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육을 가진 인간은 끊임없이 육신으로 사는 이 땅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거기서 무언가를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거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서 오며 그곳은 창세전 곧 만물 위로부터 임을 믿습니다.
나의 생각과 가치가 이 세상 만물 안에서 만물 위로 옮겨지게 하소서.
육신이 아무리 잘 된다한들 그것은 결국 썩어지고 없어져 쇠할 뿐이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생명은 결코 쇠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오니 삼위 하나님이 존재로 거하시는 그 나라를 오늘도 소망가운데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 곳만이 내가 살 곳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거할 곳임을 믿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생명을 주는 영이신 성령 안에 이 하루도 침잠하오니 나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구원자 신드롬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숨을 쉬며 살게 하옵소서.
아직도 꿈틀거리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20:1-12
제목 :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1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32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2 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4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5 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7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8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9 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10 그 때에 벤하닷이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나를 따르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하매
11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12 그 때에 벤하닷이 왕들과 장막에서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진영을 치라 하매 곧 성읍을 향하여 진영을 치니라.
* 나의 묵상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아람 왕 벤하닷 사이의 전쟁은 주전 857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벤하닷은 유다 왕 아사와 동맹을 맺고 북이스라엘을 공격한 바 있는 벤하닷 1세의 아들로서 벤하닷 2세를 가리킨다.
그 벤하닷(벤하닷 2세)는 아람의 소왕국 32개를 하나로 통합하여 통일을 이루어 근동 지역에서 큰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해묵은 적대 관계에 있던 북이스라엘까지도 자기 세력 하에 두고자 침공한 것이다.
그는 이 32개의 소왕국의 왕들을 거느리고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아합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요구하였다.
이는 아합의 처자와 은금 등 귀한 모든 것을 다 자기의 소유로 삼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아합의 신하들의 재물까지도 벤하닷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아합은 처음에는 벤하닷의 굴욕적인 항복 요구에 비굴한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후에 벤하닷의 신하들이 와서 아합의 신하들의 집에 있는 재물까지 다 가져가겠다고 하자 아합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 그 모든 일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장로들은 벤하닷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요청한다.
다시 말하면 아합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처음 요구인 자신의 처자와 은금 요구는 들어줄 수 있지만 두 번째 요구 곧 아합의 신하들의 재산까지 가져가는 것은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하자 벤하닷의 사신들이 돌아가 벤하닷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벤하닷은 사마리아를 ‘부스러진 것’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아파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폐허를 만들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히브리어 ‘아파르’는 먼지 티끌이라는 뜻으로, 사마리아를 불로 태워 부스러져서 재가 남는 상황을 희화화한 표현이다.
이 말은 아람 군대가 굉장히 강력해서 그 공격이 그만큼 철저하고 잔인하여 남는 것이 재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의미는 아람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사마리아를 태운 재를 아람의 군인들이 한 줌씩만 가져간다 해도 부족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 마디로 자신의 요구를 사실상 거절한 아합의 군대를 벤하닷이 초토화시키겠다는 말이다.
이런 벤하닷의 호언장담에 아합의 대답 역시 조소하는 말로 응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갑옷을 입는 자는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이고 갑옷을 벗으며 자랑하는 자는 전쟁에 승리한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직 전쟁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다 이긴 것처럼 오판하지 말라는 조소의 의미로 벤하닷의 말을 반사시킨 것이다.
아합이 한 이 말은 당시 고대 근동에 널리 알려진 격언이다.
그는 이 격언을 인용하여 아람 왕 벤하닷의 교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아람 왕 벤하닷은 북이스라엘을 지나치게 무시한 결과 북이스라엘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신 북이스라엘 군대에 대패하고 만다(19-21절).
아합의 조소 어린 반응을 들은 벤하닷은 심히 열 받았다.
그가 이 말을 들을 때 32명의 소왕국 왕들과 함께 장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성을 잃고 신하들에게 곧바로 북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아람 군대는 북이스라엘의 성읍을 향한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아람의 벤하닷과 북이스라엘의 아합 간의 첫 번째 전쟁은 벤하닷의 선제 포위 공격과 기가 막힌 협박으로 시작되었다.
벤하닷은 먼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였다.
그런 이후에 사신을 보내 북이스라엘에 대한 아람의 절대 우위를 과시하며 아합으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게 하였다.
이에 대한 아합의 대응이 어떠했는가?
아합은 벤하닷의 요구에 순순히 시인하고 자신을 벤하닷의 신하인 것처럼 한없이 낮추어 말하였다.
