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차인과 그들의 멋
-조선 후기 걸명(乞茗) 시문을 통해 본 한국 차인의 멋-
정 민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Ⅰ. 머리말
Ⅱ. 다산의 걸명 시문
Ⅲ. 추사의 걸명 시문
Ⅳ. 기타 제가의 걸명 시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이 글은 이후 조선 후기 문집에 산견되는 걸명(乞茗) 시문을 통해 옛 사람들의 차 사랑과 풍류의 일단을 거칠게나마 살펴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걸명(乞茗) 시문이란 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지은 시문이다. 사다(謝茶)는 보내준 차를 받고 고맙다고 답장한 것이다. 중국 차시에 사다(謝茶)의 내용은 수없이 많지만, 걸명 시문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우리의 경우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걸명소(乞茗疏)〉와 걸명시 이래로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걸명 편지를 비롯해 제가의 걸명 시문 여러 편이 남아 있다. 이 걸명 시문은 차가 워낙 귀해 구하기 어려웠던데다 차 만드는 사람은 몇 안 되던 당시 조선의 특수 상황이 낳은 독특한 문화 현상의 하나다.
선초 이래로 쇠잔 침체 일로를 걷던 조선의 차문화는 1801년 다산의 강진 유배 이후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1760년(영조 36) 남쪽에 표류해온 차 상선(商船)에서 흘러나온 차를 전 조선이 10년간 마셨다.1) 조선에서 차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음다(飮茶)는 작설차를 고아 달여 약용으로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후 진도에 귀양 와 있던 이덕리(李德履, 1728-?)의 차에 관한 저술 〈기다(記茶)〉(일명 《동다기(東茶記)》)가 호남 지역으로 유포되면서 차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음다 문화가 점차 확산되었다. 눈 밝은 다산이 이를 이어 〈각다고(榷茶攷)〉를 저술하고, 해남 황차로도 불리는 만불차(萬佛茶)와 보림 죽로차(竹露茶) 등을 잇달아 개발하면서 차문화는 흥성해졌다. 다산이 지핀 차문화의 맥락은 초의선사(1786-1866)에게로 이어져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등의 저술을 낳았다. 다산과 혜장, 초의와 추사로 이어지는 차의 제조와 걸명(乞茗)에 얽힌 이런저런 시문들의 존재는, 19세기 초에 갑작스레 흥성해진 차문화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차를 청하는 걸명 시문에는 선인들의 차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차와 함께 오간 마음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어, 옛 차인들의 풍류와 멋을 한층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차 한 봉을 청하는 데도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또 이를 받고 나서도 고마움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 마음자리를 오늘에 새삼 되새겨 보려는 데 이 글을 쓰는 뜻이 있다.
Ⅱ. 다산의 걸명시문
우리나라에서 걸명(乞茗)의 글을 처음 남긴 이는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여러 편의 걸명 시문을 남겼다. 본 절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걸명소(乞茗疏)〉와 걸명시 몇 수, 그리고 백운동 이시헌(李是憲, 1803-1860)에게 차를 청한 편지 등을 함께 읽어 다산의 차 사랑과 다산이 마셨던 차의 제조법에 대해 살펴보겠다.2)
시문집을 통해 볼 때 다산은 유배 이전에도 차를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21세 나던 임인년(1782) 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춘일체천잡시(春日棣泉雜詩)〉의 첫 수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아곡의 새 차가 새 잎을 막 펼치니
마을 사람 내게 주어 한 포 겨우 얻었네.
체천의 물맛은 맑기가 어떠한가
은병에 길어다가 조금 시험 해본다네.
鴉谷新茶始展旗 一包纔得里人貽
棣泉水品淸何似 閒就銀甁小試之3)
아곡은 검단산(黔丹山) 북쪽으로, 이곳에서 작설차가 난다는 원주가 실려 있다. 당시 서울 지역에서도 채다(採茶)가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어렵겠다. 또 〈미천가(尾泉歌)〉의 뒷부분에도 차 마시는 일에 관한 언급이 있다.
시험 삼아 용단차(龍團茶)로 고질병을 다스리니
해맑기 수정이요 달기는 꿀맛일세.
육우가 온다하면 어디서 샘 찾을까
원교의 동쪽이요 학령의 남쪽이리.
爲試龍團治癖疾 瑩如水精甘如蜜
陸羽若來何處尋 員嶠之東鶴嶺南4)
이 또한 20대의 작품이다. 용단차(龍團茶)를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다산이 마셨던 차는 단차(團茶), 즉 떡차였음을 알 수 있고, 약용으로 마신 것이 확인된다. 이런 시의 존재는 다산의 음다(飮茶)가 유배 이전 20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 생활 속에서 차 마시는 일을 언급한 몇 수의 시가 더 있지만 차의 효용에 대한 언급이나 구체적인 예찬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강진에 귀양 간 후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 선사와 교유를 갖게 되면서, 답답한 체증을 치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차를 구해 상음하게 되었던 듯하다.
1805년 봄 곡우를 전후하여 햇차를 딸 계절이 돌아왔다. 다산은 혜장 스님께 차를 요청하며 〈기증혜장상인걸명(寄贈惠藏上人乞茗)〉이란 제목의 걸명시(乞茗詩)를 보낸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걸명시다.
듣자니 돌 너덜 바로 아래서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지금은 보리 익을 계절인지라
기(旗)도 피고 창(槍) 또한 돋아났겠네.
궁한 살림 장재(長齋)함이 습관이 되어
누리고 비린 것은 비위가 상해.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더부룩한 체증이 아주 괴로워
이따금씩 술 취하면 못 깨어나네.
스님의 숲 속 차 도움을 받아
육우(陸羽)의 차 솥을 좀 채웠으면.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에 다르리.
모름지기 찌고 말림 법대로 해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으리라.
傳聞石廩底 由來產佳茗
時當曬麥天 旗展亦槍挺
窮居習長齋 羶臊志已冷
花猪與粥雞 豪侈邈難竝
秖因痃癖苦 時中酒未醒
庶藉己公林 少充陸羽鼎
檀施苟去疾 奚殊津筏拯
焙曬須如法 浸漬色方瀅5)
당시 다산은 섭생이 좋지 않았고 마음의 울결로 체증이 얹혀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때문에 혜장 스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차를 보시해서 묵은 체증을 시원스레 내리게 해 준다면 이야말로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배로(焙爐)에 쪄서 햇볕에 말리는 차 제조 과정을 법식에 따라 할 것을 당부했다. 다산 자신이 이미 차 제조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나란히 이어지는 시 또한 같은 운자로 지은 걸명시이다. 그 전후 사정이 재미있다. 긴 제목의 내용은 이렇다. 〈혜장이 나를 위해 차를 만들었는데, 마침 그 문도인 색성이 내게 차를 주자 마침내 그만두고 주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하는 글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앞의 운을 쓴다(藏旣爲余製茶, 適其徒賾性有贈, 遂止不予. 聊致怨詞, 以徼卒惠. 用前韻).〉
옛날에 문여가(文與可)는 대를 탐했고
오늘날 탁옹(籜翁)은 차에 빠졌네.
하물며 그대는 다산(茶山)에 사니
온 산에 자순(紫箰)이 돋아났으리.
제자의 마음 씀은 저리 후한데
선생의 예법은 매정도 해라.
백 근을 준데도 마다 않을 터
두 꾸러미 주는 게 뭐가 어때서.
만약에 술이 달랑 한 병뿐이면
어이해 깨지 않고 길이 취하리.
유언충(劉彦沖)의 찻그릇 텅 비었건만
미명(彌明)의 돌솥에 죄를 씌우네.
이웃에 설사병 걸린 이 많아
찾아오면 무엇으로 고쳐 주리오.
오직 다만 벽간월(碧澗月)로 부응하여서
구름 속 맑은 모습 토해내시게.
