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해에 (노나라에서는)윤3월을 두었는데, 올바른 방식이 아니었다. 선왕께서 때를 바로 잡음에 있어 일 년의 첫날을 올바르게 정하고 중기를 알맞게 배치하여 나머지를 모아 맨 나중에 윤달로 두었다."
기원적 250년 이전에 만들어진 책 <춘추좌씨전>에 나온 이 말이 바로 전통적인 동양 역법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체의 주기적 현상에 따라 시간단위를 정해 나가는 체계를 ‘역’이라 하고 역을 편찬하는 원리를 역법이라고 합니다. 역은 현재 달력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근대이전에 달력은 현재의 연도에 해당하는 연호, 음력, 윤달, 길한 날과 흉한 날, 절기, 일식, 행사일, 특별한 기상 변동사항 등을 일 년 단위로 묶어 책의 형태로 만들기 때문에 책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책력은 국립 천문관청인 관상감에서 제작 배포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선물이라고 여겨 비매품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관상감 관원들도 개인적으로 판매하여 부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동양의 달력은 태양력인 절기와 태음력인 음력을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태음태양력이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동양역법 최대의 주제가 발생합니다. 윤달의 배치를 어떻게 둘까 하는 문제로 말이죠. 아시다시피 서양은 태양력이기 때문에 태양의 주기를 맞추기 위해 윤년은 두지만 윤달은 없습니다.
그럼 윤달의 규칙은 어떤 것일까요?
전통역법에서는 일 년을 24개의 기로 나누어 12개의 절기와 12개의 중기로 하는 ‘평기법’을 써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통상 절기라고 표현합니다. 절기는 대표적인 태양력으로 태양의 운행에 맞춰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졌는데요, 대략적인 기후변화가 이정도의 주기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태양의 운행과는 관계없이 일 년을 무 자르듯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눈 것에 불과합니다. 태양궤도가 타원궤도가 아니라 완벽한 원궤도라고 가정해서 만든 것이죠.
이 24절기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은 중기가 그달이 음력 몇 월 인지를 정한다는데 있습니다. 가령,
1월 (우수가 들어있는 달)
2월 (춘분이 들어있는 달)
3월 (곡우가 들어있는 달)
4월 (소만이 들어있는 달)
5월 (하지가 들어있는 달)
6월 (대서가 들어있는 달)
7월 (처서가 들어있는 달)
8월 (추분이 들어있는 달)
9월 (상강이 들어있는 달)
10월 (소설이 들어있는 달)
11월 (동지가 들어있는 달)
12월 (대한이 들어있는 달)
물론 절기는 어디에 들어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기에 따라 달의 이름을 정하는 이 방식은 주나라 말기에 완전히 성립한 것으로 빨라야 기원전 5세기 무렵이라고 합니다.
일년의 길이는 대략 365 1/4일이므로 이를 24로 나누면 하나의 기가 차지하는 시간 간격은 15일 2시 5각이 됩니다. 한 달 안에는 보통 하나의 절기와 하나의 중기가 들어가므로 그 둘을 합치면 30일 43각 정도죠. (전통적인 시각법인 백각법은 하루를 100각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음력의 기준이 되는 달이 삭망 주기는 29일 53각 정도 됩니다. 한달을 30일이라고 하면 절기에선 43각이 남고, 음력의 한달로는 46각이 모자라서 그 합은 90각 정도로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하루가 100각이므로 거의 하루에 가까운 수치인 것이죠. 이것은 태양력인 절기와 태음력인 음력 달을 맞추려다보니 생긴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90각의 차이에 의해 그달의 이름을 정하는 중기가 점점 뒤로 밀리다가 중기점의 위치가 전달의 맨 끝날까지 오게 되면 그다음 달은 건너뛰게 됩니다. 한 달은 29일 53각이고 다음 중기점은 30일 43각의 뒤기 때문이죠. 중기점은 한 달을 건너뛰어 그다음 달 맨 앞에 오게 되어버리고 결국 그 사이의 한 달 동안은 중기점이 없게 됩니다. 자, 그럼, 중기점이 없는 그달은 몇월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2.
이 난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바로 ‘무중치윤법’입니다. 한마디로 중기가 없는 달을 없애기 위해 중기가 없는 달에 윤달을 두는 규칙입니다. 이것이 바로 맨 처음에 <춘추좌씨전>에 언급된 규칙입니다.
