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선평가 1
홍기원 시민사회국장
들어가면서
문후보가 정치에 입문해서 자기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2번 있었습니다. 후보 시절에 한번, 대표 시절에 한번 있었습니다. 2월 3일 중앙위원회의 비민주성에 대해 2월 4일 비판 성명을 낸 7인의 한 사람입니다. 제가 문국현 후보 대선캠프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7년 9월 14일 각 대학 민주동문회가 가입하고 있는 7080학생연대에서 문국현 후보 강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강연회에 110명 정도 참석했는데 참석자 90% 정도는 문 후보의 강연회에 감동을 먹었습니다. 9월 14일 당시 상황을 보면, 7080학생연대 구성원 중 이해찬 캠프, 손학규 캠프, 통합신당 대표 비서 등으로 정치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갈 길을 정한 상태에서 다수 7080학생연대 구성원들은 ‘2007 대선은 관심 없다’라는 냉담자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9.14 문 후보 강연은 이런 냉담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습니다. 강연회 이후 바로 강원대, 고려대, 국민대, 동국대, 부산대, 성균관대, 서울대, 연세대, 외대, 이대 민동 등 10여명이 ‘문국현과 함께 하는 7080’을 조직해서 조건 없이 문국현 후보를 돕기로 결의를 모았습니다.
9.18일 김영호 전 산자부장관이 주선하여 문국현 후보와 세실 4층에서 면담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국현과 함께 하는 7080’ 중 대표로 2명이 문 후보 캠프에 합류하기로 이야기 했습니다. 9.20일 김재현 부속실장을 만났고, 9월 28일 전재경 엔지오 창조한국 조직위원장을 만나 10월 1일부터 성우빌딩 창당기획단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9월 18일 문 후보와 면담하고 2주 정도 만에 성우빌딩에 출근을 시작했는데, 그 정도면 우리는 그래도 빠른 시일 안에 조직에 정착한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저는 창당기획단 내에 7080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10월 14일 창조한국당 창당발기인대회 이후에 저는 창당준비위원회 시민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활동을 했고, 10월 30일 중앙당 창당 이후 11월 7일 임명된 중앙당 임시 당직에서는 대외협력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대선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저는 은평구에 가서 선거연락사무소 꾸리는 일을 시작했고, 대선기간 내내 은평선거연락소장 역할을 했습니다. 은평선거연락사무소를 정리하고 중앙당 출근을 시작한 12월 말부터 대선평가단에 소속되어서 2008년 1월 말까지 대선평가단 활동을 했습니다. 문 후보 캠프 참여는 저에게 1992년 민중당 해체 뒤 15년 만의 정치활동이었습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정치인그룹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입니다. 저는 은평구에서 공동육아, 은평두레생협, 갈현초등학교 운영위원, 은평뉴타운 문화재 지키기, 은평연대 등등의 활동, 그리고 고대민주동우회 간사 활동을 하던 사람입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노선이 맞지 않아서 민주노동당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고, 여의도 정치권과는 거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2월 4일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간단하게 정치권그룹이라고 덮어씌우기에는 경우가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문 후보 캠프에 들어와서 ‘문국현과 함께하는 7080’ 활동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이상 모임을 가지면서 활동을 했는데, 총무국에서 행사비, 모임비용을 신청해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한 번도 행사비, 모임비용 지원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과 함께 하는 7080’은 모든 비용은 자체 갹출로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대선 때는 은평구 선거연락소장을 하면서 제 돈으로 선거사무소 계약을 했고, 운영비도 서울시당 지원이 없어서 제 돈으로 했습니다. 유급선거사무원 활동비 중 미지급분 1/4는 지역 아주머니 선거사무원들한테 온갖 욕 얻어먹다가 12월 31일 재야의 종이 치기 전에 제 카드 마이너스 긁어서 다 해결했습니다. 처음에 문 캠프로 올 때 은평시민단체에서는 가지 말라고 반대했습니다. 지역시민운동역량이 뻔한데 지역시민운동 대표격을 하던 사람이 빠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대선까지만 뛰고 은평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창당 활동하면서 대선 때만 몸담고 있다가 싹 빠지는 것이 기회주의 같아서 은평두레생협이사장직도 내놓고, 학교운영위원도 내놓고 창조한국당에 가입했습니다.(참고로 생협법 상 생협이사장은 당원이 되면 안됩니다.) 저는 문 후보에게서 빼먹을 것 다 빼먹고 더 빼먹을 것이 없어 성명서 발표하고 제 살길 찾으러 가려 한 사람이 아닙니다. 문 후보를 사랑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자기 돈 바쳐가며 시간과 열정과 모든 것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제가 하고자 했던 정당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기본으로 지켜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참여형 정당을 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현장을 목도하고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을까요? 성명서 발표는 저에게는 적어도 이 땅에서 민주화운을 했다는 사람의 명예의 문제였습니다. 왜 한 사람이 명예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지경에 창조한국당이 이르렀는지 참당한 심경입니다.
