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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암벽 산행
천태산 ^^ 충북 영동
영국사주차장 – 진주폭포 – 삼단폭포 – 영국사은행나
무 – 미륵길 암벽코스 – 천태산 –남고개 –원각국사비
망탑 – 영국사 - 주차장
살얼음 녹는 봇도랑을 건넜다. 야트막한 산마루를 내려서면 진주폭폭가 너럭바위를 타고 봄물로 흐른다. 겨우 내내 어깨에 멘 얼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느티나무 고목을 껴안고 비탈길을 오르면 세 번을 굽이치는 삼단폭포가 마중한다. 절집에 들어오려면 정갈하게 몸을 씻으라는 뜻이겠거니 하면서 쪼그리고 앉아 손을 씻었다. 멀리 영국사가 보인다. 개구리는 또 울어댄다. 가까이 갔다. 일제히 울음을 멈추고 경계심을 드러낸다. 행나무가 워낙 커서인지 작은 절집 같다. 조용하던 영국사 계곡으로 일제히 개구리소리가 들린다. 된 신음으로 운다. 때를 같이하여 스님의 목탁소리도 이내 멈춘다. 또 개구리가 울어댄다. 가까이 갔다. 일제히 울음을 멈추고 경계심을 드러낸다.
영국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를 지나면 부들과 미나리와 물매화가 사계절 수초로 자라는 연못을 만나게 된다. 연못에서 겨울잠을 잔 개구리가 영국사에 아침이 왔다는 전갈을 보내는 신호였고 아침공양을 알리는 산사의 신호였으며 봄이 왔다는 외침이었다. 아침예불을 드리던 작은 스님은 개구리 소리에 키득키득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있는데 부들과 미나리와 물매화가 이른 봄부터 가을 까지 수초로 자란다.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가 살얼음을 깨고 영국사에 아침이 왔다는 전갈이었고 아침공양을 알리는 산사의 신호였으며 봄이 왔다는 외침이었다. 아침예불에 익숙지 않은 작은 스님은 개구리소리에 키득키득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천태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국사를 들르게 되는데 우람한 풍채의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기품과 절개가 있는 나무다. 영국사 턱밑에서 천년을 지켜왔으니 이 절집의 주인이고 산증인인 셈이다. 그래서 영국사에는 험상궂은 사천왕이 지키는 사천왕문은 없고 천년 은행나무가 사천왕문을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
영국사는 나라의 흥망을 예견하는 절로도 유명하다. 절이 쇠락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절이 크게 번성하면 나라가 흥한다는 여수의 흥국사(興國寺)처럼 영국사(寧國寺) 역시 이 사찰이 존재하므로 나라가 편안하다는 절이다.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1,300년으로 추정되는데 영특한 나무로 가을마다 당산제를 지낸다. 1974년과 2003년 국가적인 사건이 있기 하루 전날, 이 은행나무는 밤새 울었다고 노교리의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봄바람이 일렁이는 키 작은 소나무 숲길을 빠져나왔다. 2지점부터 5지점 구간까지 계속되는 암릉이다. 밧줄의 긁기부터가 대단하다. <노약자는 절대 안전을 위해 우회 하라>는 안내 팻말이 곳곳에 꽂혀 있다. 우회할까 하다가 노약자가 아니니 직진한다. 구간 구간마다 안전대장과 등반대장, 구호대장이 손을 잡아준다. 100여m를 오르면 암릉 이고, 소나무 밑 둥을 밟고 오르면 또 암릉이다. 마지막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에서는 한사람씩 오르다보니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영국사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쉬었다.
소나무 조붓한 노루목 고갯길로 천태산 정상석이 보인다.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남기는데 한꺼번에 탄성이 이어진다. 입춘 날의 눈이었다.
그것도 함박눈이었다. 절기를 잊고 내리는 눈이니 꼭 길조는 아닌 듯싶지만 좋게 해석하면 좋은 것 아닌가. 회색빛 하늘에 가느다란 바람을 타고 천태산 정상석에 내려앉는다. 심술부리는 바람을 타고 둥둥 춤사위를 타고 있는 걸 보면 겨울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나 보다. 8부 능선을 내려오자 성근 눈발이 약해진다. 한 번 더 바람이 지나가고 싸락눈으로 변한다. 남고개쯤 내려서는데 빗방울로 변한다. 봄이 오기까지는 계절도 심한 몸살을 한다. 하산 길에 망탑봉의 영국사 삼층석탑(보물 제535호)은 꼭 봐야한다. 화강암으로 기단을 만들고 3층으로 탑신을 올린 온전한 모습의 아담한 탑이다. 영국사가 가까운 뒤란을 내려오면서 연꽃 문양의 부도 석 점도 봤다. 하산 길에 문화유적을 만나는 것은 덤이자 산행의 쏠쏠함이다. 오래도록 내릴 비가 아니기에 영국사 봉당에서 비를 피했다.
삼단폭포를 돌아서는데 산까치 내외가 갈참나무 끝가지에 집을 짓고 있었다. 기둥을 세우겠지. 용마루 올리겠지. 서까래 얹겠지. 벽채도 엮겠지. 갈참나무 언덕으로 쏟아지는 햇발이 헤프게 웃는다. 아지랑이 한보따리 퍼 담아 가야지.
옥정호에서 쓰는 가을편지
전북 임실
영암부락재 - 520봉 - 2봉 - 4봉 - 국사봉 – 대숲 오봉산 – 운암삼거리
오그라든 굴참나무 갈색 잎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여름 짙푸르던 청단풍이 새빨갛게 물 들다 스무 날을 채 넘기지 못하고발밑에 낙엽되어 서걱서걱 밟힌다. 호젓한 가을의 소리다. 민소매 봄옷을 입은 채로 여름을 보냈다. 이제 가을에 걸쳤던 암갈색 옷까지도 벗는다. 새벽안개 내려앉는 옥정호의 오봉산 능선을 오른다. 진홍 핏빛으로 출렁이던 당단풍과 복자기도 절반쯤만 가지 끝에 매달려 팔랑이는 빛바랜 마른 잎이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여기저기 검버섯 자국도 선명하니 낙엽도 해가 내려쬐는 시간에 따라 때깔이 다른 것 같다. 절반을 읽다 머리맡에 접어둔 책갈피에 꽂아두었으면 싶은 진분홍 단풍도 있고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가 되는 낙엽도 있다.
옥정호의 가을 정취를 눈으로 확인하는 계단을 오른다. 수북이 쌓인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 잎이 강바람에 책장 넘기는 소리로 들린다. 가을의 소리다. 나무들이 애지중지하던 식솔들을 내려놓고 저마다 허리를 편 채 말쑥한 차림이다. 모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희생
했을 때 온전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은 말하고 있다.
휙휙 어둠이 물러가고 옥정호의 강둑으로 아침이 찾아든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여기서 한바탕 물안개를 일으키고 섬진강 줄기를 따라 하동을 거쳐 남해 바다로 흘러드는 섬진강의 윗물이고 더 깊숙한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면 덕치면 진메마을이다. 김용택 시인은 지금도 거기에 산다.
섬진강 상류의 옥정호의 물안개길이다. 호수 끄트머리 산자락 머무는
외딴집이 보인다. 굴뚝에서는 삭정이 태우는 맑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강둑에도 섬에도 물안개가 가득하다. 옥정호의 아침이다. 무쇠솥뚜껑 여닫는 소리가 두어 번 들리고 난 후, 마당 가득 아침 햇살이 찾아든다. 국사봉전망대 데크에서 내려다보는 옥정호는 너무도 호젓하다. 그만그만한 산으로 이어지다 끝자락에서 끊기고 또 능선을 이어 놓고 다시 산허리를 감아 도는 물굽이가 가슴높이로 찰랑댄다. 군청색 어깨띠가 날렵한 물새 한 마리가 옥정호에 물살을 일으키고는 가운데 붕어섬 쪽으로 몸을 숨긴다. 청둥오리 떼 지어 내려앉으니 뽀얀 물안개가 번진다. 아침에 배달된 우윳빛 같다. 한산모시 옥색치마를 두른 새색시의 치마폭이다. 더 유심히 내려다보면 안개꽃을 물위에 뿌려놓은 하얀 꽃밭이다. 금붕어를 빼닮은 옥정호의 붕어섬이 지느러미를 너풀거린다. 어제의 오목눈이 작은 새 날아들고 가창오리와 쇠기러기는 이른 봄 내내 옥정호의 물살을 가를 것이다. 아, 하얗게 너울거리는 옥정호의 아침이 신비롭다. 순결한 아침이 문을 연다.
길게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가을 길을 물안개 길이라 부른다. 빨갛게
물든 개옻나무 저편으로 대숲능선이 이어지고 잘 익은 감나무 언덕으로 외딴집이 있다. 인기척도 없으니 가을걷이를 나갔나보다. 물안개길의 날머리 푯말이 보인다.
옥정호에서 이 가을에 편지를 쓴다. 가을에 쓰는 편지는 그리움의 편지다. 가을에 쓰는 편지는 기다림의 편지다. 물안개가 번진 편지지에 가을 나뭇가지로 사랑의 잉크를 듬뿍 찍어 그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힐 때 가슴 한구석 멍한 것은 필시 외로움을 타기 때문이다. 발코니에서 먼 산을 바라볼 때 슬쩍 스치는 얼굴이 있다면 간절한 그리움 때문임을 숨기지 말자. 가을 타는 계절병이라고 둘러댈 필요도 없다. 털복숭아 검색 털옷을 꺼내입고 편지를 쓴다.
지금 생각나는 한 사람 있는가? 얼른 편지를 쓰자. 가물가물한 어릴 적 친구가 생각날 때도 편지를 쓰자. 이웃에게, 소원했던 선배에게 안부를 묻자. 무덤덤하게 지냈던 평생지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보라. 가을에 쓰는 사랑의 연서는 감미롭고 달콤하다. 연분홍으로 익은 당단풍 잎이 아니어도, 샛노란 은행잎을 붙이지 않더라도 가을에 보내는 편지는 그리움이 묻어난다. 기다림이 흥건하다. 깔짝깔짝 서너 줄 문자로 안부를 묻는다는 게 너무 삭막하지 않던가. 오늘은 스마트폰에 길들여진 잘못된 습관을 타박해보자. 하얀 종이에 손편지를 써보자.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난 후,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툭툭 털어내며 지난 시절을 읽어 내려가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촉촉한 안경 너머로 편지를 읽는 노신사를 상상해보라. 상상만으로도 고상하지 않은가 !
옥정호에서 이 가을에 편지를 쓴다.
달뜨는 월출산
전남 영암
천황사매표소 - 구름다리 - 바람폭포 – 통천문 – 월 출산 정상 - 쇠사다리 - 매봉 - 구정봉 – 마애여래좌 상 - 향로봉갈림길 - 미왕재 - 갈대밭 - 도갑사
천황사 삼거리로 갈라지는 바람 골은 새벽바람이 차가웠나 보다. 길섶의 키 큰 대나무가 부스럭부스럭 서로 얼굴을 부비며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꼬부랑 바윗길을 따라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경사가 급한 철계단까지 이어진다. 힘에 부치는 것 같기에 노각나무에 기대어 호흡을 가다듬는데 주황색 구름다리가 보인다. 머리를 한껏 뒤로 꺾어야 온전하게 다리를 볼 수 있다. 월출산의 매봉과 사자봉 사이의 까마득한 벼랑을 이어주는 출렁다리로 구름다리 위에 서면 장군봉이 눈높이로 다가오고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영산강이 굽이굽이 흐른다. 너무 오래 머무르면 멀미를 할 것만 같다.
구름다리를 건너 왼쪽의 암벽으로 80도 각도의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을 오르는데 얼마 전 대둔산 삼선계단을 오를 때의 공포감이 느껴진다. 아래를 보면 오금이 저리고 발이 후들거리고 아찔하다. 오르락내리락 뾰족한 암릉을 넘고 절벽을 돌아 한참을 오르니 저기 높은 능선으로 뻥 뚫린 하늘이 보인다. 하늘과 통한다는 월출산의 통천문이다. 천황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통천문 이외의 우회하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하늘의 문이 열렸으니 곧 천황봉이다.
동으로는 고흥의 팔영산이 보이고 남으로 해남의 두륜산이, 서쪽으로 영산강이, 북쪽으로는 영암평야와 나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시야를 둘 수 있는 산이 월출산이다. 구정봉을 향하면서 두리번 거리는데 시선이 닿는 곳 모두가 기암괴석, 천태만상의 바위들이 군상을 이루고 있다. 기이한 암봉이 능선에 우뚝 서서 허리를 굽실대는가 싶고 이만큼에서 머리를 흔들더니 저만치에서는 잘 가라 손짓을 한다.
구정봉으로 가는 길에 남근석을 만났다. 힘차게 발기한 남근석이 바람재를 사이에 두고 일명 여자바위로 일컫는 베틀굴과 마주보고 있으니 자연이 빗어낸 음양의 조화가 여기에도 존재하나 보다. 월출산 산행이 오늘로 네 번째인데, 비가 오는 날이 많아 투덜대며 걷기가 일쑤였고 날씨가 좋다가도 갑자기 안개가 끼어 기를 쓰고 올라 와서는 휑하니 내려왔던 기억밖에 없었다.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구정봉 정상에서 저 아래의 마애여래좌상을 만나기로 생각을 고쳤다.
구정봉에서 능선을 따라 20여 분의 발품을 팔면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을 만나게 된다. 노송을 안고 돌아야 한다. 기암절벽 8.3 미터의 수직 바위다. 화강암 바위에 사각형의 감실을 만들어 부처를 부조로 조각했는데, 사각형의 얼굴에 귀는 어깨에 닿고 반쯤 뜬눈이 사뭇 근엄하다. 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기도하는 동자상을 조각했으니 보고 또 봐도 참으로 깜찍하다. 이게 다일까. 능선을 따라 100 여 미터 아래로 내려왔다. 뭉툭한 바위 위에 바위보다 더 큰 기단의 삼층석탑이 남근바위와 베틀굴이 마주보듯이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보물 제1,283호)도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가 마주보고 있다. 엇나간 부조화 같은데 신기하게 조화롭다.
