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다음 성냥을 다시 켜지 않고 돌아서서 도시의 불빛을 응시하며 내가 본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대재앙의 순간에 이보다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고뇌에 빠져 먼 연인에게 외칠 것이다.
내 사랑아, 나의 아름다운 여인아, 나의 운명아, 재앙이 닥쳐오고 있어.
내개로 와. 지금 내게로 와,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든지, 담배 연기 가득한 사무실이든, 흐트러진 푸른 침실이든, 빨래가 말라 가는 집의 양파 냄새 나는 부엌이든, 때가 되었으니, 내게로 와, 우리에게 밀려드는 재앙을 잊기 위해서는 커튼이 쳐진 반쯤 어두운 방의 정적 속에서, 어둠에 덮이면, 서로를 힘껏 껴안고 죽음의 시간을 기다려야 해.
==
“기억의 정원이 마르기 시작하면 마지막으로 남은 나무와 장미에 온 정성을 다 쏟아붓지. 말라 죽지 말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물을 주며 어루만지지.
나는 기억해,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해!”
==
“손님들은 거리에서 매일 수천 번 보는 우리 국민들이 (콧수염나고, 다리는 휘어지고, 피부는 검은) 입고 있는 외투가 아니라,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서 온 새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입는 외투를 입고 싶어 합니다.
그 외투를 입으면 자신도 변해서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지요.”
이 직종에서 잔뼈가 굵은 디스플레이 전문가는 장인 베디의 작품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생계를 위한 자신의 진열장에 이 진짜 터키인, 진짜 국민을 놓을 수는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터키인들은 이제 터키인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의복 혁명이 있었으며, 수염을 자르고 언어와 글자도 바꾸었다고 했다. 한 가게 주인은 더 간단명료하게, 손님들이 옷이 아니라 실은 환상을 사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진짜 사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옷을 입은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자 하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바람이 전혀 실현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것으로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 관심이 많았던 어떤 가게 주인이, 더 싼 값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제작소에서 마네킹 한두 개를 사 갔다.
하지만 마네킹의 자세와 제스처가 진열장 앞에 선 손님들, 인도를 흘러 지나가는 인파와 어찌나 닮았던지, 그가 사서 진열한 마네킹이 어찌나 평범하고, 어찌나 진짜 같고, 어찌나 우리 중 한 명 같았던지, 아마도 그 마네킹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 구두쇠 가게 주인은 톱으로 마네킹을 조각조각 잘라 버렸다.
제스터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총체가 사라지고 팔과 다리와 발은 작은 가게의 작은 진열정에서, 베이올루의 인파에게 우산, 장갑, 부츠, 신발을 진열해 보여 주는 데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삶이 다른 누군가의 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
==
현대판 마술사는, 자신이 구경꾼에게 보여 준 것이 속임수라고들 해도 흥분하며 구경하는 관객들이 한순간만이라도 그것을 속임수가 아니라 마술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기에 행복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들었던 말 한마디나 이야기, 함께 읽었던 책의 영향으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의 흥분으로 연인과 결혼을 하고, 남은 인생을 사랑의 배후에 있는 이 착각을 결코 알지 못한 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의 아내가 아침을 차리기 위해 식탁 위에 있는 잡지를 치울 때, 사임은 현관문 밑
으로 들어온 그날의 신문을 읽으며, 쓰여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라 단어로 꾸며 놓은 꿈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
단지 읽는 재미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칼럼 작가를 망망대해에 나침반 없이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
하지만 칼럼 작가는 이솝도 루미도 아니다.
교훈은 항상 이야기에서 나온다.
이야기가 교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
“사람들은 대부분 대상이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장자리나 구석에 있고, 그래서 주의를 끄는 부차적인 특징을 보고 알게 되지. 이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은 확연히 드러나게 하지 않고 칼럼 한구석에 쑤셔 넣곤 해. 물론 아주 꼭꼭 숨겨진 구석은 아니야. 아이들을 속여 넘기는 것 같은 숨바꼭질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찾은 것을 아이들처럼 곧장 믿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야.
게다가 최악의 것은, 글의 나머지 대부분에 내포되어 있는, 바로 코앞에 보이는 그 확연한 의미와, 약간의 인내와 지능만을 요하는 숨겨진 우연적 의미도 인지되지 못한 채 신문이 내던져진다는 사실이지.”
==
그들의 삶은 고뇌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것이 시작되고, 이 다른 것에 익숙해지면 또 다른 것이 엄습해 오며, 그 고통은 우리의 얼굴을 서로 닮게 만드는 깊은 주름을 남긴다.
우리는 이 고통이 갑자기 닥치더라도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에 우리 자신을 준비시켰다.
하지만 그래도 고통이 악몽처럼 드리우면 우리는 외로움에 휩싸인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절망적이며 중독적인 외로움, 갈립은 문득 자신의 고통과 스크린 속 여자의 슬픔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슬픔은 공유하지 않더라도 공통의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하지만 절대 외면당하지 않는, 의미와 무의미가 제한 되어 있는, 사람을 겸손함으로 초대하는 정돈된 어떤 세계.
