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르 초상사진. 이런 사진이 가능했던 것은 철저하게 분업화된 산업 시스템 덕분이었다.
실제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 건 대부분 나다르가 아닌 발터 담리라는 벨기에 사진가였다.
반전의 예술사 28 _펠릭스 나다르
초상사진의 일인자, 포토샵의 원조
“프랑스 정신이 가진 신성한 요소를 황폐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1859년 다게르가 개최한 사진 살롱 전시회에 대해 보들레르는 이처럼 혹평으로 일관했다. 프랑스 의회가 사진의 역사상 첫 발명을 선포하고 그 특허권을 인정한 것이 1839년 일이니, 이 살롱전은 사진이라는 갓 태어난 문명의 기술이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첫 도약을 하던 즈음에 열린 것이었다.
게다가 살롱전을 연 다게르는 바로 그 사진에 대한 특허권을 가진, 의회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은 사진을 발명한 장본인이었다(그가 최초 발명자였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이런 보들레르의 혹평에 아마도 다게르는 적잖이 마음 상했을 것이다. 사진을 발명하기 전 그는 오페라 무대 배 경을 그리는, 그래도 명실상부한 전직 화가였으며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
초창기 사진을 폄하하는 태도는 비단 보들레르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그림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사진의 정밀한 묘사에 혹하며 신기해 하면서도 이 기구를 단지 상업주의에 의해 탄생한 하찮은 오락물로 생각할 뿐 절대로 예술을 위한 도구로는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하지만 이런 지식인들의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를 무마시키는 획기적인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펠릭스 나다르였다.
파리에 오픈했던 ‘나다르 사진관'.
단순히 사진 촬영만을 위한 아틀리에의 기능을 넘어 문화예술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회합의 장소였다.
인상파 작가들의 최초의 전시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의대 지망생에서 저널리스트, 사진작가로 전업
펠릭스 나다르( F?lix Nadar)의 본명은 가스파르 펠릭스 투르나숑(Gaspard-F?lix Tournachon)으로 나다르는 그가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사용하기 시작한 예명이다. 1820년 파리에서 태어났으니 1839년 발명된 사진기를 아무리 빨라야 스무 살에나 접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처음에는 의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장남인 그는 의사가 되기도 전에 집안의 경제를 떠맡을 처지에 놓였다.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문학 지망생이 되어 1842년 저널리스트로 데뷔, 평론이며 단편소설, 그리고 캐리커처를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나다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사실 나다르는 사진작가가 되기 전부터 꽤 인기 있는 언론인이었다. 유려하고 신랄한 필체의 소유자였던 그는 정치인과 지식인을 비롯한 각계 유명 인사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성격이며 인물 됨됨이를 직접 그린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와 함께 기고했다.
「우리 시대의 웃기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는 나다르의 명성은 물론 그의 기사를 실은 야당계 일간지나 잡지들의 판매 부수를 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그가 그린 캐리커처는 부르주아와 엘리트 사이에서 폭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다. 나다르는 이 그림들을 그리기 위해 그들의 과장되거나 기괴한 모든 특징들을 각각의 성격과 더불어 목록으로 작성할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는데, 나중에 이 캐리커처들만을 따로 모아 전시회를 할 참이었다.
하지만 1852년 나폴레옹 2세가 통치하는 제2제정이 시작되면서 나다르는 다시 한 번 생계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공화정 시절과 달리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던 이 시기에 모든 출판물은 검열을 통과해야 했고 정치인들의 풍자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억압은 예술계에 전화위복으로 다가왔다.
나다르로 하여금 언론인이라는 직함을 때려치우고 사진을 본업으로 삼겠다고 본격적으로 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2제정이 시작되기 3년 전인 1849년부터 나다르는 사진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신문마다 막 발명된 사진 이야기로 떠들썩한데다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사진관만 차리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친구들의 귓속말도 수시로 전해졌다.
그는 동생에게 사진관을 차려줬지만 동생은 미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감각이 부족했다.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자 그는 동생의 사진관을 도로 인수해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다. 이때 공부한 사진 기술이 캐리커처를 그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뒤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더 이상 풍자만화를 그리는 것이 어려워지자 아예 사진작가로 전업하게 된 것이다.
나다르 사진관의 단골 모델이었던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전혀 손색없는 퀄리티를 자랑한다.
고가 마케팅의 성공
나다르의 사진관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 비결로는 몇 가지 외적인 요인과 그보다 훨씬 중요한 몇 가지 내적인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우선 외적인 요인부터 보자면, 사진관만 차리면 떼돈을 번다는 친구들의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사진이 발명된 이후 가장 먼저 개척된 장르는 단연 초상사진이었으며, 이는 사진의 빠른 보편화에 크게 공헌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의 몰락과 더불어 급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들은 과거 귀족들처럼 자신들의 신분을 과시하고자 초상화에 공을 들였다.
이런 가운데 초상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지만 공급은 이에 현저하게 미치지 못했다. 결국 뒤늦게 발명된 사진은 초상화가를 대신하여 공급을 담당하는 매체로 자리 잡았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대기표를 받고 기다릴 정도로 사진관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게다가 초상사진은 초상화보다 훨씬 저렴했다.
