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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성근 부산 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 화사을포에서 갯마을의 고장 일광 이을포까지
오전 9시20분 부전역에서 월내로 향한다. 기차는 철로변 낡고 오래된 마을과 고층아파트로 뒤엉킨 도시의 풍경을 흘려보내며 해운대를 지나 동해와 만난다. 청사포의 등대와 수평선이 몰려왔다. 적란운(積亂雲)이 하늘 한켠에 드리웠다. 소나기가 예고되었지만 간편한 차림으로 나섰다. 정확히 한 시간이 걸려 기차는 월내역에 도착했다. 이 역에서 배우 박중훈과 정유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찍었다.
월내는 부산해안 700리의 기종점 지역이다. 오늘은 그 관문이라 할 수 있는 1-1코스를 걷는다. 공식코스는 임랑해수욕장~기장군청(12.2km)이지만 접근성을 고려해 월내에서 일광 삼성대까지 잡았다. 약 11km 거리에 3시간 정도 걸린다. 사실 시간은 무의미하다. 장소에 따라 투영하는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마나 제대로 보느냐’로 귀결된다. 걷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본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 임랑해수욕장 북쪽 해변에는 작은 시내가 바다로 유입되고 있다. 놀랍게도 이 작은 물길에 의존하는 생명체가 많다.
역사를 빠져 나와 월내항으로 향한다. 그 길에 눈여겨 볼 세 개의 비가 있다. 이 지역 출신 보부상 우두머리 배상기의 영세불망비다. 좌우사반수배상기휼상영세불망비(左右社班首裵常起恤商永世不忘碑)는 반수 배상기가 지역의 상인들에게 혜택을 베풂과 함께 보부상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월내 동서리를 중심으로 계(契)를 조직하고 장학사업 등을 벌인 것을 기리기 위해 1904~1917년에 세웠다.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보부상’(선질꾼 포함) 관련 공덕비는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 부조(扶助)장터에서 발견된 ‘좌상대도접장 김공 이형 유공비’(左商隊都接長金公以亨有功碑)와 충남 홍성군 광천읍 응암리에 있는 ‘부상감의비’(負商感義碑), 그리고 울진군 북면 두천리의 ‘내성행상불망비’ 총 3기가 있는데, 월내 보부상불망비는 그렇게 알려진 바 없다. 비가 건립된 시기로 본다면 부조장터의 유공비는 고종 원년인 1864년에 세워졌고, 충남 홍성의 비는 고종 3년인 1896년에 세워졌으니, 월내의 것이 가장 나중에 세워진 것이다. 안타깝게도 월내 보부상불망비는 그 어떤 기념물이나 민속자료, 문화재 유형에 들어 있지 않다.
▲ 1 기장군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전문 전시장 및 교육공간인 기장도예관. / 2 임랑해수욕장 북쪽 해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달랑게는 그 존재만으로도 반갑다.(위) 월내역 뒤편에 있는 보부상 우두머리 배상기의 영세불망비.
아무튼 보부상 관련 비는 비록 그 신분이 미천해 주목받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어떤 불망비보다 오래 기억되는 삶의 상징이리라. 어쩌면 기장 구포를 연결하는 길은 이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여 그들이 등짐을 지고 걸었던 그 시대의 해안을 따라 길을 재촉한다. 마을의 변화는 아직 눈에 띄게 이렇다 할 무엇은 보이지 않는다. 집을 개량하긴 했으나 골목은 살아 있었다. 골목으로 바다내음이 밀려왔다. 해안정비를 통해 바다는 예전보다 물러나 있다. 물결이 찰랑대고 파도가 밀어붙이던 곳은 테트라포트가 켜켜이 서고 물양장에는 월내 5일장(매월 2, 7일)이 섰다. 파장이다. 쓸쓸함이 묻어난다. 한때 월내 5일장은 근동에서 알아주던 장이었지만 시나브로 시들해졌다.
