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를 고치시다
마 9:1-8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9:1-8 / [중풍병자를 고치시다;막2:1-12,눅5:17-26]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고향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2) 사람들이 곧 중풍환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눕힌 채로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 아들아! 내가 네 죄를 용서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3)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말하다니, 이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4)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고 `왜 너희는 그렇게 미련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를 용서한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중 어느 말이 하기가 더 쉽겠느냐? 6) 인자는 세상에서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 내가 이 사람을 낫게 하여 너희에게 그 증거를 보이겠다' 하며 중풍병자에게 돌아서서 명령하셨다.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네 병이 나았다' 7) 그러자 그 사람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8) 군중은 눈 앞에서 일어난 이 광경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실뿐만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2) 예수님은 여러 곳을 다니신 후, 평소 머무셨던 본 동네인 가버나움으로 오셨고 그곳에서도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미 예수님은 많은 병자와 귀신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일이 특이한 점은,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신 점입니다. 죄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뿌리 깊은 질병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시러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선포하시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감격으로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반발하는 서기관들(3-6)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모두 아십니다. 어떤 서기관들은 한 영혼이 죄사함을 얻은 사실을 기뻐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 예수님을 대적하는 데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악한 생각을 폭로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대리자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십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바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치료자 예수(7-8) 모든 질병과 고난이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본 단락의 중풍병은 병자의 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영혼의 질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2). 그리고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입증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같은 사건이지만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 앞에서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믿음과 마음의 밭을 가져야 합니다.
적용: 육체와 영혼의 질병에 사로잡혀 희망 없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혼과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시다.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하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노는 한 꼬마를 만났습니다.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라고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습니다. 다시 “왜 무섭지 않니?”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 41:10)
< 설 교 >
예수님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 9장 / 김명혁 목사
마태는 주님의 제자가 된 후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을 기술하는 복음서의 저자가 되었다. 여기 9장에서는 8장에 이어 예수님이 죄인들과 병자들에게 오시고 그들은 주님에게 나아와 사죄와 치유의 은혜를 받은 사역에 대해서 기술했다.
1.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1-17)
죄인들과 병자들이 사는 길은 예수님이 나에게로 ‘오시는’ 길이고 그리고 내가 예수님에게 ‘나오는’ 길인데 스스로 나오든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나오게 된다. 예수님이 중풍병자가 사는 가버나움 동네로 ‘오셨고’ 중풍병자는 네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에게 ‘나왔다’. 네 사람의 관심과 사랑과 믿음과 전도와 도움에 의해서 주님 앞에 나왔다. 자기 자신도 완강하게 거절하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며 침상에 메워서 왔을 것이다. 결국 그는 죄 사함과 병 고침을 받고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이 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여전히 유대 종교인 서기관들이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는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예수님은 또한 세리 마태에게 ‘오셔서’ 자기를 좇으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는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 들어가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 마태의 생애와 눈과 손이 바뀌어지는 시간들이었다. 사람들과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어졌다. 이 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여전히 유대 종교인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기는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다시 한번 분명하게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금식과 같은 종교의식보다는 예수님을 만나 죄 사함과 치유의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 새 시대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여신 것이었다.
2.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와서” (18-34)
한 직원이 예수님에게 ‘와서’ 절하고 방장 죽게 된 자기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다. 마치 로마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와 자기의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일어나 그의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중에 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와서’ 그의 옷 가를 ‘만졌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부정한(레15:25) 여자였다. 예수님은 그를 ‘돌이켜 보셨다’. 죄인 한 사람의 신음 소리도 외면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갸륵한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셨고 구원해 주셨다. 그리고 그 직원의 집으로 가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소경들이 있는 곳을 향해 가셨다. 소경들이 ‘따라 오며’ ‘나아오며’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님이 자기들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저희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눈을 ‘만지시며’ 그들의 눈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에게 ‘데려온’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다. 이 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여전히 유대 종교인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모독하기까지 했다.
3.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35-38)
예수님의 사역은 죄인들과 병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 ‘두루 다니시는’ 사역이었고,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는’ 사역이었으며,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불쌍히) 여기시는’ 사역이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본 받아야 할 사역의 모습이다.
인생을 고칠 힘이 없을 때
마 9:1-2 / 김남준 목사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종종 우리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환경을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결심과 의지, 노력으로 고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한계 선상에서 우리를 불러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쳐주시려고 하는 분이십니다.
II. 침상에 떠메어 온 중풍병자
오늘 성경에 보면 침상에 떠 메여 온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의 중풍병은 가벼운 증상이 아니라 매우 심한 중풍병이고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기동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동할 수도 없고, 어쩌면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 내야 되는 아주 고통스런 인생의 삶을 지속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오늘 읽은 본문과 꼭 같은 병행 기사가 나타나는데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떠 메여 병 고치는 예수님께 데려간 걸로 나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입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를 고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이 사람은 떠 메여져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의 중풍병이 들렸기 때문에 마음의 생각과 뜻은 있었지만 사지백체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중풍병보다도 더 비참한 것은 영혼의 중풍병입니다. 마음으로는 이런 저런 선한 일들을 계획하고 뜻을 갖지만 그 뜻대로 우리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경배가 아니면 여러분들의 껍질뿐인 행실은 하나님 앞에 심히 역겨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제사는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진정한 경배이고, 마음과 그의 삶이 일치가 되는 온전한 재물을 주님은 받으십니다. 마음의 중풍병은 육체의 중풍병보다 훨씬 더 근원적으로 여러분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도 고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인정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한계를 발견하고 우연적인 문제에서 영혼 깊이 더듬어 내려가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필연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힘으로서가 아니면 고쳐질 수 없고 우리의 한계를 초월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III.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A. 질병의 근원을 보이심
이 사람이 드디어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이 중풍병자의 중차대한 문제를 치료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질병의 근원을 보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명백히 이 사람의 중풍병 상태는 죄 때문에 생긴 질병이었습니다.
B.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우리들이 유의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 중풍병의 문제를 치료하기에 앞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 때문에 생겨난 질병이라는 것은 말씀하시지만 이 질병이 죄에 대한 신적인 복수심을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 모든 우주의 주인이요, 중심이라고 생각했었을 사람들을 주님은 실패하게 하심으로 자기의 약함을 보게 하시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만이 존귀하신 분임을 깨닫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이 병들었고, 그가 가련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에게 죄를 지적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실 때 비로소 자신의 이 병든 육신의 상태의 근원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복음에 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든 몸으로 병든 영혼을 알고 이 질병의 근원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질병의 겉모습이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1. “안심하라”
주님께서 그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죄 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먼서 이 사람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라고 하는 이 호칭은 정말 어린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호칭인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소자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중풍병자를 향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아마도 이 사람의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랑스럽게 보시고 이 사람을 소자라고 불러주셨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그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고,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에 그때에 그는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음에 있어서 어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이성의 위험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이 사람에게 “소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마음에 쉼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임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쉼이 없는 곳에서 쉼을 찾고 안정이 없는 곳에서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숨을 불어 넣어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거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자리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자신의 영혼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온 이 사람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안정을 원하십니까? 요동치는 마음으로는 천국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자를 안심시키신 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달아 내린 이 모든 사람들의 믿음을 함께 보시고 사죄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중풍병자가 비록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는 육신을 사용해서는 아무것도 이바지할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던 병자였고, 그래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에 신앙으로 나아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중풍병의 문제를 표피적인 부분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믿음으로 자기 앞에 나아오는 이 비참한 중풍병자를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죄사할 권세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중풍병을 통해서 오히려 그것이 징검다리가 되어서 자기의 인생에 찾아오시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한 의존의 대상이 예수뿐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IV. 인생을 고칠 힘이 없을 때
우리는 종종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고칠 아무런 능력이 없을 때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가장 곤고해집니다. 사랑하던 사람들조차도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낯선 사람들로 느껴집니다.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외톨박이가 됩니다. 이게 자기 사랑의 결말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로 묶어 사랑으로 유통하게 만들어 나를 지체들 안에서 발견하고 지체들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우리와 지체들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누리도록 만들어 줍니다.
V. 결 론
주님이 여러분들의 불순종과 죄악에 대해서 복수하신다기 보다는 이 중풍병자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침상에 떠 메여서라도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잠시 홀로 두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거짓과 위선으로 주님을 찾지 말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마디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인생을 고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됩니까?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을 그 올무에서 풀어주십니다. 뺨에 흐르는 눈물들을 씻어주시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지혜가 모자라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살도록 당신을 의존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을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자유보다 소중한 것
마 9:1-8 / 홍문수 목사(신반포교회)
‘인생은 고해(苦海)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갖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혹자는 가난이 제일 큰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 설움 저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다는 말도 있죠. 혹자는 질병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합니다. 연전에 천국 가신 권사님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대학 교수를 지내시고 명문대 학장까지 역임하신 분입니다. 평생 유복하게 지내셨고 노년에도 늘 건강하셨습니다. 그런데 덜컥 병환으로 입원하신 겁니다. 심방을 갔더니 그러시더군요. “목사님! 요즘 누가 제일 부러운 줄 아세요? 병실에 들어와 대걸레를 밀면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예요. 건강해서 저렇게 일하니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러실까 싶어 마음이 짠했습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질병의 고통이 제일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가리켜 생로병사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인생의 온갖 문제들보다, 질병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음을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게 무슨 문제일까요? 죄 문제입니다. 왜 그런가요? 죄는 여타의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을 사망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1] 인생의 근본 문제 : 죄와 사망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이 널리널리 퍼졌습니다. 한 중풍병자가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전신이 마비되어 오랜 세월 누워 있는 그에게는 정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혼자 갈 수 없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간청합니다. 다행히 몇 사람이 나서서 그를 예수님께 데려다 줍니다. 2절(상).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 ”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2절(하). “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자에게는 지금 겪고 있는 질병이 제일 크고 시급한 문제인데, 예수님은 위로하거나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죄를 사해 주시겠다고 엉뚱한 말씀만 하십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서기관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필사하는 학자들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에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이목이 예수님에게 집중되면서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감시하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주시하고 있었는데, 호재를 만난 겁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반문합니다. ‘아니,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데 자기가 죄를 사한다고?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거야? 아니면 메시야라도 된다는 거야?’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라 그들의 속마음을 간파하시고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5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어느 쪽이 더 쉽겠습니까? 둘 다 어렵죠. 더 어려운 것은 어느 쪽일까요? 일어나 걸으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죄 사함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니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죠. 그러나 일어나 걸으라는 것은 당장 결판이 납니다. 그런 점에서 훨씬 더 어려운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점을 감안하시고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상).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 ” 병을 당장에 고쳐주심으로 죄를 사하는 권세도 있음을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이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하). “6 ...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말도 안 되죠. 오랜 세월 누워만 있던 사람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게다가 무거운 침상을 들고 가라니 말이 됩니까? 먼저 병을 고쳐주고 말해야 될 텐데 다짜고짜 그렇게 말씀하시니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병자가 자기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남을 느낍니다. ‘어, 이게 뭐야? 몸에 힘이 생기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몸을 일으켜 봅니다. 그랬더니 정말 일어나지는 겁니다. 7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그는 일어났고,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난리가 났겠죠.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마 서기관들이 입이 딱 벌어지고 기가 막혔을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며 죄를 사하는 권세자임을 간단히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죄를 사해 주심을 선포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죄가 병의 원인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질병의 문제보다 죄의 문제가 훨씬 심각한 근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죄가 병의 원인이라는 말에 대해 부연 설명을 드립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병에 걸렸을 때 무조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발병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직접적으로 나의 어떤 죄 때문에 질병이 생기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욥이 극한 시련을 당하고 몸에 병까지 얻습니다. 그는 동방의 의인인데도 시련을 당하고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경우는 신앙의 연단의 차원에서 발병한 겁니다. 그 외에 자연스런 현상으로 발병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과로했다든지 병균에 감염이 됐다든지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발병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너무 죄책감으로 괴로워해도 안 됩니다. 혹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해도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어떤 케이스였을까요? 그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됐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렇지 않고 그의 몸에 생리적 균형이 깨지면서 발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질병이 직접적으로 본인의 특정한 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지라도, 인류에게 질병이 생긴 것은 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함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에게 저주가 임했습니다. 그 가운데 질병이 생겼고 사망이 닥쳐온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그 과정이 기록되어 있죠.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인간의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질병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죄가 관영함에 따라 이상한 질병들이 계속 생깁니다. 이따금 그런 보도 보잖아요. 신종 슈퍼 박테리아에 감염되어서 아무리 강한 항생제를 투여해도 듣지 않아 결국은 사망했다는 등.
그러므로 개별적으로는 질병이나 인간의 모든 문제가 죄의 결과가 아닐지 모르지만, 원론적으로 보면 엄연히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겉으로 보이는 문제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병을 고쳐야 되죠.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다시 병들 수도 있고, 결국은 늙고 죽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겁니다. 사실 병을 고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의사나 약사가 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무당이 푸닥거리를 해도(좋은 것은 아니지만)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와 사망의 문제 앞에는 그 누구도 속수무책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이따금 임종을 목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마지막 투병하는 환자를 보면 침상 옆에 모니터에 혈압, 맥박, 호흡 등이 그래프와 숫자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그래프가 직선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의사가 최종적으로 확인한 후 흰 천을 씌우고 손을 놓아버립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장의사가 나섭니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장례나 치러주지 그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망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질병 문제를 해결하는 치유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그 어떤 문제들이 아무리 심각하고 시급하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과 영생입니다.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인이고, 그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롬3:10 “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의 수준에 미달이 됩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문제들이 근본을 따져 들어가면 죄의 결과라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망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포괄적인 내용입니다. 세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육신의 사망, 그 이전에 영적인 사망,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사망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의 개념은 생물학적인 게 아닙니다. 기본 개념이 ‘분리’입니다. 육신의 사망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심판받고 내세로 들어갑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내세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 가운데 사는 게 영원한 사망입니다.
영적인 사망은 육체가 멀쩡히 살아있어도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곤고하고 허무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은 다 이렇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그것은 육신적으로 안락한 것이지 참 행복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별의 별 것을 다 줘도 결국은 엄마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야 진짜 행복합니다.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 품에 안겨야 진짜 행복합니다.
육신의 사망이나 영원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인 사망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그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일단 영생을 얻으면 이 세상 살 동안에도 행복하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해도 그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옮겨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죄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죠. 그래야 다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 사망의 문제까지 해결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근본 문제를 제쳐놓고 다른 부수적인 문제들만 건드리니까 그때뿐입니다.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마치 위암에 걸렸는데 소화제나 먹고, 속이 쓰리다고 위장약 한 봉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우리 인생의 각가지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본말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 부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다가 가장 중요한 근본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놓치면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예수님을 심부름센터나 해결사의 도움이나 혹은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복음서를 잘 보면, 예수님이 이따금 이상항 행동을 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어떻게 하시죠? 산으로 피신합니다. 이상합니다. 군중들이 환호하고 추앙하는데 피해 버립니다. 또 병자를 고쳐주신 후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건 소문이 나면 좋으련만. 혹시라도 본말이 전도될까봐 그러신 겁니다. 인간은 무지해서 당장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달려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여기기보다 병을 고쳐주는 의사로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경제인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큰 비극입니다.