==
우리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서유럽과 미국에 사는 유대인은 대부분 천년 전 카프카스산맥과 볼가강 사이를 지배했던 하자르의 유대 왕국 후손이라고 알고 있다.
하자르 사람들이 실은 터키인들이고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것은, 유대인이 터키인인 것만큼 터키인도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형제인 이 두 민족이 20세기 내내 이주를 하면서 서로에게 가 닿지는 못하지만 항상 서로 스치고 지나가면서, 비밀스러운 음악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듯,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절망적인 쌍둥이들처럼 영원히 연결된 채 영원히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
신문들은 말라트야 출신 양치기 아이가 일주일 만에 영화에 중독되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썼다.
갈립은 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가?
스크린 위에서 본 거리, 옷, 여성을 선망했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더 가난하고 더 비참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데는 몇 날 며칠도 모자란다. 영화에서 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환자 혹은 잘못이라고 하지 못했고, 게다가 우리의 새 주인은 그들을 자신의 연예 사업의 동업자로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장님이 되었다. 우리 모두, 우리 모두…….
뤼야의 전남편이자 집주인은 물었다.
왜 정부 관료 중 어느 누구도 영화 관람의 증가와 이스탄불의 쇠퇴가 비례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나? 그는 또 물었다. 극장과 사창가가 항상 같은 거리에 있는 것은 우연인가? 극장은 왜 그렇게 어두워야 하는가, 왜 항상 칠흑처럼 어두운가?
==
동양이 서양을, 서양이 동양을 도용했다는 영원한 전설에 대해 들을 때마다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하는 꿈의 세계가, 우리가 몽유병 환자처럼 어리
둥절한 상태에서 문을 통해 들어가 버렸던 집이라면, 문학 역시 우리가 익숙해지고 싶어 했던 그 집의 방에 걸린 벽시계와 비슷하다.
1.이 꿈이라는 집의 방에 있는 똑딱거리는 시계 중 하나만 시간이 맞고 나머지는 틀리다고 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2.방에 있는 시계 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다섯 시간 빠르다고 하는 것도 난센스이다. 왜냐하면 같은 시계가 일곱 시간 늦다는 결론도 같은 논리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3.같은 이유로, 시계가 9시 35분을 가리킨 후 한참이 지나 다른 시계가 9시 35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두 번째 시계가 첫 번째 시계를 모방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난센스이다.
==
이백 권이 넘는 신비주의 책을 쓴 이븐 아라비는 코르도바에서 거행될 이븐 뤼쉬드의 장례식에 첨석하기 일 년 전에 모로코에 있었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코란의 이스라 장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쓴 것도 바로 이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마호메트가 어느 날 밤 예루살렘으로 인도된 이야기, 계단을 통해 승천한 이야기, 천국과 지옥을 본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책을 썼다.
지금, 이븐 아라비의 안내로 그가 일곱 개의 천국과 구름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본 것과 거기서 만난 예언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읽고, 또 글을 쓸 당시 (1198년) 그가 35살이었다는 것을 알고서, 그의 꿈에 나온 소녀 니잠은 맞고 베아트리체는 틀렸다거나, 이븐 아라비는 맞고 단테는 틀렸다거나, ‘이스라의 책과 아스라의 사당’은 맞고, 신곡은 틀렸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조금 전 언급한 첫 번째 난센스의 예이다.
11세기 안달루시아의 철학자 이븐 투테일은 한 아이가 무인도에 떨어진 후 거기서 자연, 물체, 자신에게 젖을 먹인 사슴, 바다, 죽음, 하늘, 신성의 진실을 알게 된다는 책을 썼다. 그러나 이 하이 이븐 약잔이 로빈슨 크루소보다 육백 년 앞섰다고 하거나, 로빈슨 크루소가 물건과 도구에 대해 더 세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이븐 투테일이 대니얼 디포보다 육백년 뒤쳐졌다고 하는 것은 두 번째 난센스의 예이다.
무스타파 3세 시절의 종교학자 하즈 외리위딘 에펜디는, 1761년 3월 어느 금요일 저녁에 한 수다스러운 친구가 그의 집을 방문하여 서재에 있는 웅장한 책장을 보더니 무례하고도 부적절하게 “하지만, 선생! 책장도 선생의 이성처럼 어지럽군요!” 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 순간 영감에 휩싸여 그의 이성도 호두나무 책장도 모두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주제로, 이 둘을 서로 비교하며 증명하여 긴 메스네비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이 작품에서, 두 개의 뚜껑이 달려 있고 두 개의 선반과 12개의 서랍이 있는 멋진 아르메니아산 책장처럼, 우리의 머릿속에도 시간, 장소, 숫자, 종이, 오늘날 원인과 결과, 실존, 필연성이라고 하는 수많은 잡동사니를 저정하는 12개의 서랍이 있다고 한 것이, 독일 철학자 칸트가 순수이성의 12범주를 열거한 그 유명한 책을 출간한 것보다 20년 앞섰다며, 칸트가 그를 모방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세 번째 난세스의 예이다.
==
그리고 쓰기도 썼다. 칼럼이라기보다는 이야기에 가까운 그 글에서, 늙은 기자는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처럼 서술되었다.
