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인생의 마지막 장면 딤후1:7-8, 2:11-12, 4:6-8
2월은 초중고를 비롯하여 대학까지 졸업을 하는 졸업시즌이다. 입학하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다니 얼마나 그동안 공부하던 순간이 힘들었을까 하는 마음도 교차하겠지만 전 과정을 모두 통과하는 학생들에게만 이 영광의 졸업이 주어지게 된다. 우리 인생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이런 입학과 졸업이 반복적으로 일어 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인생들이 출생하는 것이 이 땅에서 최초의 입학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이 땅에서 인생의 마지막 졸업이라고 하면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생 졸업을 하면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미련한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사후의 세계가 어디 있어 하면서 먹고 마시고 취하다가 마지막 졸업을 하는 인생들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은 태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이전 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생들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라는 책에서 저자는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죽은 이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했어느 장례지도사가던 쓴 책에서 40대 중반, 암에 걸려 저승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돌아온 저자 강봉희는 그때부터 죽음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그는 2004년부터 700여 명의 고독사 사망자들과 기초수급자 고인들의 장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도맡아왔다. 저자는 오늘도 외롭게 죽은 이들의 시신을 염습하고, 장례식장을 오가면서 오래도록 죽은 이들의 마지막을 목격했던 그가 들려주는 죽음이란 삶과 인간에 관한 길고 긴 성찰의 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피조물이 있지만 피조물이기 때문에 수명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오르지 인간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면서 인간만이 신을 믿고 종교생활을 한다. 인간을 제외한 어떤 피조물들은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해 생각할 수 없지만 인간만은 이 땅에 살아온 이후 예날이건 지금이건 누구든지 죽음 이후의 세계를 한 두 번씩은 생각하지 않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만이 영혼이 있는데 영혼이란 불멸의 존재라는 말이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 죽음을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은 오직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조상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라면 누구든지 이 세상 떠나기 전 그래도 나는 선하게 살겠다고 남을 위해 희생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 죽음을 준비했다고는 할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확실히 말하는데 인류역사상 죽음이라는 사망권세를 이겼던 사람은 예수그리스도 한분 밖에는 없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치르고자 십자가위에서 죽으셨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들만이 죄값을 치른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인생들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는 죽음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마다 신이 있고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처럼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던 사람은 이제까지 예수님 이외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을 믿고서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런 무지한 자들이 참으로 불쌍하기도 하다. 이제 죽음문제를 해결하고부터는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총사망자수는 한해 373,000명 정도로 매일 1000명 이상이 사망한다는 것인데 사망 원인 1위는 암, 2위는 심장질환이며 이 외에도 교통사고나 살인이나 자살자수도 무시못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특히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 재해는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에 대하여는 그저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로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 이런 이야기는 당신이 오늘 죽을 수 있는 수천가지 경우 수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해 숨을 수는 없을 것이기도 하지만 죽음이란 세상에 나온 순서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예고 없이 갑자기 오는 경우가 너무 많으므로 인간은 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고 어떻게 죽어야 복된 죽음인가를 죽음을 앞둔 사도 바울의 죽음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한 그의 신앙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을 압축하고 압축하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이다. 인생이 생을 마감하고 나면 사후세계는 천국에서 영생하느냐 지옥에서 영벌받느냐로 결정되는데 문제는 아무도 살아서는 지옥과 천국을 경험할 수 없는 길이기에 믿으려고 하지 않지만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인류에게 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책은 오직 성경말씀이외는 어디에도 시원하게 알려주는 곳은 없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경고는 162번이나 기록되었으며 이중에서 70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예수님이 이런 지옥을 70번 말씀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옥은 실존하는 것이라고 봐야한다. 