이제 대선평가를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문국현 후보가 기존 정치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는 2007년 10월 초 통합신당의 경선이 정동영 후보 측의 조직. 동원선거 논란으로 혼란과 파행으로 치달을 때였습니다. 그때 통합신당 국회의원 10명이라도 빼내 올 수 있었다면 문후보의 정치력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달라졌을 것이고, 10월 15일 이후 2달 동안 15% 내외에서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 정체를 보일 때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그 원인을 파헤쳐 보기로 합시다.
문국현 후보의 조직이 대외적으로 비쳐진 모습
1. 미약한 세력
1) 너무 늦은 문국현 후보 출마
문국현 후보가 대선 출마를 결심했던 때는 5월 중순이다. 5월 중순 경 문국현 후보가 확실하게 기반을 둘 수 있는 조직은 시민사회 조직이었다. 문국현 후보가 시민사회 진영 내에 기반을 닦을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조직하는 방법과 매개적으로 시민사회 진영 출신으로서 정당을 준비하고 있는 세력을 자기 조직화하는 방법 2가지 방법이 있었다. 직접 조직하는 방법은 전재경 박사를 중심으로 한 초기 조직 주체에 의해 이루어 졌다. 초기 조직 주체는 2007년 5월부터 ‘문국현 사장의 출마 의지가 확고하다’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조직화 사업을 시작했다. 초기 조직 주체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생명의 숲, 생명회의, 환경운동연합 활동가, 지역환경운동가, 시민운동가, 중소기업인, 농민, 교수, 변호사 등 주로 환경운동을 하던 시민운동가를 중심으로 조직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후자 시민사회 진영 정당 추진세력과 문국현 후보를 매개했던 사람은 최열 전 환경운동연합 대표였다. 시민사회 정당 준비세력은 5월 15일 ‘미래구상’과 ‘통합번영’이 합쳐서 ‘통합번영미래구상’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시민사회 그룹 ‘통합번영미래구상’ 세력은 6월 11일 창당선언을 했다. 이때 시민사회 그룹 창당 세력은 문국현 후보에게 출마 선언을 빨리 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하지만 문국현 후보는 유한킴벌리와 킴벌리 클라크를 정리하는 와중 있었기 때문에 정리가 끝나기 전에 출마선언을 할 수 있는 사정이 되지 못했다. 정리가 끝나기 전 출마선언은 유한킴벌리와 킴벌리클라크의 주주들의 이해에 심각한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문제여서 문국현 후보가 처신할 수 있는 폭은 제한되어 있었다. 문국현 후보가 처해있는 사정이 100% 전달되지 못한 시민사회 진영 창당세력은 7월 8일 미래창조연대 창당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우리당 탈당파 의원 40명을 포함한 200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대회는 열린우리당 탈당파 쪽에서 대거 동원한 대회였다. 이 대회 이후 미래창조연대 창당준비위원회는 급격하게 통합신당을 창당하는 한 세력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문국현 후보가 시민사회 진영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대선 판에 뛰어들 수 있기 위해서는 시민사회 진영 창당 세력을 잡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이 부분이 문국현 후보 출마가 늦어 지지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문국현 후보의 초기 세력 형성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기반인 시민사회 진영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문국현 후보가 모양새 좋게 첫출발을 하는데 가장 큰 한계로 작용했다.
