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껑꺼이는 묻는 말의 어미에 '껴'를 붙이는 안동 토박이를 이르는 말이다. 이 책은 한 껑꺼이, 안태인(安泰仁)의 이야기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꾼이 될 뻔하였다. 5.16이 있었던 1961년 중학교에 진학하여 16살에 졸업한 후 안동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 과외지도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1981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다. 대학에서 세포생물학과동물생리학을, 대학원에서 세포 공생론과 막 생물학을 강의하였다. 퇴임까지 한 주제로 아메바에서 공생 세균과 숙주인 아메바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였다.
한국동물학회 회장, 한국유전학회 회장, 한국생물과학협회 회장,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부회장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생물학 용어 심의위원장, 네이버 동물학 백과 편찬위원장,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장, 의치의학교육입문검사(MDEET) 출제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30년 근속공로표창과 대한민국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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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2012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2017년에는 명예교수 강의도 끝났다. 마침 2017년부터 네이버 동물학 백과 편찬을 시작하여 2021년에 마무리하였다. 2022년(75세)에 이르러 처음 여유시간이 생겼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보니 나도 모르게 지난 이야기를 끄적이게 되었다. 단편적인 글들을 모으다 보니 버리기가 아쉬워 정리한 것이 내 이야기가 되었다. 나이 탓이지만 소싯적 일은 메모 없이도 기억이 생생한데 불과 몇 해전 다녀온 여행은 챙겨둔 여행 일정표가 없으면 회고할수가 없었다.
16살에 안동을 떠나면서 막막하였던 껑꺼이 세상을 일구면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초년은 태생적으로 어려운 시절, 안동 전통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고생이 많았으나 참을성과 성실성이 길러졌다. 이후 배움길에서 간곳마다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 많은 도움과 깨우침을 받았다. 또한 그때마다 좋은동학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삶이 즐거웠다.
내 이야기를 관심있게 읽어주시는 모든분께 감사드린다.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께서 필자와 동시대를 산사람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은 I껑꺼이 삶, II 학문 맥락, III 취미로 구성되어있다.
2024년 2월에 안태인
차례
1.출향(出鄕)
안동역 앞에서
1963년 12월 30일경, 병산중학교(현, 풍산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저녁 9시 반경에 출발하는 중급행 야간열차로 서울에 가기 위해 안동역으로 갔다. 역 앞에서 누구를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도 없으니 기다릴 일도 없는데 할 일 없이 출발대합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열차 도착을 기다린다.
안동군 풍천면 가일(가곡1리)에 살면서 중학교에 다니느라 풍산안교리까지 열심히 다녔지. 안동시내까지는 50리 길이라 나올 일이 별로 없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아버님이 입원하신 안동성소병원을 오가면서 안동 시외버스터미널을 한두 번 와본 적이 있고, 기차역 앞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만나러 온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가일 촌뜨기에게 안동 시내는 겁나는 객지였다.
기차역 앞 과일 도매상 골목은 안동사과를 서울로 출하하는 중개 상장터였다. 어머니는 안동과수원의 사과를 구매하여 이 골목 상가에서 포장한 다음, 철도 화물로 탁송하여 청량리 시장에서 경매하는 행상을 하였다. 나는 오후 5시경 그 골목 식당에서 국밥을 사 먹고 밤늦게 출발하는 청량리행기차를 기다린다.
어머니는 작년 가을에 가일에 있던 우리 집을 팔고 동생들을 모두 서울로 전학시켰다. 나는 서난(가일선원길) 외딴집에 살면서 농사를 짓는 숙부님 댁에 얹혀살면서 중학교를 다녔다. 짐이라야 가방에 든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겨울 방학 동안 서울에서 지내고 2월에 돌아오면 졸업식을 끝으로 안동을 완전히 떠나게 되어있다. 다시 못 올 고향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안동에서 16년 세월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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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생
내가 서울생활을 시작한 1964년 서울은 인구 약 300만 남짓하였다. 4 대문안이 도심이었으며, 동쪽으로 청량리, 중랑교, 신당동, 왕십리, 남쪽으로 용산, 이태원, 노량진, 영등포, 서쪽으로 아현동, 마포, 수색, 북쪽으로는 돈암동, 미아리, 정릉 등이 있었다.
시내 교통수단은 도로 가운데를 달리는 노면전차가 있었고, 차장이 문에 매달려 손님을호객하여서 태우는 합승 버스(마이크로버스), 그리고 택시가 있었다. 택시는 운임이 비쌌고, 합승은 서울 지리를 모르니 차장이 외치는 '오라이소리만 들리지, 어디로 가는지 노선을 알고 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다음 성동구에 있는 서울중앙시장을 가려면 운행 시간을 기다려 전차를 타야만 했다. 전차는 지상으로만 다녔으며 청량리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을지로입구에서 왕십리 행을 바꾸어 타고 신당동에서 내리면 되었다. 우리 집은 서울중앙시장 앞에 왕십리로 나가는 큰길(현재 퇴계로, 2호선 신당역 부근) 가에 있었다. 건물 1층 앞쪽은 과일가게, 안쪽에방이 하나 있어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거처하고 가게 위쪽 다락방은 가게 일을 보는 윤 씨와 내가 함께 사용하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쳐야 했는데 12월 말에 시골 중학교에서 갓 올라온 나는 어느 고등학교가 어떤지도 얼마나 경쟁이 높은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웃에 수소문하여 중앙시장 안쪽에 2층 가옥에서 중3 여학생 2명과 남학생 1명을 집단과외 지도하는 동국대학교 3학년 학생을 소개받았다.
고등학교 입학원서 마감일인 1964년 1월 18일을 몇 주 앞두고 시작한 입시 준비였다. 과외지도 선생인 대학생이 내게 국어 영어 수학문제집을 내어주면서 시험을 보게 하더니 D 상고는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매일 문제 풀이를 하면서 1주일이 지나자 자기가 나온 S 상고에 가도 되겠다는 것이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면서 입학원서를 사러 가야 할 시점이 되었는데 상고보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5대 공립인 경동고등학교를 가라고 추천하였다.
원서를 마감하고 나니 경쟁률이 3.6:1이었다. 시험 보러 돈암동에 있는 학교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어서 숨이 찼다. 이 학교 합격이 이렇게 숨찬가 하였는데 1964년 2월 2일 신문 호외로 발표된 합격자 480명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함께 공부하였던 여학생 둘은 각각 서울사대부고, 창덕여고에, 한 남학생은 배재고등학교에 합격하였다.
고등학생
경동고등학교에 합격은 하였는데 입학금과 등록금을 낼 수 없어 입학식에는 가지도 못하였다. 윤 씨를 통해서 알게 된 사진관 아저씨가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는지 고등학교 후기 입학시험에 대리 시험을 봐주면 등록금을 후원할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사진 기술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껑꺼이 아무리 어리숙하고 궁해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몹시 불쾌하였다. 그것을 안 사진관 아저씨가 좀 미안했던지 내가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타고 다니다가 서울까지 가지고 온 내 자전거를 잡고 돈을 빌려주어서 입학금에 보탤 수 있었다.
