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의 넋을 기리며.. |
20044644 행정학과 이현수
어렸을 적 주말이 되면 아버지를 따라 우리나라 주요 사찰들이나 유적지들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왜 재미도 없는 이런 것들을 나에게 보여주실까 하며 친구들과 뛰어놀고만 싶은 간절함에 아버지를 원망도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경험들이 나에게 있어서 역사에 대한 탐구의 끈을 놓치지 않게 했던 원동력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때와 지금은 조금 목적이 다르지만 어쨌든 답사를 함은 우리 자신에게도 내 어릴 적의 기억처럼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과거를 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학과 학생으로 전공과목을 함께 듣고 있어서 이번 역사학과 답사에 참여하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어떤 곳을 답사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교수님께서도 언급하여 주셨고 학교를 등하교하며 익숙해져있던 사육신묘를 가기로 한다. 가기 전에 학교 도서관에 가서 사육신에 대한 서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마땅한 자료가 없어서 인터넷을 뒤지며 사육신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사실들, 사육신공원이 생긴 유래 등을 찾아봤다.
- 관련자료조사 -
◎ 시대적 배경과 사건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세 사람 중 남지는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이 대신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한다. 계유정난 이 후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일찍이 김종서의 천거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박호문을 임명하였다. 이에 분개한 이징옥은 박호문을 죽인 후, 병마를 이끌고 종성(鍾城)으로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징옥은 정종 등의 술책에 빠져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1455년 음 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으로부터 사양받은 것처럼 모사(금성대군이 화의군 영과 함께 모반했다고 거짓으로 꾸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단종이 왕위를 포기하게 하고는 자신은 천연스럽게 사양하는 체 하다가 왕위를 빼앗음)를 꾸며 어린 단종임금이 공포심에서 임금 자리를 스스로 내놓게 하여 왕위를 찬탈한다. 이에 분개를 느끼고 『하나의 태양 아래서 두명의 왕을 섬길 수 없다』는 절의파인 집현전 학사들에 의에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가 중심이 되어 성삼문 아버지 적곡(赤谷) 성승(成勝) 박팽년(朴彭年) 아버지 한석당(閑碩堂), 박중림(朴仲林) 단종(端宗)의 외숙 권자신(權自愼), 윤영손(尹鈴孫), 김질등 많은 동지를 규합하여 상왕으로서 수강궁에 있던 단종의 복위와 그 기회를 기다렸다.
세조 2년 병자 1456년 6월 초하루 명나라 사신 윤봉이 조선에 와 있었는데 창덕궁에서 상왕이 된 단종과 명나라 사신(使臣)의 초대연을 열기로 했다.
이때 박팽년 등은 이 기회를 노리어 세조의 무리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상왕이 된 단종을 복위케 하려 했다. 이 연회에 도총관인 성승과 유응부 박쟁 등이 별운검(別雲劍)으로 연석에 들어가 거사 하기로 되었으나 결행 직전에 한명회는 갑자기 단종을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운검(雲劒)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이 이같이 되자 김질은 동지를 배반하고 그의 장인인 정창손과 결탁하고 유월 초이를 사정전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밀고하니 피 비린내나는 참극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 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 사육신공원의 유래
이러한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이 산기슭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死六臣碑)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 사육신 그리고 7개의 묘
현재 이 곳은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이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丙午)조에는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ㆍ박팽년을 비롯한 성승ㆍ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ㆍ성삼문ㆍ유응부ㆍ이개의 묘에,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假墓)도 함께 만들었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 현장답사
중앙도서관에서 인터넷으로 사전조사를 마치고 정문 앞 길 건너 5517버스를 타고 사육신공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많이 풀리고 햇살이 눈부셔서 들뜬 기분이였다. 사육신공원 정류장에서 하차를 했는데 지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깔끔하고 예쁜 담벼락이 눈에 띄었다. 담벼락 중간 중간에는 멋진 문양들과 그림 그리고 1970년 4월 19일 함석헌이 창간한 월간 평론 교양잡지인 씨알의 소리에 실렸던 글귀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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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발걸음을 옮기니 돌담길이 끝나는 길에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입구 앞에는 사충서원의 터라고 적혀진 표식이 있었는데 답사 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사충서원(四忠書院)은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에 있는 서원이다. 1725년 경기도 과천(현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에 신임옥사 4충신, 곧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725년 사액을 받았다. 1927년 서원 부지가 철도용지로 편입되어 용산구 보광동으로 옮겼으나, 한국 전쟁으로 서원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우는 것이 힘들어지자 1968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라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이 장소가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인터넷이라는 인간 기술의 진보가 찾고 싶은 정보를 단 몇초의 시간을 투자하여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뭐든지 알 수게 해준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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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를 들어서니 붉은색의 기둥문이 있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홍살문이라는 것이였는데 능(陵), 원(園), 묘(廟), 궁전 또는 관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사당이나 열녀효자문 등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문을 말하는 것으로 악귀를 몰아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니 봄을 알리는 듯 따스한 햇살속에 박태기나무 꽃, 개나리 꽃, 벚꽃 들이 피어 있었고 마당에는 이름 모를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자라고 있었다. 