예수님은 인생의 목숨에 대해 온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목숨인데 이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어도 지옥으로 향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다. 70억이 살아가고 있는 지구촌에는 매일 240,000명이 죽어 가고 있다. 오늘은 당신이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신도 곧 그 속에 포함될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는 당신이 결정하지 않지만 당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당신이 오늘 죽어도 될 만큼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해 준비가 안 되었다면 그런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지옥은 유황불속에서 영혼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이다. 당신의 탐욕적인 육체는 세상에서 한 순간 살지만 지옥에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영원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쾌락을 다 즐긴들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지옥으로 갈 것이다. 영원에 비하면 이세상의 삶은 1초 보다도 짧은데 당신은 지금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죽음에 대한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아서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습니다. 믿던 안믿던 모든 인생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아니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사도 바울이 자신이 두 번째 투옥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옥중에서 쓴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통해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고백한 심정을 볼 수 있는데 바울은 자신이 죽을 수 있으므로 성도들이 자기 때문에 뒤로 물러날 가봐 염려하고 디모데가 흔들릴 가봐 염려하는 바울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1. 바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로마화재발생
64년에 로마시에서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여 광범위한 파괴와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화재는 며칠 동안 계속되어 인근 지역과 도시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네로 황제가 비판을 받게 되었을 때 네로황제는 이 화제를 일으킨 자를 당시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키면서 그 중심에는 사도바울이 지목되었다. 사도들의 발자취를 읽으면서 네로황제의 박해가 시작된 이래 기독교회는 어느 곳에서나 배척 받는 종파였다.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로마시에 불을 지른 방화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바울은 체포되었고 다시 감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에게 올 것 같으니 바울에게 전가되어 교회가 환난 속에 들어갔을 때 교인들은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데 네로황제 치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고 도시를 떠나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는데 지금 마지막 교회들도 비슷하다. 로마시방화 범죄가 바울이 저질렀다는 것으로 전가되면서 바울은 만민에게 저주의 대상이 된다. 바울은 아무도 모르게 핍박받았다가 순교한 것이 아니라 로마라는 국가 전체에서 범죄자라고 핍박을 당한 것처럼 마지막 때도 성도들에게 온 세상의 미움이 집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결국은 바울과 가깝다 혹은 내가 바울을 지지한다고 한다면 바울과 같은 취급을 받으니 두렵다는 것이다. 마지막 666 짐승표 환란이 온다면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짐승표를 안받은 사람들이 먼저 체포될 것이며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큰 압박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는 네로황제의 큰 핍박이 와서 바울이 체포 되어 감옥에 들어갔을 때 바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떠났다는데 그중에는 바울과 가깝다는 친구들도 떠났다.
(딤후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나(바울)를 버리고 돌아선 이 일을 네(디모데)가 알거니와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그때 또 유명한 또 한사람이 또 떠났는데 그 사람이 데마이다.
(골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데마는 초대교회 지도자급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바울과 절친한 관계였는데 바울이 두 번째 투옥되자 그는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그레스겐은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바울과 함께 누가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이 마지막 순간에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면서 희망을 잃어버리고 좌절하여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세상으로 갔다는 기막힌 이야기에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우리가 평안할 때 진리를 분명하게 붙잡고 충성하는 신앙이 있어야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게 된다. 1C 때 바울에게 직접 복음을 받았던 사람들도 바울이 체포되고 감옥에 갇힐 때 바울은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바울이 체포되었을 때는 나이도 많고 오랜 수고와 병으로 쇠약해 졌을 때 바울에게는 인생에서 도움이 가장 필요하고 절실했던 때 그를 옆에서 지지했던 사람들이 떠났다는 것이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나고 동역자들이 계속해서 떠났다는 것인데 떠났던 그들이 세상에 나가 얼마나 행복해 졌을까? 남은 생애동안 바울이 순교당하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같이 신앙생활 하던 많은 사람들이 핍박당하고 순교당하는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진리를 버리고 넓은 길로 간다는 것이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 떠났던 자들은 남은 평생동안 가책을 받고 살아야하지 않았겠는가? 진리를 알았고 빛을 받았음에도 세상에 마음을 뺏겨서 진리를 떠난다는 것은 최악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누가만 남았다고 했다.
