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ver France &Italy (2015.10.21~2015.11.12)
Oct.21
카카오 택시 어플을 처음 받아놓고 택시를 불렀다.
운전기사 신분증과 전화번호는 물론 도착까지 4분 소요된다는 메시지도 뜬다.
편리하고 놀라운 세상이다.
기사에게 1,000원 더 주라고 Gold에게 일렀다.
택시 안에 분실물이 있으면 찾아 질 것이다.
금번여행은 3 ladies를 모시는 여행이다.
wife. daughter. granddaughter.가 손님이고 나는 가이드다.
손녀 손님은 무료, 딸 손님은 자기지분의 숙박료와 비행기 삯,
마나님 손님은 여행기간 동안 점심 부담 조건이다.
나머지는 가이드 총 부담 이다.
안전여행을 다짐한다.
팀워크 여행이지만 각자의 느낌에 충실하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또 하나의 원칙은 서로 No touch 원칙이다.
두 달 전부터 여행을 계획할 때 Baltic 3국 또는 모로코 전역과 카사블랑카나 나폴레옹 출생지인
코르시카 섬들을 검토하다가 손녀를 위한 루트로 최종 확정했다.
나는 파리나 니스 , 피렌체 베네치아 모두 익숙하지만 새로운 고객들을 위해 반복여행,
영화를 재탕하는 기분이지만 名畵는 두세 번 봐도 명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이번 여행을 기획하고 직접 예약하면서 이 일이 없었더라면 시간들이 무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세상은 넓고 할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시간은 많고 할일은 없다”
요즘의 내 일상 이었던 것 같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세계사와 인문학공부를 많이 했다.
1,2차 세계대전 전쟁사, 대국굴기, 르네상스 인문학 강의 등.
西洋史 공부를 많이 한 셈이다.
파리에 2박 후 마르세유로 이동하여 프랑스 남부를 횡단하는 프로방스 지방에서 7박 후
열차로 이태리 중동부인 제노바. 피사,르네상스의 발상지인 꽃의 도시 피렌체,
시에나. 볼료냐(Bologna), 베네치아를 거쳐 파리에서 최종 4박하는 22박24일의 여정이다.
집을 출발한 택시는 잠시 후에 미금 공항버스 정류장에 우릴 내려준다.
5시35분 버스가 막 출발하는 상황이지만 원래 계획했던 5시55분 버스를 타기로 결정하고
서두르지 않았다.
내 여행안전지침인 No hurry를 지킨 샘이다.
재수 좋게 오늘 에어프랑스 자리가 여유롭다.
티켓 받고 pp(Priority Pass)카드 이용해서 허브라운지 들려 아침 먹고
게이트113 이동 9시30분 이륙했다.
32E. F. G. H 나란히 받았다. Priority Pass 카드로 배를 채우고, 출국심사 받고 탑승했다.
좌석에 착석, 잠시 눈을 감았다가 깜박 존 후 비행기가 이미 이륙 후 안전고도 진입이라 판단하여
연결된 빈자리 찾으려고 일어섰는데, 승무원이 급히 뛰어와 자리에 앉힌다.
상황은 이제 막 이륙하려고 엔진을 가속중인 상태다.
엉뚱한 승객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륙 후 벨트사인은 그대로 이지만 승무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있어 나도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일어섰는데 복도 건너편에 앉은 중년 승객이 지금 일어서면 안 된다고 나를 말린다.
내 머리 속은 온통 뒤에 세 자리 연속 빈자리를 맡아서 침대로 사용할 궁리인데
이 중년은 날 처음 비행기 타는 老人으로 간주 하고 있다.
속으론 요놈아! 이번 비행이 150여회나 되는 비행이니 염려 놓아라.
그렇지만 졸다가 벌떡 일어서서 행동으로 옮긴 일은 서둘지 말자는 안전수칙을 어긴 에러가 분명하다.
주는 밥 잘 받아먹고 샴페인 한잔. 와인 한잔 마시고 양말 벗고 의자 3개 차지하고 큰 대자로 누었다.
발이 조금 불편하지만 First class 그 이상 이다. Beyond.
오후 2시경 파리드골공항 도착해서 Mercure Paris CDG Airport & Convention 호텔에 체크인,
저녁은 누룽지로 했다.
루트를 정기적으로 운행 하는 공항셔틀을 잘못 타서 공항 부근의 다른 메르크르 호텔에 내렸다가
프론트 에서 연락해 줘서 메르크르 Convention 호텔 미니 버스가 우릴 싣고 갔다.
Oct.22
식구들 모두 새벽에 눈을 떴다.
호텔에서 넉넉하게 아침식사 후 2 터미널 과 tgv사이로 이동해서 자판기에서 티켓 팅 해서
RER B선으로 노트르담까지 이동했다.
어른 어린이 구분 없이 편도 인당 10유로씩이다.
티켓 자판기에서 표를 사는 데는 손녀 Kelly가 선수다.
그동안 많은 해외여행 동반으로 국제화 돼 있다.
보는 것도 빠르고 움직임도 민첩하다. 위기가 닥쳐 필요 할 땐 영어도 유창하다.
RER B 라인은 노트르담 까지 직통이다.
센 강과 파리 시청사 익숙한 모습들이다.
街販들은 모두 천막을 내렸다.
시즌이 아닌 탓일 것이다.
노트르담 타워에 오르는 긴 줄에 섰다가 성당 내부만 돌아보는 줄로 이동 붐비지 않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외부만 보고 돌아갔는데 이젠 안도 보게 됐다.
보물 구역에는 교황들이 사용하던 황금으로 된 화려한 성구들이 전시 되어있고
별도로 돈을 받는다. 나오는데 입구 직원이 땡큐 라고 인사를 한다.
별도로 돈을 내면 대우 받는 것은 동서양이 같다.
소로 본(Cluny La Sorbonne) 대학도 들려보고, 루이 15세가 1774년 중병에서 회복되고,
살아 있음에 기쁨으로 성녀 제느비에브(파리를 수호하는 성녀)에게 바치는 교회로 만든 곳으로
1789년 축조한 판테온에 들려 프랑스가 자랑하는 예술가 학자 정치가들의 정갈한 무덤들도 둘러봤다.
판테온의 원전은 로마에 있는 것인데, 피렌체의 도모 성당의 돔을 설계한 브르네르스키 도
로마 것을 벤치마킹 했다. 파리의 판테온도 로마 것을 카피 했을 것이다.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퀴리 부인 등의 묘소가 있고, 지구의 자전을 증명했던
곳으로 그때 사용했던 진자가 남아 있다.
소로 본은 파리의 3대학 ,4대학의 통칭이고, 빅토르 위고(1802~1885 노트르담 드 파리),
파스퇴르(1822~1895 탄저균 백신) 등 유명인사들이 배출 되었다.
점심은 스테이크로 하고 퐁피두센터로 이동했다.
프랑스 전역에 최고단계의 테러위험경보가 내렸다고 각별주의 하라는 외교부의 메일이 뜬다.
입구의 검색이 꼼꼼하다.
어쩌라고? 여행은 결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는데, 외교부 메시지는 고맙기 보단 짜증스럽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보안을 강화하는 이유를 알 수 있으니 좋긴 하다.
Gold와 나는 카페에서 쉬고 아이들만 미술관등에 들려서 피카소 샤갈 그림들을 봤다.
6층에서 내려 다 보는 파리 시내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전한다.
파리 복판은 거의 평지이고 고층 건물도 규제되기 때문에 조금 높은 곳에 오르면 시내
전경이 잘 들어난다.
6시가 다될 무렵 마리 앙뚜아네트 Antoinette (루이 16세의 왕비,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리지아의 막내딸/14세 때 정략결혼으로 1774년 왕비가 됨/베르사유 궁전에서
살다가 혁명이 난 1789년 10월
파리의 왕궁으로 연행 되어 1792년 시민봉기로 탕플 탑에 유폐되고,1793년 10월 단두대로 처형/
1755~1793 38세)가 프랑스 혁명 시 갇혔던 궁전과 방을 둘러봤다.
화려한 궁전에서 호화롭게 살았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 222년이 지난 지금도 쏴한 마음으로
전해 온다.
런던도 그렇지만 내가 아주 익숙한 파리도 항상 새롭고 정겹다.
드골공항 역으로 이동해서 Paul 베이커리에서 빵을 샀다.
맛 있는 빵집으로 알려 있는데 파리 바게트 만도 못하다. 빵을 잘 못 골랐나?
호텔셔틀로 호텔로 돌아와 사온 빵과 샐러드로 저녁을 했다.
Oct.23
5시 공항 이동. 이른 아침에 공항으로 이동하는 투숙객들이 몇명 더 있다.
7시20분 마르세유로 이동.
렌트카 하는 날이다.
트렁크 예비타이어 작키 안전 삼각대 확인, 기름 종류,문제시 여락 처(야간포함)등을 확인,
톰톰작동, 급한 출발 방향 전환 등 주의 할일들이다.
셔틀 기다리는 동안 아이 패드 사용 건으로 Su와 Kelly 충돌이 생겼다.
금방 平常이 된다.
母女는 그래서 좋다.
할배와 할매인 우린 傍觀者 내지 觀衆이다.
호텔셔틀에 탄 대부분 승객들은 터미널 1에서 내리고 우리만 터미널2로 이동했는데,
기사가 터미널2 A에 내려주는 바람에 F까지 10분 이상 걸었다.
영어에 다소 두려움인지 거북함인지는 몰라도 일반 파리 사람들은 先行된 서비스는
제공 하지 않는다.
에어프랑스는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으로 티켓체크인 짐표부착 등 모든 것을 고객이 하도록
만드는 단계다.
지금은 혼란스럽다.이 회사는 이런 개선으로 인원을 줄이는 효율화를 기하고 노동생산성을 높일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일자리가 줄어드니 생산성증가가 고용축소로 이어진다.
게이트 통과하면서 Your new system make us confuse. It's very difficulty 라고 했다.
종업원도 미안한 듯 씩 웃어준다.
검색대에서 페이퍼 쇼핑백에 넣었다가 잊어먹고 휴대한 스프라이트(사이다)때문에 잠시 지체됐다.
공항의 화장실도 모두 페이퍼 휴지를 사용하지 않고 에어드라이로 교체되어 있다.
파리시내도 그런 곳이 많았었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배설에 대한 청결이나 배려는 뒤져있다.
그래도 화장실에 대한 인심은 우리나라가 최고다.
지구 온난화 방지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외국에 나오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커피를 마셔야 되는 경우가 많다.
구굴에서 잠시 확인해서 인쇄 해둔 운전 루트에서 공항에서 엑상프로방스진입까지는 9번 도로를 시작
51번으로 이동한다.
지도 도상 연구를 잠시 했다.
마르세유에 내려 유로파 렌트카로 갔는데 국제 면허 외에 오리지널 한국면허증을 요구한다.
당연한 일에 내가 또 빅 프로블룸 Big Problem을 만들어버렸다.
영국에서 차를 빌릴 때 처음에만 오리지널 면허를 제시하고 다음에는 국제면허만으로
빌렸던 경험이 머릿속에 국제 면허만으로 당연히 렌트카를 할 수 있다는 내 고정관념의
오류가 잘못 입력된 탓이다.
그리고 렌트카 회사에서 메일로 보내진 중요 알림을 주의 깊게 보지 않고 건성으로
본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닌 나는 가끔 중요한 것들도 건성으로 스치는 경우가 있다. 잠시 맨 붕~~~~ 카악 카악 카~~악. 머리에서 까마귀가 날아간다.
Rentalcars.com 의 연락번호가 나와 있는 영국사무소에 상황을 통보했다.
로컬 시간 9시15분, 한국시간 오후 4시15분이다.