간신히 입학금을 내고 입학 날짜보다 15일 정도 늦게 처음으로 등교하였다. 공립학교라서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늦게까지도 내 학적을 유지하여 주었으며 나는 1학년 8개 반중 3반이 되었다.
그 당시 과일가게는 한 철 장사여서 가을 겨울에는 사과를, 여름에는 참외 수박을 파는 장사에 불과하였다. 요즘처럼 과일이 사철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과일만 팔아서는 월세를 내기도 어려워서 가게를 접고 뒷골목에 단칸방으로 이사하였다. 이사한 집의 바로 옆방은 골목 음식점이어서 밤이면 대단히 시끄러웠다.
나는 주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신설동을 거쳐 신당동까지 약 3.6k를 걸어서 통학하였다.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동네에 동생 또래 초등학생 4~5명을 모아서 그룹과외를 지도하였다. 생활비 조달이 불가능하여 어머니는 아버지 산소가 있는 평장골 밭까지 팔아왔으며, 집을 동화동 달동네에 4가구가 사는 오두막의 단칸방으로 이사하였다.
그때 겨울은 춥기도 하였다. 고등학생이니 얼굴에는 여드름이 나고 두피에도 지방질이 많아서 비듬이 잘 생겼다. 당시 대부분 서울 일반 가정에는 수도는 있어도 온수공급장치가 없었고, 목욕탕을 가야만 뜨거운 물에 머리도 감고 때도 씻을 수 있었다.
그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 누군가 들려준 말을 믿고, 수돗가에서 찬물에 머리를 감으면서 비듬을 없애겠다고 소금을 풀고 빡빡 씻었더니 두피에서 피가 나고 피딱지까지 생겼다. 그로 인해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모근이 손상되어서 노년이 되면서 대머리가 되었다. 그 사연을 알 리가 없는 어린 손자가 신기한듯 재미로 내 머리를 쓰다듬곤 한다.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 중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그 달동네 우리 집까지 가정방문을 오셨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방문에 혹시라도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하여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우리 2학년 학생 중에서 긴급하게 장학생을 추천하게 되었는데 후보자 2명을 선정해 놓고 보니 집에 전화도 없는 학생들이었다. 연락이 닿는 사람에게 우선 수여하기로 결정이 되어서 급하게 나를 찾아 가정방문을 온 것이었다. 당시에는 장학금이 흔하지도 않았으며 금액도 많지 않았는데 나는 그 덕택에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주는 큰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된 담임 선생님이 가정교사 자리까지 추천해 주었다. 2학년 2학기가 되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셔서 교무실에 갔더니 교무주임 선생님께 가보라하였다. 우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를 장남으로 두고 있는 한 학부모 가정에 초등학생 동생이 둘 있어서 입주 가정교사를 구하는데 내가 할수 있냐고 물었다.
주소를 받아들고 찾아갔더니 종로5가에 넓은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이었으며, 두 아들들은 효제초등학교 3학년 5학년이었다. 내가 할 일은 2층에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하루에 2시간 정도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주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단칸방에 내 책상 하나 놓을 자리도 넉넉지 못하였는데 내 생활공간이 생기고 가정교사로 월급을 받으니 경제적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 꼬맹이들이 보통 말썽꾸러기가 아니었다. 집이 번듯한 것과는 달리 이 집은 가족관계가 복잡하여서 아이들이 바르게 자리지 못한 것 같았다 청계5가 가방도매상가 사장에게는 아들 4형제와 딸이 하나 있는데 5남매다른 세 사람. 전 부인에게서 났고 현재 부인은 직접 낳은 아이는 없고 전부인들이 낳은 자녀들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나이든 두 아들은 성인이어서 집을 나갔고 그다음 딸이 중학생, 끝으로 아들 둘이 내가 가르칠 초등학생이었다.
5학년 다니는 큰 녀석은 하교하면서 돌팔매질로 학교 유리창을 깨어놓고 오는가 하면, 동네에서 놀다가 늦게 돌아올 때는 대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말장을 넘어서 들어온다. 2층 방에서 내 앞에 앉아 문제 풀기를 하다가 화장실을 간다면서 일어나 나간 지 30여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래위층 반과 화장실을 뒤지다 보면, 화장실에서 잠자고 있었다. 처음에는 계모에게 탄트라도 날까 몰래 데리고 올라오고 타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을 듣는 아이가 아니어서 나중에는 야단도 치고 매질도 하면서 가르쳤다.
하루는 주인아주머니가 좀 보자 하길래 매질한 것을 탓할까 걱정하였는데 의외로 친동생 돌보듯 하여 주어서 고맙다고 하였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내가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나도 대학입시 준비에 집중하여야 했기 때문에 가정교사를 한 학기 동안 그만두었다가 대학에 합격한 다음 다시 입주하여 그 말썽꾸러기가 중학교 갈 때까지 가르쳤다.
우리 집에는 나혼자 공부할수 있는 공간도 없고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내내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였다.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먼저 사관학교 지원이 있었고 나도 가정 형편상 사관학교를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하였다. 1차 학과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에서 체력검사, 신체검사를 받은 다음 육사 교장 면접을 보았다. 면접 과정에서 문서전달병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자식 시험 더럽게도 잘 봤네.”라고 하였다. 나도 학과시험을 잘봤다고는 생각하였지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낙방은상상도 하지 않았다. 공부는 접어두고 방과후에는 운동장에서 사관생도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체력단련을 하였다.
11월 어느 날인가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불합격이었다. 신체검사에서 하지정맥류가 불합격 요인으로 생각되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농사짓고 있을 때, 여름밤에 동네 아이들과 공터에서 불장난하면서 노는동안 헌 고무신이 타면서 생긴 불덩이가 튀어서 내 무릎에 달라붙어 화상을 입었는데 크면서 그흉터 주변에 하지 정맥류가 생겼다.
대학입시가 한 달 정도 남았는데 대학을 가려면 마지막 정리에 매달려야 할 시점인 지난 석 달가량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이 엄청 후회스러웠다. 불가불대학을 가야 했고 3학년 때도 같은 선생님이 담임이어서 진학을 상담하게 되었고, 내 형편을 잘 아는 선생님께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생물전공을 추천해 주셨다. 그때는 대학별 본고사가 있었으며, 나는 국어, 영어, 수학 필수과목과 국사와 화학을 선택과목으로 시험을 보았다.
