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젊은 시절
이병철(1910. 2. 12~1987. 11. 19)
나는 1910년 2월 12일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두 누이와 형(병각,秉珏, 1905~1971)이 있는 4남매의 막내였다.
이해는 조선 조년기로 융희 4년(1910), 8월 22일 에는 치욕의 한일합방 조약이 조인되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조선왕조의 말기는 참으로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민족과 국가 수난의 해가 기구하게도 내 출생의 해였다는 것은 파란만장했던 그 후에 나의 인생을 돌아 볼 때 뭔가 암시적인 것이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히 가정의 형편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나의 가계는 경주이씨에 속한다. 10대조가 중교리에 은거의 고장으로 삼아 가속을 이끌고 낙향하였다. 조선왕조 연산군 때의 일 이었으니 지금부터 480년 전에 일이다. 16대조 후에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분들도 간혹 있었으나 19대조 후대 부터는 정치와 벼슬과 무관한채로 전원 생활을 이어 온 것 같다.
할아버지 이홍석 공(호 문산 1838년~1897년)은 학문에 소양이 있어 당시에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로 일컬어지던 허 승재의 문하생으로서 시문과 성리학 등에 능했다고 한다. 이러한 할아버지 밑에서 아버지가 한학공부를 강요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그하나로 개항 개국 등 외세의 침투로 나라가 흔들리는 청년기에는 상경하여 독립협회 회원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
기독교청년회에도 출입 하여 뒷날 대통령 되는 이승만박사와 서로 알게 된 것도 그쯤에 일이다. 아버지와 이박사는 동갑이었다.
그러나 결국 중교리로 귀향하여 전원 생활을 즐겼다.
어머니 안동권씨는 아버지 그늘에서 겸허하게 평생을 보낸 전형적인 부덕의 여성이었다.
인정이 많아 어려운 사람을 그냥 보내지 못한 성품이셨다. 마을에 해산한 집이 있으면 반드시 미역과 쌀을 보냈고 양식이 떨어졌다고 하면 늘 쌀이나 보리쌀을 들려 보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른 봄 찔레 꽃이 필 무렵은 가난한 농촌에서는 가장 어려울 때 이니 무심히 넘겨서는 안된다.
어머니는 이따금 나에게 이렇게 타이르곤 했다. 찔레 꽃이 필 무렵이면 바로 우리 꼭이라고 하는 춘궁기를 말한다.
그때만 해도 가난했던 농촌에서 가을에 거두어들이었던 양식이 찔레꽃이 필 때 쯤 떨어지고 만다.
안양 골프장 18번홀에서 11번 홀로 넘어가는 왼쪽 길목에는 봄마다 찔레꽃이 활짝 핀다. 그 청초한 꽃에 눈길이 갈때마다 옛날 농촌에 그 춘궁기가 생각나며 인자했던 어머니 모습이 문뜩 떠오르곤 한다.
어머니는 언제나 남보다 일찍 일어나 집안 일을 돌봤지만 며느리 방앞을 지날 때면 행여나 그 며느리가 선잠을 깰까봐 조용조용 발소리를 죽여가며 걸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언제나 인자하고 온화했다. 내 외가는 두루 장수하는 가문으로 이모들은 모두 90 이 넘는 장수를 누렸다. 이 분만 해방도 못보고 1941년 전란 중에 시골에서 70세로 먼저 떠나 보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교가 도덕의 규범이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친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머니도 타계 한지 이미 40여년이 지났다. 다섯 살이 되면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 문산정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책을 옆에끼고 현관의 대문을 나서는 나를 늘 지켜 보았다. 어머니가 36세 때, 태어난 막내인 나에게 거는 기대는 큰 것 같았다. 나는 어릴 때 뛰어 나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다만 유별나게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 했다는 데, 두서너 달이면 된다는 천자문에 나는 일년 남짓 걸렸다.
그래도 5년 가까운 서당 공부에 보람이 있어서 통감이나 논어도 통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문산 선생의 손자가 이래서야 하는 훈장의 훈계를 듣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후 2년이 지나 11세가 되었을 때 집안에서 의논을 거듭한 끝에 나늘 당시에 신식 학교에 넣기로 결정했다.
