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게 밝은데 그는 왜 그렇게 비참하고 어둡게 죽어가야 했을까? 꽃들은 하늘을 찬양하고 땅을 축복하는데 그의 예술은 왜 하늘과 땅에 대고 메아리 없는 절규만을 해댔을까? '
반 고흐 미술관을 나오면서 원예의 나라 네덜란드의 축제일에 벌어진 꽃 마차 퍼레이드의 원색의 물결을 보고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 꽃잔치가 반고흐와 어울리지 않는 다고 느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반 고흐와 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솔직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부조화의 긴장'은 애초 반 고흐의 예술세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바우하우스식 모던 스타일의 미술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반 고흐의 영혼은 어디 가서 쉬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것입니다.
1. '블랙 홀'에서 출발한 예술 역정
심연처럼 깔린 검정색을 배경으로 활짝 펼쳐져 있는 가죽 성경, 성경 옆에는 촛대가 있고 성경 앞에는 레몬색 표지의 소설책이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반 고흐의 삶을 압축한 듯 강한 호소력이 느껴집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해 그의 아버지가 작고했습니다. 그림의 소재가 된 성경은 그의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목사였으며, 경건한 삶으로 존경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림의 꺼진 촛불은 그의 아버지가 이제 이승의 짐을 벗고 본향으로 돌아갔음을 암시합니다. 아들의 추념이 성경 앞의 소설 책처럼 외롭게 떠돌고 있는데, 그 책이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라는 점에서 두 부자간의 의식차, 세대차를 엿보게 됩니다.
** 빈센트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그가 화랑과 서점 직원 생활을 때려치우고 전도사 양성소에 입학, 사역자가 돼 보리나쥬의 탄광지대로 간 것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탓이 컷습니다. **
**<펼쳐진 성경>은 회화적 특질면에서 렘브란트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화면과 두터운 착색, 강한 명암대비가 그렇습니다. 이 그림은 지난 91년 도난사고로 손상됐다가 복원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실물 모델 성경도 이 미술관 한켠 유리 상자에 보관 되어 있습니다.**
**렘브란트
만일 누군가가 렘브란트를 깊이 사랑한다면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그는 신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프랑스혁명사에 대해 공부한다면 목표를 형성하는 힘에 대해 느끼게 될테니 그는 회의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고흐
버려진 인생처럼 너무나 비참하게 구겨져 있는 <구두>, 인생이라는 쓰디쓴 업보를 먹는 <감자 먹는 사람들>, 농민들의 고단한 노동요가 들릴 듯한 <감자바구니> 등 이 무렵 반 고흐의 작품들은 <펼쳐진 성경이 있는 풍경> 처럼 대부분 '블랙홀' 속에 있습니다. 어떤 물체도 중력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검은 구멍'은 인생의 무게, 바로 그 거역할 수 없는 '생존의 명령'인 것입니다.
이 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첫발자욱을 내디딜 때부터 우주인이 대기권으로 들어올 때 느끼는 그런 강력한 중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미술관쪽이 반 고흐의 작품을 그의 노이넨과 안트베르펜 시절에서부터 파리, 아를르, 생 레미, 오베르 시기까지 시대순으로 배열해 놓아 관람 여정의 첫 순서가 바로 '블랙 홀'의 통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1872 ~~~**1881 빈센트 윌렘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873년 6월, 그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이 무렵 19살의 하숙집 딸에게 구혼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신앙과 현실과의 마찰사이에서 방황의 생활을 하던 빈센트는 1879년 여름,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됬고, 그가 전업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동생 테오는 경제적인 약속을 하게 됩니다.
