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와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사상 오동춘 시인,짚신문학회 회장 차례 1.들어 가는 말 2.포은圃隱 정몽주의 삶과 사상 3.애국시조의 효시 단심가 4.도산島山 안창호의 애국가사상과 단심가
1.들어 가는 말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시조 단심가丹心歌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가 지은 우리 애국가와 사상적 측면에서 어떤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 보는 것도 뜻 깊은 일로 생각된다 포은과 도산의 애국사상 관계를 이미 필자는 종보宗報 20호<2012>에 밝혀 쓴 바가 있다 그러나 포은의 단심가 시조가 애국시조의 효시를 이루며 고려 회고가,조선조 성삼문成三問<1418-1458>을 비롯한 사육신 시조 등에 선비사상 애국사상 시조상의 형식 문제 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 살펴 보는 것이 본 원고의 집필 목적이 된다
2.포은 정몽주의 삶과 사상 포은 정몽주는 고려 27대 충숙왕 6년 12월 영천군永川郡 동우향리東愚巷里 에서 명유名儒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인 운관云瓘 아버지와 영천 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 났다 첫 이름은 어머니가 임신 중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 뜨려 놀라 깨면서 낳았다 하여 몽난夢蘭으로 불렀다 정몽주가 아홉 살 되었을 때 낮잠 중에 흑룡黑龍이 마당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기어 오르는 꿈을 꾸면서 놀라 잠을 깨고 밖에 나와 보니 정몽주가 배나무에 기어 오르며 놀고 있는 모습을 어머니가 본 것이다 그래서 정몽주 이름을 그 때 몽룡夢龍으로 고쳐 불렀다 몽주夢周라는 이름은 두 번이나 꿈을 둘러 낳은 아들이므로 관례冠禮를 치루고 나서 부른 이름인 것이다 자는 달가達可 아호는 포은이다 포은은 어려서 글 읽기를 좋아하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21세 때 감시監試에서 3등 합격을 했다 3년 뒤에 삼장三場에 응시하여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 이 세 번의 시험에서 연달아 장원을 차지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 11년<1362>에 예문검열禮文檢閱 벼슬로 관계에 진출하여 좋은 정치 업적도 남겼다 공민왕 13년<1364> 병마사兵馬使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女眞의 삼선三善 삼개를三介 화주和州 에서 격파했다 전농시승典農侍丞,예조정랑禮曹正郞,사성司成을 거쳐 공민왕 21년 <1372>3월 서상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당시 명나라 서울 남경에 갔다 집에 두고 온 종성宗誠 종본宗本 두 아들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신흥 명나라 황제 주원장을 만나 하夏나라 평정 축하와 고려 유학생을 받아 달라는 외교 성과를 거두고 귀국했다 우왕 1년<1375>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으로 원元나라 순제가 세운 북원北元을 섬기지 말자고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에게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명나라의 세력이 커지자 유배에서 풀려 우왕 원년<1375>에 나라 안에 들어 와 기승을 부리는 왜구 문제로 일본 규슈로 건너 갔다 규슈 탐제 이마까와 아까네<周孟仁>를 만나 왜구의 고려 침략을 막아 달라하여 문제 해결을 이루고 귀국길에 그간 포로로 잡혀 갔던 윤명尹明 안우세安遇世 등 수백명을 데리고 함께 온 것이다 포은의 외교능력이 탁월함을 보여 준 것이다 우왕 6년<1380>에 이성계를 따라 가서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왜구倭寇를 물리친 공로로 밀직제학密直堤學에 올랐다 우왕 10년<1384>에 정당문학政當文學으로 명나라에 외교 활동을 펼치고 와서 우왕 12년 다시 명나라에 외교차 가서 세공歲貢 면제의 업적을 이루고 귀국하여 포은은 영원군永原君에 피봉되고 삼사좌사三司左使 벼슬에 이르렀다 우왕 14년<1388> 명나라는 고려에 트집을 잡아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 요동에 귀속시키겠다고 주장해 왔다 우왕은 최영崔營<1316-1388>장군을 팔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아 요동 정벌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반기를 들어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개성에 이르자 친원파 최영을 유배시켰다가 끝내 처형했다 중앙 정권의 실권을 잡은 이성게는 우왕,창왕도 몰아내 죽이고 공양왕을 세웠다 포은도 처음에는 정국 수습에 협력하여 이성계를 도왔다 그 공로로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되었다 포은은 정치 