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는 동양의 문화를 대표한다. 지금 유교는 물질문명에 밀려 근원지인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우리나라에서도 찾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안동은 지금도 과학의 시대에 버렸던 그 유교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고들 한다. 많은 종택과 서원, 정자들이 있고 그 속에서 선조들의 삶을 이어 불천위가 있는 곳이며, 서원향사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유교 문화를 주도했던 많은 인물들의 공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이라. 그 중에서도 서원의 문화는 종가와 함께 안동의 유교문화를 압축해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영가지』‧『선성지』‧『향청사례등록』‧『안동부여지』등 옛 문헌에 서원과 사우가 62개소가 있다고 전하는 것은 양적으로도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달에 찾아가는 화산과 화천이 잘 어울린 부용대 자락의 화천서원은 벼슬을 버리고 향촌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와 우애를 실천한 퇴계 선생이 아끼던 제자였던 문경공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 ~16010)선생을 모신 곳이다.
- 안동에는 수많은 유교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가장 많은 유교 관련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죽은 문화가 아닌 여전히 살아 생동하는 문화로서 유교문화가 향사, 불천위제사, 기제사, 문회 등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종택과 서원에서 고택체험 장으로서 잊혀져가는 선현들의 삶을 체험하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났고, 영남 인재의 반은 안동에서 났다는 옛말이 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안동이 유학적 전통이 강한 곳임을 나타내 주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많은 인재들, 즉 사대부들은 서원이라는 공간 속에서 학문과 인격을 수양했고, 안동은 명성에 걸맞게 많은 서원과 인재들이 있었다. 우리는 『영가지』‧『선성지』‧『향청사례등록』‧『안동부여지』등의 고문헌을 통해 시대별 안동에서 만들어지고 존속되었던 많은 서원의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재 안동의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원 및 사우의 수는 62개소에 이른다.
또한, 안동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뜻에서 추로지향(鄒魯之鄕), 영남 유림(儒林)의 총본산 등으로 일컬어지고, 이러한 문화적 기반을 조성하고 성리학의 체계를 발전시켜 영남학파를 형성한 퇴계(退溪) 선생의 학덕을 기려 퇴도지향(退陶之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살펴보듯이, 조선시대 중기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안동의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유교 문화의 강성함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안동이 학문과 교육의 중심을 이루었던 당대 최고의 문화고을, 즉 문향(文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동은 우리 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문적 연원지로서 근세 문화사를 떠받들고 있는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들이 많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유교와 관련된 많은 건축물들이 생겨났다. 예제(禮制)를 다루는 건축인 단(壇), 묘(廟)와 교학을 다루는 건축인 성균관, 서원, 향교가 대표적이다.
물론 서원과 향교는 교육과 관련된 건축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구성과 운영방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점을 갖기도 한다. 이번에는 조선시대 충과 효, 예제를 중히 여겼던 유교건축을 대표하는 하회의 화천서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화천서원과 배양인물
화천서원은 안동지역의 유림들이 서원을 건립하여 묘우(사당)을 짓고 겸암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는 곳이다. (중략)
서원의 훼철로 향사를 올리지 못함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이 100여녀이 지난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사림들의 공론으로 1996년 5월 2일에 복설 고유를 거행했다.
안동에는 1864년 대원군의 서원정비 시행 이전에 37개소의 서원이 있었고 사액서원은 6개소였으나 서원 철폐령 이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이 훼철되었다.
그 이후 1900년대에 이르러 훼철된 서원을 복원하거나 새로 서원을 설립, 1997년 말 현재 향사를 지내는 서원 21개소를 포함하여 29개소의 서원이 있고 완전히 없어진 서원이 15개이다. 없어진 서원을 포함한 총 42개의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85명이다.
겸암 류운룡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은, 예천의 우곡서원(愚谷書院)과 이곳 화천서원(花川書阮)두 곳이다.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 중종34~1601, 선조34)선생의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으로 입암 중영의 맏아들이다. 심학연원(心學淵源)의 적통(嫡統)이요 목민관(牧民官)의 귀감(龜鑑)이며 고결(高潔)하고 온후(溫厚)한 인간상을 우리에게 심어준 분이다. 아우인 서애 류성룡 선생과 함께 ‘하남백숙(河南伯叔)’이라 칭한다. 15세에 처음으로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학문에 힘썼으나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34세에 친명(親命)에 의해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간 겸암은 중앙관서의 여러 직책을 거친 뒤 인동현감으로 나가서는 법을 공평하게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특히 인동에서는 야은 길재의 무덤 뒤에다 오산서원(吳山書院)을 창건하고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워 고을에 충절(忠節)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겸암의 인동현감 재직시의 사례가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는 풍기군수로서 멀리 의주의 행재소까지 정조문안사(正朝問安使)를 파견하고「군국편의소(軍國便宜疏)」를 올리기도 했다. (중략)
다음은 동리 김윤안(東籬 金 允 安:1560, 명종 15~1620, 광해군 12)선생은 순천인(順天人)이다.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로 겸암•서애 선생의 문인이다. 선조조에 사마를 거쳐 광해군 4년(1612) 증광문과에 올라 대구부사에 이르렀다. 임란이 발발하자 형 윤명(允明)과 함께 근시제(近始齋)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1803년(순조 3년 윤 2월)에 졸재 류원지와 함께 화천서원에 배향 되었다.