다시 구릉을 지나쳐 향로봉으로 향했다. 여린 곡선의 향로봉이지만 억새밭 사이로 피어난 가을꽃을 만나니 하산길도 지루할 틈이 없다. 능선과 능선 사이로 억새가 서해바다의 물결처럼 출렁이는 언덕으로 가을 산꽃이 지천이다. 여기저기 구절초가 하얗게 하얗게 꽃을 피우고 흔한 쑥꽃도 흰 꽃이며 궁궁이도 흰 꽃인데 한껏 치장을 했다면 벌개미취가 연분홍이요, 쑥부쟁이와 모싯대 그리고 잔대꽃이 연보라색이고, 산부추가 자주색이다. 노오란 마타리 옆으로 두어 발쯤 사이를 두고 용담꽃이 진보라일 뿐이다.
이처럼 가을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 산야에서 소리 소문 내지 않고 조용히 피는 꽃이다. 그래서 가을꽃은 겸손한 꽃이다. 들릴 듯 말듯 조근거리는 산개울 소리가 감지된다. 도갑사가 가까워지고 있나보다. 내려온 산길을 뒤돌아 보는데 쑥부쟁이와 구절초 사이로 가을이 절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백암산 신선골 계곡
새벽 네 시에 알람이 울렸다. 추석 연휴에 마셔댄 술 때문에 정신이 몽롱하다.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한 후 텃밭에서 고들빼기를 캐고 한나절 내내 오미자를 땄다. 저녁 무렵이 되자 시댁으로 친정으로 식구들이 고향을 찾는다. 들녘이 풍성해서 한 잔이고 반가워서 한 잔이고 잘 커주니 고마워서 한잔이다. 숙취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행밖에 없다고 믿기에 배낭을 메고 산행버스에 올랐다. 명절 밑이고 경주 지진에 태풍까지 예보했던 터라 단출한 산꾼들이 모였다. 태풍은 물러갔지만 백암산 초입을 들어설 때는 보슬비가 내렸다. 구릉을 지나 능선을 오르니 산안개가 소나무 숲을 빠져나간다. 비가 멎는다는 징조다.
졸참나무 비탈을 내려서는데 개울물 소리가 기운차게 들린다. 더 가까이 갔다. 백암폭포의 물줄기가 장쾌하다. 오싹한 추위가 느껴지니 십수년 묶은 체증이 싹 가시는 느낌이다. 잡목이 우거진 아래의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룬 오솔길이 펼쳐진다. 곱고 고운 능선이다. 비는 완전히 멎었다. 바람이 분다. 울진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려니 한다. 어깨를 스쳐 목덜미를 지나는 바람이 시원하다. 산들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안고 백암산 정상에 섰다. 멀리 동해바다가 가물가물 보이다가는 사라지고 또 보이고 그러다간 지평선 하나 옆으로 긋는다. 영양에 일월산이고 영덕의 칠보산이 지척이다.
하산은 백암산 코스 가운데 가장 긴 신선계곡으로 잡았다. 합수곡을
내려서면 길게 흐르는 신선계곡이다. 거친 산허리를 감아 돌고 낭떠러
지의 데크 길을 걸으며 계곡을 내려온다. 사나흘 내린 비로 온산이 촉촉하다 못해 말캉말캉하다. 싸리버섯과 느타리버섯이 길섶에 피었고 하얀 노루궁둥이버섯도 비를 맞은 다음 날 신갈나무, 졸참나무 습기 많은 등걸에 사나흘 보이고는 사라진다. 시도 때도 없이 느끼지만 산허리를 돌때마다 만나는 폭포는 산객에게는 아껴두었던 힘을 쏟게 하는 마력이 아닐 수 없다. 기력을 다한 것 같다가도 산중에서 폭포를 만나 할딱이던 심장이 청년의 맥박으로 순환됨을 느낀다.
하늘을 찌를 듯 한 금강송이 빼곡한 산이다. 산안개가 걷히는 백암산 자락으로 곤줄박이 먼저 날고 딱새가 떼를 지어 숲속에 내려앉는다. 계곡이 끝나는 굽은 구렁으로 추수를 앞둔 논배미가 보인다. 계곡물소리도 귓가에서 사라진다. 14.5킬로미터, 일곱 시간의 산행이다. 며칠 후의 어느 새벽에도 싱싱한 알람이 울릴 것이다. 얼른 일어나서 배낭을 꾸릴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칼바람
전북 남원, 전남 구례, 경남 산청, 함양, 하동
중산리 - 칼바위 - 법계사 – 개선문 - 천왕샘
천왕봉 - 제석봉 - 장터목대피소 -
몸살기운으로 밤새도록 뒤척였다. 한 번쯤 산행을 미루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산엘 가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성깔 때문에 배낭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미련하달까, 습관이랄까? 늘 그렇게 해왔고 또 산행을 하고 나면 언제 아팠느냐는 식으로 멀쩡해지는 신체구조임을 잘 안다.
천왕봉을 향한 칼바위 삼거리에서 아이젠을 차고 배낭끈도 조여 앞으로 당겼다. 어제부터 반짝 추위가 엄습했으나 사나흘 전에는 이곳 지리산에도 날씨가 포근했었나 보다. 그러다 밤새 다시 산책로가 꽁꽁
얼어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고뿔을 메고 다른 어깨에는 몸살을 메고 있으니 그 무게가 천근만근 온몸을 짓누른다. 법계사까지 선두로 치고 앞장서기로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면 콜록거릴 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 쌓인 오르막 능선 좌우로 사람 키 높이로 자란 산죽이 파란 손을 흔든다. 오르막이 너무 지루하다고 여기려는데 노각나무 맞은편 언덕으로 산사가 보인다. 법계사다.
흔히들 설악산 봉정암이 높은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지만 지리산 천왕봉 길목의 법계사야말로 해발 1,380m 고지대에 있는 절집이다. 기둥이 그렇고 단청이 그러하며 기와까지도 고색창연하다. 돌담도 없는 작은 일주문이 거창하지 않아서 편하다. 산신각 앞에 있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은 단번에 시선을 끈다.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하부 기단부를 생략한 몇 안되는 날렵한 석탑이다.
천왕봉을 오르는 능선은 눈도 참 많이 쌓였다. 내려서 쌓이고 또
내리고 눈보라에 덮이고 지리산은 눈 속에 깊이 잠을 자고 있었다. 개선문 문을 들어서면 오싹한 추위와 함께 사방의 산세가 환하게 바뀐다. 구상나무에 눈꽃이 만발하고 철쭉에는 상고대가 몽실몽실 피어나서 겨울바람에 출렁인다. 휙 하는 바람과 함께 상고대가 부딪치며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낸다. 깔딱능선을 오르는 산객의 주변에 거친 눈보라가 흩고 지나간다. 보기에도 아찔하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섰다.
지리산 천왕봉이다. 지리산에서 오늘처럼 청명한 하늘을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겹겹으로 다가서는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들이 층층시하로 밀려온다. 멀리 여수 광양만이 보이고 진주의 남강이 손에 잡힐 듯하니 남해바다의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산과 들을 거스르며 실핏줄처럼 흐르는 섬진강이 눈에 확연하다. 천왕봉에서의 풍광이 그만이다. 한파주의보속에 영하 19도까지 수은주가 뚝 떨어질 것이란 예보가 있었는데 이곳 지리산 정상의 체감온도는 30도를 넘을 것 같다. 볼이 아리고 눈알이 뻐근하다. 몸도 가누기 힘겨울 정도로 겨울바람이 매섭다. 장터목으로 가는 제석봉 능선의 푯말이 가슴 높이로 눈 속에 묻혀 있다. 눈밭에 주저앉아 배낭에서 물을 꺼내는데 탱탱 얼었다. 볶은 옥수수와 대추 여남은 개를 넣고 끓인 온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는데 따스한 온기가 뱃속까지 스며든다.
글자 그대로 장터목 대피소는 그야말로 시골장터처럼 번잡했다. 이런 날 잠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피소이기도 하지만 이곳 지리산에서 불을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기에 늘 북적이며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누구 한 사람 앉을 수도 없이 그냥 서서 식사를 한다. 이럴 땐 앞에서 코 흘리며 밥을 먹는 숙녀(?) 산악인도 추하지 않다. 장터목에서 멀리 펼쳐진 저 아래능선을 내려다본다. 지리산은
능선도 굵고 골도 깊다. 깊은 만큼 봉우리도 높고 능선도 길어 사방 어딜 봐도 겹겹으로 산이고 켜켜이 능선이다.
하산을 하는데 예상했던 대로 몸살기운도 사라졌다. 굼뜬 걸음으로 능선 몇 개쯤 더 올라서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몹시 추웠던 날의 허세임을 잘 안다. 사시사철 지리산을 찾아 지리산의 산과 나무와 바람과 고요를 사진으로 남긴 고 하성목은 "우리가 산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우리가 산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훗날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 그가 남긴 사진첩 첫머리에 썼다.
칼바위 골을 내려오는데 드르렁드르렁 산이 울리는 것 같다. 깊은 겨울 잠자리에서 심드렁하게 코고는 반달곰의 코골이였으면 싶다. 야생 반달가슴곰 출연에 주의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중산리 마을을다 내려왔을 땐 산그늘이 지고 겨울 햇살은 저만치 도망치고 있었다.
연화도에 가면 연꽃은 없고 용머리가 있다
경남 통영
여객선 터미널 - 마을정자 - 아미타재불 – 연화봉
보덕암 - 출렁다리 - 용머리해안 -
스마트폰 컬러링 소리에 내 휴대폰인가 했는데 바로 옆 사람이 받는다. 스마트폰이라는 괴물을 잊고 나왔다는 사실을 안 것은 연화도 선착장을 막 내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초조하거나 답답하지 않은 것은 어차피 되돌아갈 수 없는 통영까지 왔기에 바로 포기하는 순간 홀가분한 자유가 품에 들어와서다.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왔을 때 하루 종일 조바심하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고 신경에 거슬렸던가, 혼을 기계에게 다 빼놓고 사는 별스러운 세상에 바보 같은 현대인들이다.
세계 최고수의 프로 9단 이세돌이 무단의 이른바 인공지능 알파고에
게 잇달아 패하다 네 번째 만에 승리를 이끌어내는 수모를 겪었다. 힘자랑이 아닌 두뇌싸움에서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인간이 지다니 전 세계는 충격이고 경악이다. 이미 로봇이라는 괴물은 사람의 일자리를 가로 챈지 오래고 사람의 손으로 몇 천 날에 겨우 할 수 있는 일을 컴퓨터라는 기계는 단 몇 초 만에 뚝딱 해치우는 해괴한 세상이다. 얼핏 생각하면 편한 세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분명 재앙이다. 우리 인간이 쓸데없이 저질러 놓은 오염으로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루고 있는 건 아닐까? 훗날 인공지능이라는 형체 없는 괴물이 명령을 내리면 불평 한 마디 없이 절절매는 끔찍한 세상이 도래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싶다. 누구 할 것 없이 앞으로 닥칠 재앙이 무섭고 두렵다.
우리가 봄이면 바다건너 섬을 찾는 이유는 뭘까? 아직은 손때를 덜
타고 오염의 정도가 감내할 수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화도는 통영에서 27km 한 시간 거리의 뱃길이다. 포말을 일으키며 연화도로 가는 여객선 뱃머리에 서면 양쪽으로 도열한 섬들이 해병대 내무반에서 막 점호를 취할 것 같은 긴장된 분위기다. 연화도, 연꽃이 피어서 연화도일까? 그렇진 않다. 연화도의 섬 이름은 불경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 연화세계가 곧 극락세계요, 부처님이 상주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해남의 달마산엘 가면 미황사, 달마산, 관음봉, 도솔봉, 도솔암 등 등 불교와 연관이 있는 지명이 곳곳에 있는데 섬의 지명이 불교와 연관이 있는 섬은 통영에 다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욕지면에 속해있지만 욕지면과는 배를 타고 20분 가야만 만나는 섬이다. 연화사에서 합장하고 능선을 따라 망부석바위가 보이는 전망대까지 갔다. 오른쪽 벼랑으로 망부석바위가 보이고 연화도 끄트머리에 용머리가 솟구쳐있다. 용머리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용트림을 달리하는 바위다. 이렇게 보면 용이 바다에서 솟구치는 것 같고 한참을 왼쪽으로 나와서 보면 다시 바다로 들어가려 꿈틀대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해안 절벽 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돼지목과 들물강정으로 가는 출렁다리가 나온다. 어찌나 심하게 요동치는지 섬 여행을 나온 어느 새댁은 다리 난간을 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섬 일주도로를 걷다가 보덕암으로 내려갔다. 보덕암은 바다를 보기위해 언덕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절 입구에 해우소가 있었다. 대개의 절에서는 해우소를 외졌거나 후미진 장소를 택하는데 여기의 해우소는 마치 대문처럼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 보덕암에 오느라 오랫동안 참았으니 볼일부터 해결하라는 뜻인가, 아니면 마음도 몸도 모두 깨끗하게 정진해야하니 쾌변 후에 부처님을 만나라는 뜻인가? 아, 그런데 해우소 입구에 해괴한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큼지막하게. <전망 좋은 해우소>.