(4절)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여기서 아합이 자신을 낮춘 이유는 벤하닷의 군사력을 보고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벤하닷이 요구하는 것들이 아직은 자신이나 북이스라엘에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닐 것이라는 다소 쉽게 생각한 면이 없지 않다.
어쩌면 아합은 이 시점에서 자신이 적당히 굴복하는 것으로 벤하닷이 만족하고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북이스라엘이 별다른 화를 입지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다시 말하면 아합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벤하닷은 이렇게 말한다.
(5-6절) 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이를 통해서 아합의 생각과는 달리 벤하닷의 야욕이 무엇인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아합과 북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쳐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람의 건국 초기부터 중근동 지역의 강국이었던 이스라엘의 힘을 간과할 수 없었기에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합의 태도를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아람의 우위가 분명히 드러났고, 아합이 겁을 먹고 있다고 판단된 이상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던 벤하닷은 마음 놓고 북이스라엘을 요리하겠다는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만약 아합이 벤하닷이 보낸 첫 번째 사신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결사 항전의 태도를 보였다면 벤하닷은 아마도 모든 요구를 철회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화평을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벤하닷의 음흉한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이 땅의 모든 악인, 특히 악의 원천인 사탄의 속성을 볼 수 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매 순간 사탄의 유혹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유혹이 우리가 단번에 유혹이라고 느낄 만큼 큰 것으로 다가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개의 경우 사탄의 유혹은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하는 정도로 다가 온다.
성도들은 여기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마지노선이라 생각하고 그 유혹을 받아들인다.
사실 처음의 유혹은 아주 작고 그 존재가 미미하기까지 하여 유혹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밀려왔다 가기를 반복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보면 어느덧 모래사장이 점점 줄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창조 이후에 하와 역시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현현으로 나타난 뱀의 유혹을 받는다.
그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짐승이었다.
여기서 ‘간교한’으로 쓰인 히브리어 ‘아룸’은 극히 순전하다는 뜻이다.
이 ‘아룸’이 바로 위에 있는 창 2:25절에서 동일하게 나온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아루밈)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아룸은 뱀 혼자이므로 단수형으로 쓰였고, 아루밈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므로 복수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이는 곧 벌거벗은 모습 그 상태가 아룸이며 가장 순전한 상태를 말한다.
이처럼 뱀은 하와를 유혹하기에 가장 적합한 동물이었다.
만약 그 뱀이 오늘날 징그럽고 흉측하게 생긴 동물이었다면 하와가 그 뱀과 만나서 서로 말을 섞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뱀은 오늘날 애완견처럼 가장 친숙한 동물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의 손길이 바로 그러하다.
고린도 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생들이 자주 그들을 미혹했는데 사도 바울은 그런 미혹의 손길을 가리켜 ‘광명의 천사’라고 말하였다.
(고후 11:13-15)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나 역시 아합이나 하와와 같이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사탄의 유혹인 것을 인지하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면서 그 정도는 나의 힘으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어디 유혹이 과연 그런가?
나도 모르게 넘어가 보기 좋게 뒤로 자빠지는 것이다.
물론 그 자빠짐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지만 그 유혹은 이내 다시 찾아온다.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 과감하게 잘라내지 않으면 평생 죄에 종노릇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짓는 온갖 죄들이 이제는 지나간 때로 족하지 않느냐고 일갈하는 것이다.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나는 이런 죄의 목록에 따른 죄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넘어진 자였다.
목록적인 죄를 짓고 나서 나는 그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얼마나 많이 다짐 또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지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다시 그 죄에 머물러 있는 나를 본다.
그런 와중에 주님이 알려주신 복음 앞에 선다.
그 복음이 나를 십자가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무슨 선한 행위를 해서 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서는 곳이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인정한다.
그렇게 받은 영원한 생명 앞에 겸손함과 면목없음으로 나아갈 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 자신을 보면 악을 행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아니라 이번만 이번만 하면서 죄악을 조금씩 허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죄악을 짓지 않겠다는 결단을 해도 그 결단은 금세 무너지고 마는 나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하는 결단은 오히려 나를 더 죄인으로 들어가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되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임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서기를 원합니다.
나는 원래 벌거벗은 자(아룸)입니다.
그것은 죄를 지은 후에 내 눈으로 볼 때 부끄러운 자였습니다.
이를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그 부끄러움을 세상의 사장 높은 곳인 십자가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친히 아룸이 되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품에 안길 때에만 부끄러움이 없어집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것, 곧 주님의 품속만이 나를 순전한 나로 세워줍니다.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주님의 부끄러움 안에 거하는 자로 서게 하소서.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