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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빚은 우리 인생 전체를 지배한다. 여기서 빚이란 단지 금전적인 의미의 채무, 채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대가없이 받았거나, 허락없이 외면해 버린 모든 것이 어쩌면 모두 빚으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나 우정이 될 수도 있고,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돈으로 큰 빚을 질 경우에는 생계의 어려움, 좋지 않은 경우 생명의 위협까지 가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고난이 닥치지만, 사랑이나 도리 면에서 빚을 질 경우에는 책임감, 죄책감과 같은 심리적인 고난이 기다린다.
영화 <카운트다운>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듯 영화 속에서 '인생은 빚을 지고 갚으면서 사는 것'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진다. 주인공이 빚을 진 이들에게 빚 독촉하기를 도맡아하는 채권추심원이라는 데서부터, 이 영화는 '빚'이 소재임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것이 처음에는 돈을 가운데 놓고 사람과 사람이 쫓고 쫓기는 양상만을 가져올 줄 알았지만, 영화 속을 들춰보니 그렇지만은 않았다. 돈으로서의 빚이 지니는 긴박감보다 더 큰 것은 마음의 빚이 지니는 후회와 절박함이었다.
신용정보회사에서 실적 1위를 달리고 있는 채권추심원 태건호(정재영)는 피도 눈물도 없이 맡은 목표는 반드시 집어 물고야 마는 냉엄한 인간이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간암 판정을 받는다. 길어야 열 흘 안에 간 이식을 받아야 가망이 있는 상태. 그는 문득 세상을 떠난 어린 아들이 떠오른다. 잃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잃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아들이 사후 장기기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건호는 자신에게 간을 이식해 줄 사람을 찾아나서고, 그 중 한 사람으로 차하연(전도연)이라는 여인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녀는 '숨쉬는 것 빼고는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타고난 사기꾼 기질의 여인. 그래도 간 이식을 위해 태건호는 그녀가 복역중인 교도소까지 찾아가 합의를 받아낸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그녀가 출소하는 순간부터 위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다. 하연이 찾고자 하는 다단계 사업자 조명석(이경영), 그녀가 등쳐먹고 도망가는 바람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쫓아오는 '연변 흑사파'의 보스 쓰와이(오만석)까지 겹치면서 사건의 방향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무게감 있는 배우들이 투톱을 맡아 출연하지만 사실 <카운트다운>은 그렇다고 정말 진지하고 무겁다거나 암울하고 복잡한 메시지가 있다거나 하는 영화는 아니다. 일단 오락영화로서 이 영화는 상당히 깨알같이 꽉 차 있다. 영화 시작 후 태건호가 채권추심원으로서 펼치는 활약(?)에서부터 상당한 몰입도를 보여주는 영화는 이후 차하연의 등장과 함께 그녀의 전적과 그녀로 인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더더욱 속도감을 붙여간다. 태건호는 차하연을 쫓고, 차하연 또한 조명석을 쫓는 과정에서 꽤 긴박한 추격전의 형태가 갖춰지고, 시장 안에서의 자동차 추격전, 백화점 안에서의 추격전 등 몇몇의 스릴 넘치는 액션 장면들과 함께 영화는 우선 오락영화로서의 충실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배우들의 튼튼한 연기가 여기에 더해지는 덕분에 이 재미가 가볍지만은 않고 관객들에게 보다 믿음직한 형태로 다가온다. 정재영과 전도연은 쫓고 쫓기는 관계, 약점을 잡고 있고 잡혀 있는 관계인 만큼 캐릭터나 연기 면에서 상반되는 인상을 준다. 빈틈없이 냉혹하지만 사실 사연이 있기 때문에 그러할 수 밖에 없는 태건호 역의 정재영은 깔끔한 냉철함과 비극적인 처절함을 오가는 폭넓은 연기의 폭으로 영화를 굵직하게 이끌어간다. 초반에 차가운 행동과 말투를 통해 캐릭터를 말끔하게 소개한 뒤 뒤로 갈수록 타들어가는 속내를 끄집어내는 그의 겉과 속이 알찬 연기는 매 영화마다 실망을 준 적이 없는 그의 진면목을 실감케 한다. 오랜만에 비교적 경쾌한 캐릭터로 돌아온 전도연은 <밀양>, <하녀> 등의 전작보다 한결 무게를 덜어낸 덕분인지 자칫 과잉 감정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는 순간에도 오히려 쿨하게 달려나가는 연기가 돋보였다. 영화를 보면 사실 정재영이 전도연을 이끌어가는 양상임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정재영보다는 한결 가벼운 연기를 보여주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벼움이 얕은 느낌이 아니라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느낌을 주는 것은 역시 전도연이 지닌 탁월한 재능 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톱 배우 못지 않게 눈에 띄는 배우들도 포진해 있다. 사실 마냥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던 <카운트다운>은 의외로 꽤 웃긴 구석이 좀 있는데 그 근거가 의외로 악역들에게서 보인다. 차하연에게 큰 돈을 떼이는 바람에 보복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연변 폭력 조직의 보스 쓰와이 역의 오만석은 그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캐릭터로 <황해>에서 김윤석이 맡은 면정학이 있겠지만, 면정학은 과묵하면서 잔악무도한 데 반해 쓰와이는 몹시 흥분을 잘 하면서 느슨한 구석이 많다. 그가 펼치는 연변 사투리는 공포감 조성보다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강하게 주고, 의지가 생각보다 먼저 앞서기 때문에 태건호가 간 얘기를 꺼내자 "간?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그 간?"과 같은 예상치 못한 폭소 대사까지 뿜어내기도 한다. 오만석은 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다소 과장된 연기 톤을 십분 살려 쓰와이 역을 감칠맛 나게 소화해냈다. 쓰와이보다는 더 진지하고 냉혹한 느낌이지만 처세술에 있어서 깨알같은 강박이 느껴지는 조명석 역의 이경영도 눈여겨 볼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카운트다운>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아이러니'와 '빚'이다. '아이러니'는 영화 속에서도 자주 나오는,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를 일컫는 말이지만 영화의 특성을 잘 설명해주기도 한다. 영화가 처음에는 마치 세상의 비정한 측면을 보여주려고 작정하는 듯 보이는데 나중에 가서는 그 속에서도 실낱처럼 남아 있는 휴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건호와 차하연 모두 과거가 있는 사람들인데, 추격전이 거듭되고 둘 사이에 인간적인 친밀도가 점점 쌓여가면서 미스터리처럼 감춰져 있던 그 과거들이 한꺼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히 의외로 사연이 많을 것 같은 차하연보다 더 말 못할 비밀을 안고 있는 태건호의 과거는 주목할 부분이다.