조계산 선암사 해우소 뒷간에 가면 쪼그리고 앉은 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쭈그리고 앉는 화장실인데 전망 좋은 해우소라고 광고(?) 따위를 하진 않는다. 볼일을 보면서 손뼉을 탁 치면서 금세 수긍을 했다. 정면을 보니 정말 조망이 그만이다. 이런 화장실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으리라. 오른쪽 벼랑으로는 철썩철썩 바닷물이 출렁이고 약간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망대에서 봤던 용머리바위가 입체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연화도 끄트머리의 섬이 좀 큰 바위가 있고 다음에 그보다 작은 바위가 솟아있고 좀 작은 암봉이 바다를 향해 떠 있고 그보다 작은 바위가 바다로 잠기는 용머리바위다.
해우소에 앉아서 생각해 봤다. 저 용머리 끝나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바위들은 순서를 지키며 차례대로 바닥까지 도열했으리라 연화도의 용머리바위를 가장 실감나게 보려거든 보덕암 해우소로 가라.
영취산과 여수 돌게장정식
전남 여수
여수산업단지 - 골영치 - 돌고개 - 영취산정상 –도솔 암 - 봉우재 - 흥국사
배추된장국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여수산업단지를 뒤로하고 일출을 보기 위해 골명치 능선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지만 워낙 날씨가 흐린 탓에 해무 사이로 번지는 빛 퍼짐만 볼 수 있었다. 너무도 아쉬웠다. 그러나 골명치 계곡을 따라 햇살 드는 남녘 능선으로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영취산의 진달래군락은 골명치에서 시작되는 돌고개 군락지를 비롯해 가마봉 쪽의 골망재 군락지, 동쪽의 개구리군락지, 영취산 정상의 서쪽능선의 군락지 등, 시선을 두는 곳 마다 진달래꽃이 피었다가는 지고 또 피기에 하나도 지루한 느낌이 없는 유유자적할 수 있는 산길이다.
어릴 적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뒷산 어디를 가도 매양 피고 지는 흔하디흔한 꽃이 진달래였는데 얼마나 흔하던 꽃이었으면 어머니는 뒷동산 참나무 마냥 널린 꽃이라며 참꽃이라고 불렀고, 유난히 약주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절반쯤 필 때를 기다려 이 진달래꽃으로 술을 만들어 드셨으니 아마도 진달래주였나 보다.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는 뒷산 소나무 아래 듬성듬성 피던 꽃이 진달래였는데 영취산처럼 무리지어 군락을 이룬 꽃 산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가마봉 능선에도, 진례봉 꼭대기에도 붉디붉은 진달래꽃이 아침햇살에 저마다 얼굴을 들고 몸치장을 하고 있었다.
흔히 진달래 3대 군락지로는 경남 창녕의 화왕산과 마산의 무학산 그리고 이곳 영취산을 꼽고 있는데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 라고 소월이 노래한 평안북도 영변이 관서팔경의 으뜸이라고 하였기에 진달래 군락지로 꼽을 수 있겠으나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 않은가. 더욱이 오늘날의 영변은 핵시설로 온통 파헤쳐졌다고 하니 진달래 꽃밭이라고 변변하겠는가 싶다.
진달래를 뭉뚱그려 그냥 진달래라고 부르고 있으나 꽃잎이 연한 분홍빛의 연달래가 있고 진한 핏빛의 꽃잎을 진달래라고 부르는데 이곳 영취산이야말로 짙은 진달래 참꽃이다. 때마침 영취산진달래축제가 열리는 까닭인지 정오가 가까이 되자 분홍빛 주단의 영취산 능선으로 상춘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솔암을 거쳐 봉우재로 내려오는 계곡으로는 희디흰 산벚 꽃이 터널을 이루고, 군데군데 연분홍 산복사꽃도 볼 수 있다. 골명치에도, 가마봉에도, 진례봉에도, 도솔암에도 영취산 능선 팔방으로 진분홍의 꽃물결이다.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라. 진분홍이 진달래이고 듬성듬성 연분홍의 꽃은 산복사꽃인데 계곡으로 흰 꽃이 산벚꽃이라면 더 흰 꽃은 자잘한 조팝나무 꽃일 게다. 그렇게 만개한 봄꽃으로 눈요기를 실컷 하고나면 너덜바위 내리막 구간을 지나게 되고 구릉지 양지 녘으로 크나큰 절집이 나온다. 고려 명종 25년 보조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흥국사이다. 대웅전과 후불탱화 등 국가지정 보물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일찍이 승병훈련소로 호남 의병의 전진기지임은 물론 승병항쟁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으니 이 흥국사가 기울면 나라가 망하고 흥국사가 흥하면 부강한 나라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흔히들 여수하면 오동도와 금오도 비렁길 그리고 향일암의 일출과 같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연상하지만 볼거리 못지않게 먹거리가 풍성한 것도 남도이기 때문이다. 산행을 마치고 돌산대교를 가보라.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입맛을 잃게 하는 봄철에 돌게장정식은 여수에서만 그 특이한 미각을 대접받는다. 게장백반에는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이 차려지고 시원한 국물의 꽃게탕은 기본이요, 갈치속젖도 곁들여 나오는데 남도음식이 그러하듯이 해산물로 버무린 반찬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이 사람은 매운맛에는 기겁을 하는 터라 양념게장보다는 간장게장을 즐겨 먹는데 한 입 곱씹으면 탁 터져 나오는 달짝지근한 게맛이 일품이고 입 안 가득 씹히는 쌉싸름한 돌산 갓김치 맛은 십 수해가 지나도록 여태껏 잊지를 못한다. 20 여 년 전처럼 돌산대교 아래서 현란한 야경을 보며 여수돌산 게정식을 주문한다. 기본 반찬 가운데 양념게장만을 시켰다. 달작지근하면서 새콤한 맛이 혀끝을 녹인다. 낮에는 영취산에서 꽃구경하고 밤에는 돌산대교에서의 밤풍경을 보고, 오늘은 공사다망이다.
곤한 몸을 크게 드러누웠다. 발을 쭉 뻗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천정이 모두 진분홍 색실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차렵이불이다. 영취산 진달래 꽃 이불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여수의 밤이 깊어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욕지도 비렁길로 봄이 오더라
경남 통영
선착장 - 야포마을 포구 - 혼곡 - 할매바위- 일출봉
샛고닥 - 출렁다리 - 비렁길 - 천왕봉 - 편백나무숲
첫배를 탔지만 욕지도에서의 일출은 남해바다 선미에서 보는 것으로만족하나보다. 시간 반을 항해 끝에 욕지도 선착장에 내리면 해안을 일주하는 버스가 기다린다. 그러나 타지 않았다. 한적한 포구를 걸어서
등산로 초입 야포마을까지 가는 것도 섬 산행에서만 얻어지는 덤이다. 물살을 일으키며 먼 바다로 향하는 통통배, 그 위를 나는 갈매기의 배웅, 물양장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뒷모습, 봄 햇살 가득한 선창가의 아침은 이렇게 분주하다..
일출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섬이라고 만만하게 봤다가는 금세 각오를 바꿔야한다. 일출봉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국도와 자사리도 사이에서 남쪽나라의 해가 솟아오르면 벅찬 감동으로 탄성을 지르게 되는 욕지도 일출의 명소이다. 빨리 걸어도 그만이고 시적시적 걸으면 더 좋은 섬 산의 능선은 사방 어딜 봐도 바다며 섬이다. 샛고닥에 이르러서는 해안 절벽으로 출렁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남해바다가 출렁이는 욕지면 비렁길이다. 여수의 금오도 비렁길 3코스와 흡사하다. 개미목 끄트머리에 가면 찰랑찰랑 신발을 적시고 과 바다끝전망대에 오르면 옥빛바다의 남태평양이다. 그리고 언덕 높은 목장 출입문까지 절벽 버렁길로 천황산 정상만 아니라면 몇 시간을 지체해도 좋을 듯싶다.
대개의 바닷가 마을들은 계절적으로 불어오는 폭풍과 드센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집집마다 돌로 담을 쌓는데 밭둑 역시 작물이 바람에 의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담을 쌓는다. 얼기설기 대충대충 쌓은 것 같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과학적 근거가 깔려있다. 길게 이어지던 돌담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다.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담이되, 바람을 그대로 통과할 수 있도록 배려한 바람구멍이고 숨구멍인 셈이다. 돌담 밑에 피어난 노루귀꽃이 귀를 쫑긋 세우고는 반갑다는 말쯤은 한마디 건네고 가라고 한다. 길섶에는 지금 꽃다지도, 제비꽃도, 양지꽃도 서로 이른 봄이라고 좋아라 한다.
천황산 천왕봉이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바다와 섬이 황홀하다. 동쪽으로 내초도, 외초도, 국도, 자사리도가, 남쪽으로 갈도와 남해가, 서쪽으로 두미도, 비산도, 납도, 봉도, 모섬이, 북쪽에 노대도가 기웃거린다. 욕지도 선착장과 해안을 내려다보며 산길을 걷는데 그윽한 향이 진동한다. 편백나무 숲이었다. 두 손을 뒤로 가슴을 내밀어 깊게 들어 마셨다. 진하게 전해지는 상쾌함이 폐 깊숙이 느껴진다. 하산길 양지녘의 봄 쑥도 향이 짙다. 하산 길에 욕지도 섬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이름없는 제당도 들렸다. 수원지쯤 내려오면 선착장을 중심으로 아늑한 섬마을이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간다. 삼층 이상의 건물이 왜 없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이 서로 앞마당과 다름없는 포구의 풍광을 서로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임을 섬사람들은 안다.
작은 섬 작은 포구에서 고등어 회를 먹는다. 욕지도에 오면 꼭 고등어회를 맛봐야 욕지도를 갔다 왔다고 큰소리 칠 수 있단다. 고등어란 어종은 성질 한 번 괴팍해서 잡기가 무섭게 제 혼자 제 성질을 부리다가 금세 제풀에 죽는지라 싱싱한 회를 먹어보기 힘들지만 얼마 전부터 욕지도에서는 고등어를 기르는 가두리 양식이 성공을 거두어 등 푸른 고등어회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란다. 입가심으로 가자미쑥국을 먹는데 욕지도의 섬과 천황산을 통째로 맛보는 만족감이다. 통영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통영의 섬에 빠져 통영의 세월을 렌즈에 담아온 이상희 사진작가는 통영의 섬을 일컬어 "별 하나 떨어져 섬이 되었다." 라고 감탄을 하는데 욕지도도 그 별 중 하나일 게다.
배를 기다리며 멍게와 해삼을 안주로 소주를 마신다.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은 량의 술은 배멀미를 억제 시키는 멀미약 구실을 한다고 우기는데 원체 멀미를 모르니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준다.
욕지도는 지독한 욕을 해대는 섬이 아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섬은 더욱 아니다.
“그래, 너 잘났다. 욕지도, 너는 지독히 아름다운 섬이다."
불갑사 상사화 절정
전남 영광
불갑사 - 장군봉 - 구수재 - 연실봉 - 해불암 동백 골 - 불갑사 - 주차장
다섯 시간을 운전한 끝에 불갑사 일주문에 도착한 것이 새벽 5시였다. 영광까지 400km를 찍은 걸 보니 진주라 천리 길이라더니 전남 영광도 천리 길이다. 시래기 된장국이 맛있었다. 덜 깨어난 하늘에 보름달이 떠있으니 한가위 달빛산행이 아닌가? 관음봉을 지나 투구봉까지의 길섶으로 진분홍 상사화가 붉은 꽃대로 일렁이고 있었다.
장군봉을 오를 무렵이 돼서야 굴참나무 사이로 아침햇살이 바닥까지 번지는데 온산이 붉고 또 붉고, 초가을 불갑산이 죄다 불게 탄다. 서어나무 아래도, 바위 틈새에도 온통 진분홍 상사화가 떼거지로 피었으니 침침한 눈이 호강을 한다. 연실봉을 돌아 구수재를 넘어설 때 동백골로 이어지는 실개천을 따라 진분홍에 연분홍의 상사화가 골바람에 출렁이고 불갑사 지붕과 맞닿은 언덕아래 건넛산은 구름도, 상사화도 호수에 풍덩 빠지니 빨간 물감을 쏟아 부은 것 같다.
예닐곱 살 되던 유년 시절의 어느 초봄이던가, 뒤란으로 배꽃이 피기도 전에 언 땅을 헤집고 뭉툭한 새순이 올라왔다. 부들처럼 두툼한 잎은 무릎 만큼 쑥쑥 자라는가 싶더니 여름이 되기 무섭게 시들어 버리고 그 자리에 젓가락 같은 꽃대가 올라왔다. 텃밭에서 참깨를 털 무렵에 연분홍 꽃을 피워냈으니 어머니는 측은꽃(?)이라고 했다. 측은 꽃, 잎이 있을 때 꽃을 볼 수 없고 꽃이 필 때 잎이 없으니 오죽이나 측은했던가. 그러다 불갑산의 상사화를 본 것이 1993 년쯤이었다. 1991년 가을, 원주문화방송 창사기획특집 담당프로듀서로 "1인 창무극 공옥진" 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공 여사를 알게 되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상사화 보러 오라는 기별이 있었기에 1993년 가을 공옥진 여사와 불갑사를 찾게 되었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에 이르기까지 상사화가 떼 지어 피었는데 다저녁 석양과 어우러져 노을보다 더 붉게 타고 있었다. 어릴 적보고 두 번째 보는 상사화다. 공 여사는 창무극을 끝내고 공허할 때 마다 불갑사를 찾는다고 했는데 그날도 수산 주지스님과 함께 세 사람이 수산 스님의 유명한 전다 (錢茶)차를 마셨다. 생전에 공 여사는 상사화를 무척이나 좋다고 했다. 말쑥한 꽃대에 새색시가 족두리를 쓴 것 같은 꽃송이가 좋았고 길게 옆으로 뻗다가 꼬리에서 슬쩍 치켜든 꽃수술이 버선의 코끝 같아서 좋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상사화는 기이한 꽃이다. 나리꽃 같지만 마디마디 마다 피는 나리꽃과는 다르게 꽃대의 꼭대기에서 꽃이 피는 게 다르고, 하늘나리꽃 같지만 더 우아하게 피는 꽃이 상사화다. 이른 봄발등에 툭툭 떨어져 시드는 선암사 동백이 지는 것과는 다르게 상사화는 땅에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길쭉한 꽃대에서 자글자글 말리며 시든다. 잔치국수에 빨간 실고추 고명을 얻은 모양새다.