택시로 아파트호텔아다지오 엑상프로방스 Aparthotel Adagio Aix en Provence Center로 이동해서 여행 짐을 모두 보관시키고 점심 후 버스로 아비뇽으로 이동 교황궁전과 아비뇽다리 둘러봤다.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 버리고, 힘 센 왕이 교황 권에 도전한 곳이다.
이 지역에는 앙굴렘의 만화 축제, 망통의 레몬 축제, 니스의 꽃 축제들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곳이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 동요 SUR LE D'AVIGNON(아비뇽 다리도 유명하다.13세기
초에 교황이 프랑스로 와서 70 여년 머물던 도시다.(1309년부터 1377년 까지 7명의 교황이 머문 곳)
엑상프로방스에서 버스로 이동해서 내렸을 때 관광안내소에서 시티 Map을 받고 설명 까지
들었는데 방향을 잘 못 잡아 반대 방향으로 빙 둘러 갔다.
스마트 폰에는 나침판 어플도 있으므로 이 것을 내려 받아서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먼저 동서남북 방향을 정해 놓고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定置해서 갈 방향을 정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것이다.
다음엔 꼭 그렇게 해 봐야겠다.
Oct.24
8시10분 버스로 아를(Arles)로 이동해서 9시50분쯤 아를에 내렸는데 토요일 臨時場이 盛市다.
의복류는 물론이고 풍부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잘 기른 프랑스남부의 농산물들이 壯觀이다.
통닭도 팔고 먹음직스런 파에야 Paella와 각종 치즈들이 넘쳐난다.
이 지역이 스페인으로 통하는 주 通路이어서 스페인의 전통 음식인 파에야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다.
홍합과 새우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꽃처럼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노란 밥 사이로 입맛을 유혹한다.
그런데 아침에 먹은 음식이 소화전이니 어쩌랴?
오후에 파장한 장을 확인 한 후 여행을 마칠 때 까지 그 때 먹지 못한 파에야가 눈에 어른 거렸다.
2012년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고 난 후 길가에서 먹었던 파에야의 본맛을 찾겠다고 마드리드에서
파에야 전문집에 일부러 가서 골라 먹었지만 맛은 별로였던 기억으로 덮어 버렸다.
빈센트 반 고흐가 머물던 정신병원과 카페와 별이 빛나던 밤에 그림 현장을 방문했다.
점심은 그 카페 노랑색 투성이인 아포스토르피 카페에서 오리스테이크로 했다.
2년여 동안 고흐의 多作이 곳에서 그려졌고, 불후의 명화들이 탄생한 현장이다.
1888년 2월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는 해바라기 고장인 이곳에 왔다.
그 때 카미유라는 11살짜리 소년을 만난다.
외로운 고흐에게 친구가 되어준 카미유와 그 가족들에게 그림으로 보상한다.
이 만남이 소년의 아버지 우체부 Joseph Roulin 초상화와 家族 畵 시리지가 탄생 되었다.
이 아를에서 고흐는 14개월 동안 무려 150점의 걸작을 남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 , 인간과 자연의 만남, 만남은 운명을 가르는 빛과 그림자다.
고갱(Paul Gauguin 1848~1903 55세/대표작 1891년 타히티의 여인들)과 60일을 같이 보낸
곳이기도 하다.
고흐 세잔 고갱 20세기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들이다.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아를에 봄에 다시 찾아 와 볼까?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기원전 90년에 건립되고, 12,000명 수용했던 원형 경기장/
4,6,9,10월에 투우 축제)을 둘러보다가 거리의 기타리스트에게
노래를 들은 값으로 2유로 주고 C D 한 장을 샀다. 10유로 냈다.
(귀국한 후 이 C D를 컴퓨터와 차량 속에 넣어 봤는데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방식의 차인가? 사기인가?) 이 거리는 樂士는 5년 전 부산에 다녀 갔다고 했다.
오후4시30분 버스로 엑상프로방스로 되 돌아왔다.
버스를 타는데 영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운전사가 불어로 뭐라고 말을 하는데
우린 못 알아듣고 .....10유로짜리와 동전만 받는다.
영어를 하는 관광객이 소액권 만 받는다고 알려 준다.
유럽의 다양한 나라의 다른 여행자들이 위조고액권을 사용해온 모양이다.
식구들 호주머니 털어서 42유로 지불했다. 불편하다.물2병 계란6개 망고 사서 라면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무리 했다.
잘 익었다고 생각했던 망고는 값이 쌌지만 거의 반은 썩어서 먹질 못했다.
마르세유 역 (Gare Saint- Charles)에서 니스(200Km)까지의 교통편을 확인했다.
버스도 열차도 있는데 교통비가 만만치 않다.
4인 이동에 US 달라 기준 200불이상일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되는 경우에 난 스마트 폰 써칭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Oct.25 일요일
일요일 택시이동은 야간할증이 붙는다고 한다.
다음 여정을 위해 30km정도 이동하는 날이다.
여행5일 째다.
여행을 떠난 지가 오래된 듯하다고 Su가 말했는데 여행 그자체가 새로운 것들과 만남이 많아
심리적으로 익숙한 일상 때보다 훨씬 시간이 늦게 흐른다고 여기진다고 설명했다.
익숙한 삶은 순간적으로 세월이 흐른다.
오랜 시간 준비해도 꼼꼼하게 챙겼다고 생각했던 일.영국 체류 시 랜트카를 잘 했던 기억이 있는데
한국오리지널면허는 당연히 국제면허가 있으니 불필요하다고 지례 판단 해 버리고 서류의 양이
많은 렌트카 약정에 중요한 알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건
스스로 약이 오르는 일이다.
1주전 운전 시에도 시동 시 액셀레이테에 발을 올리고 반복적으로 시동을 걸면서
나는 당연히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걸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리고 에러를 반복했던 일도
늙음으로 연결할 일만은 아니다.
머리와 동작이 같이 退化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동행 식구들은 차를 빌리지 못한 것이 차라리 안전 여행으로 잘 된 일 이라고
서로 위로를 했다.
내 여행 짐에도 늘 불필요한 것들이 많다.
한번쯤은 긴요하게 쓰임이있겠지만...
항상 20~23Kg 무게가 되어 무게를 초과 할 때를 위해 비상 배낭을 늘 휴대한다.
좀 더 숙고하는 삶.조금 더 신중한 자세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내 인생에 박수를/ 깃털처럼 가볍게/날마다 소풍처럼 살려면 말이다.
이번에 많은 서양의 예술과 역사와 자연을 만나게 된다.
더 좀 숙성해지는 내가 되어 가자.
어제는 빈세트 반 고흐(1853~1890 47년)의 1년간의 프로방스의 작품들과 흔적을 봤고,
오늘은 세잔(Paul Cezanne 1839~1906 67년)의 본 고향에서 흔적을 찾는 날이다.
그들의 지난 삶속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보자.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샤갈(Marc Chagall 1887~1985 98년/마지막 20년은
니스 북방의 생 폴 드 방스 Saint Paul Vence 에서 살았다)은?
20세기의 의 위대한 화가들이다.
그런데 고흐는 귀도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도하고 스스로 권총으로 삶을 짧게 마감하면서
위대한 예술품들을 남겼다.
탁월함을 만드는 일은 미쳐버린다는 말과 서로 통함이 있다.
새로운 예술이나 문명의 탄생은 큰 이질적인 만남에서의 굉음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남부지방 끝부분인 바닷가 예르에 예약한 숙소는 차량 렌트를 전제로 정한 곳이어서 취소했다.
26일 밤은 마르세유에 추가 예약이 필요하다.
새벽2시인데 잠은 멀리 가버렸다.
그래도 고달프고 예기치 않았던 문제로 상황이 빗 나갔지만 내 삶은 잘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칸Cannes에 Hotel Le Canberra -Hotel Ocre et Azure를 1박 예약했다.
예르에 예약했던 호텔은 취소했다.
엑상프로방스의 세잔의 뮤즈엄의 정원이 참 아름답다.
잘 정돈된 정원에 여러 갈레로 뻗어난 낮선 가을 단풍나무의 작은 잎들이 파란 잔디위에
소복이 쌓인 모습 아름다움의 최고봉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위적일 때도 자연 그대로 일 때도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세잔의 예술의 일대기가 영어로 된 영화로 보여준다.
아름다운 엑상프로방스의 풍광,삶의 마지막까지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다 죽어가는 모습,
세상에 족적을 남긴 이들의 삶의 모습은 항상 베스트를 다한다.
세잔의 아틀리에는 택시로 이동 했는데 보존상태가 허접하다.
손을 대지 않는 허접함 자체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자위를 해보지만 쌈박하지 못하다.
대충 훑어보고 난후 훤히 보이는 도심을 향해서 오래된 성당을 거쳐 시내 쪽 마켓지역으로
내려오는데 광장에 일요시장이 성업 중이다.
이들은 상설 시장이 아니고 임시 장을 펼친 후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깔끔하게 물청소 하고 종료 한다.
이용자에게도 상인들에게도 효율적이다.
레스토랑도 시간을 정해서 운용 하는 것도 마찬 가지다.
하루 종일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우리에 풍경 보다 낫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점심으로 나는 오믈렛 식구들은 샐러드 홍합요리 스파게티로 했다.
식사 때면 난 스프를 찾고 집 사람은 늘 샐러드를 찾는 편이다.
우리는 늘 국물을 찾지만 이들은 스프를 별로 찾지 않는다.
총금액은 60유로 정도인데 음식 재료나 요리들이 훌륭하다.
스파게티에 잘게 썰어 넣은 햄과 큰 홍합요리가 아주 풍성하다.
빵도 소스도 굿이다.
서비스 맨도 정성을 다한다.
마누라가 비타민이라 들렸는데 베트남사람이라는 얘기다.
같은 동양계인 우리에게 정이 가나 보다.
제 아이의 사진도 보여 준다.
아파트호텔아다지오의 Front Desk는 문제해결도 잘하고 친절하다.
도착한 첫날 4명용 방으로 문제가 생겨 컴플레인을 했는데 소파베드를 펼쳐주면서
깔끔하게 처리해 줬다.
소파 베드가 어른에게도 의외로 편안 하다.
밤에 모기가 웽웽 거려 힘들었고 Su는 아까운 피를 빼앗겼다.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할 때 호텔을 선정 할 때 총점 5점 만점에 4점 이상인 곳을 선정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억지로 만들어 지는 점수가 아니고 이용한 고객들의 평점에 의한 것이니 믿을 만 하다.
비슷한 걸로 뉴욕의 음식 평가인 자겟 서베이 Zagat Survey/ New York city Restaurant
도 같다.
이용한 손님들이 서비스 값 맛 분위기를 가각 평가해서 점수를 집계해서 음식점을
평가하는 제도다.
이번 여행의 호텔 선정 기준에서도 거리와 평가점수들을 꼼꼼하게 챙겨서 호텔을 선정했다.
오후에 맡긴 짐을 찾고 호텔에 부탁해서 택시를 불러 마르세유로 이동했다.
홀리데이 엑스프레스가 바로 마르세유 본 역(Gare Saint-Charles) 앞이어서 좋다.
식당에서도 택시도 친절한 이들에겐 팁을 반드시 준다.
우리처럼 잘 해 달라고 미리 주는 팁이 아니고, 정성을 다한 이들에게 事後에 주는
팁이어서 주면서도 기분이 좋을 때가 많다.
사전에 팁을 건네는 우리네 관습에 동의하지 않는다.
길거리 악사들에게도 내가 스스로 귀기우려 듣는 경우는 팁을 놨다.
아를 원형 경기장 앞에서의 감미로운 기타 연주, 엑상프로방스의 고대 성당 앞의 아코디언
연주자들이 그들이다.