가장 중요한 구원 문제를 제쳐놓고 눈앞의 당면 문제에 매달려 있는 것은 마치 이런 겁니다. 시한폭탄이 재깍재깍 폭발의 순간의 향해 가고 있는데 엉뚱하게 다른 일만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한폭탄을 제거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죄와 사망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 질병이나 다른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역시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유일한 해결책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그러면 인생의 근본 문제요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나요?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왜 그런가요? 히9:22 “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생명을 상징하고 피흘림은 사망입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죄값인 사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죄값을 치르면 너무 비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겁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대속입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은 속죄를 의미합니다.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망에서 완전히 구원받고 생명을 얻은 겁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처럼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으면 영혼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인생만사와 세상만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인생 만사의 해법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믿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절대 믿음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면 인생 만사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죠.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세주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
한번은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있는 차 뒤의 유리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해답이다!”(Jesus is the Answer!) 너무 좋은 말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가지가지입니다. 그러나 해답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나아가 순종하고 기도하면 인생 만사와 세상 만사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잠3:6~10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마음에 영생의 기쁨을 주십니다. 마음이 편해지니까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립니다. 혹시 고난이 와도 넉넉히 이겨냅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하니까 병에 잘 걸리지 않고, 혹시 병에 걸려도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치유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고질병’이 ‘고칠 병’이 됩니다. 설사 죽는다 해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은 마치 손에 마스터키를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스터키는 건물의 모든 방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입니다. 인생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제이 씨 페니」백화점을 아시나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판매하는 백화점으로 유명합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 주요 도시에 가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창업주가 누구죠? J. C. Penney입니다. 그는 한 때 파산해서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결핵에 걸려 요양소에 입원하게 됩니다. 당장 오늘 내일 죽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찬송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가 나는 데로 가 보니까 환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마침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 ” 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가운데 감동이 밀려왔고 살아계신 구세주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결핵도 완치됩니다. 그는 건강만 회복한 게 아니라 용기도 얻었습니다. 멋지게 재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바로「제이 씨 페니」백화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 살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다른 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예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죄 사함 받고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고 이미 영생을 얻었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확신을 갖고 담대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질병은 치유해 주시고, 꼬인 것은 풀어주시고, 답답한 것은 시원케 해 주실 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과 이웃에게 이 복음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 병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나요? 다른 사람들이 데려다 줬어요. 우리도 처음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누군가 데려다 줬습니다. 다가오는「새생명축제」는 가족과 이웃을 예수님께 데려다 주는 기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인생의 마스터키를 선물하는 겁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더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께 데려다 줄 그들도 인생의 해답이신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 분과 함께
마 9:1-8 / 박주락 목사
마태복음 9장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9-13절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14-17절은 금식에 대한 교훈, 18-26절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일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치신 일, 27-34절은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신 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35절은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세 가지였음을 밝혀줍니다. 그것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신 것입니다.
1. 두루다니사
4:23은 "갈릴리에 두루 다니셨다"고 했고,9:35은 "모든 성과 촌에 두루다니사"라고 했습니다. 두 구절을 합하면 갈릴리 지방 곳곳을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욥기 2:2을 보면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사탄의 대답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였습니다.
예수님도 여기저기 두루 다니셨고, 사탄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차이점은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기 위해서 였고, 사탄은 먹이 사냥을 위해서 였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닙니다. 베드로전서 5:8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적을 위하여, 사탄은 악한 목적을 위하여 두루 다닌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합시다. 열심히 돌아다닙시다. 가치창출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루 다닙시다.
2. 가르치시며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르치시는 사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열 두 제자를 가르치셨고
70인 제자를 양육하셨습니다. 그리고 기회 있는대로 산에서 들에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는 그 전승을 따라 들어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신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를 보면 1884년 인천항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 역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1887년 봄 아펜젤러 선교사는 당시 배재학당 학생 한사람과 관리인과 함께 자기 집에서 비밀리에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888년에는 이화학당에서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해 12명의 처녀와3명의 부인이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교회의 교육 선교는 도시마다 기독교학교를 세웠습니다. 목포 정명학교, 광주 수피아여고, 순천 매산학교,전주 신흥, 기전학교, 대구 계명, 신명학교, 대전 한남대학, 평양 숭실, 서울 연세, 이화 등사립 학교의 90퍼센트가 기독교학교들입니다.
기독교학교는 교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기 위해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독교학교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일반대학 뒤따라가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행정당국은 기독교학교가 정체성을 버리고 세속학교가 되도록 종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칠 수 없고,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학교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은 인성교육과 인격교육의 공황기를 겪고 있습리다. 학교는 출석하고 성적만 매길 뿐 사람 되라, 바로 살아라, 진실한사람이 되라는 말을 못합니다. 실력은 학원에서 쌓고, 정보는 컴퓨터에서 얻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책을 읽어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한 시간 안에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보에는 밝지만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감동받는 일이 없습니다. 인성이 메마르고 인격이 거칠어졌습니다. 존경받던 스승상은 돈받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 구실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똑똑하고 잘나 보이는데 인간미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기계와 대화하고 기계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교육방법은 얼굴과 얼굴 대하기, 천국 복음 가르치기였습니다.
사상 교육을 참교육이라 합니다만 예수님의 참교육은 영혼 살리고, 구원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육은 프로그램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설보다, 프로그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육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고,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두루다니사 가르치시는 주님과 함께하고 닮아가고 제자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전파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사람들은 70년 동안 전세계 인류에게 공산주의이론을 전파하는 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2천년 동안 복음을 전한 사람보다 70년 동안 공산주의 이론을 배우고 전도받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의 허구가 종주국 러시아에서 실험결과 드러났고 공산주의 이론의 토대 위에 세웠던 러시아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전하고 예수를 전하는 기독교는 세계 어느 나라에 들어가든 사멸하거나 무너진 경우가 없습니다. 박해 때문에 지하로 숨어 들어가긴 했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 로마가 300년 동안 황제마다 경쟁하듯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36년 동안 한국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교회 종까지 떼 다가 무기로 만들었고, 제암리교회는 불을 질렀고, 성경 찬송은 먹칠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더 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교회를 없애고 교회 지도자들을 숙청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문화혁명 때 빼앗겼던 교회들을 요즘에는 다시 찾고 교회를 신축하는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 역시 반세기 동안 교회를 없애고 지도자들을 숙청했습니다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진리, 생명, 영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하지 않는 교회는 스스로 문을 닫고 맙니다. 우리보다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유럽 교회들은 교만에 빠져 전하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 결과 문 닫은 교회들이 많습니다. 문은 교회만 닫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도 문을 닫을 수 있고, 기업도 회사도 문을 닫을 수 있으며, 학교도 병원도 가게도 문을 닫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7을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고 했고, 3:8을 보면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열면 열리고 닫으면 닫힙니다. 주님이 닫는데 내 힘으로 열 수 없습니다. 주님이 활짝 열어 주시는데 그 누구도 가로막거나닫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 예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땅 끝까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 고치시며
마태복음 9장을 살펴보면 중풍병자, 혈루증 환자, 맹인, 농아를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마태복음4:23을 보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고, 24절을 보면 "앎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9:35을 보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최첨단과학시대가 됐습니다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 거기다 귀신들린 것까지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의술은 없습니다. 최근 줄기세포를 통해 암을 고치는 의술이 개발돼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미 동물실험을 거쳤고 인체실험을 거치는 데는4-5년이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불치병이 또 생길 것입니다. 항생제의 개발로 인해 수많은 병을 고쳤습니다만 항생제로 고치지 못하는 병이 더 많아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와 오늘의 차이점이 있다면 의학과 의약이 발달해 웬만한 질병은 치료가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병원도, 의사도, 의약도 손을 못 대는 병이 많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때 그 능력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신다는 것을 성경은 선포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병을 고쳤고, 죄사함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고, 회복 되었고, 구원을 받았노라고. 문제는 예수를 진심으로 만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만나야 진실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세계적인 부자들이 그 부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고 했습니다. 미국투자은행 jp모건의 연구결과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세계 최고의 부자들 가운데 그 부와지위를 계속 유지한사람들은 5명당 1명 체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기껏 3대를 넘기지 못해 무너졌는데 그 이유는 과도한 소비생활, 변덕스런 주식시장, 과중한 세금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자로 꼽힌 400명 중 145명은 일찍 죽었고, 200명은 잘못된 투자로 부를 잃었고, 겨우50명 정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도, 건강도, 인기도, 명성도, 영광도, 권력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잘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미국의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 가운데 가장 건전한 인기와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은 지미 카터입니다. 세계 분쟁지역에 특사로 가는가 하면, 사랑의 집짓기운동 헤비타트운동에 앞장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통령 되기 전에도, 대통령 시절에도 주일학교 선생이었고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 예수를 만난 국가, 공동체는 행복하고 번영합니다. 그분과 함까라면 언제 어디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평생토록 동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
마태복음 9:1-12 / 정필도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인이 된 한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본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각 장애로 말미암아 평생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을지, 아마 이 사람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그 어떤 사람의 고통보다 더욱 컸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사람과 여러분의 입장을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도 이 사람보다 더 불행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노동부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장애인의 수가 이미 95년도에 일백일만 육천팔백이십육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전체 인구의 2-3 %에 해당됩니다. 이중에 선천성 장애는 3.4 %이고 후천성 장애가 88.1 %라고 합니다. 후천성 장애 중에서도 지체장애는 95.7%, 시각장애는 89.2%, 청각장애는 85.6%, 언어장애는 51.6%, 정신지체장애는 30.9%라고 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장애인구는 그 나라 전체인구의 약 10% 정도라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15%이고, 캐나다는 무려 23%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자동차 사고율이 세계 제1위입니다. 더구나 산업재해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숫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장애인구의 비율이 세계평균치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을 리가 없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족들 중에 장애자가 있어도 밖으로 잘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2-3% 정도로 통계가 적게 잡힌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선천성 장애자는 3.4%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다가 여러 가지 사고로 장애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잘못으로 장애가 된 경우는 1/5에 불과하고, 남의 잘못으로 장애자가 된 경우가 4/5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산업현장에서 또는 자동차나 비행기 사고로 인해 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행히 귀중한 목숨은 건졌으나 억울하게도 어느 날 장애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적어도 500만 명 이상의 장애자가 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로 장애자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예비 장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가 된 사람을 보며 좬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좭라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장애자를 보면 부모 때문인지 조상 때문인지 먼저 죄와 관련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문둥병이나 소경이나 앉은뱅이 등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을 보면 더욱 그리 생각하여 저주라고까지 여겼습니다. 장애자들은 자신의 죄가 많아서 이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다보니 정작 장애로 말미암아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불편함과 고통보다 이런 왜곡된 시각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사실 그런 경우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평소 부모의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여 임질이나 매독에 걸린 상태로 임신이 된 경우 그 부모로 인해 태아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신명기 5:7-10을 보면 좬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좭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가리켜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난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어 놓고 밤낮 그 우상에게 절하고 숭배하는 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죄를 범하면 그 죄값을 삼, 사대에 이르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은혜를 천대까지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난 이 사람을 가리켜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난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좬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좭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 사람은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죄 때문이요 저주받은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죽지 못해 살아왔으나 예수님께서 그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며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상상해 보건대 너무 기쁜 나머지 그만 함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죄가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를 따라 더 큰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 더 높이 들어쓰시기 위해 때때로 우리를 고난의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요셉을 생각해보세요!
요셉이 노예로 애굽에 팔려간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에 보내 총리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 그리고 크게 축복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도 자기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바벨론에 보내 교육시키시고 그를 높이시고 총리가 되게 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각장애인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람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큰 역사를 위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좋았을까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얼마든지 그 고난을 기쁨으로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예수 믿는 자매가 믿지 않는 총각과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상대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총각이 자기도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매는 신랑의 말을 믿고 안 믿는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신랑이 몇 번 교회에 나오더니 점점 교회와 멀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가 교회에 가는 것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기며 핍박했습니다.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교회에 나가겠다는 남편의 말에 속아서 시집을 왔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습니다. 아마 우리 주위에는 이런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여성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이 남편과 이 집안 식구들을 구원시키기 위해 자신을 선교사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가족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며 끝까지 인내하는 자는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실수가 있고 허물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시각장애인에게 믿음이 생긴 증거는?
1.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의 순종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순종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실로암 연못에 가서 자신의 눈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을 붙잡고 안수기도를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는 동안 병이 다 나았습니다(눅 17:14).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든지 안되든지 무조건 순종할 때 믿음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2.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좬예수라 하는 그 사람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좬선지자좭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좬그분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좬내가 믿나이다좭라고 말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점점 믿음이 확실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좋아지고 있는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으며, 얼마나 믿음의 말을 하고 있는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장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체 장애와 정신 장애와 영적 장애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장애는 영적장애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어도 예수는 안 믿겠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긴 들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를 못합니다. 영적으로 타락하여 인간 됨됨이가 삐뚤어져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삐딱하고 매사에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사람입니다.
1994년도 21세의 나이로 미스 아메리카에 당선된 [화이트 스톤]양은 청각장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대에서 비아 돌로로사(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라는 곡에 맞추어 발레를 했습니다. 전혀 음악을 듣지 못하는 그녀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때 많은 관중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가 미스 아메리카에 당선된 직후 기자가 물었습니다. “신체장애가 의지를 꺾지는 않았습니까?” 이에 그녀는 “최악의 장애인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신체 장애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도자가 된 [조니 에릭슨]이라는 미국 여성은 청소년 시절에 다이빙을 하다가 그만 실수로 전신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고를 당한 몇 년 동안은 자신의 삶을 원망불평하며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전신장애자입니다. 그러나 이 형편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입술에 상처가 나고 붓을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으나 반복하여 노력하다보니 입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완숙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길렉터라는 볼펜을 제조하는 유명한 회사에서 광고에 출연해달라는 교섭이 들어왔습니다. 조니는 광고 출연을 수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림 밑에 들어가는 사인만은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볼펜을 물고 그림 아래 쓴 글자는 “PTL" “Praise the Lord". 즉 주님을 찬양하라는 말의 약자였고 그후로 조니가 쓰는 모든 글과 그림에는 이 글씨가 붙어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님을 만나시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어떤 장애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믿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어떤 불행 앞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 불행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특별히 복을 받은 자녀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하시는 일을 위해 택함 받은 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믿음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분의 치유 – 병과 죄
마 9:1-13 / 조재호 목사
2002년은 국가적인 대사가 많았습니다. 월드컵과 아시안게임, 지자체 선거와 대통령선거.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승리자로 끝났습니다.
월드컵이 끝날 때 “이제 무슨 재미로 살지”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니 “이제 무슨 재미로 살지”하는 소리를 또 듣습니다.
이제 우리는 연초에 성경 통독하는 재미로 살려고 합니다. 많이 신청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어느 사이트에서 본 글입니다. 앤드류 보니라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3가지 신앙규칙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에게 말씀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둘째,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손이 먼저 갑니까 아니면 신문에 손이 먼저 갑니까? 한해를 시작하며 생명의 말씀, 축복의 말씀인 성경을 먼저 읽고 시작합시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고 성탄절은 예수님의 나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질병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질병, 곧 병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과 영혼의 질병, 곧 절망과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근본적인 질병의 문제를 치료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과 희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 이야기이지만 연결된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북쪽 가버나움이라는 동네, 어느 집에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친구 일행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와 그 후 세리 마태의 집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병과 죄를 치료하시는 영혼의 의사로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둘려 쌓여 있습니다. 들것에 실려온 중풍병자, 그를 데려온 적어도 4명의 친구, 서기관,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세리 마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변두리인물들, 바리새인들...