유아 사망률이 증가하고 전쟁이 빈번하던 우울한 시대에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이들과 전쟁터로 떠나는 가족, 친지, 친구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이런 소박한 사연이 없더라도 일반 평민들은 값비싼 초상화 대신 사진을 집에 걸어두고는 귀족 흉내를 내며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때 아닌 성황으로 인해 심지어 화가에서 초상 사진작가로 전업하여 성공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목격되었다.
이러한 환경이 외적 기반이 되어주었다면, 나다르 개인의 뛰어난 관찰력과 불굴의 모험심, 그리고 그 까다로운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격의 없는 친구로 사귈 수 있는 타고난 친화력은 나다르의 성공 신화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캐리커처를 그릴 때 발휘했던 탁월한 감각으로 사람들의 개성을 한껏 살려 사진을 제작했다. 심심한 구도의 증명사진이나 초상화를 모방하는 대신 피사체들에게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요구했다. 물론 이런 포즈와 표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피사체에게 가장 난해한 미션이다. 그런 자연스러움은 아무 앞에서나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다르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저널리스트 시절부터 쌓아둔 인맥을 최대한 동원했다. 사진관을 유명인들을 위한 예술 살롱으로 개방했다. 매일같이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그의 사진관에 드나들며 회합을 가졌다.
마네와 모네를 위시한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가 나다르의 사진관에서 개최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인상주의 화가를 제외하고도 들라크루아, 베를리오즈, 도데, 드뷔시, 로시니, 바그너, 리스트, 위고 등과 같은 예술 도시 파리에 거점을 둔 순수 예술가와 문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사라 베른하르트와 같은 당대를 풍미한 명배우, 그리고 파브르와 같은 유명한 곤충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건축가 샤를라 가르니에. 오늘날 파리 오페라극장을 설계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들은 나다르가 찍어준 자신의 사진에 열광했다. 그것은 다른 사진관에서 생각 없이 사진기를 들이대고 찍는, 오직 기록의 가치만을 내세우는 천편일률적인 저질 사진과는 달리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런 셀레브리티들의 사진으로 한 차례 거창하게 전시회를 개최한 뒤 나다르는 자신만의 ‘나다르 표’ 사진 브랜드를 만들어 다른 사진관보다 고가로 책정했다. 가격이 훨씬 비쌌음에도 나다르의 사진관은 늘 고급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가 찍은 유명 인사들의 사진은 나름대로 예술성을 인정받아 예술작품처럼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작가 샤를 보들레르. 사진 기술을 혐오했으나 나다르가 가장 선호했던 피사체 중 하나였다.
나다르의 사진관에서 장사진을 치른 단골손님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보들레르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두에 언급했듯 그는 “게으르거나 무능한 화가들의 피난처에 불과한, 감히 예술이 되려는 시건방진 기술”이라는 논조로 사진을 가장 처참하게 비판했던 인물 중 하나다. 한데 이처럼 냉소적이었던 그가 1865년 크리스마스 며칠 전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의 사진을 가지고 싶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간다면 꼭 제가 같이 따라 나서겠습니다. 어머니는 사진에 대해 잘 모르시니까요.” 이와 같은 보들레르의 급격한 반전에는 나다르의 공이 컸다. 사실 보들레르가 사진을 싫어했던 이유는 예술성의 여부가 아닌 다른 데 있었다. 이보다 훨씬 전에 그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사진작가들이란 얼굴의 결점들이며 주름살, 흠집 같은 모든 사소한 것들이 아주 잘 나타나 있고 또 유난히 두드려져 보이는 사진일수록 잘 된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 모습이 가혹할수록 사진작가들은 흡족해 하지요.”
이런 사진에 대한 보들레르의 반감은 나다르가 찍어준 사진으로 완전히 불식되었다. 나다르는 보들레르를 위해서 그가 원하는 포즈를 늘 우선으로 했으며, 얼굴의 크기를 작게 잡아 피부의 결점을 최소한으로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잡티들은 현상 과정에서 희미하게 지워주었다.
이런 나다르의 작업은 비단 보들레르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고, 보들레르는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인물들의 매력을 나다르의 사진에서 발견했다. 나다르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보들레르를 촬영했고, 오늘날 전해지는 열두 장의 보들레르 사진중 다섯 장이 나다르에 의해 촬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덕분에 나다르는 보들레르의 끊임없는 ‘예술의 산업화’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껴갈 수 있을뿐더러 오히려 당당히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촬영에서부터 인화, 현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이 나다르 혼자가 아닌 그의 고용인들과의 분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보들레르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철저한 산업화 시스템을 눈감아준 그의 이율배반적인 아량이 크게 작용했다).
회화에 비해 더욱 극명한 사실성과 저렴한 생산 비용을 장점으로 앞세우며 세상에 등장했던 사진이, 사실에 대한 왜곡(?)과 차별화된 고가 정책을 통해 기술에서 예술로 인정받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글 :: 노승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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