임금 진상품 중 하나였던 기장미역 이른 봄 이 길은 미역내가 진동한다. 겨우내 채취했던 생미역을 널어 말리는 과정에서 나는 냄새인데, 복더위에 그 냄새가 그리웠다. 기장미역은 예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는 품목 중의 하나였을 만큼 맛과 색이 뛰어났다. 전국 미역 생산량의 5%에 불과하지만 자연산 돌미역처럼 잎이 좁으며 줄기가 두툼하면서도 부드럽고 쫄깃하여 맛이 좋다. 출하 시기는 2월이다. 미역생산이 끝나면 4월 다시마와 7월 멸치가 기장 갯가의 냄새를 지배한다.
▲ 1 월내와 임랑의 경계지점인 임랑항 포구에 누군가 무사안녕을 빌고 갔다. / 2 임랑해수욕장 북쪽 암반에 입지한 대형 음식점 ‘고스락’의 등장은 공유수면과 해안길에 대한 침해다.
이제 본격적으로 걸을 시간이다. 이정표처럼 달음산이 솟아 있다. 월내는 이전에는 월포로 불리던 곳인데 월내항에서 길천 방면 고리 쪽으로 1km 남짓한 거리에 고리의 옛 포구인 화사을포(火士乙浦)가 있다. 화사을포의 화(火)는 불이고 사을(士乙)은 살(光)이므로 ‘불살개’라 했다. 새벽의 붉은 햇살이 비추는 갯가의 아름다운 광경을 불살개라 불렀다 하는데 지금의 고리원자력발전소도 이 지명에 연유해 필연적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한 지역의 피해는 수십 년 갈등의 씨앗이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통념과 이기심이 ‘고리’라는 지명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해안 속초 이남을 통틀어 고리만큼 자연경관이 빼어난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분명 그랬을 것 같다.
암담한 사실은 세상을 뒤흔들었던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사고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동해안에는 원자력발전소가 계속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전보다 반핵의 분위기는 확장되었지만 탈핵의 길은 아직 요원하다. 게다가 고리1호기 재가동은 지역을 새롭게 달구고 있었다. 장안읍 일대에 일제히 나붙은 가동반대 현수막과 억울한 심사를 토해 낸 주민의 구호는 이 여름 지구온난화 시대,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의 본질을 되묻게 한다.
▲ 1 부산 출신 가수 정훈희씨가 운영하는 카페 ‘꽃밭에서’는 그녀의 대표곡명이기도 하다. / 2 효덕마을 최상규 임의용씨댁. 집 전체를 패각으로 치장하고 다양한 새들을 만들어 설치했다.
그 풍경을 뒤로하고 임랑으로 향한다. 기장군의 해안은 그 길이가 월내에서 송정까지 40.7km쯤 되는데 대체로 단조롭다. 예부터 아홉 개의 포구가 있어 연근해 어업이 발달했다. 아홉 포구는 화사을포(火士乙浦)-고리, 월내포(月來浦)-월내·임랑, 독이포(禿伊浦)-문오동(文五洞)·칠암·신평, 동백포(冬柏浦)-동백, 기포(碁浦)-이동, 이을포(伊乙浦)-일광·이천, 무지포-대변, 공수포(公須浦)-공수, 가을포(加乙浦)-송정을 말한다. 이 중 송정은 조선 고종 때 이곳 출신으로 승지벼슬을 했던 노영경(盧泳敬)이 그 출신지인 갯가를 뜻하는 가을포를 숨기려는 뜻에서 송정으로 개명했고, 이로 인해 가을포는 차성 아홉포(九浦)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송정은 기장군 소속이 아닌 해운대에 속해 있다.
