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沃案' "난 너를 사랑해"
어느 여학생이 어느 남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자. 이 말이 어느 상황에서, 어떤 분위기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던져졌는지,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어떠한 관계를 지녀온 사람들인지, 이런 모든 함수가 정밀하게 논의되어야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겠지만, 과연 이 말을 들은 남학생은 무엇을 느꼈을까?
상기의 명제에서 '나'니, '너'니 하는 것은 명제를 구성하는 문법의 요소일 뿐이고, 별로 큰 뜻은 없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 즉 화자라는 주체와 그 말이 던져지는 대상을 지칭하는 문장의 기능적 요소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해" 라는 것이 화자의 어떠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던지간에, 그 느낌이 "사랑해" 라는 말로써 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해"를 말로 하지 않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든가, 오묘한 시선을 던졌다든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든가, 눈물을 글썽거렸다든가, 머뭇거리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든가...... 했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
(ㅋㅋ 요즘 『어서 말을 해」 라는 해바라기의 노래를 즐겨 듣고 있는뎅ㅎ)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대부분은 "사랑해" 라고 말로 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붉히는, 언어 이전의 표정의 전달력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더 내면의 실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이 이미 수천년 동안 『노자』가 읽혀 내려온 문명의 감성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말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줄여서 '언표言表되었다'라고 해보자.
사실 이 책은 평생 나의 사유의 기반이었던 노자 라는 서물의 내용을 아주 쉽게, 원문에 대한 주해형식을 취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의미만을 선별하여 해설하는 방식으로 풀이하기 위하여 집필된 것이다. 그런데 서두를 장식하다 보니 또다시 어렵게 서술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집필을 기획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노자 에 관한 나의 사유가 너무 깊고 넓어서 점점 집필이 불가능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논의가 어려워지고 있는 제1의 이유는 노자 는 전체가 81장으로구성되어 있는데, 첫머리에 해당되는 '제1장'의 내용이 81장 전체를 포섭하는, 그러니까 2장부터 81장까지의 전 내용이 연역될 수 있는 대전제와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지극히 함축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좀 어렵더라도 제1장의 내용을 충실히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제1장만 제대로 이해하면 노자 라는 텍스트는 쉽게 '뻐개진다'. 제1장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미 우리의 일상언어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양화되어서 우리의 사유자체가 서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서구화'의 근본에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초월주의, 관념주의, 이상주의, 존재론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편견과 선이해를 버리고 노자 라는 텍스트 그 자체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언표라는 것은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말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되기 이전에 의식에 떠오른 의미체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말은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국한시켜 이야기를 해보면, 사랑한다는 말이 선택되기까지 그 이전의 세계는 화자의 의식상에서 복잡하고도 혼돈스러운, 그러면서도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얽혀있는 그러한 세계이다. 그런데 그러한 복잡계가, 언어가 선택되는 동시에, 단순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복잡계가 단순계로 이동했다는 것을 우리는 '개념화conceptualization컨셉춸리제이션'되었다고 말한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사랑하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개념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 이런 설명을 하면서도 자꾸 어려워지는 것 같아,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솟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들어보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언어는 사랑하는 실제행위나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 과도 같은 단순한 개념들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아! 사랑하는 실제적 감정이 사랑이라는 개념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이 변화는 인류가 지구상에 생명체로서 존재하게 된 이후로 가장 거대한 변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 이전 언어라는 장벽 언어 이후
감정 ➨ 이성
혼돈 ➨ 질서
카오스 ➨ 코스모스
비논리 ➨ 논리
순간순간 변화 ➨ 불변
유동 ➨ 고정
비관념 ➨ 관념
무형 ➨ 유형
현상적 실상 ➨ 초월
개별자 ➨ 보편자
사랑한다라고 하는 미묘하고도 다양한 갈래의 감정행위, 오묘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행위가 '사랑한다' 라는 말로 언표되는 순간, 즉 '사랑한다'라는 언표로써 개념화되는 순간, 사랑은 개념의 틀 속에 갇혀버리고, 고정불변의 관념이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러한 연표를 선택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 표현이 전달이 쉽고, 또 개념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일반명사(고유명사가 아닌)가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이다. '나무'가 여러분들은 그냥 주변의 나무들을 가리키는 평범한 명사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무라는 말이 지칭하는 실제 나무는 수없이 다양한 종류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거의 무한대라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거의 무한대라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상태와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수천수만 억개의 나무를 우리는 '나무' 라는 단 하나의 보통명사로 다 묶어 표현하고 있다.
