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렸을 적엔 (어둑한 시절) 대전천에서 여름엔 물장구치며 놀고, 겨울엔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치고, 보문산으로 소풍다니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아니 생생하게... “또 그 시시한 보문산이야~” 하고 불평하며, 그저 한량~하고 느려터진 충청도 촌구석의 보잘것 없어 보이는 나즈막하게 펼쳐진 山川들을 그냥 촌스럽고 어설프게 생각했다...
필자는 대전의 主山인 보문산자락에서 내려온 대흥동인란 동네에서 토박이로 자라고 핵교 댕기며 성장했다.
옛날엔 대흥동 테미골에 커다란 연못-방죽이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연못에서 물장구치고 송사리잡던 추억이 아련~하다... 왠만한 옛 사람이 아니곤 도심에 가까운 테미땅에 설마 연못이 있었으리라곤 생각도 못하리라. 그 연못가엔 둥근나무라는 아름들이 느티나무가 떡 버티며 못을 지켜보는 수호목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디... 동네 개구쟁이 녀석들끼리 낭구에 올라 타고 놀았던 것이 생각난다. 유감스럽게도 그 나무를 일부러 베었는지, 나무기둥이 싹둑 잘리고 썩어 버렸다. 그리곤 연못을 메워 벽돌공장, 시장과 집을 지었다. 잘 보존해서 자연과 어우러진 공원으로 만들어 도심속의 보기드문 자연을 만끽할 편안한 휴식처로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찢어지게 가난한 빈곤과 미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당시 상황에서, 그런 발상은 도저히 나올수 없었지만...)
그 맞은편엔 보문산 줄기인 수도산이 나즈막히 앉아 있다. 그것도 산이라고...^^ 지금은 공원으로 새 단장 되어있다. 그 사이엔 (지금은 복개했지만)실개천의 또랑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참 시골스런 동네였다.
그래서 어둑했던 옛 시절의 정취가 자꾸만 그리워 진다...
(테미란 백제시대에 보문산의 ‘뫼를 테둘러’ 산성을 쌓아, ‘테뫼’ 식 산성을 이룬데서 유래된다. 명칭은 퇴메, 테미등으로 변천. 지금도 보문산 군데 군데에 테뫼식 산성터와 복원된 수각 정자가 남아 있다. 촌동네의 이름조차 이러한 유서깊은 역사가 서려있을 줄이야...
寶文山보문산의 원래 이름은 鳳舞山봉무산이다. 대전 한복판에서 조망해보면 봉황이 고개(시루봉)를 들고 양어깨를 들썩거리듯 춤추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대전의 산은 西:계룡산, 南:보문산-식장산, 東:봉황(계족)산 北:금병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거대한 분지를 형성하고있다. 식장산을 중심으로보면 보문산과 봉황산이 음양의 짝을 이루고 펼쳐져있다)
거기서 보문산자락으로 들어가면 東으로 대사동,문창동 西南으론 문화동,산성동,안영리 등이 죽 펼쳐지는데, 예전엔 논밭속의 개구리우는 소리만 들리던 촌동네였다. 그래서 (필자가)퇴미 촌놈인 주제에 이곳을 촌동네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원래, 대전의 고급 주택가인 양반동네라 하면 선화동과 대흥동을 꼽았다. 그래 봤자 촌스럽지만... 은행동(으능정이)이 대전역과 도청사이의 중심지이긴 하나, 그곳은 역전통과 시장통 상가, 그리고 중앙대로로 형성된 도심지역이었다.
대전의 중추가 대거 이전된 지금은 둔산동이 졸지에 금싸라기의 중심지로 바뀌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군부대와 군용비행장 그리고 논밭밖에 없던 황량한 벌판이었다. 새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軍이 駐屯주둔하여 땅다지기 작업을 한 샘이란 생각이 든다. 屯山洞둔산동이란 지명속의 진칠屯자가 그것을 예고하고 있으니 이는 선조들의 선견지명인가...
