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깔고 자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서로 사랑하게 되면 댓잎 자리면 어떻고 차가운 냉방인들 어떠하랴.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자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거나 정이 멀어 마지못해 사는 부부라면 비단 금침 속에서 잔다고 한들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추운 겨울에 댓잎 자리 깔고 잠을 자도 서로 부둥켜안고 정을 나누면서 자는 것이 좋을까, 따뜻한 비단이불 속에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자는 것이 좋을까.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 해도 이 좋은 세상에서 추운 냉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얼음장 같은 차가운 방에서도 정이 넘치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 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얼음 위에서 얼어 죽어도 님과 함께라면 이 밤을 더디게 새우고 싶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라면 얼어 죽은들 어떠하리. 얼마나 사랑이 절실했으면 그렇게 노래했겠나. 滿殿春은 춘삼월, 꽃피는 봄이라 後庭에 봄이 오니 바람에 꽃잎이 하늘거리는데 空房에 갇혀있는 思春의 젊은 麝香각시는 어찌할 건가. 힘이 넘치는 젊은 남정의 넓은 가슴이 그립다. 사향각시는 버드나무 물오르듯이 온몸이 한껏 부풀어 오는데 마음은 한없는 우수와 春情에 잠긴다. 뒤척뒤척 잠 오지 않는 외로운 밤에 서쪽 창문을 여니 달은 桃花 가지에 반쯤 가린 채 떠있다. 달빛 속에서 복숭아꽃 방싯 웃고 있는데 나는 어찌 이 밤을 외로이 지내느냐. 죽어서 넋이 되어서라도 함께 살자했건만, 님은 언약을 잊으셨는지.
뒤뜰에 있는 소(沼)에 오리 암수 한 쌍이 다정스레 노니고 있다. 오리는 넓은 여울을 두고 어찌 後庭에 있는 좁은 늪에서만 자는가. 늪에는 얼음이 얼었는데 거기 외로우면 짝지어 노니는 오리처럼 흐르는 여울에 가야지.
석양에 서창 너머에는 복사꽃이 피어 있다. 젊은 각시는 복숭아꽃에 넘나드는 나비가 부럽고, 춘정이 그리운데 어찌 空閨의 肉情을 홀로 감당할 수 있었겠나. 외로운 여인들은 그랬을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어 꽃잎끼리 부비고 부딪히듯 밤에 女體들끼리 서로 맞대고 애무하며 육정을 발산하니 內密한 宮中의 宮房에도 가쁜 숨소리가 宦官을 한숨짓게 했을 것이다.
꿈에서 그려본다. 남산에 자리를 펴서 옥산을 베고 누워 錦繡山 이불 안에 사향각시를 안고 누워 약 든 가슴을 서로 맞추자. 아! 님아, 우리 평생을 헤어짐이 없이 살았으면 하고 꿈속에서 하소연한다.
조선조, 金守溫이 만전춘별사를 한시로 이렇게 읊었다.
* 시월의 언 얼음 위
차가운 댓잎 자리 깔고
님과 더불어 얼어 죽어도
새벽닭아 울지를 마라.
醫方類聚, 釋迦譜를 편찬한 김수온이 아무리 만전춘 가락이 좋다고는 하지만 선비가 비리지사(鄙俚之詞)를 읊었으니 그 시대에도 이런 노래를 귀천이 없이 사람들 입에 膾炙되였던 모양이다. 만춘전별사를 선비들은 점잖게 말해서 봉황이 상열하듯 하다하여 봉황음(鳳凰吟)이라고도 했다.
만전춘과 흡사한 후전진작(後殿眞勺)이라는 가사가 있다. 조선조의 만전춘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가사의 원문이 전해 내려오지 않아 어느 선비가 복원한 한시를 풀이하여 여기에 옮겨 본다.
혼자 누워 생각해도 어느 누가 찾아오나
이런 저런 전차로 그님의 사정으로
살며시 찾아와 밤새도록 노니고 싶네.
누운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님이 오랴
이제 누운들 어느 잠이 벌써 오리
차라리 앉은 곳에서 긴 밤이나 세우자.
공방(空房)을 지키고 聖德을 기다린다
내종(乃終)과 시종(始終)은 모르지만
그 때는 서로 서로 괴시었던 것인데
아, 내 황모시필(黃毛試筆) 먹을 갈아 창 밖에서 기다리면
이제 돌아가면 얻을 법도 하건만
누구든 어디 가거든 그려보면 알리라.