졸재(拙齋) 류원지(柳 元 之:1598, 선조 31~1674, 현종 15)선생의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지(拙齋)이다. 서애 유성룡의 손자로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수암( 修巖) 진(袗)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도산후제일(陶山後第一)’이라는 칭하던 인물다. 일찍이 황간•진안 등지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에는 안동지방의 의병장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와 함께 활약하였다. 성리(性理)•이기(理氣)•상수(象數)•천문•지리•예설 등에 통달하였다. 이기설에 있어서 주로 퇴계(退溪)의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율곡(栗谷)의 설을 반박하였으며, 예설이 있어서는 효종의 服喪問題에 우암 송시열이 의정(議定)한 기년제(朞服制)를 부인하고 3년설을 주장하였다. 화천서원과 1703년(숙종29년 )진안 인화서원(仁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존효록『尊堯錄』과 문집 14권 7책이 있다.
□화천서원의 기능과 구성
서원의 기능은 제향과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글을 가르치고 때로는 토론을 하는 일이 일반적인 역할이었다. 교육과목은 대체로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춘추의 차례로 가르쳤다. 그러나 서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에도 제한이 있었다. 처음 백운동서원의 경우 사마시(생원, 진사), 초시 합격자, 그밖에 향학하고 조행(操行)이 있는 자로 규정했지만, 그 뒤 향교를 모방하여 양반유생과 평민원생으로 구분하여 평민들도 받아들였다.
어느 기관이나 마찬가지지만 서원도 그 기능을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했는데, 이와 같은 재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났고 서원의 권위가 추락하기도 했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것도 이러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중략)
서원의 정문은 아주 크고, 그 앞에 누각이 있는 경우가 있다. 화천서원의 정문인 유도문(由道問)을 지나면 2층 누각인 문루는 지산루(地山樓)인데,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인 역경(易經)의 『지중유산(地中有山)이 겸(謙)이니 구자(君子) 이(以) 하야 부다이과(裒多益寡)하야 칭물평시(稱物平施)하나니』에서 따온 말인 즉, 높은 산이 낙은 땅을 붙이고 있듯이 군자는 겸손해야하고, 많은 것을 덜어 적은 것에 더해 주듯이 물건을 저울하여 평균하게 한다는 뜻이다) 후대에는 서원의 누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원생들이 모여서 같이 시도 짓고 때로는 휴식을 취하곤 했다. 서원에 들어서면 크게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과 유명한 분들을 제사 지내는 제향공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의 위치에 따라 서원의 구조를 설명하기도 한다. 화천서원의 경우 제향공간인 경덕사(景德祠)는 위패를 모셔둔 사당으로, 묘우는 삼문으로 되어있고 경덕사에 올라가는 문도 삼문으로 되어있다. 문에는 태극이 그려져 있다.
강학공간인 숭교당(崇敎堂)은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며, 서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서 유생들이 직접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학문하는 강학당(講學堂)이다. 정면 처마 밑에는 화천서원(花川書院) 현판이 걸려 있다.
서원에서 가장 높은 분은 원장이고, 그 밖에 여러 가르치는 우사가 있다. 학생 정원은 보통 한 서원에 20~30명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역을 면제 받기위해 들어오는 사람들도 받아들여 폐단이 생기기도 했다.
서원에서는 유교서적을 공부하여 시험을 보기도 하는데, 시험방식은 대체로 배운 부분을 외우는 형태가 주류였다. 서원 교육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인 심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사람들이 서원에 입학하기도 하였다. 또한 학자들 간의 토론과 논쟁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중략)
조선시대는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현실적이고 대의적인 교육관을 형성하게 된다. 유교의 교육관은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착한 인간의 천성을 교육으로 바르게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서 최고의 인격자인 군자(君子), 즉 천인합일의 경지에 달한 성인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교육관은 다양한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성인군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학사상으로 확산되었다. 안동지역에서도 유교적 교육관이 크게 전파되어 많은 교육기관이 이곳에서 발달하였으며, 이런 기관에서 수많은 명현거유를 배출함으로써 추로지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세운 수많은 교육기관을 통해서 교학사상이 크게 일어나서 우리나라 교학사상의 진원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학사상의 맥이 안동지역에 면면이 이어져 오면서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현재도 누리고 있다. 오늘날 윤리도덕의 정신문화가 쇠퇴하여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자기중심의 이기적인사고, 황금물질주의가 더욱 팽배 해 가는 현실사회에 우리 모두 새로운 교육혁신과 지행합일에 따른 교육목표를 세워 인간성을 회복 해 나가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답게, 학문을 넓히고 예를 지키며 넓고 의연함으로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사람과 문화 121호 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