공적(公的) 기능 가진 해안의 사유화 더 이상 안 돼 임랑은 월내항으로부터 1km 남쪽에 있다. 좌광천 하구에서 고스락까지 약 1km 길이의 임랑해수욕장이 있는데 기장도예관 앞쪽에 소규모 어항이 들어서면서 모래사장이 반으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북쪽 사빈은 나중에 들어선 대형음식점 ‘고스락’ 전용 사빈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해안으로 돌출된 암반 지역에 입지한 고스락은 이 구간 해안길의 걷는 맛을 반감시켜 버렸다. 붉은 기와지붕을 한 방갈로가 잇대어진 고스락의 존재는 알려진 맛집과 경관적 측면에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뚜벅이들에게는 식당 때문에 400여 m를 차도로 우회해야 한다는 불편을 강요하는 형국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공적 기능을 가진 해안의 사유화는 이제 어떤 장치가 만들어져야 한다. 아무리 사유지라 하더라도 공유 수면까지는 점유해서는 안 된다. 길은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는 경관은 누구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고를 지향한다는 고스락 측의 배려와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해소 노력을 희망한다.
▲ 전 포스코 회장 고 박태준씨의 생가 담벼락. 민박촌 임랑의 마지막 골목이다.
월내리와 임랑리는 옛날 같은 권내의 마을이었고, 월내해수욕장과 더불어 임을랑포(林乙浪浦)라고 불렸는데,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이다. 수려한 송림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을 두고 마을 이름을 임랑이라 하였고,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월출경이 좋아서 월호라 한다고 자랑하지만 민박집이 줄지어 선 임랑해수욕장의 침식은 심각한 수준이다. 한편 여름 임랑은 부산권 해수욕장 중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 송정해수욕장과 더불어 대학생을 비롯 단체 MT 명소다. 지난해 겨울 마을은 벽화를 입혀 새롭게 단장했다. 민박집 마당어귀에 차곡차곡 단을 쌓아 쉬고 있던 평상들이 마당으로 내려와 피서객들의 웃음을 담아내고 있다.
마을 끝은 좌광천 하구지점이다. 좌광천이 임랑바다로 들기 전 S자로 휘어지는 부지에 작년 말 작고한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생가가 있다. 임랑마을은 박씨 집성촌으로 박 명예회장의 인척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박 명예회장은 여섯 살까지 이 마을에서 지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장군은 24억 원을 들여 3,600㎡ 규모의 임랑문화공원을 조성, 이곳에 ‘박태준 기념관’을 2013년까지 건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태준 명예회장 측에서도 기념관 건립을 위해 1,869㎡ 규모의 토지를 군에 기부 채납했다. 그의 삶은 현대 한국 정치와 경제를 관통한다.
▲ 임랑삼거리 좌광천 하구에 입지한 효덕마을은 지금은 원전건설로 인해 사라진 효암 이주민 마을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박 회장은 재계에서 시작해 성공한 삶을 살다 나중에 정치에 발을 들인 이후 패착했다고나 할까.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선후배로 인연을 맺었다. 1967년 박 전 대통령의 특명으로 포항제철을 만들고, 1980년 신군부가 만든 국보위 입법위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입문을 한 다음, 19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이 집권 세력에 합류하면서 1992년 대선에서의 갈등과 불협으로 민자당을 탈당하고 포철 명예회장직까지 박탈당한 데다 수뢰 및 뇌물수수혐의로 기소 당했다. 그 때문에 4년 정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1997년 문민정부 말 귀국 후 포항 보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김종필의 권유로 자민당 총재를 맡기도 하였다.
이후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으로 일컬어지는 DJP 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주축이 되어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 공으로 국무총리까지 지냈지만 그 기간은 4개월에 불과했고 이후 그는 정치계에서 은퇴한 다음 2011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권력의 무상함이 이 골목에서 물씬 묻어난다. 골목에다 이름 하나 붙여 본다. 박태준 골목이라고.
