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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의 월평(2008. 7월호)
삶의 발견, 삶의 표현
한국수필 월평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은 삶의 발견이며, 수필창작은 생의 발견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있다면, 수필은 곧 삶이다. ‘적자 생존’이란 ‘글을 쓰라, 그러면 생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수필가는 각자 자기의 개성적인 언어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뜨겁게 사는 사람은 뜨겁게, 아름답게 사는 사람은 아름답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붓 가는 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다. 문학이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성찰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수필에서는 시나 소설에서처럼 특별한 기교를 요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창작상 표현을 위한 무기교의 기교가 필요하다. 음식을 만드는 경우에도 요리사의 솜씨가 없이는 요리가 제대로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창작에도 기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필문장은 설명되기보다는 표현되어야 한다. ‘꽃은 아름답다’와 ‘꽃이 아름답다’는 진술은 조사의 차이로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듯이, 문학에서 표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자가 전달성에 목적을 둔 설명이라면, 후자는 표현에 목적을 둔 묘사다. 수필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설명보다도 묘사에 충실해야 문학성이라든지 예술성이 산다는 말이다.
가치 있는 인생의 체험을 문학 작품으로 표현할 때, 형상성, 참신성, 함축성, 탄력성과 같은 속성을 갖추도록 해서 손맛을 우려내야 한다. 1930년 후반 이후 대표작의 문학성을 짚어보고자 기획한 <한국수필> 7월호의 연재 김우종 교수의 한국현대수필 평설은 현대수필의 흐름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유익한 시도였다. 뿐만 아니라 지상강좌 시리즈 장호병의 ‘붓 가는 대로 쓰다’ 역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에 대한 역설을 통해 수필의 문학성에 대해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어 수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글이다. 7월호에 실린 글 중에서도 손맛이 우러나는 작품은 김학, 방원석, 오세윤, 이규백, 박영자, 송미정 등의 수필이었다. 이번 월평에서는 아쉽지만 김학, 박영자의 두 작품에 대해 집중 조명하는 선에서 월평을 마무리하겠다.
II.
김학의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는 ‘테마에세이/ 여름, 스케치’에서 뽑은 작품이다. 이 수필은 미적 구조로서 수필이 갖추어야 할 형상성은 물론 인식구조로서 수필이 가져야 할 인식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용된 말도 구체적일뿐더러 말하고자하는 바를 형상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 모습이 분명하다. 형상화란 무엇인가라는 알려주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설명의 기법을 쓰지만 이 분은 '형상화'의 의미를 시각화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표현 의도를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서두 첫 단락에서 수필에 있어서 형상화란 '염천의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앞 집 옥상의 빨래가 갑자기 무녀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이기 시작한다. 찌는 듯하던 여름밤의 무더위가 슬그머니 뒷문을 박차고 꽁무니를 뺀다. 혁명군인 양 치달아온 바람이 고요한 누리에 파문을 일군다. 뜨락의 나무들은 바람의 위세에 눌려 저마다 아부의 깃발을 흔든다'고 표현함으로써 눈앞에 그것의 개념이 그림으로 그려지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끝까지 읽어보지 않아도 수필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하는 발단부의 묘사적 문장이 주는 손맛이 일품이다. 수필 언어에 대한 좋은 본보기다. 문학의 네 가지 속성을 고루 갖춘 멋진 표현이다. 수필가들의 일독을 권한다.
발단부 둘째 문단의 문장들도 질서 정연할뿐더러 대단히 조직적이다. 백목련은 무당춤을 추고, 대나무는 승무를, 백합은 어깨춤을, 그리고 대추나무 등은 디스코를 춘다는 진술이 절묘하다. 백목련이 무당춤을 추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키가 크기 때문이고,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나긋나긋한 승무를 추는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분기에 발을 담궜기 때문이란다. 백합이 사근사근 어깨춤을 추는 이유는 수줍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추나무, 은행나무, 모과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등은 왜 하필 디스코를 출까. 대추나무 등이 디스코를 치는 이유는 문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 줄 한 줄의 문장에 적확한 수식과 생략이 절묘하게 계산된 문장을 음미하면 미소가 번져온다. 생략과 압축의 묘미로 수필 문장의 맛을 잘 살린 탓에 어느덧 작가의 집에 있는 손바닥만한 뜨락은 각종 화목들의 무도장이 되고 만다. 여기서 이 정도의 묘사로 끝냈다면 결코 찬사를 받을 리 만무하다. 작가는 바람의 강약에 따라 나무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데 착안하여, 화목들이 바람에 놀아난다고 적고 있다. 그 춤은 바람이 한눈을 팔 땐, 몸놀림이 되고, 바람이 눈을 부릅뜨면 춤동작이 된다는 대칭적 표현도 매우 섬세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라 그 맛이 솔솔하다. 마지막으로 나무들의 춤은 작가에게 작태로 인식된다.