언어개념으로서의 나무는 실제로 수천수만 억 개의 실제 나무의 '하느님God'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철학용어로서는 '보편자'라고 표현한다. 현상으로서의 나무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고, 또 나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다양한 변종도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상태의 변화나 다양한 모습과 무관하게 '나무'라는 보편의 불변개념 하나를 머릿속(즉 관념)에 간직하고 있다.
'사랑한다' 라고 하는 감정적 행위는 실상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의 주체 그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난 너를 사랑해' 라는 표현은 사실 그것이 언표된 그 순간의 감정상태만을 지칭한 것이다. 얼마 지난 후에 그 말은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 사랑해라고 말한 것은 잘못된 표현일 수도 있어' 하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의 세계에 있어서는 즉각즉각 반영되지 않는다. 언어는 개념화된 틀을 계속 가지고 간다. '너 그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니?' 하고 언어의 고정불변성에 근거하여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 주변의 다반사일 것이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인간세의 진리의 기준을 언어에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순간순간 변하는 것은 너무 허망하고 신뢰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24/6/11, 06:43 새벽운동 나가겠다고 다짐했지만(일주일 여 다니긴 했다) 여섯시 어름에서 일어나 기본 몸풀기를 마치곤ㅎ 컴에 앉게 된다. 어쩌면 '벌떡' 일어나지지를 않아서, 미적미적하다가 06:30을 넘기게 마련인 게 아마도 직접적 원인일 것이다. '임선호' 를 틀어 놓고 집자 이틀째를 시작한다.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은 집이 없다. 가벼운 텐트 하나로 쉽게 이동하면서 살기 때문에 땅에 박은 뿌리가 없다.지상에서는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기 어렵고, 또 보이는 모든 주변의 현상들은 쉽게 이동하고 변한다. 산과 같은 모래더미도 바람에 따라 위치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항구한 그 무엇이 아니다. 따라서 오관五官으로 감지하는 현상의 세계를 불신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변하는 현상 속에 사는 사람들은 땅과 하늘을 분리시키기를 좋아한다. 땅이 변화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하늘은 불변과 영원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개별자 보편자
the Individual the Universal
변화 불변
땅 하늘
현상 관념
언어 밖 언어 속
중동문명권의 사막에서 그 토대를 키운 서양문명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중오하고 불변, 즉 영원을 사랑한다. 변화에 대한 증오가 하늘에 대한 동경을 낳았고 불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이 시공간 속에는 '불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불변'은 불변(무변화)이 아니라, 변화의 지속태duration일 뿐이다.
우리 동양사람들, 아름다운 사계절 산하의 사람들은 불변을 추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불변보다는 변화를 사랑했다. 모든 이법理法을 불변이 아닌 변화 속에서 추구했다.
불변이란 변화가 전혀 없다는 뜻인데, 그것은 시간의 부정이다. 시공간(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데)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였다. 그러기 때문에 불변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관념세계를 '불변의 자리'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개념화된 언어의 세계를 존중했다. 기실 그 언어의 표준이 수학과 논리였다. 그래서 수학과 논리가 희랍문명권에서 비상하게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방은 수학과 논리의 연역적 사유, 그 보편성이나 관념성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 동방인의 철학적 관심은 불변의 허구적 관념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공간 속의 우주 그 자체에 있었다. 이 변화하는 우주와 어떻게 인간이 화해하면서도 융합된 혼연일체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천인합일에 관심이 있었고, 그에 기초한 우리의 도덕적 삶, 즉 가치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우리는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 천지대자연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오히려 논리와 수학의 연역적 폭력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존재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당위론에 관심이 있었다. 문명의 위기상황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었다.
『노자 』라는 책을 읽으려면 이러한 세계관의 근본적 핵심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읽을수록 오해가 생겨난다. 근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지엽이 다 뒤틀려 버리는 것이다.
