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내신 분들 2
3.8 芝山 朴仁圭 선생
가르침은 香을 나누는 것 후학 양성 주력
동의보감 낡을 정도로 탐독, 한의학 매진
생긴 대로 병이 온다는 형상의학이라는 학문을 꽃 피운 지산 박인규 선생은 가르침은 향을 나누는 것이라는 평소 뜻처럼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열과 성의를 다하며 2000년 1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한의학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선생의 이런 삶을 증명해 주듯 대한형상의학회(회장 정행규)는 그가 영면한 이후 더욱더 활발한 활동으로 향학열을 불태우며 지산 선생의 뒤를 밟고 있다. 그의 향은 작고하기 전 15억원 상당의 재산을 학회에 쾌척함으로 한의사, 한의대 교수 및 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장학재단을 설립, 매년 전국 11개 한의대의 학생과 교수 및 한의학관련 연구원들에게 장학금․연구비를 지원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더욱 널리 깊게 퍼지고 있다.
「不問診斷學」 번역으로 한의계 입문
1927년 경남 마산에서 아버지 박완묵, 어머니 김수련 씨의 3대 독자로 태어난 박인규 선생은 처음부터 한의사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29년 금강산 입구인 강원도 고성군 장전으로 이주, 장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해 협성실업전수학교를 마치고 45년 해방 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사상범으로 몰려 원산형무소에서 13개월 간 복역하기도 했다.
47년 월남한 지산 선생은 강원도 춘천에 거주하며 춘천농대에서 학업을 닦던 중 48년 국민대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법대 3학년 재학 중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 전쟁 후 고등고시를 준비하던 선생은 인생의 항로를 바꿔 55년 서울에서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입문한다. 이 시기에 김은순 씨와 결혼을 하고 경무대와 국회 출입기자로 활약해 국회의원 등 정계관계자들과 친분을 쌓고 신임을 얻기도 했다. 기자로서 활동하던 그는 66년 한의계의 醫林잡지사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때 우연히 일본에서 나온 「不問診斷學」이란 책을 번역할 기회를 만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한의사 자격 취득
의림지 기자 생활시 한의학에 대해 관심을 갖던 지산 선생은 「不問診斷學」책 번역으로 한의학에 대해 깊은 감흥을 느끼고 한의학 공부에 점점 심취해 갔으며 대리 한의사를 두어 한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주위 한의원으로부터 돌팔이가 한의사를 고용하고 무자격자가 멋대로 진찰한다는 비난을 받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71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월남 전 의약업에 종사했던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한의사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는 특별국가시험이 생겼다. 한의사 2인의 보증이 있으면 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북에서 한의사 생활을 하지 않았던 지산 선생에게는 보증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 의림지 기자시절부터 친분을 맺어 온 우성덕 원장(85․서울 성덕한의원)이 선생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어 6개월 간 여관생활을 하며 불철주야 시험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우 원장은 당시 박 선생은 한의계에 몸담고 싶어하는 열정이 남달랐고 한의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며 동의보감을 깊숙이 파고들어 능통했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시험 당일 주위 한의원에서 무면허 진료를 한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는데 담당형사에게 당신은 어떤 병이 있고 어디가 아프지 않냐?고 정확히 진단하는 것을 보고 형사가 두말없이 당신 같은 사람은 오늘 시험을 보아야 한다며 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험을 치른 지산 선생은 면허번호 2319번으로 한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72년 1월 종로에 세운당한의원을 개원해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게 된다.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대한정통한의학회 창립
임상의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산 선생은 76년 大韓正統韓醫學會를 창립해 한의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 현재 대한형상의학회의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청강하고자 하는 한의사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학회도 번창해 81년에는 학회 명칭을 大韓傳統韓醫學會로 변경하고 한의원도 봉천동 관악구청 건너편 세운한의원으로 이전해 강의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93년에는 현재의 형상의학회 회관인 관악구 봉천동으로 강의실을 확장․이전해 이후 회원들을 정기적으로 선발하기 시작해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제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된다.
지산 선생이 한의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밑거름은 동의보감에 대한 철저한 이해였다고 그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한의사 면허 시험 당시 동의보감을 다 외웠을 정도였던 선생은 한의사가 된 이후에도 동의보감을 늘 탐독했다고 한다. 지금도 형상의학회관에는 그의 손때 묻은 낡은 동의보감 책이 전시돼 있다.
정행규 형상의학회 회장(49․서울 홍제한의원)은 언젠가 선생께서 동의보감을 정리한 노트를 보여주며 나는 지금도 쪽지까지 적어 길에 다니면서 외울 정도인데 제자들은 너무 공부를 안 한다며 호통을 치신 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부인 김은순 씨(72)는 하루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을 정도로 항상 책을 읽는 지독한 노력파로 한의학을 누구보다 사랑한 분이었다며 제자들이 수시로 집으로 찾아와 지산 선생에게 직접 묻지 못하고 김 씨에게 선생님이 무슨 책을 보셨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선생의 성품은 자상하면서도 섬세했으며 특히 시야가 넓고 탐구심이 강해 모든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달라 환자를 보는 것 이외에도 실생활을 한의학과 접목시켜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했다고 한다.
이론과 임상 일치, 객관적 판단 항상 강조
사진설명-시간이 나면 해외여행을 즐겼던 지산 선생과 부인 김은순 씨.
형상의학, 생긴 대로 병이 오는 것
지산 선생이 꽃피운 형상의학은 자연인의 형상을 보고 그 속에 내재된 원리에 입각, 생리․병리를 규명해서 진단과 치료에 응용하며 나아가 양생의 방법을 찾는다는 이론이다.
즉 형상 관찰을 위주로 인체의 精․氣․神․血, 五臟六腑, 外形, 六氣 및 雜病 상태를 바르게 파악하고 병리와 치법을 구해 질병을 치료․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쉽게 얘기하면 생긴 대로 병이 온다고 보는 것이 형상의학의 특징인 것이다.
臟象論에서는 인체의 내부에 간직된 모든 것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인체 외부로 발현되는데 이것을 形象이라고 한다. 이때에 인체의 특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大小, 肥瘦, 長短 등 有形한 形態를 形이라 하고, 인체에 내재된 본질의 징조․기미로 드러나는 氣勢, 色, 脈象, 症狀 등 좀 더 無形한 것을 象이라고 한다. 즉 形象이란 현재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內的 外的 與件에 따라 體外로 나타나는 모든 發顯象을 뜻하는 것이다.
형상의학회 정행규 회장은 『東醫寶鑑』 첫 장 身形臟腑論에 보면 사람의 形과 色에 따라 같은 症狀이라도 다르게 治療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 바 있으며 형상의학은 새로운 학문세계가 아니라 한의학의 한 분야로 이미 여러 문헌에 기록됐던 것으로 지산 선생께서 이론과 임상에서 체계화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의학은 곧 생활, 한의학은 인간과학
또한 한의계 입문 전 고시 준비로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고와 지식으로 동의보감을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셨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박인규 선생은 의학은 곧 생활이다. 한의학은 생활의 법도를 명시한 학문 이라고 강조하며 한의학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에 人間科學이라고 설명했다.
병이란 矛盾의 集體인 사람의 몸에 본래부터 씨앗으로 내재해 있다가 內外與件에 상응하지 못했을 때 싹트는 것이므로 생활 속에서 내외여건에 상응하는 養生法道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의학이란 우리가 밥 먹고 숨쉬고 일하고 性生活하는 그 自體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醫學이 따로 있고 藥이 따로 있고, 또한 生活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례로 지산 선생과 遠行을 다니며 심신을 수양하던 형상의학회는 어느 날 대전 유성의 간혹 들렀던 음식점에서 평소보다 맛이 짜다고 느끼며 설렁탕을 먹고 있는데 선생께서 이 집 주방장이 오늘 허리가 아플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두들 의아하며 일행중 한 사람이 주방장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내가 허리 아픈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놀라는 표정을 했다. 지산 선생은 허리는 腎의 집인데, 腎은 허리의 건강을 주관하고, 腎의 맛은 짠맛이다. 그런데 허리가 안 좋으니 맛을 짜게 먹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성태 형상재단 이사장(47․서울 아카데미한의원)은 사실 이 말은 한의사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醫學은 생활이라고 하신 말씀이 실감난 일이었다며 선생께서는 항상 이론과 실제에 맞게 쉽게 설명해주시며 이론과 임상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
모든 생활을 한의학에 접목시켜 이해하고 활용했던 지산 선생에 대해 장남인 박경현 원장(46․경기 삼대조한의원)은 한의대 재학시절 방학에 서울 집에 오면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에 사람의 벗은 몸을 봐야 체질을 알 수 있다며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큰 소리로 강의를 하시고 5시에 집에 와서는 2시간씩 동의보감을 가르치셨다며 그 당시에는 도망가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또한 세계 각 문화를 체험하며 왜 저런 문화가 형성됐을까 항상 의구심을 갖고 한의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여행을 즐겼던 지산 선생은 여행 중에 한의대생인 장남과 차남 박정현 원장(39․서울 세운한의원)에게 편지를 늘 보냈다고 한다.
선생이 영면한 이후 그 편지를 묶어 『너와 나의 세계(芝山 선생이 한의사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펴내기도 했다. 박경현 원장은 학문적으로는 항심을 갖고 늘 노력하는 자세로 자녀들에게 엄격했지만 무척 따뜻하고 자상해 친구 같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지산 선생은 슬하에 3남1녀를 두었으며 첫째와 셋째가 한의사의 길을, 둘째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넷째는 미국에서 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 醫 者 三 訓 ◀
- 心身合一로 事物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느끼고,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춘다.
- 心身合一로 事物의 與件變化에 따라 能變해 갈 수 있는 智慧를 가꾼다.
- 心身合一로 精․氣․神을 배양하여 天理에 逆行하지 않고 天壽를 다한다.
윗 글은 지산 선생이 생전에 가장 강조했던 醫者三訓으로 醫者는 먼저 醫學에 대한 자신의 主觀을 세워야 하며,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恒心을 가지고 학문을 체득하고, 세상사를 박식하게 두루 알아야 하며, 체득한 의술로 널리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으로 형상의학회 회원들은 새벽강의를 듣거나 진료에 임하기 전 이 문구를 늘 되새긴다고.
오수석 원장(37․경기 인보한의원)은 선생께서는 醫者三訓의 첫 번째 덕목처럼 항상 객관적으로 모든 사물을 볼 것을 주지시키셨다며 똑같은 질환의 환자를 보더라도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 처방할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의사는 환자를 보다가 죽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99년 작고하기 전까지 진료를 보았던 지산 선생은 본인의 강의를 꾸준히 들었던 제자에게는 강의할 기회를 주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조성태 이사장은 처음 강의할 때는 너무 어려웠지만 선생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며 몇 년 간 강의를 한 후 생긴 대로 병이 온다는 책 저술을 권유받았을 때는 의아했다 고 한다.
