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453. [역경의 열매] 강효숙 (1-17) 하나님은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시는 분
여러나라 다니며 현실도피하다 둘째 딸 위기로 감사의 삶 깨닫고 한식으로 한국문화 알리는 일 매진
강효숙 콩두에프앤씨 이사가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속된 말로 아주 팔자 센 여자처럼 보일지 모른다. 나는 세상 구경하러 태어난 사람처럼 전 세계를 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고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으며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늘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남들과 무언가 다르고 싶었던 기질도 있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 숨 막힐 것 같던 한국이 나는 싫었다. 젊은 여성이 혼자 해외로 나가는 것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한국을 벗어날 궁리 끝에 알리탈리아 항공사에 취업해 한국을 떠났다.
이탈리아에 첫 발을 내딛으며 시작된 외국 생활은 미국 뉴욕 생활로 이어졌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동기였던 남편과 10년 연애하고 뉴욕에서 결혼한 뒤 12년을 함께 살았다. 남편과 함께 한국 섬유를 뉴욕의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소개하고 판매하는 사업으로 제법 성공했다. 뉴욕의 패션은 그야말로 종합예술의 경지에 있었다. 나는 그 치열한 현장과 패션계 인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움과 흥분을 느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됐다. 돌이켜보면 화내고 싸우더라도 결혼에 대해 둘이 함께 결론을 내려야 했는데, 난 두 딸을 데리고 홍콩으로 떠나버리는 쪽을 택했다.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혼자 내릴 때가 많았다. 그리고 결정은 늘 도망치는 쪽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기다리셨다. 남편과는 헤어지면 그만이었지만 딸들은 달랐다. 갑작스러운 홍콩 생활에 사춘기가 겹치면서 큰딸 수현이가 엇나가기 시작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교회에 가보라고 권했다. 처음 교회에 나간 날, 설교 제목이 ‘야곱의 하나님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었다. 거짓말하고 가족을 속이고 멀리 도망치던 야곱의 하나님이 돼 주셨던 그분이 야곱과 같은 나의 하나님이 돼 주셨다. 무언가 꽂히는 게 있으면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 나는 교회도 그렇게 열심히 다니고 헌금과 기부도 열심히 했다.
하나님은 그래도 내게 더 많은 세상을, 그분의 더 크신 사랑을 보여주고 싶으셨나 보다. 미국 예일대를 졸업하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둘째 딸 수진이가 2011년 약물 사고로 쓰러졌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됐다. 수진이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다. 나는 그저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수진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 또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할 줄 몰라도 그저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주시는 분임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 한식 전문 레스토랑이자 다양한 케이터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콩두에프앤씨의 이사를 맡고 있다. 한윤주 대표와 함께 한식을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한다. 지난 30여년간 여행 패션 음식 등 첨단 문화를 경험하고 해외에서 사업한 경험이 나의 자산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어느 것 하나 꼼꼼하게 계획하고 찾아다닌 것이 없다. 그저 하나님이 세상을 나에게 구경시켜주신 덕분이다.
수진이가 쓰러진 뒤 슬픈 날도 있었고 아픈 시간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감사가 많아졌다. 어떤 일이든 감사한 마음이 들고 주위 사람들도 감사하다.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과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됐다는 것, 내 역경의 열매를 이렇게 나누고자 한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 하나님은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시는 분
* [역경의 열매] 강효숙 (2) 학창시절, 불공평한 세상 보며 탈출 꿈꿔
* [역경의 열매] 강효숙 (3) 사람 볼 줄 모르는 이 나라, 난 떠난다
* [역경의 열매] 강효숙 (4) 로마에서 2주만에 사표… 내친김에 미국으로
* [역경의 열매] 강효숙 (5) 도망 가듯 떠난 뉴욕에서도 새로운 삶의 갈증 느껴
* [역경의 열매] 강효숙 (6) 새로운 도전들… 가장 반짝거리던 시절
* [역경의 열매] 강효숙 (7)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삶 깨달아
* [역경의 열매] 강효숙 (8) 상처만 남은 부부… 난 다시 도망가기로
* [역경의 열매] 강효숙 (9) 날 기다려주신 하나님 앞에서 그저 울기만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0) 도망치는 것을 멈추게 한 큰딸의 한마디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1) 사춘기 두 딸 키울 때 교회 공동체가 큰 힘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2) 외로움 견디며 우울증으로 지쳐가는 작은 딸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3) 화해가 시작될 즈음 맞이한 '영원한 이별'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4) 가장 한국적인 맛으로 세계인 입맛 사로잡아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5) 2주간 생사 넘나들던 딸… "주님, 살려만 주세요"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6) 소중한 딸 보듬고 서울로 돌아오다
* [역경의 열매] 강효숙 (17·끝) 정답 없는 삶, 늘 믿는 사람답게 살 수 있게 기도
약력=1952년 서울 출생. 이화여중·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알리탈리아 항공 근무. 미국 뉴욕과 홍콩에서 사업. 현 ㈜콩두에프앤씨 이사
***[역경의 열매] 강효숙 (2) 학창시절, 불공평한 세상 보며 탈출 꿈꿔
네 자매 중 늦둥이 막내딸, 부모·언니와 나이 차 많아… 어려서부터 자립생활 익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절, 과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그 시절 강 이사는 세상에 불만이 많은 청춘이었다.
나는 1952년 네 자매 중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났다. 엄마 나이 마흔, 아버지가 쉰둘일 때였다. 아들을 기다리던 엄마는 “얜 꼭 아들인 줄 알았는데…” 하며 늘 아쉬워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며 어려서부터 아들 노릇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의 씨앗이 심긴 것 같다.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하셔서 손님이 자주 집에 오셨다. 정갈한 개성 손맛의 엄마표 술상이 차려지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막내딸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술상에만 오르는 진귀한 안주를 냉큼냉큼 집어 먹는 날은, 내 잔칫날이요 큰 즐거움이었다.
58년 서울교대부속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젊은 부모들이 교육에 열을 올리며 과외를 시키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특히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이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만 자라주기를 바라셨다. 엄마가 공부 얘기를 하시면 아버지는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일찍 자라고 불을 꺼주셨다.
학부모 모임이 있던 날, 한복을 입고 쪽을 찐 우리 엄마와 굽실굽실한 파마머리에 양장을 차려입은 친구들의 엄마는 아주 달랐다. 나이가 많은 부모가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엄마에게 학부모 통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큰 언니와 무려 15살, 셋째 언니와도 8살 차이라 언니들과 의논할 처지도 못 됐다. 가족과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정할 때가 많아졌다. 좋게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독립적으로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화여중과 이화여고를 다녔다. 중3 때 아버지가 중풍을 앓다 돌아가셨고 언니들도 하나둘 결혼해 집을 떠났다. 겨울이면 아랫목은 따뜻해도 코는 시린 행당동 한옥에서 엄마와 둘이 살았다. 내 눈에는 거대한 듯 보이는 번듯한 양옥집에 자기 방을 가진 친구들의 집을 드나들며 빈부차에 눈을 떴다. 그때는 또 치맛바람이 세서, 교사가 자기 학교 학생을 과외수업하기도 했다. ‘이건 공평하지 않은데…’라는 생각에 그런 선생님들을 우습게 보면서 사춘기의 반항심을 키웠던 것 같다.
불공평한 세상을 보며 기자의 꿈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싫었다. 시험 과목이 가장 적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원서를 넣고 보니 경쟁률이 8대 1이나 됐다. 입학 원서를 내러 갈 때만 해도 학교 앞길은 진흙밭이었다. 그런데 시험을 치러 가서 보니 어느새 신촌로터리에서 대학 정문 경비실 앞까지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입학한 후에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에 입학해 그랬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1970년대 유신시절 캠퍼스의 현실은 답답했다. 낮엔 시위하고 밤엔 야학에서 가르치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느날 어제 같이 자장면을 먹던 누군가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리던 시절이었다.그래도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또 시위가 벌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시대는 참 암울했지만, 청년들이 태웠던 열정은 불꽃처럼 아름다웠다. 하루하루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위도, 연애도 다들 뜨겁게 했던 것 같다.