예전에는 대전의 관문인 대전역에 턱~내려 보면, 전국 제일의 드넓은 역광장에 인적도 뜸한것이 한량하다 못해 한심스럽기 조차하였다. 서울에 한번 갔다 돌아와 보면 왠지 모르게 대전 바닥은 왜소-초라하고 별볼일 없이 느껴졌다. 요즘은 고속전철도 달리고, 東西관통도로가 역을 관통하고 있지만, 이미 대전의 중심축이 서부 둔산지구로 이동한지라, 구도심이 침체되어 썰렁한 분위기이다.
대전은 요즘 뜨는 명성만큼이나 오명도 많았다. 예를 들자면>>>
교통의 요충지인것 같으나 실은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그냥 지나가는 통과지에 불과하여 남좋은 일만 하다 마는 곳, 三道삼도+이북에서 우루루 몰려와 우후죽순으로 형성된 수준낮은 시장통=상업지, 각색 지방문화가 짬뽕되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함, 문화적 소양의 척박함, 충청도 중심지면서도 충청 문화와 품격의 부재.....
그래서 이곳의 문화인과 공부꾼, 야심가들은 다들 대전을 등지고 서울로 향했다.
정치 경제 대학 문화 등등 모든 중심인 서울을 동경하고 부러워하던 옛 시절이 떠오른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는 지금도 여전히 정치,자본,문화,교육 등 모든것이 서울에 집중돼있지만...
대전은 내륙지방이어서 교통 이동이 뜸했던 그 시절엔 바다구경을 못해보고, 여름엔 그저 신탄진에 ‘해수욕’ 하러 가는게 큰 피서거리였다. (어렸을적) 내륙 촌놈이 해수욕의 개념을 모르던 때인지라... 언젠가 남측일원이 북한에 들어가 주민과 인터뷰 할때, 올해는 해수욕 갔다 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저 묘향산 한번 갔다 왔시오” 라고 답하여, 남녁 동포들의 배꼽을 뺀 에피소드가 상기된다..... ^^*
한참 덜 떨어진 대전이 광역시로 격상되면서 대덕군을 흡수하여 확장되고 둔산 신도심과 정부청사가 조성되어 도시축軸이 대이동, 현저하게 환골탈태하기 시작한 것 이다. 70년대부터 조성된 대덕연구단지과 충남대-KAIST 이전, 게다가 '93엑스포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 호재가 촉매제로 작용되어 장족의 발전이 이뤄졌다.
그리고 요즈음 행정도시 조성으로 들썩들썩 대는 충청권.......
충청도에 관한 언론자료 ☞
☞ 충청도~지리적 환경이 인격 형성에 큰 영향 [월간조선]
흔히 충청도를 ‘멍청도’ 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충청도의 속성~본성을 모르고 겉만 보고 내뱉는 소리로, 진짜 멍청한 소치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얕잡아보고 싶은 의도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그 보다는 ‘능청도’ 가 본질에 더 가깝다 볼 수 있다.
사실 기질적으로 멍청한 구석도 있고, 한템포 느리고(일명 slow motion) 고무줄 근성이 있다. (고무줄 근성: 끌어당기면 가는 척하지만 놓으면 제자리로 '원위치'하여 답답하게 애간장 태우게하고 '졌다' 하며 고개를 설레 설레하게 만드는 성질이라고나 할까...^^)
(경상도나 전라도 기질 같은) 화끈한 맛이랄까, Yes까 No까 뭔가 탁 떨어지는 게 없고, 술에 물 탄듯 물에 술 탄듯 한 적당주의..... 그러한 미적지근~하고 흐지부지한 근성때문에 여태껏 괄목할 만한 발전과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한반도 東西南北의 첨예한 대립상황속에서 애매모호한 경계선상에 어중간하게 머물러 왔던 것이다.
하지만, 또 어찌보면 인간사와 자연의 이치엔 항상 양면성이란게 존재한다. 음양의 동시성이란 것..... 즉 인간사에도 내면적으론 이것과 저것을 확연히 구분짓는게 불가능하고 ‘이것이 저것이면서 저것이 이것이다’ 하는 양면성과 동시성이 있기에 이원론적으로 구분짓지 않고 다양성을 동시에 하나로 묶어 인식하는 사고방식(일원론) 에서 연유되는 기질이 아닌가 (두루뭉실하게) 하는 생각도 든다. (변명일까, 억지인가?...)