작가는 민초들의 슬픈 역사를 주제의식에 담기 위해 발단부에 주제에 대한 수준 높은 암시와 함축적인 표현을 했다. 바람과 나무는 상징이다. 바람이 권력자요, 실권자라면, 나무는 권력자의 기호에 따라 몰려다니는 무소신의 기회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작가는 발단부에 암시된 주제의 상상화를 단 하나의 삽화를 전개부 상단에 배치함으로써, 긴장된 독자의 시선과 가슴을 녹여준다. 일반화에서 예시로 이어가는 문단의 연결성, 제재에 주제의식을 담아 풀어내는 솜씨가 단연 돋보인다. 전개부 하단은 또 다른 권력자의 상징으로 비를 조명하였다. 바람이 나무를 춤추게 하였다면, 비는 연주를 하게 한다. 빗방울의 강역에 따라 관현악이 되고, 생음악이 되고, 경음악이 되고, 그러다가 절정에 가서야 빗소리는 ‘총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의 소음’으로 인식된다. 결국 바람과 비는 권력자요, 실권자의 상징으로서 작태와 소음의 주인이 된다. 결말은 바람과 빗방울이 철수하면서 뜨락에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오르고 있다는 표현으로 나무들은 원래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다. 바람과 비로 연상되는 번개, 천둥, 두려움, 총탄, 전쟁터, 실권자는 그들의 철수로 평화, 자유의 개념에 도달하는 언어들의 연상 작용으로, 독자들은 힘 있는 자들에게 우롱당해 온 민초들의 슬픈 역사를 작가와 함께 읽을 수 있게 된다.
구성면에서, 표현력 면에서, 인식의 측면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발단부 셋째 단락을 두 번째 단락에 이어 쓰지 않고 별도 단락으로 처리한 것과, 강조를 위해 전개부를 처음 여는 단락을 한 문장으로 해서 독립문단으로 처리한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개부는 전환의 의미가 아니고서는 특수단락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문장론의 기본이다. 문장비평의 관점에서 두 가지 ‘옥의 티’가 발견되었지만, 이 작품은 허점은 작품의 성공도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불어버리면 깨끗해질 정도로 미약한 것이란 말이다. 이런 수필을 자주 접할 수 있다면 월평을 쓰는 재미가 한 맛 더 있을 것 같다. “좋은 수필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을 바르게 읽어야 한다. 세상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교감은 평소 작가의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생활의 성찰에서 온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장호병의 말은 수필가가 가져야 할 자세로서, 적절한 말이다. 김학의 글이 연륜이 더 할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은 삶의 깊은 사유와 성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박영자의 <직선과 곡선>은 에코수필에 소개된 작품이다. 우리 문학인이 생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수필이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있어야 할 것’들에 관심을 놓고, 수필의 테마를 ‘생태와 평화’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이제 수필가들이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평자는 ‘생태’ 문제가 절실한 이 시기에 월간 <한국수필>이 생태수필을 기획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지역적인 환경파괴 및 오염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 뒤늦게나마 생태학과 경제학 간의 대화 분위기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다행하다 하겠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차제에 한국수필 7월호에서 생태 환경을 제재로 한 테마수필을 기획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제목에 걸맞는 문체와 표현이 참신함을 안겨준다. 직선으로 상징되는 도시화와 개발 그리고 곡선으로 상징되는 생태 환경과 보존을 대칭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문명 비판적 인 시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데서 이 작품은 읽는 사람의 기분을 밝게 할뿐더러 흥미를 더해주고, 나아가 생태 환경의 중요한 의미를 새롭게 해준다. 이 분의 수필을 읽으면, 원시적 생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골 농촌이 주는 청신한 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참신한 표현은 비단 소재나 표현 자체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볼 수 있듯이 글을 쓰는 문체에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참신한 표현을 쓸 수 있다. '몸'과 '봄'의 대화하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구체적으로 그려내면서 작가는 '봄'을 느끼는 예민한 '몸'에 감탄하며 경쾌한 리듬으로 '아하, 봄이 오고 있구나'라고 외친다. 결구 표현 ' '는 '봄'의 느낌과 이미지를 절묘하게 형상화했다고 하겠다.
