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원담스님 , 사회: 혜안, 인례: 자성, 헌향: 월광화 , 헌다: 연오행, 명조, 발원문: 부회장 무아, 촬영 및 방송: 방송담당 대원3구, 안내팀, 음악: 마하보디 합창단, 지휘자, 반주자, 취재: 미디어팀 , 법회 방역 및 안내: 대원 3구, 법회팀, 보광당 좌석 배치: 청정팀, 법회 후 뒷정리: 송파 17, 20구, 대원 4구 법회, 법회보 제작 : 법회보 제작팀, 법회보 배부: 송파 17구 법회, 데스크 안내: 법당 안내팀, 새법우 안내: 새법우 교육팀, 떡 및 생수 보시 : 송파 18, 19, 20, 21구법회.
보현행자의 서원 : 참회분
지난주에 광명의 등을 설치가 끝나고, 연꽃 등, 컵 등을 제작하는 보살님들의 손길에서 초파일이 머지않음이 느껴집니다.
광명의 등 설치는, 2023년 올해를 마지막으로 불광 정상화가 이루어지기를 두 손 모아 합장 발원 올리옵니다.
오늘도 법회를 찾아오신 분들과 정답게 인사 나누며 법회지를 전해 주시는 보살님들, 아직도 열리지 않는 사무국 문 앞 복도에서 초파일 준비로 연꽃을 제작하시는 사무국 봉사팀들의 모습, 불광을 환하게 비추시는 인꽃(人花)입니다.
수고하시며 봉사하는 보살님들, 감사드리며, 떡과 생수를 준비하여 배분하시는 구 법회 보살님들, 고맙게 먹겠습니다.
혜담 스님과 원담 스님께서 자리하시고, 천수경 독송을 끝내고 법회를 시작하는 타종, 헌향, 헌다를 올리어 부처님께 예경 올리고 혜안 거사님의 말씀으로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보광당 일요 법회에 참석하신 불광 형제들이 원담 스님 법문에 귀 기울이고 있어 고요한 법회 풍경
금주의 법문 : 원담 스님(진주선원장)
금주의 법어 : 향기나는 시간을 살기 위해서
불광에서 다시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제가 일요법회에 참석한지는 두 번째입니다.
찰나였던 봄도 꽃도 다 지나고 낙화유수라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불교매체에서도 불광사 문제는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아침에 거사님들과 이야기 잠깐 들으니 이 세상이 고해라고 하지만 고해를 벗어나서 해탈할 길을 간다고 절에 왔는데도 다시 절도 세상속의 절이라 가는데 마다 문제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존경하는 큰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하셨을까?
두 가지로 접근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의 일은 세상의 방식대로 해야 되겠지마는 진실 된 공(空}의 관점, 본래 무일물(無一物)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를 주장하지 마라, 나의 것을 주장하지 마라. 그런데 그것을 못 놓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고(苦)의 원인이 아(我)와 나의 것. 제일 놓지 못한 그 무명이랄까? 그 욕심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 모두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세상이 연기(緣起)로 되었다는 것은, 전체가 전체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 중에 티끌 하나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잠시 빌려 써서 잘 사용하다가 돌아갈 때 돌려주고 가면 그 뿐입니다. 잘 사용하다가 놓아두고 가라.
모든 것은 전체에 속한다. 세계 자체가 세계에 속한다. 그 중에 무엇을 나의 것으로 삼았다. 오온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유식론이 되고 세간의 관계와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근본 번뇌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킬 것이며 갈등과 모든 심리적 불안의 원인입니다.