선생 본인이 저술할 수 있을뿐더러 한의사 아들을 둘이나 둔 그가 아끼는 제자에게 책 저술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조 이사장은 평소 선생께서 나는 뿌리와 거름이 될 테니 너희들은 꽃을 피우라고 제자들에게 늘 언급했던 것을 몸소 실천하신 것 같다며 그런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형상의학회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3.9 一松 朴性洙 회장
한의학 산업․교육․제도화의 선구자
일제강점기, 곧이어 들이닥친 미군 군정. 이 급박한 시류에서 좌표를 잃은 조선의 운명과 함께 조선의 사상․문화, 그리고 한의학도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에 한의학의 제도화를 위한 염원은 뜨거워졌고, 한의학 산업화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한방제약회사가 설립됐다.
일송 박성수 회장(1897~1989)은 한의사로서 초기 한의사제도․교육 정착을 위해 활약하고 조선무약을 창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독립운동과 교육계에도 열정을 쏟는 등 대의에 따른 투철한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도전과 성과는 눈 속에 핀 매화가 더욱 귀중한 가치를 품는 것처럼, 현재 한의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방의 對日 수출 1호
1897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한 박 회장은 일찍 한의학에 뜻을 두고, 당대 한의학의 명가 이상열 선생 문하에서 한의학을 수학한 후 1919년 경성한약 전수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1920년 23세의 나이에 질병으로부터 국민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한성약업사 및 대창창업사를 창설했지만,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그 해 9월 수감돼 옥고를 치뤘다.
하지만 다시 약업에 투신, 1925년 조선무약합자회사를 설립해 솔표 우황청심원 등 대표적인 한약제제를 개발하게 된다. 솔표라는 상호는 박 회장의 아호인 一松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무약의 솔표 우황청심원이나 사향소합원 등이 1969년 일본 후생성의 수입허가를 획득하기까지 5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됐다. 일본에 약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1등국, 한국은 3등국이라는 인식까지 깨야했기 때문이다.
수출개척이라는 목표를 향한 집념으로 일관한 결과 일본 수출의 길이 열렸고, 오히려 거래선인 일본제약공업(주)에서는 연수생을 보내오기도 했다.
조선무약은 연수 뿐 아니라 한국관광도 제공해 민간외교의 역할까지 수행했으며, 1966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로는 일본제약공업(주) 초청으로 한방의학 학술세미나에 참석, 10여 년간에 걸쳐 강연을 했다. 국내에서는 69․70․72년 3회에 걸쳐 보사부장관으로부터 수출유공표창을 받았다.
집념과 정치적 수완 빼어나
일송의 행적 중 두드러진 점은 한의사로서 한의계의 발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점 외에 특히 교육사업에 대한 업적이 상당하다.
1926년 서울미동초등학교 후원회 부회장직을 맡은 이래 양정중학교(39년) 경복중학교(45년) 서울대 의대 의예과(45년)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해방후인 1946년 서울대 의대 후원회 상무이사를 비롯해 54년 서울 용산중학교 사친회 이사장, 56년 한국외국어 대․성균관대의 후원회장을 역임했으며, 62년도엔 성균관 대학교 재단이사로 선임됐다.
한의계 교육을 위해서는 행림 재단 이사로 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때 서울 신대방동에서 박한의원을 개업중이었던 박남중 씨는 당시 회고담에서 정부의 부산 피난시절, 최초의 한의과대학 인가와 법률상 한의사제도의 정립을 위해 일송은 부산역앞 중앙동 삼성여관에 기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고 말했다.
당시 다른 대학들은 재단만 있으면 문교부에서 인가가 나오지만 한의과대학은 보건사회부장관의 승인이 떨어져야 문교부에 넘어가게 돼있었다.
하지만 한의계에는 정치인도 재력가도 없었는데 반해 세력을 형성한 양방측이 한의대 설립을 필사적으로 저지했고, 사회적으로도 서구문화의 득세로 한의에 대한 인식도 바닥에 떨어졌다.
이 속에서 일송은 오한영 보사부장관과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등 요로에 손을 써 한의대 인허를 받아내는 한편, 법제 정쪽에 관심을 쏟아 51년에 제정된 국민의료법 제2조 의료업자 종류에 한의사를 삽입, 명문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검정고시의 길도 열린 것이라며 박남중 씨는 일송의 정치적 수완과 강한 집념을 높게 평가했었다.
애국․애민에 발벗고 나서기도
어려운 시절 그는 애민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51년 4월경은 부산 방면으로 피난 내려갔던 많은 장정들이 대전을 거쳐 경기도 서울 방변으로 귀향길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헐벗고 병든 사람이 지천이던 그때, 일송은 부산에 있는 정부 각 부처와 합심해서 온양에 국립구호병원을 설립, 인명구제에 나섰다.
쌀과 약을 준비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부산과 온양을 오르내렸으며, 53년 10월엔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계속>
조선무약합자회사는…
1925년 일송 박성수 회장이 자본금 1천4백만원을 가지고 서울 충정로에서 직원 3명으로 창립해, 현재 250여명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첫 제품으로 우황청심원을 발매했으나 6.25때 충정로의 공장이 소실되는 바람에 중단됐다가 57년 영등포구(현 동작구) 본동에 새로운 공장을 지으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68년 국내 처음으로 솔표 우황청심원을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대한민국 완제의약품 수출 1호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이 수입하고 있는 타국의 우황청심원은 건강식품으로 들어가지만 솔표 우황청심원은 의약품허가를 획득했고, 미주․동남아지역에도 수출됐다.
회사 대표가 85년 일송의 2세인 박대규(약학박사) 사장으로 바뀌고, 86․88서울올림픽 공식지정 업체로 선정돼기도 했다. 자사 매출의 총규모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우황청심원 외에 쌍화탕, 위청수 등의 제품이 있다.
조선무약은 70년 가까이 우황청심원시장의 선두주자로 군림해, 95년 제약기업 300업체 중 12위를 기록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후발업체의 추격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최근 박 대표이사는 경영 악화로 2001년 부도가 난 이후, 작년 7월 화의에 들어가, 경영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초기협회장시절, 한의사제도 안착시켜
사진설명-1955년 서울시 한의사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일송 박성수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5번째).
한의사제도를 위하여
54년 보사부장관으로부터 한의사국가시험위원으로 위촉받은 일송은 당시 한의사의 수효가 다른 의료단체와 비교했을 때 너무 적어 회무활동의 열세를 면치 못한다고 판단, 질도 중요하지만 수를 늘리는 문제도 시급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의 노력으로 그 해 국가시험에 상당수가 합격했다.
국민의료법에 따라 52년 부산에서 한의사협회결성총회가 열려, 이익룡 초대회장단이 결성됐다.
이 때 일송은 이사로 선임됐다. 하지만 53년 협회가 서울로 이전 돼, 사실상 서울시한의사회가 중앙회의 역할을 수행했고, 실질적인 운영도 당시 서울시한의사회장이었던 일송이 맡게 된다. 2대 회장에 이익룡 회장이 연임되고, 일송은 부회장에 오르지만 당시 이 회장이 부산에 개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송이 회장직무대리를 수행해 나갔다.
56~63년 일송이 3․4대 회장에 선임된 기간은 중대한 과제가 산재해 있었다. 4․19, 5․16 등 사회적으로 혼란한 배경이었고, 협회 초기시절인 만큼 조직이 취약하고 회비의 징수도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보사당국의 한의사에 대한 몰이해와 형평을 잃은 편파적 행정 등이 악재로 작용했다.
이러한 가운데, 초기 일송은 한약재의 수입완화 건의, 보사부내의 한방과 설치 건의, 한지한의사제도철폐운동 등의 주요사업을 추진했지만 반영되지는 못했다. 협회가 난항을 거듭하자 일송은 대한한의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사단법인체로의 조직개편을 제안하고, 이 안건이 수용됨에 따라 사단법인체에 필요한 정관을 새로 제정하는 등 필요한 제반사항을 단행했다.
59년 12월 1일 사단법인 대한한의사협회로 거듭나게 됐다. 어려운 와중에 한의사제도의 폐지론과 의료유사업자령이라는 큰 시련이 겹쳐지게 된다.
한의사제도폐지론이 대두되면서 일송은 보사부장관을 방문하고, 의료법개정에 있어 한의사제도의 필요성을 역설, 청원서 및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생사기로에 선 한의계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의료법 중 한의사제도를 삭제시키는 위기까지 몰렸지만, 결국 박 회장을 중심으로 집결 된 한의계는 한의사의 법적지위가 확보된 신의료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이로써 한의사제도는 제도권 안에 안전하게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일송이 대한한의사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서울시 한의사회장을 역임했던 최규만 선생은 당시 회고에서 일송을 가리켜 부산에 있던 중앙회를 서울로 끌어올렸고, 검정시험제도로 후진을 많이 배출시켰으며 의료단체 중 최초로 정관을 만들어 지방의 회원들도 회비를 잘 납부하게 해 협회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등 협회육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회운영에 자신의 사비도 많이 들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통문화․유림의 전통
전통적인 유학자인 일송은 57년과 61년에 우국노인회와 한국노인회의 회장직을 역임했다. 4․19 이후인 60년 전국적인 유도회를 조직, 자신이 직접 서울 본부위원 장직을 맡아 2년간 활약했다.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1976, 1978년 두차례에 걸쳐 7․8대 성균관장(임기 2년) 을 역임해, 유림문화를 계승 해 나갔다. 78년 성균관장 재임시절 동성 동본 결혼 인정론이 나오자, 일송은 반대운동을 전개해 전국의 유림들은 총궐기에 돌입했다. 결국 국회에서 이 안은 철회됐다.
한시에도 뛰어나
한편 漢詩실력이 뛰어나 일송의 명성은 자유중국에까지 알려졌다. 73년 대만에서 제2차 세계시인대회가 열린 당시, 한국측 참가자로 일송과 동행했던 信齊 이수원 씨는 당시 대회장에 들어섰을 때 대만정부의 장관들과 시인들은 일제히 기립, 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는데 마치 공식의전행사에 국빈환영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었다고 회고했었다.
이미 시인대회가 개최되기 10년 전인 62년에 일송은 그의 한시에 대한 명성으로 자유중국의 학회고문으로 추대됐 다. 74년에는 사단법인 한국한시협회를 조직, 회장겸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일송은 박씨 문중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63년 신라오릉보존회를 조직, 부회장에 선임됐으며, 70년부터 밀양 박씨 규정공파 대종회 회장직을 8년간 지냈다.
한의학과 한국문화 전도사
그의 일련의 업적에서 한의사 협회의 초기 제도화를 위한 투쟁․한방의 산업화 뿐 아니라, 유림의 전통을 잇고, 문중사업 및 한시에 열중했던 모습은 한의학과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으로 비춰진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애정을 근간으로 운신의 폭, 활동영역이 결정됐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대외적인 한시조직에서의 활동에서 나타나듯 비단 국내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송의 손자인 박종환 씨(조선무약합자회사 경영정상화 위원장)의 솔표 우황청심원이 일본에 수출되는 데는, 조부가 일본에서 한의학에 대해 한 강의를 듣고 일본인들이 신뢰를 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설명에서 한방제제의 대일수출이라는 사업적 성과가 단순히 경영적인 측면 뿐 아니라, 민족문화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반증한다.
