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86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렸다. ‘영원한 전진’(Ever onward)'이라는 표어를 내건 이 대회에는 북한을 비롯해 몇몇 공산권 국가들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출전 국가 수가 4년 전 인도 뉴델리 대회 때보다 적은 27개국이 참가했다. 그러나 2년 뒤 서울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공을 들였기에 참가 선수는 오히려 늘었다. 9월20일부터 10월5일까지 열린 대회에 27개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4,839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태권도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으며, 아시안게임은 물론이고 올림픽까지 따져도 가장 많은 25개 종목, 269개 세부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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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엠블럼과 대회 개막식 포스터 <출처: OCA홈페이지 http://www.ocasia.org> |
서울아시안게임은 한국이 아시아 중심에 섰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국은 1979년 대회 유치에 나선 뒤 1981년 아시아경기연맹 총회에서 개최지로 확정됐다. 이 대회에서 축적된 운영기술과 경험은 2년 뒤에 열린 제24회 서울올림픽 성공의 밑거름으로 쓰였다. 대회에는 모두 33개 경기장과 54개 연습장이 사용됐는데 기존 시설 20개가 보수·활용됐다. 1984년에 올림픽주경기장과 수원실내체육관이 완공됐다.
서울종합운동장 건너편에 지은 선수촌은 5,000명 수용 규모의 아파트 18개동과 대형식당과 국제센터, 행정센터, 병원, 본부건물 등의 시설을 갖췄다. ‘메인 프레스센터’는 각종 편의시설을 갖춰 국내외 보도진을 지원했고 아시아방송센터에는 30여개국에서 방송국 55개가 참여했다. 대회 운영에는 각 분야 요원 1만9000여명과 자원봉사자 5만4000명이 참여했다. 운동경기 외에도 32개 공식행사와 20여개 비공식행사로 꾸며진 문화예술행사가 열렸다. 부분적으로는 대회 준비 및 운영이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으나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서울아시안게임은 1970년에 이미 열렸어야 하는 대회였다. 한국이 1966년에 1970년 아시안게임 유치권을 따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군사 도발 위협까지 걸림돌이 되면서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세계 속에 발전한 한국의 위상을 알릴 수 있었다. 한국은 이후 2002년과 2014년 각각 부산과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을 개최해 태국(4회)에 이어 두 번째로 아시안게임을 많이 개최한 국가가 됐다.
서울아시안게임에선 중국과 개최국인 한국이 마지막까지 종합 우승을 다퉜다. 당시 아시아 신흥 스포츠 강국이었던 중국(금 94·은 82·동 46)은 폐막일인 10월5일 남녀 400m 계주에서 금메달 2개를 추가해 축구에서 우승한 한국을 금메달 1개 차로 따돌리고 1982년 인도 뉴델리 대회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한국은 금메달 93개·은메달 55개·동메달 46개로 일본(금 58·은 76·동 77)을 여유 있게 누르고 1970년 방콕 대회 이후 16년 만에 종합 순위 2위를 차지했다는 데 만족해야 했다. 아시아 3강이 치열한 메달 레이스를 펼친 가운데 이란(금 6·은 6·동 10) 과 인도(금 5·은 9·동 23)가 각각 4위와 5위에 올랐다.
김집 단장을 필두로 임원 106명과 선수 495명이 참가한 한국 선수단은 농구·배구·조정을 제외한 22개 종목에서 금 93, 은 55, 동 44개를 획득하며 종합 2위에 올랐다. 금메달 숫자에서 중국에 1개 차로 밀렸을 뿐, 전체 메달 수는 2개 앞서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이 대회에서 수립된 세계 신기록 11개 중 9개, 아시아 신기록 140개 중 27개, 그리고 224개의 대회 신기록 가운데 18개가 한국 선수들의 몫이었다. 탁구 남자 단식과 단체전에서 2관왕을 차지한 유남규는 남자복식과 혼합복식에서도 은메달과 동메달을 추가해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대회 최우수선수 격인 이상백배를 수상했다.
육상의 불모지였던 한국은 이 대회에서 7개의 금메달을 차지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여자 800m·1500m·3000m에서 1위를 차지한 임춘애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임춘애는 800m에서 인도의 쿠리신칼 아브라함이 주로를 벗어나 실격하는 바람에 금메달을 이어받는 행운도 안았지만, 3000m에서 9분11초92로 아시안게임 신기록을 세우면서 이 대회 육상 최고의 스타가 됐다. 남자 200m의 장재근과 남자 800m 김복주, 남자 5000m의 김종윤, 남자 멀리뛰기의 김종일도 잠실벌에 태극기를 드높였다.