경제 군사뿐만 아니라 문화 학문면에도 크게 능력을 발휘했다 수도 개성에 둔 오부五部에는 각각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유학을 진흥 시켰다 사회 윤리 도덕 확립에 힘쓴 것이다 그간 불교의식에 따르던 관혼상제를 주자가례朱子家禮로 행하게 했다 공양왕 4년<1392> 2월에 그 동안 고려 법령에 대명률大明律과 지정조격至正條格을 참작하여 신률新律을 새로 만들어 문란해진 법질서를 바로 잡아 실천해 보려 했다 포은은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다 고려 말기 원나라로부터 들어 온 성리학<일명 주자학>에도 포은의 깊은 학문적 연구 때문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했다 공민왕 16년 성균박사로 있을 때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강설講說할 때 포은의 강설이 특이하게 뛰어났던 것이다 포은은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려 그 문하에서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 강호산인江湖山人김숙자金叔滋<1389-1456>김숙자아들,점필재佔畢齎김종직金宗直<1431-1492>,한헌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등에 전승 되었다 공양왕 4년<1392> 3월에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는 보고를 받자 왕은 아우 우瑀와 함께 이성계에게 세자를 황주까지 나가서 마중하게 했다 이성게는 돌아오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다쳤다 이 기회에 해주로 이성계에게 포은은 문병을 가려했다 포은은 이성계 신흥세력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시행하려 할 기미가 보이므로 이성계 측근인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조박趙璞 등을 대간臺諫 김진양金震陽으로 하여금 선란조언죄煽亂造言罪로 귀양 보내고 장차 이성계 부자도 제거할 생각으로 이성게 문병을 가려했던 것이다 이 기미를 일찍 알아 챈 이방원<1367-1422>은 귀로 길에 있는 아버지 이성계를 속히 개성으로 오게 한 것이다 이성계가 생각보다 빨리 개성에 도착한 것을 본 포은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사흘간 고민에 빠졌다 집에 귀가한 아버지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몇 번이나 포은 정몽주 암살을 권유했으나 이성계는 들어 주지 않았다 그 때 마침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 찾아 와서 지금 결단을 내려 처치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건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왕후장상王候將相에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하는 말로서 주저하는 이방원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방원은 전탁의 말에 힘을 얻어 포은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방원은 심복 부하인 조영규趙英珪 조영무趙英茂 고여高呂 이부李敷 등에게 포은 암살계획을 맡겼다 이런 끔직한 포은 암살계획을 이성계의 형인 원규元楏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포은에게 귀뜸해 주었다 포은은 자기의 암살계획을 잘 알면서도 그 허실을 살펴보기 위해 대담하게 이성계의 문병問病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이성계를 방문한 포은을 본 방원은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조영규 등에게 포은 암살 지시를 내렸다 포은은 귀가길에 그 무렵 죽은 전직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 집에 들러 조의를 표하는 동안에 포은 암살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가喪家에서 만난 그의 문생門生 매헌梅軒 권우權遇도 포은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 때 무사武士 몇 사람이 궁전弓前을 지닌 채로 포은의 말 앞을 가로 질러 달렸다 무사들이 중신重臣 말 앞을 가로 질러 달리는 행위는 국법위반 사항이었다 심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포은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따르던 권우를 보고 “그대는 속히 집으로 돌아가라 나를 따라 오지 마라” 이렇게 말한 포은은 제자 권우를 돌려 보냈다 이미 선죽교 다리 근방에 오래 기다리고 있던 조영규가 포은을 철추로 쳤다 맞지 않았다 조영규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렸으나 뒤 따라와 말머리를 쳤다 포은은 말등에서 떨어져 달아나려 했으나 마침내 고여 등이 후려치는 칼에 쓰러졌다 그 때 포은 나이 56세였다 34왕 475년<918-1392>의 고려를 끝까지 지켜 보려 목숨 걸고 투쟁하다 개성 선죽교 다리 위에서 순국한 포은 정몽주는 짚신나라 만고충신이며 길이 이 겨레의 가슴에 순국정신을 남긴 만고의 거울이 아닐 수 없다 3.