조선조 태종께서도 이 후전진작을 좋아는 하셨지만 맹사성, 변계량, 허주(許椆)를 보고 가락은 좋으나 그 가사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노래 가사가 너무 卑俗해서 그랬던가. 이 노래는 혼자 춘정을 애원하는 노래다. 꿈꿀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절실한 기원이다. 차라리 비련으로 끝나는 슬픈 사랑이 되어도 좋다는 절규다. 이것이 바로 공규소부(空閨少婦)의 애원처창(哀怨凄愴)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님에 대한 가망 없는 사랑의 포기와 절망이다. 지난 날 서로 사랑했던 시절도 있었건만 그것은 흘러가버린 悲戀, 차라리 그런 괴이심이 있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을. 황시모필(黃毛試筆 : 模擬男根: 여자들의 수음의 도구의 하나)이란 무엇이냐. 옛날 궁중 궁녀들은 평생을 살아도 남정네를 가까이 할 수 없으니 각신(角身)이란 模擬男根으로 자위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 일이 궁녀들에게만 있었겠느냐. 명문 고관의 양반 댁 마님이나 여염집의 청상과부들도 그것으로 육신을 달랬을 것이다. 부풀어 오른 하얀 허벅지에 은장도로 생채기를 내고 피를 흘려도 참을 수 없는 것이 불타는 육정이거늘. 은밀한 각신이 여인의 마음을 조금은 달랬을 것이다. 먹(墨)은 여인의 陰水를 뜻하니 毛筆을 먹에 담그는 것을 거기에 빗대어 점잖은 선비들이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춘정은 그렇게 오는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사춘기라는 것이 있어 이성이 그리워지고 육욕을 참지 못하여 선을 넘는다. 구중궁궐의 궁녀들은 얼마나 절실했겠나. 한 때 궁중에서 한 房을 쓰는 궁녀끼리 음행한다는 소문이 돌아 궁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니, 인간의 욕정은 감당할 수 없는 것. 점잖은 사대부 청상과부도 그 때문에 목매어 죽는 여인도 있지 않았는가. 고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은 육체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세상에 일어난 많은 불행과 비극도 모두 여기에서 연유된 것.
사랑이란 댓잎 자리 위에서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서로를 위하는 것이면 어디서라도 따뜻한 것이 사랑이리라. 사랑은 고대광실이 아니라 초가집이라도 좋다. 아무리 호화로운 궁전 같은 아파트, 멋진 승용차라도 참 사랑이 없다면 차가운 댓잎 자리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 十月層氷山
寒凝竹葉棲
與君寧凍死
遮莫五更鷄
2. 황조가(黃鳥歌)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나라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죽자 태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를 지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니 유화는 이미 어떤 남자와 사통하여 아이를 낳으니 낳은 것은 큰 알이었다. 그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고주몽이니 자라서 고구려의 첫 임금 동명성왕이 되었다. 고주몽의 아들 유리왕 또한 출중하여 홀본(忽本)에서 국내성으로 터를 옮겨 비류국(沸流國)과 이웃 나라를 통합하여 넓은 卒本 땅을 평정했다.
유리왕(留離王)은 비류국의 다물도주(多勿都主) 송양(松讓)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은 송씨 왕비를 끔찍이 사랑하였으나 왕비는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송 왕비가 죽음에 왕은 골천(鶻川) 출신의 여인 화희(禾姬)를 계비로 맞이하였지만 아리따운 나이에 세상을 뜬 전처 송 왕비를 잊지 못 했다. 왕은 계비 화희가 있음에도 죽은 송 왕비가 그리워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자주 사냥을 나갔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깊은 계곡에서 묘령의 처녀를 만나니 그 처녀는 얼굴도 아름답지만 죽은 송 왕비를 너무나 닮아 왕은 그 처녀에게 흠뻑 빠졌다. 처녀는 漢族인 소금장수 부호의 딸로 이름은 치희(雉姬)였다. 왕은 화희를 동궁왕후로, 치희를 서궁왕후로 하여 동궁과 서궁 사이에 양곡(凉谷)이라는 골짝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살게 했다. 왕은 두 여인을 妃로 맞이했으니 의당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지만 젊은 여인의 마음이 어찌 그리하겠는가. 두 왕비는 마주치기만 하면 다투거나 서로 시기하였다. 왕이 한번은 기산(箕山)으로 이래 동안이나 사냥을 나간 사이에 둘이 또 다투었다. 한 여인은 고구려 여인이요 한 여인은 한(漢)족이니 의(宜)가 좋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남자가 두 여인을 거느림에 정이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기울면 어떤 여인이 참고 견디겠나. 왕은 치희를 더 사랑했으니 왕이 없는 사이에 화희는 치희를 보고 ‘너는 漢나라의 婢妾으로 내게 어찌 그리 무례하나.’ 하고 질책을 하니 치희는 쌓인 앙금과 멸시를 참지 못해 짐을 싸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사냥에서 돌아온 유리왕은 급히 말을 몰아 치희의 뒤를 쫓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왕은 망연자실하여 한숨을 몰아쉬는데 마침 나무 위에서 꾀꼬리 한 쌍이 즐거이 짖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왕은 그 소리가 하도 처량하게 들려 노래를 지어 부르니 그것이 황조가이다.
