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영화 <괴물>의 한 장면 |
봉준호의 영화 두 편, 〈괴물〉과 〈옥자〉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과 〈옥자〉에서 ‘괴물’과 ‘옥자’는 그 출생이 고전적인 괴수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근대적 체제의 가장 직접적인 산물입니다. 미군 부대에서 유기한 화학 약품으로 탄생했고 유전자 조작 식품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당대 인류의 일반의지가 개입된 핵실험이 낳은 괴물들 따위보다, 분명 더 구체적으로 몇몇 인간의 잘못으로 구성된 괴수입니다. 표현주의 영화에서 무의식을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과도 차원이 다르고요. 그러한 괴물과 옥자가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일은 앞서 얘기한 괴수들이 도시를 무너뜨리며 근대성을 비웃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촘촘한 근대적 체계에 대한 불신을 야기합니다. 〈괴물〉에서 군대와 경찰, 공무원은 불법적으로 약품을 버리고 시민 보호에는 무관심하며 뒷돈을 받습니다. 〈옥자〉는 값싸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일상적인 욕구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충족되는지 그 이면을 들춥니다. 체제와 일상, 어느 것도 믿을 게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영화의 영문 제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문 제목이 영화의 허리를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옥자〉부터 보자면 ‘okja’는 소문자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이름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한 관례입니다. 그런데 옥자는 소문자로 쓰였지요. 먹히기 위해 만들어진 실험체인 옥자는 미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던 추억을 뒤로 하고 그의 피투성(被投性, être-jeté)에 충실하기 위해 끌려갑니다. 옥자를 되찾기 위한 미자의 대장정은 옥자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같으나, 옥자는 미자의 ‘I want to buy okja, alive’라는 말로 극적인 순간에 구출됩니다. 영화 내내 미자는 ‘옥자Okja는 내 가족이니까 데려가겠다’는 논리를 펼치나 통하지 않고, ‘옥자okja를 사겠다’는 말로 그를 구출합니다.
영어 시간에 배웠다시피 괴물은 영어로 monster입니다. monster의 어원은 재미있게도 monere, 라틴어로 ‘경고하다, 보여주다’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에 명사를 만들어주는 접미사 -trum을 붙여 monstrum이 되었지요. 중세 문헌을 읽다보면 신적인 계시나 장엄한 광경을 묘사할 때에 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왕왕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괴물〉의 영문 제목에는 monster가 없습니다. 〈The Host〉지요. 곧 숙주입니다. 기생자에게 영양을 빼앗기는 그 숙주 말입니다. 〈괴물〉보다 더 어려운 제목입니다. 이 영화에서 누가 기생자이고 누가 숙주일까요? 아마도 기생자는 한강에 나타난 돌연변이 괴물이겠지요. 그렇다면 숙주host는 그 괴물이 서식하는 우리 사회, 곧 미군 부대의 유기된 약품이 낳은 괴물이 한국인을 학살했으나 미군 부대의 폭력적인 진압만이 용납되고 미국인의 죽음만이 추모되는 이 시공간을 의미하겠지요. 국문 제목과는 달리 〈The Host〉는 다른 괴물, 우리 사회를 지시합니다.