92세를 일기로 永眠
일송 박회장은 89년 92세로 일기를 마쳤다. 그가 경영일선에 있을 당시 재직했던 조선무약의 한 임원은 강직한 성품인 반면, 주위 측근에게는 상대를 배려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면서 많은 연세에도 아침에는 꼭 30분 가량 기체조를 한 후, 일요일도 없이 8시에 출근했다고 말했다.
그의 장례는 전통유교식에 따라 치러졌고, 전국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조선무약의 실제적인 경영을 맡고 있는 박종환 씨는 현재 회사가 어려운 상태에 직면했으나 창업주인 조부가 품었던 한방의 대중화․산업화 발전이라는 정신을 계승, 시대에 맞춰 세계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3.10 古松 許燕 선생
체간측정법에 의한 체질판별법 창안
한의학은 오랜 동안의 임상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개별적인 경험들이 상위의 체계적인 학문의 틀 안에서 통합되고, 이 원리가 다시 다양한 임상치료법으로 응용되면서 학문적 기틀이 단단해지기를 반복해 왔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데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현재까지 인용되는 소수 위인들의 눈부신 활약상도 있었지만, 다수 無名醫들의 존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임상이 소수 위인의 학설만으로 메울 수 없는 임상의 타당성을 증명했고, 반대로 새로이 형성될 학문의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역할을 구분해 보자면, 故 古松 허연 선생(1921~ 1995)의 행로는 무명의에 가깝다. 학자로서 평가되기에 그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書)도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교수직 등 다른 직책의 청에도 스스로 학문의 부족함을 이유로 사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발견해 임상에서 활용했던 체간측정법이 현재 그의 아들 허만회(53․서울 제원한의원)씨 대에 이르러 복원됐고, 최근에는 허만회 씨를 중심으로 이를 공부하려는체형사상학회(회장 고학준)가 발족됐다. 고 허연 선생 본인은 임상의로 진료에만 전념했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학문의 출발점이 됐던 것이다.
◎ 새로운 체질판별법
허만회 씨에 의해 복원된 체간측정법은 동의수세보원의 장부론을 근거로 체간에서 다섯개의 직선거리를 측정해 체질을 판별하는 방법이다.
허만회 씨가 이 거리를 수치화해서, 도식화하려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학회원들은 체간측정법을 통해 체질감별의 객관성과 재현성을 확보하여 임상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1921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한 허연 선생은 해방 직전 상경해 일을 하던 중, 동상으로 엄지발가락이 썩어 들어가자 이것을 스스로 치료해 보려는 생각으로 한의학을 독학하게 됐다.
결국 발가락을 절단하게 됐지만 한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눈뜨게 됐다.
한의사 양성을 위한 체계적 교육제도가 미비한 시절, 국가가 한의학 종사자를 대상으로 자격을 주기 위해 마련한 검정고시에 응시해 1956년에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서울 왕십리에 제원한의원을 열게 됐다.
허연 선생은 1995년 74세의 나이를 마감하기까지 진료를 계속했는데, 특히 외부 활동 중에서는 화요한의학연구회(현 대한청구한의학회)에 열정을 쏟았다. 이 모임은 1969년 한의사 10여명이 학술 및 친목도모를 위해 재경충남한의사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해 이듬해 화요한의학연구회로 변경한 것이다. 이 명칭은 이들이 매주 화요일 진료가 끝난 저녁에 모여 공부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배원식 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박인상 전 대전대 교수․전병순․이병행․홍순용․한희석․권영식 선생 등 한의계의 권위자․원로라 일컬어지는 인사들이 이 곳에서 교류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허연 선생은 창립멤버로 2대 회장을 역임했다.
◎ 체간측정법에 몰두
여기서 그는 사상의학 연구에 몰두했는데, 당시 임상에서 체질을 판별하는 방법으로 골도법, 척도법, 두부측정법 등 나름대로의 다양한 방법이 활용됐다. 70년대, 허연 선생이 체간을 측정할 때는 지금처럼 자로 재거나 통계 처리한 것은 없고, 환자의 체간을 가슴에서 부터 골반까지 자세히 관찰해 그 흐름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 때 권영식 선생이 사상방약합편을 인용해, 유두와 배꼽을 기준으로 그 기준선의 상하 1치를 살펴 체질을 판별하는 방법에서, 폐․신장 등의 해부학적인 위치를 보태 그 기준선을 확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몸 전체의 음양의 흐름을 살펴서 ▲골반이 크게 발달하여 복부의 선이 들어가 있는 체간은 소음인 ▲상체가 발달되어 있고 그러한 선이 골반까지 매끈하게 빠진 체간은 소양인 ▲상체가 위축되고 복부의 선이 최대로 발달되어 있으면 태음인 ▲상체가 사자가슴처럼 발달되어 있고 하체 골반에서 심하게 위축돼 상체 가슴의 발달이 우람하게 되어있 는 체질은 태양인 등으로 체질을 판별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활용한 결과 동의수세보원대로 성질 재간과도 일치했다. 아들 허만회 씨는 허연선생의 임상을 1988년 경희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논문화했고, 1988년 석사중간발표 논문 사상인의 형태학적 도식화에 관한 연구로 내놓았다. 이 논문은 사상체질학회 학회지 창간호에 실렸다. 이후 5개의 측정선을 만들고 체질판별 통계를 구축한 석사학위논문으로 발표했고, 2001년 경희대 대학원에서 체근측정법에 의한 체질분류에 따른 두면부 형태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으로 인정받게 됐다.
동의수세보원의 장부론을 적용하여, 체간측정법이라는 명칭과 지금처럼 5개의 기준선을 설정한 것은 허만회씨가 체계화한 것이다.
허만회 씨는 아버지는 홍가정진비전과 동의사상신편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회고하면서 체질을 신중히 판별한 후, 사상첩약에는 가감을 않고 원전대로 처방할 것을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허연 선생은 사상의학에 믿음이 있었고, 이를 실제 적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체간측정법을 사용했을 때 적중률이 높아 사상의학의 치료효과를 체험했기 때문에 원전처방에 대한 확신도 가졌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 화요한의학연구회의 조력자
화요한의학연구회 5대 회장을 역임한 박인상 전 대전대교수(현 서울양재동일한의원)는 회비수납 등 학회운영이 체계적이지 않던 시절, 허연 선생은 물심양면으로 학회의 기반을 조성했다고 회상했다.
학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기꺼이 자신의 한의원을 학회모임터로 열어 놓고, 직접 강사를 찾아다니며 강의를 청탁하고 사비를 털어넣는 것이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3.11 無如 申卿熙 선생
廣濟蒼生의 慈悲佛事 베푼 名醫
무여 신경희 선생(1919~2000)은 젊어서는 하루에 수백명의 환자를 보고,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기 직전 81세까지도 하루 70~8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의사의 진면목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은 환자의 눈. 오랫동안 환자의 신뢰를 받아 온 선생의 임상능력은 1950년 대한불교달마회를 창립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을 역임(1976)하면서 禪書 蕪門關譯解를 펴는 등 불교신자로서 선도 수련과 학문연마를 병행한 결과였다.
● 병증 진단에 5초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무여 선생의 부친은 낙향한 선비로 가세는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다. 이 가운데 부친은 틈틈이 한의학 지식으로 이웃 환자를 돌봤고, 무여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선친에게서 한의학을 전수받았다.
주위에 따르면, 일제시대 한의학 교육기관이었던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제마 선생의 제자에게서 학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3세에 상경한 이후 1936년 침술면허, 57년 한의사 면허를 취득해 인천 창제한의원을 개원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환자를 진료하게 된다.
길게는 3년 간 집을 떠나 약재 공부를 위해 산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그가 환자의 병증을 진단하는 시간은 5초 이내에 끝난다. 불문진단으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진맥을 해 병의 경 중을 헤아리고 침과 약으로 다스린다.
88년부터 1년간 창제한의원에서 부원장을 지냈던 장만수(44․경기 큰기운한의원) 원장은 선생님은 열성을 다해 한시도 쉬지 않고 환자를 보았고, 그 수가 인간이 볼 수 있는 최대의 수였다면서 빠른 시간 안에 환자의 병증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뛰어난 직관력으로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특히 선생의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력은 높은 불심과 학력에 의해 대오각성한 경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그를 아는 이들의 한결같은 평이다.
무여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96년부터 별세하기 전까지 그의 곁에서 임상을 지켜봤던 이형주(44․서울 수강한의원․경희대 한의대 외래교수) 원장은 선생님은 환자를 보면 상태를 알 수 있으며, 진맥을 통해 진단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일부 시각에서는 신기에 가까운 선생님의 능력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폄하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선생 님은 불가에서 화두를 깨친 분으로 전통동양학문의 입신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학문을 연마하고, 풍부한 임상에 단 련된 결과 놀라운 능력을 습득하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진료실에 들어오는 여성을 본 후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당신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말해 모두가 어리둥절했는데, 마침 그 여성은 양방병원에서 종양이 있음을 확인하고 내원한 환자여 서 환자는 물론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무여 선생은 늘 환자가 말을 꺼내기 전에 병증을 알려줌으로써 환자의 신뢰까지도 얻었다.
진료 영역은 난치성질환까지 막힘없이 포괄했다.
이형주 원장은 선생님을 통해 한의학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여 선생의 2남2녀 중 막내딸 신귀선 씨(56)의 남편은 양방의사이다. 신귀선 씨에 따르면 남편은 한의학에 대해 불신했는데, 한번은 무여 선생의 치료로 암 덩어리가 변으로 배출된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그 종양덩어리를 가지고 대학병원연구실에서 살펴본 결과 종양임을 확인하고, 무여 선생과 한방의학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
또한 무여 선생은 침술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는데, 환자에게 빠짐없이 침을 시술했다. 그는 침을 놓으면 약과 함께 치료효과가 좋아지는 것이 자명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면서 몰려드는 환자에게 일일이 침을 시술했다.
이렇게 정확하고 신속한 진단과 침술력에 대한 증언은 젊은 시절 하루에 최고 1천명까지 환자를 봤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한편 무여 선생은 의사 사위에게 담석덩어리를 가져오도록 시켜 그 담석을 가지고 여러 약재에 담궈 녹는 것을 시험하는 등 말년까지도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 神童 한의사 별명 얻어
무여 선생이 집필한 한의학書로는 유일하게 창제증방(1990)이 남겨져 있다. 이 책은 1960년 창제험방이라는 제목으로 낸 책을 다시 각과로 정리하여 1870여방을 정선한 것이다.
배원식(한국동양의학회 회장․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선생은 신 선생의 저서 창제증방을 추천하는 글에서 무여 선생을 인천시내에서 창제한의원을 개원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신동 한의사라는 별명까지 얻게 돼, 그 명성이 경인지방에 까지 퍼지게 됐다고 소개하면서 신 선생의 학문이 집필된 유일한 이 책에 대해서는 황도연 선생의 방약합편 다음 가는 새로운 시대의 방약합편이라 하여도 조금이 손색이 없는 훌륭한 寶筏書라고 평가했다.