일본어 수업을 하는 일본식 보통학교이다. 이 사실이 친척들에게 전해지자 찬반 양론으로 가려졌지만 찬성 의견이 많았다. 서당 친구들과 작별하고 누이의 시댁이 있는 진주의 지수 보통 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누이의 집에 도착하자 곧 이발소에 가서 아침마다 어머니가 손수 따지던 긴 머리를 싹둑 짤라버렸다.
한 몸을 부모에게 받았으니 훼손하지 않음이 효도의 시초이다.
서당에서 배웠던 글귀가 문뜩 뇌리를 스쳐갔다. 그날도 벌써 60여년전 먼 옛날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11세에 고향을 떠난 나의 개화의 날이었다. 지수 보통 학교에서의 생활은 모두가 새롭고 즐거운 것이었다.
여름방학 때 고향에 돌아 와서 서당시절 옛 친구들과 재회 하고서야 도회지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 했는가 동심에서 나마 절감했다. 공자는 동산에 올라가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태산에 올라가 천하가 작다고 했다고 한다. 불과 몇 달 안되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진주에서 생활을 경험하고 귀성한 나로서는 태어나서 자란 중교리는 너무 좁고 답답한 곳으로 느껴졌다.
나의집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어렴풋이 나마 갹관적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기회였던 것 같다.
마침 고향에는 재종 형(상수)이 서울에서 내려와 있었다 서울 이야기를 여러가지로 들려 주었다. 큰 거리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고층 건물 들이 거리의 경관을 자랑하고 상품도 풍부하고 좋은 학교도 많다고 생생하게 말해 주는 서울 모습에 소년의 가슴은 설랬다.
옳지 서울가서 공부 하자.
이렇게 결심한 나는 반대를 각오하고 부모에게 그 뜻을 말했다. 아버지는 언뜻 응락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는 내 생각을 두둔해 주었다.
드디어 아버지도 의외로 쾌히 허락하여 서울 행은 결정되었다. 외가가 서울이었던것이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 오던날 90세 가까운 할머니가 손수 누빈 솜옷을 건네 주면서 나의 손을 맞잡고 눈물 어린 미소를 지으며 전송해 주셨다.
함안역까지 바래다준 아버지는 열차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서울 가서 조심해야 할 일들을 자상하게 일러 주었다. 처음부터 찬성했던 어머니는 도리어 몹시 불안해 하는 모습이었다.
서울로 떠나던 그 날의 정경은 6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선명한 모습이 되어 눈에 선하다.
서울에 처음 머무는 곳은 현재도 옛주택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회동의 외가였다. 거기서 별로 멀지 않은 수송 보통학교 3학년 편입했다.
당시에 담임은 이호성 선생님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학교는 조선총독부가 초등교육의 시범학교로 세웠는데 붉은 벽돌의 3층 교사가 인상적이었다. 첫 등교 날은 들뜬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섰으나 터무니없는 난관에 부딪혔다. 급우들과 말을 주고받아도 의사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억지로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말씨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대체로 친절하였다. 서울에 왔다고 하여 학교 성적이 갑자기 좋아질리는 없었다.
산술만은 학교에서 상위에 있어서 자신이 있었지만 조선어나 일본어는 100점 만점에 겨우 6 -70점 정도, 음악과 미술 등은 간신히 낙점을 면할 정도였다. 석차는 50명중 35등에서 40등을 오르내렸다.
성적이 그러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보통학교 과정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 무모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4학년을 마치고 방학 때 귀성한 김에 아버지에게 이제 보통학교에서 배울 것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통학교 과정을 단기간에 마무리 짓는 속성과가 있는데 중학에 옮기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해 허락을 얻었다. 그래서 입학을 한 것이 중동 중학이었다.
사필귀정
아버지는 처세훈으로 자주 나에게 이 글귀를 풀이 해 주셨다.
매사에 성급하지 말아야 한다 무리하게 사물을 처리하려 들면 안 된다.
몇 차례 씩이나 학교를 바꾸는 내가 아버지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쳤을까.
공부에서 성과가있다고 보였는지 아니면 공부의 길은 가망이 없다고 보였는지 끝내 그 답을 여쭤 볼 기회도 없었다.
진주의 지수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아버지는 나에게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처세훈과 함께 늘 강조한 것은 거짓과 꾸밈은 개인의 있어서나 국가사회에 있어서나 큰 병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단정하고 근엄한 분이었지만 자녀들에겐 언제나 인자하고 큰소리로 꾸중 한 번 하는 일이 없었다.