목조삼세불이 모셔진 대웅전을 나오면서 작은 스님으로부터 백양사 방장으로 계시던 수산스님이 작년 3월에 이곳 불갑사에서 입적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20여년 만에 꼭 만나고 싶었던 스님이었다.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천왕문을 나서는데 상사화 꽃밭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군데군데 주차장이 넓은데도 8km 구간이 되도록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상사화축제가 글피가 지나면 막을 내린다. 그러나 영광 불갑사 상사화는 시월 초까지 꼿꼿이 피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떠나자! 상사화 꽃이 언제 어디서고 쉽게 보는 꽃이던가. 뜨락 아래 봉선화, 채송화, 과꽃이라던가.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풍경이 한가로운 불갑사의 상사화 꽃길로 가을 마중하는 건 어떨까?
모래주머니 던지기하는 오목눈이
경북 문경, 충북 괴산
조봉으로 오르는 아침 산길이 촉촉하다. 왼쪽 모퉁이로 꺾어지면 조령산이고 내친걸음을 이어가면 백화산이다. 건너 산의 골안개가 아래 산자락 계곡을 다 채우고 능선을 따라 싱그럽게 번진다. 덜 여문 산벚 열매가 밟히는 것을 보면 간밤에 비가 내렸었나보다. 산초나무에 매달렸던 아침 이슬이 톡 쏘는 진한 향기를 콧잔등에 묻히고는 등산화에 떨어지고 바짓단 언저리엔 노란 얼룩이다. 양지 녘 모퉁이를 돌아설 때 애기똥풀에 채였던 모양이다. 햇볕드는 곳이면 담벼락이든 언덕이든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애기똥풀 꽃을 깊은 산중에서 본다는 게 의외다. 갓 태어난 아기의 배냇똥처럼 샛노란 색깔이다. 꽃 색깔을 이처럼 잘 표현해준 꽃말이 또 있을까싶다. 갓난아기나 애기똥풀이나 별반 먹은 게 없으니 기분 상할 정도의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물을 마시며 간식을 꺼내는데 아주 가까이서 새소리가 들린다. 바로 머리 위 어디쯤일 텐데, 이 나무 어디에도 새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청아하다. 산속을 오랫동안 걷다보면 이쪽 계곡에서 듣던 새소리가 저쪽 능선에서는 다른 새들이 몰려나와 울어댄다. 더 걸으면 숲속 여기저기에서 서로 다른 음색과 선율로 산촌의 아침을 노래하는 산새들이 있어 청량한 아침이다. 싱그럽다.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들어보면 새들도 한 소절 한 소절 그네들만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찌지지 찌지지“ 한 박자 쉬고 다시"찌지지 직지 찌지 지 직" 하면서 울어 제친다. "우 주르르 루" 하며 우는 새에 ”뚜 루루 루" 하며 방울 굴리듯 노래하는 방울새도 있다. 우는 걸까, 노래하는 걸까, 말하는 걸까, 때론 비바체로, 때론 안단테로 일정한 간격의 리듬이다. 아무렇게나 우는 새는 이 세상에 없다. 다 정해진 그들만의 대화가 있으리라. 고유의 음역과 음색이 있으리라. 서로 소통이 서툰 인간과 같으랴.
후박나무와 산벚나무 아래 으름넝쿨 우거진 숲속에 가보라. 한쪽 숲에서 박새 무리가 떼 지어 울어 대면 또 다른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합창으로 화답한다. 볕 한가한 숲속 운동장에서는 텃새들이 떼로 몰려나와 날개를 퍼덕이는 기마전이 한창이고 또 다른 숲속에서는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청군백군으로 편을 갈라 병꽃나무 꽃수술을 향해 일제히 모래주머니 던지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시끌벅적 별게 아닌데도 산새들이 까르르 웃고 있었다. 이쪽 산이 번잡한데 큰 산 너머 희양산의 뻐꾸기는 왼종일 울어대지만 다저녁까지 그칠 기미가 아니다. 일정하게 정해진 박자대로 느릿느릿 한참동안 뻐꾹뻐꾹 세월아 네월아 느긋하다.
새소리만이 아니다. 비가 그치면 가장 먼저 부산을 떠는 소리가 있 다.매미다. 적게는 이삼 년을 많게는 십수 년을 번데기로 암흑 같은 땅속에서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고 우화에 우화를 거듭, 세상의 밝은 빛을 보는 매미다. 기다림의 시간만큼의 생애가 보장되지 않는 것을 매미는 이미 예감하고 태어났다. 청량하게 또는 시원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듣노라면 애달픈 울음을 토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학산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여한이 없이 우는구나. 이제 백화산 정상까지 암벽 너더댓 굽이가 기다린다. 듬성듬성 함박꽃나무가 보이고 조팝나무가 희디흰 얼굴로 산행 길을 앞지른다.
이즈음 초여름의 산꽃은 여기저기 흰 꽃들 지천이다. 지근지근 머리가 아프도록 진한 향기를 토해내는 아카시아 향은 이미 콧속을 거쳐 목젖을 콕콕 누르고 있고, 개울가 찔레꽃은 그 향기가 고급스럽다. 몇 개 되지 않는 적은 홑잎에서 어찌 이처럼 고혹적인 향기를 발산할까. 원초적 향내를 지닌 강렬한 꽃이다. 때마침 하늘에 새털구름 한 덩이 흘러간다. 개울가의 찔레꽃이 새털구름을 닮았다. 참 곱다. 흰 꽃은 또 있다. 산돌배나무도 하얗고, 고광나무도 하얗고, 함박꽃나무와 쪽동백, 조팝나무도 하얗게 계곡을 덮는다. 필 때도 질 때도 아무런 치장
도 하지 않는 미백색의 흰 꽃이어서 더 곱고 더 우아하다.
그런가하면 다른 색깔, 진한 빛으로 우쭐대는 꽃이 있다. 큰앵초꽃이
다. 큼직한 떡잎을 아래로 깔고 붉디붉은 꽃잎으로 빨갛게 꽃피우며 시선을 유혹한다. 70년대 다방이라는 만남의 장소가 있었고 거기에는 화장 짙게 한 미담이 있었다. 큰앵초 꽃색깔의 입술이었다.
백화산 정상을 목전에 두고 잠시 배낭을 나뭇가지에 걸고 있는데 붉은 자주 빛 엉겅퀴 꽃잎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산각시원추리 꽃대에 냉큼 앉는다. 작은 바람에도 휘청휘청 꽃대가 일렁일 때마다 긴 날개를 펴고 왔다갔다 그네를 타고 있었다.
이제 물길따라 하산이다. 사다리재를 넘는 하산 길도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닥 큰 산은 아니지만 백두대간을 가르는 딱 절반 지점의 산으로 1,064m 높이의 듬직한 산이다. 열두서너 봉우리를 오르고 나서야 안말로 내려서는 돌무더기 가파른 경사 너덜길이다. 한 시간 정도 숲을 빠져 나오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낙엽송 밭을 지나면서 외딴집 산촌의 빨간 지붕이 보였다.
큼직한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하얀 찔레꽃이 한 송이 바람을 타고 물결 이는 대로 떠내려 온다. 명치끝까지 시원하다. 개울가 언덕으로 산딸기가 새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스물한 살 앳된 처녀의 젖꼭지였다.
내연산 20리를 적시는 12폭포
경북 포항
그때는 바람찬 늦가을이었다. 보경사의 노송과 느티나무 길을 지나 후미진 언덕을 치고 오르다보면 빼곡이 우거진 대숲이 보인다. 대숲이 끝나는 모퉁이에 아주 작은 암자가 있었다. 문수암이다. 마당 끝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고 뒤란에도 또 한그루 감나무가 문수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을 열어주고 있었다. 늦가을 바람으로, 초겨울 바람으로 홍시가 되는 바람이었다. 절반쯤 열려있는 사립문 사이로 암자의 봉당 끝에 스님의 털신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문수암의 홍시는 까치밥으로 그냥 놔두려나보다. 학소대 언덕을 지나 문수산 정상에서 청하골 계곡을 내려다보면 내연산의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삼지봉 정상에서 향로봉을 찍으면 비로소 청하골로 내려섰던 지루한 산행으로 여직 기억에 남아있는 산이었다. 그리고 십 년 만에 찾은 내연산이다.
오늘은 하옥리 향로교에서 시작하는 산행이다. 들머리부터 가파른 오르막 능선이다. 호흡은 거칠고 걸음은 굼뜬 것을 보면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다. 흔한 푯말도 볼 수 없으니 더 지루하게 느껴진다. 향로봉 정상이다. 멀리 눈길을 주면 동해의 호미곶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이 그려지고 뒤쪽으로는 내륙의 주왕산으로 달리는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동해안 쪽으로 가지를 튼 산이 내연산이다. 그늘에서 도시락을 먹고 고메이등을 따라 구릉으로 내려섰다. 12폭포가 쏟아지는 갑천계곡이며 여기가 곧 청하계곡이다.
등산로 오른쪽으로 물소리를 듣고 내려서면 온통 다래넝쿨이 숲을 이루고 한껏 몸을 숙여 숲을 빠져 나오면 12폭포 가운데 먼저 만나는 시명폭포를 볼 수 있다. 장대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금강산 구룡폭포나 설악산 비룡폭포와는 비견 할 수 없겠으나 올망졸망 아기자기한 열두 개의 폭포가 지근거리에 모여 흐르는 모습은 너무도 정겹다. 한 올 한 올 가느다란 물줄기가 실타래 엮어 풀어놓는 잔 물살이 실폭포로 부서진다. 너른 바위를 흐르다 희디흰 물결이 은빛을 띠고 있어 은폭포다. 관음폭포 바로 위에서 학소대 기암의 웅장한 절벽아래로 연산폭포가 굵고 거센 물줄기를 쉼 없이 쏟아낸다. 그리고는 웅덩이에서 두서너 번 서성이다 관음폭포에서 신비의 용트림을 한다. 우묵한 바위 아래 양 옆으로 큼직한 동굴을 형성하고 태초의 모습 그대로 두 줄기의 폭포를 만든다. 탐방객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다.
시명폭포로부터 시작된 20리 청하계곡은 상생폭포까지 내려서면 개여울도 잔잔하다. 보경사 소나무 숲이 보인다. 저녁 공양을 준비하는 스님의 손길을 따라 추녀 끝에 풍경소리가 가늘고 은은하다. 내연산 자락의 저녁바람이었다.
혹한의 발왕산
강원 용평
곧은골 - 발왕재 - 헬기장 - 발왕산정상 – 철쭉오름 쉼터 - 약수터 - 스키장 리프트
추워야 겨울이다. 눈이 펑펑 쏟아져야 겨울이다. 15년 만에 찾아온 강력한 한파라지만 쉽게 미룰 수 없기에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겨울 산행의 백미로 꼽히는 대관령 발왕산이다. 큰느삼동 황토팬션을 지나 윗곧은골을 들머리로 잡았다. 좁은 포장도로가 끝나는데 계곡으로 오르는 탐방로가 눈보라에 묻혀 흔적조차 없다. 산행지도를 펴보니 능선 하나를 생략하고 엉뚱한 계곡을 타고 있었다. 길도 없는 구릉의 허리를 가로질러 능선까지 왔다. 예상대로 노란 리본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길을 제대로 찾은 듯하다. 아뿔싸, 길이 또 사라진다. 허둥지둥한 시간 반을 헤매고도 등산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덜컥 겁이 난다. 행동식을 꺼내는데 물도 얼어 있고 과일도 탱탱 얼어있다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 두 마리가 눈밭을 쏜살같이 내려 뛴다. 습관처럼 카메라의 버튼을 눌렀다. 먹통이다.
오늘 서울이 영하 18도였다는데 발왕산의 기온은 영하 28도 이상일 것이고 체감온도로 따지면 영하 40도는 족히 되리라. 설악산도, 오대산도 그리고 치악산까지도 혹한에 일어날 산악사고를 염려해 벌써 엿새째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 않은가? 한발 내딛으면 반발은 비탈 아래로 밀리고 헛딛은 발은 허벅지까지 빠지는 남루한 겨울 산이다. 응달이 깊어 적막하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의 힘은 점점 쪼그라든다. 발왕재 방향을 타야하는데 또 능선 하나를 잘못 집은 게 분명하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을 러셀로 치고 나가는 대장은 산행 경력20여 년 된 베테랑이니 겉으론 안심하는 척하지만 솔직히 안심 반 걱정반이다. 겨울 산행 중 조난당하는 사례가 이와 유사할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는 이런 말로 겁을 준 적이 있었다. "인석아, 너 요즘 딴생각 하고 있지,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사실 딴생각을 많이하던 때였다. 귀신같은 어머니였다. 오늘 정말 개고생이다. 눈만 빼꼼히 내민 중무장인데도 코끝이 시리고 얼굴이 아려 온다. 아까부터 두 볼의 살점은 감각도 없고 입술은 마취에서 막 깨어난 부위처럼 발음도 새나간다. 푹푹 빠지는 눈밭에 발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둔해지고 손도 시려온다. 손을 녹이던 비상용 손난로를 카메라의 뱃더리에 한참을 문지르니 몇 장의 사진이 찍히고는 또 먹통이다. 8부 능선쯤 올라서서야 반들반들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개고생 끝에 생기가 돈다.
능선 저쪽으로 용평스키장의 직벽 슬로프 꼭대기의 곤드라 옥탑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정상은 멀지만 이제 살았다 싶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생각난다. 지난 12월 펑펑 눈이 쏟아지던밤이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할 때가 가장 감동적인 무대였다.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의 연주회였다. 그가 무대 인사를 한다.