구성의 치밀함도 돋보이지만, 제재를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멋을 우려낸 수필이다. 수필에서의 함축이란 그 언어를 통해 연상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작가는 서두에서 다정한 벗을 불러 주거니 받거니 한 잔 술을 기울이고 세상을 논할 수 있는 정자를 하나 지어 살고 싶은 꿈을 얼마 전에 이루었다고 한다. 이쯤에서 평자는 작가가 '평소의 꿈을 드디어 이루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언제, 어디에다 그 좋은 정자를 지었나 궁금히 여기며, 글에 눈을 떼지 못했다. "작년이었다. 평소 꿈대로 정자를 지을 터를 물색했었다. 모든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불편함이 없는 위치, 이는 어린 시절부터 다소 배타적이라는 성격 탓에 좀더 많은 분들과 교류를 할 수 있기를 원함이었다."는 진술에 이르기까지 평자는 깜빡 속아넘어갔다. 이규보 선생의 <사륜정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바퀴가 달린 정자를 웹이라는 사이버 공간에 지었다는 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의를 알게 되었다. 사이버 상의 '홈페이지'를 단순한 사전적 의미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사륜정'이라는 함축적 의미로 파악하게 해서 감동의 울림을 느끼게 한 수법이 좋았다. '사륜'은 사계절을 함축하고, '사륜정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바람결에 이른 계절의 변화를 싣고 오는 사이버집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웹'의 영문 스펠링이나 '정자', '난' '배타적' '이탈' 등의 낱말에 굳이 한자 토를 달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한자어가 운치가 잇다하더라도 주제를 드러내고 주제를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한자어는 글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김 영의 수필이 갖는 장점은 탄력성이다. 늘 대하는 일상적인 글보다는 탄력이 있는 글이 읽는 사람의 흥미를 더해 주고, 나아가 의미를 새롭게 해 준다. 수필 <선비의 고장을 지나며>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하나같이 선비의 고장임을 자랑하는 홍보판을 보게 된다는 데에 착안하여 '선비' 정신을 주제의식으로 그려낸 수필이지만, '울창한 송림', '종가의 기와집', '동구의 동수목', '단청의 재실', '잘 관리된 묘소', '촌로들의 모습' 등의 열거가 주목을 끈다. 이런 열거는 반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열거된 것들 하나하나는 각기 다르지만, 열거라는 통사적인 구조로 선비 정신의 구체화를 도모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런 표현 방법은 글에 탄력성을 준다. 결구 단락의 두 번째 문장에, '선비의 고장을 지나면서 그래도 나는 희망과 기대를 가진다'는 말로 주제의식을 상상화하고, 결구 단락의 마지막을 '아무리 제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이어도 선비의 고장임을 외치고 홍보하는 그 자부, 그 자존, 그 정신이 살아있는 한 우리의 자랑스런 선비정신은 면면히 이어지리라는 것을 믿는다'로 맺으면서 수미쌍관의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주제가 선비 정신이라서 주제를 구체화하고 전개하는 데 한자성어가 필요하겠지만,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도 될 어휘에 한자를 병기함으로써 글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딱딱해졌다. 불필요하게 등장하는 한자어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라 글의 상처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III.
수필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수필은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져야 할 글이다. 그것이 문학적 방식인가 아닌가는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처럼 추상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구체적 형상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하는 점에 따라 구분된다. 지면 관계로 함께 조명해보지 못한 좋은 작품을 쓴 작가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놓는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 정신을 길렀다. 오늘의 우리 수필가들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과 반성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여 자기 발전의 초석으로 삼아야겠다. 유경환은 철학을 만나는 삶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철학은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삶의 바다에 낚시 바늘 같은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서 어찌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의 수필을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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