1967년 2월 9일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이어서 나는 서울대학교에 가서 발표나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숨이 차게 우리 집으로 달려오시면서 나를 부르시더니 “야, 너 수석이다." 큰 소리로 축하해주면서 바로 학교로 가자고 하였다.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수석 합격이라니 대단한 영광이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공부하였지만, 대학입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고등학교에는 선생님이 모두 훌륭하였다. 영어를 담당하였던 김덕기 선생님은 우리가 졸업한 다음 고려대학교수, 국사를 담당하였던 신형식 선생님은 이화여대 교수, 고문을 담당하였던 한원영 교무주임 선생님은 청주전문대학장, 홍순철 교장 선생님은 경기공업전문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왼팔로 또박또박 판서하던 김대열 화학 선생님과 눈이 반짝반짝하였던 김영태 수학선생님, 문과 임재중 영어 선생님 강의는 명강의였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은사님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다니는동안학과공부를 보충해 보겠다고 학원에 화학단과반을 딱 한 번 등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문난 명 강사였는데도 재치 넘치는 입담만 늘어놓고 강의 내용은 별것이 없어 몇 번 가지 않고 그만두었다.
대학교 수석 합격
수석 합격 소식은 내가 졸업한 병산중학교에도 알려졌다. 류시영) 재단 이사장이 축하를 전하면서 을지로에 이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좀 만나자고 하였다. 류 이사장은 내가 병산중학교를 졸업한 후 1965년에 제2대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68년 병산중학교를 풍산중학교로 개명하였다. 같은 재단에서 1968년 개교한 풍산상업고등학교는 1974년에는 풍산종합고등학교로 변경된 다음, 2002년 사립 자율학교 풍산고등학교라는 명문고등학교가 되었다.
당시에 류 이사장은 졸업생들을 자신이 경영하는 서울 사업장에 취업까지 시키면서 풍산면 소재지에 있는 열악한 학교의 발전과 졸업생들의 진로를 개척해 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이사장을 뵈러 을지로 사무실로 갔을 때 우리 동창 여학생 몇몇이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사장은갓 대학을 입학하는 나에게 모교의 후배들이 꿈을 갖게 하여 주기 위하여 사범대학졸업 후 한 학기라도 좋으니 꼭 모교에 와서 교편을 잡아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대학 4년간 장학금을 약속하였다.
당시 국립대학교 사범대학은 교사 양성기관이라서 모든 학생에게 수업료가 면제되었고 등록금으로 입학금과 기성회비만 내면 되었다. 나는 생물교육과수석 입학생에게 주는 영지 장학금을 받았다. 영지 장학회는 사범대학 최기철 교수님이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를 저술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도서 출판영지문화사(백만두 사장)가 후원하는 장학금이다.
매년 생물교육과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학생을 신입회원으로 맞이하는 환영화를 소공동에 있는 양식당에서 개최하였다. 백만두사장과 최 교수님. 그리고 역대 영지 장학금을 받은 선배들이 초대되었다. 그 자리에서 최 교수님이 최초 수혜자로 영국으로 유학간 전광우 박사님부터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선배 수혜자들을 차례로 소개하였다. 이 환영 행사에 참여하면서 신입생들도 미래에 대한 나름 꿈을 가져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하여도 대학생들이 다방에서 커피는 마셨지만, 양식당을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식탁에 놓인 냅킨, 좌우 양쪽에 놓인 포크,나이프, 물잔 등을 보면서 어리둥절하였다. 처음 양식을 먹으면서 결례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옆 사람이 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면서 오른손 왼손에 각각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나 같은 촌뜨기에게는 코스 요리에 대한 순서뿐만 아니라 후식이란 개념도 없었다. 마지막에 커피가 나오자 내 바로 옆에 앉은 복학생인 3학년 선배는 설탕을 듬뿍 넣으면서 나를 보고 웃었다. 그때는 배고픈 대학생들에게 설탕은 고급 탄수화물 공급원이었다.
안동을 떠나오면서 무망(無)하게 시작한 서울 생활에서 우리 가족은 뚜렷한 수입원도 없이 엄청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었지만, 껑꺼이는 운 좋게 장학금을 받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까지 마련되었다.
수석 졸업
군 제대 후 일주일, 1972년 9월 학기에 복학하여 대학 생활로 되돌아왔다. 복학한 후에도 여전히 중고등학생을 과외 지도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입학동기중 5명은 이미 졸업하였고, 나처럼 복학한 친구 1명, 휴학한 친구 1명을 포함해 3명이 후배인 70학번 20여 명과 같이 강의를 듣게 되었다.
9월 1일에 개학하였지만, 실제 강의는 10월 되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동물생리학 및 실험 강의는 외래 강사가 담당하였다. 강의와 실험을 하루에 몰아서 하는데 첫 강의에서는 실험 리포트 작성 요령을, 그리고 2차강의에서 교과서 소개와 더불어 서론 강의가 있었다. 3차시 강의를 앞둔 10월 17일 국가비상조치가 발표되면서 소위 10월 유신으로 대학에는 무기한 휴교령이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고, 마지막 출마라는 공약을 내놓고 간신히 3선에 성공하였다. 1960년대 경제개발로 사회적 갈등은 고조되고 미국의 닉슨독트린으로 주한미군 철수 논의와 미국과 중국 외교 정상화로 냉전체제가 이완되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비상계엄과 더불어 유신을 선포하였다.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가 공고한 헌법 개정안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12월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고, 대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렇게 대통령이 선출되기까지, 모든 대학은 학생 시위 억제책으로 휴교령으로 한 학기를 보냈다. 학기 말이 되어서 대부분 과목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기말고사를 대신하고 학점을 받았다. 이처럼 제대로 된 강의 한번 없이 한 학기를 보내고 4학년이 되었다. 4학년에도 주요 과목들이 있었지만, 당시 학교의 학생 지도 방침이 그러하였는지 모르지만, 교수님이 후배 학생들과 짝꿍이 너무 잘 맞아서 “교수님 탁구치시지요." 하면 강의를 접고 탁구대가 놓인 콘센트로 갔던 과목도 있었다.