與可昔饞竹 籜翁今饕茗
況爾捿茶山 漫山紫箰挺
弟子意雖厚 先生禮頗冷
百觔且不辭 兩苞施宜竝
如酒只一壺 豈得長不醒
已空彦沖瓷 辜負彌明鼎
四鄰多霍㿃 有乞將何拯
唯應碧澗月 竟吐雲中瀅6)
먼저 보낸 걸명시에도 불구하고, 제자인 색성이 차 한 포를 다산에게 준 것을 안 혜장이 다산에게 차를 주지 않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냐며 마저 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시다. 차 백 근을 주어도 사양하지 않을 판인데, 고작 두 덩이 주면서 아까워하느냐고 했다. 차 한 포를 가지고 벌이는 신경전이 미상불 재미있다.
11구와 12구는 각각 고사가 있다. ‘언충자(彦沖瓷)’는 송나라 때 유일지(劉一止)가 학사 유언충(劉彦沖)의 시에 차운한 〈차운건안유언충학사기다일수(次韻建安劉彦沖學士寄茶一首)〉와 관련이 있고, ‘미명정(彌明鼎)’은 당나라 한유의 〈석정연구시서(石鼎聯句詩序)〉에서 적고 있는 형산(衡山) 도사 미명(彌明)의 석정 고사에서 취해온 것이다.
당시 다산에게 차는 약용으로 더 요긴했던 듯, 13구와 14구에서는 차를 넉넉히 나눠주면 이웃의 설사병 걸린 사람에게 나눠주어 그들의 병을 고치는 데 쓰겠노라고 말했다. 15구의 ‘벽간월(碧澗月)’은 혜장이 만든 차의 이름인 듯하다. 초의 스님의 《동다송》에 보이는 “건양과 단산은 푸른 물의 고장인데, 품제(品題)는 특별히 운간월(雲澗月)을 꼽는다네. 建陽丹山碧水鄕, 品題特尊雲澗月”라고 한 ‘운간월’과 비슷한 명칭이다.
다산은 이렇게 해서 혜장과 색성 등에게서 차를 얻어 마셨다. 이해 겨울에 다시 한번 혜장 스님에게 차를 청하는 글을 보낸다. 앞서 얻은 차가 벌써 다 동이 났던 것이다. 이번엔 시가 아니라 소(疏), 즉 윗 사람에게 상소하는 형식을 빌었다. 이것이 유명한 〈걸명소(乞茗疏)〉다. 변려문으로 된 문식(文飾)이 두드러진 글이다. 이 글은 현행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지 않다. 원본을 확인할 수 없어 원문에 미심쩍은 곳이 없지 않다. 제목도 1989년에 간행된 《다향선미(茶香禪味)》 제 2권에는 제목이 〈걸명소(乞茗疏) 을축동(乙丑冬) 증아암선사(贈兒菴禪師)〉로 되어 있고, 용운 스님이 2002년에 펴낸 《한국차문화강좌》 교재에는 〈이아암선자걸명소(貽兒菴禪子乞茗疏) 을축동재강진(乙丑冬在康津)〉으로 되어 있어 제목이 서로 다르다. 본문의 여러 곳도 부분부분 순서가 뒤엉켜 있다. 용운 스님본이 더 정제되어 있으나, 여기에도 문리상 몇 글자의 오자가 있다. 이에 이 두 본을 교감하여 아래와 같이 원문을 정리하고 번역한다. 구절 마다 매우 복잡한 전거를 품고 있어, 주석만 꼼꼼히 달려 해도 상당한 분량에 달한다. 본고에서는 그냥 간단히 번역과 원문을 제시하고 감상하는 데 그치겠다.
나그네는 요즘 들어 다도(茶饕), 즉 차 욕심쟁이가 된데다, 겸하여 약용(藥用)에 충당하고 있다네. 글 가운데 묘한 깨달음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세 편과 온전히 통하니, 병든 숫누에는 마침내 노동(盧仝)의 일곱 사발 차를 다 마셔 버렸다오. 비록 정기를 고갈시킨다는 기모경(棊母㷡)의 말을 잊지 않았으나, 마침내 막힌 것을 뚫고 흉터를 없앤다는 이찬황(李贊皇)의 벽(癖)을 얻었다 하겠소. 아침 해가 막 떠오르매 뜬 구름은 맑은 하늘에 환히 빛나고, 낮잠에서 갓 깨어나자 밝은 달빛은 푸른 냇가에 흩어진다. 잔 구슬 같은 찻가루를 날리는 눈발처럼 흩어, 산 등불에 자순(紫筍)의 향을 날리고, 숯불로 새 샘물을 끓여, 야외의 자리에서 백토(白兎)의 맛을 올린다. 꽃무늬 자기와 붉은 옥으로 만든 그릇의 번화함도 노공(潞公)만은 못하고, 돌솥 푸른 연기의 담박함도 한자(韓子)보다는 못하다네. 해안어안(蟹眼魚眼)은 옛 사람의 즐김이 한갓 깊은데, 용단봉단(龍團鳳團)은 내부(內府)에서 귀하게 나눠줌을 이미 다했다. 게다가 몸에는 병이 있어 애오라지 차를 청하는 마음을 편다오. 들으니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비결은 단나(檀那)의 보시를 가장 무겁게 치고. 명산의 고액(膏液)은 서초(瑞草)의 으뜸인 차에 남몰래 준다고 들었소. 애타게 바람을 마땅히 헤아려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기 바라오.
(旅人近作茶饕, 兼充藥餌. 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 病裏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浸精瘠氣, 不忘棊母㷡之言, 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洎乎朝華始起, 浮雲皛皛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乎碧澗, 細珠飛雪, 山燈飄紫筍之香, 活火新泉, 野席薦白兎之味,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潞公, 石鼎靑烟澹素, 庶乏於韓子. 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 龍團鳳團, 內府之珍頒已罄. 玆有采薪之疾, 聊伸乞茗之情,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 宜念渴希, 毋慳波惠.)
스스로 다도(茶饕)라 한 것이 재미있다. 도(饕)는 고대 상상의 동물인 도철(饕餮)이다. 탐욕이 많고 흉포한 성질을 가졌다. 천하에 맛보지 않은 차가 없다고 자부했던 청나라 때 원매(袁枚)도 자신의 별호를 다도(茶饕)라 한 바 있다. 차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란 의미이다. ‘서중묘벽(書中妙辟)’은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삼매의 경계가 육우가 《다경》에서 말한 경지와 상통한다는 뜻인 듯하나 분명치 않다. 《대장경》 가운데 《공작왕주경(孔雀王咒經)》 1권에 《묘벽인당다라니경(妙辟印幢陀羅尼經)》이 실려 있다. 묘벽이란 묘한 깨달음 정도의 뜻이다.
‘병리웅잠(病裏雄蠶)’는 누에가 뽕잎을 먹고 최면기에 들어 한잠 자고 나서 다시 깨어난 상태를 말한다. 이때 누에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잠에서 깨어난 숫누에는 욕심 사납게 다시 뽕잎을 갉아 먹는데, 여기서는 다산 자신이 마치 갓 깨어난 숫누에가 뽕잎 찾듯 차를 마신다는 의미로 썼다. 노동(盧仝)의 칠완(七椀)은 흔히 〈칠완다가(七椀茶歌)〉로 널리 알려진 〈주필사맹간의기신차(走筆謝孟諫議寄新茶)〉 중의 내용을 두고 이른 말이다.
기모경(棊母㷡)은 당나라 때 우보궐(右補闕)의 벼슬을 한 사람으로 차를 싫어 해 ‘척기모정(瘠氣耗精)’으로 차의 폐해를 지적하고 차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벌다음서(伐茶飮序)〉란 글을 남겼다.7) 이찬황(李贊皇)은 본명이 이덕유(李德裕)로 당나라 때 재상을 지냈고, 차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그는 특히 차를 끓일 때 혜산천(惠山泉) 물만을 고집해 벽(癖)이 있단 말을 들었던 인물이다. 기모경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다산 자신이 이찬황처럼 차에 벽이 들었음을 말한 것이다.