▲ 임랑교에서 문오동 가는 길 야구등대, 닭벼슬등대, 젖병등대 등으로 이색 바다풍경 그의 생가를 돌아 나서면 임랑해수욕장 알림 아치가 서 있고 임랑교를 건너 문오동으로 길은 연결된다. 차가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좀 위험하다. 더욱이 곡각지점이다. 하여 임해행정봉사실서 좌광천으로 길을 내는 한편 임랑교 쪽으로 계단을 단다면 훨씬 안전하고 볼거리도 많아 또 다른 명소로도 기능할 것이다.
문오동길은 임랑교에서 10분쯤 해송길 가로수를 따라 이동한 다음 카페 ‘하눌타리’에서 시작한다. 첫 마을은 문동마을이다. 옛 이름은 독이방(禿伊坊)이었다. 독(禿)은 대머리나 나무가 없는 헐벗은 산과 같은 민둥이를 뜻하는데 이 마을 뒷산인 문산(文山)을 옛날에는 민둥산이라 한 데서 유래하고 있다. 그러나 민둥이라는 어감이 좋지 않아 발음이 비슷한 문(文)을 채택 문동(文洞)이라 하였다. 문동은 문동, 문서, 문상, 문중, 문하 다섯 마을에 이르고 있으며 속칭 문오동(文五洞)이라 부른다. 과거 문상마을이 번창하던 시절 해창(海創)이 있었고, 망해정(望海亭)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이 중 문동이 문오동의 본동으로 기장 구포(九浦) 시절 독이포(禿伊浦)로 불렸다.
▲ 갈맷길 1-1 코스 개념도 사실 문오동 해안길은 해안정비로 인해 딱딱하다. 문동에서 칠암까지 세 개의 방파제가 겹겹 들어서 있다. 이 길에서의 볼거리는 등대다. 옻을 칠한 것처럼 검은빛으로 일렁이는 칠암(漆岩)바다 남항 방파제에는 야구등대가 있다. 야구배트와 글러브, 야구공을 형상화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 기념이기도 한 이 등대는 야구의 도시 부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밖에 기장군해안에는 사람들의 출세와 성공을 기원하는 닭벼슬등대, 풍요로운 부산의 미래를 표현한 젖병등대, 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를 기념한 월드컵등대, 어부의 안전 항해를 기원한 대장군등대(일명 마징가 Z 등대) 등 10여 개가 있어 등대테마여행도 가능하다. 시간이 밥 때라면 일대에 포진한 40여 개의 횟집에서 회 한 점에 허기를 달랠 일이다. 굳이 소개할 밥집을 추천하라면 해경칠암출장소 뒤편 부자집의 ‘말미잘 십전대보탕’을 권한다.
▲ 1 칠암 남항 방파제에 서 있는 부산의 새로운 상징 야구등대. / 2 비가 그치자 황토물 냄새를 맡고 몰려오던 어란 숭어를 잡기 위해 투망하는 사람들.
신평을 앞두고 소나기가 퍼붓는다. 기세를 보아하니 지나갈 비가 아니다. 급히 비를 피할 요량으로 들어갔더니 소문을 듣고 인천서 왔다는 손님들이 한창 그 희한한 말미잘 요리를 먹고 있었다.
서산댁이 차려준 특미로 밥을 먹는 동안 비는 그쳤다. 30분 정도 억수같이 퍼붓던 비는 해안 구릉의 골짜기 황토를 실어와 바다를 누렇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봐 왔던 푸른바다 혹은 먹구름 드리운 검은 바다와는 또다른 빛깔로 바다는 출렁이고 있었다. 비는 신평소공원에 이르자 한바탕 더 퍼부었다. 달리 피할 곳도 없어 졸지에 비에 흠뻑 젖어 버렸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개였다. 그리고 한켠에서는 투망질을 하고 있었다.
▲ 1 신평 해양소공원 입구에 있는 윷판대. 왜장과 윷으로 싸웠다는 그 유래가 재미있다. / 2 작고 아담하지만 시설과 경관이 뛰어난 신평소공원..