2) 구체적 연대세력 정하지 못함
문국현 후보 캠프가 초기 조직화 사업을 할 때 환경운동세력 외에 어느 세력과 연대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지 못했다. 초기 조직사업을 할 때 문국현 후보가 기반을 둘 수 있는 세력을 명확하게 규정했어야 했다. 문국현 후보 진영이 가장 자신 있게 조직할 수 있는 환경운동세력 외에 일반 시민운동세력, 민주화운동세력, 노동운동세력, 농민운동세력, 여성운동세력, 학계. 전문가 등에 대한 대표 선수 선정을 했어야 했다. 또 연대할 수 있는 제반 세력에 대한 정보파악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했다. ‘통합번영미래구상’ 세력에서도 통합신당에 들어가지 않은 다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입장이 없었다. 오히려 통합번영미래구상이라고 하면 전부 통합신당과 연합한 세력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했다.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해서도 입장이 정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민주화운동세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게 대원칙으로 작용해 초기 세력 형성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통합신당의 각 캠프에 합류하지 않은 열린우리당 출신 정치가, GT계열 정치가, 개혁당 출신 정치가, 민주당 출신 정치가 등 여러 출신의 정치가에 대해 입장이 정해지지 않았다. 문국현 후보 출마선언 전까지 어떤 세력을 초동 주체세력으로 세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대로 정해지지 못했다. 초동주체가 형성되어야 출마선언 이후 인사영입에 본격 나설 수 있었는데 그 점이 준비되지 못했다.
3) 초기 조직 체계 형성 실패
8.23 출마선언 전에 창당기획단 내에 조직위원회가 짜여 있어야 했다. 이 창당기획단 조직위원회 내에 인사위원회 내지 인재영입위원회 같은 조직이 있어서 문국현 후보가 영입해야 하는 인사리스트가 작성되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출마선언 이후 합류를 타진하는 인사에 대한 조직합류 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졌어야 했다. 사전 조직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8.23일 문국현 후보는 ‘대한민국 재창조를 위한 17가지 약속’을 발표하면서 출마선언을 했다. ‘사람이 희망이다’라고 선언한 17가지 약속은 네티즌의 폭발적 반응을 야기시켰고, 정치권 안팎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문국현 후보에게 기대를 거는 많은 사람이 출현했다. 이때 문국현 후보의 조직이 문국현 후보의 콘텐츠, 즉 17가지 약속에 동의하는 개인과 세력은 누구든지 받아들인다는 개방적인 자세로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개방적인 자세로 나가기에는 내부 조직의 준비가 너무 취약했다. 초기 조직 형성의 실패는 네티즌의 폭발적 반응을 실제 지지율 상승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조직기반 확대에 한계를 가져오게 했다. 그것은 또 통합신당의 국회의원을 영입하는 문제에 대해 문국현 후보에게 재량권과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4) 시민사회 기반 정당론
문국현 후보 초기 조직 세력은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정당을 만들고 이 정당이 대선후보를 추대한다는 논리를 폈다. ‘시민사회 주도론’은, 민주사회의 시민들은 시원적 헌법제정권력에 기초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논리로 뒷받침되었다. 하지만 ‘시민사회 주도론’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기존 정치권 부정논리, 기존 운동권세력 부정논리로 나타났다. ‘시민사회 주도론’은 먼저 시민사회운동권 활동가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조직화되어야 했지만 이런 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현재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중견 리더들에게 ‘시민사회 주도론’을 가지고 뭔가 심각한 논의 한번은 일으켜보아야 했는데 그것도 하지 못했다. ‘시민사회 주도론’은 말은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실상은 시민운동 진영 전체가 아니라 시민운동 중 가장 귀족적인 시민운동인 한 영역만을 대표하는 이론이었다. 오히려 ‘시민사회주도론’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영역은 시민사회 진영이 아니라, 8.23 문국현 후보 출마 이전에 합류한 세력의 기득권 유지였다. ‘시민사회주도론’은 시민사회진영 전체에서 문국현 후보를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는 가장 효력을 덜 발휘하고, 문국현 후보 진영에 참여하고자 하는 기존 정치권 인사와 기존 운동권인사에게는 차별적 논리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시민사회주도론’은 문국현 후보 진영이 개방적으로 제 세력을 모아야하는 결정적 시기에 열린 문으로서가 아니라 먼저 선점한 사람들의 기득권 강화논리로 작용하면서 열세한 조직을 더욱더 열세하게 만들어 버리는 논리로 작용했다.