이 전통은 시헌력이 시행될 때까지 2000년간 수없이 역법이 바뀌면서도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동양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장례, 제사, 혼인과 같은 의식이나 사주를 보거나 점을 치는 일등에서 사용되어오면서도 한 번도 혼란을 겪지 않게 되었죠. 말그대로 동양인들의 삶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헌력이 이것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태양의 운행을 중심으로 절기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공전궤도가 타원형이기 때문에 태양은 북반구를 기준으로 겨울에는 빨리 움직이고 여름에는 느리게 움직이는데 이것을 그대로 반영하여 태양이 황도상에서 15도 운동하는 시간을 한 절기로 삼은 것입니다. 따라서 겨울에는 절기사이의 간격이 짧아지고, 반대로 여름에는 간격이 넓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태양의 운동을 근거로 절기를 배치하는 방법을 ‘정기법’이라고 합니다.
시헌력 주장자들은 이 정기법이야 말로 시헌력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무중치윤법’의 규칙이었습니다. 태양태음력의 전통을 파괴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습니다. 시헌력 사용 직후인 1646년 11월에 대설, 동지, 소한의 세절기가 들어가 버렸습니다. 지금껏 없었던 최초의 사태가 벌어지자 반대론자들의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1661년에도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8월에 중기가 없어서 이달을 윤달인 윤7월로 삼았는데 같은 해 12월에도 중기가 없었던 것이죠. 시헌력은 이달을 윤달로 삼지 않았습니다. <춘추 좌씨전>에서 제시된 2000여년간의 전통의 대원칙이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중국의 시헌력 반대론자들은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반격의 기회만 노리게 됩니다.
바로 그때, 문제의 양광선과 아담 샬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청나라에서는 1664년에 이전 황제의 아들인 영친왕의 장례일을 일부러 나쁜 날로 잡았다며 흠천감 관원들이 고발되었습니다. 8개월간의 취조 끝에 시헌력을 만든 아담 샬과 다른 관원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황태후의 배려와 때마침 일어난 지진덕분에 아담 샬은 살아났지만 흠천감에서 쫓겨나고 시헌력 반대론자인 양광선이 흠천감 대표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시헌력을 폐지하고 대통력으로 바꾼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대통력과 시헌력의 싸움이 발단이 된 것은 ‘무중치윤법’의 대원칙과 태양의 실제운행에 맞는 절기배치법이라는 동서양 과학적 전통의 대충돌이었습니다. 과연 이 싸움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3.
보통 새로운 왕조의 성립과 함께 새로운 역법을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에는 모두 48가지의 역법이 알려져 있습니다. 최초의 역법은 기원전 104년에 만들어진 태초력이고 최후의 역법은 1645년 서양인 선교사인 아담샬(중국명 탁약망)이 만든 시헌력입니다. 시헌력은 서양과학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나머지 동양 역법만 보면 창조적 가치가 있는 것은 10여 종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역법은 3가지인데, 그것은 기원전 104년에 만들어진 태초력과 당나라 때인 729년에 만들어진 대연력, 그리고 수시력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모든 역법들의 평균 사용시간은 대략 30년 정도인데요, 그 중 오로지 <수시력>만이 1281년부터 1644년까지 364년 동안이나 사용됩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역법이 얼마나 우수하고 가치가 높은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력>만이 실제 관측자료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 역법입니다.
수시력 이전에 역법은 경험과 기록된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행성운동이나 천체운동은 일정한 주기로 움직이므로 이것을 꾸준히 관측해서 그 변화를 일종의 데이터로 남겨둡니다. 그것을 가지고 뛰어난 천문학자가 세차운동이라거나 메톤주기와 같은 천문학적 상수들을 찾아내어 달력제작에 사용하였습니다.
