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 안 신교육의 바람이 불다
우리들의 학교, 100년을 돌아보다
의친왕이 배제학당에 내린 글 의화군 이강(義和君 李堈)이 배제학당 설립에 관해 쓴 글이다. 미국인 아펜젤러에 의해 학교가 설립된 것과 국가에서 '배재(培材)'라는 이름을 하사한 사실 등이 적혀있다.
1912년 3월 관립계동소학교(현 서울재동초등학교) 제7회 졸업기념사진 관립교동소학교와 달리 서민층 자녀들의 교육기관으로 계동에서 계교 하였으나 학생 수에 비해 교사(校舍)가 비좁아 한 달만에 재동으로 옮기게 되면서 교명도 관립재동소학교로 변경되었다.
정동여학당(현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명성황후의 주치의로 제중원 여의사이자 선교사인 엘리스가 고종이 하사한 제중원 사택에서 문을 열었다. 첫 학생은 언더우드학당에서 온 '정네'라는 이름의 다섯 살 여자아이였다.
배우고자 한다면 사대문 안으로
전쟁통에도 수업이 이어지다.
폐허가 된 서울재동국민학교(1953년 임인식 촬영) 6.25 전쟁으로 서울의 학교(學校)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어버렸다.
6.25 동란으로 굳게 닫힌 교문(1950년) 전쟁이 발발한 이튿날인 1950년 6월 26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휴교한 서울청운국민학교.
전차 안에서 수업을 받는 피난학교 학생들(1950년대, 국가기록원) 전쟁으로 60%의 교실이 파괴되거나 유실되고 80%의 교육기자재가 없어지는 등 학교시설의 손실은 매우 극심했다. 교실이 없어 버려진 전차를 활용하는 모습.
전쟁통에도 군사용 칠판 앞에서 부서진 벽돌을 의자 삼아 진지하게 수업을 받는 어린이들
피난시절 교무일지
'광희의 역사' 사진첩 / 1909년~1942년, 서울광희초등학교 서울광희초등학교 제1회부터 제34회 졸업사진이 정리된 사진첩이다. 내부 사진은 물론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사진첩 자체만으로도 사료적(史料的) 가치(價値)가 매우 높다.
중학교 무시험 추첨기 / 1969년, 서울교육박물관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 도입으로 학생들은 지접 추첨기 손잡이를 돌려서 나오는 은행알에 적힌 번호에 따라 학교(學校)를 배정받았다.
무시험 입학제도와 함께 문을 닫는 학교들
사대문 너머 강남으로 강남과 잠실, 목동으로 이전한 학교들
서울 학생의 노래
서울 학생의 노래 음반 / 1979년 홍준호 작사, 허원무 작곡 / 배화여자중고등학교 소장 1979년에 서울특별시위원회에서 제작(製作)해 배포한 음반(音盤)으로 앞면에는 '애국가'와 함께 '서울 어린이 노래', '스승의 은혜'가 뒷면에는 '서울 학생의 노래', '서울 교사의 노래' '학도호국단가'가 수록되어 있다.
입학과 수업
서울매동국민학교입학식 풍경(1966년, 국가기록원) 입학식의 기억 중 하나는 가슴에 단 손수건이다.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을 위해 가슴에 큼지막한 손수건을 달아주었다.
서울후암국민학교 운동장 수돗가에 몰려있는 아이들(1979년)
중학교 개교 및 입학식(1972년)
서울종로국민학교 수업시간과 시간표(1956년)
서울재동국민학교 생활통지표
어린이 1일 생활표
서울효제국민학교 운동회(1978년) 파아란 하늘 밑에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며 목청껏 소리지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가있었다.
졸업
경복고등학교 학생수첩과 학생증(신분증명서) 경복고등학교 학생임을 증명해주는 오늘날의 학생증과 같은 신분증명서와 이를 보관하는 학생수첩이다. 아래에는 경복고등학교 버클도 보인다.
사대문 안을 지켜온 백년대계의 배움터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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