어떤 이상한 서양 소설의 주인공을 사랑하고, 자신이 작가이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이스탄불 출신의 외롭고 처량한 노인.
칼럼 속의 늙은 기자에게도, 실재하는 늙은 기자처럼 얼룩 고양이가 있었다.
칼럼 속에 나오는 노인도,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야기에서 자신이 조롱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 칼럼에 나오는 이야기 속 늙은 기자도 프루스트와 알베르틴이라는 이름을 신문에서 보고 죽고 싶어 한다. 이야기 속 이야기 속에 있는, 이야기 속의 외로운 기자들, 프루스트들, 알베르틴들은 늙은 기자의 인생의 마지막 밤의 악몽에서 바닥이 없고, 끝이 없는 우물에서 한 명씩 한 명씩 나타났다.
한밤중에 악몽에서 깨어나, 아무것도 모르기에 상상하며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랑도 이제는 없었다. 그 매정한 칼럼이 게재되고 사흘이 지난 날 아침, 문을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도무지 불이 붙지 않는 난로에서 새어 나온 연기 때문에, 늙은 기자는 잠을 자며 조용히 죽어 있었다.
얼룩 고양이는 이틀 동안 굶었지만, 그래도 주인의 살을 먹을 용기는 내지 못했다.
==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들을 개의치 않고, 그들의 소리, 그들의 냄새, 그들의 욕구, 그들의 사랑, 그들의 증오를 개의치 않고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 둥근 의자 위에서 편히 쉬고 있는 발을, 천장을 향해 내뿜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되뇌었다. 나는,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 왜냐하면 나 자신이 되지 못하면 그들이 원하는 내가 될 것이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그런 사람을 견뎌낼 수 없으며, 그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느니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니까.
차라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
그 밤늦은 시각, 안락의자에 앉아 발을 둥근 의자 위로 뻗고, 맹렬하게 울리는 그
오래된 후렴을 들으며 좋지 않은 기억들을 떠올리니, 그에게 대답할 말이 생각났다.
“그렇소, 이발사 선생!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도무지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되도록 놔두지 않는다고, 절대로 놔두지 않아요!”
이 말은 후렴처럼 끊임없이 울리면서도, 내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평온 속에 나를 더욱 깊이 파묻었다.
그 순간, 기억나게 했던 이발사 사이의 연결 고리를 발견했다.
이전 칼럼에서 쓴, 오로지 충실한 독자만이 알아챌 어떤 질서, 어떤 의미, 뭐라고 해야 하나, ‘비밀스런 균형’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다.
사실, 나의 미래를 가리키는 신호였다.
길고 복잡했던 하루의 끝에, 나만의 안락의자에 앉아 자신을 찾는 것…….
그것은 오랜 세월 모험으로 가득했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
“남편이 죽을 때까지 이 병은 계속되었어. 어쩌면 지금도 계속된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병처럼 느껴지지 않아. 남편이 죽은 뒤 외로움과 후회의 날들을 보내며 깨달은 것이 있어.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은 없다는 거야. 그때 나를 덮쳤던 깊은 후회는 똑같은 병의 변형일 뿐이었어. 내 새로운 열명도 마찬가지였지. 니하트와 함께한 삶을 되살리고 싶다는 열망, 이번에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되어 살고 싶다는 열망 말이야. 이런 후회가 남은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어느 날 밤,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어.
삶의 초반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나 자신이 되지 못했고, 중반은 나 자신이 되지 못한 그 세월을 후회하며 또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낼 거라는 생각이었지. 이 생각이 얼마나 우습게 느껴졌던지, 웃음밖에 나지 않았어.
나의 과거, 나의 미래라 생각했던 공포와 불행이, 한순간 모든 사람과 나누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운명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전혀 의심 없이 확신하게 되었지.
버스 정거장에서 줄을 선 사람들 속에서 고민에 빠진 노인 역시 오래전에 자신이 열망했던 실제 인물들의 환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겨울날 아침, 햇볕을 쐬어 주려 아이를 공원으로 데리고 나간 그 건강한 어머니 역시 희생자임을, 또 다른 어머니 상의 복사본임을 알았어.
극장에서 멍하게 걸어 나오는 슬픈 사람들, 복잡한 거리에서, 시끄러운 찻집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은 그들이 되고 싶어 하는 진짜의 환영들로 아침저녁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더 있다.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비둘기들의 머리와 몸, 짙은 군청색의 주위, 흔들리는 커튼, 한순간 켜졌다 꺼지는 전등과 환한 방은 이후 같은 모습과 창문으로 변할 불행하고 떳떳지 못할 기억에 반짝이는 오렌지색의 흔적을 남겼다는 것 말이다.
인생은 짧다.
우리는 조금밖에 보지 못하고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니 상상이라도 하는 수밖에.
사랑하는 독자 여려분, 좋은 일요일 보내시길.
