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헌신의 모델
삼상 6 : 1- 16. 2012. 1. 5.
성경에 보면 종들 가운데 칭찬을 듣는 종이 이었고 책망을 듣는 종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은 중간은 없다. 책망과 칭찬은 생과 사, 성공과 실패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마 25:28-30]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위의 말씀은 주의 종들에 대한 미래의 심판이기도 하며 현실의 종들에 대한 마음이기도 하다. 각각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었는데 남긴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했고 남기지 않은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했다. 그리고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익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다.
달란트를 받은 두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열 달란트로 네 달란트로 남겼다. 주인이 계산할 때 남긴 것만 종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본전 까지 열 달란트 모두 주었다. 종들은 주인을 위해 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충성 했는데 결과를 보니 자기를 위해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받은 자에게 주라고 했다. 열 달란트 받은 자는 열 달란트만으로도 감사 한데 한 달란트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주라하니 자신에게 열 달란트나 받았으니 족하다고 했다. 그러나 주인은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주 안에서 일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인데 나에게 재능과 직분을 주신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나의 신앙을 위하여 말씀만 하시고 행하는 대로 모든 결과는 나에게 돌려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했다.
왜 주님의 일을 하는데 내가 충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주님의 일이니 주님이 알아서 나를 충성하라고 부탁하고 명령해야 할 것인데 왜 충성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는가? 그것은 그 충성이 바로 위의 달란트 비유처럼 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충성 한 것이 결과는 모두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충성된 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잠20:6.많은 사람이 각각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 랴
충성이란 말은 충성(忠誠)忠- 충성 충, 곧을 충, 이다 (誠-정성 성. 믿을 성, 공경 성, 진실 성, 살필 성, 이다. 충 (忠 =中 +心) 성 ( 誠 +言 +成) 마음 중심으로 말씀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충성된 자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자를 말한다.
충성이란 피스테 클레로스(πιστε κληρος) 믿고 맡기다. 인데 충성된 자라는 말은 어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를 말한다.
본문 말씀은 충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귀한 말씀이다.
타락한 엘리제사장으로 인하여 불레셋 부족에게 빼앗긴 법궤가 다시 택한 백성을 찾아 벧세메스 여호수아의 집에 이르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왜 충성해야 하는 가를 잘 깨우쳐 주고 있다.
이 수례에 실은 궤가 화(禍)복(福)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불레셋 부족이 이 법궤를 빼앗아 자기들이 섬기기 위해 그들이 섬기는 아스돗 다곤 신당에 모셔 놓았다. 그런데 다곤 신상이 모두 파괴되고 그들이 거주하는 아스돗은 질병의 재앙이 일어났다.
(삼상 5:6)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 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그래서 이 재앙이 요인 여부를 알기 위해 에그론 지역으로 옮겼다.
그 지역도 재앙이 일어났다.
(삼상 5:10)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그래서 방백들을 모으고 의논한 결과 다시 돌려보내야 산다는 결론 하에 그의 백성에게 돌려보내는 말씀이다.
[삼상 5:11-12]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하나님의 법궤는 아무나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이 택한 백성만이 모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수례에 실은 법궤는 택한 백성들에게는 도움을 주고 은혜를 입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화를 내리는 법궤이다. 그의 택한 백성이 비록 타락해서 법궤를 소홀히 하게 했지만 끝가지 택한 백성을 찾는 법궤이고 보니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법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례에 실린 법궤는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이 법궤는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삼하 6:10-11]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벧세메스로 온 법궤는 바알레 유다(기략 여아림 옛 명칭)에 70여 년간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의 성막에 거하여야 할 법궤가 거할 처소가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윗이 이것을 깨닫고 궁으로 모셔오려 했다. 세 수례를 만들어 실고 오는 중에 법궤를 실은 소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발이 걸려서 뛰어서 수례가 흔들리게 되자 제사장의 아비나답의 손자 인 제사장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다. 그런데 그 법궤를 붙든 웃사가 그 즉시로 죽는다.
그 이유는 법궤는 수례에 실어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제사장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고 또한 법궤에 직접 손대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흔들려도 법궤는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죽은 것은 이 모든 율례를 잘 알기 때문에 그 율례대로 행해야 했다. 그런데 그 율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의미를 알지 못하는 다윗은 두렵기도 하고 법궤를 메어 오는데 재앙을 내린대 대하여 과가 났다. 그래서 중단해 버리고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한지 3개월이 되었다. 그 3개월 법궤를 모시고 있었던 오벧에돔의 가정이 소문 날 만큼 복을 받았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모셔오게 된다. 그러기에 수례가 실은 법궤는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었다.
불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자기 신전에 모셨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신의 하나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신과 동일하게 섬기려는 의도에서이다. 왜냐 하면 이 법궤는 능력이 있는 법궤인 것을 이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법궤를 두는 곳마다 재앙을 내렸다. 그래서 법궤의 능력 여부를 알기 위해 새 수례를 만들어 보내게 되었다.
신앙생활이란 법궤를 실은 수례를 끌고 가는 것이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며 수례는 교회이다. 그리고 소는 성도들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이루셨다.
(계 1: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5: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성경은 믿는 자는 마땅히 주의 일꾼이라 여길 것이며 주의 일꾼의 기도는 충성이라고 했다.
[고전 4:1-2]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된 일군은 바로 법궤를 실은 두 마리 암소와 같이 수례를 끄는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벧세메스 소처럼 충성하는 자를 통하여 그의 큰 뜻을 이루시고 그런 자들을 축복 하시는 분임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헌신을 요구 하시는 것은 이 충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에게는 복을 주시는 방편인 것이다.