나의 꿈도 바뀌었다. 기자가 아니라 이 나라를 떠나 어디론가 도망가는 것이 꿈이 됐다. 프랑스나 미국 영화를 보고 나면 나도 저렇게 넓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영화는 사춘기 시절부터 나의 반항의 수단이자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는 땋은 머리를 풀고 언니 옷을 훔쳐 입은 채 대학생인 양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레고리 펙이 기자로 나왔던 ‘로마의 휴일’은 여섯 번도 넘게 봤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현실 속의 내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느껴졌다. 꽉 눌려 있던 나는 훨훨 날아가는 꿈을 자주 꿨다. 어떻게든 떠날 길을 찾기로 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3) 사람 볼 줄 모르는 이 나라, 난 떠난다
졸업 후 신문사 수습으로 일하다 여자라고 무시해 2주 만에 그만둬…외국 항공사 취업해 로마로 연수
이탈리아 항공사 알리탈리아에 입사해 근무하던 시절의 강효숙 이사.
경쟁률이 8:1이었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합격통지서를 받아든 나는 이제 마음껏 놀아볼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라 믿었다. 그 이유는 고3 물리시간에 책에 머리를 묻고 자던 나를 일으킨 선생님이 “대학 가면 실컷 놀 텐데, 그 시간을 위해 공부하는데 그것도 못 참고 자냐”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나는 고3을 무사히 마쳤으니 대학에서는 신나게 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970년대 대학생에게는 놀 거리라는 게 별로 없었다. 여고 동창의 주선으로 떼 지어 미팅을 나가면, 하던 소리를 또 하고 또 듣고 하는 게 지루했다.
우리 과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 검정고시를 치른 친구들이 있었다. 시골에서 대학을 올 수 없는 형편을 헤치고 입학한 친구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서울에 살던 나는 전혀 알 수 없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일상이 어떤 이들에게는 치열하게 분투해야 얻어낼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1년 내내 검은 반코트 군복을 입고 사는 친구도 있었다. 내 눈에는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어느 눈 오던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서강대 앞에서 대학로의 옛 서울대까지 걸어가며 모든 포장마차에 들러 인사를 했다. 학생증을 받아주는 곳이 있으면 막걸리를 얻어먹고 인사하고 또 걷고 했던, 인심 좋은 시절이었다. 돈은 없어도 호기로 가득한 그때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이 두려움 없이 일을 저지르는 나의 행보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1학년 1학기 말, 1학년 지도교수가 나를 불렀다. 원칙대로 하면 내 성적은 C여야 하지만, A를 줬다고 했다. 내가 그 과목에서 A를 받지 못하면 학사경고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못 다녀?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엄마였다. 엄마는 열심히 잘 놀며 대학생활하는 딸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엄마의 유일한 바람은 막내딸이 ‘청바지를 벗고 얌전한 원피스를 입고 다녔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런 엄마에게 가장 미안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사진반 동아리방에 앉아있는데, 과에서 가장 비호감이었던 남학생이 놀란 듯 말을 건네왔다. 학과 첫 모임때 여학생들 콧대가 너무 세다고 말했다가 전체 여학생들에게 찍혔던, 멋내기 좋아하는 서울 범생이 친구였다. “무슨 일이 있냐. 평소 너와 달리 무척 기죽어 보인다”며 말을 건 그에게 막막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나를 위로하며 영화나 보러 가자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그와의 데이트가 시작됐다. 그 후 나는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건들거리다 때론 치열하게 토론하고 데모하고 연애하며 지냈다.
1973년 4학년이 된 나는 어느 신문사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출근하니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는 재떨이 청소부터 하라고 했다. 그들은 “뭔 계집애가 기자를 하겠다고” 하며 여자인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살벌한 그곳에서 나는 참혹하게 패배했다. 기자의 꿈을 완전히 접고 2주 만에 나왔다. 본격적으로 한국 탈출 작전을 짜는 데 몰입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다. 여자들이 여권을 가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유학을 가거나 해외연수를 보내주는 외국계 항공사에 취업하거나. 당시 유학은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나는 이탈리아 항공사인 알리탈리아(Alitalia) 한국사무소에 발권과 직원으로 입사했다. 입사한 지 6개월 후 드디어 이탈리아 로마로 연수가 결정됐다. 야호! 18가지 서류를 준비해 여권을 받았다. 정보기관으로부터 정신교육과 소양교육도 받았다. 그렇게 어렵게 받아든 여권을 들고 나는 “사람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놈의 나라, 난 떠난다” 하며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4) 로마에서 2주만에 사표… 내친김에 미국으로
현지연수 마치고 귀국 안해,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 신세에 좌절… 한국 대사 도움으로 미국 비자 받아
강효숙 이사가 30대 때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해 한 성당에서 찍은 사진. 아쉽게도 첫 로마 방문 때 찍은 사진은 없다.
스물세 살, 평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더구나 로마로 향하는 국제선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의 벅찬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쿵쿵거린다.
그러나 동트기 전 새벽에 도착한 피우미치노 공항은 어둡고 서늘했다. 노숙자들이 곳곳에 누워서 여행객을 보며 떠드는 모습에 부풀었던 마음은 두려움과 공포로 쪼그라들었다. 생전 처음 발 들인 타지는 외롭고 낯설고 두려운 현실이었다.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중 나온 동남아시아 담당 직원의 안내로 연수가 시작됐다.
신기하게도 아침 빛이 로마에 가득하자 숙소와 직장이 있다는 안도감이 찾아오며 새벽의 공포는 말끔히 물러갔다. 헐리우드 배우 같은 선남선녀들이 오가고 수천년의 기억을 담고 있는 유적지며 아름다운 분수 등의 풍경에 금세 매료됐다. 숨 쉬는 것도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탈리아에서는 가난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2주간 연수를 마치고 나는 서울로 사표를 보내 달라고 부탁한 뒤 인사를 하고 나왔다. “탈출 성공!”
숙소를 현지 유학 중인 지인의 동생집으로 옮겼다. 공동부엌을 쓰는 셰어하우스 타입의 단칸방 아파트였다. 취직해서 이곳에 머물려면 말을 배워야 했다. 페루자에 국제학교가 있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하지만 학교에선 넉 달 후에나 학생을 모집한다고 했다.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넌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니. 돌아갈 곳도 없는데 무슨 일을 이렇게 경솔하게 하니.’ 나는 우주에 덩그맣게 남겨진 외톨이였다. 돌아오니 지인의 아파트 벽에 걸린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를 드러내고 포즈를 취한 모습이었다.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번다는 그녀의 말에 “아,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니구나” 결론 내렸다.
사촌들이 사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 비자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무런 근거 없이 미국 비자를 받을 수는 없었다. 머리를 굴리다 한국대사관에서 추천서를 받으면 1%라도 가능성이 생기리란 생각에 대사관을 찾아갔다. 영사에게 “나는 알리탈리아 직원인데 미국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가려 한다”며 추천서를 써 달라고 청했다. 영사는 미국 비자는 본국에서 받아야 한다며 안 된다고 했다. 거절당하고 돌아왔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실랑이를 하는데 대사가 나오더니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나를 보던 대사는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고” 하고 물었다. 이화여고라고 밝히자 그는 “내 조카도 이화여고 나왔는데”라고 했다. 그 순간 1%의 가능성이 50%의 소망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름이 뭐예요?” 누구라는 말에 나는 “아, 저 그 애 알아요”라고 말했다. 갑자기 대화에 여유가 생겼다. 그분은 부디 비자 받는 데 도움 되길 바란다며 추천서를 써줬다.