“저 여기 사람 이예요.”
인간은 가끔씩 엉뚱한 생각으로 반전을 꾀하려드는 경우가 있다. 플릇, 오버에, 클라리넷과의 앙상블 연주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바람을 안고 발왕산을 내려온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린다. 동계올림픽의 성패는 계절과 연관이 깊다는데 제발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이었으면 싶다. “겨울아! 너도 자존심 하나는 있을 것 아니냐?”
변산반도 능가산의 봄
전북 부안
남여치 - 월명암 - 선녀탕 – 직소폭포 –재백이고개 관음봉 - 내소사 - 전나무숲길
키 작은 조록싸리의 마른 대궁에 새순이 돋는다. 국수나무와 덜꿩나무 가지 끄트머리에도 연초록 새순이 움을 티우고 병꽃나무와 노린재나무도 계절의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거무티티하던 구릉과 계곡이 초록으로 변신을 시작한다. 남녀치 오솔길로 실바람이 불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언덕으로 오만가지 새순이 신명나게 볼기를 흔들어 댄다. 소나무 언덕을 내려서는 가르맛길 언저리로 노란 꽃다지가 피었고 노랑나비 날아간 자리에 하얀민들레가 아까부터 봄볕에 졸고 있다.
월명암의 작은 돌담이 보인다. 그 담장의 버덩에 자리를 잡은 상사화는 부들같이 두툼한 싹을 키우고 있다. 싹이 웃자라고 싹이 꺾기고 새로운 꽃대가 올라오고 그렇게 기다린 구시월 가을이 되면 상사화로 피어날 것이다. 선운사 꽃이 다르고, 불갑사 꽃이 다르고, 월명암 꽃이 다르다. 선운사는 빨강의 꽃무릇이 피는데 반해 불갑사는 꽃무릇에, 진노랑상사화, 붉노랑상사화, 개상사화, 백상사화 그리고 백양꽃이 석어서 필 것이요, 월명암은 전다지 노랑 색깔의 붉상사화만 피어난다.
얼마나 봄물이 맑았으면 봇도랑 한 가운데 도롱뇽이 동그랗게 똬리를 틀어 알을 까놓았을까? 장한 일을 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월명암은 허구한 날 불자들이 예불을 드린다고 한다. 대웅전을 나서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삽살이를 만난다. 절집에 있는 개를 터줏대감이라 부르기엔 민망한 일일지 모르지만 긴 털의 이 개는 순둥이로도 이름이 나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주지만 이미 오래전에 득도를 했다는 듯 무개념, 무소유의 자세로 싱긋싱긋 웃는다.
산사의 불경소리를 뒤로하고 봉래구곡으로 향한다. 신선대의 신선샘에서 발원한 물이 대소보와 직소를 휘돌아 분옥담과 봉래곡을 거쳐 해창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말하는데 어찌나 물이 맑은지 참종개 무늬를 몸에 두른 부안종개가 토종물고기란 명찰을 달고 살아간다. 피라미도 살고 버들치, 동자개, 꺽지도 봉래구곡에서 산다. 산행을 하면서 왼쪽으로 흐르는 계곡이 봉래구곡인데 기암괴석을 만지며 흐르는 물이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한다. 실질적으로는 직소보와 직소는 구분할 수 있지만 분옥담과 봉래곡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선녀탕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소가 오막하고 넓은 편이다. 가까이 얼굴을 대면 땀방울까지도 그려내는 호수다. 하얀 조팝나무 꽃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선녀탕까지 왔다
분옥담에서 모퉁이 하나를 돌면 시야가 트이면서 멋드러진 폭포를 만난다. 부안 2경인 직소폭포다. 30m 높이의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압권이 아닐 수 없다. 직소폭포를 보지 않고는 변산반도를 말하지 말라 했으니 멀리서 한 번 보고 가까이 들어가서 또 볼일이다. 꼭 폭포아래 발을 들여놓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가슴 저 아래까지 시리고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여름에는 더 이를 말이겠는가? 그리고 다시 폭포를 옆으로 보면서 직소보로 향한다.
호수를 낀 긴 목책이 있고 반원형의 전망대도 있다. 막 피어나려는 진달래의 기지개를 보며 수수꽃다리와 버들개지는 흠뻑 봄물을 마시고 있다. 호수가 끝나는 방향으로 물안개 피어오르고 봉래골 멀리 관음봉이 보인다.
관음봉까지는 그야말로 지루한 산행이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깊은 산중이고 벼랑에 모퉁이고 바위 언덕이다. 관음봉 삼거리에 서면 석포리 앞바다가 밀물처럼 밀려올 것만 같다. 서해 쪽으로 시야가 터진 소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축인다. 곤줄박이 한 마리가 소나무 끝까지 솟구쳐 날아오르다가 잽싸게 거꾸로 내려앉는다.
관음봉 아래로 내소사의 궁궐 같은 절집이 보이고 전나무 숲 툭 터진 외변산 줄포만으로 드넓은 바다가 찰랑인다. 벅찬 감동의 풍광이다. 새봉 줄기의 청련암과 지장암이 감싸고 오른쪽의 신선봉 자락이 내소사를 껴안고 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이지만 절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전나무 숲을 지나 내소사로 들어간다. 사천왕문에 기댄 하얀 백매가 곱게 꽃을 피웠다. 대웅보전 바로 아래 담벼락에는 또 한 그루의 홍매가 빨갛게 익은 채로 매향을 뿌리며 넓은 마당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산행이 바쁘더라도 내소사는 샅샅이 살펴보시라. 단층팔작지붕의 목조건물인 내소사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은 단청이 바랜 채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러기에 더 중후한 멋이 풍긴다. 기둥을 보자. 원기둥으로 이어지다 모서리에 와서는 배흘림으로 잔뜩 멋을 냈다. 키높이의 문짝은 또 어떤가. 연꽃과 국화무늬 꽃창살로 장식을 마쳤다. 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도 영원히 시들지 않을 내변산 꽃으로 남기 위해서다. 전나무 숲이 멀어지고 있다. 언젠가는 또 올 것이다. 변산반도의 산과 바다와 내소사의 봄이 몸살 나게 그리워지면 다시 찾을 것이다. 대웅보전의 홍매 꽃그늘 아래를 서성일 것이다.
치악산의 가을 향취
- 어머니의 젖가슴 -
강원 원주, 횡성
관음사 - 주막거리옛터 - 고든재 – 비로봉정 – 사다 리병창 - 세렴폭포 - 구룡사 - 학곡리 주차장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산기슭을 가면 꽃밭머리고 낙엽송 그늘을 지나치면 관음사 계곡이다. 조근조근 들려주는 개울물소리를 듣는데 벌써 치악산 주막거리옛터에서 배낭을 내려놓는다. 객지가 고향같이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서울에 눌러 사는 타관의 친구 여섯이 고향의 산엘 가겠다며 치악산을 찾았다. 몇 해 전부터 벼르던 산행의 약속이 친구의 여식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고향에 왔다가 이루어졌다.
느슨한 발걸음이지만 딱히 나무랄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면서 뒤에서 보조를 맞춘다. 학창시절, 시위하다 쫒기는 신세가 돼 사나흘 내 집에 머물다가 몇 자 적어놓고 떠났던 젊은 친구였는데 등산모자 사이로 숯도 빈약한 흰머리구나. 너나 나나 같겠지. 고든재를 오르는 계곡으로 오색 단풍이 물들었다. 고든재 정상에서 능선을 타면 오른쪽은 향로봉과 남대봉을 거치는 상원사 방향이고 왼쪽은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 가는 능선길이다. 부곡 어디쯤의 계곡에서 짙은 안개를 헤집고 바람이 불어온다. 샛노란 음나무 이파리가 내려앉는다. 누른빛 함박꽃나무가 뒹굴고 빨갛게 익은 옻나무 갈지자로 휘청거리며 떨어진다. 사위가 보낸 술이라며 진도 홍주를 내놓는 고척동 친구가 딸 자랑 사위 자랑이다. 등산로 너럭바위에 앉아있던 또 다른 친구는 산에서 웬 똥냄새냐고 묻는다.
어릴 적 사랑채 너머로 보이던 두엄더미가 생각난다. 이른 아침이면 두엄더미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퀴퀴한 두엄냄새가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치악산 능선에 가을 낙엽이 차곡차곡 쌓인다. 선홍빛 당단풍 한 잎 길 위로 떨어진다. 아, 어머니 가슴에서 풍기던 그 냄새다. 밭일을 끝낸 어머니가 대청마루에 앉기가 무섭게 난 당신의 젖을 찾았다. 서른 살 터울의 큰형이 빨던 어머니의 젖이었다. 둘째, 셋째, 넷째 그렇게 순서대로 먹던 어머니의 젖을 맨 마지막으로 내가 빨았는데 쭈글쭈글 탄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늘어진 젖이었다. 마늘밭을 매고 들어올 때는 어머니의 젖가슴은 눈이 시겁도록 매웠고 채마밭에서 개구리참외를 따올 적에는 향긋한 과일향이 풍겨났다. 가끔은 앞가슴에 작은 생채기가 났으니 그날은 필시 옥수수 밭고랑엘 다녀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누른색 삼베적삼을 헤치고 어머니의 젖가슴을 빨았다. 팔남매가 매달려 빨았으니 젖꼭지도 짙은 갈색이다. 젖이 나올 리 만무하다.퀴퀴하고 시큼한 냄새가 난다. 하루 종일 콩밭으로 두엄을 퍼 나른 어머니였다. 60여 년 전에 맡아봤던 기억이 서울 친구를 만나서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비로봉 정상을 오르는데 복자기 붉은 잎이 발에 밟힌다. 소나무 마른 잎이 쌓이고 핏빛 화살나무 잎이 덮인다. 비로봉 정상을 내려오는데 또 빨갛게 익은 가을바람이 분다. 밭일을 끝낸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맡아보던 흙냄새요, 푸성귀 냄새이고, 두엄냄새였다. 관음사 계곡에서도, 곧은재 정상에서도 그리고 비로봉 정상에도 문득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다리병창을 내려오면서도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풍기던 어릴 적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 오늘따라 당신이 무척 그립습니다."
천태산 암벽 산행
충북 영동
영국사주차장 – 진주폭포 – 삼단폭포 – 영국사은행나
무 – 미륵길 암벽코스 – 천태산 –남고개 –원각국사비
망탑 – 영국사 - 주차장
살얼음 녹는 봇도랑을 건넜다. 야트막한 산마루를 내려서면 진주폭폭가 너럭바위를 타고 봄물로 흐른다. 겨우 내내 어깨에 멘 얼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느티나무 고목을 껴안고 비탈길을 오르면 세 번을 굽이치는 삼단폭포가 마중한다. 절집에 들어오려면 정갈하게 몸을 단장하라는 뜻이겠거니 하면서 쪼그리고 앉아 손을 씻었다. 멀리 영국사가 보이는데 은행나무가 워낙 커서인지 작은 절집 같다. 조용하던 영국사 계곡으로 일제히 개구리소리가 들린다. 된 신음으로 운다. 때를 같이하여 스님의 목탁소리도 이내 멈춘다. 개구리는 또 울어댄다. 가까이 갔다. 일제히 울음을 멈추고 경계심을 드러낸다.
영국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를 지나면 부들과 미나리와 물매화가 사계절 수초로 자는 연못을 만나게 된다. 연못에서 겨울잠을 지낸 개구리가 영국사에 아침이 왔다는 전갈을 보내는 신호였고 아침공양을 알리는 산사의 신호였으며 봄이 왔다는 외침이었다. 아침예불을 드리던 작은 스님은 개구리소리에 키득키득 웃고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천태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국사를 들르게 되는데 우람한 풍채의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기품과 절개가 있는 나무다. 영국사 턱밑에서 천년을 지켜왔으니 이 절집의 주인이고 산증인인 셈인데 때문인지 영국사에는 사천왕이 지키는 사천왕문은 없고 천년 은행나무가 사천왕문을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
영국사는 나라의 흥망을 예견하는 절로도 유명하다. 절이 쇠락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절이 크게 번성하면 나라가 흥한다는 해남의 대흥사(大興寺)처럼 영국사(寧國寺) 역시 이 영국사가 존재하므로 나라가 편안하다는 절이다.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1,300년으로 추정되는데 영특한 나무로 가을마다 당산제를 지낸다. 1974년과 2003년 국가적인 사건이 있기
하루 전날, 이 은행나무는 밤새 울었다고 노교리의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봄바람이 일렁이는 키 작은 소나무 숲길을 빠져나왔다. 2지점부터 5지점 구간까지 계속되는 암릉이다. 밧줄의 긁기부터가 대단하다. <노약자는 절대 안전을 위해 우회 하라>는 안내 팻말이 곳곳에 꽂혀 있다. 우회할까 하다가 노약자가 아니니 직진한다. 구간 구간마다 안전대장과 등반대장, 구호대장이 손을 잡아준다. 100여m를 오르면 암릉 이고, 소나무 밑 둥을 밟고 오르면 또 암릉이다. 마지막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에서는 한사람씩 오르다보니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영국사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쉬었다.
소나무 조붓한 노루목 고갯길로 천태산 정상석이 보인다.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남기는데 한꺼번에 탄성이 이어진다. 입춘 날의 눈이었다.