==
장례식이 끝난 후 갈립과 제랄은 가족들의 집에서 자주 저녁을 보냈는데, 어느 날 밤 제랄은 갈립에게 이 트렁크 살인에 대해 아는지, 구체적으로는 갈립이 안다고 한 이 학생 혁명론자들 중 누군가 ‘러시아 작가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날 밤 제랄은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모든 살인은 다른 살인의 모방이기 때문이지. 모든 책이 다른 책의 모방인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난 내 이름으로 책을 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살인이 아니라 책이 전적인 모방인거야. 그러나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방에 대한 모방이지. 책을 설명하는 살인과, 살인을 설명하는 책은 보편적인 호소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때만 희생자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칠 수 있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살인자로 간주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창조성은 대부분 분노 속에,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그 분노 속에 존재해.
하지만 분노는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배운 방법을 매개로만 우리가 행동을 개시하게 만들어. 우리가 쓰는 칼은 (그리고 권총, 독, 문학 기법, 장르, 시의 운율, 심지어 소위 ‘공공의 적’이 내뱉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재판관님!’ 이라는 늘 같은 말조차) 똑같은 진실을 배반하지.
우리가 살인의 의식과 세부 사항을 다른 데서, 다시 말하면, 전설과 이야기와 회고록과 신문에서 배운다는 진실 말이야.
간단히 말하면, 문학에서 살인을 대해 배우는 거야.
가장 순수한 살인조차, 실수로 혹은 질투 때문에 저지른 살인조차 모방, 문학적 모방이야. 범인이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해도 말이야. 내가 이에 대해 글을 써야 할 것 같지 않아?”
==
기다리면서 당신은 익숙한 밤의 소리를 듣습니다. 마을을 지나다니는 자동차가 당신이 너무나 잘 아는 돌로 된 보도블록과 길가에 있는 물웅덩이 위로 지나가는 소리, 가까운 어느 곳에서 대문이 닫히는 소리, 낡은 냉장고의 모터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가 짖는 소리, 저 멀리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무적 소리, 갑자기 닫히는 무할레비 가게의 셔터 소리.
잠과 꿈의 연상과 망각의 기억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이 소리와 함께 다가옵니다. 이들은 이제 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매혹적인 잠의 세계로 빠져들면 이들과 함께 당신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 당신이 사랑하는 침대까지도 모두 당신의 정신에서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당신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몸으로부터, 다리와 엉덩이로부터, 더 가까운 곳에 있는 팔과 손으로부터 멀어진 느낌입니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좋아 당신 가까이에 있는 팔다리의 도움조차 몸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곧 이것들도 잊을 거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그래도 잠을 자지 못하면 나는 기억의 흔적을 따라 잃어버린 연인의 모습을 찾는 구애자가 됩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내가 여는 모든 문 뒤편에서, 내가 들렀던 모든 아편 소굴에서, 이야기꾼들의 모임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모든 집에서 나의 과거와 내 연인의 흔적을 찾습니다. 이 긴 여행 도중에 나의 기억과 상상력, 여기저기로 휩쓸려 다니는 나의 꿈이 지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내 두 눈이 내가 알고 있는 장소를 비추는 이상은 꿈과 생시의 그 모호한 경계를 계속해서 떠다닐 것입니다.
먼 친구의 집이든 가까운 친척의 빈집이든 어디든 간에 그 안으로 들어가 모든 문을 열고 방 구석구석을 돌며 기억의 잃어버린 부분을 찾을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들어간 방에서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쭉 펴고 누워 이상하고 생소한 사물에 둘러싸인 채 잠이 듭니다.
==
생각해 보았는가? 이 얼굴들이 이상하게도 서로 닮지 않았는가? 마치 이 사람들을 서로 깊게 연결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매듭이 있어서 이들의 얼굴 또한 서로 비슷하게 만드는 것 같지 않은가? 말 없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자신의 말을 경청하게 만드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벙어리 같은 사람들, 적절한 대답을 항상 일이 끝난 후 집에서 생각해 내는 사람들,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미 있고 더 꽉 차 있지 않은가?
자신들이 설명하지 못한 이야기의 신호가 그 얼굴에 어려 있는 것만 같다.
이 얼굴들 속에 당신의 얼굴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 중 이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우리 모두는 얼마나 가련하며, 우리 대부분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하지만 그래도 난 여러분을 속이고 싶지 않다.
나는 여러분 중 하나가 아니다. 손에 종이와 연필을 들고 무엇인가를 쏟아 낼 수 있고, 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럭저럭 읽게 만드는 사람, 그러니까 약간은 이 병에서 구제된 축에 낀다. 아마 이러한 이유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간의 이 상태에 대한 타당하게 언급한 작가를 나는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손에 펜을 쥘 때마다 이것이 유일한 주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부터 오직 우리 얼굴에 있는 비밀의 시로, 우리 시선 속에 있는 끔찍한 비밀로 들어가는 데 전념할 것이다. 그러니 준비하기 바란다.
==
상자에서 아무렇게나 빼낸 이 사진들은 자신들의 존재와 자신들이 보관된 이유를 스스로 말하는 것 같았다. 갈립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포착한 사진보다, 사람의 얼굴 표정이 숨겨져 있는 자료보다 더 의미있고, 더 만족스럽고, 더 궁금한 것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수정되거나 조작된 사진조차, 심지어 공허한 얼굴조차 의미를 숨기고 있었고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을 눈, 눈썹,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갈립을 응시했고, 갈립은 말할 수 없이 슬퍼졌다.