예수님은 그들에게 3가지 행동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3가지 중요한 진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의미 있는 행동과 그 행동에 따른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싣고 자기에게로 데려오는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을 때 나다나엘은 자신을 알아보는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여기 오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눈앞에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이미 보고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안에 거짓이 없는 충직함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그물 깁는 요한과 야고보를 보시고 그들 안에서 복음의 일군 됨을 보셨습니다. 사람 많은 가운데 뽕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던 삭개오도 보시고 따돌림받으며 외롭게 살아왔지만 회개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밤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 다 도망쳤지만, 숨어서 멀찍이 따르던 베드로도 보시고 두려움 속에서도 그래도 마지막까지 좇으려고 하는 그의 우직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백성들을 보시며 상처 난 채 유리하고 방황하는 가엾은 양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호렙산 기슭에서 모세에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신다는 것은 그 보이는 것의 이면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상을 들고 오는 그들을 보시고 그들 안에 있는 멋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침상을 무슨 나무로 만들었나? 저 사람들 출신이 어딘가?’ 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면의 의미와 뜻과 마음과 본질을 보시는 분으로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믿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총으로 죄 사함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사람들의 행동 속에서 믿음을 보셨을 뿐만 아니라 한 서기관의 속생각을 아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숨죽이고 있던 서기관이 이 일들을 보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감히 사람으로서 사람의 죄를 사해 준다고 말하다니.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이야. 이제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어. 더 이상 빠져나가기 힘들겠지“
겉으로 말하면 눈총을 받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몰매 맞을지 모를까봐 그는 속으로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속생각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어찌해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을 붙잡고 기도하십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 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나의 고민하는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서기관의 마음을 읽으시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 하노라” (6)
주님은 죄를 사 해주시는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하시고 판단하시는 권세도 갖고 계시고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위로하고 섬기시는 권세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권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이고 최고의 권세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앞에서 권세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와 실패로 연약해진 힘없는 사람 앞에서 권세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권세 있는 자 같이 행동하는 서기관의 잘못되고 악한 생각을 드러내시며 ‘내가 권세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권세의 주님 앞에 감추일 것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 오심은 세상의 불의와 어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속마음, 속생각을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향한 좋은 생각을 많이 품으시기 바랍니다. 이웃과 세상을 향한 좋은 생각을 많이 품으십시오. 주님이 알고 계시고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은 보시고 아셨을 뿐만 아니라 들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빈정거림을 들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너희 선생이라는 사람은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하고만 밥 먹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누구하고 어울리는지를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빈정거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3차 귀환 때 느헤미야 총독을 중심으로 성벽을 건축할 때, 방해꾼들이 와서 “그것도 성벽이라고 짓느냐?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고 빈정거렸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빈정거렸습니다. “젖비린내 난다. 내가 심심해서 온 줄 아느냐?”
욥의 친구들은 고통받고 있는 욥을 찾아와 위로하기는커녕 빈정거렸습니다. “죄가 없으면 어찌 그런 고난이 오겠느냐? 잘 생각해 봐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빈정거렸습니다. “저것 봐라 대낮에 술에 취했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왼쪽 강도가 빈정거렸습니다. “남을 구원하지 말고 자기나 구원해라”
때로는 무슨 일을 새롭게 시작할 때 빈정거리는 것을 듣게 됩니다. 남다르게 헌신하려고 할 때 빈정거리는 것을 듣게 됩니다.
빈정거리는 것은 비웃는 것이고 못되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빈정거리는 사람은 신앙과 인격이 소극적인 사람이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순수한 열심을 내다가 비난이 오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마십시오. 빈정거리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은혜를 누리지 못하며 주님의 일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빈정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빈정거림을 들으시고 직격탄을 날리셨습니다. “너희들과 같이 의인이라고 잘난 척 하는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번 성탄절에는 죄인을 향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 사랑과 베풂의 은총이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죄 사함의 권세
마 9:1-8 / 박세갑 목사
본문의 이적은 예수님의 1차 갈릴리 사역 중에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계신 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풍병자를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침상과 함께 달아 내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막2;1~12, 눅5;17~26). 여기서 주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사하시고 병을 고쳐주시어 자신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환자와 함께 침상을 들고 온 친구들 모두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께서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하심으로 그를 구원하신 것은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친구들의 믿음보다 근본적으로 병자 자신이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겔18;1~4)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주를 먹었음으로 그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죄와 사망의 책임과 구원의 은총을 받음도 모두 본인 자신의 책임임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병자의 치유 전에 먼저 그의 사죄를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질병이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질병과 사망 등의 온갖 저주가 오게 되었다고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요5;14)에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심으로 인간의 병고가 범죄의 원인인 경우를 가르쳐 주십니다. 물론 욥이나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은 특별히 죄가 없이 병에 걸린 예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병든 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함과 함께 치료하시는 주님께 치유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주님을 찾아온 것은 자신의 질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오랜 동안 타락과 방탕으로 나뿐 죄악에 빠져있어 중풍에 걸렸고, 그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지금 주님 앞에 나아오며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같은 죄인을 주목해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용서의 선언은 질병의 치유와 함께 그 원인을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무리 가운데 의혹과 비난이 일어났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사건을 관망하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권위를 가지시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하며 공격합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데 주님께서 죄 사함의 선포를 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참칭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때 주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며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하셨고 그러자 그 환자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본 무리들은 두려워하며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수 안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이 계심을 인식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들이 정직했다면 주님의 위대하신 죄 사함의 선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의심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의 치유는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사죄의 선포는 입증해 보일 수 없는 말을 쉽게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주님은 자상하신 모습으로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그 사람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습니다.
죄 사함의 선포는 오직 하나님 만 하실 수 있는 것이지만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나 사도들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이비들은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가시화할 수 없는 죄 사함의 선포를 남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온 유대인 무리들은 죄 사함보다 병 고치는 능력이 더 쉽다고 생각했지만 이 모두는 하나님의 권능이 필요한 것으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둘 모두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그날 곁에서 지켜 본 사람들처럼 인간의 육체의 문제가 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의 선포로 그 사람의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였다는 사실을 역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고통의 관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태는 (8;17)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함으로 예수께로 나아온 사람들이 모두 고침을 받은 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사야는 (사53;4~5)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수백 년 전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종이요, 완전한 치료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가 당하실 십자가 고통과 함께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치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대리적 고난을 통하여 죄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무능력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죄의 결과로 야기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 해결하셔야할 사명입니다.
본문의 이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중풍병자였고, 죄가 그의 중풍병의 뿌리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그 죄를 감당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기인하여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주님께서 행하신 인간의 모든 육체적 무능력을 치료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권리이며 보증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신비를 통하여 우리의 허물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불의를 대신하여 찔리심으로 우리를 치료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실 때, 인간의 모든 눈물이 씻기고, 모든 질병이 해결되어 내쫓겼으며, 질병의 원인인 죄를 짊어지심으로 육체적 영역에 까지도 승리 하셨습니다. 이 승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육체적 구원을 허락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명은 죄를 해결하는 것이고 동시에 죄로 인한 질병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적들은 기존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앞의 8장에서 우리의 주님이 육체적 영역의 주인이시며, 자연계의 주인이시고, 영적인 세계에 까지 주인이심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본문에서 육체적 무능을 치유하시며, 도덕적 영역에서도 주인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믿기만 하면 침상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던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괴롭히고 핍박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 속에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하나님을 소원하며,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으로나 세상의 도덕적으로도 보다 높고 큰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이 자랑과 기쁨을 빼앗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거룩하게 복되게 지키시고 의와 생명과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 내가 있는 곳에서 빛을 발하고 생명의 향기를 내고 결실하는 그 자랑과 환희를 맛보는 온사랑 교회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나누십시오.
마 9:1-8 / 전순기 목사
지난 4월 달에 성지 여행을 앞두고 아내의 어깨 상태가 심각해졌었습니다. 늘 오른쪽 어깨가 아파도,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생긴 후유증이거니 하고, 그냥 무시하고 살았는데, 점점 통증이 심해져서 어떻게 팔을 쓸 수가 없는 지경까지 간 겁니다. 내일 모래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오른팔을 쓸 수가 없으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응급조치라도 해야 하겠기에, 어느 병원을 갈까 수소문을 해 보았습니다. 오십견으로 고생을 하는 동료 목사님이 있는데, 그 목사님 말이 자기도 누구의 소개로 인근에 있는 00신경외과가 어깨 통증 전문이라고 해서 거기에 가서 어깨 통증 치료를 받았더니, 아주 신통하게 잘 듣더라고 소개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가 초음파로 어깨 부분을 진단해 보더니, 어깨 부분에 염증이 있고, 좀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어깨에 주사를 몇 대 놓아 줄테니까, 여행 다녀온 후에 다시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주사를 맞고 사나흘 쯤 지나니까, 정말 통증이 없어지고, 팔을 움직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야! 정말 소문대로 실력 있는 의사로구나!” 생각했었습니다. 덕분에 한 달간 여행은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니까 다시 어깨가 아프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병원을 다시 찾아갔더니, 대뜸 주사를 또 놓는 겁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주사를 매 주 한 번씩 여러 번 더 맞아야 하고, 어깨 근육이 석회화되었기 때문에 석회화된 근육을 풀어주는 최신 기계를 사용하여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10회가 한 세트인데, 한 세트에 50만원씩 하는 치료를 최소한 두 번 이상 받아야 한다고 권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삼성 병원에서 운동치료사로 근무하는 형제에게 알아보니, 동네 병원에서 주로 사용하는 주사는 스테로이드가 포함된 주사인데, 그 주사를 맞으면 즉각적인 진통은 되지만, 부작용이 너무 커서, 자주 맞으면 큰일 난다고 하면서 제대로 된 검사를 해서 원인을 알아내고 치료를 해야 한다고 조언을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삼성 병원 정형외과에 가서 MRI를 찍어 정밀검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오른쪽 어깨 인대가 상당 부분 끊어져 있고 염증이 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의사의 말이 이건 주사로 치료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주사를 자꾸 맞으면 뼈와 인대와 근육이 녹아버린다고 다시는 맞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치료는 수술밖에는 길이 없다고 진단을 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수술할 형편이 아니라, 수술하기 전에라도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항생제를 한 달간 복용토록 처방을 받았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진단을 내리고 증상 치료만 하는 것과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원인 치료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 지를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참 의사도 천차만별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큰 종합병원에서는 환자가 아무리 아프다고 하소연을 해도 섣불리 약을 처방하거나, 진통제를 주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효과가 즉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부작용이 심각하게 야기되는 약물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게 상식이고 양심적인 일입니다.
증상만 보고 처방하는 의사는 좋은 의사가 아닙니다. 좋은 의사는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한 후에 처방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어 치료하심으로 온전한 치료를 하시는 참 좋으신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영혼과 몸을 온전히 고쳐주시는 위대한 의사이십니다. 우리 중에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모두 함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여 온전케 해 주시는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나뵙기를 원합니다.
증상보다는 원인부터 해결하라!
주님은 당신 앞에 나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다소 엉뚱해 보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엉뚱해 보이는 이유는 주님께서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중풍병만 고치러 나왔지만, 주님은 이 사람에게는 중풍병을 고침 받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죄사함 받는 일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중풍병은 의학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어떤 죄였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죄가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어떤 병의 증상은 원인이 사라지면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허리에 디스크가 오면,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린 증상이 나타납니다. 진통제 주사를 맞으면 잠시 통증이 사라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통증이 찾아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튀어나와 신경을 누르고 있는 디스크를 수술을 통해서 제거하는 겁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서 근육을 강화시켜 주어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의 경우에 중풍이라는 증상은 죄라는 원인만 해결되면 저절로 해결될 증상인 것입니다. 반면에 중풍의 원인인 죄를 해결해 주지 않고 병만 고쳐주면, 또 다시 재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원리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에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증상만 피상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들의 모든 고통의 원인 - 죄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인간이 처한 곤경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그런 노력의 산물이 바로 문학이며, 철학이며 심리학과 같은 학문들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심리학에 재미를 붙여서 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과거의 심리학은 프로이드라는 학자의 영향으로 인간의 부정적인 면, 즉 심리적인 결함이나 정신적 장애에 초점을 맞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줄 것인가에 집중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불행을 극복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심리학은 관심의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경향의 심리학을 긍정 심리학이라고 부릅니다. ‘마틴 샐리그만’ ‘칙센트 미하이’ 교수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학자들입니다.
긍정심리학은 마음의 상처나 정신적 질환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연구하여 그 원리를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긍정 심리학에서는 ‘행복을 안전감과 평온함을 느끼는 상태’로 규정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자존감을 높여라.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라. 자기 기질대로 살아라. 서로 배려하며 살아라. 감사하며 살아라. 유머를 즐겨라. 경청하며 살아라. 용서해라. 몰입의 기쁨을 누려라.” 등등, 행복한 삶의 원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이런 심리학적인 원리들을 배우는 것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원리들을 배운다고 해도, 그 원리대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느냐는 겁니다. 배려라는 말을 배운다고 해서 배려가 되는 게 아니며, 경청의 원리를 배웠다고 해서 경청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용서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용서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의 한계이며,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인간이 처한 모든 곤경과 궁핍과 고통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있고, 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동산에 거품이 생기고, 주가를 조작하는 등, 이 모든 행위들의 뒤에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죄가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죄의 배후에는 추악한 탐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과 한숨과 눈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만 봐서는 해결이 안됩니다. 근본적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심리학은 죄 문제를 결코 다루지 않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죄라고 여기는 것들, 예컨대, 세상의 법을 어겨서 처벌을 받게 되는 것들이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보다 더 깊은 영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들이 근본적으로 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 모두의 근본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생각대로, 자기 느낌대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주장하는 의지’가 죄라는 겁니다. 그런 자기를 주장하는 의지가 하나님의 법을 범하게도 하고, 또 자신의 양심도 무시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하는데, 세상은 죄라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이렇게 사는 사람을 “의지가 강한 사람, 주관이 분명한 사람, 개성 있는 사람,”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점점 더 절감하는 것은 “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모든 인생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사람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되면서, 저 자신과 아내를 더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많은 부분에서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며 또 놀라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저는 제 기질대로 행하고 있고, 아내는 아내 기질대로 행하고 있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여전히 발생하는 겁니다. 식자우환이라고 했는데, 알면서도 안되니까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또 깨닫게 되는 게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정말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거구나!” 하는 겁니다.
서로 부딪쳐서 상처를 주고받아 괴로울 때, 사도 바울처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는 탄식의 기도가 중심에서부터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에게 사죄의 은혜가 필요하고, 주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가 필요함을 절감하며 아버지 앞에 나아가 엎드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날마다 간절히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목회를 해 나가면서, 사람들을 알아 가면 갈수록,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주님의 은혜만 의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참으로 모든 성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용납해 준다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날마다 발견합니다. 또 제가 설교하고 목양하는 목회의 목적은 성도들의 인격과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루는 데 있는데,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일은 도무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날마다 절감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말씀과 성령의 능력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스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이 고통들의 원인과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환자가 병원에 와서 의사의 진단을 받았으면,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이고 처방을 받을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치료가 시작됩니다.
자신의 삶의 문제점을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죄와 허물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죄라고 여겨지는 도적질이나, 간음이나, 사기죄와 같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나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기 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대로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저도 그랬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이 옳다고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만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계심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기준을 버리고 주님의 기준으로 살겠습니다. 내 생각 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나의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말씀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을 옳게 여기고, 그것을 근거로 세상만사를 판단하고, 세상만사를 자기 뜻에 맞게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앞에 나아가 죄사함을 받으라!
이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죄사함 받는 것이 어떤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보다 우선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소자여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죄를 사해 주시고, 긍휼을 베푸실 분은 세상에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실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한 단어인데, “값이 지불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죗값이 다 청산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대속의 은총 때문에 언제 어떤 상태에 있든지, “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고통과 한숨과 눈물의 원인을 피상적으로 보고, 환경이나 사람에게 탓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나 사람을 탓해 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누구 탓을 함으로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환경을 탓한다고 해서 환경이 바뀌지 않고, 사람을 탓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럼 나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은혜를 의지하며, 긴장을 하고 열심히 노력을 하면 좀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원래 모습대로 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올바른 원리를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기주장대로, 자기 기질대로 행하며 상처를 주는 근본적인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죄사함의 열매들을 누리며 살라!
