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순천김 가문에는 고래로부터 위국헌신하고 학문에 뜻을 두어 높은 경지에 이른 분들이 많다.
그리하여 조선시대만해도 대과(문과)에 급제한 분들이 60여명에 이르고 정승도 세분이나 나오셨다.
하지만 비록 정치적으로는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학문적으로 후세에 이름을 떨치고...
높은 도덕심으로 후인들의 귀감이 된 분들이 적지 않다.
오늘은 그 중 두 분만 간단히 말씀드리고저 한다.
먼저 수북정 김흥국 할아버님...
수북정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명종 12년에 출생하시어 선조 22년 대과에 급제하시고 관직은 형조정랑에 이르셨다.
서정관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오시고...외직으로는 영변,회양,한산,양주 수령을 하시었다.
당시 시대가 선조,광해군,인조 때이기에 나라가 어수선했다.
임진왜란..광해군 폭정..인조반정,정묘 병자호란..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대..
수북정공은 인조반정시 친척 김류와 이귀로부터 함께 거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는가하면...
인조반정에 성공 후 정권을 잡은 세력들이 부제학자리를 주면서 합류하기를 바랐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단호히 거절하고 낙향 후 백마강가에 정자를 짓고...
거유 김장생,황유 등과 교류하며 시문에 정진했다.
공의 저서로는 수북정집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 되고 낙본만 전한다고 한다.
할아버님의 주옥 같은 글을 보지 못한 우리 후손들은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다.
비록 고관대작은 못되었을 망정..굳은 절개를 우리 후손들께 가르쳐주었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또 한 분..순천김씨 형성공파이신 구암 김경장할아버님...
구암공은 조선중기 문인으로 광해군 9년에 향시(1차시험)에 급제하시고 복시(2차시험)는 아예 단념하셨다.
광해군시대라 나라가 어수선했기 때문..공께서는 후학 양성에 정진하셨는데..
구암공의 높은 학문과 명성을 듣고 경상도 일대에서 찾아 온 제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구암공 사후 300년이 될 무렵(1942년) 구암문집이 나왔다. 4권 2책으로...
그 후 횡성공파 구암공종중회에서 전에 편찬한 문집을 수정 증보하여 2차 문집을 편찬..
내가 그 문집을 가지고 있기에 자세히 보니 2015년 도서출판에서 편찬했다.
나 말고도 형제분들이 많이 소장하고 있을 것...
문집에는 할아버님의 주옥 같은 시문이 다수 있지만...
그 중 칠언율시 하나를 소개해드리고저한다.(한문은 생략함)
일단홍교이십추:(무지개다리 한 번 끊어진지 이미 10년)
상여금패행동주:(아직 젊은 선비 남아있어 다행히 한 배에 탓네)
강호유월전심학(강호엔 달이 밝아 심학을 전하고)
동우장서시로추(집에는 책을 쌓았으니 이것이 추로향일세)
만실난향경백록(한방 가득 지란 향기 백록동 서원을 거쳤고)
일당훈모부창주(일당에 앉아 훈연이 사모함은 주희에게 부촉하네)
향래주비구의일(지난 날 헛되이 보내던 일을 옷자락 여미고 회상하여)
설여제량선흑두(젊은이에게 일러주며 청년시절 부러워하네)
*시의 내용은 스승인 여헌선생이 오산서원에서 강학하던 것을 회상하며 사모하는 뜻을 나타낸 것.
*장인채 편저"여헌학단"구암선생편에서 번역문을 옮겨옴.
~이상 칠언율시와 상기 별표의 두 줄 내용은 제가 구암문집에서 참고한 것임을 밝힘.~
첫댓글 좀 쑥스럽지만 후손된 도리로 당연히 조상님들 자랑을 해야..
후손들이 본 받고 자아형성(확립) 과정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 됨.
순천김은 총인구 6~7만명...
조선 초 계유정난, 1,2차 단종 복위 실패...
그때 마다 세조의 살상 행위(김종서:19대조.일파 제거)로..순천김 인구 급감..
우리집안만해도 해남군 계곡면, 산이면 산골짜기로 피신, 500년 이상을 숨어 삶.
시조묘소(전남순천))정화작업엔 한화 회장(시조로부터 40세)과 동생 빙그레 회장이 큰 역할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