다시 말하면, 겉보기엔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으나, 속으론 또 다른 생각을 하며 복안을 갖고 능청을 떨고 있어,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기가 어려운 구조라 볼 수 있다. 사람나름이겠지만..... 그래서 겉보기엔 어리숙한게 굼띠고 무뎌보이지만, 그 속에는 능구렁이와 곰탱이덜이 득실거리고 있음을 잘 모를 것이다..... ^^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겉보기엔 좀 멍하고 느릿~느릿하여 어중간한 것 같지만, 심성이 모나지 않고 두루뭉실하여 괜시리 뻑세거나 과격,각박,경박,척박하지는 않다.
어질仁인의 성품이 있어 인자하고 여유로움이 넘친다. (너무 여유로워 탈이지만...)
충청도엔 이 고장 특유의 온화함이 있고, 풋풋한 인심과 온건한 인정이 많다.
누천년 풍운의 역사를 겪어온 한민족의 특성인 ‘은근과 끈기의 근성(인내심)’ 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다.
忠義충의의 고장인지라 예로 부터 충신과 의인 열녀 지사들이 부지기수로 나왔다. 뿐만 아니라, 호호탕탕한 영웅호걸도 풍성하다.
망해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5천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5만의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번번히 물리치며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가신 계백장군(황산벌), 신라의 명장 金庾信김유신도 알고 보면 충북 진천 출생이다.(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한민족의 웅혼과 광활한 지도를 역사에서 사라지게한 망국통일의 위업은 재평가되고 있지만...) 고려말 李成桂(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붉은 무덤」의 崔瑩(최영) 장군(충남 홍성), 임진왜란때 왜적들이 쳐들어와 조선강산을 짓밟을때 해상에서 거북선 거느리고 왜군의 허리를 쎄려 잘라 대파하고 전황을 반전시켜, 연전연승의 빛나는 승전을 이룩한 ‘불멸의 이순신’ (아산), 만주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홍성), 종로통 바닥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수많은 왜놈들을 깨부수고 해방후엔 극도로 혼란한 정치전선에서 불의와 맞서 싸운 김두한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태극기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왜놈의 칼에 사지가 열지되어 죽어가는 순간까지 대항한 유관순 할머니의 통곡혼(천안), 상하이 虹口홍구공원 의거로 倭帝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든 윤봉길 의사(예산-청양), 그리고 역대 조정에 선 숱한 충신들... 현대로 들어와 뭇 여성의 귀감이 된 육영수 여사(옥천), 5.16거사의 핵심으로서 최근까지도 막강한 실세로 작용했던 김종필(부여).....
그런데 충청도에서는 무엇보다도 道學子도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후천의 우주象상=正易정역을 세상에 밝혀 놓은 김일부 선생(연산), 조선조에 유학을 집대성하여 宋子송자라는 칭호까지 얻은 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대전) (子라는 칭호는 공자, 맹자와 같이 학문과 정치의 대업을 이룬 자들에게 붙이는 문자이다)-그 학파가 조선조의 학풍을 주름잡고 권력을 주도해왔다.
탁월한 학식과 文才로서(집현전학사)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하고 일편단심 충신(死六臣)이 된 박팽년朴彭年(대전 비래동+청주), 성삼문成三問(충남 홍성), 좌-우-영의정 등 최고 벼슬을 지낸 신숙주申叔舟(충북 청원)-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후손으로 나라잃은 암울한 시절에 빈곤속 모진 고생하고 만주일대를 찾아다니며 소실된 조선 고대사의 진면모를 발굴하고 민족혼을 갱생시키기위해 심혈을 다바친 신채호 선생(대전 중리동 출생+청주)..... 그리고 근자에 들어 박람박식의 지적 행보속에서 여러가지하며(^^) 파격을 몰고 댕기는 화제의 인물=김용옥(천안)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쯤에서 캇또 CUT~!
