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다툼의 처리 - 송(訟)
기다림은 미래를 준비하고,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어나가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힘을 배양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대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공자가 “수는 기다림을 뜻한다.”고 하면서도 “수는 음식을 준비하는 도리”라고 말한 데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즉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훗날을 위해서는 잘 먹어 힘을 길러 두어야 한다. 나아가 음식 외에도 기다림 속에서 준비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음식을 비롯한 제반의 것들을 준비하는 데에는 남들과의 갈등과 다툼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준비물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의 교섭이나 거래 등을 통해 확보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상호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한다. “음식은 반드시 다툼을 낳는다. 그래서 <수(需)>에서 <송(訟)>으로 이어졌다.[飮食 必有訟 故受之以訟]”(「서괘전」) 그리하여 <송>괘는 다툼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
<송>괘는 상괘 ‘건’과 하괘 ‘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의 상징은 하늘이요 후자의 상징은 물이다. 그리하여 이 괘는 하늘이 높이 위에 있고 물이 아래로 흐르는 형상을 갖고 있다. 양자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방향을 서로 달리 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여 의견의 합일을 보지 못한 채 상호 갈등하고 대립함을 은유한다.
공자는 말한다. “다툼은, 윗사람은 강하고 아랫사람은 험악한 데에서, 또 험악한 마음에 강경한 행동에서 생긴다. 그것이 <송>의 모습이다.[訟 上剛下險 險而健 訟]”(「서괘전」)
괘사卦辭
다툼은 신뢰가 막히는 데에서 생겨난다.
다툼을 두렵게 여기면서 도중에 화해하면 좋은 결말을 얻겠지만
끝까지 다투면 불행해지리라.
현자를 찾아볼 것이요, 큰 강물을 건너는 것은 득이 안 된다.
訟 有孚 窒 惕 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송 유부 질 척 중길 종흉 이견대인 불리섭대천)
다툼은 자신은 옳다고 여기는데 상대방이 나를 믿어 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달리 말하면 서로의 의견과 주장이 부딪치면 다툼이 생긴다.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남과 다투는 행위 역시 모함(무고)의 문제로 처리 되어야 한다.
공개적인 다툼과는 달리 은밀하고 음험한 모함은 응징해야 한다. 취향이든, 의견이든, 믿음이든 항상 남과 공유하기를 바라는 것은 환상이다. 세상 만물이 다 그렇지만, 인간 사회도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믿음(의견)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에서만 아름다운 법이다. 공자는 이를 “화이부동(和而部同)”으로 말한다.
자타 간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 설사 내심 자신이 옳다고 여기더라도 “다툼을 두렵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다툼으로 인해 사나워지고 험악해지는 언행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도 거칠고 쓰라린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관계의 파탄으로 인해 스스로 외로움을 자초하고 말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도중에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중립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中吉 剛來 而得中也]”(「단전」) 여기에서 “중립의 정신”이란 자신의 주장을 잠시 한쪽으로 제쳐두고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을 헤아릴 줄 아는 객관적인 안목을 뜻한다.
다툼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현자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그는 중립적이고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利見大人 尙中正也]”(「단전」) 가령 오늘날 각종의 분쟁 조정 위원회가 ‘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거부하고 다툼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설사 상대방을 이긴다 하더라도 그의 원망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삶 자체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끝까지 다투면 불행해지는 것은 다툼을 통해서는 삶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終凶訟不可成也]”(「단전」)
모든 다툼이 그렇기는 하지만, “큰 강물을 건너듯” 무모한 다툼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여기에서 ‘큰 강물’이란 단순하고 사소한 다툼을 넘어, 자신의 삶이 심각하게 파괴당할 수도 있는 커다란 다툼을 은유한다. 공자는 말한다. “큰 강물을 건너는 것은 득이 안 된다. 깊은 물 속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不利涉大川 入干淵也]”(「단전」)
괘상卦象
하늘과 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모습이 <송>의 형상이다.
군자는 이를 보고서 무슨 일이든 그 시초부터 조심스럽게 처사한다.
天與水 違行 訟 君子 以 作事謀始 (천여수 위행 송 군자 이 작사모시)
모든 다툼은 무단히 일어나지 않는다. <곤>괘(「단전」)에서 경고했던 내용은 여기에서도 그대로 타당하다. “신하가 제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제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일조일석에 생기는 일이 아니다. 그 원인들이 점점 쌓여 온 결과이다.” 마치 “하늘과 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듯이, 나와 남 사이에 서로 사소하게 엇갈리는 의견이 여러 가지 불화의 원인을 만들어 내면서 그것이 쌓여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타 간 아무리 작은 갈등이라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부부 싸움을 예로 들어 보자. 부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냉랭한 분위기나 갈등을 말 한마디에서, 또는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그것을 진솔한 대화나 기분 전환의 여행과 같은 것을 통해 초기에 수습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방치하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극단적으로는 서로 갈라서는 일까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 일의 낌새를 살펴 처사하는 “견기이작(見幾而作)”(「계사전」)의 지혜를 키워야 한다.