복권에 당첨된 이불상 조수의 행복하지만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면서, 아내를 칼로 찌른 보험 중개인을 보면서, 미스 유럽 대회에서 3위로 선발되어 유럽에서 우리 나라를 가장 잘 대표한 미스 튀르키예를 보면서 갈립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
==
하지만 잠시 후 제랄이 하르비예나 페리쾨이, 혹은 톱하네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그의 분노는 자신을 덫으로 끌고 간 제랄이 아니라, 제랄의 모든 글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자신의 이성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오락거리를 찾는 아이를 경멸하는 것처럼, 이야기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의 이성을 경멸했다. 한순간, 세상에 신호나 실마리, 두 번째나 세 번째 의미, 신비, 비밀의 장소는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모두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가 본 신호는 자신이 간절히 찾길 원했기 때문에 의미로 읽힌 것뿐이었다.
모든 물건이 단지 그 물건으로서 존재하는 세상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 솟아올랐다. 칼럼도, 글자도, 얼굴도, 가로등도 단지 자기자신만을 가리키는 세상, 제랄의 책상도, 멜리흐 백부의 유산인 저 장식장도, 뤼야의 지문이 묻어 있는 이 가위와 볼펜도 그 어떤 비밀을 품지 않은 세상 말이다.
==
우는 것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희생자들이 보이는 평범한 반응이었지만 그는 파샤의 우는 얼굴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았기에, 30년간 이 일을 해 오면서 처음으로 망설였다. 결국 그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되었다.
목을 조르기 전에 희생자의 얼굴을 천으로 덮은 것이다.
이 일을 하는 동료들이 본다면 비난할 행동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적인 흔들림 없이 희생자의 눈을 응시할 수 있어야만 사형집행인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에, 그 역시 이렇게 하는 동료들을 비난하곤 했다.
==
해가 다시 나왔을 때는, 세상의 신비가 우는 얼굴에 나타난 비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가 알았던 세상이, 그가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알던 세상은 평범한 얼굴들이 표현하는 평범한 의미를 통해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우는 얼굴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본 그 순간 이후, 세계 그 자체의 의미는 산산조각 났다. 그가 비참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깨져 버린 마법 그릇의 조각들, 되붙일 수 없이 갈라져 버린 마법의 수정 주전자,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세계였다.
비에 젖은 옷을 햇볕에 말리면서, 그는 과거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깨달았다. 자루에 들어 있는 머리가 가면처럼 쓰고 있는 표정을 바꾸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직업상의 도덕은 엄격해서, 머리를 모헤어 자루 안의 꿀에 완벽하게 보존한 채로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이스탄불까지 가져가야 했다.
==
자루에서 끈질기게 들려오는 신경 거실리는 흐느낌을 무시해보려 하면서, 잠들지 못한 채 말 위에 앉아 밤을 샜다.
동이 터 올 무렵이 되자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려서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플라타너스, 소나무, 진흙탕 길, 마을 우물가에 모여 있다가 자신이 등장하자 공포에 질려 도망쳤던 사람들은 그가 전혀 알지 못한 세계에서 나온 존재였다. 한 마을에 들러 게걸스레 점심을 먹을 때는 접시에 담긴 음식이 뭔지도 분간하지 힘들었다. 말도 쉬게 할 겸 마을 밖 나무 밑에 드러눕자, 하늘이라고 여겼던 것이 전혀 모르는, 전혀 보지 못했던 이상한 푸른색 둥근 지붕이 되어 있었다.
해가 지자마자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앞으로 엿새나 더 가야 했다. 자루속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을 멈추지 못한다면, 우는 얼굴의 표정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의 세계를 예전에 알고 있던 세계로 되돌리지 못한다면, 이스탄불에 결코 도착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이 이미 파즐랄라흐의 작품에서 암시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중요한 점을 윈친쥐는 지적했다. 동양과 서양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던 각 시기는 우연이 아니라 논리적인 결과였다.
그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승기를 잡은 쪽은 세계를 비밀과 이중적 의미로 가득 찬 신비스러운 장소로 보는 쪽이었다.
세계를 단순하고 단일한 의미로, 신비스럽지 않은 곳으로 보는 사람들은 패배하였고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었다.
==
행복과 승리의 시대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처럼 우리 얼굴도 의미로 가득했다. 세상의 신비와 우리 얼굴의 글자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후루피주의자들이었으므로, 이것 역시 후루피주의자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루피주의는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세계는 신비를 잃어버렸으며, 우리 얼굴도 글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얼굴은 공허하고, 과거와 같이 얼굴에서 뭔가를 읽을 가능성은 없어졌다. 우리의 눈썹, 눈, 코, 눈길, 표현, 공허한 얼굴은 무의미하다.
==
“우리같이 가난한 나라에선 부자가 되는 게 가장 쉬운 일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 나라에 이렇게나 가난한 사람이 많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삶에 만족하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이었다.