5) 정치인 영입 실패
초기조직형성 실패는 8.23출마선인 이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조직을 개방하고 조직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했다. 초기조직형성 실패는 규모 있는 전국적 조직 확대의 기회를 무산시켰고, 결국 문국현 후보에게 최대의 기회였던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파열음이 났던 10월 초 결정적 시기에 통합신당의 흔들리는 국회의원을 우리 쪽으로 다수 끌어올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했다. 문국현 후보의 최대 약점은 조직세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국민으로부터 수권세력으로서 믿음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이를 극복할 방안은 국회의원을 원내교섭단체 정도로 통합신당에서 빼내 오는 방법 밖에 없었다. 준비되어 있는 조직만이 다른 조직의 분열과 혼란을 이용할 수 있다. 대통합신당의 혼란을 이용하기에는 문국현 후보 조직의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대통합신당의 경선이 끝난 후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이 15% 아래에서 정체되는 시기가 둘 달간이나 계속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10월 15일 이후 고정된 조직프레임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채 대선을 마쳐야 했다.
2. 폐쇄성
1) 공식 루트 부재
문국현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캠프에 들어오고 싶을 때 공식적으로 두드릴 수 있는 루트가 없었다. 인사위원회 같은 곳을 두어야 했다. 창당기획단의 경우 전재경 창당기획단장 루트 하나 밖에 없었다. 지지자가 창당기획단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재경 창당기획단장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정보였고, 전재경 창당기획단장과 일단 만나더라도 다시 전화를 받기까지 2주~ 3주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전재경 창당기획단장에게 개인적으로 연결해서 빨리 자리를 찾았고, 그냥 전화를 기다리던 사람은 궁금증 때문에 성우 빌딩을 여러 번 찾아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창당기획단 실무자들이 창당기획단에서 자리를 찾는 과정이 각자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재경 창당기획단장은 지방조직 건설 때문에 항상 지방을 돌았기 때문에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항상 바쁘고 회의 중이었기 때문에 전화연락을 한 번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강연에서, 문국현 후보 동영상에서 감동받아서 문국현 후보를 돕고 싶어 캠프와 창당기획단 문을 두드려도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하는지 친절하게 말해 주는 공식 조직이 없었다. 몇 단계로 닫혀 있던 문을 노크하기에 지친 사람들은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문국현 후보 캠프는 너무 닫혀 있다고 여기저기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2) 명함 문제
창당기획단까지는 명함이 없었다. 창당을 하는 과정에서는 조직이 여러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명함이 수시로 바뀌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조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명함이 나와야 했다. 하지만 창당기획단에서는 명함이야기가 여러 번 나왔지만 명함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외적으로 사람을 만날 때 명함이 없이 만나니까 공식성이 없었다.
명함을 제때 발급하지 못하는 문제는 조직 확대에 커다란 장벽으로 작용했다. 문국현 후보 출마선언 이후 당을 찾아오는 지지자의 경우 추천자가 확실할 경우 바로 명함이 나갔어야 했다. 창당기획단 내 여러 위원회를 두고 문국현 후보 캠프를 두드리는 사람들을 담으면서, 그 사람들에게 위원장, 부위원장 명함을 제때 발급만 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게 하는 사고는 방지했을 것이다.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명함을 제때 주지 못해 돌아가게 하면 그 사람들은 문국현 후보 캠프에 대해 자기 주위 사람에게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문국현 후보 캠프는 벽이 높다는 소문이 확산되게 만든 주요인 중 하나가 명함문제였다.
3) 조직의 동맥경화
창당기획단에서는 물론이고, 10월 14일 창당발기인대회 이후 창준위가 뜨고 나서도 실무단위를 대표하는 실국장이 임명되지 않았다. 따라서 창준위에서 실국장 회의는 없었다.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이 주재하는 전체회의 밖에 없었다. 창준위 안에 각 위원회를 두었지만 각 위원회는 독자적인 회의단위가 되지 못했다. 각 실국장에게 권한을 위임했더라면 실국 단위에서 풀릴 수 있는 문제도 실국장 단위가 없기 때문에 작은 결재 사항도 전부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에게 몰렸다.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은 각 지역 시도당을 만들기 위해 아침회의가 끝나면 바로 지역으로 내려갔다. 결재될 사안은 많고 결재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단위인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은 아침에 전체 회의만 주재하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 매일 되풀이되다 보니 결재가 되지 않아서 조직이 곳곳에서 정체현상을 빚었다. 캠프나 창준위에 실무자를 소개하기 위해, 혹은 후보 특보 소개를 위해 이력서를 제출하면 보통 2주 3주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 손에 정체되어 있는 것은 보통이었다. 심한 경우는 한달씩 정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10월 16일 올라간 후보특보의 임명 이력서가 돌고 돌아서 11월 9일에 임명이 떨어졌다. 김영춘 집행위원장 체제가 들어선 2일 뒤에 처리된 것이다. 24일 만이었다. 그동안 밖에서 후보특보를 신청했던 사람도 지쳤고, 안에서 후보특보를 소개한 사람도 답을 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문국현 후보 캠프와 창준위는 이력서 하나 올라가면 답이 없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내부 조직 동맥경화는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문후보 캠프와 창준위를 벽이 높고 일이 되지 않은 조직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이 조직 곳곳에서 일어났다.