양궁도 효자 종목으로 톡톡히 제 몫을 해냈다. 남자부 개인 종합과 남자 개인 90m, 여자부 개인 70m만을 중국에게 1위를 내줬을 뿐 12개의 세부 종목 가운데 9개 종목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특히 양창훈은 남자 30m, 50m, 70m, 단체전 등 4관왕에 올랐고 김진호도 여자 30m, 60m, 단체전에서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이 쌍벽을 이루던 체조에서도 작은 이변을 일으켰다. 이 대회 전까지 한국이 체조에서 따낸 금메달은 2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선 남자 평행봉의 권순성, 여자 평균대의 서선앵, 이단평행봉의 서연희가 금빛 연기를 펼쳤고, 남녀 단체전에서는 일본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수영에선 1982년 인도 뉴델리 대회 3관왕인 최윤희가 여자 배영 100m에서 1분4초90, 200m에서 2분18초33의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터치패드를 찍어 체면을 세웠다.
사격에선 애초 목표였던 금메달 4개를 뛰어넘는 7개의 금메달로 2년 뒤 서울올림픽의 선전을 예고했다. 윤덕하·차영철·곽정환이 남자 소구경 소총복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차영철은 이 종목 개인전에서 금빛 과녁을 쏴 2관왕이 됐다. 여자 공기소총 단체전에서는 박정아·이홍기·강혜자가 우승했고, 개인전에서 박정아가 역시 금메달을 따내 2관왕이 됐다. 여자 공기소총은 이 대회를 계기로 국제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역도는 또다시 중량급의 선전이 돋보였다. 90kg급의 전병국은 용상에서 자신의 최고기록보다 7.5kg을 늘린 192.5kg을 들어 합계 337.5kg으로 이라크의 압둘라 아랄라를 2.5kg 차이로 따돌리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100kg급의 황우원도 합계 360kg으로 시상대 맨 위에 올랐고, 110kg급의 이민우는 합계 382.5kg으로 이라크의 라임 압둘라를 32.5kg로 제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펜싱은 남자부에서만 4개의 금메달이 나왔다. 최정식·김봉만·이일희·이상기·윤남진이 나선 에페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8-1로 꺾었다. 이 종목 개인전에서는 이일희가 우승해 2관왕이 됐다. 플뢰레 단체전 결승에서도 중국을 8-6으로 눌렀고 개인전에서 고낙춘과 조재봉이 금·은을 나눠 가졌다.
한국 사이클은 도로경기에 강했다. 벨로드롬이 없는 한계를 오히려 장점으로 살린 한국은 신대철과 김경숙이 각각 남자 179.2km 도로경기 개인전과 여자 64km 도로경기 개인전에서 금빛 페달을 밟았다. 다만 도로경기 단체전을 비롯해 다른 세부 종목에서 기대했던 성적을 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요트에선 대회 최연소(13살) 우승자가 나왔다. 당시 대천중학교에서 재학 중인 박종우는 요트 경력이 단 1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국제대회 경험도 없었지만 옵티미스트급에서 금메달 레이스를 펼쳤다. 레이저급의 박길철도 금메달을 더했다.
6개의 금메달이 걸린 승마에선 반타작에 성공했다. 신창무·서인교·서정균이 나선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일본을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고, 이 종목 개인전에서 서정균이 2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종합마술 개인전에서는 최명진이 마필명 고구려를 타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농구와 배구의 부진은 아쉬웠다. 전 대회에서 역대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던 남자 농구는 결승전에서 중국에 74-77로 역전패해 은메달에 그쳤다. 여자 역시 중국에 64-78로 져 준우승에 머물렀다. 배구도 중국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남자 배구는 결승리그에서 중국에 1-3로 져 준우승했고, 5개국이 풀리그를 벌인 여자는 중국과 일본에 모두 0-3으로 완패해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조정 또한 농구·배구와 함께 이 대회에서 금메달이 나오지 않은 종목이었다. 한국은 이 대회를 위해 110억원의 예산을 들여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짓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나 은메달 4개가 성과의 전부였다.