중국 송나라는 통일 이후 어떤 때보다 천문학에 투자를 많이 하였는데 1010년부터 1106년 사이에 5차에 걸쳐 대규모 항성 위치 관측을 합니다. 이것은 중국 천문역산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할 만큼 광범위하고 정밀한 것이었죠. 특히 요순보라는 천문학자는 가장 정확도가 높은 관측값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천체들의 위치가 변하는 이유가 하늘이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관측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이 데이터가 수시력 탄생에 기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세계의 정복자답게 가장 완벽한 역법을 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은 곽수경과 왕순이 맡았습니다. 곽수경은 10여가지 천문기구를 만들어 사천대를 건축하고 관측하는 일을 했으며 수학적 계산은 왕순이 담당하였는데 도중에 왕순이 사망함에 따라 곽수경의 책임아래 일이 진행되었고, <수시력>의 완성자로서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수시력은 방대하고 정밀한 관측 데이터와 함께 고차방벙식인 초차법과 구면삼각법인 호시할원술이라는 수학적 계산법을 도입함으로써 평면운동이 아니라 곡선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수학적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수시력을 받아들인 조선에서도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연구했지만, 이 수학적 계산법만은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정도로 동양수학과 천문학의 정점이 곽수경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곽수경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뛰어난 천문학자가 등장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더 이상 발전된 역법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오죽하면 이런 논평이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천명을 받으면 제도를 고친다는 이념으로 새 역법을 편찬하려고 해도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를 능가할 수 있는 천문학과 수학은 동양전통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듯 수시력의 대체자는 시헌력이었습니다.
4.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새로운 왕조는 새로운 역법과 함께 한다는 전통에 따라 <대통력>을 만들었습니다만, 그것은 수시력의 기본구조는 거의 건드리지 않고, 약간의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 무시할만한 수치인 <세실소장법>을 폐지한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세실소장법>은 우리에겐 아주 최근에 경험하게 한 <윤초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차운동 때문에 지구 자전속도가 100년에 8초 정도 느려지는데, 이것을 보정하기 위해 지난 7월 1일에 1초의 윤초를 두었던 것이 바로 이 <세실소장법>입니다. 대통력은 이것을 없앴지만, 명나라의 사대관계였던 조선은 오히려 이 <세실소장법>을 부활시킨 <칠정산>을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명분보다는 과학을 선택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시력은 동양의 전통 천문학과 수학의 기반위에서 만들어져서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수준에 오른 것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하학적인 수치모델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한 비교라면 우리가 맨 처음 함수를 배울 때 X->Y로의 대응을 나타내는 두 개의 정의역과 치역의 다이어그램을 배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동양의 수학입니다. 반면 서양의 수학은 x축과 y축 위에 이 함수를 그래프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기는 합니다만, 전자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깁니다. 변수가 생겼을 때 수정할 근거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이 약점은 그대로 수시력에 반영됩니다.
또 파이 값을 3으로 둠으로써 작은 오차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마어마해지게 되고, 특히 일식과 월식의 예측에선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명나라도 조선도 일월식의 계산은 서양 기하학에 기반을 둔 아라비아 역법인 <회회력>을 사용한 것도 이때문이고, 대통력이 폐기되고 <시헌력>이 공표되게 된 것도 아담 샬이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5.
명나라 말기에 북경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자명종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는 황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칠 방식으로 서양과학을 이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요구하는 서양과학은 역법계산을 정확하게 해줄 천문학자였고, 다른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테오리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같은 중세천문학과 수학의 기초교과서 정도만 공부한 초급과학도였기 때문에 이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죠. 그래서 교황청에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선교사를 요청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세상을 떠난 후 북경에 들어온 예수교 선교사인 아담 샬은 수준 높은 천문학자였습니다. 그는 1629년 여름의 일식을 유일하게 정확하게 예측하면서 단번에 황제의 신임을 얻고 새로운 역법을 만들 임무를 부여받는데요, 그것이 <숭정역서>로 명나라 황제 숭정제에게 바친 역서였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한 역법은 만들어지지 못한 채 명나라가 망해버렸지만 뒤를 이은 청나라에서는 아담 샬의 능력을 높게 사서 <숭정역서>를 바탕으로 다시 역서를 쓰게 했는데 그것이 <서양신법역서>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나온 역법이 시헌력입니다.
시헌력의 과학적 바탕이 되는 <서양신법역서>의 수학이론은 유클리드 체제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지만 천문학은 덴마크의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와 그의 추종자인 롱고몬타누스의 이론들입니다. 이들이 살았던 시기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였으니 <서양신법역서>는 말 그대로 최신 서양과학인 셈이었죠.
그러나 시헌력은 서양과학에 바탕을 둔만큼 동양의 태양태음력에 대응할만한 완벽한 체계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절기법의 문제가 그것이었습니다. <무중치윤법>이라는 대전제가 도전받게 되면서 중국의 전통 역법가들은 시헌력을 공격할 수 있는 여론과 무기를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양광선은 바로 그런 여론을 등에 업고 시헌력의 허점을 파고든 것입니다.
