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삶과 죽음
출처 세계일보 : https://www.segye.com/newsView/20231017518350?OutUrl=naver
인간의 생명은 유한해서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탄생의 순간에 숙명적으로 죽음이라는 파국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다. 파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완성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생이 알차든 미흡하든. 죽음이 한 존재의 종말이자 사멸이라는 점에서는 두렵기도 하고 애달프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부쩍 지인들의 부고가 늘었다. 그 부고를 볼 때마다 마음이 털썩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생전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기억 속 그들은 성성했고, 활기찼으며, 주어진 역할에 나름대로 충실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 죽었으므로. 삶에서 가장 공평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죽음을 들 수 있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죽음이 없는 삶은 더 끔찍할 수 있다. 끝없는 삶은 축복이기보다 차라리 저주처럼 들리기도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했고, ‘죽지 않는 사람’이란 작품을 통해 불멸의 끔찍함을 이야기했다. “나는 조용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행복해하면서 피가 천천히 방울지는 아름다운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어 “나는 다시 죽는 존재가 되었어.” 드디어 죽음을 맞게 된 소설 속 주인공의 기쁨에 찬 표정과 독백이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주인공은 불멸을 원해 영생의 샘물을 마셨지만 끝없이 되풀이되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죽기를 소망했다. 그렇듯 불멸의 삶은 오히려 삶의 역동성과 의미를 저해한다.
요 며칠 사이 들려온 두 사람의 죽음이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 사람은 불혹의 나이를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사람은 92세,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한 생애의 끝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사람들이 보이는 애도의 방식에서는 두 죽음이 너무 다르다. 어느 죽음인들 안타깝고 구슬프고 애달프지 않을까마는 전자의 죽음은 죽어서도 편치 않다. 애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원망이 더 크다. 그에 반해 후자의 죽음은 사람들에게서 아쉬움과 존경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92세, 천수를 누린 그는 세계의 갑부였고,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면서 10조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기부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바로 척 피니의 이야기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종말이자 사회의 손실이며 상실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죽음이 불러오는 사람들의 반응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지나온 삶을 반영한다. 죽음 뒤에 오는 나의 모습은 생전의 나를 대변하는 것이니, 죽음은 삶의 거울인 셈이다. 기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한 존재가 살아서 스스로 이어 갈 서사의 영속성만 끊어질 뿐이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끊임없이 소환되고 회자되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더 두렵지 않은가. 남은 시간 동안 잘 살아야겠다.
은미희 작가
빛명상
육체에서 뛰쳐나온
‘내’가 갈 길은?
때로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긴다. 고요함이 찾아든다. 그 고요 속에 그림움을 사랑을 그리고 보고 싶은 얼굴을 그려본다. 건강도 생각하고 미래도 계획한다. 여유가 생기면 육체를 떠난 나를 생각한다. 그 기능을 다하면 죽음이란 영·육의 분리 과정을 거쳐 시체가 되고 마음은 영혼이 된다. 육체에서 뛰쳐나온 마음이란 영혼, 그 영혼이 진짜 ‘나’이다.
그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해 주었는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그 영원한 길을 빛VIIT명상은 알려준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육체속의 나는
마음의 고향, 빛VIIT으로 돌아가야 한다.
출처 : 빛(VIIT)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2021년 1월 18일 초판 1쇄 P. 376
육체는 사라지지만 육체 속의 나는 마음의 고향, 빛VIIT으로 돌아가야 한다.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무도 죽음 이후 죽지 않는 비물질인 마음이 가야 할 곳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두워지면 모든 생명들은 자신이 왔던 곳, 자신이 쉴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죽음의 그림자가 육체를 완전히 뒤덮게 되면 내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인 ‘마음’ 또한 그것이 왔던 곳, 생명근원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우주의 중심에서 오는
생명원천의 에너지, ‘빛(VIIT)'
그곳이 우리의 마음이 온 고향이다.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귀목도歸牧圖
출처 : 빛(VIIT)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2021년 1월 18일 초판 1쇄 P. 379
그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나뭇잎이 팔랑일때 바람이 지나감을 느낀다. 그 바람 속에는 온갖 기(氣), 오행의 이치, 계절의 변화, 우주의 마음 등이 실려 있다.
이젠 그것도 과학으로 증명 하는 시대에 있다. 누가 이 힘이 보이지 않는다고, 미신이나 허황한 소리라고 한다면 그 사람만이 어리석다 하겠다. 우주의 힘, 초광력을 과학으로 증명 하겠다고 현미경을 찾는 것은, 그 현미경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정신, 생명, 혼)을 찾겠다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이 고요히 보면 우주의 마음, 지극히 성스러운 '빛(VIIT)'의 현상 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누구나 수명을 다 사는 것도 아니고 또 건강하게 자기 뜻대로 살다 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공포도 크려니와 살아 있는 동안 갖가지 번민과 질병 등으로 시달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국제간의 경제 전쟁이 일어나는 등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이 빛(VIIT)의 힘으로, 현대 의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원인 모를 질병들이 치유되고, 개인의 능력이 향샹 되며, 사업이 발전 하는 것을 수차 보아 오고 있다. 이러한 것들도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의 일부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정화하고 맑게 하는 데서 비롯된다. 과학 문명을 초월하여 우주의 생명력을 주관하는 이 빛(VIIT)의 힘을 지상에 내려, 행복하고 건강한 인간의 삶을 지향 하고자 한다.
출처 :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
1996.6.30. 초판 1쇄 P. 25중
귀한빛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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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빛명상을 통한 관조의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