공맹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켰고 톼계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삼강오륜을 충실 하면서도 인의예지신의 생활윤리 중에서도 특히 신을 강조하고 비록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창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성이 그 신용을 기업의 생명으로 삼아 오고 있는 것도, 되돌아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그런 말씀이 그 뿌리가 되었던 것 같다. 삼성이 외국자본을 도입할 때 삼성 자체 신용만으로 계약할 수 있었고 별도의 지불보증이 필요 없을만큼 된 것은 나는 지금도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아버지의 뜻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1957년 12월 26일 84세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는데 이만큼 장수한 것도 모든 것에 절제를 지키며 살았던 때문으로 안다.
내가 1976년 9월 위암 수술을 받고 난 뒤 애용 하던 담배를 끊고 지금도 건강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아버지께서 몸소 실천한 그 절제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도의 문화운동의 관심을 갖고 뛰어난 효행자 들을 골라 시상하고 있는 것도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하는 이 세상에서 모든 도덕의 기본인 효 만이라도 먼저 지켜 나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중동 증학 속성과에서는 1년 동안 보통 학교에 5. 6학년 과정을 끝내야 한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공부에 몰두했었다고 기억된다. 당시의 교장은 해방후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재직중 북한에 피랍된 최규동 선생이었다. 이 학교는 스포츠가 성했고 특히 구기에 강했다.
나도 축구와 테니스에 열중하였다. 또한 이 학교는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이 많았다. 1926년 3학년 가을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너의 혼담이 이루어져 12월 5일(음력)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귀가 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조혼이 관행이었다. 별 생각 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모관대를 갖춘 대군복 차림의 구식 혼례를 올렸다. 19세의 겨울이었다.
신부는 경상북도 달성군 묘동에 사는 사육신 박팽년 공의 후손인 순천박씨 기동공파의 4녀였다.
초례청에서 처음 마주본 신부인상은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슬하에 4남 5녀를 두고 반세기를 넘게 서로 도우면서 살아 왔다.
안사람 역시 유교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전통적인 도덕을 배우고 성장 해서 그런지 바깥 활동을 되도록 삼가하고 집안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예의범절에도 밝아 대소가가 두루 화목하다. 지금까지 몸치장 얼굴 화장 한번 제대로 해본일 없고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처럼 수신제가의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는 한 사람에게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가족 제도에서는 예로부터 부부 사이에 갈등도 적지 않지만 안사람은 출가한 딸들에게 보다도 오히려 며느리에게 각별한 정을 주고 있다. 며느리들의 생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일일이 선물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든지 가을에 새 곡식이나 과일이 들어오면 며느리들 몫으로 먼저 떼어 놓고 나머지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든지 이 모두가 그저 흐뭇하기만 하다.
손자 손녀들이 한 30여명 있는데 그 아이들이 한결같이 할머니를 따른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난후 일본유학에 결심을 말씀 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크게 꾸중 하셨다. 일은 반드시 본 말이 있고 시종 있는 것이다. 19세가 되고도 아직 그것을 모르느냐?.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버지의 엄한 꾸지람이었다. 그러나 유학 자체에 대한 반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며칠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부산으로 가서 부관 연락선을 탔다. 시모노세키로 가는 선상에서 평생 잊지 못할 불쾌한 사건을 겪었다.
당신의 부관연락선은 3000톤급에 상당히 큰 것이었으나 시설 등의 내부에 설비는 매우 허술했다. 배가 부산항을 떠난지 얼마 안되어 2등 선실에서 갑판으로 나갔다가 고향 출신인 안호상 박사를 만났다. 안 박사는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또 대학에서 다시 1년 동안 동양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건너 간다고 했다.