애국시조의 효시 단심가 고려 말기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함께 여말 충신 삼은三隱의 하나인 포은 정몽주는 불후의 명시조 단심가를 남겼다 이 시조의 창작 동기는 이성계의 문병을 갔을 때 정치야심 만만한 이방원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포은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렇게 하여가何如歌 시조로 포은의 내심을 알아 보려한 것이다 이방원은 고려 왕씨를 섬기다 조선 이씨를 섬겨 봄도 좋지 않으냐고 신의와 충절로 고려 왕조를 굳게 지키려는 충신 선비 포은의 가슴에 불의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포은은 불쾌한 하여가의 화답시조로 단심충절丹心忠節이 담긴 단심가 시조로 임향한 일편단심의 지조불변의 애국사상을 보인 것이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렇게 포은 정몽주는 유교이념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해와같이 밝게 자기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해동악부海東樂府 한역가漢譯歌에 보면 아래와 같이 한역 되어 있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렇게 한역된 단심가의 중심사상은 향주일편단심向主一片丹心에 있다 충신 불사이군의 충신 충절과 신의의 선비정신이 우리의 거울로 비치는 단심가 시조가 아닐 수 없다 경북대 총장을 지낸 서원섭徐元燮교수는 그의 저서 <시조문학연구>에서 단심가는 만고萬古 충신이 쓴 동서고금의 시가詩歌 중에 절조絶調로 높이 평가했다 시조 순국사상과 표현 및 삼장구조의 기교에 대한 평가로 볼 수 있다 안동대 이정탁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시조문학 연구>에서 단심가의 종장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은 바로 정몽주의 지조요 인격이요 생명으로 그 애국사상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도남 조윤제,장덕순 서울대 두 교수는 단심가 시조형식이 우리 시조형식의 전형적 모법시조로 보고 있다 특히 도남陶南 조윤제 교수는 단심가의 초장 중장의 점층적 언어표현 기교와 해와 달에 비유할만큼 문학적 가치가 높은 단심가는 한국시조 형식의 전형적 출발이며 그 사상적 내용의 가치는 충의 사상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사상을 잘 보여 주는 시조로 단심가의 시조가치를 사상과 표현면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곧 우리 시조의 역사와 특성을 도남 교수가 잘 말해 주고 있다 포은 정몽주가 이성계 문병을 갈 때 팔십대 포은 어머니는 아들에게 교훈적 시조 한수로 그 모성애를 잘 보여 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 더러힐까 하노라 이 시조는 까마귀 백로 두 날짐승의 흑백 색채감을 비유하여 음흉한 까마귀 모인 곳에 푸른 물결에 깨끗이 마음이 씻긴 아들 포은이 이성계 문병 가는 일을 사랑의 어머니 마음으로 만류한 것이다 까마귀와 백로의 대조적 시어 구사로 표현기교를 보인 포은 어머니 시조는 자녀교육의 정신교육 교재로 교훈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개성의 선죽교<전 選地橋.>다리 위는 오늘날도 비가 오면 빗물이 붉게 보이며 빗물도 사람인<人>자를 이루며 흘러 가고 선죽교 옆 포은 어머니 비석에는 비명에 간 아들 포은 생각에 눈물인양 축축한 물기가 흐른다고 한다 만고충신 포은이 남긴 단심가의 애국적 시조영향은 고려 말 이색,길재,원천석, 정도전 성여완 등이 남긴 고려 회고가에도 나라 겨레사랑 정신이 흐르고 있다 조선조에 오면 단심가의 충의사상적 영향은 사육신 시조를 비롯하여 많은 연군戀君 시조에 애국애족심이 잘 드러나 있다 오동춘 교수의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옛시조에 나타난 애국사상 연구>에서 밝힌 단심가의 애국사상적 영향은 사육신 피로 이어지고,임진왜란 때의 의병의 피로 경술국치 때 분사한 열사들에 의하여 찬연히 꽃 피었다 지금, 또 앞으로 순국적 애국사상의 거울로 길이 빛날 것이라 했다 송골松骨 오 동춘 교수는 포은의 단심가에 깃든 애국사상은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든 국민교육헌장 글 중에 나오는 “조상의 빛난 얼”로 이어져 있다고 보며 단심가는 자주,자아,민주,주체의식이 실존적 가치로 승화된 문학적 미적 가치나 민족주의 밑뿌리가 스며 있는 작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단심가를 삼단논법으로 추리해 보면 “일편단심”은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라는 초장 중장 개념보다 더 넓고 큰 개념으로서 이 두 개념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대전제로 내세울 수 있다 따라서 초장 중장은 소전제로 보게 된다 일편단심 대전제와 초장 중장의 소전제는 “님향한”의 표현에 종합되어 삼단논법의 결론은 종장에서 이루어진다 단심가의 삼단논법 가운데도 “님향한” 곧 향주일편단심이 가장 큰 