효사爻辭
初六
일을 길게 끌어서는 안 된다.
다소 언쟁이 오가겠지만, 나중에는 좋은 결말을 보리라.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불영소사 소유언 종길)
초육(初六)은 음효로 괘의 제일 아래에서 양의 자리에 잘못 있으므로 힘도 없고 명분도 약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툼을 길게 끈다면 그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다툼의 초기에 “다소 언쟁이 오가겠지만” 그것을 빨리 끝내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좋은 결말”을 볼 수 있다. ‘좋은 결말’은 초육이 자신과 음양으로 호응하는 구사의 현자에게 찾아가 자문함을 은연중 암시한다.
남과의 다툼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명분과 처지를 잘 살펴야 한다. 원래 다툼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닌데, 명분도 약하고 처지까지 불리하다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다툼을 길게 끌지 말고 빨리 수습해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일이 길게 끌어서는 안 되니, 다툼을 오래하지 말아야 한다. 다소 언쟁이 오가겠지만 현자가 사리를 분명하게 판단해 줄 것이다.[不永所事 訟不可長也 雖小有言 其辯明也]”(「상전」)
九二
다툼에서 이길 수 없다. 물러나서 자리를 피하라.
그러면 삼백 가호의 고을 사람들이 화를 면하리라.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 三百戶 无眚 (불극송 귀이포 기읍인 삼백호 무생)
구이(九二)는 하괘 ‘감’의 가운데 양효이므로, 험악한 성질에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상대는 서로 양성(陽性)끼리 부딪치는 구오다. 하지만 자신이 (양효로서 음의 자리에 잘못 있어서) 옳지 못한데다가, 구오가 높은 자리에서 힘을 갖고 있으므로 “다툼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물러나서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다. “삼백 가호의 고을 사람들”이란 구이의 주변 사람들이라는 은유를 갖는다.
자기보다 힘이 강한 사람과 무모하게 다투는 것은 용감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세를 살필 줄 모르는 만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다툼을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계책이다. 만약 잘못된 계산이나 집요한 승부 의식으로 다툼에 나선다면 커다란 화를 입을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다투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짓이다.[自下訟上 患至掇也]”(「상전」)
옛날 봉건 시절을 예로 들어 보자. 임금은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식읍(食邑)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그 고을사람들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생활을 할 수 있는 특전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에 우쭐하여 은근히 임금과 힘을 겨루려 한다면 임금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한 재앙이 “삼백 가호의 고을 사람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六三
본분을 지키면서 삶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가도록 하라.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필경에는 행복을 얻으리라.
임금의 일을 보좌하는 자리라면 공로를 자처하려 해서는 안 된다.
食舊德 貞 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식구덕 정 려 종길 혹종왕사 무성)
육삼(六三)은 음효로 하괘에 있으므로 성질이 유순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남들과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구이와 구사의 강한 자들 사이에 끼여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본분을 지키면서 삶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간다면 “필경에는 행복을 얻을” 것이다. “임금의 일을 보좌” 운운한 것은 본분의 수행을 통해 얻은 공로의 과시를 경계한 말이다.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의 경쟁을 부추키는 요인은 대개 권력과 재물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획득하기 위해 남들과 다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 자체를 삶의 의미와 가치로, 그것의 득실을 행복과 불행의 척도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내 안에서 사람됨의 본분을 자각하여 실현하려 하지 않고 외재적인 사물들만 추구하는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또 빈곤할까. 그 결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즉 인생무상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다. 오늘날 물신숭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무가 만연하는 커다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악마의 배설물”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은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허무를 벗어나 의미 충만한 삶과 참다운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됨의) 본분을 지키면서”, 자타 간 다툼으로 내모는 부귀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삶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가도록” 해야 한다. 물론 ‘본분’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규명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다툼의 세상에서 자기 안으로 돌아와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하여 만약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석가모니의 청정한 불성이나, 공자의 밝은 덕성이나, 예수의 고결한 영혼을 자각한다면 더 이상 바람직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입각한 흔들림 없는 삶은 참다운 행복을 얻을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본분을 지키면서 하늘을 따르면 행복을 얻을 것이다. [食舊德 從上 吉也]”(「상전」)
九四
다툼에서 이길 수 없다.
마음을 안으로 돌려 하늘의 뜻을 자각하면서
삶의 자세를 바꿔야 한다.
마음 편안하게, 올바른 정신으로 나서면 행복을 얻으리라.