배는 파도가 거센 현해탄에 접어들어 요동이 심했다. 안 박사와 나는 배 멀미가 심해져서 시설이 다소 나은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실 입구에서 일본인 형사가 우리를 저지하였다. 우리가 한국인 인줄 안 형사는 거만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 조선인들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신분을 꼬치꼬치 캐는 것이었다. 돈을 듬뿍 가지고 놀러 가는데 이왕이면 바로 일등 실로 가려는 거야 안박사가 비꼬는투로 받았다. 화낼 줄 모르는 자는 어리석다. 그러나 화낼 줄 안다면 참는 자는 현명하다고 한다.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나라가 망해 있다는 사실에 참뜻을 처음으로 실감하였다. 사소한 사건인지는 몰라도 실국한 청년에게 굴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해지려면 우선 풍족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아! 뒤에 내가 사업에 더욱 몰두하게 된 것은 식민지 지배 하에 놓인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것은 그 부관 연락선상에서 조그만한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로 갈아탄지 20여 시간만에 도쿄역에 내렸다. 대학에 입학하게까지 아직 반년 남짓 남아 있었다. 우선 하숙소를 정하고 입시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날로 와서 대학 근처에 하숙 소개소를 찾아 부탁해 놓고 지리를 익히고 방향 감각을 기르느라 다가다바죠우역에서 세이부신주쿠 전에 전철을 탔다. 당시 이 일대는 숲과 밭이었고 역 근처 여기저기 드문드문 세 집이 들어서고 있었다. 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한 청년이 눈에 띄었다.
그쪽도 유심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말로 말을 건넸더니 바로 우리말로 대답하였다. 와세다 대학 학부3학년에 재학 중인 우리나라 유학생 경남 함안 출신 이순근씨였다. 셋방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는 하숙집에 일본 음식은 입에 맞지 않고 자취가 오히려 편하다고 셋방을 권했다.
낯선 땅에서 처음 만난 동포이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편이 마음든든 할 것도 같아서 그의 거처 근방에 나도 셋방을 구했다.
이렇게 하여도 도쿄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30년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전경과에 입학하였다. 그 무렵 미국의 월가에서 발단이 된 금융공황은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어 일본 경제도 심각한 불황에 빠져 있었다.
쌀이나 생필품의 시세가 몇 달 사이에 반 이하로 폭락 하였다. 실업자가 거리에 넘치고 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따랐다.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언론의 화제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또한 좌익 운동이 과격해 지자 당국의 자세도 날로 경화되었다. 돌파구 없는 불황 그것을 해결할 방도도 없는 모순에 부딪친 일본은 차첨 군사 파시즘의 길로 치달았다.
대학이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대학은 좌익과 반체제운동의 본산으로 변모해갔다.
와세다의 숲속에서도 집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와세다대학에는 당시 우리나라 유학생이 많았다. 도쿄에서 처음 만난 이순근씨 외에도 개성 출신 황씨, 호남 출신 진씨, 등과도 알게 되어 한때 다다미방 넷을 세를 얻어 하루씩 번갈아 당번이 되는 공동 자취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20년 뒤에 삼성사업에 참여하게 되어 있지만 청년다운 정열의 활동가였다. 그에게서 자주 사상운동을 참여하라는 권유도 받았으나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단 한 번 대모의 성격을 띤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함께 참가했던 와세다 대학 학생들과 함께 연행되어 이틀 동안 경시청 유치장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데모 참가도 단순히 호기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만약 사상 운동에 적극 참여할 용기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다지 적극적인 의사는 없었다고 대답하는 편이 정직할 것이다. 보통 학교에서 중학교에 걸쳐 학교를 전전하면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지 못한 나였지만 뒤늦게나마 학교공부에 몰두했다.
강의에는 빠짐없이 나갔다. 그것도 알아듣기 쉬운 앞자리에 차지하려고 강의시간 훨씬 전에 강의실에 들어갔다. 책도 읽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복자 투성이 문헌도 돌파했다. 난생 처음으로 진지하게 책과 사귀고 사색에 잠겼던 시기였다.
모처럼 공부에도 열중하고 내 나름대로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2학기 말이 되자 심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자취 생활에서 습관처럼 되어버린 편식 탓인 것 같다. 조금만 책을 읽어도 몹시 지치고 운동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2학년이 되면서 1년간 휴학원을 내고 온천욕 등 효험이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해 보았다.