추천서를 들고 주이탈리아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 신청을 하고 기다렸다. 한참 뒤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흑인 영사가 들어오라고 했다. 그 역시 비자는 본국에서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애당초 불가능한 것을 시작했으니 안 되면 그만이다’는 심정으로 더듬더듬 내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비자를 거부당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효숙 캉! 비자 스탬프가 찍힌 여권을 돌려받았을 때의 어리둥절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5) 도망 가듯 떠난 뉴욕에서도 새로운 삶의 갈증 느껴
가족들이 항공료와 기타 경비 배상, 엄마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 힘들 때 위로해준 남자친구와 결혼
1980년 결혼한 뒤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
긴장이 풀리면서 다시 세상구경을 하고 싶어졌다. 뉴욕으로 가는 길에 영화에서만 봤던 프랑스 파리에 들렀다. 15일간의 즐거웠던 파리 여행을 뒤로하고 뉴욕으로 출발했다. 치밀하게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일을 저질러 버리는 나의 습관은 타고난 천성이었을까. 그런데도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모든 과정을 보고 계시면서 간섭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나중에 주님을 영접하고야 깨달았다.
내가 로마에서 뉴욕으로 도망가는 동안 한국에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한국을 탈출할 생각에만 몰두하다 보니 나의 무모한 행동이 가져올 파장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연수를 끝내고 도주한 일이 알리탈리아 항공사 한국사무소에서도 얼마나 황망하고 난처한 일인지 전혀 생각을 못 했다. 옳지 않은 일이란 걸 알았기에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계획한 일이었다. 서울의 엄마와 결혼한 언니들이 쉬쉬하면서 항공료와 기타 경비를 배상했다. 엄마는 딸을 잘못 키웠다고,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고, 알았으면 딸을 타지에 보냈겠느냐면서 무수히 사과하셨다고 한다. 그때 엄마의 심경을 생각하면 아직도 죄송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불똥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남자친구에게도 튀었다. 그러잖아도 그의 부모는 나를 며느리감으로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참이었다. 여자애가 다소곳하지 않다고, 외아들을 번듯한 집에 장가보내고 싶었는데 아들 녀석이 영 말을 안 듣는다고 말이다. 내가 뉴욕으로 떠났다고 하니 그 집에서도 ‘그것 보라’며 난리가 났다.
그때는 해외에서 국내로 연락할 방법이 편지나 국제전화뿐이었다. 유럽에서의 이야기와 뉴욕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은 남자친구에게 편지로 써서 보냈다. 하지만 유럽에서 보낸 편지가 한 달 걸려 한국에 도착하던 시절이라 모든 사람에게 난 도망자였다.
어렵게 한국 탈출의 꿈은 이뤘지만, 뉴욕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친척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내가 해 본 일이라곤 6개월간 알리탈리아에서 배운 항공권 발권 업무뿐이었다. 나는 뉴욕 현지의 한국 여행사 중 이화여고 출신 선배가 운영하는 작은 여행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는 일은 단순했다. 고객이 항공권을 사겠다고 하면 대한항공 뉴욕지점에 가서 발권하는 것이었다. 대신 항공권을 10~50% 가격에 살 수 있어 어디든 여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세상구경 좋아하는 나는 그나마 그 덕에 삭막한 뉴욕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2년쯤 일하던 중 대한항공이 49번가 5번 애비뉴의 새 사무실로 이사하며 직원을 모집했다. 뉴욕 노선을 신설하며 야심 차게 뻗어 나갈 때였다. 안면이 있던 대한항공 지점장에게 “저만큼 발권 경력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요” 하면서 지원했다. 대한항공으로 직장을 옮겼다.
사실 뉴욕에서의 삶은 내가 서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얻어낸 만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내가 한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고민에 빠지고 우울해질 때가 많았다. 그때 남자친구와 주고받는 편지가 위로였고 외로움을 견디게 해 주는 보약이었다. 마침내 그는 종합상사의 뉴욕지사로 발령받아 나왔다. 결혼하기 위해 나왔다는 그와 10년 연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우리는 롱아일랜드에 살던 시누이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야외에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떠났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6) 새로운 도전들… 가장 반짝거리던 시절
항공사 직원 특혜로 남미 등 여행… 남편은 독립 후 자기 사업 시작, 회사 일 도우며 두 딸 출산
1987년 뉴저지의 한 공원에서 열린 재뉴욕서강대모임에 참석했다 찍은 가족사진. 이때는 사업과 육아로 바빴음에도 새로운 도전이란 생각에 신나고 즐거웠다.
결혼 후 뉴욕에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남편과 나는 성향이 많이 닮았다. 좋아하는 음식도, 영화도, 패션 취향도. 무엇보다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는 것도 비슷했다. 그래서 답답한 것을 견디기 힘들어 도망치는 나를 그는 잘 이해해줬다. 나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격이 서로 부딪힐 때는 둘 중 하나를 부러뜨리는 치명적인 복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는 ‘뉴욕의 문화를 누리려면 맨해튼에 살아야 해’하며 두 사람 수입의 5분의 3을 신혼집 월세로 썼다. 월급 타는 날이면 한 달에 한 번 초밥집에서 귀한 초밥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한 달을 버텼다. 가난하지만 즐거운 일상이었다. 그제야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라며 안도했다.
뉴욕에 살면 뮤지컬은 필수라고 해서 처음으로 뮤지컬 ‘에비타’를 관람한 날, 나는 ‘이런 세계가 존재하다니’하며 잠을 설칠 만큼 흥분했다. 그 후 새로운 뮤지컬과 음악 공연을 보기 위해 돈을 모았고 뉴욕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새롭게 체험하는 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항공사 직원은 항공권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며칠의 여유가 생기면 남미 카리브해 유럽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어른들은 우리를 보며 “돈 모아 집을 사야지…”하고 걱정했지만, 우리는 스튜디오 원룸에 살면서 세상 구경하는 것에 모든 의미를 두고 살았다. 누구든 삶에서 놓치고 싶지 않아 할, 꿈 같은 시간이었다.
1982년 9월 큰딸 수현이가 태어났다. 이리도 신기하고 예쁜 아이가 내 아이라니, 실감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딸아이를 보러 온 선배가 “아유, 예뻐라. 그런데 이 아이가 예쁘다고 네가 만지면 만질수록 아이는 네 그릇만 해져”라고 했다. 아이의 정신을 담을 그릇에 관한 이야기임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는 “아이는 네 소유물이 아니야. 네 작품도 아니고 하나님의 작품이야. 그분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보라며 교회에 나오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싫다며 완강히 거절했다. 그럴 때 이런 멋진 말을 나의 뇌리에 남게 해준 그 선배에게 지금도 참 고맙다.
수현이가 태어나고 나를 돕기 위해 친정엄마가 미국으로 건너오셨다. 손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시면서 엄마는 당신의 삶 중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손녀딸을 향한 사랑이 그분을 그리도 행복하게 한 것이다.
남편도 아이를 기르는 가장으로 모드를 바꾸고 회사에서 독립해 원단사업을 시작했다. 85년 둘째 수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나는 배가 불뚝한 상태로 수십 개의 원단 조각을 전단지에 잘라 붙였다. 그러면 남편은 그 전단을 들고 7번가 패션 애비뉴에 있는 수백 곳의 디자이너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영업을 시작했다.