* 펄펄 날아 오가는 꾀꼬리여
암컷 수컷 서로 의지하며 사네
생각느니 나는 외로운 사람
누가 있어 함께 가리.
얼마나 사랑했으면 나는 외로운 사람이라 했고, 누가 있어 함께 가리 했겠나. 용맹스러운 일국의 제왕이 쏟아내는 한탄치고는 어쩌면 너무나 연약한 소리다. 왕이라도 진정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갓 감상에 젖은 소년 같기도 하다. 유리왕은 화희 보다 치희를 더 사랑해서 그랬을 것이다. 돌아간 송 왕비와 닮아서 일까 아니면 송 왕비가 너무나 그리워서 그랬을까. 마침내 왕은 죽은 송 왕비의 다음 동생을 취해 또 妃로 맞았다니 죽은 송 왕비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리했겠나.
유리왕은 송씨 여형제 둘을 왕비로 맞은 셈이다. 화희에게서 도절(都切)과 해명(解明)이 태어나고 두 번째 송씨에게서 무휼(無恤)과 여진(如津)이 태어나니 화희 소생의 왕자인 도절, 해명을 내치고 둘째 송씨 소생인 무휼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가 고구려 세 번째 임금인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왕의 죽은 송씨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연유했을 것이다.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에도 황조가와 유사한 시(和歌)가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황조가에 나오는 새는 꾀꼬리인데 일본의 화가에 나오는 새는 원앙이라는 데 차이가 있을 뿐 시의 감흥은 참으로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이를 ‘원앙가(鴛鴦歌)’라고 부른다.
** 산천에 노니는 원앙새 두 마리처럼,
사이좋고 사이좋은 내 아내를 누가 데려갔는가.
나무 가지마다 꽃은 피었건만,
어찌하여 사랑하는 내 아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버리면 애틋한 이별의 정은 가슴에 응어리져 슬픈 노래가 되고 시가 되었다. 제왕이던 초야에 묻힌 백성이던 한 사내에게 두 여인이 있을 때 여인 사이의 시기는 필연일 것이고, 여인의 시기는 태어난 자식들 사이에도 다투게 되어 왕국일 때는 역사를 바뀌게 하고 서민일 때는 불화를 가져와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말년에 여인들이나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며 시기하고 화합하지 못하면 왕이라도 생각하느니 외로운 사람, 누가 있어 함께 가리하고 노래했다. 제왕도 죽을 때는 자기 육신의 죽음보다 더한 외로움을 안고 떠나갔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물기 없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는다. 이 밤(栗)이 움이 돋아 싹이 나는 그때, 내 님과 이별하게 하소서. 굽지 않는 밤이라도 물기 없는 모래밭에 밤을 심으면 그 밤이 싹이 틔는가. 하물며 옹(瓮)솥에 구워진 밤이야 어찌 싹을 틔우겠는가. 밤 다섯 되가 싹이 틔거든, 밤 다섯 되가 싹이 틔거든 그 때, 님이여 떠나소서. 그 밤이 싹을 틔우는 때가 언제인가.
삭삭기 세모래 별에
삭삭기 세모래 별에
구운 밤 닷되를 심고이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 나거시아
그 밤이 움이 돋아 싹 나거시아
유덕하신 님을 여의아와지이다
옥돌로 연꽃을 새기고 그 연꽃을 바위 위에 접을 붙인다. 그 꽃이 삼동(三冬)에 피어야만 덕행이 있으신 우리 님을 이별하고 싶다. 옥돌로 연꽃을 새긴다고 해도 그것이 어찌 꽃이 피겠는가. 무쇠로 융복(戎服 : 옛 군복)을 재단하여 철사로 꿰매고 주름을 박아 그 옷을 입고 무쇠 옷이 완전히 해진 뒤라야만 내 님과 이별하고 싶다. 무쇠로 큰 소(牛)를 만들어서 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매어 놓는다. 무쇠로 된 소가 어찌 풀을 뜯겠는가. 무쇠 소가 쇠로 된 풀을 먹어야만 덕행이 있으신 우리 님을 이별하고 싶다. 이별은 있을 수 없다는 애절한 하소연을 어찌 그렇게 절실하게 표현했는가.