4) 캠프와 당조직의 단절
“캠프 팀장회의의 경우도 처음에는 오인권 씨가 참석했다. 전재경 박사로부터 캠프 회의에는 일체 보고서를 제출하지 마라는 지시를 받고 중앙에서는 자신이 할 일이 없음을 알고 김제로 다시 내려갔다. 그 이후 박종화 팀장이 캠프 팀장 회의에 다시 나갔지만 전재경 박사가 못나가게 해서 나가지 못했다. 당 조직과 캠프의 소통을 막고 대결국면을 조성한 것은 전재경 박사였다.”<김두수 중앙선대위 홍보미디어위원회 부위원장 인터뷰 중에서>
“창당과정을 아는 사람은 전재경 박사 밖에 없었다. 박종화 팀장 전에 한두 명이 캠프 회의에 왔지만 캠프 회의에 온 사람 그 사람도 창당과정을 몰랐다. 물어보면 “자기는 잘 모른다. 시도당에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대답 밖에 없었다. 창당과정을 다 아는 사람은 전재경 박사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재경 박사는 캠프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전국적인 창당과정을 아는 사람이 전재경 박사였는데 캠프회의에 나오지 않으니 커뮤니케이션(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자체가 없었다.”<김헌태 중앙선대위 전략기획위원회 부위원장 인터뷰 중에서>
위 인터뷰에서 나타나듯이 10월 14일 창당발기인대회 하기 전 캠프와 당조직은 완벽하게 소통이 안 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10월 14일 창조한국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난 뒤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이 캠프 회의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소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캠프와 당 조직이 소통을 시작했다기 보다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의 캠프에 대한 관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때부터 당 조직과 캠프의 본격적인 불협화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국현 캠프를 당 조직이 조직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은 문국현 후보의 조직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열세한 조직으로 출발한 문국현 후보 캠프와 당 조직이 소통이 잘되어서 서로 플러스 기능을 해도 뭐라고 할 텐데, 아예 소통이 안 되는 상태는 문국현 후보의 조직적인 모습을 더욱 열세하게 만들었고,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3. 인력배치의 부재
1) 권한 위임 부재
창당기획단 단계와 창당준비위 단계까지 창당 세력으로서 권한을 가졌던 사람은 전부 8.23일 문국현 후보 출마 선언 전에 합류한 전재경 창준위 집행위원장, 박오순 창준위 조직위원장, 황은주 창준위 총무위원장, 이수원 중소기업위원회 위원장, 조상식 지역조직실장 정도였다. 초기 합류세력들은 소위 분권형 포도송이 이론을 주창하면서 각 국실팀에서 자연 리더십이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자연 리더십 성장이론이란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은 실국장을 임명하지 않고 권한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형태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초기합류세력들이 주창한 분권형 포도송이 이론은 권한을 나눠주지 않고 계속 가지고 가는 권한독점논리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창당기획단 단계는 물론이고 창당준비위원회 단계까지 실국장들이 임명되지 못하고, 권한을 위임받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만 것이다. 믿고 맡겨야 일이 되는데 믿고 맡기지 못하니 능력 있는 실무자들이 그냥 방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인재는 있지만 인재가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했다.