**1882 1881년 4월, 부모 곁으로 돌아온 고흐는 인물데생에 몰두랍니다. 또 그 해 여름 사촌 케이에게 구혼을 하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이는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고흐는 가족은 물론 친척들과도 갈등을 겪게됩니다. 12월 초 안톤 모베에게 수채화와 유화의 원리를 배우기 위해 헤이그로 갑니다. 화가로서 그의 첫 발을 내 딧는 순간인 샘이지요. 이후 가족과 거리가 멀어지고 1882년 1월엔 모베와 구필 화라으이 지점장이던 테르스테크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아틀리에를 얻어 독립을 하게 됩니다. 시엔이라는 불행한 매춘녀를 집으로 데려온 고흐에게 가족과 관계에 금이 가게 되고, 고흐는 테오도 등을 돌릴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으나 테오는 계속 형을 돕습니다.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
상상이나 현실 속의 교회의 벽을 생각하면 냉기를 느낀다.영혼까지 스며드는 섬뜩한 냉기를 그런 치명적인 감정에 압도되는 건 아니겠지 하고 혼자 중얼거려본다. 무언가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도 여자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랑 없이는 여자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고흐는 생전에 한 점의 그림만 팔았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화에만 국한된 이야기이고, 그는 화상이던 숙부의 주문을 받고 헤이그 풍경을 담은 열두 점의 스케치를 그려서 20길더를 받습니다. 1882년 11월에는 처음으로 석판화를 제작해서 테오에게 시험쇄를 보냈고, 석판화 <슬픔>을 본 화상이 특별 주문을 하기도 합니다. **1882 ~~~**1885 1883년 9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엔과 헤어지고 드랜테로 간 고흐는 시엔과 그녀의 아이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열악한 환경과 고독을 참지 못한 그는 가족에게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관계는 심각합니다. 1885년 아버지가 목사관 정문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그는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1885 ~~~**1888 1885년 도시 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려는 희망을 품고 엔트위프로 떠난 그는 처음으로 일본 판화를 감상하기도 합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그는 건강이 나빠지게 되지만, 그들의 영향으로 화풍에 변화가 생기면서 한때 점묘파의 기법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6월,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강한 충격을 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그림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화게 됩니다. 11월 <쁘띠 불르바르의 인상파 화가들>이라는 전시회에서 만난 고갱, 기욤, 쇠라 등과 교제를 하게 됩니다. 파리에 온지 1년 6개월이 지나자 이 도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되고, 그는 더 많은 빛과 색을 찾아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나게 됩니다.
**1888 ~~~~**1889 아를에 와서도 테오를 통해 파리에 있는 젊은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 받던 고흐는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초기에는 많은 그림을 그렸던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심해지게 되고, 고갱과 심하게 다툰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됩니다. 고갱은 파리로 떠나고, 고흐는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이 시기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양파가 있는 정물>, <자장가>등의 작품이 나옵니다.
## 내 그림의 값어치 ##
테오에게 너는 내가 부치는 그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너에게 진 빚을 갚아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지. 그러나 나로서는 너에게 만 프랑 정도를 가져다줄 수 있게 되는 날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지난날 이미 써버린 돈도 우리 손에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 값어치가 있는 물건의 형태로라도, 아직은 그렇게 되기 힘들겠지. 이번에 부치는 짐 속에는 거친 캔버스에 그린 분홍색 과일나무 그림이 있고, 폭이 넓은 하얀 과일나무 그림, 그리고 다리 그림이 있다. 그걸 보관해 두면 나중에 가격이 오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수준의 그림이 50점 정도 된다면 별로 운이 없었던 우리의 과거를 보상 받을 수 있겠지, 그러니 이 그림 세 점을 네 집에 두고 팔지 말아라. 시간이 지나면 이 그림들은 각각 500프랑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1888년 5월 10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내 영혼을 주겠다 ##
테오에게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1889년 1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9 ~~**1890 끝모를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고흐는 1889년 5월,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홀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갑니다. 9월에는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두 점이 파리에서 전시되고 좋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고흐는 계속되는 발작의 고통 속에서 작업을 계속합니다. 간질성 발작이 잦아지고, 요양생활은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1890 ~~**1890 6월 말 고흐는 테오와 돈 문제로 다투고 오베르로 돌아와 <까마귀가 있는 밀밭><오베르의 교회>등을 그립니다.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그를 라보의 가족이 발견합니다.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쏜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테오가 오고, 두 형제는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
파란 가득한 우리의 천재 화가 고흐가 동생 테오의 품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 ##
테오에게 화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든, 돈 이야기는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래, 정말 우리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생아, 내가 늘 말해왔고 다시 한번 말하건대. 나는 네가 단순한 화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너는 나를 통해서 직접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림은 파산의 순간에도 냉정을 유지한다. 내 그림, 그것에 내 생명을 걸었고, 머리도 그것 때문에 흐리멍텅해졌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은 아니다. 네 입장을 정하고 진정으로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도데체 넌 뭘 바라는 것이냐?