서울=한양이 조선500년 도읍지임에도 불구하고, 畿湖기호(서울-경기)지방을 양반이라 하지 않고, 충청도를 양반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당시 조정의 관료들은 畿湖기호지방과 풍습-말씨가 비슷하고 온화한 충청도에 집과 토지를 갖고 살았고, 또한 충청도에서 수많은 벼슬아치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대부집안의 ‘양반’ 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충청도안에서도 충남-대전보다는 충북-청주-충주쪽이 더 양반답다고들 한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대전은 이미 정체성을 찾기 힘든 복합도시가 되버렸고(그것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다), 충북은 개발이 덜되고 유서깊은 고장이 더 많은 것 같다. 우선 忠淸道란 지명자체가 충북의 忠州충주와 淸州청주에서 따온 지명이다... 충북은 풍속과 말씨가 경기도에 더 가깝다. 그에 비해 대전이남은 전라도와 비젓하기도 하다.(조선조때 금산을 전라에서 충청으로 개편했다) (이 조그마한 남한땅의 손바닥만한 한 道안에서 조차도 지역차이가 난다니... 고개가 설레 설레...)
충청도와 전라도는 같은 백제 문화권으로서 역사적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대전은 1900년대 (강증산 어른이 천지인 삼계를 통투하는 대도통을 얻고 천지공사를 보시던 무렵)만 해도 인구200명도 채 안되는 한량한 밭만 무성했던 한촌일 뿐이었다. (헉~ 200명? ;;;) 회덕-유성-진잠 분지안의 광활한 밭인지라 그저 한밭, 태전太田으로 불리며 ‘미래의 주인’ 을 기다리고 잠자던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미래의 주인’ 은 아직 본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태전 콩밭에서 밭갈고(耕田) 보양물 먹으며 이 땅에 후천 조화세상을 열 공부를 하며 광구창생의 포덕을 펴나아가고 있다...
일제가 원래는 경부선을 당시 충남의 중심지인 공주를 통과하도록 하려했으나, 공주의 고명하신 유림 양반들이 대쪽같은 고집으로 맞서 대항, “철마를 내 집앞으로 통과시키느니 차라리 나를 쥑이시유~” 하는 결사적인 저항엔 일제의 질풍노도같은 철마조차 돌아 갈 수밖에 없었고, 할 수 없이 그 옆댕이의 한촌인 한밭벌 太田으로 지나가도록 하고 또한 호남선의 시발점이 되니, 그로부터 이름없던 대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일제에 의해 임의로 도시가 형성됐으니 그 시작부터가 좀 수치스러운 (양반답지 못한)감이 있다. 그리하야, 대전역을 중심으로 사람사는 촌이 형성되기 시작된 것이다.
당시 공주 갑부 김갑수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약삭빠르게 파악, 아예 대전바닥 땅리란 땅은 몽땅 사재기해서 마구 사들였다고 한다. 아니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백성과 나라의 땅을 다 갈취해 제 손아귀에 움켜쥐려고 해? 이런 천고의 욕심쟁이가트니라고... 허허~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흉내를 내어 제 욕심좀 채워보려한 모양인디..... 워쨋든 김첨지(김갑수)는 헛첨지였다네 그려~ 쩝 ;;
일제 征韓論정한론과 조선침략의 거두인 伊藤 博文 이토오 히로부미가 전국순행길에서 대전을 한번 둘러봤는디... 대전의 강렬한 地勢지세와 풍광의 빼어남에 위압당하고 위기를 느껴, 그 엄청난 기운을 거세해보려고 太田태전의 太字에서 생명의 잉태자리 점(、)을 빼내어 大田으로 개명해버렸다.
마침내 한일합방이 되고, 倭人왜인들이 들어와 대전을 府부로 승격시켜 크게 발전시키고 해방되었다. (그래봐야 일본은 일만 늘씬 해주고 품삭도 못받고 돌아가는 머슴역할을 한 샘이다)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 국운을 쇄진케하고 민족정기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명산대천의 혈자리에다 말뚝박고 지명을 엉뚱하게 바꿔놓아 기운을 돌려놓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시엔 후퇴하다가 대전에 임시수도를 설치하기도 했다. 당시 동족상잔의 격전속에서 대전지역엔 무고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그 와중에 이북에서 물밀듯 내려온 소위 북선사람들이 대전에 대거 정착하게 된 것이다. 전후에는 교통의 요충지와 남한의 중심지란 이점이 작용하여 인근의 청주나 공주의 시세를 능가하고 발전을 거듭한 것이다. 그 시기에 서울 경기와 경상도, 전라도의 三道삼도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물론 주변의 충청인들도 유입되고... 즉, 오만 잡종(심했나?)들이 이해관계로 몰려 들어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서울도 이런 케이스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니 충청도 고유의 전통과 기풍은 온데간데 없고, 잡탕문화가 횡행하는 도시가 됐다는 얘기다.