프랑스 지하철 코너에서 오케스트라로 연주 하던 이들과 열차 내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들은 그냥 지나쳤다.그들의 음악에는 귀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2시 조금 지나 체크인하고 구 항구 바닷가로 가서 초콜릿 땅콩,수제 머시멜로, 라벤더 마른 꽃을사고
돌아오는 길에 물, 맛도 생김새도 우리 것 만 훨씬 못한 서양 배, 바나나 샀고,
저녁은 누룽지로 했다.
김을 조금 준비해 왔으면 좋았을 것 이라는 생각과 캔 깻잎이나 햇 반도 두어 개는 비상용으로
좋을 듯하다.
왜 지금이 소중한가? 지나간 그때,
돌아 올 어느 때 보단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최고다.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
시간이 늦게 간다는 느낌에 대한 답. 빨리 가거나 늦게 가거나 뭐가 다른데?
인도를 여행한 이유. 남미를 여행하고 산티아고 800킬로를 걷고 유럽의 구석구석을 많이 찾아
여행을 한 이유들은 뭔가?
국내의 좋은 길들을 걷고 걸은 이유들은 뭔가?
지난 6년의 여정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Oct.26 월요일
칸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마르세유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10시쯤 체크아웃? 12시?
아침 식사 후 바로 나갔다가 11시에 들어와 체크아웃하고 점심. 시내. 4시 호텔에서 출발하자.
이렇게 아침에 늘 하루 행선 계획을 미리 정해 둔다.
가이드의 역할이자 책임 이므로.
구 항구에서 사진을 부탁 받은 단체 여행객들인 이태리인들이 이태리는 토레노(튜린 Torino/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파괴.1720년 샤르데냐 왕국의 수도.1864년까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12~14세기의 마다마 궁전.17세기의 왕궁과 고성. 예수의 신체를 감쌌다는
성해포가 보존된 산 조반니 대성당)가 아름답다네.
카메라 모발 폰 꼬레아. 삼숑. 우릴 보고 아는 척해 주는 발음들이다.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마르세유의 노트르담 사원 들렸고 현대건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뮤즈움 들려
지중해 전시품들을 봤다.
중간에 케이크와 커피로 간식을 했다.
이렇게 식구들끼리 좋은 항구의 카페에서 여유로움을 누리는 것,
이 이상의
행복이 있을까?
소문이 많이 난 꼭 먹어봐야 한다는 부아베스는 게살 스프는 비리다.점심 식대는 188유로다.
집 사람은 거의 남겼고, 나는 다 먹었다.
메인 요리는 여러 생선들을 짬뽕한 깊은 맛이 있다.
걸어서 호텔에 와서 쉬다가 5시 정각 마르세유 역에서 어제 rail euro에서 $203에 예약한
inter cities 열차편으로 칸으로이동, 급히 예약했던 Le Camberra 호텔로 걸어서 이동했다.
작은 호텔 표시를 큰길가에 놓고 한참 헤매다가 찾았다.
큰 길에서 찾지 못하고 뒷길에서 찾았다.
작은 간판이 불편 하지만 도시미관에는 조화롭다.
좋은 호텔이고 비수기라서 싸게 잡은 편이다.
프론트의 사내는 약간 설치는 느글거리는 품성의 사내다.
호텔 방 벽면의 그림도 조금은 로맨틱, 야함이 포개져 있다.
지도를 여러 번 인터넷 구굴에서확인하고 스크린 샷(스크린 샷은 이번에 처음으로 손녀 Kelly에게
배웠음) 해뒀지만 식구들 모두 걸어 이동하기는 쉽지 않다.
Kelly가 자신 있게 잘 인도한다.
리더십이 보인다. 제 말마따나 카리스마가 內在 되어 있다.
리더는 틀릴 지라도 자신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참 똑똑한 손녀다.
6개월여 영재교육에 선발되어 활동하고 발표작을 제출했는데 용인 시 최우수 팀으로 결정 됐다니
잘한 일이다.
10유로 즉각 시상을 했다.11월초 발표가 있다는데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가기는 어렵다.
라면을 많이 좋아한다.오늘은 가져온 컵라면에 누룽지를 말아서 먹는다.
새로운 요리를 개발 했다고 했다.
이 맛도 그럴싸하다. 말하자면 누룽지 밥 라면인 셈이다.
Oct.27 화요일
칸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오후에 Nice로 넘어가자.
여행은 고단하고 고달플 때가 있다.
사람마다의 스스로의 못된 성격들이 밖으로 표출 될 수도 있다.
가족끼리도 귀찮을 때도 있다.
마냥 급해지는 경우도 있고 목소리가 커지는 때도 있다.
그래도 언제나 여행은 행복한 여운을 남긴다.
15 Rue Antibes에 있는 깐 베라 칸 호텔은 메인침대 소파침대 침구 베개가 모두 좋다.
작은 수영장에 하얀 비치의자도 어울리고 인당22?를 받는 조식은 비싼 편이지만 내용이
깔끔하고 충실하고, 초등생은 무료로 해준다.
하루 더 묶는다면 작은 풀장에서 호사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몸매가 좋은 젊은이들은 자기의 몸꼴을 과시 할 수 있는 좋은 시설이다.
칸의 영화축제 장소인 페스티벌에 들렸다.
허리우드의 바닥처럼 많은 배우들의 손바닥이 찍혀 있다.
커다란 크루즈 배가 정박해 있고 수많은 요트들이 장관이다.
언덕에 올라 칸을 전체로 조망해보고 작은 성당에 들렸다.
조금 떨어진 곳의 뮤즈 엄에 우리나라 태극기가 펄럭인다.
수교60년 기념 전시회인 듯하다.일본과도 50년 수교가 금년이니 한국이 국제적으로 나라의
모양을 갖춘 것은 반세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세대는 60년 동안 아마 500년의 서양발전 문물을 접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선 행운이다. 하늘의 축복 아닌가?
우리 할아버지 세대 우리 아버지 세대에 이렇게 가족들을 거느리고
먼 곳을 활개 칠 수 있었겠는가?
거리의 청결, 상가들의 진열과간판, 가끔 지나가는 멋쟁이들이 조화롭다. 가로수로 쓰인 귤나무엔
감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아직도 파란색이다.
체크아웃하고 택시를 불러니스에 예약한 Le Panoromic 호텔로 이동 하는데 경찰이 길을 막고
검문하는 탓에 택시비가 100유로 넘어 나왔다.
운전사가 미안 했던지 그런 사실을 알려 준다.
경찰이 뭔가를 찾는다고 영어로 말했다.
이 호텔은 차를 렌트하는 전제로 빌려 조망은 좋지만 시내와의 접근성의 떨어진
Gold 말대로 난해한곳이다.
3층쯤 되는 아래로 짐을 계단으로 나르는 데 힘겹다.
그래도 식구들이 낄낄대고 웃어 주니 좋다.
비도 내려서 지하 같은 느낌으로 꿀꿀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썩 괜찮다.
홀인 식당에 양면에 거울을 붙여 놔서 그야말로 니스 전체가 보이는 것처럼
파나라마틱 Panoramatic(새로운 단어 일듯하네) 하다.
마을버스를 연구를 거듭하고 탔는데 반대편 기차역으로 가버렸다.
산에서 반대편으로 구불거리고 내려가는 길이 현기증이 난다.
덕분에 모나코로 가는 길은 한 정거장 단축됐다.
열차를 기다리는 한가한 플렛폼에 햇볕이 따갑다.
기다리는 승객들 모두 한가롭다. 행복이 넘친다.
모나코에도 커다란 크루즈 배가 2개 정박해 있고, 버스1,2번이 카지노와 궁전을 오가고 있어서
카지노는 걸어갔다가 궁전은 버스로 이동했다.
궁전 박물관은 나는 옛날에 본 것이어서 들어가지 않았다.
단체 관광을 온 미국인 들이 하는 말은 귀에 번쩍하고 들린다.
그래도 외국어 중에는 영어가 익숙한 탓일 것이다.
니스로 돌아올 땐 버스100번으로 30분정도 이동한 후 Verban지역에 내려서 저녁 하고
호텔로 택시 타고 왔다.
식대는 인당25,000원정도, 택시는 할증 붙은 탓인지?
내를 때 나타난 가격이 28유로나 나왔다.
4킬로 이내 거리인데 이놈들이 조금 속이는 느낌이 들었다.
산동네 라 자기들끼리 정해 놓은 요금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도 시계를 벗어나면 요금이 비싸지지 않는가?
비가 내렸다. 그렇게 이해 해 버리니 마음이 편하다.
(남 프랑스 이 곳엔 Marc Chagall, Vincent van Gogh , Paul Cezanne 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향기로운 라벤다 향이 가득한 곳이다)
Oct.28
비교적 잘 잤다. 식구들 모두 잘 잔다.
내일 기차일정을 좀 조정해야겠다.
Nice Requior에서 9:55분 열차를 10시33분으로 조정하고
이태리 구간은 그대로 진행한다.
열차 정거장에 가서 바꾸자.
니스에서 Ventimiglia 까지 약40분, 그곳에서 3시간정도 대기,
2시간 이동해서 제노아,40분정도 대기후, 피사로 2시간 반 이동, 8시 넘어 피사도착 이다.
기차 이동도 대기와 환승이 많아지니 머리가 쓰인다.
비행기로 획 갈걸 그랬나
?버스로 이동 후 트렘열차로 시내로 가자.
다음 호텔인 피사 4B&B전화 컨 펌 하고 출발 시 택시는 오후에 확인하자.
이 숙소는 하루 전에 반드시 전화로 연락 해 달라는 Notice가 있는 곳이다.
동반 견 오물통은 프랑스는 청색, 영국은 적색이다.
우리도 턱없이 에티켓에서 벗어난 아무대서나 받는 모발 폰에 대해 이들의 경우에는
열차 내의 객차는 찡그린 모양이고 객차사이 공간은 웃는모발 폰 모습이 계몽 홍보물로 붙어 있다.
시민들이 잘 지키는 것 같다.
프랑스 남부의 니스에서 모나코 까지 열차로 이동하면서 목격한 광경이다.
마르세유에서 칸 까지 긴 거리를 이동하는데도 객차 안에서 전화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모발 폰에 대한 예절은 단연 일본이 최고다.
그들은 911 미국 테러가 터지던 날 나는 신간선을 타고 오사카에서 동경으로 으로
이동했는데 모든 이들이 진동으로 폰을 관리 하고 있었고, 필요시에는 객차 사이에서
통화 하는 것을 목격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늘 객차 내 전광판에 음악소리를 포함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계몽하고 있지만 부족함이 있다.
우린 어떤가? 부분적으로 계몽물이 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이를 잘 인식 하지 못하고
있고, 몇몇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화를 큰 소리로 주고받는다.
우린 아직 타인을 배려하는 문화국민이 못된다.
파노라마 호텔의 아침식사는콘티넨털과 아메리카 블랙퍼스트 2종류다.
코로아상 빵을 주느냐,
베이컨과 계란이 있느냐의 차이다.
정갈하고 따뜻하고 맛있다.
식사 후 걸어서 Nice Riquier 까지 30분정도 이동해서 발권창구 여직원에게 예약서류를
넘겼는데 컴퓨터에서 예약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지불여부가 확실하니 별도로 티켓을 만들어 준다.
시간에 구애 없이 내일 어느 시간대나 이용할 수 있단다.
레일유로나 이태리의 열차표를 살 때 좌석이 주어지지 않는 열차는 시간에 구애 없이
표를 사고 사용하면 되는 것 같다.
트렘 타고 샤갈 뮤즈 움을 찾아 갔지만전시관은 개수중이고 기념품점만 오픈돼있다.