변화 불변
노자의 도道 Dao 플라톤의 이데아
천지天地 우주가 도의 고향 초월적 하늘이 이데아의 고향
노자가 사랑하는 것 노자가 배제하는 것
플라톤이 배제하는 것 플라톤이 사랑하는 것
현상 관념
생성Becoming 존재Being
내재 immanence 초월transcendence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는 것, 사랑을 사랑이라는 개념 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 그렇게 해서 개념화된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다. 여태까지 진행되어온 이 논의를 노자는 『도덕경』 첫 줄에 이렇게 표현했다.
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 말하여진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
'도道'라는 것은 상식적 의미대로 그냥 'Way'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길이라는 것은 천지대자연의 운행의 법칙을 의미하기도 한다. '길'은 'Way'도 되고 Law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당황케 되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미래운행의 예측성이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지의 운행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운행의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역법이 이러한 예측가능성 때문에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천지의 운행은 주기성의 리듬을 지닌다. 이러한 우주의 법칙을 근세과학은 자연의 법칙의 탐구라는 명분하에 거시적 세계로부터 미시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밝혀놓았다. 모두가 도道의 탐구라고 말할 수 있다.
(08:01, 아침집자 終. )
(24/6/12, 08:07
도는 과학적 법칙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시간 속에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길이 없을 수 없다. 모든 움직임에는 길이 있다. 먹는 것도 먹음의 길이 있고, 자는 것도 잠의 길이 있고, 술마시는 것도 술의 도가 있다. 섹스하는 것도 色의 도가 있고, 차를 마시는 것도 다도가 있게 마련이고, 싸우는 것도 싸움의 태권도, 유도가 있게 마련이다. 감정을 나타내는 것도 칠정의 도가 있게 마련이다. 배우는 것도 배움의 도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도 아닌 것이 없다. 우주의 길로부터 우리 삶의 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법칙성을 통관하는 개념이 도道이다.
우주의 원질을 묻는 희랍인들의 아르케와 우리 동방의 도는 좀 성격이 다르다. 희랍인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가 무엇이냐라는 자연철학적 관심에서 철학사를 출발시켰다. 그들은 모든 변화를 야기시키는, 변화의 궁극에 있는 불변의 실체, 그 존재성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철학적 물음을 출발시킨 것이다. 그러나 동방의 사람들은 그러한 궁극적 실체성이나 원초성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길'이라고 하는 천지대자연의 운행의 규칙성의 도덕적 의미를 물었다.
그러니까 그 출발점이 존재론이 아니라 가치론이고 실천론이 되는 것이다. 천인합일天人이라고하는 대전제를 떠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사유에도 약점이 있을 수 있으나, 수리적 연역성이나 그 궁극의 대전제를 묻는 환원주의적 사고는 형이상학적인 폭력성이 너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도가도道可道, 도를 도라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목적이 道이고, 그 목적을 받고 있는 동사도 道이다. 그런데 한자에 道라는 말 속에는 '말한다'라는 뜻이 '길'이라는 뜻과 함께 들어 있다. 그것은 마치 서양고전의 '로고스' 라는 단어가 이성, 궁극적 원리 같은 뜻을 가지는 동시에 '말'이라고 하는 뜻을 갖는 것과도 비슷하다.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 즉 '말씀'이 하느님과 동가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과 비견(된다)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 可道之道'는 언어 속으로 들어온 도, 개념화된 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도지도可道之道는, 즉 도라고 언표된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
可道之道, 非常道.
'常'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든가, 또는 불변이라든가, 영원의 뜻을 내포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常'이라는 글자는 평상적으로도''항상 상常'이라고 訓한다. '항상'은 불변이나 단순한 변화를 뜻하지 않는다. 항상이란 변화의 항상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조금 의미가 헷갈린다).
(08:33, 아침집자 終. 수요일 날씨 조오타ㅋ 장마 전의 요즘이 여행가기에는 참 딱춤한데ㅜ
나는 서해그린3차 관리실로 가는 세차장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 시간이 08:40분을 넘는다. 회사 까지는 10분이면 된다. 워쪄까~~ㅜㅜ 그러나 매일 노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이 좋은 날씨도 곤욕이리라. 노는 건 역시 피곤하게 월화수목금 일하고 토.일요일을 짭짤하게 맞을 때가 제일 값어치가 있는 것을.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다.