고려사 樂誌 *오관산(五冠山)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 “나무도막으로 깎은 당닭(唐鷄)을 벽(壁)에 앉히고, 이 닭이 꼬끼오 홰를 칠 때까지 그렇게 오래오래 사소서.”했다. 천지가 개벽해도 나무로 깎은 닭이 울 일이 없으니 죽지 말고 영원무궁토록 사시라는 축원이다. 이별을 말자는 간절한 기원이다.
“도련님 이제 가면 언제 오려 하오. 태산중악 만장봉이 모진 광풍에 쓰러지거든 오려 하오. 금강산 상상봉에 물 밀어 배 띄어 평지 되거든 오려 하오. 기암절벽 큰 바위가 눈비 맞아 썩어지거든 오려 하오. 암벽 위에 묵은 팥 심어 싹 나거든 오려 하오. 병풍에 그린 黃鷄 두 나래 둥둥 치며 사경(四更:새벽) 일점에 날 새라고 꼬끼오 울거든 오려 하오.”춘양전의 한 구절이다.
병풍에 그려진 누른 닭이 꼬끼오 하고 울 때를 기다리려면 그 때가 언제인가. 그림에 그려진 닭이야 울 수도 없고, 금강산 상상봉이 천지개벽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그 봉우리까지 물이 차겠는가. 춘향이 이 도령을 그렇게 기다린 것이다.
내 고향(경주)에도 이와 비슷한 민요(향토 노래)가 있어 불러 본다.
‘이별 노래’의 노래다.
님아 님아 우리 님아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병풍에 그린 닭이
꼭교 울면 다시 올래
옹솥에 삶은 밤이
싹이 나면 다시 올래
고목나무 새싹 돋아
꽃이 피면 다시 올래
님아 님아 우리 님아
꽃이 피면 다시 올래
님아 님아 우리 님아
병자년 보리 숭년에
장대장아리 웃장단그려
잔 엿가래 굵은 엿가래
사다주던 우리 님아.
옹솥에 삶은 밤이 싹이 난다든가, 병풍에 그린 닭이 꼬끼오 운다든가 하는 표현들은 너무나 흡사하다. 옛날 신라인에게 불리어졌던 노래가 고려 때 정석가가 되고 내 고향 경주에까지 천년을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그래도 이별은 있었다. 님이 떠나든 날, 그는 조용히 맹세했다. 천년을 떨어져 살지라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또한 나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느냐. 어쩌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 깨진다 한들 설마 구슬을 꿰맨 끈이야 끊어지겠나. 당신이 죽어 우리 헤어져 천 년을 지낸다 한들 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야 지워지겠는가. 우리 사랑의 맹세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 세상사는 살다보면 우연히 닥치는 불행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 함께 살다가 구슬을 놓쳐 바위 위에서 깨어지듯 죽음과 같은 이별이 있더라도 무쇠로 된 언약이 있었으니 구슬은 깨어져도 끈은 그대로이니 어찌 헤어지는가. 우리를 묶어 놓은 정분이란 무쇠 끈보다 더 단단하다. 누가 우리 사랑을 때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 변했다. 만나고 헤어짐이 너무나 쉽다. 혼례식장 주례 앞에서 한 언약을 첫날밤을 못 넘기고 돌아서는 쌍도 있으니 무쇠 끈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너 아니면 나 죽는 다고 부모에게 애걸복걸 발버둥치던 짝들이 1년이 채 못 되어서 무수히 갈라진다. 얼마나 많이 헤어지면 네 쌍 중에 한 쌍이 이별을 한다니. 쉽게 헤어지는 세상이 되었다. 천년을 살아도 헤어짐 없이 사는 연분은 지금 세상에는 불에 구워진 밤에 싹이 나는 일인가. 성격이 맞지 않아서, 시부모를 모시라니까, 열쇠 세 개를 손에 쥐게 해 주지 않으니까. 돈을 벌어오지 않으니까. 검은 머리 흰 머리 되도록 백년해로 하자던 맹세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세상의 因緣들이 엷어만 간다. 건드리면 찢어지고 바람 불면 날라 가고. 신라인이나 고려인의 인연은 천년을 간 것인데.