임신 중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도 무엇을 새로 시작한다는 설렘에 힘든 줄 몰랐다. 서로를 이해하는 내 편이 함께 있다는 것에 든든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수진이가 태어나자 시어머니도 뉴욕으로 오셨다. 두 할머니의 사랑으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할머니들이 키워주시니 별 어려움 없이 안심하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다. 남편의 사업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7)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삶 깨달아
집·돈·아들에 대한 미련보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을 되도록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
미국 뉴저지의 아파트에서 큰 딸 수현이와 함께 직은 사진이다. 사업과 육아로 바쁜 와중에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던 시절이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 보금자리를 뉴욕 맨해튼의 스튜디오에서 뉴저지의 정원이 있는 2층짜리 나지막한 렌트 아파트로 옮겼다. 미국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봄날 저녁 건너편에 살고 있는 부부와의 대화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그들은 아이가 곧 1살이 된다며 집을 고치고 있었다. 나는 내 집도 아닌, 빌린 집을 수리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들에게 물었다. “렌트한 집을 왜 고쳐?” 내 말을 들은 그들은 나보다 더 놀라서 내게 반문했다. “왜 이 집이 내 집이 아니야? 한 달을 살아도 그 동안은 내 집인데, 어떻게 그대로 살아? 너희는 취향대로 고쳐서 살지 않아?” 그리고 한 달 뒤 집수리를 마친 그의 딸 생일잔치에 갔다. 얼마나 아담하고 이쁘게 바뀌었던지, 연신 감탄을 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깨달음이 내 삶에 깊숙한 영향을 주었다. 그때 나는 집 돈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내게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삶을 깨닫게 한 것이다.
이는 내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때는 몰랐지만 훗날 하나님을 믿게 된 뒤에 “모든 일이 네 손에 달린 것처럼 최선을 다하고 모든 일이 하나님 손에 있는 것처럼 기도하라”는 기독교 신앙과 통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은 그래서 내게 유독 큰 힘이 됐다. 둘째딸 수진이의 사고 이후 줄곧 나아질 것이라 희망하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을 되도록 즐겁게 살자고 마음먹게 해 줬다.
남편의 원단사업을 돕기 위해 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미국 섬유시장에 수입된 원단의 90% 이상이 일본 원단이었다. 그 시장에 한국 원단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0년대 말 한국 섬유가 급성장하며 우수성이 인정받고 우리 회사도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들에게 그들의 디자인에 어울릴 만한 원단을 소개하면 그 원단이 유행의 주축이 됐다. 그때 매출이 증가하기 시작해 직원 20명을 채용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뉴욕이 패션 광고 증권의 성지라 불리던 시절, 패션업계에선 물 밑에서 쉴 새 없이 노를 젓는 수고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움의 절대치를 뽑아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던지. 이런 노고를 거쳐 나온 작품들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42번가에 있는 뉴욕 도서관 등에서 패션쇼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최고의 장소에서 한땀 한땀 빚은 최고의 작품들이 보여질 때의 감동은 쉽게 누를 수 없었다.
아이들도 건강히 잘 자라고, 사업도 재미있게 성장하며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사이 여기저기서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학교 행사가 많아졌다. 남편은 바이어를 만나야 한다거나 출장을 가여 한다며 참석하지 않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뭔가 맘이 편치 않은 듯 말수가 적어졌다. 함께 살던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의 골도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8) 상처만 남은 부부… 난 다시 도망가기로
양가 어머니 두 분 모시고 살다 관계 무너져 엄마 집 구해 드려… 남편의 외도에 정리할 기회 줘
두 딸을 돌봐주신 친정 어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뉴욕의 한 식당에서 찍은 사진. 어머니는 두 손녀딸을 돌봐 주시면서 많이 행복해하셨다.
생활이 여러모로 안정돼 행복의 조건이 갖춰졌다고 생각할 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겼다. 삶은 나의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으나 친정엄마의 거취 문제로 남편과의 불화가 시작됐다. 아들이 없는 아쉬움과 설움을 갖고 살던 친정엄마는 시원시원한 막내 사위를 참 좋아하셨다. 사위가 마음 놓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라고 모든 살림을 다 해주면서도 늘 사위에게 고마워하는 분이셨다. 시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뒤 시어머니가 오시면서 우리는 양가 어머니 두 분을 모시고 살게 됐다. 진명여고 스케이트 선수를 지낸 시어머니는 야망도 꿈도 많았던 신여성이셨다. 친정엄마보다 나이도 14살이나 어리셨다. 엄마는 그런 사부인을 늘 깍듯하게 대하셨다. 시어머니가 거실에서 성경책을 읽거나 뜨개질하는 동안 엄마는 늘 부엌에서 바빴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양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뒤틀리고 요동쳤다. 괜스레 엄마에게 “그러지 말라니까요”하며 짜증도 많이 냈다.
하루는 엄마가 서울로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엄마가 서울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시어머니가 퉁명스레 건네는 말이 엄마를 많이 아프고 서럽게 했다. 내 가슴은 무너져 내리는데 그 말을 듣는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남편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배신당한 것 같던지, 그동안 쌓아뒀던 섭섭함과 엄마를 향한 연민이 분노로 바뀌어 남편에게 향했다. 우리 곁이 봄볕같이 따스하고 행복하다는 엄마, 먼 타국에서 자리 잡게 도와준 엄마를 그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었다. ‘누구도 건드리지 마라, 내가 엄마를 지킬 거야’ 하면서 상처받은 엄마를 어떻게 위로할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중국산 제품들이 무서운 기세로 일어났다. 우리는 홍콩의 거래처에서 중국 섬유를 수입하고 있었다. 미스터 시우(Siu)라는 거래처 대표가 미팅을 위해 몇 차례 뉴욕을 찾았다. 그는 우리 집에 와서 여러 차례 식사하며 친한 친구가 됐다. 나를 여동생 대하듯 하며 언제든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보증금을 빌리고 나머지는 은행 대출을 받아 엄마가 머무실 아담한 집 한 채를 구입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보란 듯이 엄마를 이사시켜 드렸다. 사위가 마련해준 집으로 알고 계셨던 엄마는 “이래도 되는 거니” 하면서도 무척 기뻐하셨다. 아들을 기다리다 본 늦둥이 막내딸이 자유분방해서 늘 애를 태웠던 엄마에게, 내가 해드린 최고의 효도 선물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남편과 나는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엄청난 상처를 주고받았다. 서로 담을 쌓았다. 사업도 남편은 한국, 나는 중국 쪽을 맡아 따로 했다. 급기야 1993년 남편의 외도 사실이 드러났다. 상대는 일을 잘해서 내가 뽑은 여직원이었다. 그는 1년 전 란제리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연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이나 홍콩으로 출장을 가면 직원들과 함께 파티를 열어 거의 모든 직원이 알고 있었다고, 퇴직하는 직원이 내게 알려줬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외도를 의심해보긴 했지만, 모두가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웠다. 모멸감을 느꼈다. 남편에게 관계를 정리하고 돌아오도록 2주의 시간을 줬다. 기다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이 소식을 들으면 무너지실 것 같았고, 언니들에겐 상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에게는 경멸과 저주를 담은 편지와 이혼서류를 던져줬다. 두 딸과 함께 내가 그나마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홍콩으로 떠났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9) 날 기다려주신 하나님 앞에서 그저 울기만
감정표현이 풍부한 큰딸의 사춘기, 달라진 환경과 아빠의 부재로 고통… 신앙생활 시작하며 딸 이해하게 돼
큰 딸 수현이는 여러 면에서 나를 꼭 닮았다. 사춘기를 겪는 딸과 전쟁을 치르면서 나는 하나님을 만났고 딸과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1994년 여름방학 때 두 아이를 데리고 홍콩으로 이주했다. 몇 년간 파트너로 일한 현지 회사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정착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삶은 녹록지 않았다. 한 달쯤 생활한 뒤 두 딸에겐 엄마의 비즈니스 때문에 홍콩에 머물러야 한다고 통보했다. 다른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큰딸 수현이는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재미있고 즐겁게 하는 아이였다. 감성적이라 울 때도 심하게 울고 웃을 때는 미친 듯이 웃으며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리는 장난꾸러기였다. 아빠와도 서로 좋아 죽는 사이였다. 12살 아이가 하루아침에 아빠도 없이, 재미있게 지내던 학교 친구들도 없이 달라진 환경에서 지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는 나중에 알았다. 당시 나는 상처와 분노로 가득 차 딸의 마음을 헤아릴 틈도 없이 마음이 닫혀 있었다.
