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특집 ─ 시의 공간 : 목포
해조음이 키운 뮤즈의 사도들
김선태
1. 애환과 설움의 항구도시
대전발 0시 50분 호남선 완행열차가 어둠 속을 자맥질하다가 새벽녘에야 낡은 신발을 끌며 천천히 당도하던 종착역. 플랫폼에 내리자마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 때마침 역전 광장에 함박눈이라도 펑펑 내릴라치면 못견디게 마음은 외지고 막막해져서 무작정 인근 선술집으로 스며들어가 날이 새도록 홀로 술을 마시고 싶던 곳. 갯바람이 불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린내 나는 해안통을 거닐며 뱃고동처럼 소리쳐 울고 싶던 곳. 한반도의 서남부 끄트머리에 자리한 항도 목포는 아직도 내 젊은 날의 스산한 기억 속에서 여전히 애환과 설움의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다.
실제로 해방 이후 목포는 어둡고 쓰라린 도시의 대명사였다. 일제시대 때 융성했다가 해방이 되자 쇠퇴한 항구도시, 박정희 시대 때는 ‘한국의 하와이’로 불릴 만큼 야성이 강한 도시, 갯벌 위에 세운 탓에 만조 때 자꾸만 바닷물이 시가지를 덮치는 도시, 식수원이 없어 전국에서 수도세가 가장 비싼 도시, 토박이들은 떠나고 외지인들이 철새처럼 둥지를 틀고 사는 도시, 최근 40년 동안 인구가 5만 명밖에 불어나지 않은 도시, 그러면서도 애환과 설움이 많은 덕분에 단일 도시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유행가(약 20곡)를 보유한 아이러니컬한 도시가 바로 목포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목포는 어둡고 정체된 과거를 청산하고 밝고 진취적인 도시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전기를 맞고 있다. 우선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시가지 곳곳에 환한 조명시설이 들어섰다. 그리고 전남도청이 목포 인근으로 옮겨옴에 따라 하당과 남악에 신시가지가 조성되었다. 이 밖에 신항만 개설, 대불산업단지 조성, 망운 국제공항 개항, F-1세계자동차경주대회 유치 등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용틀임을 계속하고 있다.
2. 한국근대문학의 메카
올해로 개항 113주년을 맞이한 목포는 도시의 규모나 역사의 일천함 그리고 한반도의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다수 배출함으로써 일찍부터 명실상부한 호남의 ‘예향’으로 불려왔다. 여러 예술 중에서도 특히 김우진(한국극예술의 선구자), 김진섭(한국수필문학의 비조), 박화성(한국여성소설의 대모), 차범석(한국사실주의 연극의 완성자), 김지하(목포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 김현(한국평론문학의 금자탑), 이가형(추리소설가), 최일수(평론가), 최하림(한국시단의 균형주의자), 천승세(소설가), 황현산(평론가) 등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문학 분야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특히 이들이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현저한 위치를 감안한다면 목포를 제외하고 한국근대문학을 논의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김환기(서양화가), 허건(남종화가), 이매방(승무), 최청자(현대무용가), 장주원(옥돌공예가), 김성옥(연극인), 이난영(대중가수), 남진(대중가수), 조미미(대중가수)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예술인들이 모조리 목포 출신이다. 더욱이 이 중에서 다섯 분(박화성, 차범석, 김환기, 허건, 최청자)은 명예로운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다. 이는 국내의 단일 도시로써는 전무후무한 기록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목포의 예술은 일개 지역예술이 아니라 한국예술의 중심에 해당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을 비롯한 목포의 예술이 이렇듯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나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① 무수한 섬과 바다를 끼고 있는 다도해의 모항으로서 입지적 요소, ② 개항과 더불어 통상무역이 활발했던 점과 김우진 등 일본유학생이 타 지역에 비해 눈에 띄게 많았다는 점, ③ 종합지 『호남평론』, 문예지 『시정신』, 동인지 『산문시대』(나중에 『문학과지성』의 모태가 됨.) 등 출판문화의 발달, ④ 허건·조희관·차재석 등 사재를 털어 젊은 예술인들을 지원한 후견인들이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70년대까지 목포라는 항구도시의 예술적 분위기는 매우 특별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해조음 가득한 지중해적 공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목포가 뛰어난 예술가를 다수 배출할 수 있었던 환경적 요소를 들라고 한다면 뭐니뭐니 해도 서남해의 수많은 섬들과 바다를 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쾌청한 날 유달산 일등바위에 올라가 바라보면 수천 개의 섬들이 물개처럼 헤엄치며 놀고 있는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영산강의 하구에 자리하고 있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 목포다. 목포 사람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파도소리를 듣고 자란다. 이렇듯 해조음 태교를 받고 자란 목포사람들이야말로 예술적 소양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어머니 자궁처럼 옴팍한 목포항은 마치 따스하고 융융한 지중해를 연상시킨다. 그러니 목포가 배출한 시인들이야말로 뮤즈의 자식이나 사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목포가 배출한 시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모두 그 이름을 거론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감스럽지만, 지금껏 그 명성이나 문학적 업적이 현저한 3명의 시인이 목포를 배경으로 쓴 대표작 1편씩을 일별하는 것으로 나머지를 대신하고자 한다.