기념엽서 몇 장 산 뒤, 오랜 된 올리브 나무들이 운치 있는 정원에서 커피를 마셨다.
st. paul Vence (상 폴 방스)에 다녀왔다.아름다운 마을이다.
샤갈이 뭍인 곳이기도 하다.
아흔 넘게 살았던 샤갈은 이 곳에서 20년 넘게 마지막 여생을 살았다.
마을 에서도 풍광이 가장 좋은 지역에 동네 묘지가 있고 묘지 입구에 샤갈 묘소도 있다.
이 곳을 찾아오는 미술과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세계인들이 그 묘지의 돌판 위에 사랑 마크도
남기고 꽃도 놓고 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적어도 화가 샤갈은 우아하게 죽어 아름답게 잠들고 있다. 묘지 아래로 보이는 계곡이 그림같다.
비가 많이 내린다.
카페에서 핫초코와 커피 마시고 4시17분 버스로 니스로 와 트렘타고 이동한 후,
오페라에서 중국식으로 저녁하고 7시버스로 호텔에 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게서 노인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Su가 향수를 조금 쓰라고 한다.
아침에도 향수 쓰고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저녁 열심히 샤워를 하고 있는데...잠시 후 내게서 나는 게 아니라
앞에 앉은 거지에 가까운 현지인한테서 나는 냄새란다.그 사람이 네 아버지인 모양이라고
놀리고 웃었다. 많이 크게.
옆자리에 마주앉아 있는 커플은 사이가 좋아 보인다.
Oct.29
피사로 이동하는 날이다.
무대뽀 mudaepo. 나한테 어울리는 호칭이란다.
저돌적이라는 이야기다.
아침 일어나면서 내가 하는 나만의 운동도 그 명칭은 오두방정체조, 지랄발광체조다.
발끝을 100번씩 300회를 치고 나서
얼굴을 두드리며 동시에 발끝 치기를 100회
머리를 두드리며 동시에 발끝 치기 100회,
복부를 두드리며 발끝 치기를 100회. 머리엔 오장 육부를 깨우는 마음으로 친다.
손을 마찰시켜 부비고 더워진 순 바닥으로 눈을 씻어 준다.
귀를 상하 좌우로 당기며 부비면서 동시에 발끝을 100회친다.
귀 구멍을 막고 나는 숨을 거뒀다. 라고 말한 뒤 다시 귀를 열고 다시 살았다고 외운다.
회음부로부터 고환 아래로 훑어 내는 마사지를 하면서 200회를 센다.
전립선 비대증이 완화 된다는 믿음으로 한다.
발을 직각이 되게 들어 좌로 우로 그리고 아래로 내리는 반복 운동을 8회한다.
누워서 자전거 타기를 발 돌리기를 100회 한다.
엎드려서 발목을 잡고 스트레칭 한 뒤에 발을 넓게 벌려 스트레칭 한다.
엄지발가락을 20회 정도 세면서 강하게 눌러 준다.
엎드린 자세로 가슴 들어 올리는 운동을 8회 한 뒤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유연성이 떨어지고 뼈가 궂는 모습으로 늙어 가지는 말아야지.
10시40분 택시 불러서 Nice Requier에서 11시33분 열차로 이태리 Ventimiglia에
12시19분 도착, 역 앞 레스토랑에서 피자, 스테이크, 스파게티로 식사했다.
역 앞은 언제나 지저분하다는 선입견이 싹 없어지는 곳이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직접 화덕에 피자를 굽는 식당 주인의 모습에선 장인의 모습이 넘치고도 남는다.
3시02분 Genova piazz principle에 17시경 도착예정.5시 47분 Pisa행 열차가
45분이나 지연출발이다.
플렛홈 오르내리는 계단을 집 사람 짐까지 들고 움직이니 양쪽으로 20Kg 씩 근육 운동 제대로 한다.
지하도를 빠져 나가지 않고 전광판에 피사 행 열차 플렛홈을 확인 후에 움직였다.
숙소인 4Rooms B&B에 전화했는데 자기는 퇴근하는데 역에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자신의
모발 폰 번호를 알려준다. 0039 347 5599 801이다.
확실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얼른 Su를 바꿔 줬다.
영어에 익숙한 Su 덕분에 일이 쉽다.열차 속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열차 속 음식은 영 아니다.물도 3병사서 배낭에 챙겼다.
용산 에서 장항 군산 익산으로 가는 우리나라 열차는 구돌 형 방에 찜질방도 있다는
황금열차라 하는데, 이 것 한번 타 봐야겠다.
아마도 김제의 만경들판 지평선 축제에 맞춰서 운행하는 열차인 듯하다.
우리의 철도 운영 시스템과 정시 출발, 객차 스톱 위치 등은 탁월 하다.
우리의 우체국과 철도청은 적어도 엄청난 변화와 진화를 해 왔다.
선진국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단, 비싸게 우편요금을 내고 연말이나 다른 특별한 날에 외국으로 부치는 EMS 소포의
우체국 박스는 조금 개선되어야 할 것 같다.
같은 박스라도 영국 우체국의 붉은 박스는 선물 보내기에 잘 어울린다.
9시 넘어 피사 역에 도착4Rooms B&B주인에게 도착을 알리고 택시로 이동했다.
운전기사가 참 친절하다.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를 강이 피사도 관통한다.
운전기사는 우리가 통과 하고 있는 아를 강이 플로렌스(피렌체)로 부터 80킬로 흘러온다고
전한다.
기분 좋은 팁을 줬다. 감사해 한다.
이런 교류가 서비스업의 相生 아닌가?
작은 BNB 라는 소리에 식구들이 걱정했는데 깔끔한 BNB이고 우리를 일일이 환영해주는
주인의 악수도 정겹다.
멀리서 온 여행객들에게 일일이 악수하고 환영 한다는 말을 전한다.밝은 달밤에 보는 피사의 사탑이
아름답다.
숙소 주인은 열쇠를 챙겨 주고 집안을 안내하고 내일 식사 시간과 장소도 안내하고
내일 낮엔 관광객들이 많으니 저녁에 사람들이 적을 때 차분히 사탑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고 알려 준다.
1173년 착공되어 1372년 까지 3차례에 걸쳐 약 200년 동안 공사가 진행 된
결과물이 피사의 사탑이다. 1173년~1178 1차 공사에서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기울어짐이
발견 되어 2차 공사에서 수정 했으나 5.5도까지 기울어 져 있다.
이탈리아의 1990년부터 10년에 걸친 보수 작업으로 기울어짐은 멈춘 상태다.이제부터의 여정은
역사(History)다.
Oct.30
여주인의 친절과 서비스가 돋보인다.
떠 나 올 때도 교통편을 상세히 알려 주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이 좋다.
우리식구들만 따로 테라스에 아침상을 차려줬다.
이름 모르는 자주색 작은 꽃이 아름답다.
피사의 사탑에 다시 나가서 사탑과 성당을 세트로 인당18유로가 입장료다.
Kelly와 둘이 기울어진 탑의 제일 위까지 올랐다.
대리석 사탑은 어디에도 금이 가지 않고 그대로 기울고 있다.
기울은 전체를 구불거리는 294개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오르니 현기증이 난다.
마무리하고 택시로 피사중앙역으로 이동해서 11시38분 열차를 탔다.
열차는 또 지연이다.trenitalia는 아무래도 국영이고 전국에 잘 깔린 열차노선인데
이렇게 빈번히 연발 운영하는 것은 변화하지 못하는 탓일 것 같다.
정확히 움직이는 것 보단 오히려 사람의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것은 여행의 여유로움 같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800 미터 떨어져 있는 호텔 Il Perseo를 찾는데 헤맸다.
결국 데이터 통신을 개방해서 구굴 지도로 찾았다.
사전 스크린 캡춰 해 뒀던 지도사진도 헛일이 됐다.
이 호텔이 좋은 점은 두우모 성당 바로 옆 이라는 점이다.
체크인 해서 짐을 옮기고 바로 옆 도오모(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마리아' 라는 뜻의
산타마리아델피오레대성당 Cath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
1296년 9월9일 첫 공사 후 170년 동안 계속) 성당을 거쳐
시뇨리아 광장 우피치 미술관 베키오 다리/14 세기에 지어진 피렌체 상징 아이콘/16세기 까지
식품을 파는 노전과 푸줏간/1565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베키오 궁전과 피티 궁전을 연결한
통로를 다리 위쪽으로 냄/1593년 푸줏간 정리한 후 금은 세공 상인들의 장사 지역이 됨)로 돌아왔다.
옷도 사고 행커치프도 몇 개 샀다. Gold가 내게 멋진 모직 머플러도 사줬다.
구경만 하던 이여행이 언제 부턴가 내 물건도 사는 재미가 쏠쏠한 여행이 됐다.
김민석 사장부음이 들린다.
귀국 후 챙겨보고 손이사도 찾아 봐야겠다.
부인인 손 이사한테 카카오톡으로 위로의 말만 전했다.
마침 어제 찍은 사진에 천국의 문 사진이 있어 김 사장 가는 길 밝혀주라고 위로 말에 첨부했다.
돈이 좋은 사람 한명을 잡아버렸다.
분수에 넘치는 無理數는 항상 禍를 自招한다.
돈 말고도 예술가적인 사람이 사업에 뛰어 들어 지인들이 멀어져 감을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부부들만 아는 일이다.
내가 좋아한 知人이 또 한명 멀리 떠났다. 특히 춘택 형이나 김민석은 뒷정리가 가족들한테
큰 짐을 남긴 떠남이다.춘택형 장남인 건 에게도 문자 보냈다.
얼마나 마음이 정해지지 않으면 형수가 삼오 제 당일에 내게 자문을 구했겠는가?
인생은 무엇인가?삶은 뭔가?
오르는 계단과 내림의 계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창조적이게 살고 우아하게 죽을 것인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오직 내가 홀로 스스로 타고 가는 자전거.돌림을 멈추면 넘어진다.
멈 출 때 멈추지 못하면 뒤집어 진다.
6년 이상 탄 내 자전거가 브레이크가 내리막에서 제대로 작동 되지 않는다.
브레이크를 손을 보던지 아니면 새로 사야 할 것 같다.
삶도 손을 보고 수정은 가능 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전거처럼 통째로 새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오직 스스로 앞으로 향한다.
돌아갈 일상은?
무엇으로 살 것인가?
Oct.31
아이들은 우피치 미술관 가이드관광으로 일찍 나가고 우린 9시 조금 넘어 미켈란젤로 다비드 상
眞品이 있는 아카데미아를 관람하고 산 로렌초성당과 박물관 산 크렌체 성당과 메디치
예배당을 둘러봤다.
500년 전 최고의 부와 명예를 이룬 메디치가의 죽음의 종착을 향한 자리는 대리석 차가운
단단한 돌이 화려한 문장과 꽃으로 불멸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들의 가족 예배당에 뭍여 있는 도나텔로의 스토리도 감동이 넘친다.
점심은 엘 Marzzo에서 소 내장 음식으로 했다.
간은 우리네와 다르지만 정성껏 손질이 잘 된 음식이다.
12시 10분 전이라고 문을 열지 않는다.
미리 찾아온 우리가 실례를 한 셈이다.
길을 찾는 데는 데이터 로밍으로 찾아 가는 게 효율적이다.
該當國에서 파는 칩을 사용해 봐야겠다.
주말이자 할리위인 데이라서 사람들로 거리가 넘치고 귀신분장한 사람들이 많다.
분장 객 들 중에 중국인들도 섞여 있다.
어느새 중국은 세계의 생산 기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을 먹여 살리는 세계의 소비국
수준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가 有史 以來 중국을 앞선 것은 딱 10년 1980~1990년동안 10년 정도 일 것 같다.
저녁은 Buca Mario에서 티 본 스테이크로 했다.