3인이 모이면 집단지성이 나와서 지혜가 모이면 세속의 문제는 세속의 방식대로 기다려가면서 해결 할 줄로 알아요. 그런데 불교의 일은 원력의 문제입니다. ‘원력’ 진정으로 간절한 원력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모든 불사들은 불자의 원력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광덕 스님의 원력으로 오늘날 이 법당과 불광 법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또한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살아가야합니다. 다시 한 번 나는 세상을 바꿀, 세상은 차치하고라도 내 인생을 바꾸고 싶은 간절한 원력인데, 그것이 정신력의 기적. 윌파워(willpower)라고 합니다,
거기서 약한 사람은 이 생에 되겠냐며 기다리지 못하고 다 떨어져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동안에 육신을 버려서 몸과 처자 권속을 버리면서 공덕 지혜를 쌓은 것입니다. 본래 무일물(無一物), 본래 청정한 경지에서는 불생에 항상 현존해 있지만, 그 과정에 불성이 드러나서 세계를 개조하고, 자신을 개조하고, 정토를 이루는 자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보살 행원의 길에 있습니다.
이제 제가 준비해 온 ‘향기 나는 시간을 살기 위해서’라는 주보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자, 우리 반성해봅시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60대엔 시속 60Km로 지나간다는 말이 있어요. 70대는 분속 70Km인가? 그건 너무 빠르겠지요? 그렇게 빨리 지나갑니다. 삶이 늙어갈수록 가속화된다는 이런 말을 하는데 왜 그럴까요?
가만히 보면 방향 없이 의미가 일관 되지 않게 하루하루를 그냥 뚝뚝 떨어진 채로, 어제는 어제대로. 다가오는 내일은 내일대로 서로 뚝뚝 떨어져나가서 어떤 의미가 붙지 못해요. 그러니까 손에 남는 것은 항상 텅 빈 의미 없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의심과 자기 회의만 남는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첫 번째 삶이 가속화 되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정이다. 이렇게 첫 주제를 잡았어요.
우리가 자기를 반성하고 관조(觀照)하지 않으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맙니다.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입니다. 천하 만물만사 전부 다 시간의 함수로 흘러갑니다. 내가 시간에 종속 변수일까? 시간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을까? 내가 시간의 종속 변수라면 그 때의 시간은 야마가 되어 나를 끌고 무상사유계로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광 가족은 그러하지 않으리라 보지만, 보통 사람들은 세상에서 돈을 벌기위해 온 몸을 투신하고, 높은 자리를 잡아보겠다고, 아니면 욕망을 찾아서, 날로날로 욕계에 깊숙이 빠진 사람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늙음 밖에 남지 않는, 그리고 믿을 것은 자기의 몸뚱이 하나이고 통장에 저금한 돈, 아니면 주식투자 해 놓은 것, 그것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많이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도 자기 생각만큼 그렇게 다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 다 놓으면 하루아침에 다 흩어지고 말, 한 줌의 가진 것과 자기 몸 밖에 남지 않아요.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은 늙어도 늙은 것이 아니다. 옛 말에 늙으면 현인(old wisdom)이 된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늙었습니까? 아니면 탐진치(貪瞋癡) 앞에 ‘노(老)‘자를 붙여, 노욕(老慾), 노분(老憤), 노치(老癡), 자기가 자기를 관조(觀照))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뿐 이예요. 무서운 일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렇게 뚝뚝 방향 없이 날아가는 상하는 시간을 바꾸면 그것을 향기 나는 시간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제가 만들어낸 말은 아니고 독일에 계신 ‘한병철’이란 독일어를 쓰는 우리세대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된 ‘피로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분 저서에 ‘향기 나는 시간을 위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자면, 현대인들은 점이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은 그냥 생각이 없으면 시간이 일직선으로 시간이 간다고 생각하고, 약간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시간은 한 점, 한 점 지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점이 똑똑똑 흘러간다 하여 'point instant'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이런 개념으로 ‘찰나(刹那)‘라고 말을 하지요
1찰나(刹那)는 1/75초라고 한다.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가? 인도의 사회방식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본래 사유가 발달했기 때문에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가 실체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다‘라고 이렇게 인식했어요. 그런데 마음이 빨리빨리 지나가는데 선정에서 나왔겠지요? 마음을 관찰한 결과 마음의 한 찰나가 심찰나(心刹那)라고 하여 1/75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화나 TV를 보면 1초에 27번 사진 찍은 것이 변하면, 우리는 시각적 착각으로 인하여 연속된 것으로 보이지요? 그 심찰나가 끊임없이 지나가기 때문에 사물이 전부 다 연속체로 보입니다.