==
아들 같은 갈립 씨, 자네 사촌 제랄 씨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그는 가련한 정신 불구자야.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했던 것처럼 옷장에 가발, 가짜 수염, 과거의 의상을 숨겨 놓을 필요가 없어.
그래, 마흐무트 1세가 변장을 하고 밤에 도시를 돌아다닌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가 무엇을 입었는지 아나? 술탄의 터번 대신 페즈를 쓰고 지팡이를 들었을 뿐이야. 그 정도야! 제랄처럼 분장에 시간을 들이거나 이상하게 번지르르한 옷, 혹은 거지 같은 누더기 옷을 입을 필요는 없어. 우리 세계는 총체적인 세계야. 분열된 세계가 아니야. 이 세계안에 다른 세계가 있지만, 서양인의 세계처럼 겉모양이나 장식 뒤에 숨겨진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승리라도 한 듯 덮개를 들추고 뒤에 있는 현실을 볼 필요가 없어. 우리의 겸손한 세계는 사방에 있어. 중심부가 없지. 지도에도 없어. 하지만 우리의 비밀도 바로 이것이야. 왜냐하면 이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어렵기 때문이지.
시련이 요구돼. 그들이 찾는 우주의 신비가 그들 자신임을, 신비를 찾는 그가 우주임
을 아는 대담한 영웅이 얼마나 되는가?
이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으로 가장할 권리, 다른 사람이 될 권리가 있어.
내가 자네 아저씨 제랄 씨와 공유하는 유일한 감정은 자신도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되지 못하는 우리의 영화배우에게 느끼는 연민이야.
이 배우들에게서 자신을 보는 우리 동포들은 더욱 가련하지. 이 민족은 구원될 수 있었어. 동양 전체도 그렇고. 하지만 자네의 제랄 아저씨는, 그러니까 사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릴 팔았어.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한 짓이 두려워, 옷장에 숨겨 놓은 기교와 이상한 옷을 걸치고 모든 동포들로부터 도망치고 있지.
말해 보게, 무엇을 피해 숨어 있나?
==
내가 주인공 없는 세계를 믿는다는 것을 한 번도 너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주인공을 꾸며 낸 가련한 작가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도 너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잡지에 실린 사진 속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한 번도 너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평범한 삶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한 번도 너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 평범한 삶에 자의 자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 번도 너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
갈립은 색안경을 낀 채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라디오 방송국 바로 앞 인도에 시신이 누워 있었다. 한두 사람이 옆에서 소리를 지르자 순식간에 호기심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차량 흐름이 더뎌지자, 앉아 있던 사람이건 서 있던 사람이건 할 것 없이 가능한 한 몸을 기울여 두려움에 싸인 채 조용히, 피를 흘리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
두 번째 목소리는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이자 당신이 가장 사모하는 사람들에게서 훔쳐 온 가면이지. 이 세상에서는 평온을 찾지 못하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 신비에 감싸인 영웅말이오.
이 영웅기 가져다준 위안이 없었다면, 그가 당신을 놀리거나 비난하거나, 당신 귓가에 영원히 속삭이고 있는 수수께끼와 단어 게임으로 당신을 달래 주지 않았다면, 당신이 노망든 늙은이처럼 계속해서 후렴구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처음에는 모방하거나 나중에는 정말 그 사람이 되어 버린 이 영웅이 없었다면, 버림받은 외딴 곳으로 물러나 죽음을 기다리는 이 지구상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처럼 당신은 오래전에 구석으로 물러나 앉아 죽음을 기다렸을 것이라고 하는 당신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소.
==
갈립은 한참 후에 조용히 전화를 끊고 코드를 뺀 후, 제랄의 공책, 오래된 의상, 서랍, 글 사이에서, 기억을 찾은 몽유병 환자처럼 조사를 한 후 제랄의 파자마를 입고 그의 침대에 누웠다. 니샨타쉬 광장에서 들려오는 저녁의 소음을 들으며 길고 깊은 잠의 축복이 뭔지 느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의 모습 사이의 비통한 간극을 잊었다. 잠의 심연 속으로 평화롭게 빠져들면서, 그가 들은 것과 전혀 듣지 못한 것, 본 것과 전혀 보지 못한 것, 아는 것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모두 평온하게 혼합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
나는 당신이 우리 모두를, 온 나라를 속였기 때문에, 당신의 수치스러운 꿈, 엉터리 같은 망상, 거리낌 없는 거짓말을 사랑스러운 익살, 감동적인 섬세함, 적절한 말로 포장해서 우리 모두를, 모든 동포를, 그 누구보다도 수년간, 그 수많은 세월 동안 나를 속여 왔기 때문에 당신을 죽이겠소.
난 이제 눈이 뜨였소.
다른 사람들의 눈도 뜨일 것이오.
==
“난 당신을 죽이겠소. 당신을 죽이겠소. 당신 때문에 한 번도 나 자신이 되지 못했소.”
“사람은 절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소.”
“당신은 그 말을 아주 많이 썼지만, 그것을 나처럼 느낄 수 없을 거요. 그 사실을 나만큼이나 이해할 리가 없소.