졸업은 다가오는데 진로를 걱정할 지음 최기철 교수님을 뵈었더니 졸업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으셨다. 당시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으로 사범대학에는 과학교육과 석사과정이 있었지만, 현직 교사들을 위하여 야간(2부) 수업으로 진행되었고, 대학원 생물학과는 문리대학에 있었다. 나는 형편상 대학원 진학은못하겠으며, 교직에 근무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유학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복학생이 과외지도까지 하면서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1974년 2월 졸업식이 다가오면서 나는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수석졸업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대학 입학 수석 하나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졸업까지 수석을 하는 영광을 누리다니 이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1967년에 입학한 우리 67학번까지는 각 단과대학에서 교양과목을 이수한데 비하여, 교양과정부가 생긴 68학번 이후 입학생들은 여러 단과대학의 신입생들이 공릉동 캠퍼스의 교양과정부에서 교양과목을 이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후배들이 교양과정에서 학점을 잘 받지 못한 어부지리를 70학번과 졸업 동기가 된 내가누린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졸업식에 앞서 1974년 2월 22일에는 전례대로 대통령 부부가 서울대 각 단과대학 수석졸업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과 더불어 덕담을 해 주었다. 그 자리에는 서울대학교 한심석 총장, 문교부 민관식 장관 등이 함께 참석하였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처음 뵙는 대통령은 키는 좀 작았으며, 피부색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숙부님 얼굴을 뵙는 것처럼 까무잡잡하였으나 인상이나 말씀은 빈틈이 없었다. 영부인은 키가 크고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매우 온화한 인상을 풍기며 아주 친절하였다. 대통령 부부나 청와대 분위기는 매우 검소하게 느껴졌으며 차려진 한식 오찬도 흰쌀밥에 장국과 몇 가지 반찬으로 정말 간소하였다.
초청되었던 우리 졸업생 일동은 매우 감동적인 격려를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뭔가는 해야 할 소명의식이 느껴졌다. 그해에 대통령의 영식 박근혜 씨가 서강대학을 졸업하였으나 그 자리에 함께하지는 않았다.
1974년 2월 26일 제28회 서울대학교 졸업식에는 연례대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민복기 대법원장, 민관식 문교장관 등 요인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축사에 학생들이 뒤돌아 앉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 이후 서울대학교 졸업식에는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으며, 28회 졸업식이 대통령이 참석한 마지막 졸업식이 되었다.
1. 등산
취미로 특정 종목의 운동을 평생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봄, 가을로 경치 좋은 시기에 누구나 산을 가기는 하지만 여름 겨울 구분 없이 즐기기는 어렵다. 나는 우연한 가족 동반 산행에서 건강 문제를 느껴서 등산을 시작하였다. 산행으로 좋은 친구도 만나고 평생 건강을 다질 수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무렵 우리는 구로구 고척동에 살면서 서초구 잠원동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서울의 서쪽에 사는 동안에 가까운 강화도 마니산(摩泥山,469m)을 가보기로 하고 주말을 맞이하여 아이들과 함께 산행에 나섰다. 마니산등산로 입구 주차장에서 등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몇 계단을 오르지도 않고 온 식구가 숨이 차서 야단이다. 결국 도전한 지 30분도 안 되어서 등산을 포기해야 했고, 강화도를 드라이브만 하고 돌아왔다.
1981년 귀국 후 한국에 정착하느라 운동을 소홀히 한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1982년부터 1987년 9월까지 5년 남짓 관악산 바로 밑 낙성대 근처에 있는 교수아파트에 살면서도 그 앞산을 올라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인이었다.
온 가족의 체력이 심각하다고 생각되어서 가족 건강을 챙기기 위하여 께 등산하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북한산, 도봉산, 등 서울 주변의 산을 대=생 때 몇 번 가보기는 하였지만, 그 산들을 가본지가 10여 년이 넘었으니 어느 교통편을 이용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막막하였다. 추석날 집에 온 동생을 보고등산로 안내를 부탁하였다.
그렇게 하여 처음 산행에 나선 것이 우이동 종점에서 올라간 북한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 산행에서 물론 정상을 오르지는 못하고 등산로 입구와 계곡만 구경하고 내려왔다. 그날 이후 한 달에 한 번, 작정하고 등산을 시작하였다. 아이들도 함께 갔다.
관악산을 낙성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시작하여 처음 몇 번은상봉약수터까지 오르고 다음 몇 번은 마당바위까지, 이렇듯 관악산을 몇 해 걸쳐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 오르면서 정상인 연주대(해발 629m)까지 가는 체력을 길렀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함께 등산을 가면 큰 녀석에게는 2,000원, 작은 녀석에게는 1,000원 용돈을 주면서 가족이 등산하였다.
본격 등산은 고등학교 동창들과 “고우회"가 결성되면서 30여 년 정기산행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2013년 고등학교총동창회의 백두대간산행에 참여하여 5년여에 걸쳐 성공적으로 종주하였다. 이어서 시작한 낙동정맥 산행은 체력 한계로 중도에 하차하였다. 이 외에도 매년 분기별로 3, 6, 9, 12월 둘째 토요일에 개최되는 총동창회 산악회 정기산행에 참여하여 전국의 명산들을 등산하면서 좋은 동문 선후배들을 만났다.
서울에 사는 중학교 동창들도 예닐곱 명이 한때는 정기적으로 서울 근교 등산하였다. 대구 친구들과 합세하여 가야산 해인사와 대구 팔공산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등산 회원이 줄고, 나이 들면서 중학교 등산모임은 흐지부지되었다.
고우회/우보회
고등학교 동창 중에 가끔 전화하면서 근황을 묻곤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등산한다고 했더니 산행하는 동창 친구들을 소개해주어서 함께 서울 근교 산들을 등산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친구들은 등산보다는 친목이 목표라서 물좋고 정자 좋은곳에 모여 친목을 다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1991년 마침 고등학교 23회 동창회 이진우 회장이 동창회 활성화를 위하여 등산모임부터 활성화해보자고 하여서 10여 명이 모였다. 그 등산모임을 동창회장 제안으로 고우회(高友會)로 정하고 북한산도봉산등산 경험이 많고 지리에 밝은 송요철 친구가 고문으로 등산로를 안내하기로 하고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고우회 첫해에는 한 달에 한 번 하던 중턱 친목 모임을 계획된 등산로를 완주하는 산행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회원도 늘고 산행도 점차활기를 띠었다. 회장이 바뀌고 해가 거듭되면서 한 달에 2번씩 1.3주 토요일에 산행하게 되었다.
2001년 6월 6일은 공휴일인데 학교에 나갔다가 고우회의 소식과 산행 경험을 공유하기 위하여 다음에 고우회 카페를 만들었더니 그 카페가 회원간 소통에 활력을 제공하였다. 고우회 산행 담을 공유하는 광장이 확장되어 그카페는 2003년 경동 23회 동창회 카페로 승계되었다.
고우회는 서울 주변에서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관악산, 청계산(만경대), 남한산성, 구룡산, 불곡산, 소요산, 감악산, 운길산, 예봉산, 검단산용마산, 운악산, 축령산, 청계산(양평), 유명산, 중원산, 삼악산, 검봉산, 백운산,명지산, 명성산, 광교산, 수리산, 마니산, 석모도, 호룡곡산(무의도), 등을 두루산행하였다.