바둑돌처럼 반질거리는 검은 돌 해변 기포 동백마을 지나 온정마을로 들어선다. 온정마을은 1970년대 고리원전으로 인해 이주당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당시 주민 162세대는 두 마을로 흩어졌는데 온정마을과 서생 골메마을이다. 특히 울주군 서생면 골메마을로 이주한 29세대는 신고리 1·2호기 건설로 인해 25년 만인 1995년 신리마을로 다시 이주해야 했는데 신고리 5·6호기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세 번째 이주를 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 상실의 참담함이 먹구름처럼 드리웠다.
마을 앞 양식장에 있는 바위 하나를 ‘망향바위’라 이름 붙여 보았다. 생김새가 흡사 사람 형상에 바다를 향한 옆모습이 처연하다. 이 길의 아픔이다.
▲ 온정에서 이동 구간 기장 해안의 원형을 보여주는 자연발생유원지.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용왕제가 수없이 치러진다.
자연발생유원지로 향한다. 1km 남짓한 이 해안은 송림을 배경으로 몽돌과 기암이 보기 좋은 기장 해안의 원형을 보여준다. 소나기 물러난 해안은 다시 피서객들로 북적인다. 솔숲을 빠져나와 미역과 다시마의 원산지로 알려진 이동마을로 걸음을 옮긴다. 이동마을은 이천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이 ‘기포(碁浦)’로서 ‘바돌개’라고도 한다. 바닷가에 검은 돌이 많이 깔려 있고, 그 돌들이 바둑돌처럼 반질반질 윤이 난다 하여 기포라 하였다.
한국유리 모퉁이를 돌아서면 일광이다. 담벼락이 보기보다 운치 있어 이 구간을 걸어 본 사람들은 맛있는 길이라 말하는 곳이다. 조간대에서는 늘 해조류를 채취하는 지역민들과 마주친다. 건너편 학리가 지척이다. 일광천 하구에서 학리까지 해안은 반원형을 그리며 사빈을 형성하고 있다. 기장 구포 중의 하나인 이을포(伊乙浦)인데 요즘은 이천포구라 한다. 그 이름의 유래는 ‘이을개’의 준말인 ‘얼개’로서 ‘잇은개(蓮結浦)’, ‘어량’(漁梁: 대나무나 가는 나무들로 엮어 바닷물이나 강물의 한가운데를 막아 놓고 그곳에 얼개를 치고 끝부분에 통발을 놓고 고기를 잡는 장치)이라 했다. 넓은 백사장과 강송정 포구 위를 나는 갈매기의 군무가 아름다워 평사낙구(平沙落鷗)의 승경으로 차성팔경의 하나로 칭송된 곳이다. 이 일대를 배경으로 작가 오영수가 소설 ‘갯마을’을 썼다. 멀리 기차소리 바람결에 들리고, ‘덧게덧게 굴딱지가 붙은 돌담에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들이 있는 마을에 스물셋 청상과부 해순이’가 살았던 마을이지만 그 흔적은 소설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계속 걸으면 일광해수욕장 끝, 죽성으로 귀양 왔던 고산 윤선도가 동생과 이별하면서 시를 쓴 곳인 삼성대가 있다. 여기서 기장군청까지는 약 2.7km. 귀가를 위해 기장역으로 향한다.
▲ 1 한국유리 해안, 담벼락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닫힘에서 열림으로 전환되면서 건너편 학리해안과 어울린다. / 2 이을포는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실제 무대였다. 그래서 이곳에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가 서있다.
별미 ‘말미잘 십전대보탕’ 말미잘은 얼핏 보면 꽃이다. 촉수는 꽃잎처럼 하늘거리고 입은 암술처럼 옹다물었다. 이 모습을 대하는 동서양의 시각이 확연히 다르다. 예컨대 서양에서는 이 말미잘을 ‘바다의 아네모네’(Sea anemone)라고 부르는 반면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항문을 뜻하는 ‘미주알’로 본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역시 ‘홍미주알’이라고 하며, ‘모양은 오랫동안 이질을 앓은 사람이 탈항(脫肛)한 것 같다’고 했다. 때문에 말미잘이란 이름도 말이란 일반 접두사에 미주알의 준말인 미잘의 합성어다.