그러나 세 종목의 아쉬움은 복싱이 깨끗이 씻어냈다. 12개 전 체급 석권의 신화였다. 라이트플라이급의 오광수가 태국의 분로와드 수파프를 2회 RSC로 물리치는 등 대부분의 체급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빛 펀치를 날렸다. 체급별 금메달리스트는 라이트플라이급 오광수, 플라이급 김광선, 밴텀급 문성길, 페더급 박형옥, 라이트급 권현규, 라이트웰터급 김기택, 웰터급 김동길, 라이트미들급 이해정, 미들급 신준섭, 라이트헤비급 민병용, 헤비급 김유현, 슈퍼헤비급 백현만 등이다.
유도는 전 체급 메달로 종주국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8개의 금메달 가운데 6개가 한국의 몫이었다. 유도에 뒤질세라 레슬링도 그레코로만형에서 5개, 자유형에서 4개 등 9개의 금메달을 안겼다. 특히 그레코로만형은 10개 전 체급에서 메달을 기록했다.
태권도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페더급의 한재구가 결승에서 요르단의 사메르 카말을 오른발 뒤후리기 KO승으로 누르고 우승하는 등 밴텀급을 제외한 7개 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종주국의 위세를 확인했다.
한국의 기세는 구기 종목으로 이어졌다. 탁구가 선봉장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한국은 이 종목 절대 강자인 중국과 7번의 결승전을 벌여 3개의 금메달을 가져왔다. 당시 각각 3명의 선수가 돌아가면서 나서는 9번의 단식 경기를 치러 승패를 갈랐던 남녀 단체전에서 모두 이긴 것이 결정적이었다. 유남규는 남자단식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2관왕이 됐다. 남자 단체전에서 혼자 3승을 올려 우승을 이끌었던 안재형은 이 대회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인 중국의 자오즈민과 1989년 10월, 두 나라가 아직 미수교인 상태에서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배드민턴도 탁구처럼 한·중 양자 대결의 구도였다. 한국은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박주봉·김문수·성한국의 활약에 힘입어 중국을 5-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했고, 박주봉-김문수 조는 남자 복식 결승에서도 중국의 티안빙이-리용보 조를 2-0으로 완파하고 금메달을 추가했다. 박주봉은 혼합복식에서 정명희와 짝을 이뤄 결승에서 이득춘-정소영 조를 2-0으로 누르고 3관왕이 됐다. 그러나 중국도 여자 단체전 등 나머지 4개 종목에서 우승해 절대 강호의 위치를 재확인했다.
핸드볼이 아시아 첫 정상에 오른 것도 이 대회였다. 한국은 6개국이 풀리그로 순위를 가린 이 대회에서 라이벌 일본을 38-26으로 꺾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마저 38-24로 물리쳐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생순>으로 잘 알려진 여자 핸드볼은 다음 대회인 1990년 베이징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하키도 남녀 동반 우승의 값진 성과를 이뤘다. 남자는 결승에서 1984년 LA올림픽 우승국 파키스탄을 2-1로 꺾었고, 여자는 6개국 풀리그로 치러진 대회에서 인도를 3-0으로 물리치는 등 5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키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기반이 바로 이 대회였다.
테니스에선 유진선의 존재감이 빛을 발했다. 유진선은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2-1로 꺾고 첫 금메달을 차지하더니, 단식·복식·혼합복식 등 출전한 모든 종목에서 애국가를 울려퍼지게 만들어 4관왕의 위업을 썼다. 볼링에서도 변용환과 이지연이 남녀 마스터스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남자부만 열린 골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 샷을 날렸다.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폐막일에 열린 축구 결승이었다. 전날까지 한국과 중국은 각각 금메달 92개로 타이를 이뤄 마지막 날 결과에 따라 최종 순위가 결정돼 관심을 모았다. 그해 6월 멕시코월드컵에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던 한국은 결승에서 조광래와 변병주의 연속골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눌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첫 단독 우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종전까지 한국 축구는 1970년과 1978년 방콕에서 열린 두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으나 각각 버마(미얀마), 북한과 공동 우승한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승부차기 규정이 없어 생긴 일이었다. 그러다 이번 대회에선 처음으로 단독 우승했다. 그러나 한국은 축구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남녀 400m 계주에서 금메달 2개를 추가하면서 금메달 1개 차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