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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후광 김대중대통령 이희호여사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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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대통령≫흔적 스크랩 중프라이즈-`김대중 아들` 김홍일 의원, 험난했던 가족사
후광사랑 추천 0 조회 31 09.11.09 18: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대중 아들' 김홍일 의원, 험난했던 가족사
종아니   2008-03-28 04:04:51, 조회:52, 추천:0
'김대중 아들' 김홍일 의원, 험난했던 가족사와 인간적 고뇌 첫고백

2001.10.18 여성동아

"새어머니가 준 선물을 받는 게 돌아가신 어머니께 미안해 슬그머니 치우곤 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의원이 자전에세이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를 펴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아버지와 함께 겪은 정치적 역경은 물론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새어머니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아내와 딸들에 대한 사랑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대통령의 아들’이 아닌 ‘자연인’ 김홍일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인 민주당 김홍일 의원(53)이 ‘탄압받는 야당지도자의 아들’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살아온 지난한 삶의 역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눈길을 끈다. 최근 자전에세이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를 출간한 것.

사실 그의 청년 시절은 아버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난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대학원 1학년 때인 71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느닷없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온갖 고초를 당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고(故)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의원, 심재권 의원 등 당시 서울대생들이 주축이 된 전국 최초 학생운동조직체인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의 배후조종자란 혐의였다. 그는 이때의 고문으로 허리를 다쳤다.

또한 80년 5월17일에도 신군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처음 24시간은 말 한 마디 할 사이도 없이 얻어맞기만 했고, 그 다음부터는 허위사실을 자백하라며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중엔 견딜 수 없어 책상 위에 올라가 그대로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떨어졌다. 그렇게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 않고 목만 다쳤다.

그후로도 87년 정치적 사면복권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정권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친구나 외부인사를 만나면 기관원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감시해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를 만나기 꺼려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마흔살이 될 때까지 직업다운 직업 한번 가져보지 못하고, 월급다운 월급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취직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장사를 시작하면 곧바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들어왔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역대 집권자들의 견제와 적대감이 음으로 양으로 엉뚱한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후에도 김의원은 단지 ‘김대중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제약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라는 사시 섞인 눈초리도 받아야 했고, 98년부터는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의 아들은 명예라기보다는 멍에요, 행복이라기보다는 불행”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책에는 이렇듯 ‘야당 지도자의 아들’이기에 겪어야 했던 고초와 함께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들도 솔직히 그리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친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진실한 사랑으로 홍일 형제를 키워준 새어머니 이희호 여사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부인과 세딸들에 대한 소박한 사랑 등을 읽다보면 정치인이 아닌 한 가슴 따뜻한 남자와 만나게 된다.

“그리운 어머니 차용애와 고마운 어머니 이희호”

김대중 대통령이 일찍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들인 김의원의 입장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 나이에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전부인 어머니를 잃은 것이고, 한참 예민한 사춘기에 새어머니를 맞이한 셈이다.

그는 친어머니 차용애 여사를 ‘수채화 같은 그리움을 내 가슴에 남겨놓고 떠나신 어머니’라고 말한다. 지금도 어머니와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지치고 힘들 때면 꺼내보면서 위안을 받는다고. 또한 살아생전 틈이 날 때마다 꼭 껴안아주던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재울 때는 물론 바느질을 할 때 즐겨 불러주던 자장가가 있다. 지금도 그 노래가 귀에 선명하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도 지영이, 정화, 화영이 세딸을 키우면서 가끔 아이들에게 그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그는 친어머니를 “늘 조용하고, 말을 아끼는 분”이었다고 한다. 또한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꼭 목욕을 시키고, 세면장 밖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다가 꼼꼼히 몸을 닦아주는 등 자상해서 친구들이 부러워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한번은 친구들이 자기 어머니를 ‘엄니’라고 부르는 것이 재미있어서 나도 ‘엄니’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러자 어머니는 ‘홍일아, 엄니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어머니라고 불러. 나는 네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아’라고 하셨다. 야단을 칠 때도 어머니는 상냥히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목포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서도 틈나는 대로 서울 구경도 같이 하고,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도 사주곤 하는 어머니의 갑작스런 부재는 어린 홍일에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더구나 뒤이은 아버지의 재혼은 사춘기의 그에게 무척 당황스러운 사건이었고, 새어머니 역시 쉽게 받아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희호 여사는 결혼하기 전부터 종종 그의 집에 들렀다. 그때마다 미국산 사탕이나 하얀 티셔츠 등 당시 아이들이 좋아하고 갖고 싶어하는 선물을 가지고 와 홍일씨와 동생 홍업씨 책상에 살짝 놓고가곤 했다고 한다. 김의원은 “어쩐지 그 선물에 손을 대는 일 자체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미안한 것 같아 슬그머니 치우곤 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신 후에도 가능한 한 어머니와 눈길을 마주치는 일도 피했다. 곰살갑게 대해 본 적도 없다.”

그의 반항에도 이희호 여사는 항상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그도 새어머니가 자기에게 진실한 사랑을 쏟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부끄럽게도 오랫동안 새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어머니라고 부른 것이다.