예약 관광을 나갔던 Su가 전화번호와 예약방법을 알아 왔는데, 예약하는 데도 별도
요금을 지불하는 시스템이다.
잘 이해되진 않지만 아마 식당은 항상 예약에 대응 할 필요가 없이
제 3자를 통해서 예약을 전담 하게끔 한 서비스 방식인 듯하다.
식사대 200유로 정도를 집사람이 부담했다.
이 식당은 1880년부터 시작했는데 음료와 메인음식 주문과 서브를 구분하고
예약비도 별도로 받고 나올 때는 포장된 과자와 앞치마도 선물을 한다.
고기를 숙성시키는 냉장시설과 장식된 야채들, 주인의 가족사진,카트에 준비된 디저트의
먹음직스러움은 적어도 피렌체에서는 최고로 세련된 식당이다.
건너 편 좌석에는 한국인 여성 혼자 앉아서 와인에 티본 스테이크를 여유롭게 즐긴다.
잡지 기자 냄새가 난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태어난 명품브랜드인 페라가모 매장앞에 거리의 악사가 섹스 폰을 연주한다. 익숙한 곡인데 ..대부의 주제곡 같은데...
2015년 10월의 마지막 밤을 꽃의 도시인 르네상스의 피렌체,
이야기속의 아를 강 위의 베키오 다리의 시내 쪽을 걷는 가족들은 3만보나 걸은 고단함은 있지만
벅찬 행복의 정점에 있다. The peak of the happiness.
Nov.1 Sunday
종탑의 꼭대기에 올라 황금빛 피렌체의 전경을 한 눈에 내려 다 봤다.
지붕이 햇빛에 반사 되어 그야말로 황금빛으로 보여 진다.
다리가 부실해서 못 오른 집 사람을 혼자 두고 올라 와서 마음이 급해 졌다.
도오모 대성당은 오늘이 일요일 이어서 일요 미사를 마친 오후부터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새로 단장해서 오픈한 박물관에 들려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원본도 보고
천국의 문 오리지널도 감상했다.
박물관은 아주 잘 단장 되고 꾸며져 있다.그동안 닫혀 있다가 그저께 문을 열었다니 운이 좋다.
세례당의 실내도 세 번째 방문한 이번에 비로소 처음 들어 가 봤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아름다운 장소다.
만일 옛 사람들이, 아니 현재의 사람들도 이 곳에서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과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것 같다.
도오모의 대성당의 꼭대기 사랑과 열정사이의 촬영 장소였다.
종루의 꼭대기에도 올랐다.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느리게 움직인다.
먼저 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난 후에 올라가게 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꼭대기에 오르면서 도오모 성당의 내부와 천정화를 봤다.
천정화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그림은 진짜 사람이 내려오는 듯 입체감을 준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서 피티 궁전을 찾아 갔는데 막 클로스 하는 시간이다.
아플 사 내일은 월요일이고 내일은 휴장을 한단다.
이 피티 궁전에서 베키오 다리를 건너는 비밀 통로가 우피치 베키오 궁전 까지 연결이 되어있다고
했는데. . .
남겨 놓은 이야기 거리를 뒤로 하는 것은 아쉬움이 있지만 언젠가 다시 찾아 올 기회도 된다.
Nov.2 Monday
열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아침에 단테 생가 자리 쪽으로 이동해서 박물관 한 개를 찍어
보려 했는데 이 역시 월요일 Off다.
11시 체크 아웃해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쪽에 있는 한 식당을 찾았다.
배우 이영애를 만났던 한 식당 궁보단 훨씬 맛이 좋은 집이다.
소고기 국밥은 일품이다. 외국의 음식이 질리고 아련한 고국의 음식,
그것도 푸짐한 쇠고기 국밥은 여행의 고단함을 잊게 해줄 음식으로 최고다.
바로 주변에 큰 시장이 있다.
지폐 묶는 피렌체 문장이 들어 있는 가죽 좌석을 샀다.
(피렌체는 이번 까지 3회를 방문했다. 언제나 좋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이 이 속에 있다.
미켈란젤로 그의 좌우명은 나는 내 미래와 경쟁 한다. 위대한 하느님을 닮으려 했던
그는 천국의 문이라고 기베리티의 청동 문을 격찬 했다.
1501년 이 청동 문은 공모에 의해 두 사람이 지원 했다.
기베리티와 브루넬레스키다. 승자는 기베리티 였고, 그는 21년간 문을 만들었다.
다른 한 쪽을 추가 만드는 데는 27년이 걸렸다.
문 하나를 만드는데 48년간의 시간과 혼이 주어 진 곳이 이곳이다.
경합에서 실패 했던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유학을 갔고, 판테온을 공부한 그는 400만 개의 벽돌로
불후의 명작인 도오모 성당의 돔을 완성 했다.
메디치가의 기둥인 코시모 대 매디치는 1469년 종교회의를 개최 해서
동방 비잔틴 교회 그리스교회 서방 카톨릭 성당의 지도자들을 사비로 700명을 초청해서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는 프라톤 전집을 참석자들 모두에게 선물 했다,
동질적인 사고와 행동에서는 새로운 것은 창조 되지 않는다.
새로운 충돌이 있을 때 새로운 문화는 탄생 한다.
그들은 파라곤 즉 완벽을 추구 했다.
이번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의 진품을 아카데미아 에서 봤고, 청동문의 진품을
도오모 성당의 박물관에서 봤다./ 그 시대는 예술가들이 태어나는 토양이 있었다.
Reonardo da Vinci, Donatello, Boticelli, Raffaello, Galileo Galilei Machiaveli,
Cosimo de Medici, Rolenzo de Medici, Dante)
피렌체 아래쪽 50Km에 있는 시에나로 열차로 이동했다.
호텔은 아기자기 하다.
바로 창 앞으로 대 성당이 펼쳐진다.
이 호텔 프론트에 있는 젤리는 맛이 굿이다.
호텔에 물어 소개 받은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잘 하는 집이다.
여행지에 나오면 난 언제나 레드와인, 그것도 하우스 와인을 한잔씩 한다.
그리고 스프롤 잘 찾는 편이다.
Nov.3, Tuesday
캄포광장도 거듭 둘러보고 성당도 둘러 봤다.
이 캄포광장이 유럽에서 가장 드넓고 아름답다고 한다.
유럽의 광장들은 매력적이다. 로마의 광장들, 폴란드의 광장들,
폴란드 크라코프이 비온 던 날의 추억들, 암스테르담, 부다페스트, 프라하, 비인,
두부르부니크, 여행했던 광장들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먹을 것도 볼 것들도 많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종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줄을 달리 해서 깔아 놓은 벽돌 모양이 조개처럼 보인다.
Kelly와 나만 종루 꼭대기 까지 올랐다.
비둘기가 후다닥 날라 올라 깜짝 놀라기도 했다.
초입은 휴대한 등산용 헤드 전지를 켜고 움직였다. 한가한 편이다.
광장 입구 숍에서 구스다운 자켓을 Gold가 쇼핑했다.
한가로이 돌다가 아이스크림 집에도 들리고, 어제 호텔에서 소개해준 식당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춰 식사를 했다.
맛도 맛이지만 주문한 고기를 요리하기 전에 직접 손님에게 보여주고
하몽 샐러드를 주문한 손님에겐 주인이 직접 고기와 칼을 들고 나와서 정성을 다해서
썰어 낸다.
주인장도 채소와 하몽을 곁들이고 와인도 한잔 들고 손님 객석에 앉아서 간단한
점심을 한다. 자연스럽고 보기에도 좋다.
촛대 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서 모양을 달리한 촛대들도 아름답다.
(날아가 버린 기록들을 다시 회상해서 기록하는 이 순간 역시 해 보니 귀찮은 일이 아니고
행복 하네/11월 1일 이후부터 스마트 폰 기록이 살아져서 그냥 덮어 뒀다가
11월23일부터 다시 回想 기록을 시작했다.
사라진 이유는 메모리가 작기 때문에 메모리 확장 작업을 하다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오후에 들려 본 대 성당은 바닥에 색이 서로 다른 돌들을 이용한 그림들이 정교 하고 아름답다.
내가 본 그 많고 많은 유럽 성당 중에서 바닥 그림으로는 이곳에 최고일 것이 틀림이 없다.
은박 돗자리와 마르세유 魚市場에서 오징어를 사서 물에 데쳐 찍어 먹으려고 한국에서
가져갔고, 유럽을 들고 다녔던 초장도 버리기로 작정 했다.
은박 돗자리는 어린이를 포함한 4명을 숙박인원으로 방을 선정 했지만 혹시라도 잠자리가
시원찮을 때는 응급으로 바닥에 깔고 사용하기로 작정한 물품인데,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특히 마르세유의 홀리데이 엑스프레스를 염려 했었는데, 별 문제가 없이 지냈다.
여행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에서 은박지 돗자리와 초장은 불필요한 물건으로 판정 했다.
문방구에서 산 내가 애용하는 가벼운 실내화도 뒤꿈치를 칼로 도려냈다.
무게도 부피도 줄이는 전략이다.
멋진 구두 2개를 추가로 샀기 때문에 버릴 줄 모르는 내가 결정한 최종 결심이다.
넘치면 힘겨우면 버리는 것이네.
이처럼 끝까지 버티다가 버릴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줄이는 것이 현명한데 늘 마음 같지 않다.
내 인생에 박수를! 깃털처럼 가볍게! 날마다 소풍처럼! 내 삶의 제목들을 다시 되 씹어 본다.
Nov.4 Wednesday
이동하는 시간대는 대게 점심 경에 잡았기 때문에 호텔에서 느긋하게 준비하면 되고
짐 싸 놓고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에 택시로 이동하면 된다.
처음에는 조금 번거로운 일로 생각 되었지만 숙달 되니 오히려 체크아웃 시간도
넉넉하고 짐 맡기고 돌다가 화장실도 이용하고 정비하는 시간도 갖게 되어 오히려 편리하고 좋다.
짐을 맡기고 점심은 다시 광장에 나가서 스파게티 종류로 했다.
아이들은 피자를 선택했다.
시에나 역으로 나가는데 구 도시지역이라서 구불구불 일방통행을 한참을 돌아서
택시가 빠져 나간다.
시에나 역은 작은 역 같았는데 뒤 쪽으로 새롭게 큰 쇼핑센터가 최근에 지어진 듯하다.
리프트를 이용해서 비교적 수월하게 여행 짐을 옮겼다.
열차를 타면서 계단을 이용 할 수밖에 없는 호텔에서 집 사람 짐까지 옮기느라고
내 근육은 운동을 충분히 했다.
운동이라 생각하니 이 역시 참 좋다.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하고 헤멜 때 우릴 안내 해준 사내는 팁을 원했다.
열차는 볼로냐(Bologna)로 향 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다. 1088년 유럽 처음으로 대학이 생긴 도시다.
이 곳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조성한 명칭이 향후
컬리지와 유니버시티로 발전된 유서 깊은 도시다.
Hotel Paradise는 볼로냐 역에서 지척의 거리 900M다.
이 호텔 역시 걸어서 찾기에는 무리가 있다.
프론트와 숙박지역이 분리 되어 있는데, 주방시설도 갖추어진 아파트형 호텔이다.
주방 시설 이용에는 별도 요금을 내면 된단다.
프론트의 여직원이 상냥하고 예쁘다.
서비스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기본으로 좋은 인상과 상냥함이 중요하다.
방도 넓고, 화장실도 좋고, 벽에도 물방울무늬 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호텔이다.
빨래 건조 열선도 배치되어 있는 숙박을 위한 손님들에게 여러모로 부족함이 없이
정성을 다한 5점 만점에 만점을 주고 싶은 호텔이다.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소개 받은 식당에서 했다.