‘세주비설(細珠飛雪)’과 ‘활화신천(活火新泉)’, '해안어안(蟹眼魚眼)’ 은 모두 소동파의 〈시원전다(試院煎茶)〉시에서 따왔다. 송나라 때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에 얽힌 고사도 같은 시에 나온다. ‘자순(紫筍)’과 ‘백토(白兎)’는 차의 이름이다. 자순차는 육우가 《다경》에서 이미 천하 제일의 명차로 일컬은 바 있고, 백토차는 월토차(月兎茶)를 변려문의 대우에 맞춰 색채어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서초지괴(瑞草之魁)’는 상서로운 풀 가운데서 으뜸이란 말로 차의 별칭이다. 당나라 때 두목(杜牧)의 〈제다산(題茶山)〉이란 작품 중에 첫 두 구절, “산은 실로 동오 땅이 아름다운데, 차를 일러 서초괴(瑞草魁)라 부르는구나. 山實東吳秀, 茶稱瑞草魁”라 한 구절에서 나왔다.
정연하게 대우를 맞춘 다산의 〈결명소〉는 비록 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그의 차 애호와 관련해서 없지 못할 중요한 글이다. 그 내용이나 일부 표현은 앞서 살펴본 혜장 스님에게 보낸 걸명시에도 그대로 보인다. 다만 원본의 소재를 알 길이 없어 보다 분명한 교감을 할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이상 살펴본 3편의 차를 청하는 글을 통해, 다산이 차에 관한 독서가 상당히 깊었고, 생활화된 음차 습관은 물론 차 제조법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음을 본다. 또 한 가지, 당시 차의 용도가 단순히 기호 식품이 아닌 체증과 설사 등의 치료약으로서의 쓰임이 컸음을 이들 시문들은 잘 보여준다. 이는 이덕리가 《동다기》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는 그대로다. 혜장과 색성 등의 승려가 따로 차를 만들고 있는 데서 보듯 이 시기 차의 제법은 초의 이전부터 이미 일정 수준의 단계로 돌입하고 있었다.
다산이 귀양을 마치고 강진을 떠나면서 다산초당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결성하여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 등을 마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여기서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다. 이밖에 다산의 걸명 편지 한통이 더 남아 있다. 강진을 떠나 마재로 돌아간 지 10년도 더 된, 다산이 69세 나던 1830년에 강진 백운동에 살던 제자 이시헌(李時憲)에게 보낸 것이다. 2005년 강진에서 개최된 제 1회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매우 중요한 자료이므로 여기에 함께 소개한다.
잠깐 눈 돌리는 사이에 세 해가 문득 지났네. 생각건대, 효성스런 마음이 드넓어 내가 미칠 바가 아닐세. 소식 끊겨 생각만 못내 아득할 뿐 안타까운 마음을 펼 길이 없네. 그간 편히 지내셨는가? 또 과거 시험을 보는 해를 맞으니, 비록 영화로운 이름에 뜻이 없다고는 하나 마땅히 글쓰기에 마음을 두고 있겠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나는 나이가 들어 병으로 실로 괴롭기 짝이 없네. 기운이 없어 문밖에도 나갈 수가 없다네. 정신의 진액은 온통 소모되어 남은 것이라고는 실낱같군. 이래서야 어찌 살아 있다 하겠는가.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가까스로 도착하였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 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 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알겠는가?
시험 보는 고을은 어디인가? 경과(慶科) 때에는 틀림없이 올라올 테니 직접 줘도 좋겠고, 그렇지 않으면 여름이나 가을에 연지(蓮池) 사는 천총(千摠) 김인권(金仁權)의 집으로 보내주게나. 즉각 내게 전해올 걸세. 이현(泥峴) 사는 조카는 청양(靑陽)에 고을 원이 되어 나간지라, 서울 안에는 부탁할만한 곳이 없어 인편에 전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을 걸세. 잠시 줄이고 다 적지 않네. 삼가 쓰네.
경인년(1830) 3월 15일 먼 친척 아무개 돈수.
(轉眄之頃, 三霜奄過. 伏惟孝思廓然, 靡所逮及. 消息頓絶, 思路遂渺, 耿耿之懷, 無以悉喩. 比來起居佳勝. 又當科年, 雖曰無意於榮名, 亦當留神於佔畢. 所做何工? 戚記年固巍矣. 病實苦哉. 委頓不能出戶外. 精神津液都已耗盡, 所存菫一縷耳. 尙何云生世也. 向惠茶封書, 間關來到, 至今珍謝. 年來病滯益甚, 殘骸所支, 惟茶餠是靠, 今當穀雨之天, 復望續惠. 但向寄茶餠, 似或粗末, 未甚佳. 須三蒸三曬, 極細硏, 又必以石泉水調勻, 爛搗如泥, 乃卽作小餠然後, 稠粘可嚥, 諒之如何? 試邑定是何邑? 慶科時, 似必上來, 袖傳爲好, 否則或夏或秋, 入送于蓮池金千摠仁權之家, 必卽傳來耳. 泥峴族姪, 年前出宰靑陽, 京中無可付之處耳. 不宜轉付於風便也. 姑略不宣. 謹狀. 庚寅三月十五日, 戚記逋頓首.)8)
겉봉에는 ‘강진백운동(康津白雲洞) 이대아서궤경납(李大雅書几敬納)’이라 적혀 있다. 발신인에는 ‘두릉후장(斗陵侯狀)’으로 적었다. 수신인 이대아는 다산이 강진 시절에 직접 가르쳤던 막내 제자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을 가리킨다. ‘척기(戚記)’라 한 것으로 보아 사제간에 앞서, 먼 친척 뻘 되는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서두에서 과거 시험에 대한 이야기로 길게 말문을 열었다. 또 지난 해 부쳐준 차를 받고 이에 대한 인사가 늦었음을 들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정작 다산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차피 머잖아 과거 보러 서울로 오게 될 테니 그때 차를 좀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나이 들어 안 아픈 데가 없다며 엄살을 있는 데로 떨고 나서야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편지 끝에서는 자칫 배달 사고라도 날까봐 전달 방법까지 꼼꼼히 적어 두었다. 다산에게 이 차떡이 얼마나 소중한 물건이었는지 실감이 난다.
특히 이 편지가 주목되는 점은 다산이 생각한 차 제조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다산이 적고 있는 차 제조 방법은 이렇다. 먼저 삼증삼쇄(三蒸三曬), 즉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그것을 절구에 빻아 곱게 가루 낸다. 분말이 거칠면 안 되고 반드시 아주 가늘어야 한다. 그런 다음 돌샘 물로 가루를 반죽해서 진흙처럼 갠다. 이를 다시 작게 떼어 떡으로 만들어 굳힌다.
다산은 이 차를 ‘차병(茶餠)’, 즉 차떡으로 표기했다. 하지만 쌀가루 같은 곡물을 섞은 식용의 떡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병차(餠茶) 즉 떡차를 가리킨다. 당시 다산이 즐겨 마신 차는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덖음 잎차가 아닌 여러 번 쪄서 말리는 과정을 되풀이한 후 분말을 내어 반죽해 말린 떡차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2006년 10월 강진에서 열린 제 2회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에 전시된 또 다른 편지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다산이 우이도(牛耳島)의 어떤 사람에게 보낸 감사 편지에서 상대가 전복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로 차떡 50개를 선물로 보내는 내용이 실려 있다.9)
다산의 제다법에 대해서는 그간 다계의 이견이 분분했다. 일찍이 다산이 〈차운범석호병오서회십수간기송옹(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이란 시의 둘째 수에서 “지나침을 줄이려 차는 구증구포(九蒸九曝)를 하고, 번다함을 싫어해 닭은 한 쌍만 기른다네. 洩過茶經九蒸曝, 厭煩鷄畜一雄雌”10)라 한 이후,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구증구포가 다산 제다의 비법인양 알려져 지금도 이를 고수하는 것을 정법으로 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구증구포의 목적을 ‘설과(洩過)’ 즉 지나침을 줄이려는데 있다고 했는데, 이는 차의 강한 성질을 감쇄시켜 약용으로 쓰기 위해서이다.