애국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비록 고려 한 나라 왕씨에 대한 일편단심 충성이라해도 군신유의,군위신강의 삼강오륜의 유교이념이 절대가치로 승화된 단심가는 높은 차원의 애국시조인 것이다 한 왕조에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바친 희생의 충성심은 우리 조상들이 후세에 남긴 값진 애국사상이 아닐 수 없다 단심가에 애국애족의 순국정신,신념의 선비정신,나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희생정신이 산 거울로 비춰지고 있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화답시조로 창작된 단심가는 조선조 으뜸 사육신死六臣 매죽헌梅竹軒 성삼문 시조 두 수 충의가에 잘 이어지고 있다 추의가忠義歌 1.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 건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충의가 2.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夷齊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정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것인들 긔 뉘 땅에 났더니 매죽헌의 충의가 <1>은 단종복위 혁명을 도모하다가 김질 배신으로 발각되어 세조 앞에 잡혀가 가혹한 친국親鞠을 당하면서도 그의 독야청청 일편단심 충신불사이군의 군신유의 군위신강의 신의를 굳게 지켰다 호탕하고 활발하고 기개 푸른 성삼문을 죽이기 아까워 내시를 시켜 잠시 가둔 옥에 가서 내시가 이방원의 하여가로 성삼문이 세조 보고 나으리로 부르던 어조를 상감마마로 바꾸어 용서를 빌면 세조는 성삼문을 살려 신하로 삼고자했다 그러나 성삼문의 남자 네 아들 아우 셋까지 성삼문 보는 앞에서 다 죽여도 단심가의 임향한 일편단심이나 본인의 단종께 향한 독야청청 충의 지조는 결코 꺽을 수 없었다 성삼문의 일편단심 독야청청 지조는 불변임을 깨친 세조는 “내 앞에서는 난신이로되 훗날 충신 소릴 듣겠도다”라는 말을 궁중 내시 앞에서 말한 것이다 하늘에 해도 하나요 달도 하나이듯이 내 가슴 임도 단종 하나이기 때문에 세종 문종 고명의 신의도 지키며 단종복위 혁명을 도모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도 제거하려 했다 혁명도모 목적을 세조에게 한 팔이 날아 가고 배에 단군질로 배에 기름이 끓어도 독야청청 신의를 지켜 말하는 매죽헌 성삼문도 포은 정몽주처럼 만고충신이 아닐 수 없다 세조가 예견한대로 성삼문은 영조때 충신으로 명예회복이 되고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시호도 충문忠文으로 받았다 자를 근보謹甫 혹은 눌옹訥翁 아호는 매죽헌梅竹軒이라 했다 육신묘가 있는 노량진에 민절愍節서원 성삼문이 태어난 홍주에 녹운綠雲서원 ,단종 무덤이 있는 영월에 창절彰節서원 연산에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이 설치되어 성삼문 충정절개를 기리고 제향을 드리고 있다 충의가 <2>는 성삼문이 중국 이제묘 앞에서 지은 시조다 은殷 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살해하고 주周 나라를 세우려는 주무왕에게 신하로서 군주의 살해가 불충이므로 백이 숙제 형제가 만류했으나 주무왕이 자기 뜻대로 은나라를 없애고 주나라를 세우니 주나라 땅에 살지 않겠다고 말하고 중국 수양산 고사리만 캐먹고 살다가 죽은 것이다 고사리도 주나라땅 식물인데 그걸 먹고도 너희 형제가 중국 충신이라 할 수 있느냐고 심히 나무라 주어서 이제비석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는 말이 있다 성삼문 자기 같으면 고사리도 안캐 먹고 순국 했을 것으로 말한 것이다 자신은 단종을 완전히 섬겨 군신유의 충신불사이군의 신의를 지켜 극형의 형장 이슬로 사라질 자기고백을 하고 있다 사육신 중에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창제에 크게 공을 이루었다 요동에 와 있는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에게 13회나 음운 질문차 갔던 것이다 박팽년 이개 등도 사육신으로서 집현전 학사가 되어 훈민정음 창제에 세종을 잘 도와 맡은 소임을 잘 감당했다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 애국사상은 성삼문 외에도 사육신 가운데 박팽년, 이개,유응부 시조에서 찾아 볼수 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밥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朴彭年<1417-1456>- 창 안에 혓는 촉불 눌과 이별 하였관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촉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더라 이개李塏<1417-1456>-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다 기우러지단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兪應孚<?