도쿄에 온 이후에 할머니는 철이 바뀔 때마다 손수 꾸민 한복을 보내 주었다. 방에서는 그것을 갈아 입고 있었는데 몹시 고온 다습한 일본의 기후에 맞지 않나 싶어서 여름에는 일본의 유카타를 입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혀 차도가 없어서 초조한데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무렵 도쿄에서 한 달에 오십원만 있어도 5~6명의 가족이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어김없이 매월 200원에 송금이 있었다. 유학 중이었으므로 시간은 남아 돌았다. 병은 기가 허해져서 생긴다고 하니 결단을 내려 생활을 바꿔 보자고 온천장이나 명승고적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러한 천지 요양이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태로 덧 없이 시간을 보냈더니 차라리 학교를 단념하고 도쿄를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는 일을 고향 어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부모를 뵐 면목은 없었지만 학업 중단을 결심하여 2학년 가을에 와세다 대학을 중퇴했다. 진주에 지수 보통 학교와 서울의 수송 보통 학교와 중동 학교로 이어지는 네 번째 중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졸업장 이라는 것은 한 장도 없다. 그러나 여기 후일담이 하나 있다. 몇 년 전인가 중동학교가 특별 조치로 졸업증서를 보내 주었다. 너도 무슨 요량이 있었겠지 일에는 반드시 본 말과 시종이 있다고 일러 주신 아버지도 무언가 할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 때 아버지의 마음은 지금이라도 헤아리고 남음이 있다. 중교리의 맑은 공기와 아늑한 환경에 둘러싸여 얼마 후에 건강도 회복되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생각한 나는 다시 상경하여 현재 산업은행 뒤에 있는 일본어 학원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오랫동안 격조 했던 옛 친구들을 두루 만났다. 취직 같은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고 결국 2년 가까운 두 번째 서울 생활도 아버지의 송금으로 놀고지내는 셈이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갔으나 집안일은 아버지의 지휘 아래 형이 감당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고등 소체를 재배해 보려고 일본에서 그 종자를 들여오고 하였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어느새 친구들과 골프에 열중도 해보았지만 지칠 대로 지쳐서 저녁에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내가 실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운이 없었던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지성과 자제를 잃은 무의도식의 나날이 그 후에도 한 동안 계속되었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몇 번은 전성기를 맞게 마련인데 스스로 그것을 만드는 일도 있지만 느닷없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 느닷없이 찾아오는 전기를 어느 날 맞게 되었다. 그 날도 골패의 노름을 하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밝은 달빛이 창 너머로 방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내나이 26세 이미 세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듯한 심정이 되었다. 너무 허송세월을 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 잠자리에 들기는 했으나 그날밤은 한 잠도 이룰 수 없었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뜻을 굳힌 것이 사업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독립운동 사업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독립운동을 위해서 투신 하는 것 못지않게 국민을 빈곤에서 구하는 일이 또한 시급하다. 식민지 치하의 관리 생활이란 떳떳하지 못하다. 사업에 길을 찾는 것이 성격에 가장 잘 맞는다.
사업에 투신하자. 나의 인생을 사업에 걸어 보자!. 그냥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꿈인 것처럼 들릴 줄 모르나 사실이다. 훨씬 뒷날 어느 저널리스트와 인터뷰에서 당신을 회고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일이든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치자. 그 10년이 남겼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디어 나가는 것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려 나가느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쿄에서 돌아온 후 이삼년이 결코 낭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무엇인가 생각이 여물고 결국은 사업을 이렇게 해야 된다는 뜻을 갖게 했던 것이다. 뜻을 세우기 위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업에 투신 하자는 결단은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한 일도 아니었다. 어찌되었던 그 결심은 나의 인생에 있어 결과적으로 큰 전환점이 되어버렸다. 삼성그룹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1986년 3월
이병철
▲이병철의 아버지 이찬우(1879~1957) 어머니 권재림(1881~1959) 여사.
▲기자회견을 자청 밀수사건을 해명하고 한비를 국가에 헌납 할 뜻을 표명한 이병철 회장
1966년 한국비료 밀수와 국회 오물사건.
▲1966 9.22 국회본회의에서 한독당 김두한의원이 삼성재벌 밀수사건에 관한 발언도중 국무위원석에 오물을 뿌렸다.
▲고(故) 이병철회장 영결식.
호암아트홀에서 엄수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영결식 이 회장은 경기도 용인군 자연농원 묘지에 안장됐다. 1987년 11월 23일(월)
[출처] 이병철 회장이 직접 쓴 나의 젊은 시절 /1986.03|작성자 카르페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