본문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죄사함을 받으면 그 결과로 세 가지 열매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열매는 평화와 안식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하시면서 “소자야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수족을 움직일 수 없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중풍에 걸렸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고, 절망이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영혼의 평화와 안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소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자들에게만 평화와 안식이 필요한 게 아니고, 오늘 현대인들 모두에게 다 평화와 안식이 필요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은 지식, 기술, 고도의 문화생활을 누리고 살지만 타인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세 가지 그림자가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그 세 가지 그림자는 “공허감, 죄책감, 두려움”입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현대인들은 만성적인 죄책감에 눌려있거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경제 위기의 시대는 더욱 더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럴 때에 주님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않고,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두려워 말아라. 안심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로 나아가 죄사함을 받으시고,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열매는 육신의 건강이라는 열매입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가장 절실한 죄사함을 먼저 주시고, 또 그 마음에 평화와 안식을 주신 다음에 병든 육신도 고쳐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고, 권세 있는 주님의 말씀이 중풍병자의 사지백체에 힘을 주었습니다. 중풍병자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치료하시는 순서를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고치고, 마음을 고치고, 그리고 몸을 고칩니다. 이게 주님께서 치료하시는 순서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구하노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의 순서입니다. 영혼이 먼저 복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 참 평화와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몸도 건강해져야 합니다.
세 번째 열매는 관계 회복이라는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집 안에 우환이 있으면 온 식구들이 다 함께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 중풍병자의 가족들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노릇 하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짐만 되는 자신이 너무도 한스러웠던 이 중풍병자의 고통도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병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이제 고통 끝 행복 시작”인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에게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가정의 행복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행복한 관계를 누리고, 이제 이웃들과도 행복한 관계를 누리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주라!
중풍병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없어서 네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중풍병자 자신이 요청했는지, 아니면 그를 사랑하는 친지들이 도움을 주려고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저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신앙생활은 공동체로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뿐더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힘만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 기꺼이 도와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누리며 행복해진 성도들은 자기 행복에만 취해 있지 말고 주위를 돌아봐야 합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돌아보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들을 찾아가서 도와야 합니다.
돕는 일을 혼자 힘만으로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네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목장활동이 이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목장에서 목원들이 목자를 중심으로 해서 한 영혼을 돕는 일을 해 보십시오. 목장이라는 우리 안에 있는 목원들도 섬기고, 또 우리 밖에 있는 주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섬겨 줌으로 주님께로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에, 본인과 그 가족들도 행복했겠지만, 중풍병자를 메고 와서 지붕을 뜯고 예수님께 달아 내리는 수고를 했던 네 사람들도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사건을 통해서 참 행복한 삶의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문젯거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행복은 저절로 오거나,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젯거리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문젯거리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피상적인 해결책을 구하지 말고 본질적인 해결책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스런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죄라고 선언하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니, 당신께로 나와 죄사함부터 받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자기주장, 자기 생각, 자기 판단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태도와 자세가 죄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발생하고 고통이 올 때에 누구 탓으로 돌리지 말고,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자신이 변화되려고 하는 주도적인 태도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 평화와 안식이 임하고, 병든 육신이 치료되고, 모든 관계가 회복됨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날마다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사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천국의 열쇠
마 9:1-8 / 이정선 목사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하늘이 내린 형벌로 인식되던 문둥병을 고치셨고, 먼 곳에 있는 중풍병자를 리모트컨트롤 방식으로 고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구하셨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그 사람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병자 고치시는 사건들을 산상수훈 뒤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자를 고치시는 사역의 연관성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맨 처음 선포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의 주제는 천국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내가 천국을 가지고 왔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천국에 합당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가져오셨다고 주장하시는 천국, 그것이 과연 근거 있고 유효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들을 고치심으로써 자신이 천국을 가져올 수 있는 권위가 있으신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실 뿐 아니라 사나운 풍랑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온 우주에 대한 지배권이 있으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에서 매우 생소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여러 차례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 사건에서처럼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나타나는 매우 특이한 한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지금까지는 병자를 고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마태가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서기관들과 충돌하게 된 것을 보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왜 이 병자를 고치시면서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언을 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아주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기관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이게 무슨 소린가 하다가 이 예수라는 젊은이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서기관들도 예수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의 권위에 복종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한 마디에 예수와 서기관들은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기관들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고두고 핍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서기관들에게 물으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아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것이 쉽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훨씬 쉬워 보입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는데 중풍병자가 아직도 침상에 누워 ‘아이고 삭신이야.’ 하고 신음한다면 곤란할 테니까요. 거기에 비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당장 나타나는 현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저를 속이고 제가 가장 아끼는 보물을 훔쳐갔다고 합시다. 당연히 제가 무척 화가 났겠지요. 나중에 그 사람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저에게 와서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 누가 그 사람에게 ‘괜찮아. 없던 일로 하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저 혼자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만 유효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효입니다. 저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한다고 그 사람이 ‘고마워.’ 그러면서 마음이 평안해져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발끈한 것입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선언을 새파란 젊은 친구가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신 신적 존재, 천국을 가져올 수 있는 자격과 권위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았다는 선언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그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워 있게 만드는 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선언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을 옭아매고 있는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 질병은 인간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다른 사람과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천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또 어떻습니까? 정신은 말짱한데 자기 몸뚱아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꼴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예수께서 가져오신 천국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악한 세력과 현실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현재 나타나는 증상은 질병에 의한 인간의 파괴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질병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죄였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던 부부가 불신하고 서로를 탓하게 되었고, 질투와 시기 속에 미움이 싹트고 살인이 행해졌습니다. 다른 피조물들도 저주를 받아 땅은 엉겅퀴를 내고 질병과 고통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질병은 단지 하나의 증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 인간에게 천국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병이 나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천국을 가져다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시는 선언입니다.
죄 짓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맞은 사람은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지만, 때린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죄책감 아닙니까? 죄책감이라는 것은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우리의 본능적인 갈망입니다.
어느 날 진주의 한 병원에 40대 여자가 나타나 ‘밀린 병원비 21만원’이라고 적힌 돈 봉투를 접수시켰습니다. 한바탕 소란 끝에 이 여자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18년 전 4살박이 아들이 엄마가 일하던 식당에서 놀다가 식탁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고 그 병원에 입원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수년째 항암치료를 받느라고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병원비 21만원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몰래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자가 18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려오다가 지금이라도 병원비를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뉴스를 종종 접합니다. 18년이 지나서야 병원비를 갚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을 때 이 여자는 얼마나 시원하고 위안이 되었을까요? 다윗은 노래하기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 죄사함의 은총이 가져다주는 평안과 기쁨이 늘 넘쳐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애물은 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죄의 장애물을 제거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천국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는데, 이 중풍병자에게 있어서 죄와 병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 사람은 죄의 결과로 중풍에 걸린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죄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떤 특정한 죄를 지었고, 그 죄 때문에 중풍에 걸린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가 뭔지는 모르지만 큰 죄를 지었고 그 죄의 결과로 중풍병에 걸린 것을 예수께서 죄 용서와 함께 중풍병을 고쳐주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걸리는 질병은 우리의 특정한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만약에 죄를 짓는 만큼 병에 걸린다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죄를 지어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교도소가 따로 필요 없겠네요. 또 우리는 어떻습니까? 죄를 지은 만큼 병에 걸린다면 우리 중에 온전하게 걸어다닐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다들 다리 부러지고 붕대 붙이고 다니겠지요. 어느 이단 집단에서는 질병을 귀신이 가져다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병원의 의사들은 귀신과 싸우는 사람들입니까?
죄의 결과로 질병에 걸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은 아닐지라도, 여기 나오는 중풍병자에게는 맞는 얘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죄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문둥병에 걸렸고, 헤롯왕은 신이라고 칭송을 받고 우쭐했다가 벌레가 먹어 죽는 병에 걸렸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범죄에 대하여 특정한 방법으로 징벌하신 경우입니다. 특별 케이스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그런 특별 케이스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의도는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생긴 병을 고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면서 죄사함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시는데,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심판을 받게 된 인간은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사함을 받는 것은 죄인들에게 꼭 닫혀버린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그 죄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죄사함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놓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권세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죄로 인한 책임, 즉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병원비 21만원을 갚고 나서도 그렇게 마음이 시원하고 평안할진대, 하나님과 원수되는 죄, 영원한 사망의 형벌에 합당한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얼마나 복 있는 사람입니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습니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위로와 기쁨이 항상 여러분의 가슴 속에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누리는 믿음
마 9:1-8 / 김근중 목사
1.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제약된 상황이나 조건은 전혀 없다.
인간의 진정한 용기는 대세를 거슬러 움직일 수 있는 용기입니다. 물길을 따라 흘러가기는 쉽지만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려운 것처럼 인간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살기란 쉽지 않으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정욕대로 흘러가며 사는 것은 아주 쉽지만 마음의 정욕을 거슬러 사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시고 싶은 대로 술을 마시고, 피고 싶은 대로 담배 피는 것은 쉽지만 그 정욕을 제어하여 술과 담배를 거부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인간의 정욕대로 죄를 범하기는 쉽습니다.그러나 그 죄의 소원을 거슬러 사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죄악의 길로 들어 선 후에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후에 점점 더 그 죄악의 낙을 누리는 수렁에 빠지기는 쉽지만,그 수렁에서 회개하고 빠져나오려면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죄인 자신에게는 그 용기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 그 용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초기에 한 동네에서 그러한 용기를 목격하고 매우 놀라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마 9:1은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본 동네”는 막 2:1에서 “가버나움”이라고 알려줍니다. 마 9:2는 그 동네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에 대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중풍병자를 소개합니다.그런데 원문에 보면 마 9:2의 말씀 첫 머리에 “보라!”라는 감탄사가 나타나며, 예수님의 일행이 그들을 보시며 놀라워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예수님께 나아온 중풍병자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여러 사람들이 중풍병자와 함께 나왔습니다
여러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를 메고 나왔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어떤 죄의 결과로 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연단이나 시련으로 인한 병이 아니라 본인의 죄 때문에 발생한 병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중풍병자 자신도 자신이 중풍병에 걸린 이유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그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들도 알고 있는 그의 어떤 죄 때문이었고,주변에 함께 몰려든 수많은 무리들도 알고 있었을 어떤 죄 때문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거론하실 때 죄 자체에 대하여 항의하거나 변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중풍병자와 그의 무리들은 이러한 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죄악 중에 중풍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예수님께 나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상태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인의 몸으로, 중풍병 환자의 몸으로 나왔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주저하다가 뒤늦게 용기를 내고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 2:2-4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몸을 용신할 수 없을 정도라, 지붕을 뜯고 달아 내릴 상황에 이를 때까지 주저했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만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중풍병 환자로서 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였습니다. 자신을 비난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몰려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은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의 몸에 의탁하여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중풍병자는 모든 이웃과 함께 용기를 갖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모든 무리가 알고 있을 정도의 죄악 중에 있었던 자라 두려웠을 것이지만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은 우리의 평가 대상이 아닌 누릴 대상이다.
예수님은 이들 무리들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보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시며 칭찬해 주신 “저희의 믿음”은 그 시대에 기대하기 어려웠던 믿음입니다. 죄인들과 함께하기를 거부했던 유대주의 사상 속에서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죄인 된 그 중풍병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죄인인 중풍병자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행동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용서와 구원과 치료의 역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친구들의 믿음은 주변의 모든 비난 세력의 핍박과 비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만나는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죄로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버려두지 않는 사랑을 수반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도 동일한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믿음이며, 예수님만이 용서와 구원과 치료의 은혜를 주실 분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친구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며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내려놓는 중풍병자를 향한 예수님의 은혜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의 첫마디는 중풍병자가 고통을 겪는 중풍병의 치료의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중풍병자가 공동체 속에서 비난 받으며 어려움을 겪는 죄사함의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그 첫마디는 “소자야 안심하라”라는 칭찬과 위로와 격려의 선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표현된 “안심하라(달세오)”라는 단어는 “매우 용기 있다, 상당히 활기차다”라는 뜻의 단어의 명령형입니다. 즉 우리말의 안심하라는 단어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단어로서 “용기를 내라, 힘을 내라”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더 이상 죄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요구 명령입니다. 주변의 비난 세력들의 비난에 주저앉지 말라는 격려의 명령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께 나오는 길을 가로 막을 자가 없다는 위로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안심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안심시키고,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안심하라”라고 먼저 격려하신 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며 육신보다 먼저 영혼의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육신의 질병인 중풍병도 고쳐 주셨습니다. 주변에 모여든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심하며 도전할 때,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을 향한 용기 있는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직접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용기로 누리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의 권세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용기는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권세 앞에 나아가 용서와 구원과 치유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용기를 갖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그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죄악 중에 거하다가 얻은 질병이든, 우리가 잘못하여 얻은 문제들이든, 예수님은 우리들이 용기를 갖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그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하시며,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에 그 믿음을 주시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도록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에 반응하여,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서 죄악의 낙을 누리거나, 주변의 따가운 비난의 시선을 의식하며 숨어버리거나, 자신의 무능을 핑계 삼아 병상에 눕거나 눌러 앉아서 세상을 대적 삼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은 우리의 평가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대상입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믿음의 용기로 예수님 앞에 나아감으로써 그 권세와 능력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와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마 9:3-4에 보면,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평가하는 악한 생각을 드러내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용기로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을 칭찬하시며 치유하여 주시지만, 예수님을 평가하기 위해 나오는 자들을 향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서도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고자 하지 않고, 그 능력과 권세를 평가하고자 하는 자들의 악함을 책망하십니다. 공동체에서 버림 받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중풍병으로 인해 무능해진 자신의 육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믿음의 용기 대신에 평가자의 교만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3. 치유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권세를 누리는 자의 증거가 선포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악한 마음”을 향하여 도전합니다. 예수님은 마 9:5에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그들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교만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와 “중풍병을 고치시는 권세”는 둘 다 “메시아의 권세”이며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둘 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권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죄사함이, 보이는 중풍병의 고침보다 쉽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중풍병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죄사함의 권세를 나타내신 후에 중풍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서기관은 중풍병의 고침을 확인하고, 죄사함의 권세를 인정하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평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자신의 마음의 요구와 달리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시자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평가하는 악한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악함을 고치시며,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이 원하는 대로 중풍병의 고침을 통해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마 9:6에 보면,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중풍병자를 고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누리지 못하고 평가만 하는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은혜의 배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시자 중풍병자는 치유함을 받고 일어났습니다. 마 9:7은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이라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세가 세상 가운데 보여진 증거입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중풍병을 고치는 사건은 메시아의 증거이며, 죄 사함의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마 9:8에 보면,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라고 하며 그들의 두려움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은 우리들의 평가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직접 누려야 할 대상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의 용기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그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믿음이 없는 서기관과 같은 자라 할지라도 그러한 자리에 함께할 때,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죄사하는 권세를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받아들이며 회복해 갑니다.
무리들은 그 권세를 보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그러한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치유의 역사는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권세를 증거하는 선포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용기로 예수님께 나아가며 좌 사함과 구원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며 증거하는 선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치유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와 자신의 질병과 자신의 연약함을 들고 나가는 자들로 변화되며 회복되어 갑니다.