-1456>- 사육신의 하나인 박팽년은 호를 취금헌醉琴軒이라 했다 불의의 임금 세조를 까마귀에 비유하고 야광명월은 단종에 비유하여 군신유의 신념으로 오직 단종만이 모시는 임금으로 기개와 지조를 지켰다 세조 밑에 충청도 관찰사로 가 있으면서 보고에 신臣이란 말은 일체 없고 臣자 대신 巨자로 쓰고 세조를 나으리로만 대우한 지조 높은 선비임을 알 수 있다 단심가에서 이어진 순국 애국사상 곧 임 향한 일편단심으로 단종만 섬기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한수 시조 종장 이미지는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으랴“로 읊어 오직 바른 임금 단종 한 임만을 따라 살겠다는 충의 신념을 잘 드러냈다 백옥헌白玉軒 이개는 그의 시조에서 자신을 멸신滅身하며 방안을 밝히는 촛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영월로 이별된 단종 생각에 속이 타는 마음을 촛불이 자신을 태우며 속 타는 마음과 동일시하여 단종 연군사상과 군신유의君臣有義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육신으로 처형 당한 충신으로 단심가의 일편단심 성삼문의 충의가 독야청청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벽량碧梁 유응부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세조를 “자네”라고 불렀던 기개 푸른 무장이다 성삼문처럼 불꼬챙이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취조하라고 세조 앞에 호통친 충신이다 시조에서 바람이나 눈서리는 다 세조의 거센 세력이다 낙락장송은 세조세력에 죽음을 맞게 되는 사육신을 비유하고 있다 세조의 불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심가의 일편단심사상,성삼문 충의가의 독야청청사상을 지켜 새남터 오늘의 신용산근처에서 능지처참 당한 유응부의 삼강오륜의 으뜸 덕목인 군위신강,군신유의 순국 애국사상을 잘 발휘 한 것이다 이와같이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사상은 여말 회고가 시조사상이나 조선조 사육신 시조 중심으로 잘 전개되어 왔다 학문적으로 고려말 야은 길재를 위시해서 조선조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학맥이 잘 이어져 간 것이다 시조 사상적으로 애국시조 효시요 시조 형식도 그 효시를 이루며 도남 조윤제 교수에 의해 한국의 은근과 끈기 사상도 단심가에 발견되어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사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단심가의 애국사상적 문학적 가치를 잘 살펴 보았다 도산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도 살펴 보기로 한다
4.도산 안창호의 애국가사상과 단심가 애국가를 지은 위대한 우리 민족 지도자 도산 안창호<1878-1938>.선생은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어러서 부모를 여의고 유교적인 할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서당 한문공부에 열 중하다가 16세때 상경하여 밀러학당<일명 언더우드 학당> 학생이 되어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에 귀의하며 언더우드 선교사의 수제자가 된다 19세에 서재필을 만나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쾌재정에서 약관 20세의 청년 안창호의 명연설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 때 인생의 선배 남강 이승훈이 안창호를 만나 기독교 인생길을 인도 받고 남강은 노력하여 목사,교육자,언론인 등으로 한국의 지도적 애국자가 된다 21세에 평남 강서에 최초 남녀공학 사립초등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했다 점진가 교가도 지었다 이때부터 교육입국敎育立國을 부르짖었다 24세에 결혼한 이혜련 아내와 교육학전공차 미국에 건너 갔다 도미 중 배 갑판 위에서 우리 독립의 희망 상징으로 바다 위의 하와이섬 산봉우리를 보고 도산島山이라는 아호도 지었다 미국에 가 보니 교포들이 너무 무지하여 교포 교육 때문에 교육학 전공 유학을 포기하고 노동판에 뛰어 들어 교포들에게 귤 하나를 따도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고 애국심을 길러 주었다 조직에 능란한 도산은 2005년 미국내 교포단체 공립협회를 만들고 1907년 애국비밀단체 신민회 조직, 교육입국 차원에서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평양 대구 서울에 태극서관을 두고 국민계몽운동에 앞장 섰다 1909년 한국최초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조직했고 이해 안중근 의사 의거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용산 헌병대에 2개월 수감되는 고초도 겪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로 망국의 비극을 안고 거국가를 부르며 미국으로 망명한 도산은 미국에서 1912년 대한인국민회,1913년 애국단체 무실 역행 충의 용감 4대정신을 부르짖으며 흥사단을 조직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면서 임시정부 살림 기초를 확립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에 