2) 집행 결정 단위의 부재
창당기획단 단계는 물론이고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에서도 지역 조직 창당 작업은 조직위원회 실국장 단위에 맡기고 집행위원장은 조직의 소통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어야 했다. 창당기획단과 창당준비위원회 때 집행위원장이 실국장에게 권한을 주고 집행회의를 매일매일 주재하면서 조직을 관장해 나갔더라면 각 시도당의 조직 규모와 중앙당의 조직 모습이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중앙당 창당에서 꼭 필요로 하는 과정, 즉 당헌. 당규, 당 로고 등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당내 민주주의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집행 결정단위의 부재는 일이 계획 속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못하고, 항상 초분을 다투어 급하게 진행되게 만들었다. 집행결정단위 부재는 실국장 단위에서 회의를 통해 결정되는 과정 없이 전재경 집행위원장 홀로 결정을 낳았다. 홀로 결정의 대표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창준위 홈페이지 만드는 과정에서 처음에 김두수 팀장에게 맡겼다가 일 진행에 대한 보고 한번 받지 않고, 김상수 감독의 ‘홈페이지가 형편없다’는 말 한마디에 김상수 감독에게 맡겼다가 다시 김두수 팀장에게 돌아오는 과정에서 보여준 독단성이었다. 김상수 감독은 혼자서 창조한국의 C.I를 당초문양, 창조한국 상징물로 다뉴세문경, 창조한국의 상징색으로 흰색과 은색으로 하는 등 아무와 상의 없이 혼자 결정해서 www.bravokorea.com이란 당홈페이지를 개설했다가 캠프로부터 어떻게 합의도 없이 이런 당홈페이지가 뜰 수 있냐고 강력한 항의를 받고 홈페이지를 내리는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예산낭비가 1천2백만 원 정도 있었다.
그리고 홀로 결정의 또 다른 예는 창당준비위원회 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는 대중용 책자가 나오는 과정에서 있었다. 독단의 형태는, 대중용 책자의 표지디자인이 대중적인 디자인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었는데, 인쇄 넘어가기 직전에 김상수 감독이 나타나 흰바탕에 당초문양을 넣은 표지로 전격적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실무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도 나타났고, 그리고 책 내용에 대해 사전에 창준위 실무자들에게 한번이라도 돌려 읽어보게 하고 원고검토를 했다면 그렇게 비대중적인 책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이 대중용 책자를 5만권이나 찍었다. 1권당 원가가 800원이었다. ‘문국현과 함께 하는 7080’도 이 책을 판매하려던 결정을 뒤집어야 했다. 결정과정의 비민주성은 많은 재정 낭비를 초래했다. 결정과정의 홀로 결정의 결정판은 중앙당 창당과정에서 있었다. 창준위 시절 실무자들은 당 강령과 당헌, 당규, 당로고, 당색깔 등을 결정하기 위해 조직위원회에 창당준비TF를 두고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권고를 했다. 하지만 당 강령과 당헌은 중앙당 창당 전에 한 번도 실무자 선에서 검토되지 못한 채 전재경 집행위원장이 중앙당 창당 2일전부터 혼자서 작성해서 중앙당 창당에 올렸다. 창준위 실무자들도 중앙당 창당대회 장소에서 강령과 당헌을 처음 보았다. 중앙당 창당 책자가 인쇄되지 못하고 복사물로 긴급하게 대체된 이유도 당일 아침에 당헌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로고는 문제점이 너무 많이 지적되어 다시 바뀌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창준위 단계에서 집행결정단위라는 회의단위가 없으면서 빚어진 전재경 집행위원장 홀로 결정과정은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창당과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창당과정을 창조한국당이 겪게 했다.
맺으면서
문국현 후보 조직의 폐쇄성에 가장 큰 피해자로서 대표적 경우는 상생과 평화라는 그룹을 들 수 있다. 이 그룹에 속했던 박건규 노동특보 같은 경우는 2개월 정도 시간이 걸려서 노동특보 임명을 받을 수 있었다. 박건규 노동특보는 제3노총준비위원장을 역임한 노동계에 광범위한 인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창조한국당 입장에서 본다면 가장 먼저 영입해야할 케이스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문캠프에 합류하는데 2개월이 걸렸다. 그 2개월 동안 전국에 있던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200명 정도 모임을 두차례나 해야 했고, 돈도 1천 5백만원이나 깨져야 했다. 결국 시기를 놓치고 말았고, 박건규 노동특보는 개인으로 들어와서 자기 특기인 노동분야에서 활약도 못해보고 서울시당 민원부서에서 커피나 타야했다. 박건규 노동특보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그때 제대로 결합했으면 많은 노동자들이 문캠프에 합류했을 거예요.”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문국현 후보의 가치에 반해서 캠프를 찾아왔다가 조직의 폐쇄성 때문에 상처 입었던 사람이 얼마나 더 많았을까?