崇山行願(당시 在美 弘法院長) 스님은 무여 신경희 거사는 의술을 수련하여 제중의 불심에서 병리․약리의 오묘한 이법을 정통했다면서 禪心醫心一如의 경지에서 심혈을 기울인 광제창생의 염원을 實修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 경험방은 풍과․신장성중풍․ 痲木․ 신경통․ 관절염․어혈병․상한 등 선생이 임상과 학문을 통해 얻은 처방 1천8백여가지를 담고 있다.
처방은 내용과 양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중국방에 가까울 만큼 양이 많고 약력이 강하도록 구성됐다.
이형주 원장은 과감하고 대범한 처방들에서 한의학의 대가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치료원칙은 한의학 기본을 지키는 것
동양의 철학 및 종교적 깨달음은 그 존재가 언어마저도 도달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경지에 올려져 있는 이유로 보통의 방법으로 그 간극을 좁히기 쉽지 않다.
고 신경희 선생의 학문도 이와 같아, 무여 선생이 많은 후학들을 위해 강연을 했음에도 강연자체가 언어라는 협소한 도구로 사상과 지식을 전달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 자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안타까움을 안겼다.
또한 그가 남긴 유일한 한의학서 蒼濟證方 역시 질병에 따른 첩약만을 처방한 형식이어서,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 과정은 생략돼 있다. 그의 생전에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없는 현재의 후학들은 그 행간을 읽는 것 외에는 그의 사상을 가늠할 다른 뾰족한 도리가 없다.
따라서 이 단편의 기획물을 통해 그의 사상을 추적하겠다는 애초의 섣부른 각오를 고쳐잡고, 몇몇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일화와 자료로 남아있는 행적 등을 소개하는 것으로 선생의 일면을 전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치료의 목적을 八法에 의한 방제약물로 인체의 생리기혈을 조장하는 한편 病邪를 제거하고 음양을 조정하여 병적생리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환자를 대하고 치료원칙을 결정하는 데도 한의학적 기본이론에 철저하라고 늘 주문했다.
그가 쓴 한의사로서 필수적으로 실행할 의무라는 글의 일부를 인용해 보자.
…치료에 앞서 처방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병의 원인과 병리과정을 구명하는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음양오행의 상생상극, 臟腑의 경락과의 연계성, 기혈영위 등 기본이론등 종합적인 개념에서 출발해야한다. 또한 국부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전체적 종합적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기후변화, 지방풍토의 영향, 생활환경, 기호음식, 체질의 강약 등을 모두 결부시켜 전체적으로 심사해 질병에 대한 계통적인 분석과 정밀한 진단으로 치료법을 구성해야 한다.
처방구성에 있어서는 치료운용의 기본팔법(汗吐下和溫淸補消) 중에서 기본치료를 정하고 처방을 구성해야 하는데 다음사항에 유의 관찰해야 한다.
▲ 外因邪 內因邪 不內外因邪의 심별
▲ 3대 병인사의 침입 경로
▲ 表裏 寒熱과 음양허실의 病情․輕重 감별, 氣血水濕의 병변계통…
선생은 환자와 상담할 때 환자의 거주지역과 환경 등을 묻기도 하고 치료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풍수적인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유․불․선 3교를 섭렵한 지식으로, 인체의 내 외부적인 조건을 고려해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무여 선생이 자주 쓰는 개념으로 貫革板 秤등이 있었는데, 이는 과녁판의 정중앙을 맞추는 것처럼 병의 정확한 원인을 짚어내고, 저울처럼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계산할 줄 알아야 한다는 醫人의 지침을 이르는 것이다.
인명을 다루는 의자의 소명의식을 강조하면서도 去去去中知 行行行裡覺(가고 가고 가는 가운데 알게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한 속에 깨닫는다)으로 제자들의 학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선생은 인천에서 개원해 80년대 중반 서울로 이전했는데, 인천에서 목요회를 결성해 제자들에게 강연한 것이 서울에서 의우회로 이어지고, 거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임상강의를 해 후학들을 위한 가르침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또한 넉넉한 성품으로 제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바쁜 와중에도 전화로 답변을 주고, 환자들에게는 결코 화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환자가 오면 3번은 웃겨야 한다고 했던 선생은 환자의 정신적 이완을 통해 치료 효과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한편 무여 선생은 비방의 원조라 할 정도로 숨겨진 노하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개발한 가미곽향정기산은 당시 소아마비 등 각종 전염병에 탁월한 효력을 나타냈고, 가감오적산은 부인과질환에 효력이 있는 명처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한약에 대한 감별능력과 법제방법에도 해박해 경기도 한약종상 시험위원으로도 위촉됐다.
그는 가방에 숫돌 등 조그마한 연장을 넣고 다니면서 구부러진 침을 망치로 펴서 사용하는 등 침에 대한 이해와 손재주도 좋았다고 한다.
국전 서예부문 입상 7회
165cm의 작은 신장으로 단단한 체구의 무여 선생은 스스로 소양인이라 했다한다. 채식과 생식을 즐기고. 금주 금연을 하면서 이른 아침 명상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등의 철저한 관리로 만년에도 총명함을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환자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그는 한방약은 종합적 약물이면서 부작용이 거의 없고 효능 또한 복합적으로 장점이 훨씬 많은데도 근래에 들어와 속효성을 다루는 서양의학에 밀려 제도적으로 소외당하고 침체에 빠져들고 있는 현실을 무척이나 개탄했다고 전해 진다.
한편 무여선생은 서예에도 뛰어나 17년간 東庭서원을 운영했으며 63년부터 7년 연속(입선 3회, 특선 4회)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국전초대작가로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현재 강원도문화재로 지정된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의 묘비문과 서울장충단 공원에 있는 사명대사 동상의 글이 그의 작품이며 한의신문의 제호도 그의 글씨이다.
한의계에서는 경기도한의사회장과 동서의학회이사를 역임했다.
3.12 召松 申佶求 선생
근대 본초학 정립한 한국의 신농
본초강목 탐독하다 한의학에 입문
신길구(1894~1972) 선생은 서울한의과대학과 동양의약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본초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세인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한의학계의 학자로서 일제시대부터 이미 일인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고 추대되어 모든 한의학연구소 또는 황한의생강습소의 강사로서 강의를 도맡아온 선생은 본래 한의학자는 아니었다. 원래 선생은 사립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수료한 뒤 判任 文官試驗에 합격했다.
3.1운동 후 무인독재자 테라우찌(寺內)가 물러가고 사이또미노루(齋藤實)가 총독이 되어 소위 문화정책을 펴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자 선생은 동아일보 창간 기자가 됐다.
그러나 검열과 폐간이 빈번한 와중에서 선생은 졸지에 실직자가 되었다. 그때 삼남매가 3세, 4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자 비탄에 빠져 근 10년을 허송하게 되었다.
이때 의학에 관심을 두고 심심 소일로 李時珍의 본초강목을 탐독하고 번역을 하게 됐는데 이것이 곧 선생이 한의학에 입문한 시초다.
선친이 한학자인데다가 서당에서 한학을 이수한 경력은 본초강목을 완역하는 기틀이 됐다. 정통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선생은 본초강목 이외에도 의학입문, 동의보감을 문헌을 통해 배웠다.
선생의 특이한 이력 중에는 朝鮮 漢藥業組合 월보 주간을 맡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약업사가 되기 전의 일이다.
한약업조합은 한약재의 수출과 수입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한약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한문해독능력과 한약업조합에서의 경험으로 선생은 총독부가 시행한 한약업사시험에 응시하여 제1호로 합격했다. 1931년에는 한약국을 개업해 한의학의 임상에 들어가게 됐다.
해방 전에 이미 선생은 본초학의 달인이 되어 경기도 의생강습소 강사로서 본초학을 강의하는가 하면 동양의학강습소 강사를 역임하면서 한의학 제도가 없는 일제시대 한의학의 명맥을 잇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해방 후에는 동양대학관 교수를 역임하고 1952년 한의사국가고시 위원, 1953년 서울한의대대학이 만들어졌을 때(당시 학장 박호풍)에는 교무처장으로서 초기 한의대 교육의 틀을 빚는데 이바지했다.
선생은 한의대 교수로서 서울대 약대 강사를 맡았다. 한의학계 인사로서 서울대에서 강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원전 해독능력과 산야를 누비고 다닌 채집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의 강의에 힘입어 서울대 약대에 본초학이 이식될 수 있었다.
이 이후에도 선생은 한의과대학에 강의를 나갔다. 1961년에는 동양의대 교수로 있었으나 학내문제에 얽혀 그만두었다가 1965년 경희대와 동양의대가 합병하면서 다시 본초학 강의를 맡았다. 선생이 작고한 뒤에는 고 안병국 선생이 신농본초 100종이란 책으로 강의를 이어받았다.
선생에게서 본초학을 사사받았던 이상인(경희대 한의대 명예교수. 현 서울 수유리 이상인한의원) 전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본초집요 상하권으로 교육을 받았지요. 1권은 목본과 초본이었고, 2권은 광물과 동물을 다룬 책입니다. 이들 책은 1년내로 끝마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강의는 매번 30~40분 늦게 끝났는데 말입니다. 하여간 본초의 세계가 무궁무진했어요.
이런 선생이 본초학분야에서는 어떤 공헌을 했을까? 단순히 가르친 것 자체도 한의학계에 공헌이라면 공헌이지만 그것만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뭘까? 이상인 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의 본초학은 동의보감 식으로 기원, 성상, 기미, 귀경, 효능, 주치 등을 조목조목 기술했어요. 이를테면 당귀는 산형과에 속한 … 뿌리라고 가르쳤어요. 그러나 학명은 넣지 않았어요. 한약재를 식물분류학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선생의 기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학명이 있었으면 더 정확했을 것입니다.
같은 당귀라도 안젤리카 기가스와 안젤리카 시넨시스, 안젤리카 아큐블로라로 나눠지고 후자 2가지만 유효한 게 지금의 본초개념임에 비추어 다소 미흡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학문이 발전한 현재 시점에서 본 한계일뿐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선구적인 측면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한의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서 본초학의 체계를 확립한 성과는 세월이 흘러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게 현직 본초학 교수들의 판단이다. 강병수(동국대 한의대 본초학) 교수는 그를 최근세 본초학의 대부, 한국의 신농이라고 부를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당시 발행된 모잡지에는 선생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생약연구의 메시아격인 인물로서는 동양의약대학 교수이신 신 선생을 (한의계의 베테랑 컬럼난에) 모시지 않을 수 없다. 40여년간 오직 선조들이 이룩한 경험약을 과학적인 체계로 정리하신 공로는 치하하기기에는 너무나 크다. 지금 71세의 고령임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연구에 몰두하실 뿐만 아니라 후배지도에도 세심한 주의를 아끼시지 않으신다.