필자의 先山이 청주-청원쪽이라서 어려서 부터 청주-청원에 댕기곤 했는데, 대전과 지척에 있는 도시임에도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옛날엔 (도심이외에는) 낮에는 소몰며 밭갈고 농사짓고, 밤에는 전기도 없이 그저 호롱불 밝히던 시절이라서 어둑한 적막강산이었지만, 가족과 이웃간엔 무척 다정다감 했던것 같다. (아마 신세대라면 “그럼 그땐 고인돌도 있었나여~?”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 말씨도 표준말에 한층 더 가까운것 같고 늘어지는 것도 덜하다. 어른들은 忠州충주말이 원래의 표준말이라고 한다. 충주나 제천지방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말씨가 참 예의롭고 정갈하여, 자연스러우면서도 명명백백하여 품위가 있으니, 과연 귀감=스탠다드가 될 만 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느낄 것이다. 예의로움속에서 묻어 나오는 말이기에 더욱 진실한데, 예로부터 기호지방과 인접한지라 말씨도 비슷하여 위화감이 없다. 서울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럽긴하나, 잦은 꾸밈새와 그런 억양에다가 깍쟁이풍이어서 품위가 좀 떨어지는 감이 있다. (나의 편견일까... 욕 바가지로 날아오는 소리 ;;;)
보기에는 충청도 방언이 경상, 전라 방언에 비해 톡 튀는 개성과 특색이 없는것 같고 밋밋해 보이지만, 기풍있는 분들의 말을 계속 듣다 보면 구수~한 맛과 헤아릴 수 없는 짚이(깊이), 그윽한 향이 은근하게 스며든다.
돌 굴러가유~ 천안 삼거리 흥~
이거여 저거여~(예로부터 일찌기 네티즌의 외계어를 쓰는 선견지명이에여~^^)
늘어지기로 말하면 서쪽으로 감에 따라 더욱 더해지는디~ Go West!
西山서산-泰安태안에 이르면 극에 달하여 한없이 늘어지는디... 말여- 유~~~
하루에 느릿 느릿 몇마디 하다보면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저물고... ^^
아마 이쪽 양반들은 속에 능구렁이에다 늘보 곰탱이들 댓마리씩 들어앉은 모양이여~
그래뵈어도 서산 양반들은 深深黃河水심심황하수와 같은 깊이와 따라갈 수 없는 내면의 품위가 무르녹는다. 그러나, 교통발달과 인터넷 보급, 그리고 지방발전에 따라 이젠 그런 모습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한편, 淸州청주사람들을 보면 청주란 이름답게 청순-순박-온화하고 정이 많아 마음에 쏘옥 들었던 추억이 있다. 고향에 오랜만에 찾아가 온화한 산세와 멋들어지게 휘어진 고고한 기풍의 소나무숲을 바라볼 때엔 뭔가 말할수 없는 신성함을 느낀다. 발라당 까진(^^) 큰 도회지인들과 달리, 충절의 전통과 고유한 문화를 느낄수 있는 고고한 선비의 분위기였다. (어린 시절이라 어른들이 나에게 잘 대해주고 나쁜 점을 못봐서, 그렇게 좋은 인상만 남겨진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러한 내면의 문화를 보고 사람들이 양반이라 칭송하는구나 하고 느껴진다..... 단, 이동네는 평생 바다구경을 못하는 내륙의 안쪽에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이 좀 답답하고 덜 떨어지고 깨이질 못했던것 같다. 그리고 순박하기만 해서 이 험난한 세상풍파를 어찌 견딜까 싶기도 하다. (별걱정을... 사람나름 이겠지만...) 아무튼 이렇듯 고고하고 좁아 터진 청주도 지금은 개발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어, 인심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다만, 면면히 흘러내려온 仁義로운 전통과 德덕, 그리고 옛 시골의 정감어린 분위기가 사라져감이 너무 너무 아쉬울 따름이다... 정말 옛시절이 그리워진다..... ;;;
한편으론, 오히려 지방색이 결여된 서울, 대전처럼 비빔밥~잡탕같이 복합적인 도시여야, 국론을 하나로 묶을수 있는 도읍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전국의 州주자 들어가는 고을이나 오래된 기존 도시에선 결코 새서울이 이뤄질 수 없다. 왜? 강한 지방색으로 인한 고집스런 텃새와 배타성, 편협성 때문에 새롭고 보편적인 문화를 펼치기 어렵다.