우리는 믿음의 용기로 인하여 예수님의 죄 사하는 권세를 누립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누리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인해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경외하며, 믿음의 용기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평안 속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누리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누리는 그 증거를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우리를 통해서 죄 사함의 권세를 세상에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의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용기를 내어 주변에 누워 있는 중풍병 환자들을 침상에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죄악과 약함과 병든 몸을 숨기고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평가만 하려 했던 잘못된 모습들, 악한 마음들을 버리고 그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 놓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용기를 주시며, 죄를 사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셔서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자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역류하며 사는 성도들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역류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며, 정상류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용기로써 우리의 모든 실패를 인정하며, 우리의 모든 죄악을 인정하며, 우리의 모든 병든 몸과 깨어진 삶을 인정하며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중보기도
마 9:1-8 / 박지온 목사
오늘 "중보 기도"라 그렇게 제목을 삼았어요. 중보 기도를 잡고 쫌 설명이 필요해요. 여러분들이 중보 기도 그럴 때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더니만 그 사람의 어떤 문제나 어떤 사건이 해결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거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더니만 그 사람의 일이 해결되었고, 뭐가 어떻고 이런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중보 기도라는 중요한 내용에 사실적인 하나의 모델이다!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그래서 그 이제 우리 신앙에 '승리했다!' 뭐 아니면 또 일 단계가 '신앙생활에 승리하십시오!' 또 흔히 헤어질 때에 '승리하십시오!' 이런 소리를 하는데 도대체 승리라는 것이 뭐냐? 어떻게 보면 승리라는 것은, 현장에서 싸움에서이기는 것이다! 현장에 뭘 위해서 싸우고, 뭘 싸우느냐? 이렇게 막 물으면 할말이 없어요. 여러분 승리라는 개념이 뭡니까? 도대체 '이기는 것이다!' 뭘 이기는 것입니까? 이 상당히 막연하고 어떻게 보면 육적인 그런 어떤 배경으로 승리라는 것이 이해가 되기가 쉽다! 중보 기도라는 것도 육적인 것을 가지고 뭔가 이해하기 쉽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중보 기도 그럴 때에, 개인의 승리와 함께 중보 기도의 승리는 같은 맥락에서 도대체 성경에서 오늘 말씀하는 중보 기도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좀 짚고 넘어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여기에 말씀 보면 9장에 "(마 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저희 믿음이라' 그럴 때에 마가복음 서에는 구체적으로 이 중풍병자를 몇 사람이 데리고 왔는데, 데리고 오고 조금 뭐 이렇게 상세히 설명하면, 기와를 뜯어내고 뭐 이렇게 하시고 이런 어떤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만은, 여기에 오늘 나오는 말씀에 배경에 문제는 침상에다가 메고 왔으니까! 최소한 두 사람, 최소한 4사람 그럴 것 아닙니까! 하나씩 메고 온다고 그러면 이 중풍병자를 낮게 한 배경이 뭐냐하면, 중풍병자 자신 홀로서 기도해서 나았다는 배경보다도 옆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옆에서 도와 주어서 나았다! 그러면 옆에서 도와 주었다는 이 사실배경이 뭐냐? 중보입니다. 이게 이제 기도할 때에 중보 한다!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한다! 아니면 특별히 그 중보라 그럴 때에 사람중심이지, 어떤 일이나 사건중심이 아니다는 것이 오늘 좀 이해가 되어야 되겠구요. 그러면 중보 기도의 중요한 핵심이 뭐냐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그럴 때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는 사건과 사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중심입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중보 기도에 중요한 핵심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중보 받을 사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중보 기도의 중요한 핵심이 무슨 일이 잘 되었다! 뭔 일이 수월하다 뭔 일이 해결되었다는 것으로 아니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뭘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중보의 중요한 핵심이냐?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중보 기도에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도록, 바로 중보 기도의 핵심이, 바로 내용이 여기에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침상에 누운 체 중풍병자를 데리고 누구한테로 갔습니까? 주님께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보 기도한다고 그럴 때에 자칫 잘못하면 이런 중요한 핵심에 부분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위해서 기도한다! 다른 게 아닙니다. 그분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도록,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주권 속에 들어오도록, 이것이 중보 기도의 핵심입니다. 바로 오늘 중풍병자 위해서 기도한, 중보 기도한 중풍병자 위해서, 기도한 중풍병자를 도와준 이 사람들의 귀중한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 사람의 문제 해결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문제해결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이 사건 속에서 문제에 구체적인 핵심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승리하십시오' 그럴 때에 내가 승리한다는 그런 배경이 뭐냐하면, 내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나, 어떤 내용 속에 주님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승리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일이나, 무슨 사건이나, 어떤 계획을 세웠을 때에 그 순간, 그 사건, 그 일들 속에 주님만 바라본다! 이것이 승리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돼요. 그 어떤 사건에 '승리하십시오!' 사건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 헤어질 때, 만날 때, '승리하십시오! 승리합시다!' 이런 것이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주님만 바라보세요!' 이 말이 승리의 핵심입니다. 이 내용이 지금 분명히 이해가 되어야 되죠.
그랬을 때에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승리하지 못하게 하는 배경이 이겁니다. 그 배경이 뭐냐하면 창세기 3장에 배경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만 바라봤어요. 주님께 나갔을 때에 제일먼저 해결하신 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뭡니까?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뭐라 그랬어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승리할 수 있는 첫 번째, 그리고 중보 기도에 첫 번째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뭐냐하면,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내 죄 사함을 받았다!' 그럴 때에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성경에서 원죄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우리 인간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중보 할 때에 참 인간에 승리에 중요한 핵심이 제일먼저 뭐냐? 여러분과 저를 가로막고 있고 성공과 축복과 은혜를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문제! 그게 뭡니까? 원죄입니다. 원죄라 그럴 때에 이 창세기 3장에 문제! 창세기 3장에 문제 그것이 뭡니까? 사단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그 전도를 하거나, 요즘 그 우리 교회 많이 다녀도 원죄가 이해가 안 되면 종교인이 되고, 종교인이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뭐냐? 원죄가 이해가 안됩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이 전도하러 나갈 때에 지금 불교인들이나 천주교인들이나 어떤 밖으로 보여지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착할 수 있습니다. 더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다!' 그러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 많거든요. 기독교인들이 안 되었으면 더 이상한 짓 할 사람들이지만, 그런데도 성경은 분명히 뭐라 그랬느냐 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에 거기에 따라오는 엄청난 축복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포함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죄해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원죄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뭐 별 희한한 수단을 다 쓴다할지라도 이 해결이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천주교인들이나, 불교인들이나, 그 다음에 다른 어떤 그 예수를 믿어도 종교 안에서 참 착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볼 때에 할 말이 없어요. 예수 믿어도 이상한 사람이 있고, 전도하는 사람들 속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러나 그런 문제가지고 따지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착하게 보이고, 아무리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원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 다음에 오는 문제가 뭐냐? 불신자의 6가지 상태가 그대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원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불신자가 당하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오는 저주의 역사가 그대로 오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짓하고 있고, 어떤 면에서 습관이나, 그 사람의 본래 어떤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뭐 원래 가지고 있는 영적인 것들이 해결이 안 되어 가지고 이상한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영접하고, 참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원죄가 해결됩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면 그게 해결되면 비로소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불신자의 6가지 상태가 그때부터 끊어져 버립니다. 거기서부터 완전히 해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적용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먼저 예수께 나왔을 때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할렐루야! 오늘 이 사실이 여러분 정말 감사함으로 와져 야죠.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어제 보다 오늘이 훨씬 기쁜 날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되면 어제가 더 나아요. 정말 여러분들이 이것이 이해가 되고, 죄 사함 받고 모든 저주와 죽음과 고통에서부터 해방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내 가슴에 왔을 때에 뭡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보람과 가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뭡니까? 실제적으로 흑암에 세력이 꺾이게 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깨우쳐 지게 됩니다.
나는 그 '머리 아픈 것이 떠났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하고 '잠시 기분 좋다!' 말하자면 축구로 통해서 국가 위상이 올라가고 기분이 좋다! 이래도 머리 아픈 것이 사라지는데,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지고, 그 축복된 역사가 지금 사실적으로 내게 이해가 된다! 그럴 때에 그건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그건 오게 마련입니다. 그게 안 되는 배경이 우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사실이 안 되기 때문에, 이 문제가 오늘 확인이 되어야 됩니다. 먼저 뭐해야 됩니까? 먼저 '하나님 바라보라!' 먼저 우리 중보 기도 '하나님 바라보라!' 먼저 내게 승리할 수 있는 배경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 사실이 이루어 져야 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하신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을 바라본다고는 하지만 그 다음에 뭐냐하면, 중보 기도 할 때에, 그 다음에 내게 승리하는 배경이 뭐냐? 하나님을 바라봤을 때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도록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게 중요한 말씀이 있죠. 2절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말씀이 임하면 되는 겁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랬죠.
그 다음에 조금 더 넘어가면 이 말씀을 했을 때에 말씀을 못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말씀을 못 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것은 불 신앙이다! 믿음이 없다!' 는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고 뭐라고 책망했느냐 하면,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뭐라 그랬어요? '악하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악하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뭘 이상한 짓을 하고, 이상한 일을 했으니까, 악하다! 그런 게 아니고 말씀 못 받는 사람을 보고 '악하다!' 그랬습니다. 이 땅에 악한 사람이 누구냐? 말씀을 못 받을 때에 모든 문제가 다 따라 나옵니다. 악한 모든 문제가 다 따라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단에 메여 있을 때에 모든 악함이 거기서 따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순간에 모든 악함과 흑암에 세력은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랬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못 받을 때에 말씀을 못 받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악하다!' 그랬습니다. '악하다!' 여러분이 악하다는 게 뭐 악한 생각이다! 다른 게 아닙니다. 말씀이 안 들어갈 때에 그것은 악한 모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되죠. 그래서 중보 기도 할 때에 말씀을 듣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내가 참 '모든 일에 승리하십시오!' 말씀이 들려질 때에 승리가 나오는 겁니다. 말씀이 임하게 될 때에 승리가 나옵니다.
그럴 때에 성경이 뭐라 그랬냐 하면요. 6절 말씀에"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뭐라 그랬어요?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랬습니다. 개인에게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고 중풍병자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그 다음에 보면 7절에 다같이 시작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말씀이 임했을 때에, 말씀을 받는 즉시 모든 문제가 여기서 다 해결됩니다.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중풍병자가 누워 있다가 일어나 집으로 갔다! 다 된 것 아닙니까! 여기에 축복된 역사가 바로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 주일날 말씀의 강단에,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 왔을 때에, '예배드린다!' 그럴 때에 몸만 교회 나왔다는 것으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나왔을 때에 말씀이 내게 임해야 되고, 내게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이게 들어와야 돼요. 개인적으로, 말씀이 개인적으로 내게 임해야 됩니다. 그 순간에 한 주간 동안 그 말씀이 다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 다 성취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어려운 문제가 말씀, 하나님께서 말씀하게 하시는 역사! 이 중보 기도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승리한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을 수 있을 때에 승리가 옵니다. 거기에 모든 승리가 오죠.
이번에 그 치유 사명자 대회 갔을 때에, 뭐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도 하고, 우리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돕기도 하고, 많이 도운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했던, 그 우리 전에 진경 총 회장이신 장성칠 목사님! 우리 사모님이 오셔서 간증을 하셨어요. 장 목사님이 참 걷지도 못하고, 제가 갔을 때에 만나서 그랬습니다. 장 목사님 병원에 갔을 때에, 'K2, K3 기억나냐?' 그러니까 기억 못한데요. 전혀 기억 못한다 그래요. 사모님 이야기가 그때에 사람은 알아보고 그랬는데도 그때의 일을 전혀 기억을 못하신다 그래요. 그래서 장 목사님이 일어서셔서 '나보다도, 나는 그때의 일을 전혀 기억을 잘 못하니까' 그저 요즘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시고, 기억이 옛날 어릴 때로 돌아갔다가, 그 다음에 20대로 돌아갔다가, 30대로 돌아갔다가 이러신다 그래요.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나의 일을 더 잘 아시기 때문에 말씀할 것이다!' 하면서 그렇게 간증을 사모님께 넘기더라 구요. 사모님께 넘기는데, 사모님이 처음에 일을 당하시고 난 후에 병원에서도 안된데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다 끝났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이 한 20명이 오셨다던가, 목사님들이 오셔 가지고, 목사님들이 그때 저 옮기는 순간에 같이 오셔서 통성으로 기도하셨다! 그래요. 통성으로 기도하고, 의사도 '안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통성으로 기도하고 밀쳐 놓았습니다. 왜 사람이 완전히 가버렸으니까! 전혀 이 인기척이 없으니까! 호흡도 그냥 계속 넘어가는 호흡밖에 안 되니까! 20분쯤 지나서, 기도하고 난 후에 20분쯤 지나서, 호흡이 그 거친 호흡들이 조용해지는 겁니다. 호흡이 조용해서 안정이 돌아오더랍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다시 수술하고, 그 다음에 먼저 그 병원에서 '이제는 가망이 없다!' 그래서 왔었는데, 그 고대 병원인데 한 20분 후에 그렇게 돌아오고 난 후에, '수술을 했다!' 그럽니다. 수술하고 중 환자실에 갔을 때에, 살아날 수 있는 가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놓고도 살아날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의식이 없으니까 어떻게 했느냐? 듣든지, 안 듣던지 중환자 실에 들어가면 몇 분씩 그렇게 밖에 안 되잖아요. 가족들도 안 들어가니까! 중 환자실에 들어갈 때마다 목사님 옆에 귀에다가 대고 뭘 했느냐? 메시지를 했습니다. 계속해서 메시지만 했습니다. 듣던지, 안 듣던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눈에 보이도록 메시지 할 때마다 눈에 보이도록, 이 증상이 좋아지는 겁니다.
내가 이 말씀을 준비 할 때에 그 간증하던 생각이 나요. 살리는 것이 뭐 우리가 '하나님께서 살리신다!' 중요한 것은 말씀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때입니다. 그 생명이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말씀이 곧 씨입니다. 생명의 씨입니다. 말씀이 들어갈 때에 그게 사실적으로 임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중에서 누구이야기를 하시느냐 하면, 류 목사님이 똑같이 교통사고로 이형재 목사님이라고 인천에 완전히 죽어 버렸어요. 그래서 그 서울에 장로님 한 분이 가셔서 보고하기를, '목사님 참 사모님이 불쌍합니다!' 이러더랍니다.
왜, 그러냐 그러니까, 완전히 다 갔는데, 보기에도 전혀 다 가버렸는데, 시체를 앞에 놔두고 다른 사람은 다 '안 된다!' 그러는데, 사모님 혼자만 '된다!' 그러시더랍니다. 사모님 혼자 된다! 그러시더랍니다. '된다!' 그러시면서 어떻게 하느냐? 보기에 처량한 그런 모습이더라 그래요. 테이프를 틀어놓고 헤드셋 가지고 다 죽은 그 사람 귀에다가 꼽아 놓은 겁니다. 참 그 도저히, 우리는 믿음으로 아니면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사람은 죽어버렸는데, 테이프를 틀어놓고 헤드셋을 꼽아 놓은 겁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살아나셔 가지고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걷고 이런 것은 잘 못해요. 총신 교수로 오셔서 참 그 강의도 열강 하시고 하셨는데, 지금 경우에는 아직 그 정도로 활동하고 이런 것은 못해도, 이제 설교하시고, 앉아 가지고 말씀하시고, 정확하게 판단도 하시고, 그렇게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낫는다, 안 낫는다!' 뭐 '좋다, 안 좋다!'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듣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 말씀이 내게 들려지고, 말씀하시는 사실이 사실로 내게 와질 때에 뭐가 오느냐? 치료가 나옵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해결됩니다. 아무리 막 기도 열심히 하고, 떠들고, '믿습니다!' 아무리 야단해도, 말씀이 안 들어오면, 말씀이 이해가 안되고, 말씀이 안 들어오면 치료가 안됩니다.