이런 스승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본초학과 본초학을 연구하는 후학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국의 산야를 누비면서 연구․개발․정리하기 40여년.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적 가치는 여러 권의 책속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본초학 총론(1954년), 본초학 각론(1958년), 한방의학 집요(1963년), 동의개론(1966년), 약초재배법(1969년), 중요한방처방집(1971년), 신씨 본초학 총론(1972년), 신씨 본초학 각론(유고. 1973년 출간) 등이 있다.
대부분 강의록을 정리한 책들이다. 본초학자들은 이들 책이 지금도 깊이가 있다는 평을 아끼지 않는다
선생은 1920년에서 29년 사이 청강 김영훈 선생 문하에서 한의학과 본초학을 사사하고 동시에 본초강목을 완역할 정도로 이론에는 밝았지만 실물을 보아야 하였기에 늘 기회를 만들어서 각 지방 산야를 누비며 약초채집을 다녔다. 이때 채집다닐 때마다 큰딸을 데리고 다녔다. 같이 다니면서 이 식물은 이름이 무엇이며 약명은 무엇이고(예, 우리말로 삽주, 일어 オケラ, 창출, 뿌리), 양건하는지 음건하는지, 삶아서 말리는지 쪄서 말리는지 술에 담구어 말려 쓰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10本이상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곳이 양지인지 평지인지, 음지(습지)인지를 살피고 그 상황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아무리 군락을 이루고 많이 있어도 2~3개 이상은 채집 못하게 하고 희귀한 경우는 한 개이상은 뽑지 말고 후진을 위해 또는 내년 번식을 위해 꼭 남겨두는 것이 학자로서의 양심이며 책임이라고도 가르쳤다.
◆ 약재 상황 카메라에 담아.
서울 근교의 산은 말할 것도 없고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함북 회령에서 전남 해남까지 8도를 두루 다녔다. 등산가가 아니어서 정상까지 올라가지는 않았어도 밑에서 중턱까지 일년생 초본에서 다년생 목본에 이르기까지 뿌리, 열매, 적은 가지 잎사귀 등 胴亂(채집통)에 형태가 구겨지지 않게 담아서 짊어지고 다녔다. 서울근교는 돈암동 종점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서쪽으로 성벽을 끼고 돌아 삼각산 인왕산 안산을 거쳐 영천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시가지나 주택가로 되었지만 진관사 문수암으로 나와 그곳 스님과 한담도 나누고 이웃주민과 약초재배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집에 돌아오면 중국서적이나 일본의 유명식물학자인 朝比奈 박사의 저서 또는 식물도감 등을 펴놓고 연구정리하기에 바빴다. 북쪽 고산식물과 남쪽의 아열대식물에 이르기까지 식물학자 장형두 박사와 동행한 일도 많았다.
◆ 채집 후 일일이 정리
선생은 이렇듯 채집여행 재배강습여행을 다니면서 방언채집도 했다. 제주도에 가서는 그곳 방언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도 유난히 다르니까 방언채집을 해서 제주도방언집을 만들기도 했다. 이와같이 어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한편 명승고적을 찾으면 그곳의 유래, 발견년대, 그리고 전래설화도 기록으로 남겼다. 속리산기행, 동룡굴(평북 구장군) 답사 등 그 자세함과 친절한 설명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채집다니며 방언을 채집하거나 사찰에서 스님들과 혹은 그곳 지방주민들과 나누는 대화가 모두 약초의 재배와 수확․조제․저장에 이르기까지 현장학습이었다.
약국을 찾는 환자가 있어도 환자의 상태, 평상시의 식생활, 생리현상 등 문진과 진맥으로 체질을 감안, 아무리 만성병이라도 다섯첩 이상은 안지어주고 복용하고난 후 다시 용태를 봐서 더 투약하는 등 영리보다는 학자적 양심으로 대했다.
선생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중에도 한약협회 일을 하기도 했다. 한약협회 서울지부 부회장을 맡았던 이력은 서울대 약대 교수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본래 한약업사로서 출발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다는 의지의 표시로 읽힌다.
1972년 별세하기 전까지 선생은 저작활동에 몰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본초학각론의 출간사를 썼던 수문사 姜壽炳 사장에 의하면 1965년 본사로부터 집필의뢰를 받고 손을 대기 시작한 지 7년만인 1972년 비로소 탈고를 해 출판이 시작되었으나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해설하에 정확한 처방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다듬느라 총론편과 동시에 출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동서의학연구회장으로 있던 의학박사 이종규씨도 선생의 연구열을 극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경에 그 정력이란 도저히 젊은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항간에서 말하는 본초학의 귀신이다. 이미 고희의 연세를 넘기신 선생으로서… 과학적으로 조리있게 풀이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정작 선생은 본초학은 1+1=×라는 식의 과학이 아니라고 밝혔다. 오히려 본초학은 형이상학이며,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신조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구에 표현된 바 眞相을 파악하는 한편 배후에 존재하는 實相을 사색해야 한다는 게 선생의 지론이었다.
◆ 본초학은 과학 아닌 형이상학
선생은 1972년 7월 11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장녀 신현경 씨는 선생의 영면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노년에는 후진양성교육에 거리의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강연여행을 다녔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청주지방에 강연하러 갔다 귀경해서 기행문을 쓰다가 잠자리에 든 뒤 그대로 영면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생은 한의학의 과학화를 위해서 장녀를 경성약전에 진학케 했다. 장녀 신현경 씨는 현실에 타협하다보니 선친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고희를 넘겨 후회막급이고 그 불효가 하늘을 찌를 듯 송구하기 그지없다고 회고했다.
선생의 1남3녀 중에는 의약분야로 진출한 자제와 손자들이 많다. 장녀 신현경 씨와 삼녀 신창휴(재미) 씨, 손녀 신재우 씨는 약사이며, 선생의 장손자인 신동우 씨와 둘째 사위는 양의사, 차손자인 신승우(32) 씨는 한의사로서 현재 경희대 강남한방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으로 근무, 한 대 걸러 한의학의 맥을 잇고 있다.
문하생에는 서울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했던 故 임덕성 씨가 있다.
3.13 無爲堂 李元世 선생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치유를 강조
평생 난치병환자 위한 인술 실천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에게 오히려 점심까지 대접하며 마음을 다독이고, 그의 고단한 삶까지 보듬으려 애썼던 무위당 이원세 선생.
지난 2001년 8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던 날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점심식사 후 담배 한 모금을 피우는 여유를 보일 정도로 그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이였다.
한 평생 앞에 나서지 않고 난치병 환자들을 위해 정성을 다했던 그의 일생을 돌아본다.
◆ 無爲堂 그는 누구인가
경북 청도에서 가난한 농사꾼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무위당(1905~2001)은 17세 때까지 四書三經을 공부했다. 이후 20세까지 수업료를 낼 수 없었던 형편이라 이리저리 스승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무위당이 의탁한 집에 당대의 대학자였던 석곡 이규준 선생이 방문했다. 무위당은 심부름을 위해 드나들며 먼 발치에서나마 석곡의 학문 깊음을 알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틈을 보아 어디로 가면 선생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하고 석곡에게 물었더니 석곡 역시 무위당의 천품을 알아보고는 모월모일 어디로 오너라했다 한다.
무위당은 기쁜 마음에 이내 당시 대구의 유력자였던 석재 서병오의 집으로 갔다. 석재는 석곡보다 7세 아래로 그의 문하에 들었으나 대구에서는 오히려 석곡보다 석재가 더 유명했다.
천석꾼에 군수를 지냈으며, 서화가이자 재주가 많은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석재도 석곡을 만나 병을 고치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는 것.
무위당은 석재의 집에 무일푼으로 몸을 의탁하게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해야하는 힘겨운 생활을 시작했다.
석곡이 한달에 두어번 정도 석재의 집에 찾아와 무위당을 부르면 그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 중에서 두어가지 질문을 골라 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이 당시 그의 학업의 전부였다.
그러나 무위당은 비상한 결심을 하며 오로지 배움에 대한 은근과 끈기로 그 한계를 극복하고 스승의 학맥을 이었다.
그러던 1923년 석곡은 세상을 떠나게되면서 석재에게 무위당을 부탁했다.
이즈음 무위당은 6년7개월 간의 문하생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온다. 청도로 온 무위당은 20대 후반의 나이로 한약방을 열게된다.
주위에서는 무위당의 나이와 경험이 적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이치적으로 병을 다스려 1년 만에 주변에 명의로 소문이 났다.
주위의 연로한 약종상들도 결국 그들 가족의 난치병까지 젊은 무위당에게 진료를 맡김으로써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명성 덕분이었는지 그는 비록 시골의 한의사였지만 3년 만에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도 잠시 주변에서 돈을 좀 번다고 소문이 나자 그의 한약방도 가만두지는 않았다. 일제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져갔고 그는 마침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을 한다.
그러던 와중에 해방이 되자 그는 산에서 내려와 고향에서 이룬 재산들을 모두 둔 채 대구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호에서 이름을 딴 무위당한의원을 연다.
40대였던 이때에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두고 와야만 했던 고향생각에 그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간경화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게 된다.
그러다 물질의 덧없음을 깨닫고 정신 수양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고, 건강도 회복한다.
대구에서 제2회 한의사시험을 치르고 정식 한의사가 된 무위당은 침을 맞으려는 환자가 너무 많아지자 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자연스레 없어졌다.
그래서 이후에는 침을 놓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또 행여 별다른 질병은 없는데 돈 많은 사람이 단순히 피로회복이나 몸보신을 위해 약을 지으러 올라치면 그 역시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밥 잘 먹는 것이 보약이니 돌아가시오라며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이렇게 그는 늘 물질을 좇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치중했다.
그는 오로지 난치병으로 몸과 마음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한 진료에 온힘을 쏟으려 노력했다. 치료비에 연연해 하기 보다는 점심까지 먹여가면서 환자의 고통을 나누려했다.
마음을 열리도록 해야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그만의 믿음 때문이었는지 환자를 그저 환자로서의 존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한 동반자로서 그를 진심으로 다독이고 보듬으려 했다.
그래서 환자도 하루에 10여명도 채 안되게 받았다한다. 환자 한사람한사람에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진료하기 위해서였다.
환자를 적게 보는 대신 질병이 어디서부터 오게됐는지 환자와의 진솔한 대화로 원인을 찾아내고, 환자가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인생상담을 한 뒤에는 환자 개개인에 맞는 각기 다른 세밀한 처방을 써서 난치병을 완치시킬 수 있도록 했다.
무위당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다른 환자가 온다해서 똑같은 처방을 쓰지는 않았다. 사람이 각기 다 다른데 어떻게 그 사람들 모두에게 같은 약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증상이 같을 지는 몰라도 병의 원인이 다 다르므로 같은 약을 쓰더라도 병이 낫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병은 정신 즉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허리를 약간만 잘못 움직여도 디스크가 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제로 허리가 약해서 오는 디스크와는 달리 심리적인 불안초조증세가 원인이라고 보았다. 정신적인 불균형이 결국 온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이치다.