아담 샬은 양광선의 고발로 감옥에 갇혔다 옥사하였지만, 강희제는 대단히 명민한 황제로, 양광선이 가진 약점을 제대로 파악했습니다. 사실 시헌력과 대통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였는데, 그만큼 수시력 체계가 가진 위력이 어마어마한 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강희제는 몇가지 천문학적 실험을 거치게 한 뒤 시헌력의 손을 들어주었고, 양광선은 파직되었습니다. 그 후 양광선은 사형은 겨우 면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로서 중국에선 시헌력이 다시 대통력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6.
하지만 중국인들의 자존심으로는 서양과학의 위대성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매문정입니다. 매문정은 서양수학의 장점인 기하학은 동양의 구고술(피타고라스정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며, 진시황의 분서갱유때 이 비밀을 간직한 역법계산원들이 서역으로 도망친 것을 서양에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서양과학의 중국원류설>을 주장합니다. 동양수학의 시작점인 <구장산술>과 천문학의 시작점인 <주비산경>에 이미 모든 내용이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들어온 서양천문학과 수학의 내용을 완벽하게 독파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이후 케플러의 타원궤도를 도입하기 위해 서양인 선교사의 손을 빌기는 하지만 이작업이 끝나자 서양인 선교사들을 거의 추방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역법을 만들어나갑니다. 그리고 세상의 위대한 것은 모두 중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고증학에 빠집니다. 자신들이 고대부터 이뤄놓은 문헌들을 뒤지면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러한 착각은 백년간 이어지다 결국 아편전쟁으로 끝이 났고, 시헌력도 서양 달력인 그레고리역에 의해 대치되게 됩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지만, 그대로 서양과학의 흐름을 따라갔다면 동서양의 과학이 그토록 처참한 차이로 결말이 났을까요? 이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수학을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약삭빠른 자들의 학문’이라고 경시하면서 심지어 수학교과서도 조선에서 역수입할 정도로 폄하가 심한 풍토가 있었습니다. 천문학은 왕실천문학으로 오로지 역법계산외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개인의 호기심,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줄 후원자인 상인이나 권력가가 없었습니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그들 종교의 특별한 기도법 때문에 칼리프들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발전하다가 800년전에 정체와 도태를 경험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슬람 천문학은 세계최고였습니다. 곽수경이 이룬 경지도 이슬람 천문학에 빚을 지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교적 폐쇄성이 두드러지면서 후원자를 잃은 천문학자들은 일거리를 잃었습니다.
서양의 천문학의 발전은 오로지 영토분쟁과 대항해시대의 덕분이었습니다. 항해술에 필요한 경도와 위도의 파악은 당시로서는 별자리를 이용한 것이 거의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영토분쟁으로 인해 경계선을 긋기 위해서도 위도와 경도를 확정할 별자리가 필요했습니다. 어마어마한 후원에 힙 입어 티코브라헤가 정밀한 관측데이터를 얻고, 운 좋게 그 조수역할을 했던 케플러가 그 데이터를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개인 후원자들에 의해 얻은 성과와 그에 만족하지 않는 호기심 넘치는 천문학자들의 활약으로 서양천문학이 동양을 능가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인 동양은 필연적으로 서양과학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이지요. 반대로 그 국가적 지원이 곽수경을 낳은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문제에는 양측면이 있는 법이니까요. 곽수경이 이룩한 뛰어난 경지가 오히려 동양천문학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당시까지만 해도 동양의 천문학은 세계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왕실천문학자들은 곽수경을 팔아 직업적 안정을 구가하면 되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방법이 동양천문학에선 더 이상 없었습니다.
시헌력이 도입되었을 때 서양과학이 동양과학이 추월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달력만 정확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헌력은 정확한 태양태음력을 제공했고, 지동설이나 우주론이나 타원궤도나 만유인력과 같은 운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달력만드는 방법 자체가 당시 도입된 서양천문학과 수학정도를 마스터 하면 될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매문정과 중국의 천문학자들은 그 이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도대체 달력에 만유인력이 왜 필요할까요? 우리가 수학시간에 미적분을 배워서 뭣에 쓰게?하는 질문을 그들도 했겠지요.
하지만....과연, 미분적분이 반드시 무슨 용도가 있어서만 배우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