값은 만만치 않았지만 음식의 질은 좋다.
옛 도심권으로는 상가들이 죽 배치되어 있다.
Nov.5 Thursday
짐을 정리해서 프론트에 보관하고 옛 시가지로 나갔다.
아이들은 중학교 지원 문제 등 결정이 임박해서 주변 관광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둘만 구 시가지로 나가서 종탑과 성당들을 둘러보고 냅툰 분수도 보고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다가 아이들과 합류 했다.
(잠볼로냐의 걸작 조각품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볼로냐는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의 군대에 패해서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를 침략할 때까지 교황령으로 남게 된다.
교황이 다스리던 이 시기에 도시는 번영을 누렸다.
볼로냐는 위대한 학문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예술가, 화가, 장인들을 모으는 장소가
되었다.
볼로냐 중심에는 한때 종교적인 권력과 도시 권력의 본거지였던 두 개의 광장이 있다.
피아차 마지오레와, 이와 연결된 피아차 델 네투노이다. 두 광장 사이에 폰타나 델 네투노,
즉 '넵투누스 분수'가 있다. 이는 잠볼로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플랑드르의 조각가 장 불로뉴의
작품이다.그는 1550년 고향인 플랑드르를 떠나 로마에 도착하여, 2년 후에 피렌체에 정착했다.
그리스 고전 조각과 미켈란젤로 작품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점차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과장된
스타일을 대표하는 일류 조각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잠볼로냐는 1563년 교황 피우스 4세에 의해 청동으로 된 넵투누스 조각상과 분수를 이루는
다른 보조 조각품들을 제작하라는 명을 받았다.
파도를 진정시키며 삼지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 바다의 신인 넵투누스를 통해
그는 유명해졌다. 넵투누스 아래에서 상징적인 교황의 열쇠가 새겨진 대좌에
아기 천사들이 앉아 물고기를 들고 있으며, 물고기 입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매너리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박한 모습으로 분수 아래에 새겨진 네 명의 인어는 양손으로
자기 젖가슴을 안고 있으며, 양쪽 젖꼭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1564년에는 이 분수를 설치하기 위해 주택가 한 블록이 철거되었으며, 분수는 1566년 완성되었다.
분수의 아래편은 시칠리아의 예술가 토마소 라우레티가 디자인했다.분수는 호평을 받았으며,
잠볼로냐는 권력 있는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보볼리 정원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작품 주문을 받았다.
그 결과, 잠볼로냐의 조각은 전 유럽에 걸쳐 정형적인 정원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다)
큰 유적은 없지만 자나던 이탈리아의 큰 도시에 하룻밤을 묵어가는 여유가 좋다.
나그네 란 그런 것 아닌가? 그리고 멋들어진 냅튠 분수도 보았지 않은가?
이 분수는 그단스크의 냅튠 분수 보다는 수준이 하늘 급이다.
가다가 지치면 잠시 쉬어 가는 여정이 여행의 여유가 아닌가?
점심은 볼로냐 역의 카페테리아에서 했다.
음식도 다양하고 깔끔하다.
열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향 했다. 열차 속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넉넉하다.
한국인 젊은 한 쌍이 보인다.
한동안을 달려서 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베네치아가 눈에 들어온다.
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灣) 안쪽의 석호(潟湖:라군)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의 사주(砂洲)였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고,
따라서 근래 지반침하와 석호의 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10세기 말에는 동부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S자형의 대운하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고, 출구 쪽의 운하
기슭에 장대한 산마르코 광장(廣場)이 자리한 기본적인 도시형태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궁전 등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5개의 원형 지붕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 풍(風) 또는
오리엔트풍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十字軍) 원정에 힘입어서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서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14~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무렵의 베네치아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공화국의 정치 중심이었던
두칼레 궁전이 완성된 것도 15세기였다. 16세기 이후, 투르크인에 의해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이 약화되고, 따라서 베네치아는 점차 오늘날의 베네토주의
풍요한 농업지대의 중심 도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도시경제의 쇠퇴와 페스트의 유행으로
16세기에는 인구가 10만으로 감소하였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 군에 점령되기까지 반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인 북부평야를 배후지로 하는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항(商港)은 서부의 철도역에 인접한 스타치오네 마리티마이나,
20세기에 들어와 대안에 공업항(工業港)으로 마르게라가 건설됨으로써, 마르게라·메스트레 등
대안(對岸) 지역이 근대공업지대로 발전하였다.
대안의 공업지구는 현재 행정적으로는 베네치아 시에 포함되어 있고,
유리세공업(細工業)으로 유명한 무라노섬, 국제영화제 개최지 및 해수욕장, 카지노 등으로
유명한 리도 등도 베네치아 시에 포함된다.
베네치아의 구시가지는 지난날의 공화국 번영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산마르코대성당·두칼레 궁전· 아카데미아미술관 등은 미술·건축예술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는 로마·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이다. 대학 및 시(市) 동부의
현대미술전시장에서의 국제비엔날레, 리도의 국제영화제, 페니체극장 에서 의 음악 등
문화 활동도 활발하다. 그러나 구시가지는 면적이 한정되어 있고, 현대생활에는
편리한 환경이 될 수 없으므로 대안부의 도시화가 현저하다.
대안부의 공업은 화학·기계공업이 중심이며, 공업항을 포함한 베네치아항의 취급물량은
이탈리아 제3위를 차지한다.
옛날 방문 시에는 버스로 들어 왔기 때문에 이렇게 열차로 들어 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열차가 섬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 하지 못했지만 길게 철로가 잘 되어 있어
베네치아에 착지 한다.
Su도 두 번째 방문지이고, Gold는 세 번째 방문이어서 모두에게 익숙한 도시다.
몇 번 두리번거리고 관광안내소를 오간 뒤 배를 타고 우리 호텔 지역으로 이동했다.
Hotel Al Nuovo Teson 이다. 3박이 예약되어 있는 호텔이다.
베네치아는 호텔요금이 비쌌다.
그래도 이 호텔은 마르코 폴로 광장까지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니 비교적 중심부인
편이다.
마르코 폴로가 누군가?
그가 바로 이곳 사람이다.
동방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으로 동방여행을 떠나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원나라에서
관직에 올라 17년을 살았다.
이후 이야기 작가인 루스티켈로에게 동방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필록(筆錄)시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세계 경이의 서(통칭 동방견문록》가 탄생하였다.
Marco Polo(1254 ~ 1324 70세)
저서《세계 경이(驚異)의 서(東方見聞錄)》
1254년 베네치아공화국에서 출생, 당시 베네치아는 동방과의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무역상이었던 아버지 니콜로는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전 무역을 위해 동방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삼촌인 마페오 폴로(Mafeu Polo)는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보석을 거래했는데 무역을 위해 동쪽으로 나아가 베르카(Berca)라는 곳에
머물다가 원나라의 사신을 만나게 되고, 그의 제안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다.
1년을 여행하면서 동방의 이국적이고 신기한 풍물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마침내 원나라(중국)에 도착하여 쿠빌라이(Qubilai Qa'an)를 알현하게 되었다.
니콜로와 마페오는 서방에 대한 쿠빌라이의 관심에 대답하고 교황에게 파견되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이스라엘 북쪽 아크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당시 교황이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선출되기를 기다렸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269년 아버지와 삼촌이 고향인 베니스로 돌아오자 마르코는
15년 만에 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된다. 새로 선출된 교황을 만나
쿠빌라이에게 보내는 서신을 받았으며
수도사 2명이 함께 파견되기로 하였다. 1271년 다시 원나라(중국)으로
떠나는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마르코 폴로도 같이 동방여행이
시작되었다. `라이아스 항구를 떠나 지중해를 건넜으며 터키를 지나 페르시아만 호르무즈해협에
도착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일행이 호르무즈에 도착한 것은 선박을 이용하여 원나라(중국)로 항해하려고 했으나
해로(海路)의 위험성과 작은 선박의 불안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육로를 이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키르만 타브리즈 ·발흐 ·파미르고원을 경유하여 타림 분지(盆地)에 이르렀고, 카슈가르 ·
야르칸드 ·허톈 ·체르첸 등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변두리의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지나 하서(河西) 지방에 도달하였다.
마르코는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간저우[甘州]에서 l년 간 요양과 휴식을 위해 체재한 다음,
쿠빌라이[世祖]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도(上都:현 네이멍구자치구의 남부인 돌룬노르)에
도착하여(1274) 쿠빌라이를 알현하였다.
마르코는 중국에 머물러 원나라에서 우대를 받아 관직에 올랐고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았다.
중국에 머물며 각지를 여행하였고 풍속과 세태를 쿠빌라이 칸에게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또한 황제의 명으로 외국으로 파견하는 사신으로 나가기도 했다.
마르코는 17년간 원나라에서 머물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쿠빌라이칸에게 청하였지만 그를 총애한 칸은 번번이 거절하였다.
마침 마르코 폴로 일행은 이란의 몽골왕조인 일 한국(汗國)의 아르군 칸의 왕비가 사망하자
그에게 강가(降嫁:왕족의 딸이 신하의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하는
원나라의 공주 코카친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되어 겨우 원나라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행은 푸젠성[福建省]의 취안저우[泉州]를 출범(出帆)하여 자바 ·말레이 ·
스리랑카 ·말라바르 등을 경유하여 이란의 호르무즈에 도착하였지만, 아르군 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공주를
그의 아우인 가이하투 칸에게 맡겨놓고, 1295년에야 겨우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마르코는 그 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전쟁에 말려들어 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옥중에서 이야기 작가인 루스티켈로에게 동방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필록(筆錄)시켰다.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세계 경이(驚異)의 서/
일본에서 동방견문록으로 번역됨)》의 원조본(元祖 本)이 되었다.
이 책은 13,4세기의 이란 ·중앙아시아 ·몽골의 역사와 지지(地誌) 및 민속 등에 관한 귀중한
문헌이며, 프랑스어(語)의 원본은 손실되고, 가장 잘 알려진 이탈리아어(語) 사본은
1309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에서 내려서 좌회전 우회전 하니 단박에 우리 호텔이다.
프론트의 남자접객원은 설레발이다.
Gold의 짐을 번쩍 들어 3층까지 올려다 준다.
우리가 원했던 가족실(Family room)은 대게 조금 한적한 곳에 배치하기 때문에
건물 구조와 배치 상으로 제일 위 층이 되기도 하고 지하층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곳도 3층까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호텔이고 방은 비좁다.
그래도 넷이 묵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제일 비좁은 호텔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작은 섬에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지 라고 자위한다.
저녁은 호텔에서 소개를 받았고, 전통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해서
기대를 하고 시켰는데 오징어 먹물 요리가 엄청 짜다.
自生的 짠 맛이 아니라 소금 범벅 같다.
전통적으로 더운 곳이니 음식 상함을 방지하기 위한 요리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내리 물만 들이 키는 우를 범 했다.
다른 식당에서 그 다음 부턴 몇 번 레스 솔티 Less salty를 외쳐야 했다.
향토음식을 먹어 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사양사람들이 우리 향토 음식을 먹는다고 청국장이나 삭힌 홍어를 먹는다면 어떨까?
Nov.6 Friday
마르코 폴로 광장으로 나가서 Kelly와 나는 엘리베이터로 종탑까지 올랐다.
종전에는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가격도 달랐는데, 이젠 모두 엘리베이터로 이동을 한다.
운용의 효율과 수익증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광장은 비둘기 천지다.
종탑 위에서는 베네치아의 동서남북이 잘 보인다.
내려온 후 식구들 모두 합류해서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박물관과 지하 감옥을 둘러 봤다.