그것도 함박눈이었다. 절기를 잊고 내리는 눈이니 꼭 길조는 아닌 듯싶지만 좋게 해석하면 좋은 것 아닌가. 회색빛 하늘에 가느다란 바람을 타고 천태산 정상석에 내려앉는다. 심술부리는 바람을 타고 둥둥 춤사위를 타고 있는 걸 보면 겨울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나 보다. 8부 능선을 내려오자 성근 눈발이 약해진다. 한 번 더 바람이 지나가고 싸락눈으로 변한다. 남고개쯤 내려서는데 빗방울로 변한다. 봄이 오기까지는 계절도 심한 몸살을 한다. 하산 길에 망탑봉의 영국사 삼층석탑(보물 제535호)은 꼭 봐야한다. 화강암으로 기단을 만들고 3층으로 탑신을 올린 온전한 모습의 아담한 탑이다. 영국사가 가까운 뒤란을 내려오면서 연꽃 문양의 부도 석 점도 봤다. 하산 길에 문화유적을 만나는 것은 덤이자 산행의 쏠쏠함이다. 오래도록 내릴 비가 아니기에 영국사 봉당에서 비를 피했다.
삼단폭포를 돌아서는데 산까치 내외가 갈참나무 끝가지에 집을 짓고 있었다. 기둥을 세우겠지. 용마루 올리겠지. 서까래 얹겠지. 벽채도 엮겠지. 갈참나무 언덕으로 쏟아지는 햇발이 헤프게 웃는다. 아지랑이 한보따리 퍼 담아 가야지.
환상의 섬 소매물도
경남 통영
저구항여객터미널 - 선착장 – 동백나무숲길 – 남매 바위 - 망태봉 - 열목개 - 등대 - 선착장
빗속에 무슨 등산이냐고 투정을 부릴 만한데도 끽소리 없이 차에 오른다. 자정을 넘기면서 출발했으니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본다. 몇 해 전 외도라는 섬을 다녀온 경험을 빼고는 오직 자기 집 안방 밖에 모르는 친구가 서툰 잠이 불편했던지 자리를 뒤척이며 구시렁거린다. 옆 좌석의 움직임에 덩달아 불편함이 전염되는 것일까. 목베개를 꺼내 자세를 고쳐보지만 그럴수록 까만 밤에 멀뚱거리는 자신의 눈이 어른거릴 뿐이다. 이럴 땐 숫자를 100까지 세면 잠이 온다지만 평소 별 효험을 보지 못한 터라 생각을 바꿔 어릴 적 고향을 떠올리며 잠을 청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 어귀로 소동개울이 흐르고 그 너머로 석탄 실은 화물열차가 삼봉 모퉁이를 도는 철길 건너로 비끼재가 보인다. 사과 과수원을 지나 감악산이 너무도 높게 보이던 고향, 콩깍지와 쌀겨를 섞어 쑨 쇠죽을 여물통에 부으면 게걸스런 황소는 워낭을 떨렁이며 더운 쇠죽을 먹고 있었다. 빈 여물통을 핥는 것을 보면 잔뜩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더 퍼다 줘야지. 더 퍼다 줘야지.” 하는데 “형님 뭘 퍼다 줘요?” 산행버스에서 잠꼬대를 한 것이다.
저구항여객터미널에서 매물도와 소매물도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이 울리자 부둣가 여기저기서 실눈 뜨고 눈치를 살피던 갈매기들이 여객선 주위를 선회한다. 선뜻 먹이를 얻지 못하자 배란기의 숯 고양이를 유혹하는 암고양이처럼 요상한 소리를 내며 더욱 집요해진다. 선미로 나온 여행객이 새우깡을 던져준다. 괭이갈매기가 분명한데 바다 속을 헤엄치며 새우를 잡겠다는 노동의 가치 따위는 접은 지 오래다. 멀리 가까이 다가오는 다도해의 섬들, 청옥 빛 바다에 점점의 무인도가 해무에 잠긴다. 매물도의 장군봉이 보이고 대항마을 너머로 꼬들개를 사이에 두고 소매물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선착장에서 이어지는 조붓한 섬 길은 동백나무 숲길이다. 등대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물때를 잘 맞춰야 한다. 남매바위를 만나는 왼쪽 절벽 길을 도는 것은 한 시간을 지체해서 물때를 맞추자는 의도다. 꼬부라진 황톳길 언덕으로 망망대해 남쪽바다다. 앞뒤좌우 어딜 봐도 오롯이 보이는 건 바다와 섬들이고 해변의 바위산길이다. 소매물도의 동백은 작년 초가을부터 밤낮으로 앓는 소리를 했으리라. 그리고는 첫눈 내리던 상현달이 뜨던 날에 꽃을 피우더니 피고지고를 반복하고 오늘 또 무섭도록 소매물도를 빨갛게 물들인다.
부두에서 시적시적 걸어도 그만인 망태봉 오르는 길을 가보면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멋스러운 섬 길을 만난다. 겉모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걸쳐놨는데 그 투박함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돌계단 말이다. 한 번 만나보시라.
소매물도의 작은 섬 안의 또 작은 산인 망태봉 정상이다. 대매물도의 해품길이 보이고 멀리 홍도가, 더 멀리 을비도가 조망된다. 소매물도의 등대섬으로 간다. 썰물로 막 물이 빠진 열목개는 아직도 물기가 젖어 있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썰물 때면 두 섬 사이에 길이 생기는데 남매바위 길을 돌면서 지체했으니 물때는 잘 맞췄나보다. 밀물 때 바닷물이 잠기고 썰물로 물이 물러나면 70m 의 길이 생기는 열목개 길이요, 하늘이 열리는 길이다. 미끄러운 열목개를 건너 지그재그로 놓인 데크 길을 한참 걸어서 등대 아래에 섰다. 소매물도의 등대섬이구나. 흐렸다가는 잠시 바람이 잦아들고 다시 해무가 번지고 또 하얀 등대를 가리고 변덕이 심한 등대섬이다.다 화창한 날씨였으면 싶지만 간밤을 생각하면 등대섬을 밟을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저기 안개 속 봄을 몰고 오는 남해 바다의 손짓을 본다. 절벽까지 와서는 철썩철썩 그리고 솨아솨아 이른 봄의 바다는 표정까지도 밝고 또 밝다. 더 귀를 기울이면 동글동글 몽돌 구르는 소리가 아득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먼 바다 남태평양을 바라보고 저고리의 앞섶을 풀었다. 옷섶을 헤집고 파고드는 남해의 바닷바람은 분명 봄바람인 것을 소매물도에서 확인한다.
남해의 섬이 보이는 바닷가 창 넓은 자리를 꿰차고 이른 저녁을 먹는다. 해초와 해산물로 채워진 밥상에 해녀들이 갓 건져 올린 전복, 해삼, 멍게가 싱싱하고 어른 손바닥만 한 석화는 목넘이가 잠들기 전까지는 화할 것 같다. 그리고 후식으로 톳비빔밥을 먹는다. 굵게 썬 무를
솥에 깐다. 마른 톳과 쌀을 섞은 후, 막 따온 싱싱한 톳을 잘게 썰어 밥을 짓는다. 모락모락 김이 날 때, 밥을 대접에 담아 방풍나물을 얹고고추장에 썩썩 비비면 뭍에서는 어림도 없는 한량 같은 맛을 느낄 것이다.
대부도는 안산에 있다
경기 안산
대부도관광안내소 – 북망산 – 미인송 – 구봉약수터 갯벌 –개미허리아치교 – 낙조전망대 – 구봉선돌 – 종현어촌마을
서울에 가도 대부도가 있다. 부산에도 대부도가 있고 대전, 광주, 원주에도 대부도가 있다. 경기도 서해안의 대부도는 잘 모르지만 대부도해물칼국수는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전국에서 성업 중인 대부도해물칼국수야말로 오늘날 서해안의 대부도를 알게 한 공로자격이다. 그러나 대부도는 경기도 안산의 서해안에 있다. 대부도에 와야 바다와 갯벌과 노을을 볼 수 있고 조개구이와 바지락칼국수를 맛볼 수 있다. 진짜 대부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황금로에 있다. 대부도는 원래 배를 타야 갈 수 있었던 섬이었다. 그러던 섬이 1994년의 서해안 물막이 공사로 육지와 연결된 땅으로 그 유명한 시화호 끄트머리에 대부도가 있다.
대부도관광안내소부터 섬 트레킹은 시작된다. 상가를 끼고 걸어도 되고 모래사장에 발을 묻어가며 걸어도 되는데 주황색리본과 재색리본이 걸린 곳을 따라가면 된다. 무심코 리본을 따라가지만 여기엔 사연이 있다. 즉 황색의 리본은 노을을 나타내고 재색의 리본은 갯벌을 나타내는 상징의 색상으로 두 개의 리본을 걸게 됐다는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초입은 황토색 짙은 밭두렁을 밟고 가는 듯하지만 곧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서해안의 갯벌과 저만치 밀려가는 바다가 보인다. 신갈나무와 갈참나무가 색바랜 묵은 잎을 달고 새순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청미래덩굴도 빨간 열매을 달고 길섶에 웅크리고 있다.
북망산 정상이다. 북으로는 실미도가 있고
바람 좋은 날에는 페어글라이더들이 점프하는 활공장이기도 하다. 머리만 슬쩍 가릴 정도의 소나무 숲을 나오면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해송이 즐비하고 섬과 섬 사이에 서있는 해송 한 그루가 바로 미인송이다.
달력에 곧잘 나오는 명품 소나무다.
해안의 구릉과 절벽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갯바위와 갯벌이 이어지는 구봉약수터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만조 시에는 물끄러미 바라보지만 간조가 되어 물이 빠지면 잔자갈이 깔린 해변으로 변한 바닷가로 나갈 수 있다. 지금이 그 시간이다. 멀리멀리 나간 물은 오후 서너 시가 넘어야 밀물이 되어 묻힐 것이다. 점심을 먹어도 좋은 장소지만 이곳을 지날 때면 꼭 작은 칼 하나쯤은 준비하는 게 좋다. 갯바위에 붙은 싱싱한 굴을 맛볼 수 있다. 양식 굴 보다야 씨알은 작지만 고소하고 향긋한 맛은 그만이니까.
또 야지막한 능선 길이다. 햇살이 잘 들지 않을 것 같은데 하얀 노루귀가 여기저기 피었다. 노루귀는 제비꽃보다도, 양지꽃보다도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다. 역시 봄은 섬에 먼저 오는가 싶다.
고개 하나를 더 넘어서자 멋진 무지개다리가 나온다. 작은 섬을 사이에 두고 물때에 따라 잠기기도하고 빠지기도 하는 개미허리아치교는 잘록한 개미허리 그대로다.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지며 깔깔대는 사람들은 전망대로 가는 길이 바쁘지도 않은가보다. 바다위로 놓인 높은 데크를 따라가면 해넘이가 가까운 낙조전망대가 바다 한가운데 떠있다. 작은 등대도 옆에 있다.
대부도에 가면 꼭 조개구이와 조개찜을 맛보기를 권한다. 기왕이면 서해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는 게 좋다. 싱싱한 조개를 연탄불 위에 올려놓는다. 얄팍한 모양의 바지락과 대합, 모시조개, 진주조개, 새조개, 소라 그리고 전복도 두 개가 나온다. 목장갑은 왼쪽에만 끼라고 하나만 준다. 연탄불에서 노르스름하게 익은 조개를 맛보는 이 쫄깃한 육질과 향긋한 바다향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대부도에는 조개구이가 무한정 추가로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다. 조개찜을 먹는내내 창을 열어도 좋다. 아무리 서해 갈매기가 거지갈매기라해도 사람이 식사하는 방안으로 들어오는 무례는 범하지 않는다.
- 석줄 멘트 -
서울에서 만난 고교동창이 어울릴 때 오면 좋은 대부도다.
부모님과 와도 좋다. 연인과 와도 좋다. 부부싸움 뒤에 오면
더 좋은 대부도다.
2017. 3. 12 글쓴이 한 필 수
관악산 정상이 응진전이다
관악산 ^^ 서울 관악 경기 과천, 안양
호압사 – 장군봉 – 국기봉 – 거북바위 – 무너미고개
깔딱고개 – 연주암 - 관악산 – 마당바위 – 전망대 관음사
호암산문을 들어서면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산행길이다. 호압사의 일주문인데 호압산문이 아닌 호암산문인 것은 호압사가 있는 삼성산은 호암산(虎岩山)으로도 불렀기 때문이다. 경내에 세워진 노송아래 동자승과 눈인사를 했다.
많은 눈이 쌓인 때문인지 산사를 벋어나자 의외로 한가한 소나무 숲길이다. 흔히 겨울산행은 딱히 볼 게 없다는 이유로 천시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심설산행에 맛들이다보면 겨울산행처럼 뜨거운 산행이 또 있을까싶다. 신록으로 가득한 여름의 풍성함도 아니고 색색으로 현란한 그림을 그리던 가을의 색깔도 아니다. 끝이 안 보이던 숲도 오간데 없고 지난 가을에 잎을 솎아낸 허전한 나무들뿐인데 눈은 무릎까지 치고 올라온다. 너무도 조용해서 빈사상태의 겨울 같지만 겨울 산에 들어서면 산이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다만 우리의 눈앞에 내놓지 않고 숨고르기로 때를 기다린다는 사실이다. 곤충은 곤충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새들은 새들대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겨울나기를 한다. 언 땅을 부여잡고 찬바람을 견디며 봄날을 기다린다. 자연은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 절대 새치기란 없다.
수도권의 산이기 때문인지 여기저기 샛길도 많았고 갈림길도 수없이 이어진다. 멍한 걸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자칫 하산 길로 내려가기도 일쑤다. 암벽을 돌아 장군능선의 국기봉에서 잠시 배낭을 풀고 행동식을 먹는다. 눈이 또 내린다.
학바위 능선에서 이름 모를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수백 년 나이든 노송도 아니고 명품 소나무는 더더욱 아닌 매양 보고 지나치는 소나무였다. 등산객의 잦은 발길로 패이고 뭉개진 탐방로 끄트머리에 쓰러질 듯 서있는 소나무를 누군가가 부목 세 개로 고정시킨 모습이다. 튼튼한 버팀목 세 개를 고정해서 세우고는 철물점이나 슈퍼에서 파는 나이론 끈으로 소나무의 정강이와 허리를 묶은 모습이었다. 그냥 지나치지 않은 관심의 시선이 너무도 고맙다.
