는 의미다.
해외 투어 출전 3개 대회 제한을 푼 건 큰 결단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적용 대상은 별로 없다. 시차 적응 등으로 선수들이 해외 대회에 나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3개 대회 이상 나갈 선수가 거의 없다.
시간,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KLPGA에 해외 대회에 초청을 받을 정도로 세계 랭킹이 높은 선수는 손에 꼽힌다. 3개 대회 제한은 있으나 없으나 별반 차이가 없다.
KLPGA 엘리트 선수들은 LPGA 메이저대회에 나가고 싶어 한다. LPGA 메이저대회도 KLPGA 정상급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런데 정작 이 선수들은 LPGA 메이저 대회에 나가기 어렵다.
KLPGA는 국내 메이저 대회 기간엔 선수들이 해외 투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했다. KLPGA 메이저대회의 위상을 높이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다.
문제는 LPGA 메이저대회와 KLPGA 메이저대회가 연속해서 열리는 게 많다는 거다.
LPGA 첫 번째 메이저대회인 셰브런 챔피언십 다음주가 크리스F&C KLPGA 선수권이다.
6월 15일 열리는 DB 한국여자 오픈 다음 주가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이다. 그 다음 주가 US여자오픈이다.
해외 대회에 나가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려면 미리 가서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 축구 선수들의 시차 적응훈련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일본 여자 투어는 선수들이 메이저대회에 나가면 메이저 1개 대회당 2주간을 빼 준다. 가서 성적을 잘 내라고 등을 두드려 주는 독려다.
2015년 LPGA 비회원으로 US 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전인지. 게티이미지.
경기를 마치고 일요일 밤 서둘러 이동해 다음 주 대회에 참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임성재를 보면 알 수 있다. 강철 체력이라 아이언맨으로 불리는 임성재는 지난 달 한국에서 열린 우리금융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미국으로 날아가 메이저대회인 PGA 챔피언십에 참가했는데 첫날 80타를 쳤다.
당시까지 PGA 투어에서 임성재의 평균 타수는 69.47타였다. 메이저대회 난코스라고 해도 80타는 임성재의 스코어라고 믿기 어렵다. 임성재는 이어진 대회에서도 컷탈락했다.
KLPGA 투어 선수들의 LPGA 메이저대회 출전 걸림돌은 또 있다. KLPGA는 2년 연속 한 대회에 불참하는 선수에게 벌금 1000만원을 부과한다.
LPGA 메이저대회 일정은 거의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메이저 사냥하러 나가는 KLPGA 선수들은 항상 같은 국내 대회에 불참해야 한다.
한 골프 에이전트사 간부는 “1000만원 벌금을 내면서 무리하게 참가하려는 선수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KLPGA 투어가 이른바 자국 투어 보호를 이유로 스타 선수들을 국내 대회에 참가시키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메이저대회는 다르다. KLPGA 투어 역사가 길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LPGA 메이저대회는 경쟁 투어 대회라기보다는 국제대회 성격이 있다.
축구로 치면 챔피언스 리그, 야구로 치면 WBC 같은 것이다. 세계 최고가 다 모이는 그 곳에서 세계 최고와 싸워 실력을 증명해야 리그가 인정받게 된다.
LPGA 투어 메이저대회에서 우승 경쟁을 한 선수는 국내에서 스타가 된다. 일부 선수가 우승해 LPGA로 떠난다 하더라도 KLPGA 투어가 얻는 게 더 많다. 박세리 맨발의 투혼을 생각해보라.
KLPGA 투어는 LPGA 메이저대회를 위상과 실력을 증명할 무대로 여겨야 한다. 적어도 열린 대회를 표방하는 US오픈과 AIG오픈(구 브리티시 여자오픈)에는 KLPGA 투어에서 참가 자격이 되는 엘리트 선수들이 대거 나가도록 편의를 최대한 봐줘야 한다. 선수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KLPGA 투어를 위해서 그래야 한다.
국내에서 열리는 LPGA 대회인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도 KLPGA 투어 선수 참가를 허용해 LPGA로 가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박세리, 박인비, 고진영이 한국에서만 뛰었다면 한국 골프와 KLPGA는 이 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2021년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경쟁한 국내파 임희정(왼쪽)과 해외파 고진영. 사진 KLPGA.
KLPGA 투어의 위상이 올랐다 하더라도 최고와 겨루고 교류하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일본 남녀 투어가 그렇게 고립됐다가 자국 경제처럼 잃어버린 30년을 겪었다. 최근 한국 여자 골프가 태국 등에 밀리는 건 최고에 도전하지 않는 문화가 만연한 데 있다고 본다.
세계 넘버 1투어가 되겠다는 KLPGA 투어의 꿈에 동감한다. 한국의 반도체가 그렇듯 KLPGA 투어가 여자 골프 최고 무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금 규모나 메이저대회 전통 등에서 KLPGA 투어가 아직은 LPGA를 따라 가기는 어렵다.
아직은 NO라고 할 수 없는 KLPGA 투어다. 더 배워야 한다.
성호준 중앙일보 골프전문기자
*KLPGA 투어에 외국인 선수가 한 명 있기에 바로잡습니다. 원문 기사에서 KLPGA 투어에는 외국인 선수가 한 명도 없다고 잘 못 나갔습니다.
첫댓글 성호준기자의 정확한 분석이고, 결국은 세계1위 고진영프로의 탁월한 선택입니다!
정확한 분석이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