위 시에서 다산이 말한 구증구포는 여러 차례 증포한다는 관념적인 표현에 불과하고, 그것도 가마솥에 덖은 녹차 아닌 절구로 찧어 만든 떡차를 전제로 한 언급이었다. 이번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다산이 최종적으로는 구증구포가 아닌 삼증삼쇄의 방식을 권장했고, 가루를 곱게 빻아 돌샘물로 반죽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그간의 여러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 편지 한통이야 말로 우리 차 문화사의 잊혀진 고리를 이어주는 금쪽같은 정보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이상 다산의 걸명 시문을 살펴 보았다. 혜장과 이시헌에게 보낸 내용이고, 유배 초기부터 귀양 후 세상을 뜨기 전까지 다산의 차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음을 이들 글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Ⅲ. 추사의 걸명 시문
추사 김정희는 초의 스님에게 보내는 걸명 편지를 여러 통 남겼다. 이밖에도 그는 하동 쌍계사의 관화(貫華)와 만허(晩虛) 스님에게도 차를 청하는 시문을 지었다.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걸명 또는 사다(謝茶)와 관련된 내용이 너무 많아 전문을 싣지 않고 해당 부분만 보이기로 한다.11)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는 대개 1838년부터 1850년 전후까지 십여 년 간 부친 내용이다. 이 가운데 직접 차와 관련된 내용만 모두 11통에 달한다. 이하 살피는 편지는 문집에 수록된 차례대로이다. 대개 연대순일 것으로 판단한다.
[1] 다품(茶品)을 이렇게 특별히 남겨 주니 마음이 몹시 상쾌하구려. 매번 볶는 방법이 조금 지나쳐서 정기가 삭는듯한 느낌이 있소. 만약 다시 만든다면 불기운을 조심해서 조절하는 것이 어떻겠소. 무술년(1838) 초파일
(茶品荷此另存, 甚覺醒肺. 每炒法稍過, 精氣有鎖沈之意. 若更再製, 輒戒火候, 如何如何. 戊戌 佛辰)12)
[2] 차포(茶包)는 과연 훌륭한 제품이오. 능히 차의 삼매경을 투득하여 이르렀구려.
(茶包果是佳製, 有能透到茶三昧耶.)13)
처음 두 통은 추사가 초의와 만난 지 23년 째 되던 해인 1838년에 써 보낸 것이다. 추사가 초의와 처음 만난 것은 1815년이었다. 현재 남은 편지가 없을 뿐, 그 사이에도 차와 관련된 수많은 글들이 오갔을 것이 분명하다.
[1]에는 초의가 부쳐온 차를 받고서, 차맛이 너무 세서 정기(精氣)가 삭는 느낌이 있으니 다음에는 화후(火候)를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주문한 내용이다. [2]는 [1]과 달리 아주 흡족하게 잘 만들어진 차를 보고, 차의 삼매를 투득한듯하다고 추켜세웠다.
[3] 지난 번 보내준 차떡은 벌써 다 먹었소. 물리지도 않고 요구만 하니 많이 베풀어 주기야 어찌 바라겠소. 다 미루고 이만 줄이오. 정미년(1847) 유두날.
(前惠茶餠, 已喫盡. 無厭之求, 其望大檀越. 都留不宣. 丁未流頭)14)
[4] 원래 편지에 또한 차를 부탁하였더랬소. 이곳에서는 차를 얻기가 몹시 어려운 줄을 대사도 잘 아실게요. 대사가 손수 법제한 차는 당연히 해마다 보내주었으니 굳이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고, 절에서 만든 소단차(小團茶) 30, 40덩이를 조금 좋은 것으로 가려서 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 소동파가 말한 추아차(麤芽茶) 또한 부처님 전에 올리기는 충분하실 게요. 만약 박생이 다시 올 때를 기다린다면 너무 늦을 염려가 있으니 먼저 편지 보내는 편에 김용성의 처소로 속히 부쳐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原書亦以茶懇矣. 此中茶事甚艱, 師所知耳. 師之自製法茶, 當有年例, 不必更言. 寺中所造小團三四十片, 稍揀其佳, 惠及切企. 坡公所云麤芽茶, 亦足充淨供耳. 若待朴生再來時, 恐有太婉晩之慮. 先圖信便. 於金瑢性處速付, 如何如何.)15)
[5] 차에 관한 일은 앞서 편지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였소. 소단(小團) 수십 덩이로는 몇 차례 먹을거리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오. 100원을 한정해서 살 수 있다면 좋겠소. 거듭 깊이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茶事前書亦有縷及. 而小團數十片, 恐不支幾時供. 限百圓可以買取則似好. 再深商之, 如何如何.)16)
[3]~[5]는 초의가 만든 떡차[茶餠] 또는 소단차(小團茶)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 보내준 떡차를 다 먹고 다시 더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이 [3]이다. 스스로도 차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다고 술회했다. [4]의 내용이 재미있다. 해마다 초의가 만들어 보내주던 법제차는 당연한 것이니 그대로 보내주고, 여기에 더 보태서 절에서 만든 소단차 30, 40개를 더 보내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부처님 전에 바칠 차는 좀 못해도 괜찮을 테니, 자신에게는 그 중 좋은 것을 골라서 보내달라는 얌체 같은 주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5]는 [4]에서 소단차 몇 십 덩이 보내달라고 한 것을 번복하며, 아예 1백원 어치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십 덩이라야 몇 번 먹지도 않아서 다 떨어지고 말 것을 염려한 것이다. [4]와 [5]는 문집에는 빠져있다.
[6] 병중에 연거푸 스님의 편지를 보니, 한결 같이 혜명(慧命)을 이어주는 신부(神符)라 하겠소. 정수리를 적셔주는 감로(甘露)라 한들 어찌 이보다 더하기야 하겠소. 보내주신 차는 병든 위장을 시원스레 낫게 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뼈에 사무치오. 하물며 이렇듯 침돈(沈頓)한 중임에랴! 자흔과 향훈 스님이 각각 먼데까지 보내주니, 그 뜻이 진실로 두텁구려. 날 대신해서 고맙다는 뜻을 전해 주시구려. 향훈 스님이 따라 박생에게 준 잎차는 소동파의 추아차 못지 않게 향기와 맛이 아주 훌륭합디다. 다시금 날 위해 한 포를 청해주는 것이 어떻겠소? 마땅히 앓는 중에라도 따라 졸서로 작환(雀環)의 보답을 할 터이니, 아울러 향훈 스님에게 이러한 뜻을 알려 즉시 도모해 주시구려.
(病枕連見禪椷, 是一續慧命之神符. 灌頂甘露, 何以多乎? 茶惠夬醒病胃, 感切入髓. 況際此沈頓之中耶? 自欣向熏之各有遠貽, 其意良厚. 爲我代致款謝也. 熏衲之另贈朴生之葉茶, 恐不下於坡公麤茶芽. 香味絶佳, 幸更爲我, 再乞一包如何. 當於病間, 另以拙書爲雀環之報. 並及此意於熏衲, 而卽圖之.)17)
[7] 육차(六茶)가 이 갈급한 폐를 적셔 줄 수 있으나, 너무 적구려. 또 향훈 스님과 더불어 진작에 차를 주기로 한 약속을 정녕하게 하였는데, 일창일기(一槍一旗)를 보내주지 않으니 안타깝구려.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전달하여 그 차 바구니를 뒤져서라도 봄 안으로 보내주면 좋겠소. 글씨 쓰기 어렵고 인편이 바빠 예를 갖추지 못하오. 새차는 어찌하여 돌샘과 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면서 애당초 먼 데 있는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요? 아프게 몽둥이 삼십 방을 맞아야겠구료.