전설적인 바람둥이 카사노바(1725~1798 73세)도 신성 모독죄로 유죄선고를 받고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로 이름 붙은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중세의 돈의 흐름이 몰리던 공국이지만 궁중의 화려함이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 이조선의 신하들은 돌 바닥위에 벼슬의 순서대로 무릎을 꿇고 왕과 대면을 했지만
이들은 아름답고 좋은 자리에 착석을 하고 국왕과 국정을 논했다.
베네치아 발전의 중심 상업지역인 리알토 다리를 거쳐서 수산물 마켓을 찾았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이미 클로스 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중국식당을 하나 찾았는데 우리말로도 메뉴가 작성 되어 있다.
요리 몇 개를 시키고 쌀밥을 시키면 됐는데, 양도 모르고 맛도 짐작할 수 없어서
우리이름에 익숙한 요리들을 시켰고, 양이 작아서 결국은 같은 요리를 추가 주문을 했다.
음식은 입맛에 맞다.
돌아오는 길에 규모 있는 카페 앞에 그랜드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가 한창이다.
커피 값이 다른 곳의 더블은 되는 성 싶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카페가 유럽에서는 최초로 문을 연 카페란다.
산 마르코 광장이 채 지어지기도 전인 1720년 세상에서 제일 먼저 오픈한 Caffe Florian 이다.
Nov7. Saturday
아침 일찍 지도로 부라노 가는 배를 타는 곳으로 이동해서 제번 먼 배 여행을 했다.
유리세공으로 유명한 무라노 섬은 Su와 Gold가 옛날에 다녀 온 적이 있다고 해서
훨씬 먼 곳에 있는 건물색이 원색인 부라노를 선정 했다.
도착한 초입부터 건물에 발라진 페인트가 밝은 원색이다.
뱃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곳을 잘 찾기 위해서/ 배 수리 후에 남은 페인트를 이용해서/
이런 마을이 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런 색 자체가 관광 상품이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의 탄생지역인 보카 지구의 항구마을과 닮았다.
돌아오는 길에 건너편 돔이 보이는 지역 아카데미 미술관으로 가서 석양의 베네치아를 봤다.
24시간짜리 배 티켓을 사고 내일 아침 공항으로 갈 때 이 티켓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Nov.8 Sunday
이태리의 감 대봉은 단단한데 우리나라 단감처럼 떫지 않아 좋다.
씨도 없으니 새롭게 개발 발전시킨 것 같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대봉 한 개와 사과 하나를 챙겼다.
가끔 이렇게 챙겨 놓은 과일이 긴요하게 쓰일 때가 있다.
호텔을 나서면서 공항으로 가는 배를 타는 장소와 어제 산 24시간 티켓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었더니 배를 운행 하는 회사가 다르기 때문에 어제 표는 무효란다.
이리 저리 돈을 노리는 자들이 많다.
배에 나와 있는 시간은 공항 항구에서 터미널 까지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모두
계산해서 도착시간을 표시해 뒀다.
합리적인 방법이다.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의 Easy Jet 은 출국 층인 2층에 위치하지 않고
1층에 별도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오히려 한가하고 좋다.
체크인 할 때 나는 Priority 고객이어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체크인 할 수 있단다.
그동안 이 비행기를 자주 이용한 배려인지, 돈을 별도로 추가 지불하고 좌석을 미리 산
배려인지는 모르겠다.
이탈리아 공항인 베네치아 공항은 면세품 구입한 것에 대해서도 환불이 아주 쉽게 이뤄진다.
언젠가 런던 히스로공항에서 텍스를 리턴 하면서 산 물건까지 보여 달라 했던
기억이 생생해서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고 현지에서 산 신발을 모두 별도
휴대가방에 갖고 있었는데 이럴 필요 없이 원활하게 잘 해 준다.
세관 공무원이 쿵 하고 확인 도장을 찍어 주면 출국 심사를 받은 후 탑승지역에서 즉시 환불이 된다.
영수증 한 장에 확인 도장이 없다고 Su는 다시 출국심사전 지역으로 되돌아가서
도장을 받아 온다. 적극적인 자세가 좋다. 환불 받은 돈은 Su 몫이 당연하다.
텍스 푸리 환불 시스템은 오히려 이탈리아가 훨씬 선진이다.
영국의 시스템은 애국심인가? 아니면 콧대 높은 자들의 위선인가?
오래도록 기분 나쁜 영국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다.
2시간여 비행해서 파리 드골 공항에 잘 도착했다.
영국의 입국심사에서는 불친절한 경우를 많이 경험 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고 하지만 과거의 역사에 해적의 나라이고, 힘으로
미개국들을 선 점령해서 군대를 주둔 시키고 약소국가들을 노략질 한 나리다.
세계에서 식민지를 제일 많이 거느렸던 나라다.
자주 찾는 정다운 나리이긴 하지만
어차피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외교부 문자 메시지는 파리지역 테러경보 최상급단계임을 또나시
알려온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관광지 일 수밖에 없고 이런 집중시설에 테러를 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택시를 탔는데 넓고 좋은 도요다 승합차다.
운전기사가 영어로 안내도하고 친절하다.
4박을 예약한 Hotel Elysee Gare de Lyon에 잘 도착했다.
깔끔하고 교통이 좋은 파리리옹 역 바로 옆이다.
프론트의 남녀 둘은 아주 친절 하고, 남자 직원은 한국친구들도 많다고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Nov.9 Monday
호텔 아침 식사는 양호하다.
지하이지만 깔끔하게 준비하는 몸집이 제법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인상이 좋다.
식구들 모두 리옹 역으로 이동했다. 큰 역이어서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
리옹 역 메트로 창구에서 티켓을 번들로 20장 샀다.
1장에 1.8유로인 티켓은 10장을 살 때는 14유로에 살 수 있다.
28유로 내고 20장을 샀다. 4명이 5회 이용하면 끝이다.
지하철 티켓을 파는 이곳에서 파리 지하철 노선도를 제일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이고 정보다.
스마트 폰에서 세계의 지하철 노선을 모두 내려 받고 활용 할 수 있지만
페이퍼로 된 지도가 그래도 안정감이 있다. 사실은 촌스러운데 말이다.
Su의 안내로 파리다운 마레지구에 가서 이것저것 파리의 유행들을 살폈다.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커피도 마셨다.
월요일이라서 대부분의 뮤즈움 이나 실내 볼거리들은 대부분 Off다.
옛부터 고관대작들이 살았던 집들은 어디가나 대칭을 이룬 정원들은 유럽의 대표 모습이다.
쁘렝땅 백화점으로 이동해서 옥상 층에서 파리를 관망 했다.
백화점 입구에서도 테러 방지를 위해 가방 등을 샅샅이 검색한다.
백화점 내에 화장실을 잘 꾸며 놓고 돈을 받는다.
Kelly가 이어폰 감겨 숨기는 물건을 하나 사면서 나도 사 준다.
메이드인 차이나 가 아니고 네덜란드 것이라고 한다.
화장실을 찾아 가는데 곳곳이 거울이라서 현기증이 난다.
바로 나와 버렸다.
남자들은 백화점이라는 공간이 그리 편한 공간이 아니다.
1층 쇼 윈드 에는 패션 회사들이 스폰 한 장식물들이 현란하게 장치되어 있다.
설치물들이 벌써 한해의 끝을 준비하고 있다.
점심은 백화점 뒤에 있는 중국식 집을 찾아서 나는 라이스 파스타 with 포크를 시켰는데
엄청나게 큰 쌀 떡 국용 떡 음식이다. 환경과 음식들이 역겹다.
몇 개 먹다가 화장실에 가서 구토해 버렸다.
중국 관광객들이 득실거리는 식당이다.
Nov.10 Tuesday
루즈벨트(1882~1945 63세) Franklin D. Roosevelt역에서 하차해서
상젤리제 거리로 개선문Charles de Gaulle Etoile 으로 이동하면서
제일 오래된 카페에서 케이크와 커피를 마셔 보는 호사를 했다.
바로 눈앞에는 루비이똥 의 본사 마크 깃발이 보인다.
개선문으로 이동하는데 역 앞에서 모든 출입구를 막은 채로 표를 검사한다.
Su와 Kelly의 티켓이 재사용한 부정 티켓이라고 인당 50유로씩 벌금을 내란다.
여자검표원이 유세를 부린다.
남은 표가 많이 있음을 설명하고 고의가 아니고 혼동 된 결과 라 했더니
정상을 참작해서 인당 33유로씩 합 66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
강도를 당한 기분이다.
벌금을 결제 하고 나니 검표원의 얼굴도 본색으로 돌아 왔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만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우리 탓이다.
한번 사용한 티켓은 재사용이 불가한데 나는 지금 까지도 버스랑 같이 호환이 되고
시간제로 운용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마을버스나 지하철이 호환되는 상황에 시간이 반영되어 운영 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례 판단한 원인이다.
또 낯선 곳에서 낯선 이유로 특별세금을 낸 셈이다.
에펠탑이 보이는 반대편 궁전 앞에서 해지기를 기다려서 멋지게 불을 밝히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해질 녘의 에펠탑의 모습은 아름답다.
돌아오는 길에 일식집,
일식은 모두 중국인들이 운영을 해서 제대로 된 일식이 아니다, 에서 저녁을 했다.
아이들은 내일 저녁 비행기로 돌아 갈 일이 생겼다.
저녁 시간에 짐을 끌고 아이들이 리옹 역 공항버스 타는 곳으로 이동한다.
시간대 마다 15분 45분 공항버스가 운행이 된다.
이틀 먼저 가는 여정이지만 또 이런 이별은 마음을 썰렁하게 만든다.
공항버스 차비를 챙겨 줬다.
버스에 타고 가던 Kelly는 가는 동안 내내 울기만 했다고 제 어미가 카카오로
전해 온다. 구토도 했단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몸도 힘들어진다.
좋아 하는 할미 뒤에 두고 가는 마음도 불편했던 탓이리라.
길이 막혀서 공항 가는데 고생을 한 모양이다.
식구들이 북적 대다가 둘만 댕그라니 남게 되니 세상에 우리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날에 우린 영국에서 여러 번 이별 연습을 했는데도 짧은 이별도 슬프다.
이별은 항상 떠난 편보단 남는 편이 더 힘이 든다.
영국 Bognor Regis 겨울 녘에 Kelly와 Su 를 남기고 떠나 던 때가 아련하다.
그래도 주변에 발레리Valerie 와 버니Bernie라는 知人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이번 겨울 크리스마스에도 선물을 챙겨야겠다.
선물이 오면 거실 트리 밑에 뒀다가 이브 날에 개봉하는 발레리 모습이 아련하다.
아름다운 인연이고 만남이다. 보고싶다.
아이들 보내고 난 후 역 앞에 일식집을 찾아가서 새우 튀김 하고 스시와 장국을
사서 호텔 룸에서 식사를 마쳤다. 양이 많다.
음식을 주문하다 보면 늘 양이 많은 경우가 많다.
뒤에 기록하는 글이라서 날자 개념이 분명 치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콩코드 역에 내려서 언제나 보아도 멋들어진 이집트에서 프랑스
시민 혁명 후 보내온 오벨리스크도 다시보고, 이건 아무리 보아도 멋있다.
운반만 3년 이상 걸리고 파리 시민 혁명을 축하하는 선물로 줬다고 들었다.
(3300년 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화합의 마당인 콩코드에 우뚝 서 있다. /
1829년 이집트의 부왕이었던 메헤메 알 리가 두 개를 선물로 줬는데
하나는 뒤로 미뤘다가 프랑수와 미테랑이 1998년에 이집트에 반환.
프랑스의 쉐르부그에 1833년 도착 루앙을 거쳐 콩코드 다리까지 도착 한건 1834년.