(22:06, 아내 생일. 어제. 처제 아들 성현이가 쇠고기를 보내와서 네식구가 먹었다. 그는 얼굴이 제법 많이 넓어져서 멋있어져 보였다. 오늘 관리실 입구 주차장 아스팔트가 구멍이 나서, 회장님도 오시고 묘하게 구부러지고 긴 새끼손가락, 어쩌면 침하된 하수관의 마지막 숙원일지도 모르겠다.
변화의 규칙성이나 지속성, 혹은 변화하는 물체의 아이덴티티의 지속을 나타내는 말이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도올의 목소리는 항상 그렇다" 라고 말한다면, 실상 그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10년 전 목소리와 요즘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현저한 차이가 있다. 10년 전의 청아한ㅎㅎ 목소리가 더 허스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도올의 목소리라는 유니크한 음색이 유지되고, 다시 말해서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항상 그러한 도올의 목소리" 라는 그 아이덴티티가 확인되는 것이다. 불변은 없다. 그러나 변화의 항상성은 있는 것이다.
16세기부터 노자의 도덕경이 서방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이 상도는 '영원불변한 도'로서 번역되는 불운을 맞이하였고 오늘날의 중국철학적 세계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일본학자들, 그리고 선진고경의 세계관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없는 중.한의 얄팍한 학자들은 아무런 반성 없이 "영원불변의 도"를 계속 정론인 것처럼 뇌까리고 있다. 중국의 고경에도 '불변不變'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변'이라는 말 자체가 시간성의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지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이제 조금 이 말이 이해가 간다).
만약 '도가도 비상도'가 '말하여지는 도는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다' 라는 의미로서 해석되어야 한다면, 도덕경 전체가 나타내고있는 세계관은 플라톤이나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세계관과 동일한, 아니 그 아류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것이 되어버린다.
내가 대만대학 철학과 대학원에서 황 똥메이方東美 교수의 도덕경 강의를 들었을 때 (1973년) '상도'의 '상'을 changeless의 불변성으로이해하는 모든 사상가들을 싸잡아 폄하하면서, 중국인의 세계관, 주역젹 우주관 속에는 'changeless'라곤 없다! 'changeless-less'만 있을 뿐이다 라고 막 역정을 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언어화된(언표된, 개념화된) 도가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라고 말한다(이 말 자체가 나는 이해가 안된다)면 노자적 세계관이 추구하는 이상은 '영원불변의 도'가 되어버리고 만다. 지고의 가치 기준이 시간 너머의 '영원불변의 도'에 있게 되는 것이다(또 헷갈린다. 이래서 도올이 처음 설명할 때 땀이 삐질삐질 나온다고 말하였던 것인가!).
(20:57, 수요일 밤이 깊어 간다. 한낮, 꽃다발이 추욱 쳐지던 관리실 입구의 푸른색의 수국이 눈에 떠올려진다. 점점 더워질 터이니 마음.체력관리 신경 써야 굳게 설 수 있으리. 이번주 일요일엔 고향 친구들과 북경을 간다. 토요일은 김병ㅇ 7080사장이 같이 일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終.)
(2024/6/13, 08:16 하이데거라는 서양의 사상가가 『존재와 시간』(1927)이라는책을 써서 20세기모든 대륙의 철학사조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말하는 '존재Being' 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 즉 '존재자Seiende'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영어로는 존재자를 'entity'라고 번역했는데, 있는 실제적 사물 그 모든 것thing을 가리킨다.
존재자들은 우리 인간 현존재에게 도구연관구조를 가진 것들로서 나타나는데, 그 도구연관얼개 전체를 보통 세계Welt라고 부른다. 세계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시인에게는 시인의 세계, 과학자에게는 과학자의 세계, 수녀에게는 수녀의 세계, 철수에게는 철수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존재하는 것, 그 '것entitiy'이 아닌 '존재' 그 자체는 무엇일까? 있는 것이 아닌 '있음' 그 자체는 무엇일까(이건 또 무슨 씨나락까먹는 소리일까)?
