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9] 1920~1930년대 중국 상하이 스쿠먼(石庫門)과 건축가 후
매일경제 2019.11.08
▲ Shanghi Urban Planning Museum /사진=wikimedia
[효효 아키텍트-9] 중국 건축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쓰게 된 글의 한 장면 때문이다. 약 2년간 독립운동가 정화암(본명: 현섭, 1896~1981)을 주인공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설을 구상한 뒤 자료 조사를 하고 원고를 쓰면서다. 정화암이 1921년 국내를 벗어나 중국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임시정부에 당도해 목격한 청사, 생활하면서 느낀 주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전형적인 3층 스쿠먼(石庫門) 가옥 형태로 허름하고 볼품없었다. 1층 부엌, 2층 집무실, 3층은 침실로 쓰였는데, 방이 달랑 4개뿐이다. 외관은 유럽식 연립주택과 비슷하고, 내부 구조는 정원을 사이에 두고 삼면이 가로막힌 삼합원(三合園) 형태다. 대문 위 상인방의 넝쿨 장식과 박공, 툭 튀어나온 베란다는 유럽 건축의 영향이다.
스쿠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石)로 문틀과 기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쿠먼이 이룬 좁은 골목길은 '눙탕(弄堂)'이다. 눙탕은 앞집 뒷문과 뒷집 앞문이 서로 연결돼 복잡한 통로와 골목을 만든다. 아이들은 내달리며 뛰어놀고, 노인들이 골목에 모여 앉아 장기를 두는 풍경도 흔했다." 광저우에서 국내 대기업 주재원으로 생활한 군대 동기 양정현을 만났다. 그는 책과 자료를 내밀었다.
베이징은 쓰허위엔(四合苑), 상하이는 스쿠먼이 대표적 건축 양식이다. 스쿠먼은 석재로 문틀을 하고 목재로 문짝을 만든 대문을 말하는데 이농주택(里弄住宅)의 한 유형을 지칭하는 이름이 됐다. 이농은 주거지의 골목길을 말한다. 베이징에서는 후퉁(胡同)에 해당한다. 1850~1860년대 조계지의 인구가 증가하자 부동산 업자들은 측벽을 맞댄 목조 가옥을 지었다. 이후 화재를 피하기 위해 벽돌조로 개량돼 이농주택이라는 유형으로 자리 잡는다.
이농주택은 대개 구식과 신식으로 나뉘고 구식은 스쿠먼 이농주택과 중정을 둘러싸는 원락식(院落式: 원락은 마당 또는 정원)이다. 베이징 쓰허위엔은 내외원(內外院)으로 이뤄져 있다. 중국의 건축사학자 샤오모(1938~2013)는 "중국의 건축을 군체(群體)의 배치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궁전, 사찰, 민가는 모두 원락식 조합 방식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군(群)'이 중국 건축의 영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샤오모는 중국 한족의 민가를 원락식과 천정식(天井式) 두 가지로 분류한다.
스쿠먼 지구는 가로와 만나는 이농의 입구로부터 시작된다. 이농 입구는 공중전화와 식료품 가게들이 있는 공공 공간의 성격을 지니며 입구로서의 성격이 명확하게 처리돼 있다. 이농 주거도 긴 시간을 거쳐 형식 변화를 겪는다. 초기 스쿠먼의 3개간 2상방(三開間 二廂房) 형식에서 아파트식 이농주택에 이르기까지다. 이는 상하이 도시 면모의 역사적 변화 과정이기도 하다. 황푸강에 근접한 구도시에는 석고문 이농주택이 많고 그 서쪽에는 신식 이농주택이 많다.
황푸강 근처에 위치한 와이탄에는 20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HSBC 빌딩에서부터 첨탑 형식의 싸쑨하우스(현 화평반점)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있다. 1908년 상하이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上海德律风公司'가 건축됐고, 1916년 최초의 철 골조 건물인 '天祥洋行大楼'가 지어졌다.
스쿠먼 주택이 상하이를 일컫는 '해파'(海派)문화의 정수로 떠오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중국과 서양의 양식이 혼합되고, 비좁은 속에서도 풍부한 공간 구성을 가지고 있어 '중국과 서양의 융합'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상하이 도시 정신의 핵심적 내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스쿠먼 주택은 벽돌과 목재가 결합된 중국 강남 지방 주택이 특징이며, 한정된 토지에 최대한 가옥을 짓기 위해 영국식 연립주택의 병렬식 구조를 모방했다. 또 건물의 창문틀, 테라스, 기둥 등 상당수 장식이 유럽 양식을 채용해 만들어졌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스쿠먼 주택이 '중국과 서양의 장점을 합한 것'이라는 의미의 '중서합벽(中西合璧)'이라고 불린다.
1930~1945년, 중국 상하이에선 '모던'이란 신조어가 등장한다. 프라다는 중국 미디어아트 아티스트 양푸동과 함께 이 시기에 지어진 와이탄의 아르데코 양식 건물을 배경으로 짧은 영상을 찍기도 했다.
영국식 신고전주의 건축은 당시 여전히 와이탄의 스카이 라인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상하이 모던' 시기가 시작되는 1930년대는 빅토리아 번영기가 이미 막을 내린 뒤였다. 이 시기 건축물 내·외부는 당시 성행한 아르데코 양식을 채용했다.
아르데코는 1920년대에 시작돼 193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짧게 유행했다. 이 양식은 기하학적이고 대칭적인 사선과 직선, 도형, 검은색·금색·흰색 등 강렬한 색상을 특징으로 한다. 상하이는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이었고 도시적이면서도 장식적이었다. 상하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르데코 건물을 보유한 도시다. 마천루에다 내부에 아르데코 양식이 더해져 상하이 와이탄에는 새로운 건축 기호가 남겨졌다.
새로운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건물로 '파크호텔'을 꼽을 수 있다. 설계자는 체코계 헝가리인 건축가 라슬로 후덱(1898~1958)이다. 그는 '상하이를 변화시킨 이'(The Man Who Changed Shanghai)로 불린다.
상하이에 있는 미국 커리 건축회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후덱은 1925년 자신의 사무소를 낸다. 이후 30년간 건축가로서 상하이에서 지내며 총 65개의 기념비적 건물을 짓는다. 파크호텔은 지상 22층 지하 2층, 총 82m 높이로, 완공 후 약 30년간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지위를 누렸다.
후덱은 파크호텔 외에도 22층 연합금고 건물, 무어기념예배당, 병원과 공공건물, 리모델링을 거친 그랜드 영화관 등을 설계했다. 후덱은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계 1차 대전 때, 러시아군에 끌려갔으며 1918년 시베리아 열차로 탈출해 상하이에 정착했다.
상하이 마천루는 높이에서는 뉴욕에 미치지 못하지만, 외형상으로는 뉴욕 빌딩들과 매우 닮은 모습을 띠고 있다. 당시 상하이에는 꽤 많은 미국 건축가와 건축 회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유입된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미국 건축 양식을 많이 접할 수 있었고, 동시에 마천루의 실루엣과 내부의 아르데코 양식이 뮤지컬과 코미디 등 무대 디자인에 자주 등장했다.
※참고자료: '건축의 의경'(샤오모, 2014), 인터넷 웹사이트(ata.hannam.ac.kr/cities/hcc/sh-k.htm), '근대 역사 경관을 활용한 도심 재생-상하이 구 조계지역을 사례로'(한지은), '코코 샤넬의 동경, 칼 라거펠트의 영감-상하이 모던'(김주원), '혼종성을 통해 본 상해건축 발전에 관한 연구'(정윤강,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