대구에서의 생활에 마음의 안정을 느끼고 익숙해져 갈 무렵 무위당의 막내아들이 위암으로 고생하다 사망하게 되자 아들도 못 고치는 사람이 어떻게 한의사를 하겠느냐며 고통스러워했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였던 1985년 여름에는 평생을 남달리 금슬이 좋아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부인이 그만 뜻하지않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깊은 슬픔과 실의에 빠진 무위당은 대구에서 운영하던 한의원 문을 닫고 큰 아들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가게된다. 1985년(80세)의 일이다.
마음을 다스려야 병을 이긴다
소문학회로 이어진 무위당 정신
1985년 7월. 불의의 사고로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무위당은 부인이 평소 잘 다니던 절이 있는 대구 팔공산자락에 유골을 뿌려주었다. 오래 전부터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고 싶었던 무위당은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다 그 해 9월 경남 합천 해인사로 수도생활을 떠난다.
홀로 있는 아버지가 염려스러웠던 마음에 큰아들 종섭 씨가 여러차례 드나들면서 부산에 있는 집으로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처음엔 이를 완강히 거부했으나 결국 그 해 12월이 되자 무위당은 제2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부산 남구 광안동 큰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대구에서의 임상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온 무위당은 마음공부를 할만한 적당한 곳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부산 남구 남천동 금련산 기슭에 있는 보림선원이란 곳을 알게 되어 마침 그곳에서 만난 백봉 김기추 선사와 뜻이 맞고, 마음이 통해 시간이 날 때면 보림선원을 찾아가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그러다 보림선원이 땅주인의 요청으로 철거되면서 1990년초 진주 근교로 자리를 옮겨 새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무위당은 평소에 틈틈이 써 두었던 서예 40여점을 모아 부산호텔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고, 그 수익금을 보림선원 건축비로 희사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 범어사에 있는 사자암에서 법륜스님과 함께 참선하던 무위당은 여름날 저녁 나무 밑에서 그곳을 찾은 학생들과 직장인들에게 한문과 동양철학, 유교철학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소문학회가 생겨난 것은 1986년. 당시 부산에서 경희대 출신의 친한 선후배 10여명이 공부를 하던 모임이 있었다. 대구에서의 무위당에 대한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차에 이들은 그를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했다.
그렇게 해서 현재 소문학회 학술위원으로 있는 요산 김태국 원장(부산 요산한의원), 소문학회 회장인 우소 황원덕 교수(부산 동의의료원) 등을 비롯한 한의사 30여명이 매주 세 차례 무위당을 방문해 하루 두시간씩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무위당은 한의학의 근본원리를 비롯해 소문대요, 의감중마, 유교사상과 불교사상 등 동양철학, 사서삼경 등 한문도 가르쳤다. 무엇보다 배우러 오는 이들이 환자를 대하는 한의사들이었기에 그는 환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젊은 한의사들이 공부하러 꾸준히 찾아오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강의를 듣고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매번 잊지 않았다고 한다.
가정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으나 공간은 협소해져 1989년 12월엔 인근에 있는 좀더 큰집으로 옮겼다.
한창 제자들을 가르치던 시절인 이때에도 이미 84세를 넘긴 고령이었지만 그는 차츰 가르침에 대한 보람도 느끼고, 애착을 갖게 되었다.
큰아들 종섭 씨(69․해운업)는 아버지는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가족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애정을 가지셨다고 회고했다. 그래서인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수시키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것 같다고 했다.
제자들의 간절한 청으로 가까스로 생전에 두 권의 책을 남기긴 했지만 본시 자신과 관련한 무언가를 남기는 것도, 남 앞에 나서는 것도 꺼려했던 그였다.
공자같은 훌륭하신 분도 책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 아는 게 무엇이 있다고 책을 내겠는가. 외람되다며 처음엔 제자들의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제자들의 청이 계속되자 간신히 받아들인 무위당은 그의 스승이었던 석곡 이규준(1855~1923)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편집한 신방신편과 석곡이 동의보감에서 소문의 원리에 맞는 내용을 뽑아만든 의감중마에 고금의 처방을 편집해 넣은 백병총괄 방약부편등 두 권의 의서를 남겼다.
그의 제자들은 이밖에도 평소 무위당이 공부하고 참선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틈틈이 시로 옮긴 글을 모은 無爲堂雜詠草稿라는 한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무위당은 어디까지나 사람은 인생관, 인격으로 대하고 위안해서 병을 다스려야 한다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병리공부를 제대로 잘 해서 치료해야지 무슨 처방이 잘 듣더라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양심에 부딪치는 일이라고 했다.
무위당은 환자의 病理를 먼저 파악한 뒤에 淸上通中溫下에 입각해 作方을 했다고 한다. 석곡의 부양론과 내경에 나오는 오맥법을 되살려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또 병을 초래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보아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七情(喜怒憂思悲驚恐)을 예로 들며 마음을 잘 다스려야 병을 이긴다고 강조했다. 의사자신의 마음이 맑고 고요해야 환자의 마음을 열고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의 가르침을 받던 김태국 원장이 무위당을 찾아와 두 번 절했다. 이유인즉슨 어느 날 환청으로 고생하던 여고생이 양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김원장의 한의원을 찾아왔다.
여고생의 마음상태를 살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던 김원장은 여고생과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그 자리에서 함께 울고 말았다. 그렇게 약을 지어주고, 차도를 지켜보며 치료하자 여고생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한다.
밖으로 나서지 않는 무위당이었지만 그에겐 수백명에 이르는 한의계 종사자들 외에도 부산대 한문학과 국문학과 교수들을 비롯해 부산시 공무원, 의사, 법관 등 각계각층에서 그의 소중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현재 소문학회 대구지부에서 의맥을 잇고 있는 외손자 송헌 이국형(47) 원장(대구 중화당한의원)은 어릴 땐 말씀이 너무 없으셔서 무서운 외할아버지로만 생각했었는데 제가 자라서 한의사가 된다고하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더라며 요즘도 환자를 진료할 때 할아버지께 배웠던 것들을 많이 쓰고 있는데...이제는 물어보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 없네요라며 아쉬워했다.
2001년 8월 18일 노환으로 기력이 쇠잔해진 무위당은 9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살아생전 돈을 좇고 물질에 얽매이면 욕심이 생겨 정신이 흐려진다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릴 것을 강조했던 무위당. 주윗 사람들에게 늘 구름같이 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자신 바로 그런 삶을 살다간 것은 아닐까.
3.14 志山 林達圭 선생
후학 양성의 터전, 대전대 설립에 투신
30일 혜화학원 대전대에서는 개교 23주년 기념식과 더불어 설립자 고 지산 임달규(1931. 3. 12 ~ 1988. 10. 9)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4번째 한의약상 시상식이 열린다.
대전대 한의대 설립은 22년이 되는 해이다.
한의사인 지산 선생은, 후학 양성을 위해 제2의 고향인 대전에 사립대학을 설치하고 한의대와 한방병원 설립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지산 선생은 일년에 설날․추석에만 쉬면서 환자를 진료하며 인술을 펼쳤고, 이로 축적된 재산은 한의학계에 환원했다. 사비를 털어 학원을 설립했다는 업적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일신의 영화를 위한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검소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듯 하다.
■ 병마와 싸우며 한의학에 눈 떠
지산의 집안은 선대부터 선비가문이었으며 中農으로서 부족함 없는 집안이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조부 然石公 林永相이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모금활동에 동참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나라와 집안 모두 기울어가는 가운데 부친인 海雲公 光淑은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던 중 금강산 유점사에 들렸다가 海月스님을 만나 한의학을 배워 1935년 경기도 여주에 수창당 한약방을 개업했다.
이때까지 어린 지산은 예천 임씨의 집성촌이기도 한 고향에서 젖배를 골며 성장했는데, 태어날때부터 약한 그의 몸으로 인해 집안에서는 그가 살지 못할 것이라 여겼고, 그래서 실제 그의 주민등록상 출생일은 3년 늦은 1934년으로 돼있다.
그 뒤 해운공은 충남 약정국에서 실시한 약사시험에 합격해 1937년 대전에서 혜화당한약방을 열었고, 4형제 중 막내인 지산선생이 가업을 이어 이곳을 혜화당한의원으로 바꾸었다.
당시 혜화당한약방은 전국을 비롯해 북경이나 만주, 동경, 대만 등지에서 병세를 적은 서신이 와 약을 지어 우체국에서 부치기도 할 만큼 명성을 떨쳐갔고, 가세도 번성해갔다.
대전 대흥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지산은 넉넉한 집안환경에서 자라던 중 뜻하지 않게 골수염의 일종인 腐骨症에 걸리게 됐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진학을 포기하고 중학과정을 독학했다.
당시 의술수준에서 이 병은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병이었는데도 어린지산은 묵묵히 버티며 학업을 병행하면서, 부친인 해운공의 진료실에서 진료과정과 한약재를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20살 되던 해 병세가 호전됐지만 6.25전쟁이 터지고, 피난생활을 하던 지산은 1953년 부산에 전시 연합대학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가 이 대학의 한의과(후 동양한의과대학을 거쳐 현재의 경희대 한의대로 바뀜)에 입학하고, 휴전이 되자 전시 연합대학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 한약과 이재에도 밝았던 지산
일생 사치를 몰랐던 지산의 검소한 생활은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우들은 서울에서 무허가 판자집을 급조해 만든 움막에서 생활하던 지산을 영세민쯤으로만 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낙기 교수(전 대전대 한의대 학장․동교 부속한방병원장)는 훗날 지산의 영결식장 조사에서 2학년 겨울방학 형의 집을 방문했을 때 형이 그 유명한 혜화당한의원의 막내이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서 향락과 유흥은 사회적 죄악이며 민족적 배신행위라고까지 여기며 환자진료에만 몰두할 정도로 고집스러웠다고 전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대학시절 그가 스스로 약재상을 차렸다는 것이다.
지산은 학교공부에 매달리면서도 틈틈이 동대문 근처의 한약 건재상을 돌아보면서 시세를 살폈다.
어린시절부터 집안 분위기에 따라 약재에 대한 지식수준이 높았던 그는 한약재 가격까지 관심을 두고, 서울의 약재상을 돌기 전에 이미 대전 은행동에 있는 허술한 판잣집(현재 금생사 건물)을 계약했다.
학생의 신분이어서 계약은 했지만, 잔금은 부친의 꾸지람을 들으면서 지불했다. 이 곳은 충남건재라는 약재상이 됐고, 지산은 한의대 학생이면서 건재상 주인이 됐다. 서울의 좋은 약재는 대전의 충남건재로 보내지고 혜화당한의원에 물건을 납품하고 어려움 없이 운영될 정도로 이재에도 밝았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 유명한의원 처방전 수집
또 하나 지산은 유명한의원을 돌아다니며 처방전을 모았다.