초중반까지 추격 액션 스릴러처럼 흘러가던 영화는 태건호의 과거에 접근하면서 미스터리의 느낌을 풍기기 시작한다. 지금은 철거된 집에서 찾아낸 과거의 흔적들, 특히 세상을 떠난 아들과 관련된 증거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결정적 증거물인 녹음기가 제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되면서 그의 과거가 지닌 비밀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비밀이 비로소 태건호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영화는 액션 스릴러에서 미스터리를 지나 가족 드라마의 유사 형태를 지니기 시작한다. 아울러 차하연과 그녀가 어린 시절 낳고 버린 딸에 관한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이러한 이야기는 영화를 더 풍성하게 하는 부차적인 요소를 넘어서 영화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중요한 줄기가 된다.
돈을 놓고 둘러싼 추격전이 후반부로 가면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데에는 결정적인 중심 축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빚'이다. 태건호와 차하연은 서로 '계약금'과 '간'이라는 빚을 지고 있고, 차하연과 쓰와이, 조명석도 서로에 대한 빚을 놓고 추격전을 펼친다. 하지만 태건호가 채권추심원으로서 그리도 악착같이 일하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삶에 대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 차하연이 출소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돈을 모으려 움직이는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그들이 바로 사랑, 가족, 인간적인 도리라는 큰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탄치 않았던 삶의 과정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막대한 마음의 빚을 졌기에 그들이 그렇게 쫓고 쫓기고 있었음이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진다. 난데없이 가족 드라마로 흘러가는 게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온통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할 줄만 알았던 영화에 불어넣어진 따뜻한 숨결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적어도 그들에게 그토록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할 인간적 이유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등장인물들이 돈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전부가 아니라는 <카운트다운>의 이야기는 아이러니이면서도 영화가 관통하는 '빚'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준다. 돈보다 더 강력하게 주인공들을 움직이는 것은 뒤늦게 타오르는 후회 섞인 부정이자 어설프게라도 자라나는 덜 익은 모정이다. 그 모든 몸부림들은 결국 자기 내부의 상처에 함몰되어 스스로도 몹시 힘들었을 아들을 모질게 대한 빚, 어린 나이에 다가온 책임감에서 벗어나고자 섣불리 인륜을 저버린 것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함으로 귀결된다. 그 빚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갚으려는 인물들의 의지는 <카운트다운>을 차가운 액션물에서 뜨거운 드라마로 변모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결국 그런 의지마저도 돈이라는 쓸모 있지만 때론 몹쓸 것이기도 한 물건 때문에 이들을 진흙탕 속에서 뒹굴게 만드는 모습은, 여전히 인간애가 극복하지 못하는 냉엄한 현실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결국 인간에게 갚을 수 있는 빚이란 건 없는 건가. 태건호는 신용불량자로 허덕이다 채권추심원으로 번쩍거리는 위치에 올라섰지만 그에게는 뒤늦게 아들에 대한 빚이 남게 되고, 차하연 역시 그 모든 사건들을 뒤로 한다 하더라도 뒤늦게 어설픈 책임감이 살아나기 시작한 딸에 대한 빚이 남아 있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은 물질의 빚과 마음의 빚이 결국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작용을 한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강조한다. 물질의 빚은 우리를 지치게 하겠지만 마음의 빚은 우리를 살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한 움큼의 사랑이라도 더 갚으려, 한 움큼의 미움이라도 더 덜어내려 우리는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 빚을 갚으라고, 빚을 갚기 시작하는 순간 인생은 힘차게 뛰기 시작할 것이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카운트다운>은 우리를 뛰게 하고 흥분되게 하고 울게도 하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어떤 '빚'에 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