그런데 점시간(點時間)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우리가 여기서 비평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전체로 일관되지 못하게 하나의 의미로 베풀지 못하고 뚝뚝 떨어져 나가는 삶, 그것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면, 캔저스의 ‘Dust in the Wind' (바람속의 먼지일 뿐이죠) 그런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것입니다. 고전 클래식으로 들어갈 정도의 유명한 음악이 되었지요.
팝송 가사에서도 이렇게 불교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everything dust in the wind’ ‘우리 모두 바람속의 먼지일 뿐이죠.’
‘just a drop of water in an endless sea' '넓은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일뿐’
‘crumbles to the ground though we refuse to see’ ‘대지의 먼지로 사라져 갑니다.’
이렇게 관조하지 않는 삶은 부서져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항상 현재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현재는 금방 무료해지고 진부해지고 싫증을 잘 내요. 뭐 좋은 것이 없는지 다음 순간으로 옮겨 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입니다. 집에 좋은 거 다 가져다 놓고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녀가 만나 배우자로 삼았는데 문득, 세월이 지나면 더 좋은 사람을 찾게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도 다 들여놓아도 얼마 못가 싫증을 내죠.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습관으로 마약을 찾기도 하지요. 우리가 지금 그 시점에 딱 와 있습니다. 항상 불만족에서 만족을 찾아서 현재의 불만족을 미래에 투사하면서 날아가는 이러한 삶을 산다면 조금도 여기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선정(禪定)이 전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향기 있는 삶'은 어떤 것인가?
시간에 대해 그 의미를 부여해야합니다. 불교야말로 아침노을과 같고, 저녁노을과 같고 은은한 달빛 같이 우리의 삶의 백그라운드가 되어줍니다. 불교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뒷받침 해주는 가장 좋은 대서사라고 할까? 큰 의미체계입니다.
일상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에 불교를 선택하신 것은 탁월한 선택입니다.
너는 왜 사는가? 보현행원을 하기 위해 산다, 하루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의 삶은 내가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아득한 과거생 에서부터 문득 길을 찾다보니 보살의 길을 찾아 여기에 왔다는 것입니다.
의심 없이 바쳐도 좋은 하루, 의심 없이 바쳐도 좋을 나의 일생을 보살의 행원으로 살고 있다. 이렇게 강렬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불자라면 절대로 우울하거나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불자 안에서 흔들린다면 거기에 대해서 깊은 정착을 못하셨거나 불교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는 스스로 구현해야 합니다. 불교는 자신의 의미를 찾는 일에 있어서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향기 있는 삶이란?
일관되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니면, 불교를 만날 때부터 인연이 다할 때까지 아낌없이 나의 하루하루가 의미의 끈으로 이어져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수정 염주와 같을 때, 스스로 환희에 차고 다시 그 의미를 보현행원에 회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향기 있는 삶입니다.
세 번째 삶이 관조적 태도 사색적 삶은 8정도와 6바라밀이다. 사색적 삶,
vita contenmplativa 비타 콘템플라티바(관조적 삶)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여덟 가지 바른길이다.
삶의 시간을 늦추고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페이스를 확보해야한다. 자기 시간을 살아야한다.
세계에 내맡긴(혹은 세계에 빼앗긴) 시간을 회수하라. 세상에 종속된 시간, 노예의 시간, 노동의 시간이 아닌 자기를 위한 시간을 살아야 한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삶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정혜(戒定慧)입니다.
계(戒)는 질서 있는 삶, 정(定)은 평화로운 삶, 혜(慧)는 관조하는 삶, 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다음엔 가벼운 주제로, 2년 전에 나온 ‘교실 안의 야크’ 라는 부탄 영화를 보셨습니까?
행복지수(GNH)가 세게 최고인 나라에서도 이민 가려는 사람이 있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부탄에서 많이 배우고 견문이 넓은 사람일수록 자기 나라를 떠나 서양으로 나가려 한다.
그렇다면 교육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귀의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를 ‘교실 안의 야크’라는 영화에서 배울 수 있다.