입각하여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했다 1923년에는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중국남경에 독립운동근거지로서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였다 도산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현 루신공원> 일본천장절 기념식장 폭탄투척사건 배후 인물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속되어 4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2년 반만에 가석방 되었다 1937년 흥사단 사건에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병세 악화로 경성제대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 병보석 가료중 당 60세로 1938년 3월 10일 독립운동 일생을 마쳤다 2003년 제27회 도산사상연구 발표자였던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는 “흥사단을 일으킨 도산 안창호는 한말 일제 강점기 한국 사회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요 이론가이면서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실천한 탁월한 조직가였으며 자기 시대의 사회 민족 운동가로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로 도산의 사람됨을 평가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독립운동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검사 질문에 말한 도산 안창호의 나라 겨레사랑은 오늘의 우리 삶의 거울이 된다 지금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 등 많은 영역에 그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다 이처럼 순국애국자로 살아 간 도산은 애국가를 지을 때 포은의 단심가 사상을 순국 애국사상으로 받아들여 애국가 3절을 지었다고 생각된다 1905년의 을사늑약 1907년의 정미 7조약을 일제 이등박문과 친일파 앞잡이들이 만들어 나라의 위기가 풍전등화 같음을 본 도산은 미국 간지 5년만에 1907년 2월 20일 제물포<인천>항으로 귀국했다 애국비밀단체 신민회 조직차 도산은 귀국한 것이다 우선 신민회 회원부터 불러야 할 애국가를 안창호는 구상 중에 있었다 그런데 3월 초 선천 예배당에 갔을 때 부르는 찬미가에 “두만강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가 들렸다 순간 29세의 안창호 머리에 시상이 떠 올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시상이 머리에 뜬 것이다 도산은 그 길로 평양으로 올라가 이틀 금식기도하고 사계절을 배경으로 애국가를 4절까지 창작한 것이다 도산은 애굮가를 창작할 때 시어 선택에 있어서 우리에게 진선미를 가르치는 자연물을 많이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애국사상으로 포은의 단심가 순국사상 성삼문의 독야청청 순국사상을 깊이 생각한 것으로 본다 애국가 1절은 도산이 언더우드 학당에서 기독교의 장로교 신자가 되어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보호하시어 대우주적으로 하늘의 사랑 받는 나라로 창작한 것이다 종교적 위화감이 없도록 하나님도 하느님으로 언어를 보편적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그리고 1절의 자연물은 동해,백두산 하늘 <하느님> 후렴에서 무궁화,사람.공간 배경으로 삼천리 대한,등의 시어가 노래를 경건하게 이끈다 하느님이 보우하는 우리 나라 만세의 그 영원성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2절에 가면 우리 짚신겨레의 기상을 남산,소나무,바람 서리<이슬> 등의 시어와 사철 불변의 소나무 지조가 바로 우리 짚신겨레의 기상으로 그 의미를 함축했다 그리고 사육신 성삼문의 충의가 속의 낙락장송의 존재로 독야청청하겠다는 그 불변의 지조와 신념이 그리고 성삼문의 순국애국사상이 애국가 2절 속에 담겨 있다 성삼문의 고매한 인품과 맑고 고운 인격과 인간성도 느껴 볼 수 있다 변절자들은 애국가 2절 부르면서 깊이 회개해야 할 것이다 애국가 3절은 단심가의 일편단심사상이 애국사상의 바탕이 된다 3절에는 가을하늘,구름,밝은달 등의 시어가 등장한다 애국가 3절의 밝은 달은 한가위 보름달을 의미한다 드높고 짓푸르고 구름 한점 없고 짓푸른 가을 한가위 달밤 보름달의 그 밝고 넓고 아름답고 우주적인 마음 크기는 바로 우리 남북 팔천만 겨레의 가슴이다 보름달 밝은 달은 오직 단심가의 순국 애국사상으로 일편단심으로 한겨레 하나 되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고 외쳤다 개성 선죽교에서 34왕 475년의 고려 왕조를 혼자 짊어지고 망국의 비운을 막아 보려 했으나 나라는 망하고 선죽교에는 만고충신 포은 정몽주의 나라 겨레사랑의 일편단심 피가 건강하게 오늘도 흐르고 있다 정몽주 사랑하는 아들의 꿈을 두 번이나 꾸고 몽란,몽룡의 이름까지 갖게 된 정몽주는 두 번이나 꿈에 둘러 낳고 기른 아들로 만고충신의 빛삶이 길이 흐를 것이다 포은의 