수현이 특유의 자유분방함으로 사춘기 반항이 시작됐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미국에 있는 아빠나 친구들과 통화하느라 우리 집 전화는 매일 통화중이었다. 무선전화기 3대를 부숴버렸다. 무섭게 화를 내면 아이가 순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루는 스쿨버스가 도착할 시간인데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갈기갈기 찢은 청바지를 입고 머리카락을 23개로 나누어 고무밴드로 묶은 파인애플 머리를 하고 뒤늦게 나왔다. 모든 짓이 날 괴롭히기 위해 하는 짓 같았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쪽지 돌리고 숙제는 밤 10시에나 시작하니 제대로 해낼 리가 없었다. 성적표는 대부분 C나 D였다. 미술 한 과목만 가끔 A+를 받아왔다. 부를 때면 몇 번씩 불러야 했다. 눈동자를 아래에서 위로 굴려 올리며 온몸으로 싫음을 뿜어내는 딸과의 전쟁이 반복됐다.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질 무렵 세상과 이렇게 담을 쌓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 새로 왔다고 동창 하나가 나를 친절히 대해줬다. 그 친구와 연락하면서 큰딸의 파인애플 머리를 얘기했더니 “녀석, 매우 창의적인데”라고 했다.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 그때 알았다, 긍정의 힘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친구에게 마음이 열렸다.
친구는 내게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웃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안 다녀”라고 답했다. 친구는 “니가 우습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 네게 주시는 선물을 안 받으면 너만 손해잖아”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교회 나가서 기도하면 수현이가 착해질까.” “그럼, 바뀔 거야.”
나는 수현이가 바뀔 수 있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이튿날 새벽부터 교회에 갔다. 마침 열린 사경회의 주제가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어쩜 내가 야곱하고 그리도 같던지, 그런 야곱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니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 1주일간 사경회 내내, 야곱과 다를 바 없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 남의 상처를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하는, 자기밖에 모르는 나를 부끄럽지 않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저 울기만 했다.
40여년간 날 기다려주신 주님! 수현이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수현이의 아픔과 어찌할 바 모르는 황당한 마음이 내게 전해졌다. 나의 예쁜 딸을 이렇게 아프게 했다니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했다. 딸에게 무조건 엄마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미안하다고, 이제부터 너를 이해하려 노력할 테니 도와달라고. 어안이 벙벙해 하는 딸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딸도 울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10) 도망치는 것을 멈추게 한 큰딸의 한마디
홍콩 학교에서 갈등으로 힘든데도 “스스로 해결해 보겠다” 대견한 모습
부모 때문에 하루 아침에 미국 뉴욕에서 홍콩으로 삶의 자리가 바뀐 뒤 두 딸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큰딸 수현이와 작은딸 수진이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다.
며칠 뒤 학교에 간 수현이가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학교에 나 좀 데리러 와 달라”고 했다. 수현이가 홍콩에 온 뒤 처음 내게 걸어준 전화였고 우리를 화해하게 한 첫 실마리였다. 하던 일을 미루고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기죽어 있는 녀석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수현이는 그간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꺼내놓았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친구들과 갈등을 빚던 중 그날은 친구들이 모두 한편이 돼 수현이를 비난했다고 한다.
“난 무조건 네 편이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학교 다니기 힘들면 전학 가도 돼” 하며 위로했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맛난 저녁을 먹는데 수현이가 놀라운 말을 했다. “엄마, 학교는 옮기고 싶은데 그래도 아이들과 잘 해결하고 다음 학기에 옮길래요.” 도망가지 않고 해결하겠다는 딸이 대견했다. 도망가는 나보다 낫게 느껴졌다. 내가 도망가는 일을 멈추게 한 사건이었다. 수현이를 바꿔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마음을 내게 보여주시고 나를 보고 딸을 보게 해 주신 하나님. 그렇게 아버지만의 방법으로 무너진 나를 괜찮다고 일으켜주시는 주님을 만났다.
수현이와 나는 그 후에도 수없이 다퉜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친구가 됐다. 수현이는 성적표 대부분을 C로 장식했지만 어디서든지 당당하고 무슨 일이든 어려워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덤벼들었다. 학업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 외에 관심도 없던 녀석인데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을 보더니 그와 동문이 되고 싶다고 했다. 뒤늦게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클린턴의 모교인 웰슬리칼리지 심리학과에 입학해 미국 보스턴으로 떠났다.
큰딸과 치열한 나날을 보내는 사이 둘째 수진이는 마치 홍콩에서 오래 살아온 아이처럼 자기가 할 일을 잘 감당하며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한 후 행동하고 결론 내리는 이성적인 아이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가방을 멘 채로 숙제를 끝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정확히 9시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에 성장한다는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고기반찬을 꼭 올려달라고 했다. 그 덕분인지 수진이는 173㎝의 훤칠한 키에 보기 좋은 이목구비로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고등학교 때는 모델도 하고 연극공연 무대에도 섰다. 동시에 학업도 우수해서 학생회장을 지냈다. 학부형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딸을 어떻게 키웠냐고 물어와, 내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늘 나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본인이 다 알아서 처리하고 내가 참견하고 싶어도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수진이는 한편으론 내게 버겁고 다가가기 힘든 딸이었다. 어느 날 A+가 가득한 성적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기에 “우리 딸, 천재 아니야”했더니 정색하며 반기를 들었다. “엄마, 난 그런 소리가 제일 듣기 싫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아? 언니가 엄마 속을 썩여서 내가 엄마를 기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엄마는 내겐 관심도 없이 언니만 사랑하잖아.” 이때 잘 알아들었어야 했다. 수진이라고 가슴에 멍이 없었을 리 없다는 것을. 큰딸은 반항으로 엄마에게 자기를 알아달라 한 것이고, 둘째 딸은 잘해서 칭찬받는 것으로 자기를 알리려 했던 것이다. 서로 표현방법만 달랐음을 그땐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11) 사춘기 두 딸 키울 때 교회 공동체가 큰 힘
분별력 없이 열성 다한 신앙생활 믿었던 친구의 거짓말과 배신으로 나를 멈추고 성숙해지는 계기 돼
홍콩제일교회에서 중국으로 단기선교갔을 때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강효숙 이사다.
수진이의 마음을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한 건 나중이었다. 수진이는 모델을 몇 번 한 뒤 먹는 것, 입는 것에 신경 쓰더니 이내 친구들의 말 한마디에도 감정의 굴곡이 많아졌다. 주위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수진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봤지만, 싸늘한 반응이 돌아와 제대로 씨름도 해 보지 못했다.
수진이는 미국 예일대에 보란 듯이 합격했고 코네티컷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저 자랑스럽기만 했던 딸이니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갖고 살았는지 잘 모른 채, 그저 모든 것을 알아서 잘하겠지 하며 떠나보냈다.
그 아이의 마음속 멍이 그리 깊은 줄 몰랐다. 나중에 그런 사고가 날 줄은 꿈도 못 꾸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성숙했더라면 세상이 주는 성공이라는 가치에 도취해있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상에서 성공해야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위만 바라보고 달리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 자신을 돌아온 탕자로 여겨 기쁘게 생각했다. 하지만 수진이의 사고 후에는 집 나간 탕자보다 집에 남아있는 큰아들에 대한 묵상이 더 깊어지고 가슴이 아프다.
홍콩에서 혼자 사춘기의 두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는 동안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교회 공동체였다. 남편으로부터 독립해 운영한 사업체도 그 시절 홍콩의 호경기와 맞닿아 안정되면서 물질적으로도 풍성해졌다. 그동안 하나님을 부인하던 나를 지켜보며 기다려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해 나는 교회나 성도들을 열심히 섬겼다.