(六茶可以霑此渴肺, 但太略. 又與熏衲曾有茶約丁寧, 不以一槍一旗相及, 可歎. 須轉致此意, 搜其茶篋, 以送於春禠, 爲好爲好. 艱草便忙, 不式. 新茶何以獨喫於石泉松風之間, 了不作遠想耶? 可以痛棒三十矣.)18)
[6]은 초의가 보내준 차를 받고 병중에 감사의 뜻을 표한 내용이다. 초의의 제자인 자흔과 향훈 두 스님도 따로 추사에게 자신들이 만든 차를 보내왔다. 향훈 스님은 특별히 잎차를 만들어 보냈다. 이로 보아 당시 이들이 만든 차가 잎차와 떡차 두 종류 모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른 차는 잎차로 만들고, 이후로는 보관을 위해 떡차로 만들었던 듯 하다. 보편적으로 마셨던 차는 떡차였다. 추사는 초의와 자흔과 향훈의 차를 받자마자, 다시 자신의 글씨와 맞바꾸자며 향훈의 잎차 한 포를 더 구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7]에서는 초의의 육차(六茶)를 받고 양이 너무 적다고 투덜댔다. 육차(六茶)는 어떤 차인지 알 수 없다. 또 향훈이 차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하며, 그의 차 바구니를 뒤져서라도 빼앗아 보내달라고 했다. 또 혼자 새 차를 마시면서 자신에게는 묵은 차만 보내니 저 옛날 덕산 스님의 몽둥이 삼십 방을 맞아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8] 편지를 보냈건만 한 번의 답장도 받지를 못했구려. 생각건대 산 속에 바쁜 일이 필시 없을 터인데 세상 인연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여, 내가 이처럼 간절한데도 먼저 금강(金剛)으로 내려주시는 겐가? 다만 생각해보니 늙어 머리가 다 흰 나이에 갑작스레 이와 같이 하니 참 우습구료. 기꺼이 사람을 양단간에 딱 끊기라도 하겠다는 겐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요? 나는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다만 차에 얽힌 인연만은 차마 끊어 없애지 못하고, 능히 깨뜨릴 수가 없구려. 이번에 또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단지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함께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할과 덕산의 몽둥이를 받게 될 터이니, 이 한 번의 할과 한 방의 몽둥이는 수백 천겁이 지나도 피해 달아날 구멍이 없을게요. 다 미루고 이만 줄이오.
(有書而一不見答, 想山中必無忙事, 抑不欲交涉世諦. 如我之甚切, 而先以金剛下之耶. 第思之, 老白首之年, 忽作如是, 可笑. 甘做兩截人耶? 是果中於禪者耶? 吾則不欲見師, 亦不欲見師書. 唯於茶緣, 不忍斷除, 不能破壞. 又此促茶, 進不必書, 只以兩年積逋並輸. 無更遲悞可也. 不然馬祖喝德山棒, 尙可承當. 此一喝此一棒, 數百千劫, 無以避躱耳. 都留不式.)19)
[9] 햇차는 몇 근이나 따시었소. 남겨두었다가 장차 내게 주시겠소? 자흔(自欣)과 향훈(向熏) 등 여러 스님의 처소에서도 일일이 뒤져내어 빠른 인편에 함께 보내주시오. 혹 한 스님 것만 보내주어도 괜찮겠소. 김세신도 편안하겠지요? 궁금합니다. 계절 부채를 부쳐 보내오. 나누어 보관하시구려.
(新茗摘來幾斤. 留取將與我來耶. 欣熏諸衲處, 一一討出, 並寄速便. 或專送一衲, 未爲不可耳. 金世臣亦安, 念念. 節箑寄去, 分之留之.)20)
[8]은 두 해 째 초의 스님과 소식이 끊겨 차를 얻지 못하게 되자, 이제 나와는 영영 관계를 끊을 셈이냐고 말하며, 보고 싶지도 않고 편지도 필요 없으니 딱 잘라 2년치 밀린 차나 지체 없이 보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조 스님의 할과 덕산 스님의 몽둥이로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읽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정겨운 편지다. [9]에서도 햇차를 좀 보내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흔 향훈 두 스님의 차도 수소문해서 많을수록 좋으니 있는대로 부쳐달라고 적었다. 추사의 차 욕심은 끝도 없다. 초의도 추사의 끝없는 토색(?)에 자못 질린 눈치다.
[10] 중이 와서 초의의 편지를 받았고, 또 다포(茶包)도 받았소. 이곳의 샘물 맛은 관악산의 한 지맥에서 흘러나온 것이어서 두륜산 샘물과는 어느 것이 더 나을 지 모르겠으나, 또한 열에 서넛 쯤은 된다오. 서둘러 부쳐온 차를 시험해보니, 샘물도 좋고 차도 좋아 얼마간 기쁜 인연이라 하겠네. 이것은 차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편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세. 그렇다면 차가 편지보다 더 낫단 말인가? 게다가 근자에는 계속해서 일로향실(一爐香室)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어떤 좋은 인연이라고 있는 게요? 어찌 이런저런 갈등을 부숴버리고 지팡이 하나 짚고 먼 곳으로 날아와 이 차의 인연을 함께 하지 않는 게요? 게다가 근래에는 자못 참선의 즐거움에 대해 점입가경의 묘가 있으나 더불어 이 묘체를 함께 할 이가 없구려. 대사와 더불어 함께 눈썹을 치켜 세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런 지 모르겠소. 대략 졸서(拙書)가 있길래 부쳐 보내니 거두어 주시구려. 우전차의 잎은 몇 근이나 따시었소? 언제나 이어 보내주어 이 차에 대한 욕심을 진정시켜 주시려는가?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오. 이만 줄이오. 향훈에게도 한 장을 허락하니 전해주시면 고맙겠소.
(僧來得草緘, 又得茶包. 此中泉味, 是冠岳一脉之流出者, 未知於頭輪, 甲乙何如, 亦有功德之三四. 亟試來茶, 泉佳茶佳, 是一段喜懽緣. 是茶之使, 而非書之使. 茶甚於書耶. 且審近日連住一爐香, 有甚勝緣. 何不破諸藤葛, 一笻遠飛, 共此茶緣也. 且於近日頗於禪悅, 有蔗境之妙, 無與共此妙諦, 甚思師之一與掀眉. 未知以遂此願耶? 略有拙書寄副, 收入也. 雨前葉, 揀取幾斤耶? 何時續寄, 鎭此茶饞也. 日以企懸. 不宣. 向熏許一紙, 幸轉付.)21)
[11] 병든 천한 몸은 그 사이 설사병을 앓아 진기를 다 빼앗기고 말았소. 세상 길의 괴로움이 이러하단 말이오! 다행이 차의 힘을 빌어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소. 이는 한결같이 사방에 없는 무량한 복덕이라 하겠소. 가을 뒤에 계속 부치는 것은 싫증 없는 바람이오. 향훈이 만든 차 또한 인편에 따라 보내주면 좋겠소. 마침 가는 인편이 있길래 대략 적을뿐 자세히 적지는 못하오. 이만 줄이오.
(賤痒間經糗寫, 眞元敓下, 世趣之苦, 乃如是耶. 幸因茗力, 得延煖觸. 是一四方空之無量福德. 秋後繼寄, 是無厭之望. 熏製亦使隨及爲可. 適因轉禠, 略及不能悵皇, 姑不宣.)22)
[10]은 초의가 부쳐온 차를 과천의 샘물로 끓이면서, 두륜산 일지암 유천(乳泉)의 물맛과 견주었다. 한번 올라와서 선담(禪談)이나 나누자며, 끝에 가서는 우천차를 몇 근 땄느냐며 계속 보내주어 차에 기갈 든 마음을 진정시켜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11]에서도 설사병을 차 덕에 간신히 가라앉혔다며 고마움을 표한 뒤, 가을 이후에도 초의와 향훈의 차를 계속해서 더 보내달라고 주문했다.
이런 추사의 끊임없는 차 요구가 초의도 괴로웠을 것이다. 때로 편지를 연거푸 받고도 짐짓 모른 체 답장을 하지 않다가 몽둥이를 맞아야겠다는 으름장을 받기도 하고, 보내주자 마자 염체 없이 더 보내달라는 요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초의의 차만으로 부족해 자흔과 향훈 같은 초의 스님의 제자에게까지 글씨를 미끼로 차를 요구했다. 추사의 차에 대한 벽과 애호가 어떠했는지를 이들 편지는 너무도 잘 보여준다.