단심가,포은 어머니 시조는 순국애국사상 선비사상 시조로 자애로운 어머니 모법시조로 한국 시조문단의 큰 거울로 비춰 갈 것이다 애국가 4절은 2절의 독야청청 소나무 기상과 한가위 가을 달밤 보름달의 밝고 둥근 마음 일편단심으로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로 끝맺는 노래이다 도산이 이 4절의 새 애국가를 올드랭 사인곡으로 부르도록 하여 선천 예배당에 보냈더니 선천예배당의 애창곡이 되고 선찬일대의 애창곡이 된 것이다 안창호가 애국가 지은 기사는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미국에서 온 안창호씨가 서서만리현 의무균명학교 학생들과 국기배례하고 매 월요일 조회 때 애국가를 부른다더라의 기사가 보도되어 있다 도산이 지은 애국가를 1907년 당시 개성 한영학원 원장이던 윤치호가 학생 교재용으로 역술 찬미가 책을 만들 때 주권재민 혁명가에 해당하는 안창호 지은 애국가를 노가바 하여 4절에 “충성을 다하여”를 “임금을 섬기며”로 노래 가사를 바꾸어 실었다 황제충성가를 만든 것이다 윤치호는 1904년 8월 22일 일본공가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외무대신 서리로 제1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우리 정치에 고문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렇게 친일 서곡을 이룬 윤치호는 신민회 사건 주모자로 3년 옥고를 치루고 변절 친일 조건으로 특별사면 된 1915년 2월 15일 이후 일제 30년간 내선일체 전시동원체제 황민화정책 등에 적극 협력한 친일거두로 활동하고 광복을 맞은 것이다 광복 되던 해 12월 6일 뇌출혈 사망설도 있고 친일 양심가책 때문에 자살설도 있다 우리 나라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논란 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도부터의 일이다 주한 미대사관에서 미국대백과사전 만드는데 작사자를 알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때 정부는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로 통보하려다가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그랬더니 애국가 지었다는 작사자 후보가 쇄도하여 정부는 국사편찬위원회 아래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를 친일인사가 절반이 넘는 19명으로 조직 해서 두달간 조사 결과는 “애국가 작사자 미상”이 오늘에 이르는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애국가 작사자 후보로 압축된 인사로 안창호 윤치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명이다그간 민간 단체나 정부가 꾸준히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하여 최근 안창호와 윤치호로 압축 되어 있다 흥사단애국가규명위원회에서 흥사단이 2회 애국가 논문 발표<2012. 2015> 서울신대 주최 1회<2016> 명지대 주최 1회<2017>등 4회 논문발표대회를 열어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이 확정적 결론이 나왔다 윤치호측에서 내세우는 애국가 가사지,찬미가, 신한민보 자료 등에 대하여 흥사단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가 10년간 연구 해 봐도 윤치호<1965-1945>의 애국가 작사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근래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가 도산이 지은 노래가사 거국가 한양가 한반도가 등 30여곡 노래가사를 연구해 본 결과 지금의 우리 애국가가사와 동일하므로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로 주장했다 씨알연구소 박재순 소장도 안창호의 철학과 인격을 살펴 볼 때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로 말하고 있다 애국가는 포은 단심가의 임 향한 일편단심 사상이나 성삼문 충의가의 독야청청사상이 없는 결코 변절인간이 창작할 노래는 아니다 정몽주나 성삼문 같은 순국애국자가 액국가 작사자일 것으로 믿는다 순국애국자 도산 안창호 탄생 142주년,서거 82주년 되는 올해 광복 75년 맏으면서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로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길 바란다
필지약력 일본 출생 경남 함양에서 자람 문학박사 시조시인 전 연세대 한양대 사회교육원교수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현대시인협회 장로문인회 고문 짚신문학회 회장 한국통일문인협회 상임이사 한글학회 전 이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외솔회 감사 제2회 흙의문학상<1978> 국무총리표창 2회<1990.2016> 제15회 노산문학상<1990> 제25회 외솔상<2003.>외 다수 시조집:짚신사랑,봄나무 등 19권 논문집:위당시조연구 수필집 한알의 밀알이 되어 외 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