(딤후4:11) 오직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 표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에게 큰 기쁨을 준 사람이 있는데 에베소 사람인 오네시보로였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린 사건은 에베소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바울은 3차 선교 중 에베소에서 3년간 전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에베소교회가 세워졌는데 지금 디모데가 그 에베소 교회를 맡아 사역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곳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배반이라기 보다는 인간적 신의에 대한 배신을 나타낸다. 아마도 아시아, 혹은 에베소에서 함께 교제한 적이 있는 자신의 동료들로부터 바울이 매몰차게 홀대를 당하거나 배신당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바울이 체포되었을 당시 로마령에 거주하고 있던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대한 원조를 거부했던 것일 수도 있고 바울이 재판을 받을 당시에 법정 증인이 되는 것을 거절한 것이라고도 추정된다. 바울도 표면상으로는 고난과 고통에 무관한 것처럼 보였으나 고통과 배반의 때에 오네시보로의 방문은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로 보낸 바울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바울도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하여 아무 고통도 없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는 동정과 우정을 갈망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이 재차 하나님께 오네시보로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을 청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방문을 매우 고마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베소 사람인 오네시보로가 로마 감옥까지 찾아와 그를 격려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관심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16절에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빌었던 바울은 이제 개인 오네시보로에게도 긍휼을 빌고 있다. 18절 그날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인 심판의 때에 오네시보로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17절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다는 것에서 그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자신을 만난 사실을 종말론적 대심판의 때에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만나기를 바라는 염원에 기도하고 있다.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는 말씀으로 보아 바울에 대한 오네시보로의 태도가 에베소에서뿐만 아니라 로마 감옥에 있을때에도 충성스럽고 헌신적으로 바울을 지속적으로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디모데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마찬가지로 끝까지 충성할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딤후1:16-18)16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아니하였으며 17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주옵소서.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갔는데 오네시보로 만큼은 내가 옥중에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였다. 마지막 재림의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네시보로를 정말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고 가셨을 때 자신에게 치료를 받았던 수많을 사람들이 와서 동정과 우정을 주었으면 하는 것을 얼마나 갈망하였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황속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므로 환난이 올 때 누가 하나님께 진실했는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일이 잘되고 교회가 잘 나갈 땐 사람들이 몰려오지만 환난이 오면 소수의 사람들만 교회에 남는다. 그래서 환란이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 주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그 때 살았다면 바울의 옥바라지를 위해 바울을 방문했을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로마 전체에서 바울이 로마시를 불지른 의혹을 받고 있으며 바울이 황제로부터 반역죄로 미움을 받고 있는데 바울을 방문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 바울이 네로 앞에 선 장면을 생각해보자.
2. 죽음앞에서 복음을 선포한 사도의 위대함
헬라인과 로마인들 가운데는 피고가 재판장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변호인을 고용할 특권이 허락되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지만 다시말하면 로마시대에는 죄를 범한 피고인에게는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었던 권리가 있었지만 그러나 바울이 네로황제에 소환되었을 때는 아무도 그의 변호인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인이나 그리스도인 중에는 그가 이런 시련의 때에 그의 곁에 서려고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기소하였는데 누가 그의 변호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은 그 고독과 괴로운 길을 걸어간 자신의 상황을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다.