그래서 치유에서 중요한 것이 뭐냐? 말씀이 정리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치유가 가능합니다. 영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육적인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일날 말씀 받고, 말씀 붙잡고, 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모든 문제가 다 연결되는 겁니다. 이 사건이 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중보 기도한다!'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 주옵소서!'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실 때에 뭐가 나로 하여금 그 은혜의 축복을 못 누리게 만드느냐? 할 때에 내가 살았기 때문에, 그러니 여러분 '성령의 인도 받으면 다 된다!' 그러는데 왜 성령의 인도를 못 받게 만드느냐? 그게 내가 살았기 때문에, 성령이 인도하셔도, 말씀이 임하셔도 뭐냐?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말씀대로 따라갈 수 없게 돼요. 그래서 갈라디아 2장 1절이 참 중요하죠. 내가 죽고 내 안에 누가 살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내가 새 생명 얻어야 된다! 이것이 이루어 져야 성령의 인도 받고, 성령의 이끄는 데로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 윤덕희 씨가 우리 집에 오셨어요. 제가 '한번 보자!' 그랬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일에 도움이 안 되겠나 싶어서, 잠깐 오셔서 하시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끝까지 마지막까지 사단이 붙들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자기를 못 죽이더라 이겁니다. 자기를... 자기 자랑, 자기의 어떤 그것이 안 죽더라 그겁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천국 가는 문제도, 믿으면서도 나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 공로라던가, 내 힘이라던가, 이것이 이제 천주교를 믿었으니까, 이 배경을, 선행으로 가는 이 배경들, 누가 보던지 그 분에 대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칭찬하기를 '정말 교양 있고, 정말 자기를 내어 놓을만하다!' 할 정도로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라 구요.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자기를 다 버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순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데려 가더랍니다. 데려가는데, 얼마나 아름답게 마지막 죽음을 하나님 곁에 가셔서,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이 병으로, 그 암으로 가셨는데, '이렇게 조용히, 이렇게 예쁘게 가는 분은 처음 봤다!' 그러더랍니다. 간호원들이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마지막까지 포기 못하게 하는 것이 뭔지 압니까? 자기입니다.
저는 제가 이 고통받을 때에, 이 고통받게 되어서 어려운 문제가 뭐냐하면, 고통받을 때에 '나' 라는 것에 초점이 더 맞추어지지, 하나님이라는 이런 어떤 그 연결이 잘 안되어요. 그래서 고통받으면, '내가 괴롭다! 내가 아프다! 내가 어렵다! 내가 힘들다!' 이렇게 연결되지 이것이, 나라는 것이 포기가 안 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포기되는 순간에 모든 문제는 여기서 포기되는 만큼 뭐가 됩니까?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보 기도!' 그럴 때에 다른 게 아닙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 포기하고, 나 자신을 누구에게?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그것이 중보 기도요. 그 다음에 내 인생에 진정한 승리가 뭐냐? 내가 포기가 되어 졌을 때에 진정한 승리가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승리하십시오!' 그러면 뭡니까? 내가 죽는 게 승리하는 겁니다. 내가 죽는 만큼 승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5장 3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살아요? "죽노라"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바울의 승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성령이 나를 인도해 가실 때에 내가 죽는 그 순간만큼, 죽는 만큼, 죽는 프로 테이지 만큼 말씀을 따라가게 됩니다. 죽는 만큼 성령의 인도 받게 됩니다. 여기에 완전한 승리가 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이런 축복의 역사로 기도하게 될 때에, 중보 하게 될 때에 거기에 모든 승리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좀 정리를 하겠습니다. 내가 '중보 한다!' '그 사람의 이런 문제 낫게 하시고, 이런 문제 해결되게 하옵시고, 이런 문제 좋게 하옵소서!'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중보 한다!' 그럴 때에 어떤 사건과 일을 중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여러분 '중보 한다!' 사람을 두고, 사람을 두고 우리가 도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나오도록 만드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어서 나의 승리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눈이 열리면 승리가 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어서 따라오는 모든 문제가 여기서 해결되는 겁니다. 사단의 손에서부터,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들어오는 길이 여기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말씀한 것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게 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에 중요한 핵심입니다. 말씀이 들리는 순간에, 그가 사실적으로, 그가 당한 모든 문제와 사건은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주일날 말씀 받고 기도하는 것, 한 주간 다 해결되는 축복된 역사의 바로 출발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말씀 받는다! '모든 문제가 여기서 안에 있잖아요.
그 다음에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만큼 뭐가 되느냐? 자신이 죽어야 됩니다. 내 자신이 죽는 만큼, 성령 충만! 성령 충만, 다른 게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만큼, 그 프로 테이지 만큼, 성령 충만!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 받을 수 있는 눈이 열릴 뿐 아니고, 실제로 인도를 받게 되는 겁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1)
마 9:1-8 / 박종순 목사
예수님을 만나면 귀신은 도망쳤고 마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병든 사람은 고침 받았고 죽은 자는 살아났습니다. 방황하던 사람은 길을 찾았고 죄인은 용서받았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를 셀 수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1. 그는 자기 힘으로 거동이 불가능했습니다.
2절을 보면 그를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은 전신이나 반신 혹은 신체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침상에 누워있었던 점으로 미뤄 전신마비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코는 숨쉬고, 발은 걷고, 손은 일하는 기능을 다할 때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풍이란 신체의 기능이 마비됐거나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에 자력거동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체기능은 왕성한데 영적 기능이 마비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기능이 마비된 사람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병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암의 경우 본인이 통증을 느끼고 자각하는 단계는 이미 치료가 늦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리 진단하고 예방해야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 건강을 진단하는 방법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성경을 읽으면서 예진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지 않으면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읽더라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둘째는 설교를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재조명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든지 방호벽을 치고 거부한다든지 비판적자세로 듣게되면 설교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 채팅으로 비유하면 내가 아무리 많은 분량의 메시지를 상대편에 보낸다고 하더라도 상대편에서 거부해 버리면 그 메일은 공중에 떠버리고 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나 자신의 건강상태를 진단하고 치료받게 되려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영적 건강이 확인되고, 처방되고, 치료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예수님께로 데려다 준 사람은 세상을 떠나신 제 어머님이십니다. 제 어머님은 외모도 초라했고, 생활은 가난했고, 학력은 무(無)였고, 사회적 지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어머님은 저를 임신하신 후 곧바로 저를 예수님께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셨고, 복중에 있는 저를 데리고 새벽기도를 다니셨고, 교회를 봉사하셨고, 주일 낮과 밤, 수요일 저녁을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복중에 있을 때부터 어머님이 선택한 신앙을 따라야 했고, 그 길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 신앙적 선택이 오늘의 저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를 주님께로 데려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와 소박한 배려가 주의 종이 되는 쪽으로 저를 인도해 주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이셨던 정선생님은 제가 글을 잘 쓰고 작문실력이 뛰어나다면서 문학을 전공해 작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셨던 오선생님은 음악선생님이셨는데 점심시간이면 저를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도시락 반을 제게 주신 후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피아노 반주를 하셨고 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너는 노래를 잘하니까 성악을 전공해 성악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도시락도 얻어먹었고 선생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일주일쯤 지난 후 다시 저를 음악실로 부른 선생님은 도시락 반을 저에게 주신 후 노래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성악가보다는 교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주간 뒤 선생님은 다시 음악실로 저를 부른 후 "너는 말을 잘하고 웅변을 잘하니까 정치가가 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 주간이 지난 후 선생님은 다시 저에게 "너는 성격이 섬세하고 손이 작고 예쁘니까 정치가보다는 산부인과 의사가 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의 기도는 주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나깨나 그 기도만 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정치가가 됐다면 보나마나 차떼기에 걸렸던지 비자금사건에 연루돼 서울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것이고, 산부인과 의사가 됐으면 환자가 오지 않아 폐업신고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는 저를 예수님께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제 어머님은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단 한번도 학교에 와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반드시 함께 가야 했습니다. 만일 교회에 늦거나 결석을 하면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인정사정 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나를 주님께로 데려다 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도 그 누군가를 주님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남편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성적 중상위인 고1학생이 있었습니다. 고1 1학기 겨울수련회에 따라 갔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는 빠지지 않겠다고…. 그런데 문제는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집사였습니다. 여느 어머니처럼 공부해라, 과외해라 하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주일이 되면 책가방을 내려놓고 교회를 갑니다.
"너 미쳤니? 교회가 대학 보내주니? 교회는 대학 들어간 다음에 가도 돼. 너 그러다 대학 떨어지면 무슨 꼴이 되겠니?"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할께요. 저 시간 낭비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하는 거냐. 제발 부탁이다. 엄마 말 좀 들어라. 너 대학 떨어지면 엄마 못 참는다."
라며 교회 가는 걸 막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과외 선생을 연결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때부터 영적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과 어머니의 강박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적 갈등이 영적 혼란으로 발전했습니다. 중상위권이던 성적이 중하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불면증이 시작됐습니다. 몸이 야위고 의욕상실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고3이 되자 증세가 더 악화됐습니다. 정신신경과에 갔습니다.
의사의 말은 신경쇠약, 의욕상실이 겹쳤다며 쉬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년 휴학하고, 그 어머니는 회개하고, 그 아이는 서울 모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했고, 지금은 외국에 나가 유학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자녀를 위한 길이 뭡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까? 주님께로 인도합시다. 주님께로 그 누군가를 인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3.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2절을 보면 "소자야 안심해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고, 6절을 보면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고, 7절을 보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죄의 선언은 중풍병보다 더 급선무가 죄사함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사함을 받습니까?
구약의 율법은 법을 지키고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쳐 줍니다. 중풍병자의 경우는 병을 고치기 전에 먼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은 죄사함받고 육신의 중풍병도 고침을 받게된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미국 이민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내의 권유를 받은 K라는 사람이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회를 나갔던 사람이고 집사 직분까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온통 교회가 맘에 들지가 않습니다. "주일 성수해라. 기도해라. 전도해라. 십일조해라. 술, 담배하지 마라. 성경공부해라." 그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17세기 쾌쾌 묵은 설교를 한단 말인가? 어떻게 미국 천지에 이런 고리타분한 교회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좀 더 현대적인 교회가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골프장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그런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완전히 시사평론, 철학강의, 문학강의, 이민가이드였습니다.
참신하고, 현대감각이 넘쳤습니다. 예배 후 가 더 멋졌습니다.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고 바로 옆에 있는 공원으로 교인들이 나가 불고기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맥주며 와인이 곁들여 술판을 벌였습니다. 여름이 되면 두 달은 방학을 합니다. 얼마나 멋진 교회입니까? 그가 바라던 이상적 교회를 만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그 교회는 문을 닫았고, 그 사람은 지금 라스베가스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왜 교회에 나옵니까?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반드시 만나고 돌아가야 합니다. 내 죄를 사하시는 예수,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질병을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건물을 만나지 맙시다. 사람을 만나지 맙시다. 프로그램을 만나지 맙시다. 먼저 예수를 만납시다. 적십자사가 적십자 회비를 내달라는 캠페인을 위해 걸어놓은 현수막 글 중에 "사랑은 동사다"라는 표어를 보았습니다. 사랑은 움직이고 실천하는 동사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동사입니다. 믿음은 이념도, 구호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동사이며 진행형입니다. 오늘 그냥 돌아가지 맙시다.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삶의 현장으로 갑시다.
일어나 걸어가라
마 9:1-8 / 김영규 목사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중풍병자 한 사람이 침상에 누인 채로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중풍병은 현대 의학에서는 腦卒中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사망 원인 중 뇌혈관 질환이나 고혈압성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전체 사망자의 20% 이상 됩니다. 인구 10만 명당 200 명 꼴인데, 선진국인 미국은 10만 명당 400명, 독일은 580명 정도나 됩니다. 뇌졸중은 원인별로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뇌소동맥이 파열되어 출혈을 일으키는 뇌출혈이고, 둘째는 뇌의 동맥 속에서 피의 덩어리가 막혀서 피가 흘러갈 수 없어서 생기는 뇌경색입니다. 뇌출혈은 주로 혈압과 관련이 있고 뇌경색은 주로 피의 혼탁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뇌졸중에 걸리면 생명을 잃거나 혼수 상태에 빠집니다. 다행히 회복하는 경우에도 마비증세가 나타납니다. 이 마비 증세는 쉽게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됩니다. 언어 장애가 오기도 하고, 잘 걷지 못하고, 손발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들려 온 병자는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아마 상당 기간 누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이 가까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최후의 소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소망으로 주님 앞에 왔습니다. 평생 지병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병도 고쳐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첫째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2절)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신념이나 자신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저희의 믿음이라고”했습니다. 複數形입니다. 주님께서는 환자 자신의 믿음과, 이들을 떠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함께 보셨습니다.
첫째는 환자 자신의 믿음입니다. 이 환자는 여러 날 누워 앓으면서 자신의 병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으로는 별 생각을 다 했겠지요. 가장이 되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되는데 누워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죽자니 가족들이 불쌍해서 그냥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저도 큰 병을 앓아보니 그 심정을 알겠어요. 한편으로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죽을 수 없습니다. 기를 쓰고 다시 일어나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만일 살아나는 길이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찾아갔던 사람마다 다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를 쓰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가족들에게 간절히 부탁했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신다고 하니 나를 꼭 예수님께 데려다 다오! 죽어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꼭 예수님을 만나야겠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믿음으로는 기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런 믿음을 보셨습니다.
둘째는 환자를 들고 온 가족들의 믿음입니다. 그들 역시 이제는 예수 밖에는 소망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계신 곳까지 환자를 데리고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먼 거리인지 모르지만, 환자를 침상채로 들고 왔습니다. 길이 험한 것이나 먼 거리를 개의치 않고 환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의 열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해 보니 사람들로 초만원입니다. 안방, 건넌방, 문간, 통로, 마당, 모든 곳이 환자들과 구경군들로 가득합니다. 들어갈 방법이 없어요. 웬만하면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기다려 보자!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을 언제 고쳐주시고, 내 차례가 온단 말인가? 기다리다가 끝날 수는 없고, 예수님은 꼭 만나야 되겠고! 고민고민 하다가 마침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가자! 유대인들의 집은 평평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올라가 쉬기도 하는 곳입니다. 지붕에 올라가서 뭘 하자는 겁니까? 지붕을 뜯어내자는 겁니다.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러나 집 무너지는 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우선 환자를 고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요즘 응급실에 환자를 싣고 가도 빨리 차례가 오지 않습니다. 응급실에서 응급 처치를 받는 게 아니라, 만만디 치료를 받아요. 소리치고 극성을 떨어야 관심을 가집니다. 이 사람들의 심정을 그랬을 겁니다. 예수께서 한참 말씀을 하시는데 지붕에서 흙먼지가 쏟아지고, 뭐가 내려옵니다. 놀라서 쳐다보니 침상에 누운 환자가 내려와요.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런 몰지각 한 사람들이 있나! 아무리 환자가 급하다 해도 남의 집을 부숴요?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기뻐하시고 칭찬찬하셨습니다. “야! 믿음 한 번 좋구나!” 주님은 환자를 데려온 이 사람들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 아픈 환자들이 있습니까? 본인만 기도하지 말고, 온 가족이 합심하여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4-16) 하나의 장작불은 꺼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 개의 장작 불은 활활 타오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합치면 몇 백 배의 힘이 나타납니다. 가족의 믿음을 합하세요. 구역원들의 믿음을 합하세요. 온 교회의 믿음을 합해야 합니다. 합심하여 믿는 곳에 여리고성이 무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를 떠메고 온 가족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21:21)
먼저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주님의 치료 절차입니다. 주님은 먼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침상에 누운 환자에게 당연히 병세를 묻고 만지시거나 고쳐주실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느냐?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노라고 하십니다.