팔봉능선에 이르러서는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쏟아진다. 소머리바위를 돌아서는데 연주대로 향하는 산책로가 북적이고 걸음도 빨라진다. 관악산 정상의 암벽이 보이고 벼랑에 기댄 응진전이 낭떠러지 절벽과 어우러져 거대한 조각품 같다. 촛대를 묶어서 세워놓은 듯, 장수가 쓰던 창을 세워놓은 듯, 꺼지지 않는 불꽃인 듯 기암절벽을 만들고 있다. 이른바 화강암 절리현상이다. 효령각을 지나면 관악산 암봉에 정상석이 있고 미로처럼 패인 바위 틈새를 빠져 내려가면 50미터 낭떠러지에 나한법당이 있다. 세 평 남짓한 맞배지붕의 절집으로 지붕이 약간 낮을 뿐, 전통적인 대웅전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 서울이 보이고 고개를 돌리면 과천이고 청계산이다. 연주대는 관악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집결하는 곳이다.
사당능선으로 한참을 내려서면 회색빛 빌딩이 보이고 관음사 지붕과
마주하면 이 보인다. 눈이 그치고 햇살이 든다. 관악산 능선에서 서울사람들의 바쁜 모습을 봤다. 과천과 안양도 내려다 봤다. 약아빠질 것 같은 수도 서울의 관악산 속살을 봤다. 수더분했다.
바다엔 봄이고 성인봉은 겨울인 울릉도
성인봉 ^^ 경북 울릉군
도동항 – KBS울릉중계소 – 팔각정전망대 – 성인봉
배를 움켜쥐고 요란하게 배멀미를 하던 일행도 시선은 이미 울릉도의 기암절벽을 향하고 있었다. 남쪽바다와 서해는 다닥다닥 섬이 많지만 동해는 울릉도 178km뱃길이 망망대해이다. 딱 세 시간의 뱃길이다. 저동항에 내렸다. 바다야채한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25인승 투어버스에 올랐다.
도동항을 거쳐 관음도 까지 기암절벽으로 이어지는 51,6km의 해안도로를 달린다. 통구미해변에서 거북바위를 만나고 현포항을 지나 송곳봉 아래 성불사 경내로 올라갔다. 마침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이 송곳봉에 머무르며 관음상 주변으로 부챗살처럼 펴지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저녁노을이거니 하면서도 관음상을 역광으로 번득이는 빛 퍼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부처가 손 씻은 물이라는 용추수 한 모금 마셨다. 심하게 구부러진 고개를 넘어 나리분지에서 삼나물을 안주로 씨껍데기술이라는 향토술을 먀셨다. 먼발치로 삼선암을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울릉도의 해안도로를 한 바퀴를 완주하려면 56km인데 관음도 까지만 찻길이 열렸을 뿐, 내주전일출전망대까지의 4,4km는 아직 공사구간이다.
울릉도에는 신호등이 딱 두 군데 있다. 울릉읍에 있는 것도 아니요, 저동이나 도동항에 신호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비좁은 터널입구에 신호등이 있다. 의아하겠으나 나름대로 이유가 상당하다. 아홉 개의 터널을 지나는데 남동터널과 남양터널은 가는 차선과 오는 차선 모두가 일방통행의 도로다 보니 빨강과 푸른색의 신호가 차량의 진행을 돕는 체계인 것이다.
저동항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방파제 너머 촛대바위는 주황색 조명으로 밤바다가 아름답고 포구에서는 생선회를 뜨는 손길이 분주하다. 자정이 가까이 돼서야 괭이갈매기가 잠을 청하고 섬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간 이후, 뭍에서 온 나그네가 맨 마지막으로 잠을 청한다. 파도소리 마저 잔잔한 밤이다.
사실 울릉도는 역사적으로 울진과 함께 강원도 땅이었다. 포항이 217km인 반면, 묵호는 161km킬로, 후포항은 159km이니 강원도와 한참이나 가까운 섬이다. 1906년까지 강원도 울릉군에 속하던 땅이었던 섬이, 이런 저런 정치적인 사정으로 강원도와 경상남도를 떠돌다 조선시대에 와서 지금의 경상북도 땅으로 굳어졌다.
새벽 5시50분에 일어나 바다가 보이는 후박나무숲의 제당으로 갔다. 촛대바위 옆으로 떠오를 아침햇살을 봤으면 싶은데 먹구름이 짙게 깔렸다. 뱃머리에 앉아있던 갈매기가 하늘로 솟구쳐 날고, 아침 먹으라는 고함이 들리는 시간이 돼서야 구름위로 올라오는 아침 해를 볼 수 있었다.
성인봉을 오르는 삼거리 갈림길에 왔을 때는 온 천지가 눈밭이고 겹겹으로 눈 산이다. 출렁다리에도 눈이 쌓여있고 팔각정 전망대를 오르는 가파른 능선 길도 무릎까지 빠지는 그야말로 설국이다. 울릉도는 눈이 내렸다 하면 1미터에서 2미터는 보통이고 사나흘을 쉬지 않고 퍼붓는 강설량으로도 유명한 섬이다. 여기 쌓인 눈두덩도 이른 여름이 돼서야 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있으면 한식이라는 절기인데 울릉도는 딴 나라 딴 세상이다. 바다에는 완연한 봄이요, 성인봉 능선은 곤한 겨울잠에 빠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세찬 바람을 동반한 산안개가 몰아친다. 섬산의 정상치고는 꽤나 높은 986,7미터다. 겨울바람과 다르지 않다.
하산 길에 가만히 허리를 굽히면 부지깽이나물이 지천으로 깔렸다. 눈 속에서도 새잎을 피워내는 부지깽이나물은 지금이 첫물로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시기라고 한다. 어제 점심과 저녁 한정식에도 거르지 않고 상에 오르던 울릉도의 나물이었다.
어릴 적 울릉도하면 오징어와 호박엿이었다. 오징어야 그렇다 치고 호박엿은 왜일까 궁금했는데 금세 의문이 풀린다. 울릉도는 더덕이 많이 나는 섬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더덕을 캐낸 자리에서는 다른 작물은 잘 자라지 않았는데 이 호박만은 둥실둥실 익어가더란다. 그래서더덕심고 호박심고 또 더덕심고 호박심고를 반복하니 호박이 지천인 섬이 되더라는 것이 주민들의 이야기다. 그러다 최근에는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명이나물과 삼나물 그리고 부지깽이나물이 울릉도 특산물로 한자리 차지하면서 오징어내장탕과 함께 울릉도 특산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가수 이장희가 LA 한인방송 사장을 그만두고 울릉도에 눌러 앉게 된 것도 바로 부지깽이나물 맛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울릉도에 가면 나리분지에서 삼나물 무침을 맛보라. 쇠고기 씹는 맛에 싸리버섯 요리를 먹는 것 같은 오묘한 미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해가 가슴으로 밀려오는 도동항에서 바다야채한정식을 주문한다. 오징어누른창쌈장에 낙지젓이 나오고 짭짤한 명이나물과 전호나물 그리고 부지깽이나물이 차려진다. 처음에는 비릿하지만 더 씹으면 꼬들꼬들하고 더 씹어서 삼키면 화한 향이 목젖을 지그시 누를 것이다. 동해바다를 통째로 넘겨보자.
북한산 숨은벽 백운대
북한산 백운대 ^^ 서울
밤골 - 샘터 – 해골바위 - 백운대 - 만경대 - 용암문 – 북한산장 – 대동문 – 봉성암 – 중흥사지 -
중성문 – 의상봉 – 대서문 - 산성매표소
사기막골 밤나무 언덕을 지나면 지붕 낮은 국사당이 보인다. 써커스단의 마지막 무대가 끝나고 철수를 하려는 것 같이 어수선한 분위기의 국사당은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덩달아 북한산 숨은벽능선은 아침햇살까지도 이렇게 늑장을 부린다. 깔딱고개 턱밑 약수터에서 배낭을 내리고 시원한 샘물을 마셨다.
눈 쌓인 계단을 너머서자 인수봉의 날렵한 암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보름 전에 내린 첫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일찍 서둘러 산행에 나섰지만 북한산 숨은벽의 등산로는 벌써부터 순서를 기다리는 행렬이 길게 늘어선다. 어깨선이 매끄러운 인수봉을 바라보며 계단을 오른다. 쇠줄을 잡고 오르지만 아래를 보면 아찔하다. 돌아서고 비켜서고 한참을 양보한 끝에 백운대 정상이다. 어김없이 태극기가 휘날린다. 수도권의 산 정상에는 어딜 가나 태극기를 나부끼도록 깃발을 올렸다. 어쩌면 이렇게 촌스러울까 싶지만 늘 봐오던 터라 그러려니 한다. 피부가 미끈한 인수봉이 손에 잡힐 듯하고 국망봉과 노적봉이 발아래 있다. 도봉산과 북악, 남산, 남한산, 관악산이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백운대를 내려오면 북쪽으로 연결되는 원효능선과 의상능선도 있지만 오늘은 숨은벽능선을 탄다. 북한산성은 북한산 줄기의 깊은 골을 따라 능선을 잇고 계곡을 건너 봉우리를 연결하는 긴 성곽이다. 성곽의 안쪽을 따라 걷는 오솔길도 있지만 가끔은 가파른 능선이 있어 지정된 등산로를 택하는 것이 좋다. 만경대를 거쳐 용암문을 지나 동장대 망루에 섰다. 서울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동문에 이르러서는 마치 그 옛날 저잣거리처럼 왁자지껄이다. 널따란 안부가 있어 단체 탐방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칼바위능선 삼거리에서 중흥사지 방향으로 내려오는 산책로 역시 응달이라 눈길이다.
백운대를 조망하는 의상봉에 올라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서울의 사물은 한낱 점이다. 점과 점이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늘 아옹다옹 사는 게 세상살이가 아니겠는가? 서울이 타관이면서 서울사람이 다 돼버린 친구는 얼굴 보기가 쉽지 않지만 서울에 산다. 어쩌다 고향으로 떠나는 막차라도 놓치면 건넌방 하나쯤은 선뜻 내주는 살가운 친구임에 틀림없다. 여태 앞니 빠진 채 호탕하게 웃고 있으니 매일매일 바쁜가보다. 어제도 백운산에 동행하자고 전화를 건네지만 너무 바쁘니 하산해서 소주라도 마시자고 신신당부다. 네가 바쁘면 나도 바쁘다. 그냥 내려가마.
북한산은 백운봉과 인수봉 그리고 국망봉을 아우르는 세 봉우리가 뿔처럼 솟아올랐다고 해서 고려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삼각산이라 불러져 왔다. “삼각산”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지금의 북한산을 삼각산이라 부른 역사적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 예조판서를 지낸 김상헌이다. 병자호란 때 김상헌은 청나라로 붙잡혀 가면서 지금의 북한산을 바라보며 시조 한 수를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어찌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여기서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을 두고 읊은 것이요, 한강수는 한강을 뜻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에 의해서 부르게 된 서글픈 역사기에 이 역시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언젠가는 “삼각산” 으로 고쳐 불러질 것이리라 예상해본다.
연화도에 가면 연꽃은 없고 용머리가 있다
연화도 ^^ 경남 통영
여객선 터미널 - 마을정자 - 아미타재불 – 연화봉
보덕암 - 출렁다리 - 용머리해안 -
스마트폰 컬러링 소리에 내 휴대폰인가 했는데 바로 옆 사람이 받는다. 스마트폰이라는 괴물을 잊고 나왔다는 사실을 안 것은 연화도 선착장을 막 내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초조하거나 답답하지 않은 것은 어차피 되돌아갈 수 없는 통영까지 왔기에 바로 포기하는 순간 홀가분한 자유가 품에 들어와서다.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왔을 때 하루 종일 조바심하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고 신경에 거슬렸던가, 혼을 기계에게 다 빼놓고 사는 별스러운 세상에 바보 같은 현대인들이다.
세계 최고수의 프로 9단 이세돌이 무단의 이른바 인공지능 알파고에
게 잇달아 패하다 네 번째 만에 승리를 이끌어내는 수모를 겪었다. 힘자랑이 아닌 두뇌싸움에서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인간이 지다니 전 세계는 충격이고 경악이다. 이미 로봇이라는 괴물은 사람의 일자리를 가로 챈지 오래고 사람의 손으로 몇 천 날에 겨우 할 수 있는 일을 컴퓨터라는 기계는 단 몇 초 만에 뚝딱 해치우는 해괴한 세상이다. 얼핏 생각하면 편한 세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분명 재앙이다. 우리 인간이 쓸데없이 저질러 놓은 오염으로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루고 있는 건 아닐까? 훗날 인공지능이라는 형체 없는 괴물이 명령을 내리면 불평 한 마디 없이 절절매는 끔찍한 세상이 도래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싶다. 누구 할 것 없이 앞으로 닥칠 재앙이 무섭고 두렵다.