1836년 10월25일 파리지엥 20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리를 잡게 됨)
그 바로 옆에는 새롭게 Wind wheel을 건설 중이다. 나는 이 관람차를 키스카로 명명한적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과 정면이 잘 대칭되는 자리다.
영국의 템즈강변의 2000년 건설 된 런던 아이 이상 인기를 누를 것 같다.
Tuileries 정원을 거쳐서 루브르 쪽으로 이동했고, 바스티유 역에서 점심을 했다.
루이 16세의 마지막 모습들이 서려 있는 1789년 역사의 현장들이다.
Luxembourg 정원은 넓다.
파리의 시민들이 운동하고 쉬는 장소다.
피렌체와 연관이 있다.
시집온 왕비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e Medici(1573~1642 69세)가
프랑스왕 헨리 4세가 죽자 이 곳에 자기 고향의 피티 궁전을 닮은 궁전을 짓게 한 곳이다.
헨리(앙리)4세는 엄청난 바람 꾼이었다.
중세에 배우자를 보는 방법은 사신이 말을 타고 커다란 초상화를 갖고 오는 것이 고작 이었다고 한다.
앙리 4세가 초상화를 보고, 실물을 본 후에 “속았도다.“ 했다고 전해 온다.
아들 루이 8세를 1610부터 1617년 까지 섭정 했다.
시집 혼수품으로 포크 나이프와 말을 탈 때 여자들이 바지를 입게 된 것도 이 왕비가
갖고 간 것이라 들린다.
Nov.11 Wednesday
오늘의 동선을 계획함.
한국에서도 지하철 타려면 미리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Gare de Lyon 역에 나가서
라데빵스 La Defence 가는 법은 파리 리옹 역에서 A라인이나 1호선을 타면 한방에 간다.
나폴레옹묘소와 군사박물관이 있는Invalides는 리옹 역에서 타고 환승하는 방법도 있고,
우리숙소에서 다리하나건너서700미터쯤 가면 Gare D' Austerlitz역에서 C라인으로
직방으로 갈수 있다.
환승으로 가는 방법은 리옹 역에서 A나1호선으로직통으로 라데빵스로 갔다가 1호선을 타고
콩코드Concord역으로 와서8호선을 타고 Invalides에 가서 둘러보고 다시 콩코드로 와서
1호선으로 환승해서 리옹으로 올수 있다.
스마트 폰의 어플 로 내려 받은 지도가 확대가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편하게 볼 수 있다.
정거장 이름 영문자를 머리에 기억하는 것이 쉽게 찾는 수단이 된다.
그런데 거꾸로 나폴레옹 묘소가 있는 Invalides 역에 내렸다.
바로 옆으로 Air France 건물이 보이고 아름다운 알렉산드르 다리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 커다란 건물이 보이는데 접근을 허용 하지 않는다.
무슨 정부 기관인 듯하다.
되돌아서 다리를 건너 나폴레옹 묘소와 군사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오는데
다리 위에서 혼자 있던 여인이 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모발 폰 같은데 오래된 구형 같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에펠탑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옆모습과 뒤 모습을 촬영 해달라는 부탁이다.
리퍼블릭 체코에서 왔다고 한다.
뭔지는 짐작할 수도 없지만 사연이 가득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체코의 수도는 프라한데 비엔나? 라고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름을 던졌다.
나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코리아라고 답하고 헤어져 앞서 가는 Gold를 바삐 따라
잡았다.
전쟁박물관 정원의 잔디는 우리와 달리 아주 푸르고
조경수들은 뾰족한 돔처럼 잘 剪定되어 있다.
입장료 내고 들어서자 나폴레옹이 썼던 모자를 골판지로 만들어 선물로 준다.
묘소와 붙어 있는 성당은 미사 중이라서 당장은 출입이 어렵고 한 시간 뒤에
오면 된단다. 처음에는 왜 출입이 금지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폴레옹(1769~1821 52세) 묘소로 들어서자 용케도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라고 문을 지키는 근무자가 유쾌하게 인사를 건넨다.
돔의 중앙의 돌 재단위의 나폴레옹 황제의 관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그의 부인 조세핀의 관도 보인다. 조세핀 관 모양이 더욱 아름답다.
사실 이번 여행 코스를 나폴레옹이 태어난 코르시카 섬을 대상으로 했고,
워털루의 마지막 전투 장면도 역사 기록물에서 본 후라서 각별한 관심이 있는 곳이다.
세기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52세에 생을 마감 했다.
한국의 근대사의 위업을 남긴 박정희(1917~1979)도 62세에 생을 마감 했다.
위대했던 영웅의 워털루 전투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이다.
박정희도 궁정 동에서 비극적인 마감을 했다.
포병 시골뜨기 장교 출신으로 황제 까지 된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후 기울기 시작했다.
1814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의 연합군에게 파리를 점령당하고
지중해 엘바 섬에 유배 된다(1814.5.4.)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1755~1824 69세)로 왕정이 복구 되었으나
1815년 2월 1,000명의 근위대로 칸에 상륙하고 세를 규합하여 20일 만에 파리를 수복하고
1815년 6월 120,000명의 프랑스 군과 월링턴(1769~1852 73세)이 지휘하는 영국군 95,000명,
블뤼허(1742~1819 77세)지휘하의 프로센군 120,000명이 벨기에 동북방 Waterloo에서
격돌해서 초기에 승기를 잡았던 프랑스 군이 비가 내리기 시작 하면서부터 몰리기 시작해서
영국군 전사 15,000, 프로인센 7,000 전사인데 프랑스 군은 40,000명이 전사 했다.
6월22일 영국 군함 Bellerophon 호로 대서양 외딴 섬 Saint Helena 섬에 유배 되었고
1821년 5월5일 52세로 생을 마감 했다.
전쟁박물관으로 향하면서 관내 카페에서 차 한 잔 대신 아이스크림으로 했다.
전쟁박물관은 잘 정돈 되어 꾸며 있다.
방대한 전시다.
Concord 역으로 나와 1호선을 타고 라 데빵스로 갔다.
쇼핑몰을 지나 넓게 조성된 거리 사이로 걸어 내려가는데 인적이 별로 없다.
거물들도 잘 지어지고 조경도 잘 되어 있고 분수도 아름다운데 흥청거릴 사람들이
없다. 대부분의 식당들은 문을 닫았다.
계획적으로 만든 신도시는 사람들을 흡입하는 기능이 있어야 하는데.....
되돌아오면서 쇼핑센터에 들렸는데, 이 곳만 사람들이 많다.
카페테리아 형태의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이미 소진 된 스마트 폰의 배터리를
홀 중앙 부분의 카펫 바닥에 질펀하게 앉아서 충전했고, 그 사이에 집 사람은
멋진 여행 케리어 가방을 하나 사 왔다.
베네치아에서 파리로 비행 하면서 새로 산 케리어 가방이 찢어져서 하나를
쓸 만 한 것으로 사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가방이 크고 넉넉해 좋다.
그 가게에 다시 찾아가서 커버도 샀다.
금액은 만만치 않다. 거의 200유로 넘게 지불했다.
배낭은 새로 산 케리어 속에 넣고 지하철로 돌아오다가 파리 리옹 역 바로 전인
바스티유(Bastille)역에서 열차가 막 출발 하려는데 집 사람이 임시 장이 열렸다고 해서
뒤 늦게 내리다가 내 손과 케리어가 차의 문틈에 끼었는데 우리나라와 다름없이
기관사가 확인 하고 오픈 해주는 덕에 잘 내렸다.
그런데 내려서 보니 어제 아이들과 바스티유 왔다가 구경하려 했던 그 엔틱 시장으로
입장료를 인당 10유로씩이나 받는 곳이어서 포기하고 리옹 역까지 슬슬 걸어 내려 왔다.
집 사람은 개똥을 밟았고, 숙소에서 잠시 휴식 후 중식당으로 가서 아주 가볍게 입맛에 맞는
요리 몇 개로 저녁을 마감하고
강을 건너 Gare d' Austerlitz 역사 앞으로 지나서 리옹 역 앞으로 돌아서 숙소에 왔다.
리옹 역 바로 우측은 조금 어수선 하다.
이 호텔은 연거푸 이부자리에 처음에는 달러로 뒤에는 유로로 팁을 놓아도 받지 않는다.
Nov.12 Thursday
호텔 요금을 정산 하는데 달러나 유로 중 선택해서 결재 하라고 한다.
리옹 역으로 9시 경 나와서 드골 역 행 공항버스에 탑승했다.
승객은 우리 포함해서 5명에 불과 하다.
2009년 이래 4번이나 다녀간 파리는 익숙한 도시다.
떠나려면 또 아쉬움이 있다. 못 본 것 구석 마다 모두 보고 간다고 작정 하고 왔는데....
다음에 또 올 기회가 되면 숙소는 이 호텔 Hotel Elysee Gare de Lyon에 정해야겠다.
편리하고 좋은 호텔이다. 4박에 100만 원정도 지불했으니 파리 숙소로는 비싼 편이
아니다.
파리는 온통 안개 속이다.
비행기가 잘 이륙할지 걱정이다.
터미널 2E 에 내려서 Air France 카운터로 이동했는데 체크인이 모두 셀프다.
여행 시작해서 지난 달 23일 날 드골공항에서 마르세유 가는데도 마찬가지였다.
키오스크로 가서 내 항공권 번호를 입력 하니 승인이 되고, 항공권이 나오고 바로 짐표가
송객 보관용 영수증과 함께 나온다.
눈도 어둡고 동작도 느린 노인들에겐 조금 벅찬 일이다.
항공권 자리에는 SBT 라고 표시 되어 나왔다.
집작컨대 스텐바이 티켓의 약자 같다.
비행기에 다른 승객들이 모두 탑승하고 남는 자리가 있어야 승인이 되는 티켓인데
미리 주는 이유는 100% 빈자리가 있다는 신호다.
승객인 내가 짐표를 내 짐에 붙이고 영수증도 별도로 떼어서 내가 보관한다.
짐을 싣는 롤러 앞으로 가니 다시 짐표의 바코드를 읽어야 한다.
바코드를 읽으니 우리 짐은 승인이 안 된다.
자리가 남아야 타는 Zed 티켓이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고참 으로 보이는 여 직원에게 We have two Zed Tickets. Do you know about
the tickets?
라고 물었더니 슈어 하고 바로 도움을 준다.
영어는 시원찮아도 천천히 생각하고 발음 하면 모두 통한다.
빠르게 머리가 반응 하지 못하니 뒤 엉길 때가 종종 있긴 하지만......
텍스 리턴 포스트를 물어서 찾아가서 영수증에 바로 확인을 받았다.
달러 환불은 이 곳에서 하고 유로 환불은 출국심사 후 M지역에서 받으라고 한다.
미심쩍어 달러를 환불 하는 곳으로 갔는데 모두 중국인들이다.
질서가 없어서 공항 직원들에게 함부로 대우를 받는 모습이다.
기다렸다가 다시 질문했더니 유로 화 환불은 분명히 탑승저역 M이라고 말한다.
트램타고 이동해간 M지역은 새롭게 조성된 공간으로 아주 편리하게 잘 꾸며져 있다.
차한잔 하고 기다리는데 해당 게이트에서 자기들 프론트로 오라고 나를 전광판에
표시 한다. 좌석을 배정 해 준다.
페이징 시스템을 없애 버리고 전광판으로 찾으니 참 편리하다.
긴 여정으로 인천 공항에 안착했다.
공항버스 도착 지점으로 Su 마중 나와 집으로 돌아 왔다.
우리가 출발 하고 바로 다음날인 13일 금요일 SI 테러로 파리는 139명이 희생 되었다.
여행 초기 단계에 13일 금요일을 염두에 뒀던 것이 우연 이었겠지만
일정이 겹쳤다면 조금 혼란스러웠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