(딤후4:16-17)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었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하게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디모데가 이 편지를 읽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로마에 있던 누구도 바울이 이렇게 고생했을 때 아무도 변호도 하지 않았고 옆에 있어주지도 않았었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가 바울의 신앙이다. 바울은 이 재판장의 고난을 전도할 기회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핍박과 고난이 오는 것을 전도의 기회로 보는 것이다. 마지막 환란이 왔을 때도 성도들에게 무서운 핍박이 쏟아질 때 늦은비 성령을 받은 자들은 그 기간을 복음의 마지막 전도의 기회로 본다는 것과 같다. 이 네로황제의 권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절대 권력으로 말 한마디면 곧 법이다. 네로황제가 어떤 권력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바울의 입장이 정확히 설명된다. 네로의 권위를 의심하거나 그의 뜻을 거스릴 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왕들은 그의 발곁에 그의 면류관을 벗어 두었다. 강력한 육군은 그의 명령에 따라 행군하였고 그의 해군 깃발은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의 모든 군사들이 네로황제의 말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의 조각상은 재판정에 세워졌고 원로원 의원들의 포고나 재판관의 판결은 그의 뜻대로 정해졌다. 네로의 명성은 세계를 진동시켰다. 그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재산과 자유와 생명의 손실을 의미하였고 그의 얼굴 찌푸림은 염병보다 더 무서웠다. 이런 네로황제 앞에 바울이 선 것이다. 아무도 변호해 줄 사람 없이 말입니다. 바울이 의지하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시었다. 황제 앞에 서있는 바울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변호인도 없는 노령의 죄수가 네로 앞에 섰다. 황제의 얼굴에는 마음속으로부터 격노한 감정의 수치스러운 표정이 있었고 피고인의 얼굴에는 하나님과 화목한 마음이 나타나 있었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던 것은 로마시가 불탔던 것을 바울에게 뒤집어 씌워야 하므로 자기의 심증을 옆에 있는 원로들에게와 재판관들에게 다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경험은 빈곤과 극기와 고통의 그것이었다. 그의 원수들이 그를 위협하려고 행하는 끊임없는 거짓소문과 비난과 학대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려움 없이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가 믿는 주님처럼 그는 겁 없는 방랑자였지만 예수님처럼 바울은 인류를 복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재판장 앞에서 내가 불을 안질렀다는 논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1) 법정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바울
변덕스럽고 화 잘 내고 음탕한 폭군 네로가 어떻게 바울의 복음 선포를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있었겠는가? 넓은 법정에는 열심 있고 침착하지 못한 군중들이 운집하여 일어날 모든 것을 보고 듣고자 앞으로 몰려들었다.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이 거의 다 있었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학식있는 사람과 무식한 사람 거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모두 다 같이 생명과 구원의 길에 대한 참 지식이 부족하였다. 기독교의 거물 바울이 어떻게 자신을 변호하는지를 듣고자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운집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소요와 이단이라는 해묵은 비난을 퍼 부었고 유대인과 로마인은 모두 그를 로마 도성에 불을 지르도록 선동하였다고 고소하였다. 그에게 이런 비난이 역설되는 동안 바울은 계속 침착함을 유지하였을 때 백성들과 재판관들은 놀라움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많은 심문에 참석하여 많은 죄수들을 보아왔으나 저희 앞에 있는 이 죄수처럼 거룩하고 침착한 모습을 가진 자를 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들은 바울의 얼굴과 표정에서 비겁함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재판관들의 예리한 눈들은 죄수들의 얼굴의 표정을 보고 그들의 죄상을 알기에 익숙하였으나 바울의 얼굴에서 범죄의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하였다. 바울이 자신을 위하여 변호하도록 허락을 받았을 때 모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자 로마의 법에 의해서 기소를 당한 바울은 의아해 하는 군중 앞에서 십자가의 깃발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바울이 그의 앞에 모인 무리들 곧 유대인들과 헬라인들과 로마인들과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바울의 영혼은 그들의 구원에 대한 열렬한 소망으로 솟구치게 되었다. 바울의 관심은 법정의 분위기와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의 영혼들로 보는 것이다. 네로도 영혼이고 재판관도 영혼이고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도 다 영혼들이고 방청객도 영혼이고 바울은 이 재판관이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할려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 준비가 되어있는데 바울은 이들에게 무슨 설교를 했을까? 바울은 그를 둘러싼 위험들과 매우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운명을 보지 않았다. 그는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탄원하시는 중보자 예수님만을 바라본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그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야 할 이 영혼들을 보는 것이다.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보는 것이다. 인간의 웅변과 능력이상으로 바울은 복음의 기별을 제시한다. 그는 청중들에게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마련된 희생제물을 가리킨다. 그는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무한한 댓가가 지불되었음을 선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동참하도록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땅은 하늘에 연결되고 사람들의 행위는 선악간에 무한하신 재판장의 목전에 드러난다.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왔는데 이제는 떠날 시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가 법정에서 한 말을 한 번 들어봅시다.