당신이 신비라고 했던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알고만 있던 것이며, 알지도 못하면서 글로 썼던 것이오.
사람이 그 자신이 되지 않고선 누구도 이 진실을 발견할 희망을 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진실을 발견했다면 그건 아직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인 거요.
두 가지가 동시에 옳을 수는 없소. 이 역설을 이해하겠소?”
“나는 나 자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기도 하오.”
“아니, 당신은 그 말을 진심으로 온전히 믿고 하는 것이 아니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신은 죽어야 하오. 당신이 칼럼에서 썼던 것처럼, 당신은 사람들을 믿게 만들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믿지 않소.
자신이 믿지 않기 때문에 믿게 만드는 데 성공하는 거요.
하지만 당신이 믿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당신이 믿지 않는데도 자신들은 믿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두려움에 휩싸였소.”
==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저녁, 집에서 책상 앞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디완에 나오는 수수께끼, 신문에 나오는 낱말 퍼즐을 푸는 남자의 영원한 평온을 생각해 보시오. 책상 위에 있는 램프가 밝히는 종이와 글자 이외에 방에 있는 모든 것이, 재떨이가, 커튼이, 시계가, 시간이, 기억이, 고통이, 슬픔이, 배반이, 분노가, 패배가, 아, 우리의 패배가 어둠 속에 남을 거라 생각해 보시오.
낱말 퍼즐의 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표시한 비밀의 진공상태에서 멈춰 있을 무중력의 흥취는 오로지 변장을 하는 그 충족되지 않는 매혹과 비교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보시오.”
==
갈립은 불가사의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알면서도, 안다는 것을 모르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전에 읽었으면서도, 읽었다는 것을 잊었기에 흥분을 느끼는 책 사이에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느끼는 재앙과 결핍을 이전에 느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인생에서 오직 한 번만 느낄 정도로 이 고통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받고 있는 기만당한 느낌, 착각, 상실의 고통이 다른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고유한 것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마치 누군가가 체스 게임을 계획하듯이 미리 준비한 함정의 결과라고 느꼈다.
==
“마치 내가 죽었고, 내가 죽은 후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멀리서 고통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갈립은 제랄의 책상에 앉아 즉시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칼럼을 썼고 제랄의 이름으로 서명을 했다. 누군가 자신을 주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누군가가 아니라면 최소한 어떤 눈이.
==
“우리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이 아니야. 우리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이 될 수 없어. 너는 모든 사람이 너를 다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거라고 의심한 적이 전혀 없어? 너는 네가 너 자신이라는 것을 정말 확신하고 있어? 확신한다면, 너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신하고 있어? 그 사람들은 뭘 원하고 있는데? 그들이 찾는 사람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텔레비전을 보는 영국 시청자들이 그의 고민을 고민하고, 그의 슬픔을 슬퍼하고, 그의 이야기로 영향을 받을 외국인 아니냔 말이야! 바로 이 상황에 정확하게 맞는 이야기가 내게 있어! 아무도 내 얼굴을 볼 필요 없어. 내 얼굴을 검게 처리하고 촬영하면 돼. 억압하는 정부, 정치적 살인, 군사 쿠테타를 두려워하는 베일에 싸인 유명한 터키 기자자 (내가 무슬림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라는 걸 잊지 마)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꺼리며 BBC 텔레비전 방송국의 질문에 답했다. 이게 더 좋지 않아?"
==
평생을 제국의 왕위에 오를 날만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어차피 누구나 미칠 운명이었다. 같은 꿈을 꾸며 기다리던 형들이 미치는 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미치는 것 혹은 미치지 않는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미칠 수밖에 없다.
미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미치는 것을 거부하고 이를 문제시하기 때문에 미친다.
조상과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다른 형제를 어떻게 교살했는지, 그 기다림의 세월 동안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한 왕자들은 어차피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메흐메트 3세가 술탄이 되자마자 젖먹이 아이들을 포함하여 19명의 형제를 일일이 어떻게 사형에 처했는지를 역사책에서 읽은 왕자들은, 왕위에 오를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이유로 형제들을 하나하나 죽인 술탄들의 이야기를 읽어야만 하는 왕자들은 미칠 운명이었다.
자신이 독살되거나 교살되거나 살해되어서 자살로 가장될 날을 기다리면서 왕자들은 미쳐 갔고, 그것은 바로 ‘나는 경쟁에서 빠지겠다.’라는 의미였다.
왕위에 오를 날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었기에, 미치는 것은 가장 쉬운 탈출구이자 가장 심오하고 가장 은밀한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미치는 것은, 자신을 감시하는 술탄의 밀고자들, 이 밀고자들의 망을 뚫고 왕자에게 다가오는 저질 정치가들의 음모와 함정, 견딜 수 없는 왕위에 대한 모든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왕위에 앉아 있을 거라고 꿈꾸던 제국의 지도를 검토한 왕자들은, 머지않아 책임을 짊어지고, 자신, 그렇다, 오로지 자신의 명령으로 통치할 나라가 얼마나 광활하고, 얼마나 무한하고, 얼마나 광대한지를 파악할 때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무한함을 느끼지 않는 왕자들 역시 언젠가는 그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할 제국의 거대함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차피 미친 축에 들어간다.