사실 우리말에는 '존재한다' 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 자체가 우습게 들린다). '존재한다'라는 말은 20세기 서양철학적 사조들이 번역.소개되면서 폼 잡는 지성인들의 어휘로 정착된 조어이지 결코 우리말의 내재적 표현이 아니다.
'존재存在'라는한문의 표현에서 '존存'은 '담지한다,' '지속시킨다,' '존속시킨다,' '보존한다'는 뜻이고, '재在'는 그냥 '있다'의 뜻이다. 각기 독자적 뜻을 지닌 말이지, 양자가 결합하여 하나의 뜻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우리말에 '있다' 라는 말의 어근 '읻'은 '눈目'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지, 그것이 존재하냐, 아니하냐 그 존재성을 따로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성찰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존재론Ontology'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진다. 사실 서양의 존재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존재하게 만들려고 하는 데서 생겨난 말장난에 불과하다.
(08:33, 아침집자 終. 20여 분 집자를 하면서 나도 골치가 지끈지끈이 아니고 골치가 열오른다ㅋㅋ 하지만 도올의 안목을 통해서 존재론의 사조를 배울 수 있다는 건 여간 행운이 아니다. 목요일엔 프로미스가 있다. 완두)
(24/6/14, 08:22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의 존재론의 역사가 '존재망실'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 라고도 말한다. 서양의 존재론은 존재자의 궁극적 원질, 궁극적 실체, 궁극적 본질, 궁극적 실재를 추구했다. '실재實在'라는 말은 '실제로 있다' 라는 뜻이다. 이 말은 내 눈앞에 현전한 존재자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의 감관에 드러난 모든 존재자들이 가짜이고,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관에 나타난 虛幻을 넘어서 궁극적 실재(실제로 있는 것)를 추구하게 되면, 결국 그 실재는 시간을 넘어서는 것, 영원불변의 존재, 시공의 변화에 무관하게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실체라는 궁극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하는 존재자의 밑바탕에 놓여 있어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버티는 어떤 것, 그 基體를 실재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실재(실제로 있다)라고 부른 것은 관념적 허구이다. 변화하는 세계 즉 감관에 나타난 대로의 있는 세계야말로 실재라고 믿는 사유도 얼마든지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
동방인의 사유,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노자의 세계관은 바로 이러한 정당성 위에서 성립한 디스꾸르이다. 서방인이 진짜라고 믿은 실재가 우리 동방인에게는 가짜였고, 우리 동방인이 궁극적으로긍정한 실재가 서방인들에게는 가짜로서 인식된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철저한 부정을 거쳐서 산은 산이라는 대긍정에도달한 여여如如의 경지를 단순한 감각의 허환으로 간주하는 서구인들의 인식론적 오류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신학적 관심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08:34, 십여분여 감각을 키워서 열심히 집자했다. 그 행위를 하면서도 쾌감을 얻는다는 것. 밥이나 금이 중요한가. 한 줌의 지식이 중요한가. 지식이 아니라 어쩌면 道라 이름 지을 수 있는 것 말이다. 오늘은 금요일 오이와 백앵두가 있고 적앵두도 본다. 산딸기는 보드라웠다. 저 밑에는 완두층이 있고 오이는 또 얼마나 향기롭고 기름지던지.. 삼십에서 칠첨오를 소비 마창에서 아침집자 終.)
(불금ㅎ 22:53, 종일 관리동 50A 누전차단기를 만지작거렸다. 배선용차단기는 안떨어져요. 그런데ㅜㅜ 결국 퇴근 바로 전에 다시 배선용차단기로 원상복구시켜놓고 퇴근했다. 하마트면 밤에 이짓하러 나올 뻔. 누전을 잡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구나! 새삼 전기의 세계를 여는 하루를 충만하였다. 여행준비하는 영례를 곁눈질로 피하다가 이윽고 볼펜을 들고 목록을 적었다. 내몽고. 밬씅쑥크 이십일과 좁마니 십쓰 하고 내일 행솨솨 하면 되겠다. 모키새퀴 왼어깨에 앉아볼려고 쌕을 쓴다. 뒤돌아보니 줄행랑치다.