목포에서 처음으로 현대시를 썼던 사람은 1910~1920년대 김우진이다. 목포 최초의 근대 지식인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우리에게 윤심덕과의 ‘현해탄의 정사’나 극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희곡뿐만 아니라 시와 평론 등 문학 전반을 아우른 다재다능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희곡에 비해 그가 남긴 시는 관념과 추상의 덩어리라는 점에서 다소 실망감을 안겨준다. 따라서 관심의 초점을 본격적으로 목포의 시문학이 꽃피기 시작했던 1950년대로 맞출 수밖에 없다.
벌목伐木 당한 수풀에 누운 달빛
고부古阜에 울린 동학의 말발굽 소리
뗏목으로 흐르는 어느 해
한여름의 통곡을 귀에 걸고
한 마당 징소리를 울릴 양이면
무두귀無頭鬼의 무덤에
비 내린다
비 내린다
지금은 병든 동사動詞와 항구港口
미친 듯 술레 잡는 목마의 꿈을 베고
기약도 없이 저무는
나의 호적과 시집詩集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천년 바람 미친 듯 휘몰아치고
어깨에 쌓이는 아픈 세월의 껍질
지나쳐 가는 온갖 사랑의 되풀이
화살처럼 허공을 꿰뚫는
이카루스의 황금빛 날개여.
도는구나 세상이여
다섯 마당 여섯 마당… 열 마당째
돌고 도는구나 이승의 인연들이여
끝끝내 나의 사랑 선사先史의 하늘
타는 불씨를 땅 속 깊이 묻을 양이면
비에 젖는 공화국 헌법 제1조.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권일송,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부분
권일송(1933~1995)은 목포 근대시단의 실제적인 출발을 알리는 선두 주자이다. 1957년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 동시에 시가 당선됨으로써 화려하게 등단한 그는 당시 목포에 소위 ‘신춘문예 바람’을 몰고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북 순창 태생이지만 문태고 등에서 오랜 교편생활을 하며 방황과 좌절 그리고 열정과 고뇌의 젊은 날을 목포 땅에서 뒹굴었다. 이후 그는 상경하여 적극적인 시작 활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초창기의 시적 열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초기시가 아무래도 눈길을 끈다.
부분 인용한 시는 그의 대표작이면서 첫 시집(1966)의 제목이기도 하다. 원래 이 시는 총 69행의 장시이다. 제목만 보면 다소 퇴폐적이고 낭만적인 색채가 묻어나지만 저 4·19 혁명으로 대표되는 60년대 이 땅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다. 암울한 상황 속 ‘짓밟힌 청춘’의 방황과 좌절과 절규가 있다. 그는 한반도의 끄트머리인 눈물의 땅 목포에서 청춘의 독주를 마시고는 있었으되, 그의 시정신은 ‘병든 동사動詞와 항구港口’의 무기력한 분위기에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독한 어둠을 불사르는 밋밋한 깃발’을 세우고 있었고, ‘디모크래시의 피 벌은 함성’과 ‘고부古阜에 울린 동학의 말발굽 소리’를 듣고 있었으며, ‘비에 젖는 공화국 헌법 제1조’를 되씹으며 ‘이카루스의 황금빛 날개’를 남몰래 펼치고 있었다. 이것이 이 시가 50여 년이 흐른 지금껏 ‘목포’에서 여전히 애송되고 있는 이유일 터이다.