그런데 부자집(051-727-7534·부산 기장군 일광면 신평리 45의 4)은 이 말미잘로 요리를 한다. 그것도 전국에서 유일하다. 부자집이란 거창한 이름과 달리 조금은 오래 돼서 낡은 음식점이다. ‘서산댁’으로 불리는 주인 조성의씨가 직접 개발했다 한다. 1인분 1만1,000원인데 가능한 예약을 하고 가야 맛 볼 수 있는 확률이 높다.
▲ 국내 유일의 말미잘 요리, 말미잘 십전대보탕 “예전에 복어 장사를 30년쯤 했어. 우리 아바이(남편) 젊을 때 배 있었거든. 돈 많았어. 칠암에 집을 짓기로 했는데, 인부들 밥 해주면서 말미잘을 몇 마리씩 넣어서 매운탕 해준 거야. 그런데 매번 이것만 끓여 달라는 거야. 그래서 가게 손님들께도 한 번 해줘 봤지. 다 맛있대. 그래서 시작했지.”
주문했던 매운탕과 맛만 보라고 반찬처럼 내어준 조림을 살핀다. 그 생김에서 연상되는 흐물거림이 어떻게 이렇게 먹거리로 변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보아하니 온전히 말미잘로 된 것이 아니라 붕장어(아나고)를 반반씩 섞어 끓인 것이다.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여러 연구를 해 봤는데, 아나고가 말미잘과 궁합이 제일 잘 맞아. 매운탕 국물도 아나고 뼈를 밤새 고아 만든 것이고.”
맛이 묘했다. 처음엔 보들보들 씹히더니 나중엔 꼬들꼬들해졌고, 첫맛은 고소했으나 뒷맛은 콤콤했다. 부드러운 붕장어 살과도 잘 어울렸다. 된장과 고춧가루, 양파 외에 별다른 건 넣지 않는다 했다. 말미잘 자체에 간이 다 배어 있어 다른 양념을 더하면 맛이 이상해진다는 것이다.
▲ 소설 ‘갯마을’에 등장하는 강송정과 느티나무, 당집 등을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길잡이 월내역~고스락~기장도예관~임랑해수욕장~임랑교~카페 하눌타리~해양경찰서 칠암지소~부자집~ 신평해양소공원~ 동백~온정~자연발생유원지~이천항~ 한국유리 뒷길~강송정교~ 일광해수욕장~삼성대 11km
교통정보 ■열차 부전역→동해남부선 이용 월내역 하차
■열차종류 부전역, 동래, 해운대, 송정, 기장, 좌천, 월내 종점역
■가격 새마을 08:40 08:58 09:13 동대구 4,800원 무궁화 09:05 09:14 09:25 09:39 09:49 강릉 2,600원 09:20 09:30 09:40 09:48 09:57 10:10 동대구 09:53 10:02 10:13 10:20 10:27 10:36 10:41 포항
■버스 일반버스 37번, 180번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원동 IC→벡스코 사거리→송정 방향 좌회전→송정터널→시랑리→14번국도→기장
출처 : 월간산 2012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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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곳 소개해 주셨네요. 이번에는 갈켜주신대로 기차로 함 떠나 볼께요.
새로운 여행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것 같읍니다.
차만 타고 지나다녀던 곳인대 언제 사부작 사부작 걸어볼게유 감~~사...
다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구경 잘 했습니다. 옛날 돌에 한때 빠졌을때 일광 돌 줏으러 매주 토요일 마다 가곤 했는데...
자세하게 올리셨군요..즐감하구 갑니다..고맙습니다.
좋은 코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시간 내어 꼭 가봐야겟어요
자전거로는 여러번 지나치던 길이었읍니다...
언젠가 도보로 산보를 꼭 해봐야 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