==
“지금 내가 오스만 제국을 통치하는 그 바보들, 미친 사람들, 얼간이들보다 더 분별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격렬한 무한함의 느낌 때문이다!
어느 날 내 어깨에 짊어질 책임의 무한함을 생각해도 의지 없고, 힘없고, 가련한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미치지 않았다. 아니다, 정반대로, 이 느낌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를 분별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느낌을 신중하게, 나의 모든 의지와 단호함으로 통제했기 때문에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혹은 될 수 없는지’라는 것을 발견했다.”
==
“내가 상상한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 시절에 아주 자주 그랬던 것처럼, 오스만 제국의 왕좌에 앉아 국가 문제에 대해 어떤 어리석은 신하를 꾸짖는 것이었다. 그 백일몽 속에서 ‘볼테르가 말했던 것처럼’이라며 거만하게 말을 이어 가는데, 갑자기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내가 35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상상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볼테르인 것 같았고, 내가 아니라 볼테르를 모방하는 사람 같았다.
이 술탄이, 수백만의 생명을 지배하고 한계를 모르는 제국을 가진 이 남자가 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느낀 그 공포란!”
==
“말해 줄 것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만, 과거와 책에 대한 모든 기억과 기억 그 자체를 잃어버렸을 때만, 그 깊은 정적을 (영혼의 심연에서, 자아의 무한하고 어두운 미로에서 들려오는) 들은 후에만, 자신을 자신이게 할 진짜 목소리가 허락될 것이다.”
==
왕자 오스만 제렐레딘 에펜디가 살아생전 오르지 못한 왕위에는, 어렸을 때 그가 목덜미를 후려쳤던 형 메흐메트 레샤트 에펜디가 칠 년 후에 앉았고,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대전쟁에 참가한 오스만 제국은 붕괴되었다.
==
그날 밤, 갈립은 알라딘의 가게의 인형 사이에 있는 뤼야를 꿈에서 보았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른 인형들처럼, 눈을 깜빡이며 가냘프게 숨을 내쉬고만 있었다. 그녀는 갈립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갈립은 늦었다.
도무지 그곳으로 갈 수 없었다. 단지 멀리서, 쉐흐리칼프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알라딘의 가게에서 인도로 흘러나오는 진열장의 불빛만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
그들이 발아래 피어나는 이야기와 회상과 동화에 감탄하며 기억의 정원을 거닐었을 때, 그중 어떤 꽃송이가 뤼야와 제랄에게 갈립을 그 정원에 들이지 말라고 했을까? 갈립이 이야기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들만큼 생기 있고 활기 넘치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갈립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일까? 제랄을 지나치게 선망하는 게 귀찮았기 때문일까? 그가 전염병처럼 몰고 다니던 그 우울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
어쩌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것을 (혹은 내가 안다는 것을 모르는 체 하는 것)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이 제랄의 검은 신비를 죽여 없애야 했다는 것을, 내 마음뿐 아니라 모든 독자, 모든 동포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모든 신비를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의심을 싹이 트기 전에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이런 물건을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며칠이고 몇 주고,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몇 달 내내 지저분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나샨타쉬 거리에 있는 아파트 앞 쓰레기통에 얌전히, 경건한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며 버리고 도망쳤다.
그것에서 멀어진 후에도, 마치 아파트의 어두운 통풍구에서 돌아온 물건처럼, 어느 날 추억과 함께 이 슬픈 물건들도 내게 하나하나 돌아올 거라고 상상했다.
==
이제는 뤼야에게서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이 글이다.
이 검고 ,새까만 어두운 페이지들.
때로는 이야기들 중 하나가, 눈 오는 겨울밤 제랄에게서 처음 들었던 사형집행인 이야기, 혹은 뤼야와 갈립의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
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한 권의 검은 책에 나란히 넣고 싶었던 이 이야기들도 나에게 마치 서로에게 열리는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와 기억들처럼 또 다른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이스탄불 거리에서 사라졌을 때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연인의 이야기와, 얼굴에 있는 사라진 의미 그리고 비밀을 찾는 남자의 야기를 떠오르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아주 오래된, 아주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을 다시 쓰는 것일 뿐인 나의 새로운 일에 더욱더 열성적으로 몰두하여 검은 책의 마지막 장면에 다다랐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갈립은 마감 시간에 맞춰야 할, 실은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제랄의 마지막 글을 쓰고 있다.
아침 무렵, 그는 고통스럽게 뤼야를 떠올리고, 책상에서 일어나 이스탄불의 어둠을 바라본다. 나는 뤼야를 떠올리고, 책상에서 일어나 이스탄불의 어둠을 바라본다.
우리는 뤼야를 떠올리고, 이스탄불의 어둠을 바라본다.
내가 한밤중 비몽사몽간에 푸른색 체크무늬 이불 위에서 우연히 뤼야의 흔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 휩싸였던 슬픔과 흥분에 우리는 휩싸인다.
왜냐하면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그렇다, 물론, 유일한 위안거리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