그러면서 일 년에 한두 번은 관광버스에 부부 동반으로 1박2일 원정산행도 하였다. 원정산행으로 소백산 철쭉제, 청송 주왕산, 봉화 청량산, 설악산수렴동 계곡, 주전골, 창녕 화왕산, 유달산, 무등산, 해미 도비산, 강천산, 오대산노인봉, 소금강계곡, 봉래산, 내변산, 태백산, 매화산, 대둔산, 내연산, 금오도, 두악산, 단양 제비봉, 금수산, 월출산, 도락산, 청남대, 한라산, 제주 올레길, 우도, 유달산, 무등산, 월악산, 고군산, 등 전국의 명산을 다녀왔다.
이렇게 서울 근교 곳곳을, 그리고 지방의 명산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산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30여 년 역대 고우회 회장과 총무들의 열성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그렇듯 고우회는 우리 모두 아끼면서 동참하여 건강과 친목을 다지는데 한 몫 톡톡히 한 성공적인 모임이었다.
그렇게 활발하던 고우회도 30여 년 오는 동안 이제 회원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노년에 이르렀다. 근년에는 높은 산이나 정상 길은 피하고 둘레 길이나 중턱 산행으로 만족한다. 한때는 정기산행에 20여 명이 몰려다니면서 온산을 떠들썩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10명 미만이 참여한다. 코로나19로 4명 이상 모임이 어려워지니 지원자가 없어서 회장 총무를 따로 두지도 못하고 몇 년째 임원개선도 못하고 회장은 한 사람으로 붙박이가 되었다.
백두대간산행하는 동안 체력단련을 계속하기 위하여 한동안은 매주 토요일 서울 근교에서 등산하였으며, 그러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친구와 둘이 수요일에도 산행하였다. 결국 매주 2회 산행을 일상적으로 하였다. 백두대간산행이 끝난 다음에는 수요 산행은 중단하였다.
그러면서 이제 나이도 70대라 친구 대여섯이 합심하여 소걸음으로 미음완보하겠다는 의미에서 우보회(牛步會)를 결성하였다. 우보회는 매주 토요일 산행으로 북한산과 관악산을 주로 다녔다. 그도 70 중반이 되면서 정상에서 내려와 중턱까지만 가다가 더 줄여서 둘레길을 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2019년 11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으로 급성 호흡기 전염병(코로나19)이 발생하였다. 2020년 초부터 전 세계로 전파된 팬데믹이 장기화함에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2019년 11월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였다. 식당에도 4명 초과하는 인원이 함께 식사를 못하게 되면서, 등산모임도 인원제한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우보회는 총원이 6명인데 참석자가 4~5명, 식사 인원은 많아야 4명이어서 제한받지 않고 전원 건강하게 지금까지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 추운 날씨에는 비닐 쉘터를 치고 그 안에서 함께 점심을 하면서 산행을 즐기고 있다.
이렇듯 1988년부터 시작한 등산은 2024년인 현재까지 35년 넘게 내 취미활동이며 내 건강을 지켜주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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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6일자 오피니언 [同好] 김기창회장이 기고한 [경동고 23회 등산모인 '고우회' 욕심 없이 오르는 '우정의 산행길]이다.
필자는 산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아버님 덕분에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인왕산과 북한산 밑에서 보냈고 지금도 우면산 기슭에 살고 있어 자연스럽게 산과 접하면서 지내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오랫동안 산을 오르지 못하다가 3년 전에 "고우회"에 가입하게 되어 다시 산을 찾게 되었고 부부가 열심히 다닌 덕분에 올해에는 회장을 맡아 작은 봉사를 하고 있다.
"고우회"는 경동고등학교 23회 동창생들의 등산모임으로 9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여러 동창 모임 중 가장 활발한 모임으로 현재 회원 수는 46명이다. 적게 나올 때는 10명 정도, 많게는 30여 명이 나올 때도 있으며 평균적으로 15명 내외가 매달 첫째 셋째 일요일에 정기적인 산행을 하고 있다. 올해 필지가 회장을 맡고부터는 조용한 산을 찾아보자는 노력으로 경기도 일원에 있는 산을 새로운 산행지로 택하고 가끔은 지방에 있는 산도 찾고 있다.
한번은 힘든 코스, 한번은 쉬운 코스로 회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고우회의 열성 회원들로는 사전에 답사하여 항상 좋은 산행코스를 정해주는 장영건 고문(개인사업). 사업과 교회일 등으로 바쁜 중에서도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는 조일구 총무(남일상운 대표)를 필두로 통산 등산 기록 400여 회를 넘고 있는 속보등산가 송요철 회원(수유중앙시장 대표), 부부가 열심히 나오는 무골호인 오재명(세무사) 회원, 관악산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는 안태인 회원(서울대 교수), 꼿꼿한 자세로 페이스를 유지하며 유머가 넘치는 조대희 회원(치과병원장), 구수한 고전해학으로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김효영 회원(효성한의원),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산행에만 열중하는 하재룡 회원(이북오도청 국장), 열심히 약수를 나르는 애처가 이학인 회원(보험대리점업), 바위 등반전문가 정하선 회원(개인사업), 씩씩한 걸음걸이로 선두에 서는 김화영 회원(대웅숯대표), 잉꼬부부 오공근 회원(개인사업) 등이 있다.
모두들 욕심 없고 마음 좋은 분들로 함께 산행하면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으므로 건강은 물론 스트레스 해소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새로 들어온 회원들은 처음에 적응 안 되어 힘들어할 때가 많지만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헉헉대며 정신없이 쫓아다니던 내가 지금은 선두그룹에 끼어 있는 나를 모델로 삼아 용기를 북돋우어 주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 모두들 우렁차게 "삼각산 높은 봉은 기상이 씩씩하고, 한강수 맑은 물은 마음도 깨끗하다."로 시작되는 교가를 합창하고 나면 학창 시절의 싱싱한 젊음으로 돌아간다.
백두대간 종주(2013.08.17-2018.06.16 /58구간)
정년 퇴임한 이듬해인 2013년부터 고등학교 총동창회 산악회에서 기획한 백두대간 산행에 참석하였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산(白頭山 2,750m)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산줄기만으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대간을 말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은 고두산에서 북동쪽으로 장백정간이 갈라진 다음 남으로 내려오면서 13 정맥이 나무의 가지처럼 펼쳐진다. 백두대간의 높이는 100m에서 2,750여m까지 다양하다.
이 백두대간에서 뻗은 지맥들이 한반도의 산하를 이루고, 그 산하에서 흐른 물줄기가 강을 이루고, 평야를 적시며 우리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은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한반도의 큰 산줄기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산까지의 약 1.625km에 이른다. 백두대간산행은 그중 남한에서 산행이 가능한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의 약 690km를 종주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백두대간산행에 도전함은 우리 민족의 정기를 체험하는 데 있다.