한번 꽂히면 직진하는 내 성격대로 신앙생활을 하던 중 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홍콩에서 나를 처음 전도했던 친구는 사람들을 모아 성경공부, 큐티를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반에 선교헌금 감사헌금도 드리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손발 걷고 친구를 도왔다. 예수님을 알게 해 준 기쁨으로, 분별력 없이 열성을 냈던 것이다. 그런데 1년쯤 지나 여기저기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헌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선교할 목적이라며 여러 사람에게서 돈을 빌려 갔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도 있었다. 이화여고와 연세대를 졸업했다는 친구의 말도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 친구와 엮여 있는 상황에서 인간적으로 참 당혹스러웠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이 일어난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다니,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참으로 바쁘셨나 보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목회자의 지도 없이 이뤄지는 활동이 위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후 홍콩제일교회 김성복 목사님으로부터 차근차근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제자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의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교회 비전에 따라 중국 소수민족 단기선교를 다니며 다른 세상을 체험하고 성숙해질 수 있었다. 2001년 교회에 강사로 오신 최일도 목사님을 통해 기독교 영성을 접하고 영성수련프로그램 참석차 서울을 자주 방문하게 됐다.
그새 수진이는 대학을 졸업한 뒤 비즈니스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상해로 발령받아 그곳에 있던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1년간 재미있게 지냈다. 그러던 중 한 친구의 추천으로 HSBC의 글로벌매니지먼트 부로 입사했다. 수진이는 영국 런던 근교의 소도시에서 훈련받기 위해 2008년 9월 런던으로 떠났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12) 외로움 견디며 우울증으로 지쳐가는 작은 딸
잘 웃고 친구들 좋아하던 둘째 딸 수면 부족·대인 기피로 힘들어해 사표 내고 집에 돌아가자고 설득
둘째 딸 수진이(왼쪽 두 번째)는 2007년 미국 예일대를 졸업했다.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와 큰딸 수현이뿐만 아니라 아이들 아빠도 자리를 함께했다.
수진이는 2008년 9월 HSBC의 글로벌 매니지먼트 연수를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1개월간 연수를 끝낸 뒤 친구들이 있는 상하이로 발령받기를 원했지만, 런던 본사에 남게 됐다. 가족들은 실력이 좋아 본사에 남은 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한 보름쯤 지났을까. 녀석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잠이 안 와서 미칠 것 같아.” 그러고는 그냥 울었다. 퍼뜩 수진이가 혼자 있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 하던 초등학교 때 일이 생각났다. 2박 3일 마카오로 수학여행 가던 날, 엄마가 자원봉사부모가 돼 꼭 함께 가달라고 했다. 낮에 아이들 틈에선 쿨한 척하느라 엄마를 본 척도 하지 않다가도 밤이면 몰래 내 방에 와서 겨우 잠들던 아이였다. 물어보니 하루에 1~2시간밖에 못 잔다고 했다. 나도 불면증에 시달려 봤기에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바로 알았다. 그 길로 런던을 향해 떠났다.
수진이의 상태는 상상외로 피폐해져 있었다. 웃음 대신 우울함이 가득한 수진이의 얼굴은 많이 지치고 상해 있었다. 수진이는 오래된 건물과 골동품 가게가 많은 동네, 영화로도 유명한 노팅힐의 3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대낮에도 침침한 복도는 스산했고 넓지만 휑한 방은 외로움을 느낄 만했다. 먹는 것, 특히 한국 음식을 좋아하던 아이가 매일 한 가게에서 겨우 2~3가지의 샌드위치만 사서 먹고 지내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 외에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듯했다. 파티 초청장들이 집에 이리저리 굴러다녔지만, 늘 혼자 지낸다고 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재미나게 놀던 녀석이었는데 대인기피증이라니…. 우울증도 깊어진 상태였다.
그때 내가 우울증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았더라면 수진이를 대하는 방법이 달랐을지 모른다. 스스로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자책하는 수진이에게 다르게 접근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짙다. 나는 용기를 주고 싶고 힘이 돼주고 싶어서 네게 주어진 환경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누구나 꿈꿔보지만 아무나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특히 이 모든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이렇게 우울해 해선 안 된다고 쉴 새 없이 충고했다.
수진이는 머리로는 알기에, 어마어마한 죄책감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고 호소했다. 사표를 내고 엄마가 있는 서울이든, 아빠와 언니가 있는 뉴욕이든 가자고 애원해도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며 버텼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똑같은 기도를 드리며 함께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런던 전철역에서 본 수진이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인데 죽어있는 듯한 참담한 모습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이를 덮고 있었다. 나는 당장 일을 그만두자고 했다. 혼자 도저히 설득이 안 돼 뉴욕에 있던 수진이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혼했지만 아이들 아빠는 딸들이 있는 홍콩을 오가며 계속 만나고 있었다. 아빠와 언니 수현이까지 합세해 설득하면서 수진이는 2009년 여름 사직서를 내고 미국으로 갔다.
나는 수진이를 데리고 그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네팔이나 아프리카 선교지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뉴욕으로 돌아간 수진이는 영국에서의 삶을 만회하고 싶었던지 세계적인 광고회사 오클리에 다시 입사했다. 자신의 마음을 보듬는 일보다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더 중요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사람들 모두 저마다 삶이 있어 너에게 집중하지 않는다고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이렇게 두고만 보시렵니까.
***[역경의 열매] 강효숙 (13) 화해가 시작될 즈음 맞이한 ‘영원한 이별’
아이들 아빠와 인연 놓지 않으려 노력… 사랑한단 말 못하고 떠나보내 후회
헤어진 뒤에도 일 년에 두 번 어색한 가족여행을 떠나곤 했다. 2008년 바하마 여행 당시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수진이의 우울은 깊어져 갔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고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수진이는몸이 교회에 나와있어도 죽은 것처럼 앉아 있을 뿐, 나아지지를 않았다. 나의 기도도 달라졌다. 나는 2001년 홍콩에 부흥회 강사로 오셨던 최일도 목사님의 영성 수련을 통해 하나님께 내 깊은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기도를 배웠다. 이후 나의 기도는 나를 기다려주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곱게 서술한 기도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수진이를 보면서 “아버지, 어째서 당신 딸을 외면하시나요” “당신은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 맞나요” 하며 감히 하나님께 대들기 시작했다.
두 딸이 미국의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나는 홍콩에서 홀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와 캄캄한 집의 문을 열 때면 왜 그리 서럽던지…. 그때 가장 많이 생각나고 미안한 사람이 애들 아빠였다. 우리가 떠나온 뒤 혼자 어두운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생각했다. 이혼한 뒤에도 온 가족이 1년에 두 번은 함께 여행을 갔다. 내게는 참으로 어색한 여행이었지만 그도, 나도 서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며 청혼까지 한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이 우선이었기에 대학에 보낸 뒤 생각해보자고 미뤄왔지만, 곧 깨달았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은 컸지만, 그와 결혼할 수 없음을 알리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한국을 떠난 지 31년 만인 200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놀라웠던 것은 싫다고 도망갔던 내가 타지에 살면서 뼛속까지 한국사람의 긍지를 갖고 귀국했다는 사실이었다. 일은 잠시 쉬기로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다일공동체 영성 수련 안내를 기쁨으로 감당했다.
수진이의 우울증으로 애들 아빠와 연락하는 일이 늘었다. 2010년 1월 딸들과 함께 애들 아빠의 환갑잔치를 깜짝 파티로 열었다. 그 환갑잔치가 감동이었는지 애들 아빠는 아이들이 추천하는 영성 수련에 참석하기로 했다. 4박 5일 일정을 끝내고 우리는 서로 머리를 조아리고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를 되뇌며 눈물로 사죄했다. 그렇게 우리의 화해가 시작됐다. 하나님과의 화해도 시작돼 그는 주님을 영접했다. 할렐루야! 그는 영성 수련 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간 후에도 서너 번 서울로 찾아와 기독교 영성에 대해 배운 뒤 돌아가곤 했다. 그해 4월 파리에서 영성 수련을 마치면 우리 일행과 합류해 스페인 여행을 함께하기로 할 만큼 가까워졌다.