아아 무슨 근거로 물결을 출렁이며 아주 끝나거나 싸늘한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을까 나아가고자 했을까
기계가 의식의 잠 속을 우는 허다한 허다한 항구여
내부에 쌓인 슬픔을 수없이 작별하며 흘러가는 나여
이 운무 속, 찢겨진 시신들이 걸린 침묵 아래서 나뭇잎처럼
토해 놓은 우리들은 오랜 붕괴의 부두를 내려가고
저 시간들, 배신들, 나무와 같이 심은 별
우리들의 소유인 이와 같은 것들이 육체의 격렬한 통로를 지나서
(…중략…)
들어가라 들어가라 하체를 나부끼며
해안의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닷속으로
막막한 강안을 흘러와 쌓인 사아死兒의 장소. 몇 겹의 죽음.
장마철마다 떠내려온, 노래를 잃어버린 신들의 항구를 지나서.
유리를 통과한 투명한 표류물 앞에서 교미기의 어류들이 듣는 파도소리
익사한 아이들의 꿈
기계가 창으로 모든 노래를 유괴해간 지금은 무엇이 남아 눈을 뜰까
……하체를 나부끼며 해안의 아이들이 무심히 선 바다 속에서.
──최하림, 「빈약한 올훼의 회상」 부분
최하림(1939~2010)은 목포의 해조음이 길러낸 몽상과 자유의 퓨리턴이다. 목포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잠시(6세~11세) 안좌도 기좌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다시 물길을 따라 목포로 건너와 오거리 일대를 중심으로 문학청년 시절을 보냈다. 스산한 바람과 칙칙한 어둠이 골목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당시 오거리는 문학과 미술을 꿈꾸는 많은 청년들이 고뇌와 열정으로 밤낮 술병을 거꾸러뜨리는 아름다운 아지트였다. 그가 그때(1962) 그곳을 빈 주머니에 손 찌르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사람이 저 김현과 김지하이다. 또 미술을 하는 박석규·원동석·김소남·양계탁들과 함께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렸으며, 김현·김승옥 등과 함께 산문시대 동인을 결성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동인지 『산문시대』를 5집까지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후견인으로 허건·차재석(차범석의 동생)·조희관이 버티고 있었다. 마치 한국문학의 중심이 목포 오거리로 옮겨온 듯 부럽기 그지없는 시절이었다. 이때는 매년 신춘문예 당선자가 2~3명은 나올 정도로 목포의 문학적 분위기가 융성했다고 한다.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하던 최하림은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빈약한 올훼의 회상」이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 1965년 이후 약 30년 동안 서울생활을 하다가 1988년 광주로 내려와 10년 동안 전남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했다. 퇴직하고 충북 영동 산골을 거쳐 경기도 양평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금년에 세상을 떴다.
최하림은 우리 시단의 균형주의자로 잘 알려진 시인이다. 그는 “김현이 아폴로였다면 김지하는 디오니소스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이 두 사람을 합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이를 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적 사유도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이 적당이 혼융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최하림의 시에 나타난 목포 역시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문학청년시절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발레리의 시집 『해변의 묘지』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첫 시집에는 지중해의 몽환적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빈약한 올훼의 회상」, 「황혼」 등 초기시의 주요 무대는 목포 해안통에서 대반동에 이르는 바닷가이다. 바다에 관련된 모든 시가 이곳을 배경으로 창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바다와 관련된 시는 구체적인 삶이 살아있는 건강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둠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추상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용한 시는 그의 등단작으로서, 50~60년대의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을 상징적인 수법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항구, 그것도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하림이 날마다 어슬렁거렸던 목포의 해안통 거리이다. 시 속에는 도처에 ‘절망’과 ‘죽음’의 이미지가 널브러져 있다. ‘아주 끝나거나 싸늘한 바다’, ‘기계가 의식의 잠 속을 우는 허다한 허다한 항구’, ‘오랜 붕괴의 부두’, ‘저 시간들, 배신들, 나무와 같이 심은 별’, ‘노래를 잃어버린 신들의 항구’, ‘기계가 창으로 모든 노래를 유괴해간 지금’ 등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과 ‘찢겨진 시신들’, ‘사아死兒의 장소’, ‘몇 겹의 죽음’, ‘익사한 아이들의 꿈’ 등과 같은 죽음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는 비록 겉으로 보기엔 항구의 기능을 상실한 1950~60년대의 목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처참한 골육상쟁의 현장을 목격해야 했던 6·25와 4·19 당시의 절망적인 정치상황 그리고 근대화와 기계문명의 폐해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암울한 절망의식 혹은 죽음의식은 그 당시 목포에서 시를 썼던 사람들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살핀 권일송의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가 그렇고, 뒤에서 살필 김지하의 「비녀산」이 또한 그렇다. 다만 각자 색채와 강도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 누구를 통해 시를 배운 게 아니라 날마다 목포의 해안통을 거닐다보니 시가 스스로 찾아왔다는 최하림 스스로의 고백이 생각나는 시다.