우리가 봄이면 바다건너 섬을 찾는 이유는 뭘까? 아직은 손때를 덜
타고 오염의 정도가 감내할 수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화도는 통영에서 27km 한 시간 거리의 뱃길이다. 포말을 일으키며 연화도로 가는 여객선 뱃머리에 서면 양쪽으로 도열한 섬들이 해병대 내무반에서 막 점호를 취할 것 같은 긴장된 분위기다. 연화도, 연꽃이 피어서 연화도일까? 그렇진 않다. 연화도의 섬 이름은 불경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 연화세계가 곧 극락세계요, 부처님이 상주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해남의 달마산엘 가면 미황사, 달마산, 관음봉, 도솔봉, 도솔암 등 등 불교와 연관이 있는 지명이 곳곳에 있는데 섬의 지명이 불교와 연관이 있는 섬은 통영에 다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욕지면에 속해있지만 욕지면과는 배를 타고 20분 가야만 만나는 섬이다. 연화사에서 합장하고 능선을 따라 망부석바위가 보이는 전망대까지 갔다. 오른쪽 벼랑으로 망부석바위가 보이고 연화도 끄트머리에 용머리가 솟구쳐있다. 용머리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용트림을 달리하는 바위다. 이렇게 보면 용이 바다에서 솟구치는 것 같고 한참을 왼쪽으로 나와서 보면 다시 바다로 들어가려 꿈틀대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해안 절벽 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돼지목과 들물강정으로 가는 출렁다리가 나온다. 어찌나 심하게 요동치는지 섬 여행을 나온 어느 새댁은 다리 난간을 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섬 일주도로를 걷다가 보덕암으로 내려갔다. 보덕암은 바다를 보기위해 벼랑 끝 언덕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불두화가 소담하게 피어있는 절 입구에 해우소가 있다. 대개의 절에서는 해우소를 좀 외졌거나 후미진 장소를 택하는데 여기의 해우소는 마치 대문처럼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 보덕암에 오느라 오랫동안 참았으니 볼일부터 해결하라는 뜻인가, 아니면 마음도 몸도 모두 깨끗하게 정진해야하니 쾌변 후에 부처님을 만나라는 뜻인가? 아, 그런데 해우소 입구에 해괴한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큼지막하게. <전망 좋은 해우소>.
조계산 선암사 해우소 뒷간에 가면 쪼그리고 앉은 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의 화장실인데 전망 좋은 해우소라는 광고(?) 따위를 하진 않는다. 그런데 연화도 보덕암의 해우소에서는 볼일을 볼 때 손뼉을 탁 치며 예의 <전망 좋은 해우소>라는광고에 금세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을 보니 정말 조망이 그만이다. 이런 화장실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으리라. 오른쪽 벼랑으로는 철썩철썩 바닷물이 출렁이고 약간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망대에서 봤던 용머리바위가 입체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연화도 끄트머리의 섬이 좀 큰 바위가 있고 다음에 그보다 작은 바위가 솟아있고 좀 작은 암봉이 바다를 향해 떠 있고 그보다 작은 바위가 바다로 잠기는 용머리바위다.
해우소에 오래 머물렀다. 저 용머리 끝나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바위들은 순서를 기다리며 차례대로 바닥까지 도열했으리라. 연화도의 용머리바위를 가장 실감나게 보려거든 보덕암 해우소로 가라.
박건호와 시월의 마지막 밤
배부른산 ^^ 강원 원주
원주시청 – 봉화산 – 배부른산 – 안부 – 은행나무
무실가구단지
해마다 시월이 되면 배부른산을 오른다. 기왕이면 시월의 마지막 날을 지정해서 다녀오려 하지만 여의치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가까운 거리의 야지막한 산으로 내게 1년 선배인 박건호가 태어난 고향의 산이다. 그와 꼭 두 번 오른 산이었다. 이용이 부른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래를 발표하고 한 번 올랐고 그가 병마와 싸우던 시기에는 중간쯤 오르다 그만 둔 산이 배부른산이었다. 얼굴이 안 좋았던 시기도 그때였다. 박건호가 고인이 된 후, 그에게 편지를 썼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가장 많이 선곡되어 전파를 타는 노래가 있다.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다. 워낙 음악성이 뛰어난 가요이기도 하지만 가사 가운데 나오는 "시월의 마지막 밤" 이라는 묘한 뉘앙스가 한껏 매력을 발산하는 노래다. 시인이자 작사가인 박건호, 그의 가사를 받아 노래를 부르면 머지않아 정상에 오르던 시대가 있었으니 박건호 전성시절이던 이른바 7080 시절이다.
고교를 졸업하던 그해 약관의 나이에 미당 서정주의 서문이 실린 "영원의 디딤돌"이라는 첫 시집을 펴냈다. 그러던 그가 작사가로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은 박인희가 부른 “모닥불” 이라는 노랫말을 쓴 1972년의 일이다. 소위 7080세대라면 대학축제에서 혹은 해변가에서 통기타를 끼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당대의 명곡이요. 지금도 그러하다. 특히나 1982년에 발표한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는 무명에 다름없던 이용이라는 가수를 그해의 가수왕으로 진입시켰고 같은 해 MBC, KBS 양대 방송사의 가요대상 작사가상을 받았으며 1985년에는 한국방송협회로부터 아름다운 노래대상을 받았다.
원주시 흥업면 배부른산 기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봐왔던 기억을 떠올려 "배부른산" 이라는 가사를 썼으며 명절 때마다 고향의 친구는 물론 선후배와 밤이 이슥토록 세상사를 같이 고민했었다.
1999년 가을로 기억된다.
"후배님 나 건호인데 원주에서 콘서트를 하려고, 후배가 전직 아나운서 출신이니 사회 한 번 봐 주게나"
역시 어눌한 말투이다. 박건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교시절 문학 활동을 하면서였다. 그가 1년 선배였다. 졸업 후에는 각자 다른 길을 걷다가 박건호는 시인 겸 작사가로 난 방송사 아나운서로 서로 안부를 물을 정도로 지내던 터였다.
이날의 행사는 박건호로부터 가사를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잊혀진 계절의 이용과 아! 대한민국의 정수라, 고귀한 선물의 장은아, 빈 의자의 장재남, 연인들의 이야기의 임수정, 찰랑찰랑의 이자연 그리고 이른바 박건호 사단의 신인가수들이 무대에 서는 시인 박건호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박건호 콘서트였다. 1999년을 마무리하는 그 해 가을로 치악예술관은 위대한 음유시인의 서정적 노래를 감상하려는 사람들로 만석을 이루었다.
마지막 출연자인 이용의 잊혀진 계절의 전주가 흐를 때 사회를 맡았던 필자는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박건호를 넌지시 무대 위로 불러내기에 이른다.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이 상기되고 있었다. 고향에서의 행사가 감격스러워서였을까, 아니면 병마와 싸우는 힘든 앞날을 예견해서 일까. 가수 이용과 손을 맞잡던 박건호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원형의 작은 조명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다. 열광이다. 박건호의 무대이다.
그러던 그가 10여 권의 시집과 다수의 에세이집 그리고 3,000여 곡의 노랫말을 남기고 시월의 마지막 밤을 아흐레 더 넘기던 2007년 11월 9일 쉰여덟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떠난 지도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에도 그를 기리려는 많은 문인들이 고향 원주에서 박건호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가을마다 박건호노랫말공모전과 박건호가요제를 열고 있다. 올해는 지난 9월 24일 새벽 원주역을 출발해 목포를 왕복하는 박건호 전용열차가 운행되었고 열차 안에서 예심이 진행되었다. 낭만의 열차였다. 뿐이랴, 지난 10월 7일에는 제1회 박건호 시낭송회가 있었고 이튿날인 10월 8일에는 박건호가요제가 박건호공원 야외무대에서 있었다. 그런가하면 서울에서도 문학 동인들이 모여 작고 시인 박건호 문학재평가를 위한 시 낭송회가 북한강변에서 치러지고 있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음악인들이 노랫말처럼 요절하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봐왔다.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배부른산을 오른다.
"박건호 선배시여! 척박한 언어가 일상용어처럼 통용되는 해괴한 시대이기에 평범한 언어로 세상을 깨우고 섬세하고도 친근하게 사랑의 글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던 당신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배부른산을 오릅니다. 당신의 노래를 부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 ->
남해 설흘산과 다랭이마을
설흘산 ^^ 경남 남해
선구마을 팽나무언덕 - 칼날능선 – 응봉산 – 설흘산 가천다랭이마을
남해 다랭이마을은 전국적으로 얼굴이 팔린 터라 그냥 다랭이 마을만 건성으로 돌아보면 싱거울수가 있다. 오늘은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응봉산과 설흘산을 올라야겠다. 삼천포대교와 남해대교를 건너자 어슴푸레 설흘산 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선구마을의 팽나무언덕이 산행 들머리다. 삼백오십 년 묶은 팽나무 밑둥에는 금줄이 둘러져있으니 아마도 지난 정월보름에 치성을 드린 모양이다. 갈매기 몇 마리 기운찬 날개 짓과 함께 남해바다에 아침 해가 솟아오른다.
마늘밭이 끝나는 숲속으로 리본이 묶여있다. 산행의 시작이다. 남해와 사천을 연결하는 연육교가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설흘산과 응봉산은 섬 어딘가에 떠있는 그렇고 그런 산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뭍에 사람들은 응봉산과 설흘산을 동경한다. 그 끄트머리에 가천 다랭이마을도 궁금해 한다.
철쭉이 곱게 핀 솔밭을 지나 칼날능선으로 접어들었다. 삐죽삐죽 솟아오른 바위가 이구아나의 등처럼 험상궂어 바다를 조망하는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잠시 너럭바위에 앉아 남해바다를 내려다본다. 청옥 빛 바다에 점점으로 떠있는 섬과 섬이다.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황홀한 비경에 정신이 몽롱하다. 칼날같이 솟아오른 바위에서 암벽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군데군데마다 안내문구가 보인다. <사진촬영을 하면서 뒷걸음치지 마시오.>앞에서는 차라리 배를 깔고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여수공단에서 화물을 실은 화물선이 긴 뱃고동 소리를 내며 앵강만을 빠져나간다. 태평양을 건너 오대양 육대주로 나갈 수출품들이다. 소나무 한 그루 외롭게 서있는 너럭바위에 앉았다. 새움에서 피워낸 송화냄새가 진하게 전해온다. 어릴 적 검정깨로 만든 다식은 맛이 있었지만 이 송화다식은 맛이 덜했던 기억이 있는데 나이 들어 맡아보는 송화냄새는 그윽하고 화한 향이다.
이쯤에서 힐끔 뒤를 돌아본다. 아까의 섬은 보이지 않고 해솔 몇 그루 서있는 작은 섬이 나타난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보이고 금산도 가깝다. 내가 산길을 걸으면 바다가 따라 나서고또 내가 앞서가면 수십 개의 섬들도 그림자처럼 곁에 있어 준다. 조망바위를 거쳐 응봉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울퉁불퉁 앙칼진 암릉의 연속이다. 설흘산 정상이다. 멀리 한려수도가 펼쳐지면서 여수 시가지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고 노도는 물론 욕지도가 그림같이 다가온다. 햇살 너그러운 봄날이고 바람도 잔잔한 설흘산이다.
봄꽃이 반기는 섬산 다랭이마을 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산길이다. 진달래보다 보름이나 늦은 산철쭉이 설흘산 능선을 풀어 놓는다. 이끼 낀 바위 틈새에 제비꽃이 피어나고 햇살이 넉넉한 언덕으로 양지 병아리 솜털을 입은 할미꽃이 꼿꼿한 자세로 피었다. 봄보리똥나무도 이파리가 성근 것을 보면 여름이 달궈지는 날, 흰점이 박힌 분홍색
보리수 열매로 찬찬히 매달릴 것이다. 연두색 등산복의 산객이 지나간자리에 진한 더덕향이 남아있다. 이 바위산에도 더덕이 있구나 싶어 한참을 찾았지만 기척도 없다.
봉수대를 돌아서는 마지막 하산 길에 귀한 천남성이 넓은 떡잎 사이로 개불알꽃처럼 생긴 꽃대로 피어나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금 설흘산은 먼저 차지한 봄기운으로 오만가지 꽃들이 핀다. 괴불주머니기 피어나고 붓꽃이 보이고 금낭화도 봄 햇살을 쬐고 있었다. 다랭이마을과 이어지는 언덕으로 조팝나무 향이 코를 찌른다.
꼭대기 능선으로부터 시작되는 다랭이논이 갯바위 끄트머리까지 이어진다. 사실 남해라는 섬은 몇 척의 고깃배가 드나드는 작은 포구였었다. 넓지도 않은 비탈진 땅이기에 곡식이 귀한 시절이 있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비탈진 산에 돌을 쌓고 손바닥만 한 땅을 층층으로 일궈 비좁은 섬에서 땅을 개간했다. 외진 섬에서 귀한 쌀밥이라도 먹어 보자는 작은 기대 때문임은 당연했을 것이다. 산 중턱부터 시작해 계단식으로 내려오며 바다가 보이는 턱밑까지 108 층이나 되는 밭에서 남해마늘이 통통하게 살을 찌우고 있다. 내일 모레 마늘 농사가 끝나면 이 밭에 다시 봄물이 흘러 들고, 논농사로 볍씨가 뿌려질 것이다. 바로 남녘의 이모작이다.
조봇한 마을길을 내려와 암수바위를 지나면 철썩철썩 파도소리 들리는 갯바위 이름없는 포구에서 가천 다랭이마을을 올려다본다. 바닷가를 휘감는 모퉁이로 노란 유채꽃이 피어나고 좁다란 언덕길이 갈래갈래 뻗어 있다. 다랭이마을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쏘다닌다. 바다를 굽어보는 한갓진 마을에서 파도소리를 듣는다. 타관을 정리하고 찾은 고향 같은 느낌이다.
남해대교가 놓이면서 이 작은 섬마을이 적잖이 시달림을 받고 있다. 다랭이마을 어귀에서 그림 같은 영화가 찍히고, 봄이면 가장 가보고 싶은 섬으로 소개 되면서 이방인의 발길이 봇물을 이룬다. 고요하던 마을에 펜션이라는 요상한 간판이 세워지고 바람 먼저 드는 언덕이면 어김없이 모텔이 들어서고 있다. 좁은 길로 들어서는 승용차에서 잠자리안경을 걸친 육지의 색시가 내린다. 한쪽에서는 다랭이마을 이라고 황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데 다른 쪽 언덕에서는 비탈길을 깎아 내리는 중장비가 흙먼지를 일으킨다. 선구몽해변을 터벅터벅 걷는데 땀이 다 식었다. 아직은 바닷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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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산행기 멋지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