-7월 29일 고흐가 사망할 당시 지니고 있던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출판사
2.자신감을 키워가던 파리 시절
화병의 일부를 제외하면 화면 어디서도 검정색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림입니다. 배경은 밝은 하늘색이고, 꽃들은 빨강색, 흰색, 미색이며, 잎사귀들도 매우 밝은 연두빛으로 처리돼어 있습니다. 생의 환희라고도 할만한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인상파의 영향입니다. 이전까지 그에게 예술은 상처받은 짐승이 어렵게 찾아간 조그맣고 어두운 동굴이었다면, 파리 체제 초기에 예술은 그에게 치유와 안정까지 가져다 줄 것 같은 고향 어머니의 집이었습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앞길에 대한 확신이 자기 몸속에서 스멀 스멀 피어오름을 그는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이 무렵 그는 쇠라 등 신인상파의 점묘법에 영향을 받아 특유의 괄괄한 터치를 스타카토로 끊는 양식의 그림으로 나아갔습니다.. <클리치거리>, <레픽 가의 빈센트 방에서 내려다 본 파리 풍경>, <몽마르트의 야채밭과 물랭 드 블뤼트 팽>, <나무들> 등이 그런 작품들입니다.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신인상파의 점묘법은 그러나 반 고흐의 기질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천재는 항상 시대를 앞서 가지만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는 그냥 모든 앞뒤의 흐름으로부터 '튀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 고흐는 불행히도 자기가 천재라는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남들 쫒아가려 해도 잘 안 되고, 예술의 광휘와 위대성이 점 점 더 진하게 느껴짐에도 자기는 그러부터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자괴감만 일었던 것입니다. 신은 그에게 그가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거둬 주시옵소서" 하다가도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다가도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자세를 가다듬는 것은 사려깊은 성격의 예수에게서나 바랄 수 있는 일이지, 반 고흐 같은 다혈질에게 그의 소명을 고지했다가는 신이라 하더라도 언제 그에게 멱살 잡히고 봉변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현실과 소명 사이의 무언가 어렴풋한 그림자가 잡힐 것 같을 때면 그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자화상을 그릴 때 그는 새로운 형식이니 뭐니 하는 것에 개의하지 않고 자신의 '정신 현상'에 몰입, 그만큼 자신의 인간적, 예술적 고민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걸작들을 생산해냈습니다.
**반고흐 미술관은 현재 모두 18점의 그의 자화상을 소장하고 있는데(반 고흐가 평생 그린 자화상은 모두 35점이다.) 그가 자화상을 그리게 된 이면에는 잘 팔리는 초상화를 그려 작품좀 팔아봐야겠다는 생각과 그러기에는 연습할 모델이 없으니 자시느이 얼굴이라도 그려야겠다는 의도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외색 펠트 모자를 쓰고 이쓴ㄴ 자화상>, <화가 모습의 자화상> 등 파리 시절 자화상들의 예술적 성취는 확실히 이 시절의 다른 어떤 그림들에 비해 높아 보입니다.
파리 시절 그는 신인상파 못지 않게 그에게 자극적이던 한 흐름을 만난다. 바로 '일본주의(재패니즘)'다. 반 고흐는 일본 우키요(일종의 목판 민화)의 화려한 색상과 평면성, 장식적 구성에 상당히 감화를 받았습니다. <빗 속의 다리>, <꽃피는 자두나무> <기생> 등 이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한국인들에게 낯선' 반 고흐의 '일본 시리즈'를 보고 있자면 묘한 감정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일본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자랑스럽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있노라면 문화의 후광이 가져다 주는 권위와 힘에 대해 새삼 뼈저린 느낌을 갖게 됩니다.