파르메니데스(BC 515~475) 는 존재의 세계에서 생성의 세계를 철저히 배제시켰다. 존재Geing는 불변,ㅡ 영원, 불멸이며 불가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데아는 관념이며, 완전한 인식의 대상이며, 진정한 學의 근본이다. 플라톤에게는 변호하는 감각의 대상은 진정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양철학사를 집요하게 관장하는 관렴론의 아성이 되었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사도 바울의 부활론적 케리그마와 결합하여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Kingdom of God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코스모스를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서구문명 가치관의 洪流를 형성시켰다.
하이데거가 존재망실의 역사라고 비판한 서방인의 사유세계는 존재자로부터 존재가 사라졌다는 뜻을 내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시간'이 사라졌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존재자의 의미이며, 존재자들이 가진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가리키는 말인데, 존재 그 자체 또한 오직 시간 속에서 고찰될 때만이 그 있음의 본래적 의미가 바르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존재로부터 시간을 공제해버리게 되면,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의 말한 세계, 즉 이성적 관념으로만 파악되는 계량화된 법칙적 세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존재자는 도구이성의 수단적 대상이(무슨 말일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감각산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수봉이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존재이유를 갖는 것이 아니라 광물학적 도구이성의 대상이 될 때는 자원의 가치를 계산하여 순식간에 폭파되어 버리고 만다. 짙은 황토빛 대지도 생명의 근원으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되기보다는 끊임없이 재화창출의 수간으로서 가차 없이 착취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그 고유한 존재이유가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도구이성(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다!)의 이용가치로서 전락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존재는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내적인 것이며, 세계- 내 -존재의 주체인 현존재는 존재의 시간성으로 인하여 비본래적 자아를 버리고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존재는 '있음'이며 있음은 '시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 밖에 어떻게 존재가 가능하겠는가? 하느님이 시간 밖에 있다면 그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시간 속에 있는 인간과 역사에 관여할 길이 전혀 없다. 예수도 갈릴리역사의 지평 속에서만 존재 가능했던 것이다.
'있다' 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변화하고 있음' 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기존의 존재론과는 달리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은 '늘 그러함의 길'인 것(무슨 뜻일까?)이다.
이것을 노자는 '상도常항상상道'라 표현했다. 상도라는 것은 '늘 그러함의 길(무슨 뜻인지 알겠다!)' 이며 도의 시간존재론적time-ontological 모습이다. 최근에 발견된 백서 본 『노자 』에는 '상도常道'가 '항도恒항상항道'로 되어 있다. 1973년 호남성 츠앙사長沙 마왕뛔이 한묘에서 발굴됨. 역시 '항상스럽다'라는 변화 속의 도가 재삼 확인된 것이다.
'영원불변의 도' 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된 존재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하느님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변화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 시공간 내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복속된다는 것은 지극한 상식이다. 파르메니데스도 플라톤도 사도 바울도 시공간 내에서 불변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발견한 불변의 장소가 수학(기하학)이었고, 수학의 자리가 관념이었다. 관념의 자리가 바로 이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일진대(능력으로 정해진 규칙인데), 그것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의 법칙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노자가 어떻게 기원전 6세기에 이러한 고도의 성숙한 사유를 감행할 수 있었는지, 그 사유를 탄생시킨 문명의 난숙도를 헤아리기가 난감하다. 노자는 이미 인간의 언어나 관념이 실재의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는 언어개념 속에 집어넣어 버리면, 그 개념화된 도는 항상 그렇게 변화하고 있는 도의 실상을 나타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노자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을 요즈음 말로 번역해서 말한다면 '존재망실'의 서구존재론의 역사를 야기시키는 이데아론의 허구성이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상도'가 아니라 '可道之道'이다. 그가 긍정하는 것은 변화하는 도의 실상(항상 그러한 도)이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언어개념 속에 밀폐된 관념적 불변의 도이다. 노자는 변화를 긍정하고 불변의 허구성을 부정한다.