1. 진정한 헌신은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법궤를 끌고 가는 소는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소를 선택했다.
삼상6:7.그러므로 새 수례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례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떼어 집에 돌려보내고.
세상 수례는 멍에를 메어본 경험 있는 소로 이어야 한다. 멍에 메 보지 않는 소는 수례를 끌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궤를 실은 소는 멍에 메 보지 않는 소를 택했다.
세상 수례는 주인의 생각대로 소의 생각대로 길들은 대로 경험대로 가지만 하나님의 법궤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며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며 인간의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멍에 메어 보지 않는 소를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를 끄는 주의 일꾼은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순종이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순종이다. 자기 마음대로 열심하고 자기 생각대로 충성하는 것은 자기에게 충성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진정한 헌신은 성령에 이끌리어 자원하는 것이다.
삼상6:9.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법궤를 실은 수례를 끄는 소는 끄는 사람이 없이 벧세메스로 가고 있다.
하나님은 법궤를 메고 가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벧세메스로 가는 수례 뒤에는 불레셋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법궤가 소를 끌고 가는지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 소는 법궤의 의 지시를 따라 목적지를 행하여 잘 가고 있었다.
진정한 헌신은 마음에 성령의 감화를 받아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시키지 않아도 자원하여 능동적으로 일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때문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교회 일은 아버지의 일이고 나의 주인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보면 자원하여 일하는 모습이고 그로 하여금 그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증거 된다.
이런 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하나님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관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3. 조화를 잘 이루어 일한다.
삼상6:10.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수레에 쓰여 진 소는 두 마리이다 법궤는 돌비가 들어 있는 궤짝이다 법궤의 무게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 돌비는 모세가 양손에 메고 다닐 수 있는 무게이기 때문이다. 소 한 마리의 힘은 1000 키로 이상의 무게를 끄는 힘이 있다. 두 마리면 2000 키로 이상의 무게를 끄는 힘이 있다. 그런데 불과 2사람이나 네 사람이 어깨에 멜 수 있는 궤를 실은 수레를 소 두 마리에 실은 뜻이 무엇인가 ?
하나님의 법궤는 혼자서 메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만 잘하는 것이 충성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나 혼자서도 잘 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과도 더불어 잘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서 잘하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져 버림을 받게 된다. 교회 일은 적은 일일 지라도 더불어 하모니를 이루어 하는 것이다.
[시 133:1-3]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4. 충성된 종은 체험적인 확신이 있어야 한다.
삼상6:11.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이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례위에 실으니
수레에는 독종의 형상이 담겨 있다 독종의 형상은 나님께서 이 재앙을 내렸다는 증거이다 이 법궤는 능력의 법궤이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는 재앙의 법궤이다. 이 법궤는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찾으시는 법궤이다. 라는 증거의 형상들이 실려 있다.
주님의 법궤를 끌고 가는 일꾼들은 말씀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능력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능력의 확신이 있을 때 어려운 장해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 지키며 충성할 수 있는 것이다.
다메섹에서의 사울은 혹신이 있기에 즉시 사역을 시작했다.
(행 9: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확신이 있었기에 유대인들의 박해에 두려워하지 않고 즉시 말씀을 전하게 된다. 그가 박해했던 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하면 어떤 고난이 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목숨을 위험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다메섹에는 사울을 만나면 죽이라는 명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한 것은 체험이 있어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5. 진정한 헌신은 인정을 초월한다.
[삼상 6:10-12]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왜 하필이면 송아지가 있는 암소를 선책 했을까 ? 짐승이지만 모성에 때문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성에가 발동하면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아지는 떼어 집에 가두고 수례를 베고 가도록 했다.
새끼를 가두었다 모성애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일반이다 소는 새끼 때문에 울었다 그러나 뒤돌아서지 아니하였다 새끼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뒤 돌아 서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에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의 생각 같으면 돌아설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대로는 인정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신앙의 시험이 되기 때문이다.
인정을 끊지 못하여 실패한 사람이 엘리 제사장이다. 이 법궤를 빼앗긴 요인이 제사장 엘 리가 인정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삼상 2:29)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아버지가 나이 들어 늙자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이어 받아 행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해 머고 하나님의 제물을 범하고 그리고 수종 드는 여인들과 회막 문에서 음행했다. 그래도 이 제사장의 행동을 백성들은 알 수 없고 안다 하더라도 제사장이기 때문에 누가 제제 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아버지 엘리 대 제사장이 단호하게 금해야 하고 단호하게 책하여야 했다. 그러나 차마 인정을 끊지 못하여 간과 했다. 결국 온 가정이 망하게 되고 니가봇이란 대명사 하나님의 영관이 떠난 가문이란 대명사를 남겼다.
아브라함 은 인정을 초월하여 신앙도 인생도 성공 했다.
[창 22:1-2]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100세가 되어 아들 하나를 주셨고 그가 자라 성인이 될 무렵 그를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하는데 장해물인 모든 것을 제하고 순종하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다.
6. 진정한 헌신은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삼상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소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여호수아는 자기를 찾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소는 그 제사의 제물로 소의 일생은 마감하게 된다.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 론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께서 영육에 축복하시는 방편이다. 진정한 헌신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진정한 헌신은 성령에 이끌리어 자원하는 것이다. 진정한 헌신은 혼자 잘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좌화를 잘 이루는 것이다. 진정한 헌신은 체험의 확신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진정한 헌신은 인정을 초월 하는 것이다. 최고의 헌신은 자신의 희생의 제물이 되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최고의 헌신은 하나님의 최고의 큰 뜻을 이루고 최고의 축복을 받는 믿음의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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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