죄 사함 받는 것! 그것이 환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죄 사함 받는 것은 평생의 중풍병을 고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죄 때문에 병들고, 죄 때문에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죄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죄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영혼이 더럽혀집니다. 죄가 뭡니까? 죄는 단순한 실수나 부족이 아닙니다. 죄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모든 죄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요 반역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무의식적 행동이 아닙니다. 알면서 저지르는 고의적 행위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명령을 몰라서 위반했습니까? 위반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위반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계명으로 금한 사실들은 헌법 조문처럼 명백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것 죄악입니다.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나님 경배하지 않는 것이 죄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탐욕, 모두가 명백한 계명 위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계명 위반의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당연히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죽음의 심판을 받습니다. 육체가 죽고 영혼이 죽어요.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 앞에 지옥에 떨어져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이런 죄의 심판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질병도 결국은 인류의 보편적인 죄 때문에 다가온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죄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병들어 죽든, 사고가 나서 죽든, 노환으로 죽든, 마찬가집니다. 죽기 전에 죄를 먼저 해결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병자에게 “소자여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은 용기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용기와 평안은 죄 문제를 해결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죄를 씻지 못한 마음은 영원히 평안할 수 없습니다. 사실, 육체를 괴롭히는 중풍병보다도 사람을 더 괴롭게 하는 것은 마음의 불안과 염려, 절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고백했습니다. 육체는 세월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병들고 약해집니다. 그러나 정작 건강해야 될 부분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죄를 해결하여 마음을 평안하게 하라고 하신 겁니다. 오늘 우리도 육체의 병을 고민하기 전에 마음의 죄를 먼저 청산하고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명백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인간 스스로는 죄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합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원수 된 심판과 저주의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제아무리 선하게 살았다는 사람도 죽음 앞에 설 때쯤 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품에 갈 수 있을까?” 죄란 사람에게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겁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 하나님을 무시한 것, 내 마음대로 산 것이 다 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로, 주님만이 우리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죄 사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죄를 청산하는 주체가 누군가 하는 점입니다. 죄를 청산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병자더러, “네 죄는 네가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네 죄를 사하여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성자도 인간의 죄를 사하여준다든지 해결해 준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자기 죄를 해결하라고 합니다. 고행을 하든지, 선행을 하든지, 스스로 자기 죄 값을 치루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의 죄를 사하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감히 인간의 죄를 사하거나 해결해 주겠다고 나설 수 없습니다. 죄를 사하여 줄 만 한 자격 있는 자도 없고, 사죄의 능력을 가진 자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가능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죄가 없는 분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가 없는 육체로 오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린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세 번이나 공언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노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은 어린양 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처음 대면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죄인들을 향하여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병을 고치기 전에 먼저 마음의 죄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안을 얻으세요.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은 죄에서 영원히 해방됩니다. 다시는 정죄가 없습니다. 죄의 두려움, 심판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정죄를 면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주님의 사죄 선언을 마음으로 들으세요.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세요. 그러면 육신의 문제는 곧 해결 됩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죄사함을 받았을 때, 육신의 병은 쉽게 해결됩니다. 주님은 赦罪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고 곧 중풍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고치신 방법은 말씀 한 마디 뿐입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병자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죄를 사하는 것보다 육신의 중풍병을 고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마음의 죄를 해결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을 고칠 때는 말씀 한 마디로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침상을 지고 가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침상이 아까우니 도로 가져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뜻은 아니지요. 지금까지는 침상의 신세를 졌지만 이제는 네가 침상을 들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약품 선전에 보니까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이 지팡이 신세를 지고 다니다가, 그 약을 사용하고 깨끗이 나아서 지팡이를 놔두고 두 손을 치켜들고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아프면 모든 것에 신세를 져야 합니다. 가족들의 신세를 집니다. 의사의 신세를 집니다. 온갖 약품의 신세를 져야 하고, 병원 물건들마다 신세를 집니다. 그러나 병에서 놓임 받으면 더 이상 신세질 것이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혹시 아파서 사람에게 신세지고 물건에게 신세지고 계십니까? 이제 고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병에서 해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의지하던 것들로부터 해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주님은 이 병자더러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가장으로서 집안 식구들에게 하지 못한 일들을 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족 부양의 책임자로서, 일해야 될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프면 가족으로서의 책임을 다 못합니다. 돈벌이를 못 합니다. 자녀 양육을 못 합니다. 부부생활을 못 합니다. 그러나 병에서 고침 받으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모든 병을 고치시고, 행복한 가정의 일원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건강은 가정 행복의 기초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건강하여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항상 그렇듯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곳에서도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첫째는 반대자들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행동을 비방했습니다. 병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고, 오직 주님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헐뜯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를 비난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폄하합니다. 모세 시대에 이집트의 파라오는 하나님의 기적을 볼수록 마음이 더 강팍해졌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죄사함도 받을 수 없고, 병고침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기쁘게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중풍병을 고쳐주신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고 영접하는 일입니다. 오늘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마음의 평강과 기쁨을 얻습니다. 육신의 건강은 영혼이 잘 되는 사람에게 따라 오는 선물입니다. 오늘 바로 이 은혜를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사함을 받는 믿음
마 9:1-8 / 이수영 목사
마태복음의 기자에 따르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거라사인의 땅이라고도 하고 가다라 지방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배를 타시고 호수 맞은편에 있는 예수님의 "본 동네"로 돌아오셨을 때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본 동네"라고 한 것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시던 동네가 가버나움이었기에 그곳을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가버나움에서 어떤 사람들이 중풍에 걸려 스스로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없는 한 사람을 침상에 누운 채로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나아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시던 곳을 입추의 여지없이 메우고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거기에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5:17).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당장 서기관들의 귀에 거슬리게 들렸습니다. 서기관들은 속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속으로 하고 있었던 생각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속생각은 예수님에게는 악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본문 4절에서 보는 대로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그 서기관들이 속으로 하고 있었던 악한 생각들이란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죄 사함을 받았다니, 제가 뭔데 죄를 사해준다는 거야,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를 사하실 분이 없는데. 저 자가 아주 교활하잖아? 만일 '일어나 걸어가라' 했다가 안되면 허풍 떨던 것 들통날 테니까 하는 말이 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허긴 죄 사함 받았는지 아닌지는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으니 제 말대로 안 되도 누가 뭐라 할 말이 없을 것을 아니까 그러는 것 아니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교활한 것도 유분수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을 감히 제가 하다니. 그러면 뭐야, 제가 하나님이란 말이야? 저런 자는 죽여버려야지 가만 둬선 안되겠네" 등등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파하신 서기관들의 속생각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어떤 질병도 다 고치실 권세와 능력을 지니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심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에 그들의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리고는 중풍병자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 말씀대로 그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첫째로 자신에게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자신이 없어서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대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것이 아님을 증명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는 그의 능력이 죄를 용서하기도 하시는 그의 신적 권위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심으로써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신 말씀뿐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 즉 자신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말씀 또한 참되고 믿을 수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중풍병자와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아온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려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그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이란 과연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첫째는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된 믿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에게는 중풍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다고 믿는 믿음과, 그가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믿음입니다. 그들의 이 확고하고 간절한 믿음은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왔는지를 볼 때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그 과정의 묘사를 생략하고 있지만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그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두 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모여있었습니다.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무리들로 인해 침상을 메고 들어갈 길을 뚫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기와를 벗기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거기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만 가면 낳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려는 간절한 소망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대담하고 끈질긴 행동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그 중풍병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는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지만, 처음에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일어서서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엉뚱하게 여겨지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마음 속에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갈망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중풍병자는 단지 자신이 자유롭게 걷지 못하는 것만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체적인 불구뿐만 아니라 영적인 불구 또한 치유 받기를 갈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의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큰 갈망인 죄 사함에 대한 갈망을 예수님께서는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서 보신 믿음에 있어서 더 크고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런 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 중풍병자뿐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침상채로 메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내려가게 할 정도로 결사적으로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만든 동기도 단지 일어나 걷고 싶은 바램이었다기보다는 죄의 용서를 받고자 하는 갈망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단지 일어나 걷고 싶은 바램 때문에 왔었다면 도저히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 없도록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들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는 문제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을 뵙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한 그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자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기에 앞서 "안심하라"는 말씀을 먼저 덧붙이신 것은 자신의 죄의 인식과 그 죄의 용서에 대한 갈망으로 처절한 상태에 있었던 그의 심령을 달래주시려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뜻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셋째는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메고 나아온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기자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 곧 거라사인의 땅이라고도 하는 곳에 가셨을 때 있었던 사건에 바로 이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입니까? 군대라고 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밤낮으로 어디서나 소리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기도 하며, 고랑이나 쇠사슬로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셀 뿐 아니라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접근조차 할 수 없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 그에게서 귀신들을 다 내쫓으시고 그를 온전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고쳐주신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 가다라 지방에서의 사건에 곧바로 이어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잇달아 전해지는 두 사건 속에서 우리는 공통되게 예수님의 치유행위를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주목할 것은 꼭같은 예수님의 치유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가다라 지방에서의 거라사인들의 반응은 사뭇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혐오감과 공포심을 안겨주고 불편함과 위협이 되었지만 누구도 손대지 못하던 존재,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너무나 불쌍한 한 인간을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거라사인들은 그렇게 놀랍고 고마운 일을 해주신 예수님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에게 그들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일을 행하신 것을 보았다면 주위의 귀신들린 사람들, 병든 이들, 몸이 불편한 이들을 다 데리고 와서 그들도 고쳐주시기를 간청해야 마땅할 것인데, 이 거라사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이 빨리 없어져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마8:34에서 뭐라고 합니까?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런데 갈릴리 호수 건너편 예수님의 본 동네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광경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 계신 곳에 구름처럼 몰려오는 무리들이며,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침상을 달아 내리면서까지 병든 이를 데리고 나아와 예수님께 그 치유를 간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보신 믿음 속에 고통받는 형제·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실천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참된 믿음에 관한 예수님의 일련의 가르침들 가운데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참된 믿음의 면모를 우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육간의 모든 병을 치유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오늘 본문 직전에 있는 8장에서 그 어떤 병도,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리고 그 아무리 많은 귀신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음을 차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장의 첫 이야기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만유에 대한 권세를 지니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에게 죄 사하심의 권세가 있음을 힘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갈망하는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그에 의한 해결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단지 병 낫고, 가난을 해결하며,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면 안 됩니다.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고, 죄로부터 자유해지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일에 무관심할 때 참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주님께 나아옵니까?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는 이유가 그저 이런 저런 일상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얻기 위한 것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에 앞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 주위의 형제·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그 실천입니다. 우리 주위의 형제·이웃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이해와 나눔의 실천 없이 참 믿음을 가졌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려는 의지 없이 믿음을 논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참 믿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의 침상을 메고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내는 사랑과 헌신이 함께 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서 보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안심하라
마 9:1-8 / 박종순 목사
독약과 양약의 차이는 "양"에 있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지나치게 쓰거나 먹으면 독이 되고, 독약이라도 적당량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약이 된다는 것이 의사들의 주장입니다.
영양제가 몸에 좋다고 과다 복용하면 독이 되고, 보신제가 제아무리 좋아도 적당량을 지나치면 해가 됩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수면제는 도움을 주지만 한꺼번에 많은 양을 복용하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전쟁 무기로 사용하는 생화학 무기 가운데 탄저균과 보툴리누스균이 있다고 합니다. 탄저균은 미국 9.11 테러 이후 우편으로 여기저기 배달된 백색가루를 말하고, 보툴리누스균은 신경과 근육을 마비시키고 결국 사람을 죽게 만드는 생화확 무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툴리누스균으로 개발한 것이 얼굴의 주름살을 없애기 위해 만든 보톡스라고 합니다. 사람의 근육을 마비시키고 죽게 만드는 보툴리누스균으로 사람을 예쁘게 만드는 치료약을 개발한 것입니다.
불안, 근심, 걱정, 염려, 실패, 절망 이런 것들은 없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보툴리누스균이 미치광이나 전쟁주의자들 손에 들어가면 대량살생 무기가 되지만 의사 손에 들어가면 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안, 근심, 걱정, 염려, 절망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안심, 평안, 기쁨, 희망이라는 양약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과 14장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세 차례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정황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질병 중에서 안심하라
9:1-8은 중풍병 걸린 사람을 고치신 기사입니다. 2절을 보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병의 근원이 죄에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창세기 3:16 이하를 보면 범죄한 하와와 아담이 받은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잉태하는 고통, 종신토록 수고하고 자식을 낳고, 땀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고…"라는 저주가 주어졌습니다.
질병, 고통, 수고, 불안의 원인을 규명해 올라가면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고 치료하시는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고, 6절을 보면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원인을 고치고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병은 원인이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 정도언 교수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몸과 마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에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몸만을 살핀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환자들을 자세히 면담해 보면 마음 속의 갈등이 신체 증상을 불러 온 것을 알 수 있다. 원인이 마음에 있으니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자 나올 것이 없다"는 글입니다.
최근 미국 하버드 의대가 밝힌 100세까지 사는 건강 장수법에 의하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너그럽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100세를 넘긴 여자들의 경우 우울증, 불안감, 적대감이 적었다고 합니다.
유머를 생활화하고 잘 웃는 것도 건강의 비결이라고 합니다. 노먼 커즌즈는 "웃음은 체내의 조깅"이라고 했습니다. 웃으면 심장운동이 증가하고 약간의 혈압 상승작용이 일어나 신체 조직에 산소 공급이 활발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을 때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아져 신진대사가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스트레스가 적고, 혈압이 안정되고, 면역 기능이 강화된다고 하버드 의대의 허비트 빈스 박사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죄 사하는 은사가 있다", "내가 네 죄를 사한다",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가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안심하라",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3주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생각이 납니다. 저를 수술했던 김용일 박사가 "내일은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계속 드린 기도는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것이었고, 맨 먼저 교회에 올라와 드린 기도 역시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안심하라, 죄사함 받았다, 고침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씀이야말로 어떤 말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질병 중에서라도 안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능력과 권세로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근심, 걱정, 불안, 염려, 증오심은 질병을 유발하고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고통이 길게 계속되더라도 안심하라
마태복음 9:20이하를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고침받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행을 바라고 만진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옷깃을 스친 것이 아닙니다. 믿고 만진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녀에게 주님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12년 간을 부인병으로 고생했습니다. 너무나 긴 세월이었고 고통으로 뒤범벅된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안심하라"는 복음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로부터 그녀의 고통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고통의 세월이 길었는가, 짧았는가, 병이 큰가 작은가, 사건이 심각한가 가벼운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한 내과 의사 매슈스 박사는 환자들에게 처방전을 써줄 때마다 성경구절을 함께 적어 준다고 합니다. 이유는 신앙의 힘이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 안에 있는 125개의 의과대학 중 약 50개 대학에서 영적인 문제를 커리큘럼에 넣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힘이 환자의 병을 고치는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심각한 병일 경우는 더합니다. 그러나 염려하고 불안에 떤다고 해서 병이 치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염려나 걱정은 병을 더 깊게 만들뿐입니다. 걱정과 불안이 나를 엄습할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만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만지셨고, 나를 아시고, 나를 고치시는 능력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병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를 내시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시경은 줄이 연결되어 있고, 내시경이 커서 목구멍으로 넘어가기가 힘든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개발된 무선 내시경은 크기가 비타민 정만 한데다 줄이 없습니다. 그 안에는 카메라, 발광기, 배터리, 무선영상 전송장치가 들어 있어 식도, 십이지장, 소장, 위장 등을 8시간동안 자동으로 돌면서 각 부위를 정확하게 촬영해 전송해 줍니다. 그리고 8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배설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자는 마취를 할 필요도 없고, 구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몸의 약함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시편 139:2을 보면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병이 12년이더라도 안심하라", "네 고통의 세월이 길더라도 안심하라"고.
우리는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는 22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멘" 해야 합니다.
3. 풍랑 중에도 안심하라
마태복음 14:22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신 사건과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누구라도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7절을 보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풍랑 때문에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겁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32절입니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호수지만 헐몬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 들어오고 이상 기류 때문에 때로 바다의 풍랑보다 더 강한 풍랑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는 손으로 노를 젓는 작은 어선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것처럼 풍랑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건강이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내 건강은 아무 문제없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폭풍처럼 나를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사업이나 가정이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계획이 좌초되고 꿈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리질러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소리쳐 찾아야 합니다.