반 백년이 다 되도록 우리 함께 탈 없이 살아왔다. 풍파도 많았던 세상에서 헤어지자는 말없이 살았다. 이제는 물기 없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어 그 밤(栗)이 움이 돋아 싹이 나지 않는 한, 묶어 놓은 구슬 끈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옥돌로 연꽃을 새기고 그 연꽃을 바위 위에 접을 붙여 엄동설한에 꽃이 피면 그때 헤어저도 좋을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 부부 인연은 질겼다. 오래오래 함께 괴이면서 살리라.
나무 도막으로 당닭을 깎아
젓가락으로 집어 벽에 앉히고
이 새가 꼬끼오 하고 때를 알리면
어머님 얼굴은 비로소 서쪽으로 기우는 해처럼 늙으시리.
4. 가시리
님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슬픔은 그지없다. 사랑했던 님을 죽음으로 떠나보낼 때는 한이 맺힐 것이다.
정말 가시나요, 나를 버리고 기시나요. 나는 어떻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나요. 가지마세요. 그러나 떠나는 님은 말이 없이 떠나간다.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간다.
가시리 가시리 있고
버리고 가시리 있고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있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세라
설은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오소서.
떠나가셔도 가시는 듯 돌아오시기를 기원하는 애원의 소리다. 떠나는 님은 말이 없고 다시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나간다. 신라의 여인 천관(天官)은 장검으로 애마의 목을 베는 김유신이 한없이 야속했을 것이다. 죽은 온달(百濟 武王)은 사랑하는 아내 평강공주와 헤어지기 싫었는지 그의 관(棺)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주는 온달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관을 잡고 호소했다. “사생이 정해졌으니 어호라 잘 가시라(死生決定 於乎歸矣)”하니 꼼짝 않던 관이 드디어 움직였다. 온달은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이 너무나 싫었을 것이다. 평강공주는 온달을 떠나보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北邙山에 가시는 님이 돌아올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시는 듯이 돌아오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가시리는 이별의 한을 노래했다. 그것은 여인의 애원이고 또한 절개이기도 하다. ‘약산의 진달래꽃’은 님을 위해 가시는 길에 꽃을 뿌린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리다.’, 가지마시라, 그리고 나를 사랑해 주오 하는 간절한 애원이다.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는 마음이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법. 살아서 헤어져도 슬픔을 주고 산자가 죽은 이를 떠나보낼 때는 통곡이 된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헤어짐은 실연이란 아픔을 가슴에 묻고, 情人을 저승으로 떠나보냄은 恨을 가슴에 묻는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두 번 이별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인들은 성장하여 남의 가문에 출가할 때 부모 형제를 뒤 두고 떠나야하고, 부모가 늙어 세상을 떠날 때는 청산에 부모를 묻지만 어쩌다 자식이 먼저 산으로 갈 때는 부모 가슴에 자식을 묻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 얼마나 정감이 넘치는 노래인가. 어릴 적, 이 노래를 무던히도 불렀다. 친구들과 놀다가 헤어질 때도 불렀고 만났던 여인과 헤어질 때도 불렀다. 이런 옛 가사 때문에 내가 고시가를 좋아했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 반 백 년 전에 불렀던 그 노래를 잊을 만 한데 아직도 못 잊는다.
우리에게는 이별의 노래가 많았다. 부관연락선을 타고 떠나는 이별도 있었고, 목포의 눈물도 있었다. 잠시 잠간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남으로 떠난 사람들이 반 백년이 넘도록 만나지도 못하고 편지 한 장 보내지 못하는 슬픈 이별이 있다. 지척에 두고도 영영 만나지 못하는 이별이 남과 북 사이에 있다. 북에는 장군의 노래만 있고 가시리의 애절한 抒情은 없었던가.
가시리는 이별의 한이다. 백년을 같이 살자고 기약했다가 헤어지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지금은 잠시 잠간 만났다 헤어지니 가시리를 불러볼 그런 이별이 없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니 이별의 노래를 부를 겨를도 없이 떠나 가버린다. 가시리의 서정이 무디어 간다. 이별은 너무나 쉽다.
첫댓글 청산선생님, 교과서에서 읽고 외우고, 보고 또 본 삼국시대, 고려시대 문학 작품에 대해 복습 잘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