반 고흐가 한국의 분청사기나 단원의 그림을 대했으면 그는 진짜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문화는 흘러야 하고 흐를 때 비로소 힘이 생긴다는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찍이 그런 기회의 확보에 동작이 떴습니다. 유럽 땅 에 재패니즘의 열풍이 인 지 한 세기도 더 지났는데 언제쯤 우리는 이 땅에서 '코리아니븜'의 열풍이 부는 것을 볼 수 있을까요.. 3. "인생의 고통은 살아 있는 그 자체"
반 고흐가 그린, 꽃이 만개한 나무들을 보면 그가 추구하는 행복의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린 나무의 꽃들은 대부분 하얗거나 하얀 색이 어떤 식으로든 섞여 있는 것들입니다. 쏟아져내리는 눈처럼 하얗게 캔버스를 누비는 그 꽃들.
그의행복은 식물성이었고, 그것의 절정은 개화였습니다.
그는 진정 아름다움을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농투사니보다 못한 겉모습을 놓고 뭐라고 얘기해도 그의 마음 속에는 이슬을 새초롬히 머금은 꽃들이 무수히 많은 다른 꽃들과 어우러져 아기손처럼 피어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그것들을 바람처럼 애무하고 있었으니 말이죠.
나무의 꽃들은 그의 <감자를 먹는 사람>에서 보게 되는 어둠, 그 일상과 현실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결국은 하나의 이상 또는 환상이었습니다. 그것들은 그가 과수원에서 늘 대하는 살아있는 식물이었지만, 그것의 존재 위상은 시간적으로는 저 먼 미래 또는 가상의 어느 시점에, 공간적으로는 그의 동경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그가 연모하던 여인들과 달리 접근해도 도망가지 않고, 동망가지 않을 뿐 아니라 땅에 뿌리를 굳건히 박고 있는 그것은, 존재의 가장 완벽하고도 이상적인 모습이었고 그가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을 끝까지 추구하도록 인도해주는 신의 계시, 또는 그 계시의 증거 같은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불안하여 그 신의 계시마저 잘 믿기지 않을 때면 그는 나무들이 과연 뿌리를 갖고 있나 확인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나무 뿌리들>
곧잘 성을 내고 과격한 행동을 하고 남과 원만하게 사귀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하얗고 땅에 든든히 뿌리 박은 꽃나무의 수성을 죽도록 지향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언뜻 부조화로 비친 그 간극은, '그는 세상을 향해 사랑이었지만, 세상은 그를 향해 사랑이 아니었던' 데서 비롯된 것 뿐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고통은 살아 있는 그 자체"란 그의 유명한 말로 그 '묘혈'은 덮히는 것입니다.
**사람, 모든 것의 뿌리
오늘 아침, 꽃이 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멋진 바람이 불어오더니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엇는 광경을 보았다. 그럴 때면 작고 하얀 꽃잎들이 햇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이곤 한다. 그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순간 순간 땅이 진동하는 걸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요즘은 사람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우울한 감상이 영원히 지속된다 할지라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물감과 석고만으로 작업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의 살 속에서 작업하는 게 더 가치를 갖는 지도 모르지, 그런 의미에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업을 하는 것보다 아이를 낳는 게 더 가치 있는 삶이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역시 나처럼 일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인상주의가 주로 다루는 소재는 모두 쉽게 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과감하게 아주 강렬한 원색을 사용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색채는 아주 부드러워진다.**
**삶의 여백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4년 10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
"왠 쓰레기 같은 그림이냐!"란 말을 들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 농촌생활을 그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
데 스틸 계열의 현대적 감성이 강조된 반 고흐 미술관
반 고흐 [빗속의 다리] 1887
반 고흐 [꽃이 핀 배나무] 1888
반 고흐 [해바라기] 1888
반 고흐 [노란집] 1888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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