14:32을 주목해야 합니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렵고 겁나고 불안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 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풍랑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돈도 있고,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직업도 있고,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고, 형제도 있고, 친구도 있는데 왜 걱정과 근심과 아픔과 불안이 떠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과 삶의 배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리쳐 나를 도와달라고 부르짖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쟁으로 인한 갈등과 분열, 다툼과 불안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경제도 불안하고, 정치도 불안합니다. 마치 갈릴리 바다의 풍랑으로 고생하던 제자들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신앙이 있습니다.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455장 찬송이 떠올랐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렇습니다. 주 안에,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근심도, 걱정도, 염려도, 불안도, 평안과 감사와 안심으로 변합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안심하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복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을 치유받다
마 9:1-8 / 김영주 목사
서울에 사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느 날 갑자기 춤바람이 나서 가출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이해와 용서로 다시 가정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이 여인을 가까운 교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교회가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당신도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라는 의도에서 였습니다. 물론 남편도 같이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독산동에 있는 어느 교회에 데리고 나갔는데 그 날은 수요일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요지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고로 죄짓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여인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설교를 통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은 이제 무슨 벌을 받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갔는데 설교 내용은 달랐지만 요지는 같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달, 세 달을 교회를 나가는데 이 목사님은 매 설교마다 꼭 한 두 번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때마다 이 여인은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혼자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렇게 비참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 그렇게 큰 죄인이 되어버렸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 카바레에서 자기를 꼬시던 제비족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의 다리가 너무나 예쁘게 잘 빠졌네요" 이 말에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두 다리가 원수입니다. 그날부터 다리를 주먹으로 치면서 저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놈의 다리, 이 잘라버릴 다리, 이 못된 놈의 다리, 이 빌어먹을 다리..."
하면서 다리를 두드립니다. 이렇게 두 주일간 두드렸는데, 두 주일 후 새벽에 다리가 이상해졌습니다.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전혀 걸을 수 없습니다. 남편이 영문도 모르고 이 병 고쳐보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전혀 고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누가 벌을 주지 않아도 먼저 양심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 사건은 죄가 얼마나 질병과 깊이 연관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비슷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였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중풍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중풍 병에 걸린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죄인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은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병자에게 '소자야' 하고 부른 것을 보면 젊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젊은이는 성적인 죄를 범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육체적인 어떤 죄를 졌는지 모릅니다. 잘못된 습관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어떤 은밀한 죄를 지으면서 이것 때문에 깊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죄를 졌는지는 모르지만 이 죄 때문에 무척 괴로운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2절 중간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이 젊은이는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누가 알까 걱정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예수님이 이 젊은이의 상태를 알아볼 만큼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언제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이 젊은이는 자신의 죄를 바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 죄를 계속 가지고 있었고, 죄책감과 두려움, 양심의 호소에 대한 불안으로 그의 마음은 가득 찼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나중에는 중풍 병이란 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경우에 중풍병은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걸린 것입니다. 이 병의 상태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상당히 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 사람들이 이 사람을 침상에 누운 체로 데리고 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심한 상태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마비가 온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마비가 왔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여인처럼 죄로 인해 마비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도 희망의 날은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마을에 오신 것입니다. 더구나 믿음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으로 들어갈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병자를 내려놨습니다. 참 대단한 친구들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랫동안 괴롭히던 죄 문제가 한순간에 씻겨나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이 젊은이가(자기들의 친구가) 당시에는 못 고치는 중풍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갖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던 믿음입니다. 데리고 오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을 것 아닙니까? 당신들 뭐 하느냐? 헛수고하지 말라고, 가족들도 말렸을지 모릅니다. 아니라면 친구들보다 가족들이 먼저 데리고 나왔을 것입니다. 아무도 소망을 갖지 않는 상태에서 소망을 갖고 친구를 데려온 것은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죄로 인해 망가진 죄인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온 믿음입니다.
친구들이 병자를 데려올 때 이렇게 말하면서 데려왔지 않겠어요?
"너 예수님 만나야 산다". "너 예수님 만나야 죄 사함 받고 새 사람된다." 이 병자가 나는 몸이 불편해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했을 때, 침상 체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내 친구가 예수 믿겠다는 데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수고한 것입니다. 역시 이런 친구를 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교회 안 갈려고 할 때 억지로 라도 여러분을 끌고 갈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몇 이나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 우리를 끌고 술집으로, 도박장으로, 나이트 클럽으로, 경기장으로, 고스톱 치자고 끌고 갈 수 있는 친구는 많지만 나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친구는 몇이나 있습니까? 믿는다고는 하지만 신앙의 체험도 없고, '너도 하나님을 만나야 산다'고 말 한마디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음 좋은 친구들을 두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가끔 이런 사실을 몰라서 그렇지 말입니다.
세 번째는 일반적 시각을 깼다는 것입니다.
당시 중풍 병은 하나님이 주신 병이란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병은 죄의 결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가봤자 아무효과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에 나가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이런 생각을 깨뜨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야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네 번째는 이 병자의 믿음입니다.
친구들이 아무리 병자에게 예수님 만나야 한다고 했어도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했거나 요청했습니다. 나를 예수님께 데려가 달라고. 친구들의 믿음에는 이 병자의 믿음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자마자 예수님은 용서를 선언 하셨습니다. 그렇게도 괴롭히던 죄가 사라진 것입니다. 죄의 짐을 벗어버렸습니다. 이 사람을 이렇게 용서하신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나왔다는 한 가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이 사람이 회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께 나오는 순간 이미 이 사람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예수님은 병자를 보면서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할렐루야!!
참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이 병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받아주셨습니다. 품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어쩌다 그랬어?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어, 왜 그랬어?"
"그러기에 빨리 회개하지 이제까지 버티고있어? 바보같이"
"이번에 용서해주면 다음에 안 하는 거야, 약속하지?"
아닙니다. 그냥 병든 몸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을 용서하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청문회를 한다면 누가 그 앞에 서겠습니까? 누가 감히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조금 있다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6절에 보시면,
"일어나 네 자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병자는 그 말씀을 믿고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죄 용서를 받으면서 중풍 병까지도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특이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이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병자가 나와서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요청하고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무슨 말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먼저 말씀해버렸습니다. 그것도 정답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죄로, 중풍 병으로 고생한 이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참을 수 없는 사랑이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한참 꿈을 펼칠 나이에 있는 젊은이가 죄로, 병으로 고생하는 장면을 보면서 어서 빨리 고쳐줘서 새 삶을 살게 하고 싶은 주님의 마음이 보여집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죄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고민, 두려움, 질병으로 괴로워 할 때 주님께서는 어서 빨리 우리를 치료해 주기 원하십니다. 새 사람으로 살게 하고 싶어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인간을 이렇게 만든 사단의 장난에 대해 참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헨드릭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는 사단의 제일 좋은 친구이며 인간의 최대의 적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관심은 한 중풍병자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을 보시면 이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막2:2절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는지 문 앞까지 꽉 찼다고 말했습니다. 넘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서기관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길은 이런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여기 한 중풍병자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 자리에 중풍병자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집중하십니다. 본문에서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절,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본 것은 친구들의 믿음의 행동이었지만 말씀하신 대상은 중풍병자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친구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 5절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 말씀에서 뭐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참 감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어떤 말이 더 이해하기 쉬울까? 까지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병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듣고 싶은 말은 '죄 사함'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어려운 말로 병자를 헷갈리게 하거나 괴롭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이해되기 쉬운 말을 선택해서 해주셨습니다. 이 말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 말하니까 바로 서기관들이 참람하다고 시비를 걸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이 없어서 예수를 못 믿는 것 아닙니다. 배움이 짧으면 짧은 대로 예수님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주십니다. 역시 이 병자에게 예수님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6절,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었지만 대화가 옆길로 가지 않고 바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이 중풍병자 한 사람에게만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6절 마지막에 한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여기 '집으로 돌아가라' 한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왜 교회로 가라 하지 않았을까요? 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왜 신학교가라, 선교사로 가라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라 했을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다 들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한들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생명의 은인이요, 제 2의 인생을 살게 해 준 분입니다.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집으로 가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람 때문에 가족들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깨지고,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정에도 회복과 치유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건강한 육체만 주신 것이 아니라 건강한 영혼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의 육체적인 질병만 고쳐주셨다면 얼마 안되어 다시 죄로 인해 다른 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동시에 죄에서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정죄 하지 않고 받아주셨다는 용납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다음부터 이 사람은 하나님께 나오는데 걸리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납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7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죄 사함 받은 이후에 이 사람의 믿음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이 병자에게 예수님은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안수기도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말씀만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병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들면서 이 믿음을 기초로 해서 스스로 일어섰습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분이라면 저 말씀에 내가 순종할 때 나를 치료하실 수 있겠구나하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죄 문제가 해결되면 많은 이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오지만 많은 성도들 속에서 숨어있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복해서 빠지는 죄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사람도 피하고 싶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 받을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육신의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세계가 말할 수 없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죄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바로 이런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가지고 나오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고 해결해주십니다.
그 실제적인 예가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던 여인입니다. 하반신 마비가 왔던 이 여인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병원도 그녀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이것은 영적인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다니던 광명시의 한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광명의 목사님의 설교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구나, 나 같은 사람도 용서하시는구나, 나도 용서받을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3주정도 다니는데 이 여인의 하반신 마비가 풀렸습니다. 다리가 멀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여인을 다시 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죄 사함과 함께 육체의 질병도 치유된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도 이런 치유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
마 9:1-8 / 김동호 목사
옛날 우리 동양의 선조들은 도(道)를 닦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는 길이 있다고 저들은 믿었고 그 길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동양의 선조들이 도를 닦을 때 서양의 선조들은 철학을 하였습니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진리를 로고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찾는 진리란 사람이 사람답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는 식과 이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양의 도와 서양의 철학은 그 근본과 성격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길과 진리가 되신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바로 그 길과 진리가 되신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모태 교인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어려서는 그저 자연스러운 생활로서 습관처럼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교회를 다니고 뿐만 아니라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까닭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바로 그 길과 진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기가 막힌 삶의 이치와 법 그리고 식을 발견합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 내가 마땅히 가야할 삶의 길이 있고 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은 생명과 같은, 보물과 같은 진리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로마서 6장 23절의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못사는(사망) 이유가 가난 때문인 줄 알았는데 성경은 못사는 이유를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하여 우리의 욕심을 채워 부자가 되어야 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가 잘 살려면 바로 그 욕심과 죄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뚱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잘 살기 위하여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은 가면 갈수록, 열심히 가면 열심히 갈수록 더 힘들게 되고 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살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못살게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과 식이 맞습니다. 잘 살려면 가난과 싸우지 아니하고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말고 그 욕심을 버리려고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과 식이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길과 식은 틀린 것입니다. 빨리 잘못된 길과 식을 버리고 바른 길과 식을 찾아야만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삶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죄입니다.
가난 자체가 무조건 다 귀한 것은 아니지만 가난 중에도 깨끗한 가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청빈이라고 부릅니다. 그 깨끗한 가난은 오히려 우리를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우리를 못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것을 못사는 것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무조건 부유하게 사는 것은 잘 사는 것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우리를 못살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는 지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목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들으려고 사방에서 모여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들으려고 저를 청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거의 쉬지 않고 전화가 옵니다. 저를 집회에 청하는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 정말 거의 하루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읽으려고 제 책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목사님들의 책꽂이에는 의례 제 책 한 두 권쯤은 거의 다 꽂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제 설교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사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시편 8편 5절의 말씀과 같이 저를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저는 정말 그와 같은 삶을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삶을 살 자격이 사실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 속에 제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 죄들이 살아서 나를 공격하면 나는 하루아침에 이 영광스러운 삶을 잃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영광스러운 삶은 사람들이 저의 죄와 허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제가 정말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를 알지 못하고 저에게 속아서 저를 영광스럽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저를 알지 못하시고 저에게 속으셔서 저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하시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의 죄와 허물을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저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의 그 치명적인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제 대신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우리의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은 모든 죄를 사하시고도 남을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죄는 사랑으로만 용서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느 날 예수님이 형제의 죄를 일곱 번 까지 라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 씩 일곱 번 까지 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것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용서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꼭 한가지 경우에서만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부모가 자식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경우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죄를 정말 일흔 번 씩 일곱 번 까지 라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 아내에게 엄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곤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아내는 '엄마는 아빠를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에 너희들은 똑같이 사랑한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는 저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 아내는 우리 아이들의 죄를 일흔 번 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아마 저의 죄를 그렇게까지 용서해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제 아내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만큼 사랑하는가가 얼마만큼 까지 용서할 수 있는 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고등부 교육전도사를 할 때 어느 학생 하나가 새해에 카드를 보냈습니다. 한복 소매에 손을 꼽고 세배를 드리는 그림의 카드였습니다. 카드 전면에 '전도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얼마큼?'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카드를 열면 소매에서 손이 빠지면서 손이 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손이 벌려져 있는 카드 안에는 이와 같은 글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만큼'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카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카드입니다. 그 십자가의 카드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하나님의 멧세지가 적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 물으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이만큼....'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이만큼'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길 수 있는 죄가 세상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존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사형 집행 전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살인마라고 불리던 고재봉과 김대두도 사형 집행 전에 모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저들을 송사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사탄이 저들을 송사 했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저울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한 쪽에는 저들의 죄를 놓고 다른 한 쪽에는 십자가를 놓아라. 그리고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를 달아보아라"
십자가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주시고 알려 주시기 위하여 그냥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하시면 될 것을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그 능력과 권세가 저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제가 오늘 이와 같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저의 죄를 모르시고 저에게 속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저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양심을 어기는 것으로 유혹을 하다가 막상 그 유혹에 걸려들면 그 양심을 들고 나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것을 저는 사탄의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1980년 5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기 전 마음에 깊은 가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제게 준 가책이었습니다. 사탄은 양심을 통하여 저에게 '너 같은 것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라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제 죄를 기억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몹시 고민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즉시 그것이 사탄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죄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탄이 다시 그와 같은 양심으로 저를 공격할 때 저는 사탄에게 마음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그와 같은 죄인이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여 주셨다'
그 대답을 하는 순간 저는 마음에 평안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가 십자가의 보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새 사람이 되고 목사까지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순간 사도바울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말씀과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겠다'(갈 6:14)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누리는 이 영광스러운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능력은 저에게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헛된 부귀와 영광을 붙잡지 마시고, 헛된 욕심을 좇아 사시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욕심을 좇아 살지 말고, 그 욕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내고 길 되시고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 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저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아이들을 때려주곤 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그것을 미개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잠언 13장 24절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매를 들곤 했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 했다고 하면 매를 그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훈계를 하고 보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금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조금만 있으면 언제 매를 맞았나 하리만큼 까불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럽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어른을 때려주면 평생 원수가 될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여러분 어떠시겠습니까? 아이가 잘못하여 혼을 내 주었습니다. 아이가 잘못 했다기에 용서를 해주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나오지를 않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고 아이 방에 가보니 아이 놈이 책상에 앉아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였지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나쁜 놈이야. 나는 죽일 놈이야' 그러고 있다면 여러분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얼마나 괘씸한 일입니까? 아버지가 용서했으면 자기도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까불고 장난치고 밥 먹고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듯하고 양심적인 사람 중에 가끔 이렇게 어리석고 괘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루시고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셨는데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평생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 평생을 영적인 중풍병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 죄가 우리를 송사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수치를 당하고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리 만큼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들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함 받은 죄의 종으로 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리를 들고일어나 걸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같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살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다고 간증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