不克訟 復卽命 渝 安貞 吉 (불극송 복즉명 투 안정 길)
구사(九四)는 상괘의 ‘건’에서 양효로 음의 자리에 잘못 있으므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갖고서 걸핏하면 남들과 다투려는 강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다툼 상대인 바로 위의 구오가 힘이나 지위에서 막강하므로, 또한 진리와 이념을 갖고 있기도 하므로 “다툼에서 이길 수 없다.” 이 자리에서 그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마음을 안으로 돌려 하늘의 뜻을 자각하면서 삶의 자세를 바꾸는” 일이다. 그리하여 “마음 편안하게, 올바른 정신”으로 삶에 나서야 한다.
다툼은 흔히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생긴다. 크고 작은 불만이 남들과 부딪치게 만든다. 아니 그 이전에 불만은 자신의 마음을 분노의 폭탄과도 같이 만들어 그것을 누군가에게 터트려야 직성이 풀린다. 불만이 많은 사람일수록 걸핏하면 좌충우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마 그에게는 아름다운 꽃까지도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웃고 놀리는 것처럼 보여 짓밟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불만에서 생기는 다툼으로는 일의 성사나 인생의 성공이 결코 불가능하다. 설혹 어떤 일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가 거기에서 행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불만으로 사나워진 눈빛에는, 투쟁 의식으로 황폐해진 마음에는 세상과 삶이 평화롭게 다가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만은 불행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불만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는 말한다. “하늘의 뜻을 즐기고 자신의 본분을 안다. 그러므로 근심을 갖지 않는다. [樂天知命 故不憂](「계사전」)
그것이 바로 다툼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바구어야 할 ”삶의 자세“이며 지켜야 할 ”올바른 정신“이다. 공자는 말한다. ”마음을 안으로 돌려 하늘의 뜻을 자각하면서 삶의 자세를 바꾸어 마음 편안하게, 올바른 정신으로 나서면 삶에 잃는 것이 없으리라.[復卽命渝安貞 不失也]“(「상전」)
九五
다툼이 아주 좋은 결말을 이루리라.
訟 元吉 (송 원길)
구오(九五)는 상괘 ‘건’의 중심 효인 양의 자리에 양효로 올바로 있으므로, 중정한 정신의 소유자다. 즉 그는 다툼의 자리에서 편견을 갖지 않고 중립적인[中] 태도로 사태를 올바르게[正] 처리하려 한다. 그래서 “다툼이 아주 좋은 결말을 이루리라.”고 했다. 공자는 말한다. ”다툼이 아주 좋은 결말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중정한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訟 元吉 以中正也]”(「상전」)
우리는 다툼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삶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설사 내가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은 나를 어쩔 수 없이 다툼의 자리로 내몬다. 사람들은 이를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로 부추기기까지 하지만, 선의든 악의든 그것의 속내는 역시 비정한 다툼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다툼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면, 그 최선의 해결방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중정’한 정신이다. 즉 사태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으로 성찰하여 일의 시비와 곡직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이다. 문제를 자신의 처지와 관점에서만 살피면,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편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다툼이 더욱 심해져서 끝내는 서로에게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입힐 것이다.
중정한 정신은 다툼을 조정하는 중재자나 다툼을 처리하는 재판관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양쪽의 주장을 중립적으로 공평하게[中] 들어야 하며, 일의 시시비비를 사리에 따라 올바르게[正]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툼의 당사자들에게서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정신은 물론 하루아침에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정하고 무사(無私)한 도덕의식과 사리판단의 지혜를 부단히 갈고 닦는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서경은 말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당파적이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면 왕도가 순조롭게 실현될 것이며,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바른 정신을 잃지 않으면 왕도가 정대하게 행해질 것이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上九
아름다운 장식 띠를 하사받는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세 번 빼앗기리라.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혹석지반대 종조삼치지)
“아름다운 장식 띠”란 옛날에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하사했던 관복의 띠를 말한다. 상구(上九)는 괘의 마지막 양효이므로 다툼의 끝장을 보아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그는 남들과 그악스럽게 승진을 다툰 결과 “아름다운 장식 띠”를 선물로 받는다. 하지만 그처럼 경쟁적이고 호전적인 인물은 좋은 결말을 얻을 리 없다. 그래서 “(그 띠를) 하루아침에 세 번 빼앗길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경쟁에서 지고는 못 배기는 성질의 사람들이 있다. 운동선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등주의도 그러한 다툼의 심리를 안에 감추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듣 상대를 이겨야만, 일등을 쟁취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것을 성공이요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나 심지어 형제에게조차 경쟁심을 드러내면서 그들과 치열하게 겨루는 자리에서 인간관계는 얼마나 비정하고 삭막할까. 공자는 말한다. “다툼으로 장식 띠를 받으니, 사람들의 존경을 얻지 못할 것이다.[以訟受服 亦不足敬也]”(「상전」) [周易 上 김기현 著 민음사 P.148-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