폭설 등 올해는 유난히 매서웠던 겨울이였지만 이렇게 다시 생명이 싹트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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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을 올라서니 사육신공원에 대한 설명문이 오른쪽에 서있었고 앞쪽에는 불이문이 있었다. 불이문의 의미가 사육신과 연관되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신들의 저의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궁금해서 또 인터넷을 뒤진 결과 진리는 둘이 아니다 라는 의미이고 보통 사찰에서 본당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을 불이문이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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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문을 통과하니 자그만 뜰이 나오는데 오른편에는 6각의 사육신비, 왼편에는 신도비각이 세워져 있었고 정면에는 사육신의 묘역인 의절사가 있었다. 신도비는 정조 6년(1782년) 세워졌고 육각의 사육신비는 1955년에 세워 졌다고 한다. 먼저 오른쪽에 사육신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비는 상단은 시인 김광섭님이 짓고, 서예가 김충현님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사육신의 이름과 그분들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한문은 잘 몰라서 하단 부분에 대한 해석은 후일에 도모하기로 하고 윗편의 글들을 읽어봤다. 이곳이 세워진 목적에 대한 짧은 글귀였다.
다음 신도비각으로 가보니 설명글이 하나도 없고 역시 한문이 가득찬 글귀들이라 후일을 기약했다. 이곳에 일반시민들을 위해 작은 설명문이라도 설치해 줬더라면 더 많은 것을 얻고 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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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계단을 올라서면, 사육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의절사가 있다. 의절사에는 사육신을 포함한 7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향로와 그 옆에 성냥, 향을 마련해 놓음으로써 방문객들이 예를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의절사 사당에 모셔진 위패의 순서는 사당을 향하여 우측(동쪽)으로부터 김문기 선생, 박팽년 선생, 유흥부 장군, 이개 선생, 유성원 선생, 성삼문 선생, 하위지 선생 순으로 모셔져 있다. 이 순서는 바로 위절사 뒤편 언덕에 모셔진 묘소의 위치순서였다. 그러나 사찰에 멀뚱하니 위패만 모셔놓은 모습이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져 씁쓸함이 많이 남았다. 다만 그 분들의 넋을 추모하며 그 앞에서 잠시 기도를 하고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의절사 뒤편의 작은 문을 통해 올라가니 그곳에 사육신 묘소가 있었다. 묘소 잔디에 올라가 한분 한분의 비석 사진을 조심스럽게 찍었다. 잠깐 쉬기 위해서 뒤쪽에 물러나 잔디위에 앉아 있었는데 무덤 위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누워 계시는 한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사진을 찍을 때도 신경이 쓰였던 할아버지..조금은 긴장한 마음으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나에게 그 분이 다짜고짜 ‘시간있으면 자리에 좀 앉아봐!’라고 하시는 것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 들어봤더니 사육신에 대해서 본인께서 설명을 하시겠다는 것이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역사의식이 없어..라는 식이셨는데 잔소리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도 행복했던 것은 정말로 요즈음은 역사의식 없이 시대를 흥청망청 갈피를 못잡고 살아가는 나와 같은 젊은 청년들의 모습들에 무관심한 사회가 참 불만이였지만 이런 선배님들이 계셔서 아직은 안심이 되는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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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를 마치며..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이 지은 시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이다. 이 시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배웠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사육신의 역사적 의미와 배경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시자체를
분석하거나 주제나 성격 등을 단순 암기하는 식의 입시공부를 목적으로한 시읽기를 했기에 그 느낌이 잘 전달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육신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에 대해 숙지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역사적 장소에 직접 찾아가보니 이 시를 지었던 성삼문 선생의 절개와 충절을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가슴으로 뜨겁게 느낄 수 있었다.
역사적 사실이란 이렇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과거의 사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 E.H Carr의 말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육신 공원을 거닐면서 잠시 먼 과거 그때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들의 절개와 충절의 정신을 시대의 한계를 뒤로하고 내 가슴속에 새길 수 있었다. 또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이기심이 팽배해져 버린 우리사회를 바라보며, 또 나 자신을 돌아보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더불어 살아가는 와중에서 사람됨을 지켜가고 신의를 보여주는 모습이 얼마나 가치있고 멋진 일인지 사육신공원의 짧은 답사를 통해서 배워간다. 첫 답사여서 준비되지 않은 것도 많았지만 더 큰 것들을 얻고 돌아와 기분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