무성하던 삼밭도 이제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외쳐 부르던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시퍼런 하늘을 찢고
치솟아오르는 맨드라미
터질 듯 터질 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이야기 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송진 타는 여름 머나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싸움에 몸 바친 아버지
빛바랜 사진 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지막 우럴은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김지하 「비녀산」 부분
김지하(본명 김영일, 1941~)는 목포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이요, 이 땅의 반독재 투쟁의 대명사이며, 자본의 폭력과 파멸의 아수라장인 금세기 말 반생명에 맞선 생명사상가이다. 목포시 산정동 1044번지에서 동학접주였던 할아버지와 영세상인이자 월출산 빨치산 출신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했다. 서울대 미학과 3학년에 다니던 1961년 남북학생회담 남쪽 대표 3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명수배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해남을 거쳐 다시 목포로 도피하여 항만인부생활을 하며 20대 초반의 피 끓는 젊음을 고향에서 숨어 지냈다. 이때 그가 날마다 술에 취해 들락거리던 오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김현과 최하림이다. 그가 『목포문학』 2호(1963)에 처음으로 「저녁 이야기」라는 시를 발표한 것도 이 시기이며, 제1시집 『황토』에 실린 「산정리 일기」, 「비녀산」, 「성자동 언덕의 눈」, 「용당리에서」 등 목포의 구체적인 지명을 제목으로 한 대부분의 시가 이때의 체험을 모티프로 쓰여진다. 그가 흑산도 어느 여관에서 체포되어 목포를 지나갈 때의 기억을 쓴 글을 보면 당시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10여 년을 그리던 고향, 그 고향에 나는 수갑을 찬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얼마나 그리던 유달산의 모습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초라한 내 모습이던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 갑자기 오열이 터져 올라왔다. 내 시의 어머니, 굽이굽이 한이 얽힌 저 핏빛 황토의 언덕들. 사잣밥을 주워 잡수시던 할머니의 갈퀴 같은 손. 굶어죽은 내 조카 진국이의 시체를 묻으며 뻘밭에 이마를 찍으시던 외할아버지의 통곡, 대창을 휘두르며 비녀산을 내려오던 뚜쟁이의 그 핏덩어리 같은 두 눈, 생매장당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캄캄한 밤, 송장들마다 들치며 소리 죽여 울던 창남이의 모습. 그 고향에 나는 수갑을 찬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행 1974」 중에서.