아래 시 또한 초의에게 보낸 걸명시다. 다소 긴 제목은 이렇다. 〈아침에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르고, 저녁에도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렀다. 마치 학질을 앓고 난 것 같다. 장난 삼아 초의 상인에게 주다(朝爲一人所困嬲, 暮爲一人所困嬲. 如經瘧然, 戱贈草衣上人).〉
하루 걸러 앓으니 학질로 괴로운데
아침엔 더웠다가 저녁 땐 오한 드네.
산 스님 아무래도 의왕(醫王) 솜씨 아끼는 듯
관음보살 구고단(救苦丹)을 빌려주니 않누나.
鬼瘧猶爲隔日難 朝經暮又熱交寒
山僧似惜醫王手 不借觀音救苦丹23)
학질을 앓아 오한이 들고 나고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은 찾아와 끊임없이 글씨를 써달라고 조른다. 견딜 수가 없다. 이럴 때 더운 차 한 잔을 마시면 오한이 말끔히 가실 것만 같다. 하지만 초의는 좀체 의왕(醫王)의 손길을 건네 관음보살의 구고단(救苦丹) 즉 차를 보내 줄 줄 모른다고 푸념했다. 어서 좋은 차를 아끼지 말고 보내달라고 요구한 내용이다.
또한 차에 대한 답례로 추사는 계절 부채나 글씨를 보내곤 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걸작 〈명선(茗禪)〉도 바로 차를 받고 보낸 답서이다. 글씨 옆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초의가 자신이 만든 차를 부쳐왔는데 몽정차(蒙頂茶)나 노아차(露芽茶)에 못지 않았다. 이를 써서 보답한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를 써서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쓰다.
(艸衣寄來自製茗, 不減蒙頂露芽, 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24)
이 또한 걸명에 이은 사다(謝茶)의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글씨를 받고 초의로서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추사는 초의와 자흔, 향훈 스님의 차만으로는 부족해서 쌍계사의 여러 스님들에게도 끊임없이 차를 구해 마셨다.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보자.
다품이 과연 승설차(勝雪茶)의 남은 향기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쌍비관(雙碑館)에서 이 같은 차를 보았는데, 우리나라로 와서는 40년 동안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영남사람이 지리산의 스님에게서 이를 얻었답니다. 산승 또한 개미가 금탑을 모으는 것 같이 하여 실로 많이 얻기가 어렵습니다. 또 내년 봄에 다시 구해보라 하겠으나, 승려들이 모두 깊이 비밀로 하며 관(官)을 두려워하여 쉬 내놓지를 않는다는군요. 하지만 그 사람은 스님들과 좋게 지내니, 그래도 도모할만 합니다. 그 사람이 제 글씨를 아주 아끼니, 돌고 돌아 교환하는 방법도 있을 겝니다.
(茶品果是勝雪之餘馥賸香. 曾於雙碑館中, 見如此者, 東來四十年, 再未見之. 嶺南人得之於智異山僧, 山僧亦如蟻聚金塔, 實難多得. 又要明春再乞, 僧皆深秘, 畏官不易出. 然其人與僧好, 尙可圖之. 其人甚愛拙書, 有轉轉兌換之道耳.)25)
중국 옹방강의 쌍비관에서 마신 차맛을 40년 만에 만나보았다며 감격한 내용이다. 지리산 쌍계사의 스님이 만든 차를 영남 사람에게서 얻어 마시고, 이를 다시 권돈인에게 조금 나눠주었던 모양이다.
이 지리산 승려의 이름은 관화(貫華)와 만허(晩虛)였다. 관화에게 준 시가 2수, 만허에게 준 시가 1수씩 《완당전집》에 실려 있다. 차례로 읽어 본다.
한 스님 일천 산서 구해온 것 얻으니
사나운 용 턱 밑에서 우레 칠 때 딴 것일세.
솔 소리 바람 힘이 큰 허공에 서렸으니
화엄이라 법계로 고이 돌려 보내노라.
一衲千山得得來 獰龍頷下摘颷雷
松聲風力盤空大 好遣華嚴法界廻26)
관화 스님에게 준 이 시는 지리산 여러 골짜기를 다니며 딴 차를 받고 나서 감사의 뜻을 담아 보낸 사다(謝茶)의 내용을 담았다. 우레 소리를 들으며 딴 차를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은 육우의 《다경》이래로 늘 하는 말이다. 관화 스님이 보내준 차를 끓이니 차를 딸 때 함께 깃든 솔바람 소리가 허공에 가득 서리는 것만 같다고 했다. 그래서 화엄법계로 고마움의 인사를 돌려보낸다고 했다. 얼마나 멋진 인사인가.
아래 시 또한 관화 스님에게 준 시인데, 제목이 좀 길다. “차에 관한 일을 이미 쌍계사에 부탁하고, 또 광양에서 나는 동지(冬至) 전에 일찍 채취한 김도 관화와 약속하여, 먹거리로 부치도록 하였다. 모두 구복(口腹) 간의 일이라 붓을 놓고 한번 웃는다(茶事已訂雙溪, 又以光陽至前早採海衣, 約與貫華. 使之趁辛盤寄到. 皆口腹間事, 放筆一笑.).”
쌍계사의 봄빛에 차 인연은 길고 길어
육조(六祖) 고탑 광휘 아래 으뜸 가는 두강차(頭綱茶)라
욕심 많은 늙은이 곳곳마다 욕심 부려
밥상에다 향기로운 김을 또 약속했네.
雙溪春色茗緣長 第一頭綱古塔光
處處老饕饕不禁 辛盤又約海苔香27)
2구의 ‘고탑(古塔)’은 관화 스님이 쌍계사 육조탑(六祖塔) 아래서 살고 있었으므로 한 말이다. 해마다 쌍계사에서 봄차를 얻어 마셨는데, 최상품의 두강차(頭綱茶)라고 했다. 거기다 더하여 동지 전에 일찍 딴 최상품의 김까지 함께 보내달라고 부탁해놓고, 스스로 계면쩍어 지은 시다.
만허 스님 또한 관화와 같이 거처하던 승려로, 추사는 그에게서도 차를 구해 먹었다. 만허에 대해 추사는 이렇게 적었다.
만허는 쌍계사 육조탑 아래서 살고 있다. 차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 차를 가져와서 주는데, 용정차나 두강차라 해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이다. 향적주(香積廚) 가운데 이러한 무상의 묘미는 없을 듯하다. 인하여 찻종지 한 벌을 주어 육조탑 앞에 차를 공양케 했다.
(晩虛住雙溪寺之六祖塔下. 工於製茶, 携茶來餉, 雖龍井頭綱, 無以加也. 香積廚中, 恐無此無上妙味. 仍以茶鍾一具贈之, 使之茗供於六祖塔前.)28)
만허 스님이 직접 법제한 차를 맛본 뒤 최상의 찬사로 기린 내용이다. 추사는 만허를 위해 시를 써주고 글씨를 주는 한편으로 중국에서 가져온 찻 종지 한 벌까지 선물로 주어 육조탑에 올리는 헌다(獻茶)에 쓰게 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이상 살펴본 대로 추사는 초의와 그의 제자 자흔과 향훈, 그리고 쌍계사의 관화와 만허 스님 등에게서 차를 구해 마셨다. 추사가 이들에게 보낸 시문은 대부분 걸명과 사다의 내용이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한정 없이 빼앗아 가면서도, 글씨를 써서 보내고 다구(茶俱)를 답례로 보내는 등 차맛에 걸맞는 예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여러 편지는 우리 차 문화사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을 드나들던 제자 오경석 등도 중국에서 귀한 용정차 등을 구해다가 추사에게 가져다주었다.29) 추사가 마신 차의 양은 실로 적지 않은 것이었다. 거의 매일 차와 더불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에 귀양 가 있을 적에는 차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아예 그곳에서 빈랑(檳榔) 잎을 가공해 황차(黃茶)를 만들어 마시기까지 할 정도였다.30) 추사의 차 사랑은 이렇듯 유난스럽고 특별했다.