총동창 산악회는 25회 졸업생들의 주도로 박우철 회장과 부회장 5명, 산행실무 이사로 34회,36회, 39회 회원들이 수고하였다. 산행에서 등산로는 배창수(25회) 회원이 비상 탈출로 및 길을 잘못들우려가 있는 위치의 지형지물까지 상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렇듯 동창회의 선후배 회원과 산악 전문가 및 백두대간 경험자들이 앞에서 끌고 후미를 든든히 지켜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 23회처럼 나이 70대인 회원들도 큰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총동창 산악회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58개의 구간으로 나누었다. 이 구간을 2013년 8월부터 매월 3주 토요일 정기산행으로 진행하였다. 당일 산행은 토요일 아침 7시에 양재역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10~11시 사이에 산행 출발점에 도착하였다. 산행을 마치고 오후 5~7시 사이에 하산하면 저녁 식사하고 서울에 오후 10 전후에 도착하였다.
무박산행하는 경우 산행 전날(금요일) 밤 11시경 양재에서 출발하여 새벽 3시경 등산 출발점에 도착한다. 바로 야간 산행을 시작하여 오후 3시경까지산행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1박2일 산행은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여 첫날 산행하고 숙소 또는 산장에서 1박을 한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부터 2차 산행하고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백두대간에는 고도 1,000m대 봉우리가 150여 개나 있다. 무박으로 진행하였던 몇몇 산행이 힘들어 우리 23회 친구들은 1박 2일 산행으로 변경하였다. 전날 저녁에 현지에 도착하여서 1박하고 다음 날 아침에 산행을 시작하여 2시간 정도의 여유를 가진 산행을 하였다. 총 58차 백두대간 산행 중에서 1박2일 산행을 4회, 무박산행을 5회 하였다.
나는 그렇게 산행한 기록을 사진으로 총동창회 산악회와 23회 동창회 카페에 올려서 공유하였다. 매번 양재역 2번 출구 KW 컨벤션 센터 앞에서 오전 7시에 집결하여 산행지로 출발하였으며 회비는 4만 원(처음 3회는 3만원)이었다. 산행지로 향하는 버스에서 아침 떡과 식수가 제공되고 하산 후 저녁 식사가 제공되었다.
2013년 8월 17일 1차 산행 참석자는 15회 선배님부터 39회 후배까지 총 44명이었으며 우리 23회에서는 8명이 참석하였다. 1차 산행은 지리산성삼재휴게소에서 만복대 (1,433.4m), 고리봉(1,305m)을 지나 고기리 삼거리에 이르는 12.6km였다. 이후 매회 25~30명이 참석하였다. 2018년 6월 16일 미시령에서 대간령(680m), 병풍바위(1,058m), 마산봉(1,052m), 진부령 (520m)에 이는 58차 산행으로 5년여에 걸친 백두대간 산행이 끝났다. 백두대간은 1차행 중 만복대에서 고유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진부령에서 종점을 찍다. 그리고 속초로 내려가서 동명항에 있는 횟집에서 백두대간종주 기념 회으로 마무리하였으며, 나는 용케도 완주자 4명에 이름을 올렸다.
백두대간 산행은 기본 체력이 있어서 시작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봉우리 오르내리고 12~15km를 걷기 때문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권을 길러 두기 위하여 몇몇 친구들과 매주 2회 서울 근교에서 산행하였다.렇게 체력 관리를 위한 트레킹(trekking)을 꾸준히 하면 심폐기능과 근력이강되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서울 근교의 하루산행에서는 정상을 지난 다음에 점심을 먹고 좀 쉬었다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백두대간 산행은 산행 출발점에 도착하서 2시간 정도 오르면 당일 산행 거리의 약 1/3 지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이서 여유 있게 쉴 틈도 없이 몇 개의 산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므로 후반으갈수록 지치는 정도가 심각하였다. 대간 산행은 능선을 타고 다니기 때문곡을 지나지 않고, 약수터를 만나기가 어려워 식수를 구할수가 없다. 그 여름 산행은 갈증이 심하므로 물을 많이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산행은 추위와 눈보라와 싸워야하고, 미끄럼 방지를 위하여 아이젠을 지'는 것이 필수였다.
5년 동안 58차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산행에 참여하면서 산등성이마다 아은 우리 강산의 경치를 절감하였다. 전 국토의 63.5%가 임야인 골짜기 골에 옹기종기 형성된 마을들을 지나면서 우리 민족의 척박한 삶을 보는듯 하였다. 백두대간의 산들을 잇고 있는 재()와 령(嶺)은 무수히 많다. 그 재와령은 우리 선조들이 백두대간 준령을 넘나들면서 물물교환하거나 인연이 오간 흔적이 남은 한 많은 고개였을 것이다.
어느 산길은 육산(山)으로 지칠 줄 모르고 오르고 어느 너덜 길은 걸음을 재촉하면서 중심 잡기도 어려웠다. 돌멩이가 작은 너덜길에서는 발목을 다칠까 염려되었고 큰돌덩이가뒹굴어 만들어진 너덜길에서는 돌 틈에 빠질까 염려되었다. 가파른 산길에서 한 발 헛디디면 몇십 미터 낭떠러지로 구를 수도 있었고 산비탈과 바위틈새를 오르는 밧줄을 타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산행에서 큰 사고는 없었지만,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아찔한 위험을 몇 번은 경험하였다. 내리막 눈길에 동심에 홀려 미끄럼 타다가 바위 끝에서 공중회전을 하고 낙하하여 냉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다. 또는 밧줄에 매달려 바위를 내려서면서 발끝이 닫는 것을 못 본 체 밧줄을 놓아버린 실수로 역회전으로 두 바퀴를 구른 대원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배낭을 메고 있었고 착지를 잘하여서 다치지 않았다. 너덜 길에서 한 발 잘못 딛고 비탈로 나가떨어져 이마를 다치는 사고도 있었다. 하지만, 일행 중에 119 대원이 있어서 응급처치술로 위기를 면하였다.
지금은 백두대간의 여러 큰 산 중에는 생태 학습장도 만들어져 있어서 자연을 학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은 높은 산들을 끼고 있어서 야생화나 희귀 수종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는 자연학습장이다. 겨울의 상고대, 눈경치, 가을 단풍, 봄가을의 연무가 이루는 운해도 숨 막히는 풍경이었다. 산행이 주로 고산을 넘어가는 능선 길이어서인지 새나 야생동물은 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멧돼지들이 먹이 활동으로 파헤친 곳은 많이 보았다.
그런가하면 대관령 아래위로 개발된 채소밭도 많았고, 곳곳에 풍력발전으로 인한 자연훼손도 심각하였다. 또한 동계올림픽 경기장을 조성하면서 강원도 일원에는 높은 산 정상까지 훼손된 곳도 다수 보였다.
