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쇼몽’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과 ‘덤불 숲’을 묶어 1950년에 만든 영화다. 영화는 다음 해인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고, 미국에서도 작품성을 인정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일본영화와 아시아 영화를 세계에 알린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영화가 지금도 세계적인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기존 영화들의 이야기 구성을 비틀어 버린 플롯의 혁신과 이야기의 철학적 주제 외에 촬영과?음악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개봉 이후 영화의 주제를 빗대어 ‘라쇼몽 효과’라는 심리 용어가 탄생했다. 보는 사람마다 자기 처지에 따라 다르게 말하는 이런 현상을 학자 모이니한 은 ‘라쇼몽 효과’라고 정의 했다.
배경은 전란이 난무하던 헤이안 시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어느 날, 반쯤 무너진 라쇼몽(羅生門) 아래 세 사람이 모여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무꾼이 어느 날 오후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사무라이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런데 사무라이가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의 관련자 4명의 진술이 다 엇갈리며 관청에서 진실을 가리게 된다.
맨 먼저 진술한 것은 산적 이다. 그는 자신이 결투를 벌여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털어 놓는다. 사무라이를 결박해 놓고 그의 아내를 겁탈한 뒤 자리를 뜨려 하자 사무라이의 아내가 “두 남자나 알고 있는 내 치부를 안고 사느니 죽느니만 못하다”며 남편을 죽이라고 사주해 칼부림을 했다고 진술한다.
이어서 사무라이의 아내가 진술한다. 그녀는 산적에게 몸을 빼앗긴 뒤 남편인 사무라이에게 단도를 들고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남편은 정절을 잃고도 자결하지 않은 아내를 노여움도 슬픔도 아닌, 혐오뿐인 눈빛으로 응시한다. 그 시선에서 절망을 느낀 아내는 사무라이 앞에서 칼을 든 채 실신해 쓰러진다. 아내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 단도가 남편 가슴에 꽂혀 있었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무당이 등장한다. 무당은 사무라이의 혼이 빙의되었다. 산적이 아내를 유린한 뒤 함께 살자고 하자, 아내는 조건으로 남편을 죽이라고 한다. 그녀의 가증스러움에 놀란 산적은 여자를 쓰러트린 뒤, 사무라이에게 다가가 여자를 죽일지 살릴지 묻는다. 그 사이 그녀는 도망치고 사무라이는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결을 했다고 증언한다.
마지막, 이 모든 걸 지켜봤던 나무꾼은 사무라이의 아내가 싸우기 싫어하는 두 남자를 부추겨 결투를 시켰고, 두 남자는 비겁하고 추잡한 개싸움을 벌인 끝에 산적이 이겼다고 한다. 알고 보니 나무꾼도 사무라이 아내의 진주가 박힌 단도를 훔쳤다. 결국 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을 정당화 한다. 그럼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이런 의문 속에 영화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런 ‘라쇼몽 효과’는 개인 뿐 아니라 현대 정치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과거 왕정시대에는 정치에서 거짓말이 용인되었다. 정치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플라톤도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고상한 거짓말(noble lie)’이 필요하다고 했다.
과거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어 보였지만, 현재와 같은 미디어 정보의 홍수 속에서는 결국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현재 정치권은 영화 라쇼몽의 인물들처럼 자기합리화를 위한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는 ‘거짓말 난타전’을 거듭하고 있다. 파벌에 따라 정치적 주장은 다를 수 있으나 진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일 조차 비일비재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 역사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와 정치인을 대하는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당연한 말은 코로나로 인해 국민 모두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현실에선 아련한 메아리로만 인식될 뿐이다. 국민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 시국에 정치권 그 어디에도 국민은 없다. 오로지 유권자만 있을 뿐이다. 영화 ‘살아있다’처럼 투표도 살아 있어야 제 몫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