Ⅳ. 기타 제가의 걸명 시문
다산과 추사 외에도 걸명 시문을 남긴 이가 있다. 몇 편 더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다산의 제자 황상(黃裳, 1788-1863?))이 초의 스님에게 보낸 〈걸명시(乞茗詩)〉가 흥미롭다.
육우(陸羽)가 차 잘함은 이름만 들려오고
건안차(建安茶)의 승부는 소문만 전해지네.
승뢰(乘雷)니 배수(拜水)니 한갖 귀만 시끄러워
초의 스님 무리 중에 우뚝함만 못하도다.
댓닢을 함께 볶아 새 방법 사용하니
북원(北院)의 이후로 집대성을 하였다네.
명선(茗禪)이란 좋은 이름 학사께서 주시었고
-추사가 명선(茗禪)이란 호를 주었다.
초의차(草衣茶)란 그 이름을 선생에게 들었었지.
-유산(酉山)은 차를 잘하는 사람이다. 이를 일러 초의차라고 했다.
아계(我溪)가 남령(南零)에게 미치진 못했어도
오히려 전천(箭泉) 아래 능히 살만 하였다네.
-석가여래가 태자였을 때, 백리고(百里鼓)를 세워놓고 살 한대를 쏘아 북 일곱 개를 꿰뚫었다. 살이 땅에 박히자 샘물이 솟아났다. 병든 사람이 마시면 모두 나았다. 전천이라고 이름했다.
청하노니 자용향(紫茸香)과 어안송풍(魚眼松風) 아끼지 말고
티끌세상 찌든 속을 세 번 네 번 씻겨주소.
陸羽善茶但聞名 建安勝負獨傳聲
乘雷拜水徒聒耳 不如草師搴衆英
竹葉同炒用新意 北苑以後集大成
茗禪佳號學士贈-秋史贈茗禪之號
草衣茶名聽先生-酉山茶之善者, 謂之草衣茶
我溪不及南零者 猶能可居箭泉下
-如來太子時, 竪百里鼓, 放一箭透七鼓, 箭入地, 泉水湧出, 病人飮則皆愈, 名箭泉.
請君莫惜紫茸香魚眼松風 塵肚俗腸三廻四廻瀉31)
우레 소리를 들으며 딴 승뢰(乘雷)에다 물에 절을 올리고 긷는 배수(拜水) 등 차에 얽힌 이런 저런 고사를 끌어와서 초의차 위에 집대성의 영예를 얹어 기렸다. 한 가지 특이한 내용은 5구에서 보듯 초의가 차를 만들 때 댓잎을 찻잎과 함께 볶는 새로운 방법을 썼다는 사실이다. 초의차의 제다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원문의 주석에서 ‘명선(茗禪)’이 추사가 초의를 위해 지어준 호였음을 밝힌 점이 중요하다. 추사의 글씨 명선이 서체를 떠나 추사의 것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증거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아예 초의가 만든 차에다 ‘초의차’란 명칭을 붙여줄만큼 초의의 차는 경향간에 이름이 높았다.
아계(我溪)와 남령(南零)은 모두 차 끓이기에 좋은 물로, 장우신(張又新)이 지은 《전다수기(煎茶水記)》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끝에 가서 황상은 자용향(紫茸香)과 어안송풍(魚眼松風), 즉 좋은 차를 아끼지 말고 베풀어 주어 티끌세상의 찌든 속을 서너 번 깨끗하게 씻겨 달라고 부탁했다.
황상은 초의에게 보내는 걸명시를 한 수 더 남겼다.
스님의 소식을 물어보는 뜻
힘없고 아파서 신음해서지.
어찌 해야 능히 이것 없게 해볼까
고희가 문득 앞에 이르렀구려.
차는 힘을 배가 시켜 정신 차리고
대나무 그늘 이뤄 병을 낫우리.
저승에 갈 날이 머지 않으니
홀로 슬퍼 다만 소식 띄워본다네.
比丘消息意 劣疾所呻吟
何以能無此 古稀却到今
傳神茶倍力 蘇病竹成陰
不遠由旬地 自憐但送音32)
아파 힘이 없어 끙끙 앓다가 스님의 소식을 물어볼 생각을 했노라 했다. 어째서 스님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 아픈 것을 낫게 해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5구의 ‘차배력(茶倍力)’이 답이다. 차가 힘을 배가시켜주므로 차의 힘을 빌어야만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겠다는 말이다. 대나무 그늘이야 집 둘레에 있는 것이니 따로 청할 것이 못 된다. 이제 갈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말로 시를 맺었다. 요컨대는 아프고 힘들어 죽겠으니, 고희를 앞둔 늙은이가 힘을 낼 수 있도록 차를 좀 달라는 얘기인 셈이다. 겉으로 차를 달란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으니, 자못 수사의 배치가 묘하다.
다음은 추사의 동생인 김명희(金命喜, 1788-?)가 초의의 차를 받고 나서 감사의 뜻으로 보내 준 〈사다(謝茶)〉란 작품이다. 걸명시는 아니지만 내용이 흥미로와 여기서 함께 살펴보겠다. 시 끝에 후기가 적혀 있다. 이것을 먼저 읽어 보자.
학질을 앓아 갈증이 심한지라 신령한 차를 찾았다. 요즘 북경 시장에서 사온 것은 비단 주머니에 수놓은 천으로 포장해서 한갓 겉꾸밈만 숭상할 뿐 거친 가지에 뻣뻣한 잎이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이러한 때 초의가 차를 보내왔는데, 응조차(鷹爪茶)와 맥과차(麥顆茶)가 다 곡우 이전에 딴 좋은 제품이었다. 한 사발을 다 마시기도 전에 문득 번열이 가시고 갈증이 해소되어, 전씨(顓氏)의 갑옷은 이미 저만치 물러가버렸다. 고려 때는 차를 심어 공물로 바치게 했고, 내사품(內賜品)은 모두 차를 썼다. 5백년 이래로 우리나라에 차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차를 채취해서 볶는 묘함이 삼매에 든 것은 초의에게서 처음으로 얻었다. 공덕이 참으로 한량없다 하겠다. 산천 노인이 병든 팔뚝을 시험하다.
(病瘧渴甚, 乞靈茗椀. 近日燕肆購來者, 錦囊繡包, 徒尙外飾, 麄柯梗葉, 不堪入口. 此時得艸衣寄茶, 鷹爪麥顆, 儘雨前佳品也. 一甌未了, 頓令滌煩解渴. 顓氏之冑, 已退三舍矣. 麗朝令植茶土貢. 內賜皆用茶. 五百年來, 不識我東有茶, 採之焙之, 妙入三昧, 始於艸衣得之. 功德眞無量矣. 山泉老人試病腕.)
학질을 오래 앓다가 초의가 보내온 우전차를 마시자 금세 번열이 가시고 갈증이 해소되어 오한 때문에 겹겹이 갑옷처럼 껴입었던 옷을 다 벗어 버릴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호화로운 포장의 중국차들이 조선에 많이 들어왔으나, 겉만 번드르할 뿐 실제 먹을 만한 것은 드물었던 모양이다. 이점은 오늘날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고려 이후 차를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차의 법제로 삼매의 경지에 든 것은 초의가 처음이라고 추켜세웠다. 다음은 이어지는 시다.
이 늙은이 평소에 차 즐기지 않았는데
하늘이 미워하여 학질에 걸렸다네.
열나는 것 걱정 않고 갈증 심함 염려터니
급히 풍로(風爐) 가져다가 차싹을 달인다네.
연경(燕京)에서 들여온 것 가짜가 많아서
향편(香片)이니 주란(珠蘭)이니 비단 갑에 담았구나.
듣자니 좋은 차는 고운 여인 같다는데
이 계집종 재주 용모 추하기 짝이 없다.33)
초의 스님 갑자기 우전차(雨前茶)를 부쳐오니
대껍질 싼 응조차(鷹爪茶)를 손수 직접 끌렀다네.
막힘 뚫고 번열(煩熱) 씻음 그 공이 대단하여
우레 같고 칼 같으니 어이 이리 웅장한가.