(23:35, 굉장히 심오한 앎의 심연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기분이 든다. 인간의 지식의 지평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일까? 나의 비천한 앎으로써 그에 견주는 건 참으로 조족지혈이구나. 도올 철학의 깊이를 새삼 느낀다.
내일은 흐림.비 그리고 맑음. 병규랑 행사 뛰는데 왈 저녁 7시에서 8시까지 한시간이 포인트라고 한다. 수중이 텅비었으니 마음이 가볍고 두뇌의 낭비.사치가 없으며 간단명료한 두뇌로 심플하게 산다. 새삼 내 수고대비 금괴를 아내와 아이들에게나줘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집자 終.)
(24/6/15, 10:21. 토요일 오전입니다~ 우리가 기다려왔고 일심방편하였던 그 휴일의 문을 지난다. 조금 후엔 병규가 현대A관리사무소 사거리에 7080카ㅎ 녹슨 그차를 몰고.
노자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加道之道 부정 가도지도 긍정
항상 그러한 도의 추구 불변적 관념적 이데아 추구
변화긍정 불변부정 변화부정 불변긍정
몸각(몸 전체이 감수성)이 인간이 주체 이성이 인간의 주체
심미적 도법자연 과학적 세계구성
내재주의 초월주의
무종교.무체제적 개방 종교적 독단과 결합
노자는 가도지도의 고정성. 관념성. 연역성. 제약성을 버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도常道에로 회귀하려 한다. 상도는 영원히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화된 시간성' 의 성격을 거부한다. 따라서 가도지도를 파기하는 인간의 행위는 끊임없는 과정process속에 놓이게 된다.
가도지도의 거부는 인간의 언어에 대한 불신을 내포한다. 그리고 언어를 구사하는 이성의 능력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상의 모든 연역주의적 폭력을 거부한다. 이러한 논리와 이성의 불신Taoist mistrust of the powers of reason and logic이 과학의 진보를 훼방놓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과학의 진보와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이 결합하여 인류문명의 도약을 이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기의 사건이며 그 후로 약 200여년의 과학의 횡포에 대해서도 윤리적 제재가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학을 종교화하는 과학맹신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는 21세기 지적풍토에서는 더욱 더 노자의 사유야말로 인간존립을 위한 근원적 도덕성의 요청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증대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노자를 정밀하게 이해해야 할 시기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노자의 외침에 우리의 양심을 열어제껴야 할 시기이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없는 무변광대한 침묵의 깊이로 우리는 침잠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시인이 마음으로, 언어를 뛰어넘어 노자라는 시인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비로소, 이제 간신히 서두가 끝났구나! 하는 감동이ㅎㅎ 이런곳에서도 감동이 인다. 건너뛰고 싶은 걸 참고 참고 이겨냈다는 환희가 있다. 조광조와 백투더뮤직을 들으며 11:12분을 지난다. 조금 아까 정빈이의 전화, 나는 어울린다는 게 좀 번잡스럽게 느껴져서... 그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그 저 쪽의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불편함보다는 낯선 세계에 들어간다는 설렘이 더 강하다. 더우기 몽고는 흉노족의 본가가 아닌가! 우리가 그쪽으로부터 온 민족이라는 귀소본능 같은 거. 아무튼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다음 구절,
(24/6/24, 23:11. 집자 終. 32페이지 '명가명 비상명' 일부 집자. 내몽고 여행 총평을 썼고, 완셰의 허벅지 예찬론까지 작성하였지만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 컴터가 오래되니 이지경에 이르렀다. 어쩔 것인가! 하는 수 없다. 마음을 호수와 같이 평온케 하고 (그래야만 나를 괴롭히지 않으니까) 조용히 컴퓨터를 끄는 일만 남았다. 오늘 저녁에 아주 큰 일을 하나 했다. 기타 Bar를 찾은 것이 그것. 하모니카와 함께 기타집에 들어 있었다. 잃어버린지 2周쯤 되었고 마침내 정신일도하여 찾아낼 수 있었다. 2동 609호 '옥상 물탱크 상부 노후로 인하여 물이 새서 609호로 들어갔다' 로 소장과 입을 맞추었다. 내몽고 여행간 고생한 소장과 경리에게 조마루뼈다귀에서 점심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