파리에서 내가 영성 수련을 강의하던 날, 최 목사님이 어서 끝내고 나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큰딸에게서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엄마가 아빠를 꼭 봐야 하니 절대 산소호흡기를 떼지 말라”고 당부한 뒤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에서 죽을 힘을 다해 기도했다. 살려 달라고, 안 된다면 두세 달 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아픔만 준 저 사람을 이대로 보낼 수 없으니 내가 간호라도 할 수 있도록 몇 개월이라도 살려달라고…. 그러나 그는 내가 도착한 다음 날 지구별을 떠났다.
왜 사랑은 이런 암흑 속에서 더 빛을 내는지…. 내 삶의 행보가 거칠고 힘겨웠어도 후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뭐라고 사랑한다는 말조차 건네지 못한 이 어리석은 사랑을 가슴이 무너지도록 후회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14) 가장 한국적인 맛으로 세계인 입맛 사로잡아
한국음식 맛있다는 찬사와 달리 밖에서 대접은 일본식당 선호해… 우리음식과 문화 알리는데 열정
2015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엑스포. 강효숙 이사(왼쪽에서 네 번째)는 콩두 직원들과 일주일간 현지인들에게 한국음식을 소개했다.
남편의 장례식 후 정리를 마치고 수진이와 뉴욕에 머물려고 했다. 하지만 수진이는 엄마가 서울로 돌아가 엄마 일을 해야 자기가 편하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뉴욕에는 큰딸 수현이와 사위가 될 남자친구도 있었다.
당시 나는 육촌동생 한윤주 사장의 모던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홍콩에 거주할 때부터 사업차 서울을 찾으면 콩두에 들러 한 사장과 만남을 이어왔다. 어려서부터 창의적이던 동생은 갈 때마다 매번 “맞아, 바로 이 맛이야” 찬사가 절로 나오는 음식을 내놨다. 우리 어머니들의 고향이 이북인지라 음식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주는, 간이 세지 않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기억 속 그리움을 채워주는 보물을 만난 듯 감동했다.
해외에 살며 한국 문화와 음식이 일본의 위세에 눌려 숨도 못 쉬는 현실에 약 오르고 속상할 때가 많았다. 1980년대 중반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일본의 가부키 공연은 전석 매진될 만큼 미국인을 사로잡았다. 일본의 대기업은 자국민 예술인을 후원하는 동시에 미국 내 예술단체에도 어마어마하게 기부를 하며 국력을 과시했다. 일본식 스시집에 가는 건 뉴요커에게 또 다른 문화를 접해보는 자랑거리였다. 가끔 디자이너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면 ‘한국음식이 어쩜 이리 맛있냐’는 찬사를 들었지만, 밖에서 대접하려면 다들 일본 식당을 선호했다.
한 사장은 1999년 대학 졸업 후 영국에서 타고난 손재주와 예술 감각을 살린 쥬얼리 디자인으로 성공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우리 음식과 문화를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알릴지 고민했다. 요식업 경험은 없었지만 투지를 앞세워 2002년 서울 삼청동에 콩두를 열었다. 소중한 한식을 소개하고 싶어 열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구했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민족 음식의 근간을 지켜온 온 것은 콩을 발효시킨 간장 된장 고추장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장의 근원인 콩은 누구나 쉽게 발음할 수 있었다. 식당 이름을 ‘콩두’로 정했다.
한 사장과 의기투합해 멋진 일을 해보고자 2008년 콩두에 합류했다. 콩두에선 정직하고 깊은 맛, 정갈하고 단아한 플레이팅으로 손님에게 행복한 시간을 안기고자 최선을 다한다. 주중 비즈니스 차 왔던 손님들이 부모님 모시고 다시 온다고 할 때는 우리의 정성과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다. 한번은 70대 중반의 여고 동창 어르신들이 예쁘게 멋을 내고 오셨다. 그중 한 분이 “굴비 한 마리를 온전히 내 몫으로 먹은 게 내 평생 처음이야. 고마워” 하시며 눈시울을 닦아내셨다. 춥고 배고픈 시대에 희생하며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 모습에 코끝이 시려 왔다.
입소문이 나며 기업 행사의 케이터링(출장연회)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별화를 위해 행사의 목적과 콘셉트에 어울리는 음식, 그릇, 인테리어를 제공한 데 감명받은 분들이 많았다. 여러 기관의 요청으로 패션쇼, 국제 체육대회, 국제변호사대회, 다보스포럼, 밀라노엑스포, 모스크바 시민행사 등에 참여했다. 몸은 파김치가 됐어도, 그토록 소망하던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리는 데 우리가 사용된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2011년 10월 10일 경북 경주에서 열리던 유엔 세계관광기구(WTO) 행사 둘째날 밤. 행사가 끝난 뒤에 보니 큰딸로부터 6통의 다급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들었다.
“엄마! 수진이가 죽진 않았는데…”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 밤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 15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두려웠던, 공포로 짓눌려 숨쉬기도 힘들었던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15) 2주간 생사 넘나들던 딸… "주님, 살려만 주세요"
수면제 과다 복용… 구급차 도착했을 땐 이미 호흡 없어 심폐소생술 8번 시도 끝에 숨쉬어
큰딸 수현이의 아들 돌잔치 때 수진이(왼쪽)와 가족들이 함께 찍은 기념 사진이다. 가족 모임을 비롯해 수진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항상 같이 데리고 간다.
수진이는 영국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후 정신과에 다니며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이 수진이의 발목을 붙들었다. 2011년 5월 언니 수현이가 결혼한 뒤 혼자 생활하던 중이었다. 10월 10일 그날 밤에도 언니와 전화를 하다 잠이 안 온다며 걱정하더니 수면제를 정량보다 더 복용했던 모양이다.
나는 지옥 같은 비행 끝에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의 설명으로는 새벽 2시쯤 수진이가 911로 전화를 걸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뒤 쓰러졌다고 한다. 전화번호를 추적해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는 30분이 걸렸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해보니 수진이는 아파트를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을 쉬지 않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구급대원들은 보통 2번, 많으면 4번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고 한다. 그런데 수진이 기록엔 8번을 시도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한 뒤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고 돼 있었다. 수진이는 산소호흡기를 꽂고 2주간 생사의 문턱을 오갔다. 나는 그저 "살려만 주셔요. 살려만 주십시요" 소리 지르고 울며 불며 기도했다.
2주 후 이젠 생명에 지장이 없다며 호흡기를 떼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여쭤볼 수 있었다. "하나님, 이 아이의 우울증을 좀 거둬달라고 기도했는데 무슨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아버지, 앞으로 어찌 해야 좋을까요." 계속 물으며 기도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묻고 물어도 잠잠하신 하나님…. 어느 날 내 마음 저 밑에서 드는 생각이 "그렇게 괴로워하던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수진이의 영혼이 더 편하지 않을까"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하나님의 음성이라 믿었다.
그 후 많은 날을 울며 지냈다. 운다고 수진이가 회복돼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 매일 이렇게 징징거리며 사는 게 바람직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진이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수진이를 진료한 유명한 유대인 뇌전문의가 설명했다. 인간의 뇌는 우리의 얼굴과 같이 어느 누구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아 다른 장기처럼 X-레이나 정밀 검사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10~15% 알고 있는 수준이라고, 그래서 비슷한 환자들의 데이터를 모아 약물치료와 재활치료를 겸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나머지는 그분의 소관이라고, 기적은 있다고 얘기했다.
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소망을 붙들었다. 마음을 되잡고 수진이의 영은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텐데 그럼 난 어떤 태도로 이 아이를 대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수진이는 평소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하던대로 유쾌하고 씩씩하게 살기를 원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마음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점점 옅어졌다. 이제 눈 뜨는 것 하나, 재활 받으러 가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것 하나,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내 마음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었다.