손바닥만한 남한 땅의 八道팔도강산이 제각각 개성이 뚜렷하고 현저하게 다른데, 이는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예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렇게 다를 수가.....
그래도 국토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치우침이 없고 지방색도 심하지 않은 충청도, 그중에서도 (지방문화가 복합되어)충청도답지 않은 광활한 터전 = 대전(太田)에 장래 새 중추 도읍으로서 기대를 걸어볼 만 하지 않은가.....
6.25전쟁때 위기에서 진짜 목숨걸고 싸운 의로운 용사들이 충청도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평소엔 느리고 고무줄 같지만, 일단 위기에 처하면 極强극강으로 돌변하여 본성이 발동,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않고 끈질기게 밀어부쳐 큰 일을 이뤄내고 최종승자가 되는 것이다.
궁사가 활을 쏘기위해 활을 달일때, 급하고 뻑세게 달이면 부러지거나 제대로 겨냥하지 못한다. 그러나 활달이기를 진득~이 하여 一心집중하면, 그 魂이 그대로 화살에 전달되어 목표에 적중되고 만다. 바로 그것이다! 겉보기엔 느림보같아 보이지만 내면이 침착하고 진득함으로 충만돼있다...
일찌기 上古시절, 단군조선(만주)의 정통을 이어받은 熊族웅족=扶餘부여국의 일파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朱蒙)의 아들인 沸流비류와 溫祚온조형제를 따라 남으로 대거 이동, 百濟백제국을 창건하여 서울 인근(위례성=풍납토성,몽촌토성)에 도읍하다가, 고구려의 맹위에 밀려 더욱 남하, 공주(곰나루:熊津웅진), 扶餘부여에다 도읍을 정하고 마한의 토착민(虎族호족)과 어우러져 찬란한 문화를 謳歌구가하였다.
더우기, 백제는 동서로 한없이 뻗은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다. 西北向하여 중국의 산동에 백제7군을 두어 대륙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東南向하여 倭왜(일본)으로 대거진출, 倭=大和야마토정권, 飛鳥아스카, 奈良나라, 平城헤이죠, 平安헤이안 시대를 열었던 主役주역이자, 고대일본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장본인이 바로 백제인들 아닌가! 그들이 바로, 일본의 왕족-호족 그리고 백성이 되어 일본이란 나라를 처음 일으킨 창업자가 아닌가! 일본의 文武문화 즉, 학문, 무사도(사무라이=싸울아비)와 각종문화의 근간과 틀을 이뤄낸 공덕이 있잖은가...!
오호라, 장쾌하도다!!!
일찌기 백제인들이 어떻게 일본에 진출하여 나라를 일으켰는가=관련자료 ☞
☞ ☼ 일본 역사문화의 심층, 그 一考察 ~ 古代의 로만스+통곡하는 魂 ~
☞ 단군玉山신사·百濟·高句麗·新羅계의 神社=사당들 ☼ 일본을 개척한 불멸의 한국인들!
충청도는 산세가 험난하지 않고 (한국에서 가장)완만하게 펼쳐져, 마치 봉황이나 학이 고고하게 춤을 추는 듯한 산들이 많다. 그래서 이 고장엔 鳳凰봉황, 龍용, 鶴학자 들어가는 지명과 산이 유난히도 많다. 이런 지세의 기운을 받아 이 지방인들은 봉황,학같이 겉으로 온화하고 내면적으로 조화된 강렬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지명 관련자료 ☞ 대전太田 한밭의 여러 지명들...
山紫水明산자수명 의 고장이라고 할까...