세상에 바치는 노래 : 마크의 노래(목동이 야크에게 불러주는 노래)
높은 산 속 풀과 샘물의 소중함을 야크는 알지. 목동이 찬미하는 건 순수한 마음이에요.
깨끗함을 잃지 않은 채 만년설로 뒤덮인 땅이 우리 마음과 같기를 바라죠.
(야크가 목동에게 들려주는 노래): 우리 인연은 끝나지 않으리. 이번 생 아니면 다음 생에 늘 그랬듯 집으로 돌아가리.
자신에 물어볼 질문 : 나에게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 있는가? 다시 태어나도 돌아오고 싶은 고향이 있는가? 당신에게는 세세생생 다시 반복된다 해도 기꺼이 살고 싶은 삶이 있는가? 여기에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를 보살의 원력과 연관 지어 해석해보려 한다.
<지금의 인생과 똑같은 삶을 백만 번 반복하더라도 그런 삶을 기꺼이 살겠느냐?>
네가 살아온 삶을 백만 번에 다시 백만 번을 더 반복해서 산다면 너는 어떻겠는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맴도는 길은 탈출구가 없는 무간지옥일까, 아니면 축복받은 삶일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아침을 맞는 것이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인가?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으니 억지로 살아야 하는가?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 다가오는 그대로의 삶’을 크게 받아들이는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네 운명을 사랑하라)가 니체의 깨달음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너의 세계를 사랑하라, 네 삶을 사랑하라. 지금 주어진 네 인생을 사랑하라.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자. 수없는 생 동안 나고 죽고, 죽고 날 때마다 인간의 비극적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원력(願力, 이것이 바로 ‘권력의지’ 가 승화된 형태이다)을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자.
그러면 길고 긴 윤회의 세월이 고해에서 해탈하는 지혜를 닦으며, 타인에게 봉사하는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이지 않겠는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일러 보살(Bodhisattva, 보디샤트바, 줄여서 보살)이라한다.
이 세상은 사랑으로, 빛으로, 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싯다르타가 가신 길, 보디삿타의 길을 간다.
<보살의 아모르파티>
오늘 같은 아침을 백만 번을 반복하더라도 난 매일 그런 아침을 맞으리다.
오늘 같은 날을 백만 번을 반복하더라도 난 매일 그런 날을 살리라.
금생과 같은 삶을 백만 번을 반복하더라도 난 기꺼이 그런 삶을 살리라. 감사합니다.
♬ 찬탄곡 : 이 공양 받으소서(변재근 작시, 마상원 작곡) 마하보디 합창단 ♬
부처님의 법 크고 넓어 듣고 얻기 어려워 그 법을 얻을 때까지 지혜 공양 올리오리다
부처님의 가르침 한없고 깨우침이 멀다 해도 그 가르침 배울 때까지 정진 공양 올리오리다
부처님의 제자 되기 합장하는 중생마다 진정한 보리심 내기를 서원 공양 올리오리다
부처님의 대자대비 중생계에 드높이 사 발원 내는 마음마다 성불 공양 올리오리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발원문 낭독 : 불광법회 부회장 무아 거사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법회가 끝나고 법당 곳곳에서 구 법회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일요 법회를 위해 청결 및 좌석 배치에 수고해 주시는 청정팀의 수행정진 모습입니다.
일요 법회가 끝난 후에 대웅전에서 금강경 독송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이 번주에도 불광사, 동명사, 화광사, 봉은사, 조계사 앞에서 1인 시위 동참하시어 수행 정진하고 계신 불광 형제분들 모습,
늘, 수고 많으십니다.
우 리 는 횃 불 이 다. 스 스 로 타 오 르 며 역 사 를 밝 힌 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밤새 작업을 하셨네요.
로켓작업~
오디오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불안정하고, 저로서는 스님의 말소리도 알아듣기 힘들더라고요..
유튜브로 들어도 어려웠는데 마음님이 정성껏 옮겨주시니 복습할 수 있어 좋습니다_()()()_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네 바람의 노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