(2) 죽음앞에서 바울이 선포한 복음
(딤후4:6-8) 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이 말은 내가 이제 죽게 되지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으므로 이 후에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데 내게만 아니라 나와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실 것이라는 진리이다. 그 자리에 자신을 재판하기 위해 이렇게 모여 있지만 사실은 너희들이 하늘법정에서 심판받게 될 거라는 암시가 던져진 것이다. 바울은 지금 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인간이 하나님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중보하시는 은혜를 말하면서 모든 사람의 행위는 심판받는다는 것을 선포한 바울의 선포는 그들의 양심속에 성령님이 파고드는 호소를 주셨다. 바울의 설교를 듣는 재판장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바울의 음성은 하늘의 음성과 같다. 말이나 외모에 두려움이나 슬픔이나 낙담도 없다. 무죄함을 의식함으로 굳건하고 진리의 갑옷을 입은 그의 말은 전쟁의 부르짖음 위에 들리는 승리의 함성과 같다. 그는 그가 일생을 바친 사업이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유일의 사업임을 선언한다. 비록 그는 죽을지라도 복음은 죽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분의 진리는 승리할 것이다. 바울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태도로 받아야 되느냐가 중요하다. 진리가 어떤 위치에 세워져 가는가? 재림신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결하므로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바울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음을 보았다(행6:15). 사람들은 전에 이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 말들은 가장 완고한 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우상숭배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중보와 하나님도 누구신지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의 심판을 이야기 하는데 성령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양심을 책망하신다. 분명하고 확신을 주는 진리는 오류를 무너뜨렸다. 후에 즐거움으로 이 빛을 따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빛이 비추었다. 그날에 말해진 진리는 열국을 흔들고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살아남을 것이며 그들에게 말한 입술이 순교자의 무덤에서 잠잠하게 될 때에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를 끼칠 것이었다. 바울은 결국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지만 그러나 재판장에서 그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감화는 남아 있었다.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바울의 저 신앙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분이 아닌가? 도무지 우상숭배자의 속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신앙의 모습이 나온 것이었다. 그때 네로 황제도 그 설교를 들었을까?
네로는 이때 들은 진리를 일찍이 들어본 적이 결코 없었다. 네로 주위에는 전부 우상숭배자로 아부하는 자로 가득 차 있었다. 네로 황제 주변에는 바울과 같은 위대한 자가 있을 수 없었다. 네로 황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울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생애의 중한 죄악이 그 순간 그에게 그처럼 나타낸 때는 전에 결코 없었다. 하늘의 빛이 네로 황제의 심령을 꿰뚫었으며 마침내 그가 고소를 당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까 하며 두려워 떨었다. 진짜 끌려 나간 것은 바울인데 바울은 떨지 않고 오히려 네로 황제가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하고 두려워 떨었다. 네로는 사도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아무 증거도 없이 고소당한 바울에게 감히 형을 내릴 수 없었다. 두려운 느낌은 한동안 그의 피에 굶주린 정신을 제지시켰다. 네로는 바울에게 사형을 선언하지만 다음으로 미뤄버린다. 지금 재판장에서 바울이 재판받으러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 모인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듣게 되었다. 진리가 선포되고 성령께서 호소하실 때 굴복하지 않으면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고 심판대에 오르게 됩니다. 한동안 범죄하고 그 마음이 완고한 네로에게 하늘의 평화가 바람직하게 보이는 순간 은혜의 초청은 네로에게까지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용서를 바라던 생각은 일순간에 불과하였다. 그는 바울을 그의 토굴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하나님의 종에게 토굴의 문이 닫혀 졌을 때 로마황제의 회개의 문도 영원히 닫혀졌다. 하늘에서 온 빛이 다시는 그를 둘러싼 흑암을 꿰뚫지는 못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님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도 옆에서 같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네로가 이 빛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즉시 사탄이 와서 어둠으로 에워싸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빛이 오고 성령께서 마음에 호소하실 때 바로 굴복하는 사람들이 하늘에 들어가게 됩니다. 얼마 후 그는 하나님의 응보의 심판을 받아야 하였다. 성안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거리에는 네로황제와 그의 모든 지지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분노에 찬 폭도들로 가득 찼으며 그들이 신속히 왕궁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네로는 이 위기의 순간에 용기를 잃었고 비겁하게도 도성에서 도망하여 몇 마일 떨어진 시골 별장에 피신하였으나 헛되었다. 그의 은신처는 얼마 후 발견되었으며 추격하는 기마병이 가까이 접근하였을 때 그는 한 종을 시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하였다. 