![]() | ||
▲ 영화 <옥자>의 한 장면 |
균열을 상상케 하는, 그 절망적 희망 앞에서
봉준호의 괴물은 균열을 상상케 합니다. 괴물이 등장하면서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게 되고 견고했던 것들이 유동합니다. 〈괴물〉은 죽이면서, 〈옥자〉는 죽임을 당하면서 그 작업을 묵묵히 수행합니다. 튼튼한 안보 국가와 세계 최강의 군대 미군이 괴물의 탄생과 성장을 시민을 제물 삼으며 주도하는 모습에서, 조작된 생명체〔okja〕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가족〔Okja〕인 존재를 거리낌 없이 도축하는 장면에서 밥그릇이 핏빛으로 보이는 환상을 보면서 균열이 발생합니다. 이 균열은 앞서 얘기한 초국가적 힘으로 도시를 부수는 괴물은 선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찾아온 그 괴물들은 오히려 ‘이 정도로 막강한 괴물이 아니라면 근대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괴물〉과 〈옥자〉는 도리어 완벽하다고 상정된 체제가 작은 균열을 통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붕괴 이론(Zusammenbruch theorie)의 단면을 비춥니다. 사람들의 신뢰에 기반을 둔 상상의 공동체인 근대적 체제는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이물질에 의해, 괴물을 통해 상상된 균열을 통해 그 신뢰성을 잃으며 무너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족을 구하겠다며 국가에 맞서 괴물과 싸우는 힘없는 일가족과, 국가의 힘에 필적하는 대기업의 자본력과 싸우는 미자 또한 체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이물질입니다. 많은 작품들은 이 기생자들을 영웅으로 그립니다. 악(惡)과 싸워 휘청거리나 기어코 세상을 뒤엎는 용맹한 다윗과도 같은 영웅 말입니다. 그러나 〈괴물〉과 〈옥자〉는 영웅 서사를 뒤틉니다. 승리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한 결말입니다. 〈괴물〉에서 일가족은 거의 다 죽었고, 〈옥자〉에서 미자는 수천 마리의 옥자를 뒤로 한 채 고기 공장을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이 비참한 패배들을 통해 영화는 이물질에 불과한 개인이 체제 앞의 개인이 쟁취할 수 있는 미미한 승리 또한 보여줍니다. 〈괴물〉에서 딸을 잃은 강두는 겨우 구출한 생면부지의 고아를 기르고, 〈옥자〉에서 미자는 작은 돼지 한 마리를 숨겨서 옥자와 함께 살게 되니까요.
〈괴물〉과 〈옥자〉는 그렇게 답답한 결론을 내립니다. 모순 그 자체를 보여주면서요. 결벽증적인 체제가 자생적으로 이물질을 낳고, 그 이물질은 체제 자체를 위협하나 체제는 견고하며 도리어 체제를 믿고 있던 이들을 죽이고, 이물질로부터 나를 보호해달라는 이들을 이물질로 둔갑시켜 쫓아내고 나서 고작 그런 승리를 안겨준다니요. 그러나 이 끈적끈적하고 시원치 못한 결론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물질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전적인 타자를 완벽히 물리치는 자기생산(auto-poiesis)적인 체제에 대한 신앙을 깨뜨리는 이물질 말입니다. 이 영화들에는 그래서 결벽증적인 견고함을 한방에 두들겨 패는 카타르시스도 없고, 차라리 결벽증적인 견고함을 전시하는 청결의 미학도 없습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희망과 절망 중 어떤 것을 느껴야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절망 끝의 희망이 절망인지 희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물질의 거북한 역학이, 그리고 그보다 더 거북한 이물질의 사회학이 버젓이 있을 뿐이지요. 이물질을 둘러싼 이물질들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강두는 썰렁한 한강 둔치의 편의점을 지키고, 미자는 산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그런 일이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평화로움을 연기하는 강두와 미자의 일상을 엿보면서 그들이 끔찍한 상처를 잠잠히 묻고 있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영웅 서사를 따라가지만 영웅이 아닌 이들의 결말은 이렇게 나는 것 아닐까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으로 말입니다.
〈괴물〉과 〈옥자〉는 이물질의 사회학적인 해석을 거울삼아 끝내 전쟁에 참여했던 소시민적 삶의 본질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이물질을 만드는, 그러나 이물질을 용납지 않는 우리 사회에 영웅은 없다는 말로 막을 내립니다. 우리는 희망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물질을 만들지 않기를, 그 이물질이 내 일상을 덮치지 않기를, 그러나 반드시 내 일상을 덮칠 이물질에 죽지 않고 저항하기를, 그리고 이물질에 저항하는 나를 사회가 이물질로 여기고 죽이지 않기를. 딱 그 정도의 절망적인 희망만 있으면 이곳에서 살기 충분하지 않을까요.
김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