약재상을 차릴 정도로 생활비를 아껴가며 검소한 생활을 했던 지산은 유명 한약방의 처방을 얻는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한의학에 대한 관심은 여러면에서 나타나는 듯 하다.
지산이 결혼 한 이듬해(1956년) 부친이 암으로 별세함에 따라, 57년 한의사 면허증을 취득하게 된 지산이 혜화당한의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환자를 보게 됐다.
부친의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지산은 환자 진료에 전념했고, 이때부터 일년에 단 2일을 쉬며 환자를 치료했다.
쉴틈 없이 진료하는 지산선생은 의사가 쉬고 싶다고 기다리게 하고, 시간 지났다고 내일오라고 하면 환자가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전국에서 나를 찾아오는데 어찌 일신의 안일만을 생각해 편히 드러누워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낮춘 삶 짧은 생애, 긴 발자취 남겨
지산은 학교시절부터 명처방을 수집하고 틈나는대로 그 내용을 분석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선친의 진료실에서 임상실습을 하며 의인의 길을 준비했다.
그는 한번 진료했던 환자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질병을 치료함에 있어 한의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효과적인 진료를 위해 유연한 자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양방의 과학적인 병인 진찰이 탁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양방 의사와 친교를 맺어 환자들에게 X레이 촬영을 하는 등 지금으로 말하면 동서의학협진의 형태로 진료했다.
1982년 대전대 부속한방병원을 개원할 당시에 혜화당한의원에는 이미 초음파기를 두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한의사가 된 아들 임민철(35)씨는 어린시절 부친의 진료를 기억해보면 진맥이 신속하면서 정확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면서 부친의 처방 중 상당부분이 대전대 부속한방병원에서 응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충분히 일가를 이룰 만큼 자산을 모아 주위에서 자가용을 굴릴법하다고 여겼지만 지산은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서 조금 형편이 나아졌다고 차를 산다면 이 땅은 차로 뒤덮이지 않겠는가라면서 거부했다.
□ 교육과 고향에 대한 애정
지산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경북 문경시 산양면 우본리) 복지사업에 상당한 투자를 하게 된다.
그는 먼저 마을 진입로와 농로의 확포장 공사비를 전액 부담했고, 전기시설이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배터리를 이용한 앰프시설을 설치했다.
지산은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당 면적의 전답을 구입해서 도로 폭을 넓히고 악천후에도 차량이 마을 한복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돌과 시멘트로 포장했다.
앰프시설은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발소․목욕탕․도서관․마을회관을 짓고 농촌의 빈곤한 자금사정을 고려해 사재로 공공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의원 직원을 비롯해 지산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러 온 고향 지인들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사업자금을 구하러 오는 이들을 도와주다가 그 업체를 떠맡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사정으로 제지회사, 농장, 양조장, 식품회사, 대전극장 등을 인수하게 됐다.
한편 경제발전과 더불어 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대전도 마찬가지로 대학증설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지산은 학교법인 혜화학원을 설립, 대전대학 신설 인가를 받아냈다. 이때 이사장의 이름은 형인 임홍규로 서류가 꾸며졌고, 실제 설립자인 임달규선생은 대외적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이러한 육영사업의 꿈은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1950년대 부친은 학교 설립을 계획한 바 있었고 지산은 이꿈을 이어받아 실현시킨 것이다.
본래 지산의 계획은 가정사정 등으로 학업하지 못한 젊은이들을 위한 4년제 야간대학 설립이었으나 계획을 수정, 주․야간 동시모집인가를 받아냈다. 설립후 지산은 나는 한의사이므로 열심히 환자진료를 하여 얻은 수입으로 학교발전의 초석이 되면 그뿐이라며 교주인 학교의 이사장직에 오르는 것을 사양했다. 학교 운영에 대해서도 학사행정에 능숙한 교수를 초빙해 맡기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1981년 제1회 입학식에서 260여명의 신입생에게 지산은 단상에 올라가기를 사양하고, 축하객들을 맞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에 학교에 와서 아무도 모르게 둘러보기만 할뿐, 내가 나타나면 운영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럽다. 운영을 맡겼으니 소신껏 운영하게 도와줄 뿐 나는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해라고 했다.
하지만 지산은 한방병원을 중풍전문병원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2000년이 되기 이전에 대전대는 재학생, 1만명의 중부권 명문 사립종합대학교라는 마스터 플랜까지 그려놓고 있었다.
□ 드러내지 않는 덕행
향토사업과 교육사업, 한의원 진료에 동분서주했던 그에게 여행은 단 두차례였는데 이것도 로타리클럽에서의 봉사활동과 관련해 일본과 미국, 그리고 유럽을 돌아본 것이었다.
선행을 쌓으면서도 지산은 이름 내세우기를 극히 꺼렸다.
당시 대전일보 변평섭 편집국장의 회고담 한토막. 신문에 생계문제로 운동을 중단해야할 처지에 빠진 유망한 학생의 사정이 보도됐다. 이후 그 학생을 통해 지산의 도움으로 운동을 계속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산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그는 금시초문이라면서 잡아뗐다. 신문에 싣지 않겠다는 전제를 걸고 거듭 묻자, 그제서야 우리지역의 유망주인 운동선수가 포기하는 것은 지역의 손실이어서 도왔다. 신문에 내 이름을 내면 앞으로는 이런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학교설립은 이루었지만 재정문제는 끊임없는 지산의 숙제였다. 학교의 규모는 커지고 1985년에는 학교부지 확장과 한방병원의 이전문제까지 불거졌다.
대전대학 인근의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하고 병원규모도 늘려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시내 중심지인 대흥동에 충남대 의대 부속병원 자리가 났고 지산이 이를 인수했다.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한시간씩 진료를 연장했다.
아들 임민철 씨는 사업에 앞서 철저히 계획을 하시고, 빚을 끔찍이 싫어하시는 성격이라 학교설립부터 현재까지 은행에 빚이 없었지만, 당시 갑작스럽게 현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금운용에 신경쓰시느라 무리한 듯 싶다고 말했다.
과도한 무리로 인해 지산은 간경화로 건강이 악화됐고, 미국 피치버그 소재의 프레스비테리안병원 간 전문센터에서 간이식수술을 받았지만 1988년 10월 향년 58세로 끝내 생을 마감했다.
아내 오응숙 여사(1990년 별세)와의 사이에 2남 3녀가 있으며, 의사인 장남 용철 씨는 혜화학원 이사장직에 있고, 한의사인 막내 민철 씨는 혜화당한의원을 지키고 있다.
3.15 松齋 李鍾馨 선생
전통과 현대를 이은 晴崗의 수제자
교육시스템 체계 구축에 이바지
한의사의 서가라면 한권쯤 꽂혀있을 법한 晴崗醫鑑(1984․성보사 刊)은 고종 시절 내원 소속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했던 청강 김영훈 선생의 처방을 담은 것으로 晴崗의 수제자인 松齋 李鍾馨(74) 선생이 정리한 것이다.
청강 선생은 과거질서가 허물어지고 새시대로 재편되는 근현대에 한의학 계승의 주역으로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이종형 선생은 경희대, 대전대, 동국대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대한한의학회 이사장․대한한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대한내과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국제동양의학회 이사 및 세계침구학술대회 학술 위원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과거 교육과 한의사의 권익을 위해 투신했던 스승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 청강 선생과의 인연
이종형 선생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선비 출신으로 땅을 일구며 살던 집안에서 그는 어린시절 훈장이었던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근방의 한약방에 심부름을 갔던 소년의 예절바르고 영특한 모습을 보고 한약방 주부가 한의학을 배울 생각이 없냐고 권유했다.
다음해 부친이 사망하자, 6남매의 생계는 홀어머니의 몫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인생을 찾는 길은 한의사가 되는 길이라 다짐했다. 형님이 쥐어주는 3백원, 그리고 그 주부가 자신의 스승이라며 찾아가 보라고 적어준 소개장을 쥐고 홀로 월남해 만난 것이 바로 청강 김영훈 선생이었다.
처음부터 이종형 선생이 순탄하게 청강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3년간 한의원에서 이종형 선생의 일이란 것은 궂은 허드렛일 뿐이었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가르침을 청하자 스승은 하루 진료를 끝마친 저녁에 그를 불러냈다. 그가 내민 것은 빨간잉크로 일일이 토씨를 단 의학입문이라는 책이었다.
이날부터 저녁에 스승이 몇 페이지씩 읽어주면, 그는 다음날 한의원에서 틈틈이 외우고 저녁에 스승 앞에서 암송해야했다. 이렇게 해서 의학입문을 한달 안에 떼자 스승은 너는 되겠구나라고 말했다.
당시 김영훈 선생에게는 제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스승의 이 말은 수많은 사람 중에 이종형선생이 의지와 총명함을 인정받아 정식 제자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강 선생의 수업방식은 저녁에 스승이 선창하는 내용을 다음날까지 완벽히 외우게 한다. 그래야만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런식으로 황제내경, 동의수세보원 등을 배워갔다. 낮에는 스승의 곁에 붙어앉아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스승이 적어내린 처방을 한약방에 직접 전달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머릿속에 처방한 내용과 스승의 것을 비교해 보고, 틀린 것은 저녁에 스승에게 물어가며 학문을 높여갔다.
이종형 교수는 의학입문은 한의학의 가이드라인이고, 동의수세보원은 백화점입니다. 백화점에 찾고자 하는 물건이 어디있는가 잘 알 수 있는 요령은 가이드라인을 알고 나면 손쉽게 파악 할 수 있는 것처럼 동의수세보원이라는 백화점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의학입문이라면서 이것이 바로 한의학을 공부하는 요령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른살 쯤 되었을 때 차츰 내 처방이 스승의 처방과 똑같아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학문에 대한 체계도, 자신감도 생기더군요라고 회고했다.
◆ 한의학의 체계를 잡기 위해
그는 스승의 권유로 동양의약대학(현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했다. 한의원과 학교를 오가며 학업에 정진한 그는 1955년 한의사 국시에서 수석합격해 면허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8년뒤 34세(1963년)에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보인한의원을 개원했다.
치료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환자도 늘어만 갔다. 개원 8년 뒤 경희대에서 한방병원을 설립하게 되자, 이종형 선생은 교수직 제의를 받게 됐다. 그는 한의학의 임상내용․교육시스템의 체계화가 필요한 시기 라는 판단에 따라 학교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듬해(1972) 경희대 한방병원 제3내과과장으로서 임상교수의 생활이 시작됐다. 이미 개원의 시절부터 대한한의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교육문제에 고민했던 그에게 대학병원의 임상교수 자리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병원생활이 그의 이러한 의지와 맞아떨어지지 못했다. 의료시스템과 학술의 발전보다는 경영수지에 우선가치를 뒀던 병원생리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교수들은 임상연구보다 다른교수들과 환자수를 놓고 경쟁하고 반목하게 됐다.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그러한 시스템을 만든 병원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편 그는 한의학의 체계화를 추진해 나갔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한의학에 무지한 대중의 인식이었고, 보건당국자들 또한 그를 절망케 했다며 일화 한토막을 들려준다.