이리하여 폭군 네로는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빛을 받은 네로 황제도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바울이 그 앞에 섰을 때 그는 그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들었음에도 회개할 기회를 잃게 된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법정에서 얼마나 집중해서 설교를 했었을까? 놀라운 확신에 찬 엄청난 성령의 은혜가 넘치는 설교를 거절하면서 그는 그 기회를 잃게 된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 번은 바울처럼 죽을 수도 있고 네로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바울을 떠난 동역자들 처럼 세상을 사랑하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 바울의 이 마지막 장면을 살펴보면 진리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져야할지? 자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3.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진리를 굳게 지킬 것을 명한다
가이사의 재판장에서 감방으로 돌아온 바울은 매우 짧은 기간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울은 날마다 침침한 감방에 앉아서 디모데를 생각하고 그를 부르기로 작정하였다. 바울과 디모데는 매우 깊고도 강한 애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디모데는 바울의 수고와 고통에 동참하였고 두 사람사이의 우정은 더욱 강하고 깊고 거룩하게 자라서 마침내 청년 디모데와 연로하고 수고에 지친 사도와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처럼 되었다. 바울이 외롭고 고독한 중에 디모데를 보고자 간절히 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의 기별과 진리의 경험을 디모데에게 주었기 때문에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애정은 특별했고 죽기 전에 꼭 보기를 원했다. 디모데는 바울이 정신 들여서 가르친 청년 제자이다. 그래서 바울이 죽으면 이 복음은 디모데를 통해서 이어져 간다. 자 죽기 전에 만날 디모데에게 바울이 무엇을 부탁하였을까?
(1) 바울은 디모데에게 확고부동한 신앙을 부탁하였다
사도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의 많은 동역자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부끄러워하여 바울을 안다는 것을 숨기고 바울 곁을 떠났는데 디모데에겐 내가 여기 갇혔다고 해서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고난을 피하는 자는 복음을 받을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딤후2:3)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딤후2:11-12) 11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 12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리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선포하기 위하여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간청하면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간증은 내가 의지한 자를 내가 안다는 것이다. 내가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의지했던 분이 누구인지 나는 안다는 것이다. 내가 의탁한 것을 마지막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다들 사라지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지키실 줄을 내가 믿는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을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약속하시면 끝까지 지키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분께 부탁하고 간구하는 것들 별로 눈앞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시고 이루시는 것이 하님의 약속이다. 초대교회 바울의 눈에는 동역자들까지 다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또 12제자 중 11제자가 죽었지만 복음이 당대에 끝날 줄로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지키셨기 때문에 그 복음이 계속 전해오면서 우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과 그의 자세가 한결같다는 것이다. 눈앞에 일어나는 상황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능력을 보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 오랜 봉사의 기간 내내 구주께 대한 바울의 충성심이 흔들린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어디 있던지 얼굴을 찌푸린 바리새인 앞에서나 로마 관원들 앞에서나 루스드라에서 격노한 폭도들 앞에서나 빌립보 감옥에서 죄를 깨달은 죄인들 앞에서나 파선된 배위에서나 그는 그가 믿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길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의지했고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었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울 생애의 큰 목적은 한 때 자기가 멸시하였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었다. 어떠한 반대나 핍박도 그를 이 목적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노력으로 굳세게 되고 희생으로 순결하게 된 그의 신앙은 그에게 힘을 북돋워 주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불굴의 정신으로 노력하게 되고 정말 희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충성하면서 불굴의 정신으로 희생하면서 살면 모든 것이 열매로 풍요롭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 디모데야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이것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예요. 디모데에게 보내는 최후의 편지에서 바울은 젊은 디모데 앞에 높은 이상을 제시하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에게 부과된 의무를 지적하였다. 네가 전해야 그 다음세대도 너처럼 전할 것이야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첫째는 진리를 올바르게 전하라는 것이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복음 전파는 시작도 할 수 없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순교한들 뭐하겠느냐?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라는 것이 첫 번째 부탁이다.