노스님의 차 고르기 부처를 고르듯 해
일창일기(一槍一旗) 여린 싹만 엄히 지켜 가렸다네.
덖어 말림 솜씨 좋아 두루 통함 얻으니
향기와 맛을 따라 바라밀(波羅蜜)로 드는구나.
이 비법 5백년에 비로소 드러나니
옛 사람 그때보다 내 복이 훨씬 낫네.
그 맛은 순유(純乳) 보다 훨씬 나음 알겠거니
부처님 계실 적에 나지 못함 유감 없네.
차가 이리 좋으니 어이 아끼잖으리오
노동(盧仝)의 일곱 잔도 오히려 부족하다.
가벼이 외인에게 말하지 마시게나
산 속의 차에 대해 세금 매김 염려되니.
老夫平日不愛茶 天憎其頑中瘧邪
不憂熱殺憂渴殺 急向風爐瀹茶芽
自燕來者多贋品 香片珠蘭匣以錦
曾聞佳茗似佳人 此婢才耳醜更甚
艸衣忽寄雨前來 籜包鷹爪手自開
消壅滌煩功莫尙 如霆如割何雄哉
老僧選茶如選佛 一槍一旗嚴持律
尤工炒焙得圓通 從香味入波羅蜜
此秘始抉五百年 無乃福過古人天
明知味勝純乳遠 不恨不生佛滅前
茶如此好寧不愛 玉川七椀猶嫌隘
且莫輕向外人道 復恐山中茶出稅34)
고운 여인 같아야 할 차가 못난 계집종 꼴이라 하여 포장만 요란한 중국차를 나무랐다. 초의 스님이 만든 우전차는 차잎을 대껍질로 포장하고, ‘응조차(鷹爪茶)’란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응조(鷹爪)는 매발톱이니, 곡우 이전의 창(槍)이 다 펴지지 않은 첫잎을 따서 만든 차를 가리킨다. 부처님 고르듯이 일창일기(一槍一旗)만을 엄선하여 덖어 말리니 맛이 순유(純乳)보다 부드럽고 달콤하다고 했다. 이 시를 받고 초의도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좀 길지만 앞서 읽은 많은 걸명시의 수신자였던 만큼 그의 시 한 수를 여기서 읽어본다.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차를 아꼈나니
차는 마치 군자 같아 성품에 삿됨 없다.
인간이 차 만들어 대충 맛을 다 보고서
멀리 설령(雪嶺) 들어가서 노아차(露芽茶)를 채취했지.
이때부터 법제하여 제품(題品)을 얻어서는
옥병에 가득 담아 갖은 비단 꾸몄다네.
황하의 맨 위 근원 그 물을 찾고 보니
여덟 덕을 두루 갖춰 더욱더 훌륭하다.
-《서역기(西域記)》에 말했다. “황하의 근원은 아욕달지(阿褥達池)에서 처음 나온다. 물이 여덟 가지 덕을 머금어,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냄새나지 않고, 마실 때 알맞으며, 마신 뒤에 병이 나지 않는다.”
가볍고 부드러움 깊이 길어 시험하매
참된 정기 조화로와 체(體)와 신(神)이 열리누나.
-《다서》〈천품(泉品)〉에 말했다. “차란 것은 물의 신이고, 물은 차의 몸체다. 참 물이 아니고서는 그 신을 드러낼 수가 없고, 좋은 차가 아니라면 그 실체를 살피지 못한다.
거친 기운 다 없애자 정기(精氣)가 스며들어
큰 도를 이뤄 얻음 어찌 멀다 하겠는가.
영산(靈山)으로 가져와서 부처님께 봉헌하니
차 달이며 부처 율법 더욱 깊이 살피누나.
차의 참된 체성(體性)은 묘한 근원 다했거니
-범어로 ‘알가화(閼加華)’는 차를 말한다.
묘한 근원 집착 없어 바라밀(波羅蜜)이 그것일세.
-《대반야경》에 말했다. “일체의 법에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아아! 나는 삼천년이 지난 후에 태어나
물결 소리 아득하다 선천(先天)과 멀어졌네.
묘한 근원 묻자 해도 물을 곳이 바이 없어
부처님 열반 전에 나지 못함 한탄 했지.
-니원(泥洹)은 열반과 뜻이 같다.
예전의 차 사랑을 능히 씻지 못하여서
우리 땅에 가져오니 속좁음을 웃어 본다.
옥병에 비단 싸서 봉한 것을 풀어서는
지기(知己)에게 먼저 보내 단세(檀稅)를 거두시게.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人間艸茶差嘗盡 遠入雪嶺採露芽
法製從他受題品 玉壜盛裹十樣錦
水尋黃河㝡上源 具含八德美更甚
西域記云: 黃河之源, 始發於阿褥達池. 水含八德, 輕淸冷軟美, 不臭, 飮時調適, 飮後無患.
深汲輕軟一試來 眞精適和體神開
茶書泉品云: 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莫顯其神, 非精茶莫窺其體.
麤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
持歸靈山獻諸佛 煎點更細考梵律
閼加眞體窮妙源 妙源無着波羅蜜
梵語閼加花言茶. 大般若經云: 於一切法無所執着, 故名波羅蜜.
嗟我生後三千年 潮音渺渺隔先天
妙源欲問無所得 長恨不生泥洹前
泥洹涅槃義同.
從來未能洗茶愛 持歸東土笑自隘
錦纏玉壜解斜封 先向知己修檀稅35)
원문 중간중간에 주석을 붙인 것도 그렇고, 차의 지나온 내력과 효능에 대해 설명한 것이 《동다송》과 흡사하다. 이 시는 제 2의 〈다송〉으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다. 중국에서 차의 유래를 말하고, 거칠고 더러운 기운을 말끔히 씻어주는 차의 효능도 기렸다. 뒷부분은 앞서 위의 시에서 김명희가 형편없이 질이 나쁜 중국차 이야기 한 것을 되받아, 자신은 3천년 뒤에 태어나 원래 중국의 차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니, 그들이 만든 차를 자신에게 보내주면 그것을 보고 그들의 차 제조법에 대해 공부하겠노라고 말한 내용이다.
Ⅴ. 맺 음 말
이상 다산과 추사, 그리고 황상과 김명희 등의 걸명시문을 두루 살펴 보았다. 이 걸명 문화는 우리 차문화사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다산이 아암 혜장에게 〈걸명소〉를 보낸 이래, 걸명의 풍조가 하나의 유행으로 번져간 것이다. 걸명시는 예외 없이 승려를 수신인으로 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 차가 대부분 스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다산이 백운동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가 예외로 있지만, 그의 차 만드는 솜씨는 그리 시원치 않았던 듯 하다. 차는 특히 초의 스님과 그 제자, 지리산 쌍계사 스님들이 만든 것이 유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차가 그토록 높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다산과 추사 같은 큰 학자의 지우(知遇)를 입었기 때문이다.
다산과 추사 이후 서울의 명사들 사이에 차는 큰 유행을 보았고, 초의는 차를 통해 서울의 명사들 사이에서 그 성가(聲價)가 드높았다. 차문화도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해거도위 홍현주가 우리나라 차의 역사에 대해 정식으로 문의해, 초의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동다송》을 짓게될 만큼 차에 대한 관심은 갑작스레 확산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걸명 시문의 존재는 조선의 특수한 제다 상황이 만들어낸 독특한 차 문화의 하나였다.
걸명 시문에는 옛 선인들의 풍류와 해학이 그대로 살아있다. 차 한 포 청하는 데도 이런 따습고 정겨운 글이 오갔다. 이런 것이 문화다. 오늘에 선인들의 차문화를 발양시키는 것은 국적불명의 번다한 예절이나 차 관련 단체들의 주도권 다툼 같은 것을 통해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몇 편의 걸명 시문을 통해 옛 선인들의 마음의 안표를 살펴본 뜻이 여기에 있다. 논자의 차에 관한 공부가 일천하므로 대방가의 질정을 통해 잘못된 점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