나는 문후보 측근과 만난 사석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문후보 대선 조직을 맡은 전재경 박사는 시민운동 중에서도 귀족 시민운동만 하던 사람이라 사람을 조직할 줄 정말 모르는 사람입니다. 만약 저한테 조직을 맡겼다면 지금 전재경 박사가 한 조직보다 몇 배는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을 제대로 했던 중견리더에게 맡겨놓았더라도 지금보다 몇 배의 조직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건 조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조직을 망친거지요. 문 후보는 전재경 박사 때문에 그 좋았던 시기를 다 놓친 겁니다.” 사석에서 한 이 말을 나는 공개적으로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전재경 박사가 문후보 대선조직을 시작하면서 처음 내놓은 문건은 지금도 NGO창조한국 카페에 가면 볼 수 있다 .(NGO창조한국 카페는 2008년 2월 8월 무슨 이유에서 인지 기존 게시판 자료를 다 없애 버리고 카페<cafe.naver.com/dream1219> 를 새로 개설을 했다. 자료를 없애버릴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카페에서도 1번 목록에 ‘창조한국기본구상’이라는 문건이 올라와 있다. 2007.4.16 발행된 문건인데 문 후보 대선조직을 시동하는 문건이라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문건이다. 한번 보아줄 필요가 있다. 분명히 전재경 박사가 작성했을 텐데, 전재경 박사의 문건은 항상 특징이 있다.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은 특징이 있다. 상식적인 사람이 보면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며칠 전까지 김상수 감독이 만든 홈페이지(www.bravokorea.com)도 볼 수 있었는데 오늘(2008.2.11) 들어가보니 없어져 버렸다. 대선평가를 위한 웹상 기초자료들이 자꾸 사라져서 안타깝다.) 내가 전재경 박사 문건 이야기 하는 것은 ‘분권형 포도송이 이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족보를 알고 싶어서였다. 전재경 박사가 대표로 언론에 소개되고 있는 생명회의(www.lifelove.or.kr) 홈페이지도 살펴보았다. 여기서 재미난 조직이론을 보았다. 조직운용의 원칙에 저비용구조의 추구 조항이 나왔다. ‘저비용구조의 추구-비용이 들지 아니하는 사업을 우선한다. 시민운동 자체를 위한 상근 사무요원을 두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다. 역시 조직관이 독특하다. 시민단체활동을 해보면 알지만 관건은 상근자를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업의 규모와 활동의 정도가 판가름 난다. 이런 일반 시민운동 상식과 거꾸로 가고 있다. 상근활동가를 두지 않으니 활동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생명회의 홈페이지는 거의 죽은 홈페이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분권형 포도송이 이론’은 전재경 박사의 독특한 조직관이 만들어낸 이론임에 틀림없다. 생명회의에서 ‘저비용추구’라는 독특한 조직운용원리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지만, ‘분권형 포도송이 이론’은 대선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이론이란 데에 차이가 있다. 독특한 조직이론은 조용하고 귀족적인 시민운동에서나 시험할 수 있는 논리이지 대선판처럼 살벌한 정치판에서 시험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독창적인 게 항상 좋은 게 아니다. 독창적인 게 권위와 권력을 가지면 사람을 옥죄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2007년 창조한국당 창당과정은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첫댓글 마음이 무척 아프네요.. 오죽 답답했을까 생각도 듭니다. 모두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소통의 부재에 따른 의사결정구조와 집행구조의 난맥상은 많은 당원들과 문함대원들이 경험했던 사실이고 얼마나 급했으면 전국의 대부분지역조직이 문함대 동지들이 커버를 했겠습니까? 이글에 대한 전재경 최고위원의 답글이 반드시 올라와야 할 것입니다. 소통의 부재는 엄청난 비효율과 조직을 망가뜨리는 제1의 단초입니다. 중앙조직에 참가하지 않아 정확한 사정을 파악할 수 없으나 이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전개되어 현재의 당이 처한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처방전이 강구되어야 미래의 좌표를 정확하게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재경 전 최고위원의 답글을 다시 한번 촉구합니다.