이렇듯 개발이나 스포츠 목적으로 훼손은 눈도 깜짝 안 하면서 등산객들로 인한 자연훼손을 막겠다고 백두대간 등산로에 출입 금지된 곳은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금지된 곳을 우회하는 등산은 훨씬 더 어렵고 위험하였다. 서울 근교의 등산로에는 등산으로 인한 자연훼손을 줄이기 위하여 덱 계단이 많이 만들어져 있어서 등산객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백두대간 출입 금지 등산로에도 이와 같은 덱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자연손을 방지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등산을 좋아하고 백두대간을 답사하겠다는 산군들은 누구보다도 우리 강산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해줄 사람들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다음 표는 우리가 진행하였던 58차 백두대간 산행을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에 이르기까지 대간 지점(볼드체)을 중심으로 각 회차의 산행로를 정리한 것이다.
http://kd23.com/exceldoc_2/bakdudaegan_mountain.htm
키나발루산
백두대간 종주 마감을 3개월 앞둔 2018년 3월에 우리 일행은 백두대간 종주 기념으로 말레이시아의 보르네오섬 북부에 있는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에 갔다. 코타키나발루는 적도 부근에 있으며 19세기 후반, 북보르네오가 영국령이 되면서 1899년대에 건설된 항구도시로 목재·고무 등을 수출한다. 코타키나발루는 사바주의 정치·상공업의 중심지로 경제적으로는 홍콩(香港)과 유대가 깊으며, 주민의 1/3은 중국인이다.
우리는 1박2일(3월4~5일) 산행으로 동남아시아 최고봉인 키나발루산정상(4.095m)에 올랐다. 키나발루산은 정상을 오른 다음 출발점으로 원점 회귀하는총 16km 산행이다. 키나발루는 토착민인 카다잔족의 정신적 고향인 아키나발루(Aki Nabalu)에서 유래하였으며 죽은 자가 존경받는 영혼의 안식처란 뜻이라고 한다.
키나발루산은 말레이시아 최초의 세계 자연유산으로 하루 입산 인원이 산장수용인원에 맞추어 180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사전에 예약해야 산행할 수 있으며 외국인의 경우 예약금은 1인당 약 60만 원이다. 거기에 가이드 동행, 산행도시락, 산장 숙박료 산장 식사, 하산 후 점심 식사가 포함되어있다. 일행 22명 대원중에 여성으로는 내 아내와 박 단장 부인이 동참하였다. 23회 중에는 김기창, 송요철, 양수석, 하재룡, 내가 참석하였다.
항공편으로 코타키나발루에 늦은 오후에 도착하여 시내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숙소(KK Plaza, Loft)에서 민박하고, 다음 날 아침은 구시청사 등 시내 몇 곳을 구경하는데 날씨가 흐려지더니 급기야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 등산을 위해서 키나발루공원 공단에 도착하는 동안에는 폭우가 쏟아져 등산길이 염려되었다.
공원 공단(해발 1,564m) 인근에 있는 방갈로(lodge)를 배정받고 열대우림 고산 적응을 위하여 일박하였다. 해가 지면서 비도 그치고 낙조가 비치는 것을 보니 내일 날씨는 좋을 것 같기도 하였다. 방갈로는 유럽풍으로 벽난로에 장작을 피울 수 있어서 일행이 여행담을 나누면서 유쾌한 첫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원공단으로 가서 입산 신청서를 작성하고 가이드를 배정받고 입산증을 발급받았다. 등산에 필요 없는 짐은 보관시키고 필요한 짐도 지참하기가 힘들면 가이드에게 부탁하면 유료로 짐을 운반해 준다. 날씨는 쾌청하여서 정상이 바로 앞에 닿을 듯 보인다.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4.5km를 이동하여 산행 출발점인 팀폰 게이트(Timpohon Gate, 1.866m)에 도착하였다.
첫날 산행은 아침 9시경 팀폰 게이트를 출발하여 파나라반(Panalaban, 3.272.7m) 베이스캠프에 이르는 6km 구간을 오르는 것이다. 등산로는 잘 나 있었으나 영국인들이 개발해서인지 계단이 비교적 높았다. 그러나 500m, 또는 1km 간격으로 화장실이 갖추어진 쉼터가 있어서 등산이 편하였다. 등산로 곳곳에서 식충식물 같은 희귀 열대 식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 힘들지 않게라양 라양(Layang Layang) 쉼터(2,702m)에 도착하여 도시락을 먹었다.
오늘 목표 지점까지 700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지나는데 숨이 심하게 차고 조금은 어지럽고 구토가 날 것 같은 고산증세가 느껴졌다. 고도가 3,000m로 높아지면서 식물상도 키가 작은 고사목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오후 4시경 파나라반에 있는 라반 라타 산장(Laban Rata Rest-house)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오후 5시경 뷔페식 저녁을 먹는데 고산증세로 속이 그다지 펀치 못하다. 한데 창밖으로 산장 전면에 구름 위로 펼쳐지는 낙조가 황홀하였다. 내일 등산 일정을 고려하여 7시에 소등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한방에 4명이 들어가는 벙커 침대라서 쉽게 잠들지 못하였다.
다음날은 새벽 1시에 일어나 냉수욕하고 아침 식사로 죽을 먹었다. 2시 30분경, 한밤중에 산장을 출발하여서 정상까지 거리 2.7km 남짓, 고도 800m 등정을 시작하였다. 헤드랜턴을 켜고 앞사람 뒤태만 보고 한발 한발 오르는데 엄청숨이 찼다. 등산로는 온통 계단과 거친 돌밭이었다. 해발 3.668m 사얏사얏대피소(Sayat Sayat Hut)를 지나면서 통과 확인을 인증받았다.
어렴풋이 새벽이 오고 있는데 나무는 한 그루도 없는 암벽 덩어리 바위산을 이리저리 오르는데 칼바람이 불어서 잠시도 쉴 수가 없다. 05:30분 KM8.0. 고도 4008m 지점을 통과하였다. 아직도 어둡고 찬바람이 거칠게 불어온다. 먼동이 트면서 앞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람과 춥기는 여전하였다.
로우스 피크 정상(Law's Peak Summit, 4,095m)까지 2.7 km를 오르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정상에는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06:46분 일출을 보면서 정상 인증사진 한 컷을 찍고 내려오는데 저 멀리 왼편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정상에서 보는 일출이 명품이라 하여서 해가 운무를 뚫고 오르기를 기다리는데 추위가 보통이 아니다.
어둠 속에 우리가 올라온 암반 경사면이 들판처럼 펼쳐 보이고 여기저기 숨어 있던 암봉들이 드러나 보인다. 어둠 속에서 정상을 향해 두 손으로 암반을 잡고 기어오른 4발 등산이 실감났다. 운무의 적색 아우라를 입고솟아오른 태양. 그 햇살이 비치는 정상의 풍경은 비할 데가 없이 신비하고 황홀하였다.