“내겐 친어머니 같은 이모가 계셨다. 이모가 결혼하기 전에 한달 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재혼한 후 새어머니가 힘들까봐 이모는 우리집에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새어머니와 이모가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새어머니가 ‘나도 괜찮으니까 집에 자주 놀러오라’고 하셨다. 그후 두분은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처럼 새어머니는 마음 씀씀이가 넓으셨다.”

김의원이 이희호 여사의 사랑을 뼈저리게 체험한 것은 80년 당시. 한밤중에 끌려간 뒤 두달 만에 겨우 가족면회가 되었다. 그때 어머니 이희호 여사가 흘리던 눈물을 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군교도소로, 아내는 자신이 있는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아내를 부르더니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주면서 사고 싶은 것 사라고 하더란다. 바로 그날이 아내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던 아내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책에는 “전혀 꿈과는 다른 시련을 겪으면서도 항상 의연하게 곁을 지켜온” 아내 윤혜라씨(50)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생각만 해도 그저 지난 고난의 세월이 눈녹듯 사라지는” 세딸(지영, 정화, 화영)에게 보통아빠도 못되었던 아빠의 미안한 마음도 잘 나타나 있다.

윤혜라씨는 상해임시정부 시절 백범 김구 선생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윤경빈씨의 딸.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한창 핍박을 받던 무렵이라 윤경빈씨로서는 딸의 결혼을 허락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였다. 윤씨는 타이어와 의류제품을 수출하는 중견기업의 부사장이었는데, 결혼이 확정되는 날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자기 때문에 회사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육영수여사 추모곡 들으며 빵과 우유로 저녁을 먹어야 했던 신혼 첫날

그는 결혼식의 기억도 남다르다. 74년 8월15일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장소도 당시 연금상태에 있던 아버지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친척집 뜰로 잡았다. 공공장소는 아버지가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 따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하는 동안에도 비가 안 그쳐 식장을 거실로 옮기느라 어수선했고, 더구나 식을 시작하기 직전 육영수 여사가 저격을 당했다는 비보까지 전해졌다. 그야말로 엉망인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식이 끝난 후 공항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듣는 라디오에서는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침울한 추모곡과 아나운서의 슬픈 멘트만 흘러나왔다. 게다가 비 때문에 비행기가 목적지인 속초에 가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결국 신혼여행도 못간 이들 부부는 저녁으로 빵과 우유를 사든 채 신혼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혼후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김대중의 아들’이란 이유로 제대로 취직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사업조차 하기 어려워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 아버지의 영치금을 낼 돈이 없어 집에 있는 가재도구를 팔아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윤씨는 한번도 남편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 주눅들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강했던 모양이다. 그는 80년 옥중에 있을 때 감옥 안에 있던 링거 줄을 이리저리 꼬아 십자가를 만들고 칫솔을 갈아 구슬을 만들어 십자가 가운데 장식을 했다. 그렇게 만든 십자가를 간수 몰래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윤씨는 그걸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쪼들리고 힘들었을 때 불평없이 잘 자라준 아이들 역시 김의원은 고맙기만 하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지영이는 한창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이에 상황을 잘 헤아리고 잘 참았다. 아빠에게 조르는 법이 없고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는 일도 없었다. 둘째도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언니의 학용품을 만지며 놀았다. 그런 점이 아비의 마음을 더 후벼팠다. 애들이 조르기라도 하고 떼를 쓰면 혼도 내고 소리도 치면서 얼렁뚱땅 넘어가겠는데, 착하니까 가장 역할을 못하는 나에 대한 자괴감이 더욱 커졌다.”

그에겐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첫딸 지영이가 태어나던 76년, 아버지 김대중 대통령은 3·1 민주구국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다. 둘째 정화가 태어나던 78년에도 역시 아이들의 할아버지는 감옥에 있었다. 84년 셋째 화영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였다. 결국 김의원은 세딸이 태어날 때 한번도 아버지와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첫째는 지금 미국에서 언론학을 공부하고 있고, 둘째는 성악을, 셋째는 하프를 전공하고 있다.

김홍일 의원은 정치학과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집안에 항상 몰려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치에 눈을 떴고, 30년 가까이 아버지를 보좌하며 정치를 익혔다. 하지만 정치인의 꿈은 ‘김대중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포기를 강요받았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에도 후원회를 여는 것조차 비난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런 현실에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도대체 대통령의 아들은 무덤에 갈 때까지 무엇을 하며 살라는 말인가. 바보처럼 살다가 실업자라도 좋다는 배필을 만나 아버지가 건네주는 생활비로 평생 살다가 죽으란 말인가.”

그는 미국의 부시대통령뿐만 아니라 필리핀 아로요,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등 대통령의 자식임에도 대통령에 오른 것을 보고 놀라웠다며 “선진국처럼 대통령의 자식들을 자연인으로 받아들이는 풍토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주요인사들의 자녀나 친척들이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가도록 배려하는 성숙된 민주사회가 펼쳐졌으면 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처럼 ‘대통령 아들의 멍에’를 벗어나고 싶다는 것, 그것이 그가 책을 출간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대통령의 아들’이 아닌 정치인 김홍일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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