그는 학회 관계자로서 한의대 교과목으로 병리학을 개설하기 위해 보사부(현 보건복지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해당과의 담당자들은 한의학에 병리학이 어디있냐고 일언지하에 무시해 버렸다고 한다.
세포며 바이러스로 가득차 있는 그네들에게 8강을 기본으로 한 한의학의 병리학은 학문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됐지요. 하도 분통이 터져 내가 왜 이 학문을 했나하는 후회가 막심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꾹참고 수차례 찾아가 설득한 끝에 결국 병리학은 교과목으로 인정됐다고 한다. <계속>
인간을 至善의 太極으로 만드는 것이 한의학
지금까지 한방진단명 및 용어를 정리하는 작업은 한의계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방병명의 정리작업은 1973년 한국질병사인분류에 한국질병사인분류를 사용하기 위한 한의분류표형태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이때 경희대 한의대 교수로 있던 이종형 교수가 중심이 되어 대한한의사협회와 함께 제정한 것이다.
당시 그는 한의학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표준으로 쓸만한 병명이 제정돼 있지 않아 학문적 발전이 지연됐다. 한의학의 특징을 발현하지 못하고 西의 병명을 끌어다 사용하는 것은 한의학의 올바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면서 이 공용어를 토대로 한의학의 내용이 표준화되어 전반에 걸쳐 체제가 조리있게 정리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학문발전에 파벌은 있을 수 없어
경희대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 이종형 선생은 대전대를 거쳐 동국대 한의대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병원장으로 한방병원을 이끄는 역할을 병행하기도 했던 그는 특히 정년퇴임 후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작년까지 임상강의를 쉬지 않았다.
매주 목요일 자신의 한의원으로 찾아오는 한의사에게 한의학을 가르쳤는데 강의비도 받지 않았다.
그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것은 당연지사라면서 학생들이 가르친대로 임상에서 열심히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요라고 말했다.
강사의 격조와 위상을 결부시키고, 강의비가 싸면 수강생들이 모이지 않는다 하여 날로 높아지는 요즘 강의비를 생각하면 고개가 숙여진다.
마지막까지 강의를 들었던 이정용(서울 이정용한의원․상지대 겸임교수) 씨는 선생님은 의학입문․황제내경에 입각한 정통한의학의 원리를 수강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양방적인 설명과 곁들여 강의하셨는데 그 이치를 너무나 선명하게 밝혀주셨다면서 한번도 화를 내시는 법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강의하셨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강의비를 전혀 받지 않으시고,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학문을 전수하려는 세태도 극히 싫어하셔서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언제나 평등하게 가르침을 주셨다고 말했다.
□ 한의학의 정통을 이어
이종형 선생은 한의학의 뿌리인 황제내경, 의학입문, 동의보감을 거의 암송해 이를 임상에 활용했다.
그는 한의학은 자연과 하나다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안에서 한의학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그리고 미래의 한의학의 나가야 할 방향을 풀어갔다.
한의학의 기본원리는 동양의 우주원리에 있다. 이 우주의 생성과 진화과정은 무극 태소 태극으로 이루어지는데, 인간도 동물, 나무, 바위, 물처럼 모두 한 태극체이다. 인간은 至善의 太極으로써 우리(한의사)의 임무는 사람을 지선의 태극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의학의 판단 방법은 性․氣․理에 묘법이 있다. 이 우주 속 만물은 性․氣․理의 원리로 살아가는 태극체이고 한의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진찰의 목표가 바로 이 性․氣․理의 현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관찰하기 위해 陰陽, 虛實, 寒熱, 表裏를 살핀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판단방법이 바로 陰陽이론이다.
음양에는 相對性, 相補性, 分容性 同根性, 輪廻性 등 다섯가지 개념이 있으며, 이 개념파악을 다 할 수 있어야 음양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한의학도 이러한 음양개념을 통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의학입문, 어렵다고 피할 수 없어
그는 특히 이러한 동양적 사고관에 기반을 둔 한의학이 담겨 있는 것이 의학입문이라고 강조했다.
언제나 학생들은 공부법을 묻지요. 하지만 그 물음 뒤에는 어떻게 하면 빨리 임상에서 써먹을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깔려있어요라며 학문에 왕도가 있겠습니까? 차근차근히 쌓아간다는 마음이 중요하죠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학문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면, 먼저 해야 할 것이 의학입문이라는 것이다.
의학입문은 한의학의 원리가 그대로 있는 철학․문학서이기 때문에, 이를 먼저 공부하는 것이 바로 요령이란다.
의학입문, 어렵죠. 서양적 사고관에 길들여 있는 요즘사람들에게는 특히나 그렇죠. 저도 갈등을 겪으면서 한의학을 포기할까하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라면서 하지만 의학입문을 하고 동의보감을 공부하는 것이 어려운 한의학을 쉽게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부드럽게 웃는 그의 말끝에서 정도에 준하는 공부에 충실하라는 엄한 가르침이 배어난다.
애초에 한의학은 자연과 하나이기 때문에 소멸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한의학 자체의 역사에도 음양이 있죠. 실력, 자질, 노력 등 앞으로 보완해야 할 점도 많습니다라며 당부의 말을 이었다.
몇해 전 한적한 경기 구리시 인창동 현재의 집으로 옮긴 그는 아내(김혜영․68)와 인근에 4천평 규모의 밭에서 한약재를 재배했다. 지난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강의와 진료를 접고 晴崗醫鑑을 개정하는데만 전념하고 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고, 사위인 한의사 이준우(45) 씨가 이문동의 보인한의원을 잇고 있다.
3-16暘谷 조세형 선생 趙世衡
사암침법의 체계적 연구 정립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현업에선 은퇴했지만 개원활동을 한 임상가로는 드물게 평생을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며 한의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쏟아부은 暘谷 조세형(78) 선생.
한의계에 기념비적인 연구업적으로 남아있는 사암침법체계적연구를 집필할 당시 건강이 악화돼 중도에 쓰러질 정도로 고난도 따랐지만 7년 만에 어렵게 일구어낸 작업이었던 만큼 지금은 후배 한의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책이다.
1926년 경기도 안성 태생인 양곡 조세형 선생은 당시 이천군수인 아버지와 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세 살 되던 해 바위 위에서 놀다가 떨어져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결국 늑막염에 걸려 사경을 헤맬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지만 병원도 없고, 치료방법도 마땅치 않던 시대상황 때문에 손도 제대로 못써보고 지금까지 호흡기 질환을 안고 살아오고 있다. 이것이 후에 그가 한의대에 가게되는 계기가 된다.
고교를 졸업하고 고려대의 전신이었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뜻하는 바가 따로 있었던 탓에 대학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다.
이후 고향에 있는 안청중학교에서 약 3년 간 국어교사 생활을 하게된다.
그는 당시의 교사생활에 대해 때묻지 않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여행도 다니고 뛰놀 수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즐거웠던 때라고 기억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이었는지 자연스레 한의사를 꿈꿔왔던 그는 결국 교사생활을 접고, 1961년 서른 다섯 나이에 경희대의 전신인 동양의약대 한의학과에 편입학한다.
대학3학년 때는 과대표를 맡으면서 과 학생들과 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당시 교수들과 선배들의 우수처방을 모아 졸업 즈음 상병별로 정리한 동의임상처방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또 동양의과대와 원광대 한의대 등에서 교수로 지낸 김기택 선생이 조직한 고금의학회에서 학술부장을 맡으면서 7~8년 간을 공부했다.
양곡 선생은 생각해보면 당시에 학술다운, 정말 학리에 꼭 맞는 한의학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아카데미한의원을 개원한 양곡 선생은 본격적인 임상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평소의 뜻이기도 했던 학문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고전침 수기법에 대한 연구에 심취했다.
그는 바쁜 임상활동 중에도 틈틈이 침구대성이라는 고전을 중심으로 침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찾아 읽고 분석했다.
그중 불필요한 수기법은 버리고 좋은 수기법만을 골라내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보침법, 사침법, 보사겸용침법 등 세 가지 수기법의 표준형을 만들어내게 됐다.
이렇게 그가 古典針手技法을 체계적으로 분석, 연구해 누구나 알기 쉽도록 만든 책이 79년에 출간된 고전침수기법의 체계적 연구라는 창작논문집이다.
이후 침 연구의 여세를 몰아 사암침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한의계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게된다.
그는 사암침법 연구를 통해 학리와 임상의 일치로 한의학의 진가를 재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조후기인 400년 전 사암도인이란 사람이 음양오행, 장부허실설 등에 바탕을 두고 만든 사암침법은 그 효과가 신비스럽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뜻이 심오해 활용도 못하는 수수께끼의 침술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학자들이 이 사암침법을 오행침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해외에 보급 선전하고 있어 한의계에선 부끄러운 일로 여기고 있었다한다.
양곡 선생은 사암침법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침서를 겉핥기로만 읽고, 그 핵심원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결국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양곡 선생은 지난 1986년 약 3천년간의 한의학 근본원리에서부터 종합적인 고찰, 일목 요연한 요약․정립을 통해 임상가가 보고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한 439페이지 분량의 사암침법체계적연구를 펴내 현재 한의계내에서 침법에 관해서는 교과서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는 학계의 애로사항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으로 다방면의 관계문헌을 섭렵했다. 그렇게 사암침법의 기본구성을 요약 정리하는 한편 스스로의 체험에 의한 연구방법을 사용했다.
또 그 핵심원리인 장부변증에 의한 허실감별법을 논증하고 발병빈도가 높은 여러 증상의 임상실제를 구체적으로 논술하기 위해 애썼다.
양곡 선생은 針學은 內經과 難經에서 시작되고 있는데, 일반 散針法이 있고 子母補瀉法도 있다면서 舍岩針法은 五行의 子母補瀉法을 진일보하게 발전시켜 五行生剋 관계의 補瀉를 가미한 것으로 臟腑의 病變을 잘 조화시키는 독특한 침법이라고 설명했다.
컴퓨터도 없어 원고작성이 마땅치 않던 시절 그의 옆에서 사암침법체계적연구의 내용정리와 원고작성을 정성스레 도왔던 정찬길 교수(현 세명대 한의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침법이 거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양곡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깊어 사암침법의 집대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양곡선생님의 이런 면모들이 후학들이 본받아야 할 점으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1995년 사암침법체계정립 기념사업회에서는 사암침법체계정립기념비를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 세우면서 양곡의 업적과 함께 고희연을 축하하기도 했다.
또 지난 2002년 5월에는 사암침술의학이 양곡 선생에 의해 재정립된 것과 전통의학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받아 안성시문화원으로부터 사암침법 문화재라는 지역문화재로도 지정돼 문화유적으로서도 인정을 받게 됐다.
그는 지금은 머리가 좋은 후배들이 많아 더 바랄 것은 없지만 최근 사암침법에 대해 독일에서 관심을 갖고 있어 조만간 독일어로 된 사암침법 서적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러한 열의들에 뒤처지지 않도록 우리 한의계 후배들이 더욱 분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