두 달 쯤 되도록 아이가 눈으로 보지 못했다. 안과의사는 사람이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7000여개의 신경이 조화롭게 배치돼야 하기 때문에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아예 못볼 수도 있다고 했다. '아, 7000개의 신경이?' 동시에 내가 이제껏 보고 듣고 먹을 수 있는 모든 일상이 기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졌을 때만 기적이라고 기뻐했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니 자극에 눈을 깜빡이며 시력이 회복됐다. 그때의 감사는 보통 때의 감사와는 차원이 다른 깊고도 깊은 감사였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16) 소중한 딸 보듬고 서울로 돌아오다
보험회사, 요양원으로 옮겨달라… 아픈 딸 하루 2시간만 볼 수 없어
강효숙 콩두 이사(왼쪽)가 지난해 여름 간병인과 함께 딸 수진이를 데리고 경기도 남양주 한강변으로 산책을 가서 해바라기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수진이가 쓰러진 뒤 아픈 자녀를 데리고 사는 부모들에게 값싼 동정심을 보였던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깨달았다.
병원 생활 넉 달이 지나니 보험회사에서 병원치료비를 더 지급할 수 없다며 요양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곳에선 하루에 2시간만 면회할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병원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어느 부모가 26세, 아직 펴보지도 못한 소중하고 예쁘고 아픈 딸을 하루 2시간밖에 보지 못하고 살 수 있겠는가.
내가 간호하기로 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나를 돕기 위해 서울에서 뉴욕으로 달려온 친구와 둘이서 173㎝나 되는 아이를 매일 씻기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일광욕을 시켰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른다. 엄마의 힘이었을 것이다.
병상의 수진이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많은 분이 오셨다. 그때 아픈 사람 찾아가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게 있다. 기도해주러 오신 건 고맙고 반가운데, 간혹 이런 얘기들을 했다. “수진이가 평소에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았나 봐요.” 수진이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뱉어낸 말인데, 이 때문에 수진이가 더 아팠겠구나 싶어 너무 미안했다. 환자의 보호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자책하는 마음에 눌린다.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도대체 이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일까, 왜 아픈 사람 앞에 와서 자기 믿음을 자랑할까 하는 맘이 들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기도한다고 다녔겠구나’ 깊이 후회했다.
주위에서 도움의 손길을 구하기도 어려운 가운데 1년을 전전긍긍하며 버텼다. 하루는 병원에서 보험회사로 보내야 할 고지서가 착오로 우리 집으로 날아왔다. 2자 다음에 붙어있는 0을 세어보니 200만 달러, 한국 돈 20억원이 넘었다. 어마어마한 치료비에 풀썩 주저앉았다. 보험회사에서 지급한다고 해도, 그 천문학적인 숫자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2012년 11월 수진이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언니들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수진이는 사고 후 처음으로 10분 정도 미소를 보였다. 언니들은 수진이가 이모들을 알아본다고 울고, 나는 미국에서 늘 노심초사했던 나처럼 녀석도 긴장했었구나 하는 마음에 안쓰러워 울었다. 내 나라, 내 땅이 주는 푸근함을 수진이도 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울에 온 뒤 6개월 동안 한방, 민간요법, 마사지 테라피 등 사람들이 귀띔해주는 모든 것을 해봤다. 신촌세브란스병원과 로이병원을 오가며 재활도 받았다. 수진이를 환자로 살아가게 하기보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게 하고 싶어서 자그마한 집을 장만했다. 1층은 수진이 공간, 2층은 주방 겸 식당, 3층은 나의 공간이다.
수진이는 턱과 입안의 근육이 경직돼 입으로 먹지 못한다. 대신 위장으로 직접 연결되는 튜브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는다. 수진이를 6년째 쭉 돌봐주시는 간병인 이모님 두 분이 계시다. 나처럼 모두 남편을 떠나보냈다. 세 명의 과부와 한 명의 꽃다운 청춘이 살아가는 집에선 매일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일상생활을 하며 편안해지는 수진이의 표정 변화에 우리는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동대문시장으로 구경도 가고 인사동으로 산책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가며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간다.
뉴욕에선 내가 없으면 절대로 이 아이를 돌볼 수 없을 것 같아 지쳤고 사람들 때문에 마음의 상처도 입었다. 이 모든 것을 말끔히 치유해주신 이모님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는 또 다른 기쁨이다. 아픈 자녀와 살면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과 사랑의 깊이는 아주 깊고 강력하다.
***[역경의 열매] 강효숙 (17·끝) 정답 없는 삶, 늘 믿는 사람답게 살 수 있게 기도
삶을 돌아보면 어떤 길 선택하든 그 길에서 최선을 주시는 하나님… 세상에 두려운 것 없이 자유로워
지난해 3월 미국의 팀 켈러 목사가 한국에 와서 ‘고통에 답하다’ 라는 주제로 행사를 열었다. 강효숙 콩두 이사가 패널로 참석해 그간의 삶과 고통의 의미를 나누고 있다.
수진이를 데리고 서울에 돌아온 이후 만남의 축복이 풍요해졌다. 수진이와 거의 같은 상태인 사모님을 13년째 돌보고 계신 김병년 다드림교회 목사님과 교제를 시작했다. 명절이 되면 간병인 이모님들이 집에 가신다. 그때 목사님은 늘 자녀들과 우리 집을 찾아 함께 명절을 지내 주신다. “환자가 있는 집은 명절이 제일 외롭지요” 하시면서 말이다. 그럴 땐 주님이 찾아오신 듯 푸근하다.
3년 전엔 친구도 아니고 하는 일도 종교도 세대도 다른 4명의 남녀노소가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신기하리만큼 조화롭고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그 네 명과 화가 두 분이 합류해 협동조합 ‘누군가의 집’을 세웠다. 우리 집 지하 골방을 문화공간으로 삼아 전시도 하고 강연도 들으면서 귀한 만남의 인연을 이어간다. 미국이나 홍콩에서 흩어져 살던 친구들도 찾아와 같이 울다 웃다 지낸다. 어려울 때에 손 내밀어 주는 우정은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리는 생수 같다.
돌아보면 나는 전문성 없이 예상치도 않게 이 일 저 일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해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것 하나 헛됨 없이 모던 한식 레스토랑 콩두 이사로서 한식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녹여 쓸 수 있게 하셨다. 아버지! 크신 주님을 나는 측량할 수 없지만 어떤 길을 택하든지 그 길에서 최선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뇌병변 1급 판정을 받은 우리 수진이. 나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절망의 터널에 갇혀 있던 시간. 나는 그동안 나의 알량한 체험으로 “당신을 잘 아는 것처럼 교만했지만 난 당신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때 나에게 환히 드러나 보인 것이 십자가 예수님이셨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 아들을 버리기까지 나를, 수진이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감당할 수 없이 깊숙이 다가왔다. 그 사랑의 힘으로 터널을 나왔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으니 세상 두려운 것 없이 자유로워졌다.
나의 두 딸은 너무도 달랐다. 지금도 어떻게 키워야 했는지 모르겠다. 삶에 정답은 없다. 누구 하나 똑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밖으로 향했던 우리의 많은 시선을 이제는 나의 내면으로 돌려, 상처 난 곳을 보듬고 지친 나를 위로해야 한다. 소원하기는 내 딸과 손주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당당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항상 마음에 품고 있는 고린도후서 6장 8~9절 말씀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외치고 살았다. 하나님은 늘 우리 삶의 퍼즐을 맞추어 가신다. 항상 기쁘고 감사한 빨강색만 원했지만, 그분의 작품에는 까만색 퍼즐도 끼워 맞출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우리 삶이 끝나고 그분의 심판대에 섰을 때 보여주실 걸작품을 기대한다.
아픈 아이를 둔 모든 엄마의 마음처럼 나 또한 우리 아이보다 하루 더 살다 죽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시간이 와서, 하나님이 클릭하시면 수진이가 놀랍게 깨어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다. “하나님, 내가 아직은 이런 상태로 수진이를 누구에게 맡기고 가기엔 두려움이 많아요. 그러니 제가 가기 전에 하나님이 일 좀 해주세요.” 오늘의 시간도 인내하며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기를 기도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