첫 시집 『황토』에 실린 32편의 시는 거의 대부분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행 1974」에서 증언하고 있듯이, 인용한 시 「비녀산」(‘비녀산’은 지금의 목포대 목포캠퍼스 뒷산을 가리킨다. 목포 사람들은 이 산을 ‘양을산’이라고도 부르며, ‘유달산’ ‘유방산’과 함께 목포의 3대 명당으로 꼽고 있다.)도 마찬가지다. ‘무성한 삼밭’과 ‘기름진 벌판’ 그리고 ‘노래’가 들려오는 곳, ‘무거운 연자매를 돌려도’ 착취되지 아니하는 조화로운 질서가 보장되는 삶의 터전은 꿈속에서나 그려볼 뿐, 현실은 삶의 기반이 되어주지 못하는 결여의 땅이다. 현실의 어긋남은 생명의 피흘림, 곧 살아있는 것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표현된다. 즉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허구적 근대화가 제공한 자본주의적 환상을 쫓아 비자발적 임금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급속히 진행된 도시화는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그 어떠한 전망도 기대할 수 없는 죽음의 시공간화를 뜻한다. 다시 말해 도시 이주민들에게 있어 ‘비녀산’은 이제 ‘낯선 사람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 민중에게 있어 현실은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파괴당하며 생존을 위협받는 모진 세상이다. ‘참혹한 옛 싸움에 몸 바친 아버지’는 동학혁명의 희생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옛이야기 속에서는 동학혁명의 전설처럼 뜨겁고 힘찬 반역의 거센 몸부림이 있었지만 화자는 그 사진 앞에서 숨죽여서 울 수밖에 없다.
이렇듯 목포를 배경으로 한 김지하의 시는 단호하고도 격렬한 저항적 어조가 있다. 그 스스로 고백했듯이 고향 목포는 그에게 “내 시의 어머니, 굽이굽이 한이 얽힌 저 핏빛 황토의 언덕들”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4. 목포 시문학의 내일을 위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목포를 대표하는 3명의 시인들은 목포를 그들의 시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대표작들은 각자 색채나 어조의 차이는 있으되, 모두가 당대의 열악한 현실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시에 반영하거나 시로써 적극적으로 응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목포’라는 시적 공간이 품고 있는 독특한 컬러하고 하겠다. 그러나 현재 목포의 시인들은 선배시인들이 이룩한 시적 성과를 이어받고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목포문학은 대단히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오거리를 중심으로 김지하·김현·최하림 등이 문학청년 시절을 구가했다. 이들은 나중에 출향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나 평론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고향땅을 되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목포는 그들의 기억에서 옛 추억의 공간으로만 자리했다. 목포가 그들에게 어떤 몹쓸 기억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일까. 필자는 얼마 전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곤혹스러워하며 거절했다. 한 마디로 목포의 폐쇄적인 문학풍토가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달콤하게 고여 썩은 물에 새로운 물이 틈입하기엔 너무 버거운 것이리라. 그러나 그 후로 40여 년이 지난 오늘 목포에서 생산되는 문학작품들은 그들이 문학청년 시절에 썼던 것들과 비교할 때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무릇 문학이라는 양식은 치열한 정신의 소산이다. 그 중에서도 시는 그 정신의 첨예한 안테나이다. 그 안테나는 어떠한 미세한 바람도 감지할 수 있도록 언제나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테나가 통신두절 상태일 때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것이다. 아무리 열악한 여건에 처한 지역문학이라 할지라도 그 정신이 깨어 있으면 중앙문학보다 하등 뒤질 게 없다. 그러나 오늘날 목포의 문학은 어떠한가. 다소 지나친 견해일지는 몰라도 필자가 보기엔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가 죽어있다. 그런데 죽어있는 것들이 중심을 이루고 그 중심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모양새다. 예를 들어, 언제까지 유달산이고 삼학도인가. 고향을 노래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노래하는 방식이 수십 년 동안 아무런 변화나 고민 없이 똑같다는 것이다. 문학이란 오늘 아무리 새로운 것도 내일 아침이면 새롭게 변하는 양식이다. 모름지기 공부해서 깨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목포 문인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활동 자체를 부인하거나 경원시 할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목포문학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선 어떠한 것도 받아들일 줄 아는 열려 있는 정신이 부족하다면 부족하다. 앞으로 목포문단은 노·장·청의 조화가 긴요하다. 또한 몇 안 되는 젊은 사람들의 단합과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문학 지망생들의 발굴·육성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목포문학이 오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 선배들의 빛나는 문학적 전통을 계승함은 물론 새롭게 도약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김선태 / 1960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 이후 지금껏 목포에서 살고 있다. 『현대문학』에 시와 평론이 추천되면서 등단했고, 시집 『간이역』, 『동백숲에 길을 묻다』, 『살구꽃이 돌아왔다』, 평론집 『풍경과 성찰의 언어』가 있다. 애지문학상,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계간 『시와사람』 편집주간,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