비단같은 錦江금강의 젖줄이 휘감아 도는 아름다운 錦水江山금수강산...
(개뿔의 젖과 꿀이 흐른다고 사기친 에덴동산과는 다르다...^^)
淸 風 明 月 청풍명월 이라...
즉, 맑은 바람에 밝은 달과도 같이, 청순-순박하고 밝은 마음,
바로 그것이 충청도의 원원한 心法심법이자 기질이 아닐까.....
후천조화선경을 여는 淸☆和☆明☆麗 (청화명려) 의 理想鄕 이상향을 갈구하는 (이상적인) 마음심법이리라...
남한의 中心에 위치하여(한반도 중심은 아니지만)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천혜의 지리적 여건을 갖춘 지역,
한편으론 鷄龍 계룡의 둘레로 감싸안아 수호하며 외부침략으로부터 기막히게 막아주는 '절묘한 요새의 형국' 이다. (허허~ 거참 묘하도다, 묘혀~...)
中庸之心 즉 중용의 마음은 바로, 中+心=忠충이 된다. 이것이 忠淸의 忠의 정신이다.
그것은 곧, 나라(國)와 군주(帝王)에 대한 충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만고의 충신,효자,열녀,의인,지사가 많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남한지역은 크게 보아 五道로 볼 수 있다. 경기도(서울),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이렇게 5개道로 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조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갑오경장(1896년) , 전국을 13개道로 개편하면서 한 道가 남북으로 나뉘었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분열시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갈른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여기서 理法이법적으로 보면, 천지만물의 五行기운(木火土金水)을 받아 지구촌의 중추 명당혈 자리인 남한땅도 五道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바로, 충청도-태전은 五行기운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여 중앙에서 만유를 통치 관장하는 五黃極오황극 土토자리이며, 후천이 열리면 비로소 그 혈자리가 발음되어, 모든 것의 완성자리인 无極무극 十土십토자리로 재탄생하게 되리라~.
이 어찌 다시개벽 아닐런가 !!!
周易 八卦 주역 팔괘 中의 艮方간방인 한반도, 그중에서도 太田태전 한밭땅에서 불원간에 후천선경5만년의 상서로운 대도읍이 창조되나니.....
세계조화정부造化政府의 옥경대玉京臺 36만간이 조성되어 도덕과 진법으로 세상을 통치하고 온누리에 찬연한 광명의 빛
을 밝혀주는 동방의 횃불이어라~~~!!!
|
호서지방 [湖西地方] | ||||||||
호서는 충청남·북도의 별칭으로 제천 의림지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진국에,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통일신라시대에는 9주의 하나인 웅주에 속하였다. 한반도의 거의 중앙부를 차지하여, 정치적 중심지를 이 지방에 두는 경우가 많았다. 마한의 중심지는 지금의 직산이라 전해지고, 백제의 수도는 웅진(지금의 공주)·사비(지금의 부여)에 두었고, 신라 때에는 충주가 중경이 되었다. 6·25전쟁 중에는 지금의 대전이 한때 피난 정부의 임시수도였다. 대전은 중도라고도 부른다. 특히 백제 때에는 중국의 육조문화를 받아들여 당시 한반도에서도 가장 문화가 발달하였고, 그 문화를 일본에까지 전파하였다. 또한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빌어 한반도를 통일하자 이 지방은 신라의 주가 되었다. 고려 초에는 충청남도지역을 하남도로, 충청북도지역을 양광도로 편입하였고 공청도, 공홍도, 충흥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조선 인조 때 비로소 이를 통합하여 충청도라 불렀으며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좌도와 우도로 나누기도 하였다. |
첫댓글 이렇게 자기 고장 예찬론만 늘~씬 펴는 나자신을 보면 충청인답지 않고 양반이 못되는가 보다.^^ 충청도에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드러내지 않고 은거하며 공부와 도닦기에 힘쓰는 거사들이 많았다. 머나먼 이국땅(일본)에까지 와서도 (고질적인) 충청도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나는 멍청이, 우습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런디, 자신은 짐짓 모자라는 척, 낮추면서 은근~히 과시하는 것, 이 또한 충청도다운 면모가 아닌가...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