또한 홍기원 전 국장님께도 책임을 물을 사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명서 말미에 협박성 글을 사족처럼 달아 당에 위해를 가햇던 점은 위 글의 전말이 어떻게 진행되었던 차치하고 정상적인 대처는 아니었다라는 것이 많은 동지들의 생각이고 보면 이에 대한 책임 역시 무겁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도 창조당 내의 많은 문제점(소통부재, 의사결정 구조, 집행구조 등의 난맥상)이 한 두사람의 독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이고 실명으로 전재경 님을 거론한 적도 있습니다.또한 그 원인으로 우리 가치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 내지 오만과 지나친 폐쇠성에 대한 우려를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도 우리당의 전략적
지향을 개방과 소통이라고주장하면서 많은 인재의 영입을 포용력 있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리더쉽만이 우리 창조당의 미래를 보장해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맡고 있는 문대표님께도 더 넓고 높은 시야의 확보와 천하를 끌어 안을 수 있는 자신감을 다시 한번 가져주시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더불어 당원 동지분들께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모이는 집안은 흥하지만 그렇지 않은 집안은 절대로 흥할 기회조차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하시고 "꼴보기 싫은놈은 빨리 떠나버리라" "저런놈은 짤라 버려야 되"하는 식의 막말은 삼가 했으면 합니다. 너무 쉽게 뜨거워 지고 너무 쉽게 흥분하는 그리고
너무 쉽게 식어 버리는 분위기를 일신해야 할 것입니다. 평 당원 촌부의 바램입니다.
제가 이글을 펌해서 올린 이유는 이분의 주장이 올고 그르고를 떠나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상황이 발생하면 찬찬히 그 문제를 살펴보고 해결하려는 방법을 찾아야지 일단은 저지르고 비난하고 마치 나만이 문국현의 가치를 신봉하는것 처럼 나만이 정의 인냥 부글댄 적이 없었는지 돌이켜 보기 위해서 입니다.
하하 우리 문함대는 정의의 사도 수호천사가 너무 넘쳐납니다.
본인 소개를 보니 홍기원 국장님은 풀뿌리 시민운동가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소통의 부재```` 참으로 뼈아픈 지적입니다. 네티즌들의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열기가 외연 확대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가 보이는군요. (개인적으로 환경운동가 그룹을 잘은 모르지만 일부 만나본 인사들이 대체로 이념성이 약하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창조당 형성과정의 문제제기는 문함대 정관안 확정에도 참고하여야겠습니다.
가슴이 아프네요...
솔직한 글이라고 느껴지지만, 반대편 말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대선 내부 문제 많았음을 잘 알고 있지만 어느 한쪽만의 문제는 아니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기준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제 반대편인 전재경 전 최고위님의 답글을 기다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확전이 되지 않을까요?
퍼즐맞추기님..확전이 무서워서 피하면 안되죠..코 앞에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열심히 했던 인사들이 성명서를 내고 탈당하는 사태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노력이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 이후를 도모하고 준비할 수 있는 거죠..
속상합니다
힘내십시오
대선기간에 당의 누군가에게 '당에 인사검증은 누가 어떤 식으로 하는가' 고 물었더니 들려온 대답이 '그런 거 없죠' 였습니다. 뭐 그 외에도 답답한 게 많았었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군요. 당에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처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지지자들이 받은 아픔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대선 기간에 활동을 했지만 홍기원님은 너무 편향적으로 문제를 보고 계시는군요. 500여명이 활동했던 선대본 에서 왜 자신을 비롯한 역할에 대한 평가는 전무한 채 모든 원인이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인신공격성에 가까운 평가가 매우 아쉽네요.. 결과적으로 문대표님이 그런 체제를 방조했다는 말씀인데.. 대선 50여일이 지나고 총선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이런 평가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당원으로서 묻고 싶습니다.
총선을 코앞에 두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죠. 상처를 무시하고 전쟁을 치르려 하다가는 싸워보지도 못한 채, 결국 곪아터진 상처 때문에 주저앉게 됩니다.
자유토론방으로 옮겼습니다.. 문향들의 생산적인 논의 기대합니다.
반대글을 읽을수 있는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문함대는 결코 무너지지않습니다.쓴 비판이지만 인정할것은 인정하고 이제 남아있는 또다른 논란의 핵인 전박사쪽에서 해명과 책임이 따라야합니다.대선자금소동,소통의 문제..이건 암만생각해도 너무많은 피해와 분란을 만들었습니다..정말 책임있는 문후보참모라면 용퇴하는것이 맞다고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