두 번째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너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종으로 살라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자로서 가져야 할 덕목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진리를 정확히 전하면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갖고 가라는 것이다. 쓸데없는 별론하지 말고 진리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진리가 없는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는 것이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로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함이라. 바울의 이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정말 디모데에게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에 침투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라는 것이다. 진리를 분별하라고 하면서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고 하였다. 진리가 정확히 세워져야 그 다음이 있는 것이다. 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계하였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 악한 사람들이나 속이는 자들은 진리를 비틀고 왜곡하는 자들이다. 내가 너에게 가르친대로 하라는 것이다. 난 예수님께 받은 것을 그대로 너에게 전해주었으니 너도 정확하게 전해주라는 것이다. 그러기위해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자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네가 이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굴복하는 것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자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거짓선지자들과 죄는 책망하는 동시에 동정과 친절과 온유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다. 죄를 버리고 승리하라는 복음을 받으면 죄에 대한 양심이 예민해지고 죄를 거절하려는 믿음이 생긴다. 나는 진리를 정확히 세웠어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비와 동정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진리를 타협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죄를 범한 자에게는 가혹하게 해서도 안되지만 죄에 대한 경계는 분명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용해서는 안된다. 죄에 대한 지나친 관용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의가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그 사람에게 용기줘야 한다면서 칭찬하면 안된다. 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앞으로 교회안에서 이런 일이 생길거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귀가 가렵고 허탄한 이야기를 좇아 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날 거야. 이런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만 자기 생각과 자기 취향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정확하게 진리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말만 받는 사람들이란 마치 뷔페에 가서 맛있는 음심만 골라 먹듯이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 많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자기 마음에 기쁨을 주는 말만 선별적으로 받아먹는 사람들 이 말씀은 나에게 맞지 않아 하고 따지는 사람들이라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마지막 인생을 맞이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단순한 복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사용하는 허탄한 이야기들과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주기를 갈망하였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를 디모데가 잘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를 하나님을 위한 사업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게 막을 세속적인 일들을 피하고 비난과 박해를 즐거움으로 견디고 그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영혼들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그의 목회직임에 완전한 증거를 보이도록 권고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뭔지,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면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달렸다. 구세주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할 때, 세상의 악의와 원수들의 반대를 물리칠 때, 자아와 투쟁할 때, 바울을 붙들어 준 꺼지지 않은 동기였다. 바울의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은 동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울은 지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고 나눴다는 것이다. 1C의 교회에 큰 위기가 왔던 것처럼 매 시대마다 교회에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울처럼 자신을 유용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하나님의 사물에 깊은 경험을 가지며 열심과 정열이 넘치는 일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자아를 희생하는 사람들과 시련과 책임을 피하지 않는 사람, 용감하고 진실된 사람,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으로 자리 잡은 사람, 그들의 입술에 거룩한 숯불이 닿아서 ‘말씀을 전파할 사람’이 필요하다. 정말로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란 시련이 올 때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 용감하고 진실된 사람, 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으로 자리잡은 사람, 입술에 거룩한 숯불이 닿아서 말씀을 전파할 사람, 충성스럽고 수고에 지친 기수들이 진리를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바치고 죽어가고 있는 이 때에 누가 그들을 대신할 것인가? 제자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장로들이 나이가 많아서 힘들어 하고 있는 이 위기의 시대에 누가 나타나서 다음세대에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손에서 거룩한 사명을 넘겨 받을 것인가? 그들은 충성스런 선구자들의 죽음으로 생긴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가? 늙은 장로들과 사도들이 죽으면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젊은 청년들입니다. 이들이 준비되어 있는가를 이야기 한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재림신앙을 준비했던 주의 종들이 많이 돌아가면서 진리의 공백이 생길 것이다. 의의 공백이 생긴다면 누가 메꿀것인가 하고 호소하는 것이다. 청년들을 노리고 있는 이기심과 야망의 자극속에 서도 사도의 사명을 받아들이고 의무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이 바울의 부탁을 신실하게 받아서 그 다음세대에 전했고 그렇게 해서 그 기별과 복음이 다음세대에 다음세대로 전해져서 어느덧 이천년이 지나서 우리에게 까지 와서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손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내 생애와 경험으로 받아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와서 끊어지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잘 보아야 합니다. 디모데 후서 마지막 장면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기막힌 이야기를 합니다. (딤후4:21) 너는 겨울이 오기 전에 오도록 힘쓰라.
겨울이 오기 전에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디모데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바울이 갖고 있던 고민과 또 바울이 넘겨주고자 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신앙이 무엇인지 우리가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