주위와 싸우면서 보는 이 일은 과연 명품이다. 너나 모두 일을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정상에서 좀 내려온 다음 바람을 피할수 있는 자리에 앞서고 뒤선 19명 우리 대원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고단 중에는 높은 고도에서 대기압이 낮아지면 산소분압도 낮아져 숨을 쉬어도 피로 들어오는 산소가 부족한 데 따른 증세이다. 산소 공급이 부족하면 우리 몸은 신체 부위별로 혈액 공급을 부분부분 차단하는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뇌로 가는 혈액이 일부 차단되어서 어지럼증이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위로 가는 혈류 부족으로 구토 증세를 느낀다. 나는 어지럼증은 없었고 고산 증세로 몇 번 토를 하였다. 토하니 속이 아픈 것이 아니라 위가 비워지면서 위장혈관이 이완되어 혈액 공급이 회복된 것인지 뱃속이 훈훈해지면서 편해졌다.
새벽(2:30)에 출발한 산장까지 내려오니 9시가 되었다. 산장에서 등산원점까지 6km 남짓한 거리를 내려오는 길은 한발 한발 갈수록 고산 증세는 점차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2일 연속 산행하는 발길은 가볍지 않았다. 팀 폰 게이트에 오후 2시경에 도착하여 하산을 완료하였다. 2시 20분경 공원 공단에 하산을 보고하고 키나발루산등반 인증서를 발급받았다. 나이 70대에 처음으로 체력 한계에 도전해본 산행이었다.
키나발루산은 열대 우림지역에 우뚝 솟은 고산이다. 산아래는 열대성 기후로 한여름인데 정상에는 한겨울 추위에 시달릴 만큼 높다. 그래서 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4계절을 다 느낄 수 있었으며 식물 또한 열대우림에서 침엽수림까지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가기 전 2015년 6월 5일에 키나발루산은 강도 6.0의 지진이 발생하여서 거대한 바위가 무너져 내려 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우리가 산행을 마친 3일 뒤인 3월 8일에도 강도 5.2 지진이 다시 발생하여 일부 산기슭이 무너져 내렸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튼 백두대간 종주 산행 기념으로 갔던 키나발루산 산행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지만, 힘들고도 아찔한 산행이었다.
다음날은 여객선을 타고 사피섬(Sapi Island)으로 가서 모터보트에 연결된 낙하산을 타고 바다에서 공중비행을 즐기는 패러세일링(parasailing)도 해보고물안경을 쓰고 명경같은 청정해역의 바닷속 풍경을 스노클링(snorkeling)도 하였다. 돌아오는 뱃길에서는 코타키나발루 명품인 선셋 크루즈(Sunset Cruise)를 타고 낙조를 즐겼다. 실로 코타키나발루는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4계절을 다 체험할 수 있는 여행지였다.
낙동정맥
백두대간 종주에 이어서 고등학교 총동창회 산악회에서 낙동정맥 종주를 기획하였다. 낙동정맥은 백두대간 태백의 천의봉(1,303m) 동쪽 1,145m 봉에서 갈라져 부산다대포 몰운대까지 도상거리가 약 420km이다. 산줄기는 백병산(1.259m), 통고산(1,067㎡), 백암산(1,004m), 주왕산(720m), 단석산(829m), 가지산(1.240m), 신불산(1.209m), 천성산(10m), 원효산(922m)을 거쳐 부산금정산(802m)과 백양산(642m)을 넘어 몰운대에 이른다. 낙동강은 안동을 거쳐서 내 고향인 풍천면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어서 낙동정맥을 종주하면 고향 산천경개를 둘러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2018년 7월 21일에 강원도 태백시 삼수령 공원에서 낙동정맥 산행을 시작하였다. 낙동정맥은 백두대간의 분기점(1,145m)에서 시작되며 통리역까지가 1차 구간이다. 삼수령, 일명 피재)은 높이 20m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분기점이며 이곳에 떨어지는 빗물은 북쪽으로 흘러 한강을 따라 서해(황해)로, 동쪽으로 흘러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또는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흐르는 분수령이라 하여 삼강(三江)의 발원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2018년 10월 20일 4차 산행, 불심재~답운재에 이르는 15.9km 산행에서 예정 시간에 90분이나 뒤처져 캄캄한 저녁 8시에 답운재에 도착하였다. 그러면서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산행 안전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낙동정맥 산행을 6차까지 참여하고 중도 하차하였다.
앞서 백두대간을 산행하면서 후배 대원들의 성원에 힘을 얻어 완주할 수 있었다. 용기를 내어 낙동정맥 산행에도 참여하였지만, 산행을 계속하면서 체력이 향상되는 나이가 아닌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매주 2회 산행으로 단련하여도 무릎이 옛날 같지 않다. 특히 낙동정맥은 산행 시작점에 도착하고 끝지점에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왕복하는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8시간까이 되었다. 겨울철에는 안전 산행을 할 수 있는 밝은 시간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거기에다 90여 분 지각을 하게 되면 준비되지 않은 산길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
어두운 산길을 재촉하다 보면 미끄러지거나 돌부리나 나뭇등걸에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고 낭떠러지로 실족할 수도 있다. 앞 사람을 놓치거나 등산로 표시를 잘못 보고 딴 길로 들어서면 대원 모두에게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나이 72세인데 지금껏 종주 산행을 동참한 것에 만족하고 그런 무리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간 총동창회 산악회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종주산행을 진행한 집행부와 종주에 도움을 주신 대원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꼬리말
상고할수록 내 삶에 동행하였던, 또는 조우하였던 모든 인연에 감사드린다.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주신 분, 배움의 길에서 만난 은사님들, 친구가 되어준 동창들, 직장생활에서 만난 선후배 교수님들, 퇴임 후에 후일담을 공유한 명예교수님들의 우정도 깊이 감사할 일이다.
내게 가장 큰 보람과 자랑거리는 서울대학교에 근무하면서 청출어람하는 제자들을 만난 것이다. 그들 덕분에 나름대로 학문을 일구었으며 국내외 유명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많은 것을 성취하고 하는 일에 큰 보람이 있기를 기대한다.
팔십을 바라보도록 아내가 내 가는 길을 즐거이 동행해 주어서 행복하였다. 두 아들과 그 가족들은 우리 삶의 보람이었으며, 초등 4학년 되는 첫 손자와 시애틀에서 2024년 1월에 태어난 둘째 손자는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이다. 16살에 떠나온 안동 땅은 수구초심 내 정신적 근원지였다. 어려운 서울생활을 힘겹게 살아온 어머님을 비롯한 친가족은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었다. 내 삶에 수원수(怨誰咎)는 없었다. 힘들 땐 항상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였다. '껌'세상살이 팔십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이 꿈만 같다.
2024년 2월 안태인(安泰仁)
첫댓글 수고많이하셨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서전 출판을 축하드림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조회수가 저렇도록 많은 친구들이 관심가지고 봐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안동 껑꺼이] e-북이 올라와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